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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왕후는 누구인가?
姓 윤씨(尹氏). 본관 파평(坡平). 번(璠)의 딸. 1428년(세종 10) 가례(嘉禮)를 올려 낙랑부대부인(樂浪府大夫人)에 봉해지고,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왕비에 책봉, 1457년 자성(慈聖)으로 존호(尊號)되었다.
1469년(예종 1) 흠인경덕선열명순휘의(欽仁景德宣烈明順徽懿), 1471년(성종 2) 원숙신혜신헌(元淑愼惠神憲)으로
각각 존호가 더해졌다. 덕종·예종 및 의숙공주(懿淑公主) 등 2남 1녀를 낳았다. 1468년 예종이 19세로 즉위하자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게 되었는데, 이는 조선시대에 처음 있는 일이며, 성종 즉위 후에도 계속 7년 동안 섭정하였다.
능은 남양주(南楊州)의 광릉(光陵)이다.
그림1. 사적 제197호로 지적된 남양주 광릉.조선 7대 왕인 세조와 부인 정희왕후의 무덤이다.
왕의 유언에 따라서 무덤방은 돌방을 만드는 대신 석회다짐으로 막았고, 무덤 둘레에 병풍석을 세우지 못하게 하였다.
돌방과 병석을 없앰으로서 백성의 고통과 국가에서 쓰는 돈을 크게 줄일 수 있게 되었다. 무덤배치에 있어서도 최초의 동원이강의 새로운 배치 형식을 택함으로써 후세의 무덤에 영향을 끼쳤다.
그림2.언니를 제치고 세종의 둘째 아들과 결혼하다
정희왕후는 고려시대부터 명문가를 자랑하던 파평윤씨 가문의 딸로 1418년에 태어났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고려 말 판도판서를 지낸 14世 諱 승례이고 아버지 15世 諱 번은 음보로 관직에 나가 신천 현감을 거쳐 정희왕후 10여세 무렵에는 군기시 판관 자리에 있었다. 정희왕후는 윤번의 둘째 딸이었다. 야사에 의하면 원래 왕실과 혼담이 오가던 것은 그녀의 언니였다고 한다. 당시 세종은 자녀들의 결혼에 각별한 관심이 있었고, 대군과 공주의 결혼에도 정식 간택 절차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관여하여 훌륭한 배필을 맞아주려고 노력했다. 윤번의 집 큰 딸을 둘째 아들 수양대군(훗날의 세조)의 배필로 점찍고 궁중의 보모상궁과 감찰상궁을 파견한 세종은, 큰딸보다 둘째 딸의 자태가 더 비범하고 뛰어나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녀를 둘째 며느리로 맞아들였다. 그녀가 바로 훗날 조선 7대왕이 되는 세조의 정비, 정희왕후이다.
정희왕후는 1428년 11세의 나이에 한 살 연상의 수양대군과 혼례를 올리고 왕실가문의 일원이 되었다. 당시는 문종이 이미 세자의 자리를 탄탄하게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군 즉, 왕자의 아내였던 그녀에게 왕비는 거의 생각할 수도 없는 자리였다. 그녀는 수양대군의 아내가 되면서 낙랑대부인에 봉해졌다. 수양대군과는 슬하에 2남 1녀(장남 의경세자. 차남 예종. 딸 의숙공주)를 두었다. 수양대군은 왕자시절 정희왕후 외에 딱 한명의 첩을 들였는데 그녀는 훗날 근빈 박씨가 된다. 근빈 박씨가 사육신 박팽년의 누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당시 조선의 상류층 남자라면 당연시되었던 축첩(蓄妾)행위를 그다지 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수양대군과 정희왕후의 사이는 꽤 좋았던 것 같다.
