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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31. 묵상글 ( 성탄 팔일 축제 제7일. - 한처음이신 주님.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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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31. 성탄 팔일 축제 제7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12.31 04:20
- 한처음이신 주님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한 해를 마치면서 지난 한 해만을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과거 지향적으로 현재를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며 새해를 내다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과거와 미래가 같이 있는 현재를 사는 사람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현재의 자기만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현재 자기의 감정과 상태가 과거도 미래도 매몰시킬 뿐 아니라
삶을 같이 나눈 다른 사람들을 같이 돌아볼 수 없는 외로운 사람들입니다.
이에 비해 나의 한 해 동안 나에게 힘이 되어준 소중한 사람뿐 아니라
나의 삶을 힘들게 했던 사람까지 함께 돌아보는 사랑의 사람도 있습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서 안 좋은 일만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은 좋은 일만 있기를 바라거나
안 좋은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에
오히려 안 좋은 것만 눈에 보이는 사람입니다.
이에 비해 자신을 겸손하게 돌아보는 사람은
나 같이 부족한 사람, 나 같은 죄인에게
좋은 일도 많았고 너무도 고마운 사람이 많았다고
한 해를 감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서 인간과 인간사만을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과 일들 안에서 하느님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에 비해 일과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을 보고,
하느님 안에서 일과 사람들을 보는 사람은
그 일에 하느님의 뜻이 있음을 보고,
그 사람이 하느님이 내게 보내신 사람임을 봅니다.
그러므로 이제 한 해를 돌아보고 새해를 내다보면서
모든 시간의 원천이요 주인이신 한 처음을 봅시다.
모든 것을 있게 하시고 주시는 하느님을 봅시다.
2024년도 여러분을 통해 하느님께서 베푸신 모든 은총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새해 모든 것, 좋은 것과 나쁜 것, 모두를
은총으로 껴안으실 수 있는 한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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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31. 성탄 팔일 축제 제7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열심히 살았다고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열정적으로 살았던 자매님이 있습니다. 직장에서 최선을 다했고, 그래서 높은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가정에 소홀히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좋은 아내, 엄마라고 충분히 부를 수 있는 분이었다. 또 이웃에게도 친절했고, 어려운 사람을 외면하지도 않았습니다. 바쁜 일상으로 종교 활동에 전념할 수는 없었지만, 죄짓지 않으며 하느님 뜻에 맞춰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런 자매님에게 충격적인 일이 다가왔습니다. 글쎄 말기암 판정을 받은 것입니다. 1년도 채 남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의사에게 암이 생긴 이유를 물었습니다. 뭘 잘못 먹어서인지, 운동이 부족해서인지, 스트레스가 너무 많아서인지, 뭐든지 이유가 있어야 했습니다. 분명히 자기 탓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마다 의사들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유를 알 수 없어요. 그냥 갑작스러운 교통사고 같은 것이에요.”
무엇이 잘못되면 원인을 찾고 이를 고쳐나가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방식이 아닐까요? 이때 드는 생각은 불공평하다는 것입니다. 불공평으로 삶 전체가 부정되는 느낌일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의 일상 삶 영역을 넘어서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요?
하느님의 영역을 우리 인간이 알 수 없습니다. 억울하다고, 불공평하다고 하지만, 하느님 영역에서는 다른 의미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찾는 데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인간의 영역을 넘어 진정한 행복이 있는 하느님의 영역에 들어설 수 있게 됩니다.
도저히 이해될 수 없다고 또 부정한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심에 맡길 때 바뀔 가능성이 더 높아집니다.
요한은 ‘말씀은 사람이 되셨다’라면서 하느님께서 인간의 몸을 취하시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요한이 과연 아무런 문제 없이 하느님을 체험했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 역시 많은 고통과 시련으로 겪었고, 그러나 포기하고 좌절하는 것이 아닌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해 더 집중했습니다. 그 결과 이렇게 예수님을 참된 메시아로 고백하며, 그 뜻을 우리 역시 적극적으로 실천하도록 노력할 것을 권하는 것입니다.
벌써 2024년의 마지막 날을 보냅니다. 올 한 해 과연 하느님의 뜻을 찾으면서 그 뜻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면서 살았는지를 반성했으면 합니다. 어렵고 힘든 시간이었어도 분명히 하느님의 은총을 느끼면서 감사의 기도를 바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순간을 소중히 여기다 보면, 긴 세월은 저절로 흘러간다(마리아 에지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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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31. 성탄 팔일 축제 제7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성탄 8부 내 7일”이며, 2024년을 마감하는 올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지난 한 해를 돌아다보며, 오늘을 가져다 준 지난날들에 감사드려야 할 일입니다. 사실, 우리는 그분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결코 보낼 수 없었던 한해를 보냈습니다.
오늘, 우리는 <독서>를 통해서는 ‘마지막 날’에 대한 말씀을, <복음>을 통해서는 ‘한 처음의 날’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한 처음’의 놀라운 일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여기서, “사람”은 직역하면 ‘살을 취하였다’는 것으로 약함 안으로 들어온 것을 말하고, “사셨다”는 것은 ‘천막을 치고 우리와 함께 거주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하느님이 오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되시어 오셨고, 사람이 되시어 오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사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하느님의 아들이 참으로 인간의 본성을 취하여 사람이 되셨다’는 믿음과 ‘그분이 우리 가운데 천막을 치고 함께 거주하고 사신다.’는 믿음은 초기교회 때부터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이자 핵심교리가 되었습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가 인용한 초대교회의 찬미가에서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 2,7)
이는 단지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을 하느님 되게 하신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인간이 되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사시면서 하신 일인 것입니다. 이는 어마어마한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엄청난 사랑’을 말해줍니다. 교부들은 “하느님이 인간이 되신 까닭은 인간이 하느님 되기 위함이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두 개의 변모가 있습니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신 변모’와 ‘인간이 하느님이 되는 변모’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자신을 ‘비우는’ 일이 있고, 그와 ‘같아지는’ 일이 있고, ‘하나 되는’ 일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단순히 ‘본받는’는 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심도 깊은 신비적 차원을 일이 벌어집니다. 곧 베드로가 표현한대로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2베드 2,4) 되는 일이 있고, 바오로가 표현한대로 “그분의 형상을 지니고”(1코린 15,49), “그리스도를 입고”(로마 13,14;갈라 3,27;콜로 3,10), “같은 모습이 되는”(로마 8,29)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타자에게 자신의 자리를 비워주고 내어주어, 그로 하여금 당신께서 누리는 가장 귀하고 좋은 것을 함께 누리게 해 주는 것입니다. 곧 ‘사랑’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타자가 자신 안으로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자리를 그에게 내어주는 것만으론 충분하지 않습니다. 나아가, 자신이 그의 자리로 들어가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내어주는 것은 곧 들어가는 일이 됩니다. 곧 자신을 내어주고 나아가 상대에게 들어가기에, 동시에 자신의 그 빈자리에 그를 받아들이는 일이 됩니다. 그래서 상대를 취하고 상대를 받아들여 상대와 같아지고, 비로소 하나가 됩니다. 그래서 교회 전통에서 전해져 오는 격언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오직 같아지는 것만이 구원할 수 있다”
그렇습니다. 진정으로 ‘비우는’ 행위의 종착지는 ‘같아지는’ 것이요, ‘하나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것은 또 다시 당신에게로의 변형을 가져옵니다. 곧 이러한 변화는 변화 자체에 머물지 않습니다. 또 다른 차원의 변화로 끌고 갑니다. 우리 가운데서 우리와 ‘같아짐’을 통해 우리와 자리를 바꾸는 지점까지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곧 인간을 하느님이 되게까지 이르게 합니다. 그래서 옛 교부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은 본질 자체로 하느님이시고, 우리는 은총으로 하느님이 됩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래서 옛 교부들은 이를 “놀라운 교환”(admirabile commercium)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느님이 되는” 길은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바로 그 길뿐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도 이와 마찬가지의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곧 자기를 온전히 비우고 그저 자기 자신의 ‘아무 것도 아님’ 안에 머물면, 하느님께서 그 안에 들어와 ‘전부’가 되실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4)
주님!
