며칠 전 선장개로 가는 길을 묻던 나와 창촌에서 만난 50대 아주머니의 대화내용이다. 창촌은 묘도동 사무소가 있는 묘도의 마을이름이다. 선장개 방향을 대충 짐작한 채 길을 가던 중 만난 70대 할머니에게 선장개로 가는 길과 선장개의 뜻을 물었다.
"교회 쪽으로 가면 쪼그만한 길이 나온깨 그리 쭉 따라가면 돼요. 근디 거그는 바다인디 뭘라고 그런다요?"
웃음을 지으며 교회 방향으로 가는 길을 따라 가니 선장개가 보인다. '개'는 강이나 하천에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을 일컫는 말로 선장개는 묘도에 있다. 섬모양이 고양이 닮은 묘도는 광양만에서 제일 큰 섬으로 예나 지금이나 교통의 요충이다. 섬에 접근하는 데 배가 유일한 교통수단이었지만 여수박람회를 계기로 이순신대교가 개통되어 오가기에 편리해졌다.
'선장개'는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조선수군을 대피시키고 조련시킨 곳이다. 12km 떨어진 순천 예교성(여수 율촌에 위치)에 진을 친 왜군의 퇴로를 막기 위해 조선수군은 선장개에 주둔해 현재 GS칼텍스 쪽 바다를 막고 광양제철 쪽은 명나라 진린제독이 막고 있었다.
▲ 정유재란이 끝나갈 무렵 조선과 명나라 왜의 삼국수군이 명운을 걸고 싸웠던 광양만의 중심에 묘도가 있다. 묘도를 중심으로 여수쪽은 이순신장군이 광양쪽은 명나라 진린이 퇴로를 막았다. 여수와 가까운 쪽에 조선수군이 주둔한 선장개가 있다
진린이 지휘하는 명나라 수군이 주둔했던 마을은 진린도독이 주둔한 것을 기념해 '도독마을'로 개명했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이 조선수군을 조련했던 선장개에 대해 일부이기는 하지만 마을 주민도 모른다는 사실이 서글프다.
감기 기운에 찬바람이 세차게 불어 동네에서 차를 타고 간척지 제방 끝까지 가는 동안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다. 만약 사람이라도 만나면 비켜갈 여유가 없어 사람이 길옆으로 비켜서야 차가 지나갈 만큼 비좁은 길이다. 만약 운전을 잘못해 바퀴 하나라도 빠지면 구조해줄 차량도 들어올 수 없는 길이다. "괜히 차를 가지고 왔네!"하고 후회했지만 이미 돌아설 공간이 없다.
정유재란이 끝나가던 1598년 9월부터 11월까지 조선과 명나라 연합수군은 왜교성 탈환을 위해 10여 차례 격전을 치렀지만 성을 점령하지 못했다. 남의 나라 전쟁이라 손실을 줄이려는 명나라 진린도독에 비해 이순신 장군은 "한 놈이라도 살려 보내서는 안 된다"며 진린이 말리는 데도 출전을 감행하기도 했다.
이순신에게 첩보가 날아들었다. 일본으로 탈출할 방도가 막힌 왜군을 구하기 위해 무술년(1598년) 11월 18일과 19일, 사천과 남해 등지에 주둔 중인 왜군이 온다는 연락을 받았다. 조·명 연합군은 유키나가의 구원군이 올 경우 앞뒤에서 협공을 받을 염려가 있어 구원군을 먼저 공격하기로 작전을 세우고 묘도에서 14㎞쯤 떨어진 노량해협 근처로 함대를 이동했다.
11월 19일 새벽 2시. 양측 함대가 서로 조우하면서 시작된 전투는 19일 정오경에 연합함대의 대승으로 끝났다. 노량해전에 참전한 일본 측 함대는 500여 척에 달했는데 명나라 수군 300여 척과 조선수군 80여 척이 함께 뒤엉켜 처절한 싸움을 했다. 노량해전은 임진왜란의 대미를 승리로 장식한 역사적인 의미가 있지만 이순신 장군과 수많은 조선수군도 전사했다.
▲ 도독마을회관이란 간판이 선명하게 보인다. 도독마을이란 정유재란 당시 명나라 진린도독이 명나라 수군과 주둔했던 것을 기념하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