세종의 둘째 아들이었던 수양대군은 뛰어난 학자였지만 병약했던 형 문종에 비해 문무를 모두 겸비한데다 야망도 큰 인물이었기에, 아버지 세종은 둘째 아들이 훗날 왕권에 도전해 나라를 혼란에 빠뜨릴까 매우 염려하였다고 한다. ‘수양대군’이란 이름도 수양산에서 충절을 지킨 백이와 숙제의 고사를 생각해서 임금에 대한 충성을 변치 말라는 뜻에서 세종이 직접 지어준 이름이라고 한다. 둘째 아들의 야심을 꿰뚫어본 세종은 집현전 학자들에게 세손(훗날의 단종)을 보필해줄 것을 부탁하기도 하였다.
그림3.야심가 세조의 곁에서 그의 정치적 행보를 지켜보았고 또 함께 했던 정희왕후는 이때 아들을 잃은 지독한 슬픔 속에서도 재빠르게 현재의 정치상황을 분석했다. 왕실의 가장 어른자리에 남은 자신의 선택에 남편 세조의 유지와 왕실의 성쇠가 달려있었다.
법대로 하자면 왕위는 예종의 아들인 원자(후일의 제안대군)가 이어받아야 했다. 그런데 그는 이제 불과 4살. 정희왕후 자신이 나서 수렴청정을 한다 하여도 아이가 다 자라기 전에 정희왕후 본인이 죽어 다시금 혼란이 야기될지도 모를 일이라고 판단했다. 당시 정희왕후는 50대를 넘어서고 있어서 환갑을 넘기기 어렵던 조선시대 평균 수명을 감안할 때 앞날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원자는 왕위계승권에서 제외되었다. 두번째 후보는 죽은 의경세자의 첫째 아들 월산대군이었다. 당시 월산대군은 16세로, 지금 당장 왕위에 올라도 별다른 무리없이 정치에 임할만한 나이였다. 그는 어머니 수빈(의경세자의 빈, 훗날 소혜왕후)에게 엄격한 교육을 받고 자라 그다지 흠잡을 데 없는 품성과 교양을 가진 인물이었다. 누가 봐도 그가 가장 유력한 왕위계승자였다.
그림4. 계유정난, 수양대군에게 직접 갑옷을 입히다
왕실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왕이 될 수 없는 운명을 한탄하던 수양대군이 30대로 접어들면서 조선의 정치사는 앞날을 예상 할 수 없는 파란 속으로 접어들었다. 몸이 약했던 문종이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 뿐 아니라 어머니도 없고, 외척도 변변치 않은 나이 어린 단종이 즉위하면서 조선의 왕위는 백척간두에 선 듯 위태로워졌다. 단종은 그가 어른으로 성장할 때까지 왕을 보호하고 정사를 대신해줄 왕실의 어른도 없는 상황에서 어린 나이에 성급하게 일선 정치무대로 내몰렸다. 신하들과 종친들은 모두 어린 왕을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각자의 충성심을 과시했지만, 그들 중 누구도 사리사욕에 타락할 위험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은 채 권력의 시험대 위에 올랐다. 신하들은 왕권보다 더 큰 신권을 꿈꾸었고, 종친들은 어린 단종을 내몰고 자신이 왕위에 오를 기회를 노렸다.
먼저 칼을 빼든 것은 결국 세종의 예상대로 그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이었다. 수양대군은 세종과 문종의 유지로 단종을 보필하던 김종서 와 황보인을 비롯한 신하들이 어린 왕을 함부로 휘두르며 왕권을 약화시킨다고 생각했다. 거기에 동생이지만 라이벌이기도 했던 안평대군의 왕권경쟁에 참여한 듯한 애매한 태도도 수양대군의 마음을 급하게 했다. 수양대군은 한명회, 권람 등과 세력을 형성하여 안평대군과 손잡은 재상들(김종서 황보인 등)과 맞섰다.
수양대군은 단종 1년(1453년 계유년) 10월 10일 자신의 쿠데타를 ‘나라가 처한 위태로운 재난을 평정한다’는 의미인 정난(靖難)으로 미화시켜 거병했다. 그러나 이 계유정난은 정희왕후의 결단이 없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일지도 몰랐다.