한 해의 마지막 날을 보내면서,
제 발길이 당신을 향하여 있는지,
제 마음에는 당신의 평화가 들어와 있는지를 봅니다.
그렇습니다. 당신께서는 이미 제 안에 생명의 빛을 불어넣으셨으니
이제는 죽음의 어둠에 물들지 않게 하소서.
제가 당신 생명으로 새로워지고,
세상에 당신의 생명을 드러내게 하소서.
온 세상이 생명의 빛으로 차오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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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31. 성탄 팔일 축제 제7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생명, 그리고 빛
한 해의 끝자락에 왔습니다. 들리는 소식은 맑고 밝은 소리보다는 어둡고 가슴 아픈 일들이 많습니다. 정치, 경제의 성숙한 모습은 기대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진정성을 가진 책임의 실종을 바라보노라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지도자라고 하는 이들에게는 국민은 안중에 없고, 자기 권력만을 고집하고 있으니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이 걱정입니다. 믿는 이들만이라도 서민들에 대한 배려와 관심이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때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아기 예수님께 드리는 우리의 선물이 위로가 되길 희망합니다.
돌아보면 발자국마다 은총이라고 합니다.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주님의 수난과 고통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기쁘면 기쁜 대로 주님의 은혜에 감사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좋은 것도 싫은 것도 내 감정의 기복에서 왔다 갔다 한 것이지 주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지켜보시며 당신의 품에 머물기를 기다리셨습니다. 좋아서 호들갑 떨 것도, 좋지 않아서 실망할 것도 없는 주님의 품을 내 마음대로 들락거리면서 인상을 찌푸리고 투덜대기도 하고 언제 그랬냐 싶게 속이 보이도록 웃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좀 더 진중하게 주님의 품을 찾고 주님의 품을 그리워하는 한 해를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오늘을 살 수 있는 은총을 감사하고 내일의 은총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기쁨에 목말라해야 하겠습니다.
요한 복음 사가는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1,3-5) 고 말합니다. 사람들의 빛인 생명이 주어졌지만 어둠에 가리워졌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 하느님의 계명을 사는 것이 생명이건만 그 참 생명을 깨닫지 못하고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받아들이지도 못했습니다(요한1,10-11). 오늘도 여전히 그렇습니다. 세상은 자기 잇속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빛은 어둠을 몰아내고 밝게 비추게 될 것입니다. 어둠이 깊으면 깊을수록 더 밝게 비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빛을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얻게 됩니다(요한1,12). 따라서 빛을 받아들이는 눈, 생명을 받아들이는 삶이 요구됩니다. 그러나 육안으로는 그 생명을 볼 수 없습니다. 영적인 눈이 뜨여야 영적인 그분의 생명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삶은 이 세상의 삶이 아닙니다. 영원한 삶을 누리도록 허락된 우리들에게 이 세상에서 보내는 몇 년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영원히 살기 위해서라면 이 세상에서의 몇 년은 잃어버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영원히 살 수 있다면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성 세실리아).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2,17).
생명은 살아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명이, 하느님의 법칙이 하느님의 뜻이 삶 안에 녹아나는 것입니다. 사람의 권력에 흔들리지 않고 하느님의 명에 순종하는 기쁨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생명은 곧 빛입니다. 생명의 빛이 우리 모두를 비추도록 은총을 갈구하는 오늘이기를 빕니다. 한 해를 감사하고 새해를 주님의 이름으로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하늘의 명, 하늘의 말씀, 하늘의 법칙이 살아있어 감사할 수 있길 청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복 많이 지으시고, 많이 받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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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31. 성탄 팔일 축제 제7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하느님께 감사할 일이 있었습니다. 뉴욕에서 손님들이 왔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늦게 잠들었습니다. 다음날 운동하기로 하고 헤어졌습니다. 9명이라서 한 명이 남았습니다. 제가 양보하려고 했는데 손님을 초대해 놓고 빠질 수 없었습니다. 한 분이 양보하겠다고 해서 8명이 운동하려고 출발했습니다. 날씨도 제법 쌀쌀했지만 즐겁게 운동을 시작하려는데 본당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어르신 한 분이 위독하신데 병자성사를 청한다는 전화였습니다. 저는 당연히 가겠다고 했고, 양보하기로 한 분에게 저 대신 운동하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날씨도 춥고, 피곤하기도 했는데 그래도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하느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제게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어르신도, 어르신을 모시는 따님도 모두 기뻐하였습니다. 저는 이번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저를 보살펴 주시는 걸 많이 느꼈습니다. 잘 거절하지 못하는 저의 성격을 아시는지, 하느님께서는 어쩔 수 없이 제가 거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주시곤 합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신앙인들이 가야 할 길과 가지 말아야 할 길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제1독서는 가지 말아야 할 길이 무엇인지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의 적”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적은 칠죄종이라고 합니다. ‘교만, 인색, 음욕, 분노, 탐욕, 질투, 나태’입니다. 적그리스도는 많이 배운 사람들을 쓰러뜨리기도 합니다. 적그리스도는 영적인 스승을 괴롭히기도 합니다. 적그리스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를 끊임없이 공격하였습니다. 복음은 신앙인이 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름‘입니다. 영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름은 성령의 은사입니다. “슬기, 통달, 의견, 지식, 굳셈, 효경, 두려워함’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지친 이들에게 위로를 줍니다. 성령의 은사는 죄지은 이들이 하느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용기를 줍니다. 성령의 은사는 겸손한 이들이 열매를 맺도록 합니다. 성령의 은사와 함께하는 2024년의 마지막 날이 되면 좋겠습니다.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예수님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 하느님의 아들일 뿐만 아니라, 말씀이셨고, 말씀은 하느님이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태초부터 계셨던 분, 말씀이셨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자칫 예수님에 대한 기록으로 머물 뻔했던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요한복음은 우리에게 영적인 세계를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심오한 철학적인 주제들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 8장에서 우리는 지혜로운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과 15장에서 우리는 교회를 사랑하는 목자이신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우리를 영적인 세계로 인도해 주는 안내서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 사도가 있어서 마음이 든든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요한 사도가 있어서 십자가 위에서도 눈을 감을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들 또한 요한 사도처럼 주님의 마음을 든든하게 해드려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편히 쉴 수 있도록 해드려야 하겠습니다. 우리들 때문에 주님께서 행복할 수 있도록 살아야 하겠습니다.