정희왕후는 남편의 왕권에 대한 야심을 늘 걱정하고 이를 반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남편의 결심이 굳어진 상태에서 쿠데타를 일으킬 날짜가 정해지자 그녀는 태도를 완전히 바꾸었다. 심지어는 정난을 일으키기로 한 아침, 정보가 안평대군 쪽으로 넘어가 거병할 것을 망설이는 수양대군을 독려하여 손수 갑옷을 입혀 말 위에 오르게 한 것이 바로 정희왕후였다. 계유정난은 김종서와 황보인 등을 급습하여 죽이고 안평대군을 유배보내 죽임으로써 수양대군의 승리로 끝났다.
적이 사라진 중앙 정치무대에서 거칠 것이 없어진 수양대군은 바로 왕이 되는 일에 착수했다. 정난에 성공한지 2년 만에 수양대군은 어린 조카를 상왕으로 올리고 왕위를 꿰차 조선의 7대 임금 세조가 되었다. 그의 부인 정희왕후도 왕비자리에 올랐다. 이후 상왕으로 올렸던 단종을 사육신이 일으킨 복위 운동을 빌미 삼아 1457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하고 영월로 유배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1457년 서인으로 강등된 단종이 영월에서 자살하도록 만듦으로써 세조는 자신이 찬탈한 왕위를 지켜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서 세조를 격려하고 조언하며 그를 도운 사람이 바로 정희왕후였다.
그림5.왕비, 그러나 두 아들을 앞세워야 했던 비운의 어머니
명분이 취약한 자가 권력을 잡으면 그 열등감을 감추기 위해 공포정치를 하기 마련이다. 세조 또한 마찬가지였다. 조카와 남동생, 젊은 시절을 함께 했던 벗들의 피를 손에 묻힌 세조는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오른 왕위에 겨우 14년간 머물렀다. 그동안 그는 다음 왕위를 이어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큰아들 의경세자가 원인 모를 병으로 급사하는 아픔을 겪으면서 극심한 죄의식에 시달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는 정희왕후도 마찬가지였다.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가 침을 뱉는 꿈을 꾼 뒤 피부병에 시달리게 된 세조를 간호하면서 정희왕후 또한 큰아들 의경세자의 죽음이 예사 죽음이 아니라 자신들이 저지른 죄값을 치르는 것이라 여겼고, 죄의식을 털어버리기 위해 불교에 매달렸다.
그러나 정희왕후의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남편 세조가 피부병을 고치지 못하고 끝내 숨을 거둔 뒤 다음 왕위를 이은 둘째 아들 예종마저 재위 1년 2개월 만에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것이다. 수많은 사람을 죽여가며 차지했던 왕권이 허무하게 사라져가는 것을 정희왕후는 그대로 가만히 지켜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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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6.
그림7. 왕위 계승자를 선택하고 수렴청정을 하다
그런데, 정희왕후는 망설였다. 표면적인 이유는 월산군이 병약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 이유는 다른 데에 있었다. 월산군에게는 그를 뒷받침해줄 세력이 미약했다. 월산군은 병조판서 박중선의 딸과 결혼했다. 명문가문이긴 했지만 권세가는 아니었다. 세조가 왕위에 있을 때 직접 골라준 혼처였다. 세조가 월산군에게 이런 혼처를 마련해준 것은 왕위를 이을 둘째 아들 예종을 위해서였다. 아무래도 손자보다는 아들이 가까웠던 아버지 세조는 월산군이 권세가의 딸과 결혼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예종과 몇 살 차이나지 않는 손자 월산군이 세력을 키워 아들에게 부담이 되는 것을 일찌감치 막고 싶었던 것이다. 당시 세조는 예종이 1년 만에 북망으로 자신을 따라오리라고는 상상치도 못했기에 이러한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그러나 인명은 재천이고 보니 스무살 예종의 죽음 이후 정희왕후는 처가가 뒷받침이 되어주지 못할 것 같은 월산군을 선뜻 다음 왕으로 선택하지 못했다.
정희왕후는 월산군의 동생 자산군을 주목했다. 세조를 도와 계유정난을 일으킨 뒤 조선 최고의 권세가가 된 한명회를 장인으로 둔 자산군은 이제 13세였다. 자산군이 한명회의 딸과 결혼한 것은 그의 어머니 수빈 한씨 (훗날의 소혜왕후)의 의지 덕분이었다. 첫째 아들의 혼처를 정해준 세조의 의도를 잘 파악하고 있던 수빈 한씨는 내심 시아버지의 그러한 결정이 섭섭했던지 세조가 병으로 정신이 혼미한 때를 틈 타 한명회와 사돈을 맺었다. 부질없는 희망이라고 해도 남편 의경세자가 요절하지만 않았다면 왕비가 될 뻔 했던 수빈 한씨로서는 아들에게 처가나마 제대로 선택해 힘을 실어주고 싶었을 것이다. 수빈 한씨의 이러한 욕심이 결국 자산군에게 큰 보탬이 되었다. 정희왕후는 자산군의 장인 한명회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외가도 처가도 변변치 않았던 단종이 수렴청정을 해줄 할머니마저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남편 세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는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본 정희왕후는 왕에게 있어서 배후가 될 세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이미 체득하고 있었다. 뒷받침할 세력이 미약한 월산군이 왕이 될 경우, 자산군을 사위로 둔 한명회가 가만있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린 정희왕후는 골육간의 또 다른 피바람을 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정희왕후에게는 또 하나의 욕망도 잠재되어 있었던 것 같다. 이미 성인에 가까운 월산군이 왕이 되어 바로 정치 일선에 나서면 자신은 그야말로 궁궐의 뒷방에 머무는 대왕대비자리에만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만약 나이 어린 자산군이 왕위에 오른다면 자신에게 기회가 있었다. 왕실의 가장 어른인 정희왕후가 어린 왕을 끼고 수렴청정이라는 공식적인 정치 행위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수렴청정으로 정국을 직접 운영하게 되면 그야말로 조선 하늘 아래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 권력을 휘두르게 되는 것이다. 정희왕후는 마침내 자산군을 다음 왕으로 선택했다.
일단 자산군을 다음 왕으로 선택하자 모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자산군을 왕으로 지목하기 전에 이미 자산군은 궁궐에 들어와 있었다. 정희왕후가 공식발표 전에 자산군을 은밀히 불러 들여놓고 여타의 잡음이 일기 전에 즉위식을 재빨리 거행할 계획을 세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정희왕후의 부름을 받고 들어온 자산군은 그대로 즉위식을 올리고 조선 9대 왕 성종이 되었다. 그리고 그 성종의 뒤에 발을 치고 정희왕후가 국가 최고의 자리에 앉았다. 조선 최초의 수렴청정이 시작된 것이다.
신숙주 등이 굳이 이를 청하고, 이내 장계(狀啓)를 올리기를, “(전략) 사왕(嗣王)이 나이가 어리니 온 나라 신민은 허둥지둥하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자성왕대비전하(정희왕후)께서는 슬픈 정리를 조금 억제하시고, 종사의 소중함을 깊이 생각하시어 (중략) 모든 군국의 기무를 함께 들어 재단하여 사군(성종을 이름)이 능히 스스로 정사를 총람하기를 기다려 환정(還政)하시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하니 대비(大妃)가 이를 허락하였다
.-[성종실록] 1권, 즉위년(1469 기축) 11월 28일(무신)
정희왕후는 1469년부터 7년 동안 수렴청정을 하며 조선의 최고정책결정권자가 되었다. 이 기간 동안. 그녀는 종친 정리작업을 통해 왕권을 안정시키고 종친의 관리 등용을 법으로 금지시켰다. 비록 단종은 복권하지 않았지만 그의 비 정순왕후 송씨를 신원하여 단종에 대한 죄의식을 어느 정도는 상쇄하려 하였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불교를 신봉하였지만, 정책면에서는 조선의 국시인 숭유억불을 강화시켰다. 불교의 화장 풍습을 없애고 도성 내에 사찰을 폐지하였으며 승려의 도성출입을 금했다. 또한 왕실의 고리대금업을 엄단하고 농업과 잠업을 육성하였다.