한해의 끝자락에서 프란치스코 성인의 ‘평화를 구하는 기도’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주여,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주님의 은총과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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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31. 성탄 팔일 축제 제7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은 세상 창조 때부터 시작된 구원의 역사를 짧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특히 주님을 ‘참빛’으로 표현하면서 빛은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이끌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느날, 다른 성당 특강을 마치고 밤늦은 시간 이곳 성지에 돌아왔습니다.
성지 근처를 포함해서 모든 곳이 어둠 속에 있었습니다. 날씨도 추워서 그 냉랭함은 어둠을 더욱 어둡게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성지 정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때 짙은 어둠 속에서 빛이 느껴졌습니다. 늦은 시간임에도 성지 1층 성당에 초가 하나 켜져 있었던 것입니다. 다가가 보니 작은 컵 초 하나였습니다.
작은 컵 초 하나는 모든 어둠을 이겨내고 있었습니다. 작은 초 하나가 성당을 비추고 있었습니다. 낮에는 그 의미가 미미할지 모르지만, 어둠이 짙은 밤에는 그 작은 초 하나가 대단한 힘을 발휘했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아무리 어둠이 길고 깊다 하여도 빛을 어둠에 가둘 수 없다.’라는 것을.
우리 안에 작은 초 하나가 켜졌습니다. 아기 예수라는 초 말입니다. 밝은 곳에 있는 그대라면 그 작은 초의 힘이 작게 느껴질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루가 밤과 낮으로 나뉘듯이, 우리 삶에도 분명 밤이 올 것입니다. 그렇게 어둠이 우리 삶을 지배하려 할 때 우리 안에 켜져 있는 작은 초 하나는 그 힘을 발휘할 것입니다. 어둠이 우리를 집어삼키지 않도록 할 것입니다.
빛이 세상에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빛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했습니다. 주님이라는 빛이 늘 우리 앞을 비춰주십니다. 그 빛을 간직하고 그 빛을 따라갑시다. 내년에도….
⭐쉬는 날
작은 식당에서 지인과 식사했습니다.
우리 테이블 옆, 다른 테이블에는 아이와 엄마, 그리고 아빠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연신 웃으며 점심을 먹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아이가 말했습니다.
‘아빠! 오늘 쉬는 날이에요? 너무 좋아요.’라고….
아이는 그 시간이 정말 즐거웠나 봅니다. 꼭 쉬는 날처럼 말입니다.
아이에게 ‘쉬는 날’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날이며 함께 식사하는 날이었던 것입니다. 즉 쉬는 날은 함께하는 날이고 그래서 즐거운 날인 것이지요.
우리에게 쉬는 날은 어떤 날인가요?
아무것도 안 하는 날?
바닥 혹은 침대와 일체가 되는 날?
쉬는 날이 ‘함께 하는 날’이기를 바랍니다.
‘정지’가 쉼이 아니라 ‘함께’가 쉼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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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31. 성탄 팔일 축제 제7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사람되기”의 평생과제
<성화의 여정>
“그분은 당신을 받아들이는
모든 이를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네.”(요한1,12)
2024년 한해 365일 꼬박 수도원에 정주하면서 매일미사와 매일강론, 매일기도로 은총과 진리로 충만한 영적승리의 삶을 살았음에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 영광을 드립니다.
“하느님은 모든 일에 찬미 받으소서.”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평생 기도이자 삶의 요약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일에 영광 받으소서.”
성 베네딕도의 평생 기도이자 삶의 요약입니다.
두 고백 기도와 더불어, 이런저런 나눔으로 2024년12월31일 마지막날 강론을 시작합니다. 교황청 홈페이지 1면 기사는 “교황 프란치스코, 지미 카터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다.”였고 그의 업적에 대한 찬사로 가득한 내용이었습니다. 엊그제 29일 ‘1차 북핵위기 해결’에 크게 기여했던, 가장 위대한 전직 대통령으로 평가받는 미국의 제39대 지미 카터 대통령이 향년 100세로 별세했습니다. 퇴임후로도 최선을 다한 봉사활동의 삶으로 2002년 노벨평화상까지 받은 위인입니다.
<다산, 어른의 하루> 어록의 12월31일 말씀도 좋은 가르침의 지혜가 됩니다.
“기적은 힘차게 내디딘 첫걸음에서 시작되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 내디딘 마지막 걸음에서 완성된다.”<다산>
“함 삼태기의 흙을 더 붓지 않아 산을 못 만든 것도 내가 그만두는 것이다. 한 삼태기 흙을 부어 평지에서 시작하는 것도 내가 나아가는 것이다.”<논어>
모두가 한결같이 시종여일 끝까지 최선을 다할 것을 독려하는 말씀입니다.
2014년 마지막날을 맞이하여 새삼 생각하는 참사람되기, 성화의 여정중 일일일생, 일년사계로 압축하여 어느 지점, 어느 시점에 와 있는지 확인해보는 것입니다. 저로 말하면 90세 전후로 선종을 예감한다면 14년 정도 남았습니다. “아직도”라는 기대와 “벌써” 라는 아쉬움 중, 하루하루 계산하며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 인생, 남은 세월 허영이나 환상이 걷힌 맑고 투명한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아야 하겠다는 자각을 새로이 하게 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다시 참사람되기의 성화의 여정중에 저절로 솟아나는 물음입니다. 오늘 일년 마지막날 복음은 언제나 요한의 장엄한 “말씀찬가”(요한1,1-18)입니다. 요한 사도가 제1독서에서 우리의 경각심을 일깨웁니다.
“자녀 여러분, 지금이 마지막 때입니다. 지금 많은 그리스도의 적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갔지만 우리에게 속한 자들이 아니었습니다...여러분은 거룩하신 분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진리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진리를 알기 때문입니다. 또 진리에서는 어떠한 거짓말도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리이신 그리스도에게서 벗어난 이단을 비롯한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의 적이라는 것입니다. 진리이신 그리스도의 한몸 공동체에 속할 때 온전한 진리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성화의 여정은 진리이신 주님과의 일치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성화의 여정을 잘 살아 참 사람이 되겠는지요? 참으로 존엄한 품위의 참사람의 신원의 나눔입니다.