그녀의 이러한 일련의 정치를 도운 것은 세조의 근신이던 한명회와 신숙주 등이었다. 이들은 정희왕후의 수렴청정 기간 동안 엄청나게 큰 정치, 경제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때문에 이들은 훗날 새롭게 정계에 들어오게 되는 사림들의 주요한 비판 대상이 되어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그러나 과단성있고 노련했던 정희왕후의 수렴청정 기간 동안 조선의 왕권은 안정을 되찾았고 사회는 정돈되어 갔다. 이것은 이후 성종의 친정기에 문물제도가 완성되는 주춧돌 역할을 하였으며, 이후 조선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기여하였다.
정희왕후는 성종이 20세가 되던 해에 수렴청정을 거두고 정치일선에서 물러났다. 이후 그녀는 세조가 거둥(擧動)하던 온양온천에 자주 내려가 있었고 죽음도 온양에서 맞이하였다.
그림8.
그림9.
그림10.
그림11
세조의 차남 예종(세종 23년에 태어남)
이름은 황(晄). 초자는 평보(平甫), 자는 명조(明照). 세조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파평부원군 윤번(尹璠)의 딸 정희왕후(貞熹王后)이다. 비(妃)는 영의정 한명회(韓明澮)의 딸 장순왕후(章順王后)이며, 계비(繼妃)는 우의정 한백륜(韓伯倫)의 딸 안순왕후(安順王后)이다.
일찍이 해양대군(海陽大君)에 봉해졌다가, 1457년(세조 3) 9월 왕세자 장(暲 : 뒤에 德宗으로 追尊됨)이 죽자 뒤를 이어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1466년부터 승명대리(承命代理)로 정무를 보아오다 1468년 9월 세조가 죽기 직전 왕위를 이어받았다. 그러나 세조말부터 신숙주(申叔舟)·한명회·정인지(鄭麟趾)·구치관(具致寬) 등의 훈신(勳臣)들이 승정원에 상시 근무하면서 정무에 참여할 수 있는 특권이 부여되어 있었고, 예종 즉위 후에는 이들 전직 대신들이 원상(院相)으로 현직 의정부 대신들보다 더 높은 위치에서 정무를 처결하는 등 실질적 권력을 장악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원상 세력과, 이시애(李施愛) 난 진압에 공을 세운 뒤 정치적 지위가 상승한 강순(康純)·남이(南怡)·구성군(龜城君) 등 적개공신(敵愾功臣) 간의 권력다툼이 노골화되어 그해 10월 적개공신 세력이 반역혐의로 제거되었다. 원상세력은 익대공신(翊戴功臣)에 책봉되어 80~150결(結)의 공신전을 받았으며, 특히 한명회는 영의정이자 국구(國舅)로서 절대적 권력을 누렸다. 1469년 3월 삼포(三浦)의 사무역(私貿易)을 금했으며, 6월에는 일반 농민이 둔전(屯田)을 경작하는 것을 허가했다. 그해 9월에는 문민질고별감(問民疾苦別監)을 경상도·충청도·전라도에 각각 보내 민란을 진정시켰다. 문화면에서는 1469년 6월 세계지도인 〈천하도〉를 작성했고, 7월 조선초부터의 내우외환을 기록한 〈무정보감 武定寶鑑〉을 완성했다. 9월에 최항(崔恒)·김국광(金國光) 등이 〈경국대전〉을 완성했으나 반포를 보지 못했다. 14개월이란 짧은 기간 동안 재위하고 29세로 죽어 덕종의 둘째 아들 잘산군(乽山君 : 성종)이 왕위를 계승했다. 능은 경기도 고양에 있는 창릉(昌陵)이다. 시호는 양도(襄悼)이다.
세조의 장남덕종 둘째아들(세조3년에 태어났음)
세조의 큰아들인 덕종(德宗)의 둘째아들이며, 어머니는 한확(韓確)의 딸 소혜왕후(昭惠王后)이다. 비(妃)는 영의정 한명회(韓明澮)의 딸 공혜왕후(恭惠王后)이며, 계비(繼妃)는 우의정 윤호(尹壕)의 딸 정현왕후(貞顯王后)이다. 1461년(세조 7) 자산군(者山君)에 봉해졌다가 1468년 잘산군(乽山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이해 세조가 죽고 예종이 19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게 되자 세조의 즉위 때 공을 세운 신숙주·정인지·한명회 등의 훈신(勳臣)들이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정치적 지위가 급상승한 남이 세력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이에 따라 왕권이 상대적으로 약화된 가운데, 1469년 예종이 죽자 병약한 형 월산군(月山君)을 대신하여 13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7년간 정희대비(貞熹大妃:세조의 妃)의 수렴청정을 받아 독자적으로 정국을 운영하지 못했으며, 훈신세력이 모든 군국사무를 주도했다. 훈신세력은 성종이 즉위하던 해 가장 위협적인 정적이던 구성군(龜城君) 준(浚)을 유배시킴으로써 권력을 더욱 안정시킬 수 있었다. 1476년(성종 7) 친정(親政)을 시작했으나 세조와 같은 전제권을 확립하지는 못했다. 이해 공혜왕후가 아들이 없이 죽자 윤기견(尹起畎)의 딸 숙의윤씨(淑儀尹氏)를 왕비로 삼아 연산군을 얻었다. 그러나 윤씨의 투기가 매우 심해 왕의 얼굴에 상처를 입히는 사건까지 일어나자 1479년 윤씨를 폐위하고 1482년 사사(賜死)했다.
폐비 윤씨(제현왕후)(廢妃 尹氏, 1455년 음력 6월 1일 ~ 1482년 음력 8월 16일)는 누구인가?
묘역장소:경기도 고양식 덕양구 원당동 197-26에 있다.
조선의 제9대 왕 성종의 후궁이자, 두 번째 왕비이며, 10대 왕 연산군의 생모이다. 한때 제헌왕후(齊獻王后)로 추존되었으나, 폐출된데다가 이후 왕후의 지위도 다시 추탈되었으므로 보통 폐비 윤씨라 부른다. 1473년 성종의 후궁으로 간택되어 숙의에 지위에 있다가 공혜왕후가 죽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봉상시 판사(奉常寺 判事) 윤기견(尹起畎, 또는 윤기무, 尹起畝)[3]와 신씨의 딸로 윤관의 11대손이다. 본관은 함안(咸安)이다. 남편(성종)의 후궁들 문제로 남편과 시어머니 인수대비와의 갈등으로 유명하며, 성종의 용안에 상처를 낸 일로 인해 폐서인 된 후 사사되었다. 사사 당시 피를 토한 금삼을 친정어머니 신씨에게 넘겨주며 아들이 자라면 넘겨줄 것을 유언했고, 이는 후일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의 도화선이 된다.
연산군 즉위 후 제헌왕후로 왕후의 작호가 추숭되었으나 중종반정 이후 다시 삭탈되었다. 신숙주는 그의 외당숙이며, 명종 때의 권신 이량은 그의 오빠 윤구의 손녀사위이기도 하다.
출생과 가계
흔히 생년이 불분명한 것으로 알려져있으나,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된 폐비 윤씨 태실의 태지에는 그녀가 1455년 음력 6월 1일에 태어난 것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1][2]. 봉상시판사를 지낸 윤기견과 장흥부부인(연산군 사후 군부인으로 격하) 고령 신씨의 딸로 태어났으며, 3명의 이복 오빠와 1명의 친오빠가 있었다.[4]. 할아버지 윤응(尹應)은 통훈대부(通訓大夫) 교하현감(交河縣監)이었고, 증조 할아버지 윤득룡(尹得龍)은 조선조정에 처음 벼슬하여 자헌대부(資憲大夫)와 호조전서(戶曹典書)를 역임했다. 고조부 윤희(尹禧)는 고려조에서 정순대부(正順大夫)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를 지낸바 있다. 일부에서는 그녀의 아버지 윤기견의 죽음으로 인해 집안의 생계가 어려워지자 궁녀로 입궁했다고 하지만[5]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정희왕후가 그녀를 훗날의 정현왕후가 되는 윤호의 딸과 함께 입궁시켜 숙의의 첩지를 내린 사실이 명백히 표기되어 있다.