첫째, “말씀의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시게 되었으니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참사람의 원형이, 성화의 여정의 궁극목표가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말씀이 바로 인간의 본질임을 깨닫습니다. 가난도 허무도 탐욕도 인간 본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명사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동사입니다. 말씀이 우리를 살게하고 역동적이 되게 합니다. 그러니 참사람이 되기 위해 평생 부단히 말씀을 공부하고 실천하며 평생 말씀의 학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본질적 수행인지 깨닫습니다.
둘째, “생명과 빛의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생명과 빛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습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그대로 생명과 빛임을 깨닫습니다. 모든 생명과 빛은 말씀이신 그리스도로부터옵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와 일치될수록 생명과 빛의 사람이지만 반대로 멀어질수록 죽음과 어둠이 그를 지배할 것입니다.
“말씀의 빛이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왔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새삼 무지의 악, 무지의 죄, 무지의 병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깨닫습니다. 무지의 죽음이자 어둠입니다. 참생명이며 참빛이신 말씀이신 주님을 깨달아 아는 부단한 수행이 얼마다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셋째, “은총과 진리의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참사람의 원형인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은총과 진리로 충만한 분입니다. 사랑의 은총, 사랑의 진리요 결국은 사랑으로 충만한 삶입니다. 요한의 은혜로운 확신에 넘친 힘찬 고백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
참으로 아름답고 고귀한 품위의 삶의 원천은 은총과 진리의 주님뿐이요, 주님과 일치가 깊어져 주님을 닮아갈수록 비로소 아버지의 영광을 환히 드러내는 은총과 진리의 참사람이 됨을 깨닫습니다.
삶은 선물이자 과제입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모상을 지닌 사람으로 태어난 선물 인생들입니다.
성화의 여정을 통해 참사람되는 평생 과제를 부여받은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닮아,
첫째, 말씀의 사람이 되십시오.
둘째, 생명과 빛의 사람이 되십시오.
셋째, 은총과 진리의 사람이 되십시오.
더불어 이렇게 살 때 하느님 영광으로 빛나는 아름답고 거룩한 참나의 삶이겠습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과의 일치가 답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미사은총이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하느님은
당신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네.”(1요한4,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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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31. 성탄 팔일 축제 제7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 있음에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요한 1,8)
나 비록
빛은 아니지만
빛 머금은 나
세상을 비추어
빛께서 더욱
빛날 수 있었기를
올해 마지막 날
뒤늦게 바래봅니다
그리하여 새해엔 더욱 더
나 비록
말씀은 아니지만
말씀 품은 나
세상에 울려 퍼져
말씀께서 더욱
말씀하실 수 있었기를
올해 마지막 날
뒤늦게 바래봅니다
그리하여 새해엔 더욱 더
나 비록
생명은 아니지만
생명 깃든 나
세상에 스미어
생명께서 더욱
생명 돋우실 수 있었기를
올해 마지막 날
뒤늦게 바래봅니다
그리하여 새해엔 더욱 더
나 비록
하느님은 아니지만
하느님 모신 나
세상을 보듬어
하느님께서 더욱
하느님이실 수 있었기를
올해 마지막 날
뒤늦게 바래봅니다
그리하여 새해엔 더욱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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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31. 성탄 팔일 축제 제7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요한 1,1)
‘계셨다’와 연결되어 무한을 나타내는 ‘처음’
우리가 타고 있는 배가 해 안 가까이에서 항해할 때는 도시들과 항구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기지만 넓은 바다에 이르면 모두 사라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복음사가도 여기서 우리로 하여금 자기와 함께 피조물의 세계를 넘어서서 끝이 없는 빈 공간을 응시 하게 합니다....
‘한처음’이라는 말에 이르면 지성은 ‘한처음이라니?’ 하고 묻습니다. 자신의 상상력으로는 본문에 나오는 ‘계셨다’ 라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지성은] 생각의 초점을 어디에 맞추어야 할지 알지 못합니다. 열심히 위를 살펴보아도 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할지 모르다가 지친 지성은 결국 아래 에 있는 것들에 눈길을 돌립니다. 실로 ‘한처음에 계셨다’라는 말은 영원하고 무한한 존재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 성인 / 영적 글 묵상✝️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4
하느님이 그대 안에서 하느님 되게 하라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게 우리 가운데 나타났습니다(1요한 4,9)
성서 말씀에서 요한은 우리를 가리켜 “하느님의 자녀”라고 부른다. 엑카르트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 일컬어지려면 살며 사랑하며 일하는 하느님의 방법을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이유 없는, 길 없는 길이다. 이러한 삶과 일만이 기도라고 불릴 수 있을 만큼 강력하다. 그것은 힘이 넘친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유롭기 때문이다.
가장 힘이 넘치는 기도, 만물을 손에 넣을 만큼 가장 강력한 기도, 그리고 가장 일답고 할 만한 일은 무심에서 비롯됩니다. … 무심은 그 무엇에도 구애됨이 없는 마음입니다. 그것은 어떠한 삶의 방식도 우선시하지 않습니다.
...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 해도, 이러한 원천에서 힘을 끌어내지 않으면 그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이유 없이 사는 삶은 선물을 누리되 그것을 넘어서고 그것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하느님은 피조물이 끝나는 곳에서 시작한다.
자기를 여의고 모든 선물을 누리는 법을 배우십시오. 자기의 것이라고 할 만한 것은 무엇이든지 간직하지 마십시오. 이익이든 즐거움이든, 헌신이든, 감미로움이든, 보상이든, 천국이든 아니면 아집이든 간에 어떠한 것도 얻으려 하지 마십시오. 하느님은 자신의 뜻이 아니면 자신을 내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자신의 뜻이 아니면 자신을 내주시지 않으십니다.(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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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요일 성령(성시간)의 날✝️
2. 빙엔의 힐데가르트, 정홍규
힐데가르트와 음악
힐데가르트는 마음에 가장 깊이 다가오는 것들을 설명할 때 늘 푸르름이나 빛의 광채 또한 소리의 울림이란 표현으로 시작한다. 음악은 푸르른 생명의 힘, 창조의 광채와 함께 힐데가르트의 중심되는 주제였다. 그녀는 결코 음악대학에 다닌 적이 없었다. 마인츠의 프렐라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밝혔듯이 힐데가르트는 스스로 예언자로서 작곡해야 할 과제를 받았다고 여겼다. 인간이 자신의 근원을 기억하도록 일깨워주는 것이 예언자의 과제이다. 중세의 음악이론에 따르면 특별히 음악이 여기에 잘 부합된다. 귀로 들을 수 있는 음악, 노래와 악기연주가 인간에게 귀로 들을 수 없는 인간의 음악과 세계의 음악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사실 음악은 모든 것을 신선하게 하고 정화하고 거룩하게 하고 치유하는 영혼의 능력을 일으킨다. 그래서 음악, 멜로디와 리듬은 인류의 오랜 치료방법이기도 했다. 음악은 영혼의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 영적인 치유 과정을 이끄는 감정, 기분, 정서룰 불러일으킨다. 힐데가르트는 음악에서 선한 힘, 슬픔과 걱정, 염려와 분노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그 치유하고 변화되는 힘을 보았다. 그녀는 음악치료의 선구자이다. 음악을 치료 도구로 이해했다.