후궁과 왕비
입궐과 간택
윤씨는 성종 4년(1473년) 음력 3월 19일에 숙의에 봉해졌다.
성종 5년(1474년)에 성종의 첫 번째 왕비인 공혜왕후가 승하하자 성종은 2년 뒤 공혜왕후의 3년상을 마치고 1476년 7월 11일에 숙의였던 윤씨를 왕비로 삼을 것을 전교하였다. 당시 윤씨는 임신 중인 몸으로, 8월 9일 왕비로 책봉되어 3개월 뒤인 11월 7일에 원자(연산군)를 낳아 중전의 위치는 더욱 확고해졌다. 바로 그의 아버지는 영의정에 추증되고 함안군(咸安君)에 추봉되었다. 그러나 그녀가 폐위된 뒤 윤기견의 증직과 작위 역시 함께 추탈되었다.
폐출
평소에 질투심이 많았다고 알려져 있다고 하지만, 여자 관계가 복잡한 남편인 성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러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야사로 전해지는 이야기에는 성종이 자신의 처소에 들르지 않고 다른 후궁들의 처소만 찾자, 다른 후궁들을 질투하여 잡아다가 추궁, 취조하는 등의 행위를 하다 성종의 눈밖에 났고, 말싸움 중 왕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낸 것이 발단이 되어 왕대비인 인수대비의 분노를 샀다는 설이 있으며, 다른 설로는 삼사의 탄핵으로 폐출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그녀에 대한 왕실의 사후 예우를 본다면 왕실의 눈 밖에 나 폐위된 것이 유력하다.
또한 경쟁관계에 있던 성종의 다른 후궁들이 인수대비를 찾아가 윤씨를 비판하며 그녀의 폐위를 부추기기도 했다.[6] 이러한 일련의 사건 등으로 윤씨는 마침내 1479년, 자신의 생일 바로 다음날인 음력 6월 2일에 왕비에서 폐위되었다.
사사 사건
조선 조정에서는 그녀가 폐서인이 된 이후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고 있는 점, 세자의 생모라는 점 등을 이유로 들어 그녀를 살려 두고자 하였으나, 성종의 모후인 소혜왕후(인수대비)와 엄숙의, 정숙용 등의 사주로 인해 궁녀들이 성종에게 허위 보고를 하면서 1482년 음력 8월 16일, 결국 사약을 받아 사사되고 말았다. 윤씨는 죽기 전 자신의 피가 묻은 금삼을 친정어머니 신씨에게 "아들이 자라거든 이를 전달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훗날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이 사건에 대해 알게 되고, 결국 이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을 처벌하면서 1504년에 갑자사화 등이 일어나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로 인해 한명회, 한치형 등의 사람들이 부관참시를 당하고 그 이외의 사람들이 사사되거나 유배되었다. 하지만 실제 역사 속의 연산군은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어머니의 죽음을 알고 있었다. 연산군에 의해 제헌왕후(齊獻王后)에 추숭되고, 회묘는 회릉(懷陵)으로 격상되었다.
사후
사후 경기도 장단에 매장되었으나 장지가 좋지 않다는 지관의 지적으로 신하들의 건의가 있자, 성종은 1488년(성종 19년)경 한성부 동대문구 회기동 경희의료원 자리로 이장을 하였다. 뒤에 윤씨의 묘가 회묘, 회릉, 회묘로 변경되면서 이는 지명이 되어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회기동의 지명 유래가 되었다.
성종은 폐비 윤씨의 묘를 '윤씨지묘(尹氏之墓)'라 비석을 세우고, 제관 2명을 보내 기일에 제사를 올리도록하되, 묘의 이름을 영구히 고치지 못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후에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묘는 회묘에서 효사묘(孝思墓)로 바꿨다가 다시 회릉으로 격상시킨다.
연산군 사후
그 뒤 무덤은 현 위치인 경기도 고양군 원당읍 원신동(현 고양시 덕양구)로 이장하였으며, 서삼릉 내에 위치한 회묘(懷墓)이다. 왕비의 예에 따라 능으로 개장되었기 때문에 비교적 화려한 외관을 갖추고 있다. 1506년(연산군 12년) 중종 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어 연산군이 그의 어머니 윤씨에게 올린 관작과 존호는 모두 삭탈되었고, 회릉 역시 회묘로 격하되었다.
회묘 근처에는 후궁 묘역이 있으며, 그 중 윤씨의 묘소는 봉분이 크고 석물들이 존재하고 있다.
친정오빠 윤구의 손녀사위는 명종비 인순왕후의 외삼촌이자 권신인 이량이다.
세조(수양대군 정희왕후)는 김종서를 사사해야만하는 이유
김종서
[인명] 조선 초기의 문신(1390~1453). 자는 국경(國卿), 호는 절재(節齋)이다. 1405(태종 5)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함길도 절제사를 거쳐 우의정을 지냈다. 육진(六鎭)을 개척하여 두만강을 경계로 국경을 확정하였다. 《고려사》의 개찬(改撰)과, 《고려사절요》의 편찬(編纂)을 총관하였다. 수양 대군에 의하여 두 아들과 함께 격살(擊殺)되고, 대역모반죄로 효시(梟示)되었다.
문종의 유명을 받은 고명대신 황보 인과 김종서 등은 모든 정치적 권력을 정비하고 국왕을 보필했다. 중급
수양 대군은 조카 단종을 보좌하던 김종서를 살해한 후 정권을 장악했다. 중급
김종서는 문종의 유언을 받들어 어린 단종을 보필하다가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수양 대군에게 살해되었다. 중급
수양은 이번 사행의 수원(隨員)으로 황보인의 아들 석(錫)과 김종서의 아들 승규(承珪)를 자벽하였다.
고명대신, 비운의 죽음을 맞이하다
세종의 장남 문종은 승하 직전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는 정부를 개편한 바 있었다. 이때 영의정에 황보인을, 좌의정에는 김종서를, 우의정에는 정분을 각각 임명하였다. 그리고 승하에 임박해서는 이들을 비롯해 육조 판서 등을 불러놓고 세자를 앞에 세운 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 해놓은 일 없이 가거니와 잊지 못하는 것이 이 어린 세자요. 나는 이제 경들에게 간절히 부탁하노니, 부디 저버리지 말고 힘써 보호하여 주기 바라오. 이 자리에 참석했던 어느 누가 부왕의 세자에 대한 애틋한 심정을 모르겠는가?
이 순간 모두 세자에 대한 충성을 다짐했으리라.
그렇게 문종이 덧없이 승하하고 그 뒤를 열두 살의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올랐다. 이런 순간에 수양대군은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전국에서 책략가와 한량들을 모았다. 한명회∙권람∙홍윤성 등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여러 모사와 수많은 장정을 불러 모아 인적 자원을 확보하게 된 수양대군은 서서히 그 야심의 날개를 펼치게 되었다. 이러한 수양대군에게도 만만치 않은 존재가 있었으니, 그것은 단종을 보필하고 있는 고명을 받은 대신들, 그중에서도 좌의정 지위에 있는 김종서였다.
그는 수양대군이 대사를 추진해 나가는 데 있어서 가장 장애가 되는, 실로 수양대군에게 가시와 같은 존재인 동시에, 또한 제일 먼저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될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그를 살려두고는 대사를 도모하기 불가능함을 깨달은 수양대군은, 마침내 치밀한 타도의 계획을 세운 다음, 친히 양정, 유숙을 비롯한 몇 사람의 장사를 대동하고, 새문 밖 김종서의 사저로 향하여 거사에 성공함으로써 걸림돌을 제거하였다. 이렇게 한순간에 두만강의 벌판을 호령했던 큰 호랑이 김종서는 역사 속에 묻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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