태초에 ‘말씀’ 이 세상을 창조하셨듯이 하느님은 모든 것 안에 당신의 '살아있는 소리’를 담아 놓으셨다. 음악은 영혼에 울려 평상시 우리가 잊고 있는 이 깊은 곳의 울림, 천상의 고향을 기억하게 한다. 음악과 시의 대모음집 「천상 계시의 조화의 교향곡」은 인간이 “살아있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찾는 데에 도움을 주는 것이다. 힐데가르트에 있어서 영혼의 협주곡인 음악은 근본적인 개념이다. 음악은 치유하고 조화를 이루게 하며 쇄신할 수 있게 한다. 영혼과 마찬가지로 음악은 천상의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지상과 천상을,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울림 안에서 서로 고유의 중심을 향하여 연결되는 원형의 춤을 치유의 방법으로 다시 찾으려는 오늘날 영성의 움직임을 이미 보여주고 돌려주었던 힐데가르트의 비전이 이렇게 눈과 귀로 온 몸과 마음을 울려준다.
“예술은 모두 하느님의 숨결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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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31. 성탄 팔일 축제 제7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비록 부끄러운 지난 삶일지라도 /
박윤식 [big-llight] 241230. 20:01 ㅣNo.178925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였는데, 그것이 곧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 처음에 그렇게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게 그분을 통해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것이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에서 비쳤지만, 어둠은 그를 여전히 깨닫지 못하였다.’ 이렇게 우리 예수님께서는 한 처음부터 계속 계셨는데, 모든 것이 오직 그분을 통해서만 생겼고, 그분 없이 생긴 것은 하나도 없단다.
어쩌면 올해 초, 우리는 참으로 많은 희망을 품었지만, 한 해를 되돌아보면 여전히 아쉽기만 하다. 안타까운 시련이 무던히도 많았지만 그 과정에서 작은 희망도 있었다. 생활 곳곳에서 사랑의 싹들이 점차 자라났기에. 이렇게 우리는 겨자씨와도 같은 ‘그 변화’를 발견하리라. 그래도 작년보다는 올해에 조금이라도 나아진 것이 있었고, 하느님께 다가가려는 나름의 노력이 보였다. 이 작은 게 희망이다. 더 변하려면 무엇을 먼저 생각해야만 할까? 사람의 소중함이다.
이렇게 우리는 아쉬운 시간이 지나가 버린 뒤에야, 그게 비로소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곤 한다. 하느님께서 주신 시간과 맡겨 주신 걸 성실하게 관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한 해의 끝자락에 와서야 이렇게 깨닫는다. 지난 하루하루가 정말 소중했고 만난 이 모두가 진정 귀한 분이었다. 오늘 각 성당에는 송년미사를 봉헌할 게다. 올 한 해의 마지막 미사 봉헌이다.
사실 주님께는 한 해의 마지막 송년이라는 이 말은 정녕 어울리지 않는다. 그분은 지금 오늘 여기뿐만 아니라, 저기와 거기에도 언제나 계시기에. 단지 우리가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만들어 거기에 의미를 부여할 따름이니. 이 해에도 우리에게는 기억조차 싫은 억울한 일이 참 많았다. 이제는 다 내려놓고 새로운 한 해를 준비해 보자. 그것이 빛이신 그분 따르는 길이다.
그분을 따르면 우리가 모르는 새에 밝은 기운이 깃든다. 그리하여 거침없이 빛의 길을 걸어가게 한다. 이제껏 정말 어려운 일, 탈도 많았던 다사다난(多事多難)의 한 해가 저문다. 이 해를 살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이, 또 얼마나 자주 그분 말씀을 거역하고 자신만을 내세웠는지? 세상 권력이나 명예, 금전 따위의 욕심 등은 주님등지고 우상숭배에 빠졌다는 증거일 게다. 그 잘난 지나친 욕심으로 생명을 경시하였고, 환경 파괴로 자주 주님 마음 아프게 해 드렸으리라.
거듭 반성하지만, 올 한 해는 하느님께 바칠 수 있는 예쁜 알곡 같은 날들도 여럿 있었지만, 꼭 치워야 할 시든 풀 같은 날들도 분명 있었다. 하느님 앞에서 신나게 노래 부른 날들도 있었지만, 하느님을 잊고는 원망하고 그분 피해 가며 살았던 나날도 종종 기억나곤 한다. 살아온 소중한 날을 되돌아보며, 그 안에 함께 계셨던 그분께 감사드리는 하루하루가 되었으면 한다.
사실 우리는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 그러기에 한 해 주님께서 허락해 주신 시간에 대해 감사드리는 마음을 가지자. 주님께서는 저마다의 필요에 따라 당신이 원하셨던 은총을 주셨다. 무엇보다 주님에게서 받은 가장 큰 선물은 그분 자신일 게다. 올해 주님에게서 받은 모든 은총은 내년에 더 받을 은총을 준비하는 것이리라. 한 해의 마지막에 제대로 깨끗이 마무리된 것 보다는, 여전히 숙제로 남는 게 더 많다. 부끄러운 지난 삶일지라도 상처에 새살이 돋듯, 그분께서는 오는 새해도 여전히 새 기운을 담뿍 넣어 주실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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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31. 성탄 팔일 축제 제7일.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부임 첫 본당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새해 첫날 이른 새벽에 사제관에 전화가 왔습니다.
본당 총회장님이었습니다.
“신부님, 이른 아침부터 죄송해요. 저희가 성전에 모여 있는데, 잠깐 오셔서 강복 좀 주실 수 있나요?”
성전에 들어가 보니, 몇몇 교우들이 성체 조배를 하고 있었습니다.
“새벽부터 웬일이세요?” “
신부님, 다른 사람들은 일출 보러 바다로 산으로 떠났는데, 저희는 예수님 만나고 싶어서 왔어요.”
참된 믿음은 하느님의 은총과 생명이 어디에 있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4).
말씀이신 예수님 안에 우리의 생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1,16)라는 복음 말씀처럼,
그분께서는 은총의 샘이십니다.
그러나 사목 현장에서 만난 교우들 가운데에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은총보다 다른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더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거룩하신 분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1요한 2,20).
제1독서의 이 말씀처럼 우리는 또한 예수님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 은총과 생명, 구원의 빛이 있다는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
언제까지나 이 진리를 지키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한 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그동안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드리며, 좋았던 모습도 그러지 못하였던 모습도 모두 그분께 봉헌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다가오는 새해에도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 안에서 영적인 생명을 얻어 나가는 신앙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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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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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31. 성탄 팔일 축제 제7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요한복음은 하느님이신 말씀을 말하고
그 말씀이 사람들의 빛이었음을 말합니다.
그 빛을 설명하면서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으며
모든 사람을 비춘다고 말합니다.
우선 두 동사의 시제를 보면
현재형입니다.
그리스어에서 현재형은 여러 의미를 담고 있는데
그 가운데 변하지 않는 사실을 말할 때에도
현재형을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 지구가 둥글다로 할 때
지구는 어제도 둥글었고
오늘도 둥글고
내일도 둥글 것을 말합니다.
한처음부터 있었던 빛은
지금도 비치고 있고
앞으로도 그 빛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두 번째 특징은
'모든'입니다.
그 빛은 특정한 누구만 비추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비춥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모든 사람은 빛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생물학적으로도 태양이 없으면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
또한 영적으로도 우리가 살아가는데
빛이신 하느님께서 필요함을 복음은 말합니다.
빛이 필요함을 알고 계시기에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빛을 비추어 주십니다.
이것은 이어지는 구절을 보면
그 빛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도 해당됩니다.
복음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는 이들이 있었음을 말합니다.
끊임없이 빛나는 빛이 모든 사람을 비춥니다.
그 빛은 우리가 빛을 받아들이던 거부하던
우리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빛을 받을 자격이 있던 없던
편견을 갖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가 빛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만이
빛이 우리를 향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를 향하는 빛이 우리를 판단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을 판단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우리 안에 빛이 없음을
빛이 부족함을 볼 수 있고
알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우리가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 빛은 언제까지나 우리를 비출 것이고
우리를 빛으로 채워줄 것입니다.
우리에게 빛을 주시기 위해서
하느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 오셨습니다.
아기를 받아 품에 안는 것처럼
그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그 빛을 받아들여
기쁨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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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31. 성탄 팔일 축제 제7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요한 1, 9)
2024년은
특별한
한 해였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사람의 본분을
다시 배우는
가치있는
한 해였습니다.
가장 쉽고도
평범한 상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을 때
우리는 하늘의
빛을 갈망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밀어낼 수 없는
하늘의 빛이
세상에
왔습니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빛은
우리의
본모습을
찾게 합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오늘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참빛은
서두르지
않습니다.
사람을 향한
사랑의 참빛은
사람을 진정
사랑하는 길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머리가 아닌
마음을 키우지
못한
우리들입니다.
뜨거운 마음을
태우며 사랑은
어둠을 비추는
빛이 됩니다.
세월의 발걸음은
차갑지 않아야
합니다.
2024년을 주신
하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얽매임과
사로잡힘이
아닌
평화의 빛을
믿기에
우리 안에
피어나는
많은 감정들을
하느님께
내려놓습니다.
더 좋은 세상
더 좋은
사람들이
많아지고
그래서
더욱 빛나는
은총의
2025년이 되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2024년의 고통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이
아닌 더 한층
성장하는
2025년의
참빛이 되길
희망합니다.
서툰 묵상이지만
제 마음을
받아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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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31. 성탄 팔일 축제 제7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충만하신 하느님 앞에 우리는 얼마나 옹색한 존재인지요?
우리 모두 또다시 한해의 끝자락에 서 있습니다.
올 한해를 돌아보니 즉시 떠오르는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다사다난(多事多難)!
이 정도 선에서 올해가 마무리되나 싶었는데, 설상가상이라고 제주 항공 여객기 참사가 우리 모두를 깊은 슬픔에 잠기게 했습니다.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하는 탄식이 절로 입에서 터져 나옵니다.
순식간에 수많은 소중한 생명을 앗아간 초대형 참사를 바라보며 너무나 안타깝고 안쓰러워 할 말을 잊습니다.
그 많은 꿈과 희망, 애틋한 사연들, 못다한 이야기들이 순식간에 산산조각 나버렸습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이번 참사로 세상을 떠난 희생자 한분 한분을 당신의 크고 따뜻한 품에
꼭 안아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저리 황망히 떠나보내고 깊은 슬픔에 잠겨 있는 유가족 한분 한분을 따뜻이 어루만져주시기를 청합니다.
대형 참사를 접할 때마다 온몸과 마음으로 체득하게 됩니다.
우리 인간이 아무리 난다긴다할지라도, 정말이지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것 실감합니다.
우리네 인생 일장춘몽이라는 것, 그래서 하루하루에 감사하며, 매일 매일을 마지막으로 여기며, 충만한 하루를 살아내야겠다고 다짐합니다.
갖은 우여곡절 속에 살아온 한해였지만, 돌아보니 지나온 한해, 비록 실패와 상처투성이, 죄와 십자가의 연속인 우리네 삶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 좋으신 주님으로부터 은총에 은총을 폭포수처럼 받았습니다.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요한 1,16)
‘충만(充滿)함’이란 표현이 제 마음을 크게 요동치게 만듭니다.
하느님의 본성 중에 우세한 측면이 충만함입니다.
충만함이란? 풍성함, 넉넉함, 완전함, 너그러움...참 다양한 함의(含意)를 포함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에 비해 우리는 얼마나 옹색한 존재인지요?
얼마나 빈약하고 비천한지요?
얼마나 약하고 불완전한지요?
이런 우리의 불완전함을 메꿔주기 위해서 아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언제나 부족해서 허덕이는 우리이기에 너무나도 당연히, 완전하고 충만하신 그분께로 나아가야하겠습니다.
충만하신 그분께로 나아가서 풍요로우신 그분으로부터 에너지를 충전시켜야겠습니다.
백만 볼트 에너지로 가득 충전시킨 후에, 세상과 가난한 이웃들을 향해 나아가야겠습니다.
가끔씩 완전 방전된 밧데리 상태의 제 영혼을 확인하곤 합니다.
내 한 몸 서 있기에도 벅찬 순간에는 영적 생활이고 이웃사랑의 실천이고 무의미할 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틈만 나면 충만하신 하느님께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방전된 우리의 플러그를 초강력 에너지원이신 하느님이란 전원에 꼽아야겠습니다.
그것이 기도 생활이요 영적 생활입니다.
우리가 매일 스마트폰 충전 상태를 확인하듯이, 매일 우리의 영적 충전 상태를 확인해야겠습니다.
이틀에 한 번 사흘에 한 번 충전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가 매일 스마트폰 바라보듯이, 매일 영적 충전을 위해 그분께로 나아가야겠습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충만 그 자체이신 하느님, 부유하고 풍성하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충만함을 빈약한 우리를 위해 무모할 정도로 헤프게 사용하시는, 아니 남김없이 모두 써 버리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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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31. 성탄 팔일 축제 제7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모든 것이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다
오늘 복음에서 사도 요한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1.3-4) 여기서 그분이 바로 “말씀”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자면 말을 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다. 말이란 자기 생각과 마음과 의지, 즉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모든 것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그뿐 아니라, 말에 있어서, 그 말에 참으로 진실성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도 문제가 된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감사드릴 수 있는 것은 말을 들을 수 있고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말이란 서로를 이어주고 서로의 뜻을 나눌 수 있는 고마운 수단이다. 우리 사이에 주고받는 말의 역할이 그러하다면, 바로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그러한 역할을 해주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이 요한의 소개이다. 즉 하느님의 말씀이신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기에 우리는 그 말씀을 믿고 따르며 아버지께로 갈 수 있으며 친교를 맺을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당신의 아들이 말씀 자체로서 이 세상에 오셨고 하느님의 뜻을 모두 알려주셨다. 그러므로 말씀으로 오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의 뜻을 알게 되었다. 이 하느님의 말씀은 한 점, 한 획도 그르침 없이 다 이루어진다는 진리 앞에, 그 말씀 앞에 숙연하여지도록 하자. 또 생활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뿐 아니라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하느님께 감사드리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닮은 말을 할 수 있어야 하겠다. 이러한 삶을 새해에는 살아가도록 결심하며 모든 것을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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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31. 성탄 팔일 축제 제7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나는 절대 죽지 않아. 한 말씀만 있으면.
오늘 복음은 로고스 찬가입니다.
로고스는 말씀입니다.
말씀은 생명이고 빛이십니다.
말씀이 어떻게 생명이 될까요? 인간에게 있어서 말씀은 곧 생명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아는 이들은 말씀을 갈망합니다.
‘책도둑’은 나치 독일의 암울한 시대 속에서도 인간성이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지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합니다.
주인공 리젤은 글을 읽을 줄 몰랐지만, 자신의 삶에 들어온 ‘말씀’을 통해 글을 배우고, 이를 통해 인간의 존엄성을 지켰습니다.
당시 독일은 자신들의 잔인한 폭정에 반대하는 책들은 다 불태웠습니다.
부모님과 남동생을 잃은 리첼은 그래도 인간성을 지키고 싶었습니다.
그 방법은 책을 읽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글을 배우고 불타다가 남은 책들을 주워 읽습니다.
그가 글을 배우고 읽고 쓰는 작은 지하실은 독일에 남은 작은 인간성이었습니다.
그녀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곳에 유대인을 숨겨주며, 훔친 책들을 읽고 글을 쓰며 자신의 정신과 영혼을 성장시켰습니다.
어느 날 폭격으로 인해 마을의 대부분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파괴된 순간에도 그녀는 살아남습니다.
그 작은 지하실에서 글을 쓰다 잠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상징적으로 잔인한 환경 속에서도 인간성을 지키기 위해 말씀으로 양식을 삼으면 결국 인간성을 지켜낼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요한 1장 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리젤의 이야기는 암흑 속에서도 빛으로 존재하시는 말씀의 생명을 보여줍니다.
말씀은 그녀의 삶을 보호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가 고난 속에서도 자기 생명과 같은 사랑과 희망을 품게 했습니다.
버락 오바마와 오프라 윈프리의 가장 위대한 멘토가 되었던 흑인 여인이 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마야 안젤루입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 큰 고난과 차별 속에서 자랐지만, 자신의 목소리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글과 시는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나는 왜 새장에 갇힌 새가 노래하는지 안다’라는 그녀의 시는 자유를 갈망하며 억압 속에서도
살아가는 인간의 영혼을 노래합니다.
마야 안젤루의 말은 전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대통령 취임 연설에서 “우리는 말과 행동으로 희망을 전파해야 합니다.”라고 말하며, 마야 안젤루의 영향력을 간접적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녀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이가 어떻게 강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사야서 40장 31절의 말씀처럼, “주님을 바라는 이는 새의 날개처럼 힘을 얻는다.”라는 구절이
그녀의 삶에 잘 들어맞습니다.
마야 안젤루의 말에는 피가 묻어있습니다.
그녀가 하는 말은 수많은 역경을 거쳐오며 깨달은
내용들이기 때문입니다.
오프라 윈프리는 그녀가 “너는 네가 믿는대로 될 것이다.”라는 말을 받아들여 믿음을 키웠고 그렇게 되었습니다.
말씀은 오프라 윈프리를 절망에서 구해주었습니다.
제 개인적인 경험에서도 말씀은 제 삶을 변화시키는 힘이었습니다.
한 번은 성체를 영하면서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 말씀은 제 삶의 방향을 사제로서의 길로 확실히 정했습니다.
사제직의 여정에서 때때로 어려움이 있었지만,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는 동안 저는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자신이 있음을 느낍니다.
이는 시편 119편 105절에 나오는 “당신의 말씀은 제 발의 등불, 제 길의 빛이옵니다.’ 라는 고백을 체험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말씀은 우리를 어둠 속에서도 빛으로 이끄는 생명의 원천입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처럼,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라는 진리는 지금도 살아있습니다.
이를 믿고 말씀 안에 머물러 있을 때, 우리는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말씀이 생명이고 우리와 함께 있다고 믿으면 우리는 말씀을 듣고 깨달으려고 노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한 말씀은 나의 모든 고통을 치유해 줄 힘이 있습니다.
그러니 매일 말씀으로 나의 길을 닦는다면,
“난 결코 쓰러지거나 죽지 않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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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31. 성탄 팔일 축제 제7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인간은 시간의 주인이신 하느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요한 1,1-5.9-14).”
1) 지나가는 시간도, 다가오는 시간도, 인간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다가오는 시간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오만한 사람도 있습니다.
두 경우 다 하느님이 ‘시간의 주인’이시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우리는 ‘시간의 주인’이신 ‘하느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알파요 오메가’이신 분입니다(묵시 1,8).
시작하는 것도, 마치는 것도 전부 다 하느님의 권한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 이제, ‘오늘이나 내일 어느 어느 고을에 가서
일 년 동안 그곳에서 지내며 장사를 하여 돈을 벌겠다.’ 하고 말하는 여러분! 그렇지만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허세를 부리며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입니다(야고 4,13-16).”
“내일 일을 알지 못한다.” 라는 말은, ‘내일’이라는
시간에 대해서 아무 권한이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내일’이 나에게 주어질지, ‘내일’에도 내가 살아 있을지, 그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내년’이라는 시간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이다.” 라는 말은, 인간이란 정말로 보잘것없는(아무것도 아닌) 존재일 뿐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의 인생은 참으로 허무합니다.
영원하신 주님과 함께하는 인생이 아니라면......
2) “주님께서 원하시면”이라는 말에는 “주님께서
허락하시면”이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을 계획하거나 시작할 때, 그 일을 주님께서 허락하시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어떤 계시를 받아서 명시적으로 허락을 받는 경우가 더러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또 우리 입장에서는 “주님의 뜻에 합당한 일인가?”를 판단하는 것이 그 방법입니다.
주님의 뜻에 합당한 ‘선한 일’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면, 그 일은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일이라고 믿을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확신하는 경우라도, 결과는 전적으로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3) 바벨탑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창세 11,1-9).
하느님께서는 처음에는 인간들이 탑을 쌓는 것을 내버려 두셨는데, 그것은 인간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회개할 시간을 주신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바벨탑을 쌓는 것을 막고 사람들을 흩어 버리신 것은, 사람들이 한창 공사를 하고 있을 때입니다.
<거의 완성 단계까지 간 것을 하느님께서 허물어
버리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은, 또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은 것은, 바벨탑처럼 허망하게 무너집니다.
건물뿐만 아니라, 인간들이 자랑하는 업적들 전부 다,
세속의 불의한 권력들도, 부정하게 모은 재물들도......
그런 것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죄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파괴된 것도 바벨탑의 경우와 같습니다(마태 24,1-2).>
4) 자신의 인생을 ‘바벨탑을 쌓는 것처럼 사는’ 사람은 정말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지금 내 마음속에 있는 ‘바람’은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선한 희망’인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악한 욕망’인가?
<세속에서의 성공과 출세를 바라는 이들이 많은데, 그것이 이기적인 욕심이라면 ‘선한 희망’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헛된 바벨탑을 쌓는 ‘악한 욕망’일 뿐입니다.>
시간의 주인이신 하느님 앞에서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는 태도는, 만물의 주님이신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은총에 감사드리는 태도로 이어집니다.
진정한 감사는 참된 겸손과 하나입니다.
갖고 싶은 것을 다 가지고, 누리고 싶은 것을 다 누리는 사람들의 경우에, 말로는 하느님께 감사드린다고 하면서도 잘난 체 하고 교만하다면, 그리고 ‘작은 이들’을 무시하고 업신여긴다면, 하느님께 감사드린다는 그 사람의 말은 ‘빈말’이고 ‘위선’입니다.
루카복음 18장 9절-14절에 나오는 바리사이가
바로 그런 위선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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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31. 성탄 팔일 축제 제7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요한 1,1-18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어느 덧 2024년도 그 마지막 날에 접어들었습니다. 올 한 해는 그 어느 때보다 정말 다사다난했지요. 한 해를 보내고 새로운 한 해로 넘어가는 분기점에 선 우리는 오늘 독서에서는 ‘마지막 날’에 대한 말씀을, 그리고 복음에서는 ‘한 처음’에 대한 말씀을 봉독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시작이시요 마침이신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앞에서 끌어주시고 뒤에서 밀어주신 덕분임을 되새기기 위함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에 사셨습니다. 하느님이 이 세상에 그냥 오신 게 아니라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어 오셨고, 잠시 들렀다가 가시는 게 아니라 우리 가운데에 거처를 마련하시고 함께 사신다는 뜻입니다. 즉 우리가 한 해 동안 보내는 모든 시간은 그 1분 1초 모두가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며 섭리하신 순간들입니다. 우리를 참된 행복과 구원으로 이끄시기 위해 쉼 없이 일하신 하느님의 노고가 쌓여 만들어진 365일인 것이지요. 그리고 하느님은 내년에도 365일 내내 우리와 함께 하시며 당신 섭리 안에서 우리를 위해 계획하신 당신 뜻을 이루어가실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새로 맞이하게 될 한 해를 의미있고 보람차게 보내는 방법은 자명합니다. 우리를 진리로 이끌어 주시는 주님의 빛을 따라 우직하게 걷는 것입니다. 매순간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발을 디디고 살 수 밖에 없는 처지라고 하더라도 세상에 속한 사람으로 살지 말고 하느님께 속한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지난 한 해를 돌이켜보면 우리는 매 순간 하느님의 은총 안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수많은 일들 중 어느 것 하나도 은총 아닌 게 없었다는 뜻입니다. 괴로움은 괴로움대로 주님의 고통을 함께 느끼며 그분과 깊이 일치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기쁨은 기쁨대로 그분께서 베푸신 은총과 사랑에 감사드리며 내가 얼마나 복된 존재인지를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좋은 것도 싫은 것도 다 내 감정의 기복 때문에 오락가락 한 것이지, 주님께서는 언제나 한결 같이 내 곁에서 함께 계시면서 나를 올바른 길로, 나에게 가장 좋은 쪽으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하고 사라지는 세속의 것들은 우리를 참된 행복으로 이끌지 못합니다. 당신 뜻을 모두 내려놓고 아버지의 뜻이 자신을 통해 이루어지길 바라셨던 주님처럼, 우리도 욕심과 집착, 고집을 내려놓고 하느님 뜻을 충실하게 실천하며 살아갈 때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이 되고 그분께서 베풀어주시는 은총 덕분에 충만한 기쁨을 누립니다. 그리고 그 기쁨 속에서 하느님을 닮은 거룩한 존재로 조금씩 변화되어 가다가 완성에 이르지요. 새로운 한 해가 나에게 그런 시간이 되길 기도하면서, 아쉽지만 2024년과는 이만 작별해야겠습니다. 그리고 믿음과 희망으로, 감사와 찬미로 새로운 2025년을 시작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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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31. 성탄 팔일 축제 제7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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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31. 성탄 팔일 축제 제7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생명과 빛이신 말씀을 품음
한해의 마지막 날 우리는 영원으로 초대하는 요한복음의 시작을 듣는다. 요한복음의 머리말은 로고스의 선재와 강생, 창조와 구원행위 등을 언급하고 있다. 이는 요한복음의 전체 내용을 알아차리도록 이끌어주는 핵심어 역할을 한다. 요한은 예수님의 족보를 전한 공관 복음사가들과는 달리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아버지 안에서 이루어진 영원한 탄생을 서술하고 있다. ‘말씀’은 창조되지 않고 이미 영원 속에 절대적으로 계셨고(반과거형), 하느님과 함께 계셨으며, 아버지와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하느님이셨다(1,1). 여기서 말하는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이나 예수님의 말씀과는 구별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전인격을 가리킨다.
세상 창조는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다. 이렇듯 ‘말씀’이 하느님의 창조행위에 동참하였으므로 모든 창조 활동은 성부와 성자의 공동행위이다(1코린 8,6). 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1,3-4). ‘말씀’은 모든 것의 원천으로서 우리가 충만한 삶을 살아가도록 이끌어주신다. 아울러 말씀은 인간이 걸어가야 할 참된 길을 가리켜주는 ‘빛’이시다(8,12).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 하면서 자신을 따라오는 이들은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8,12).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으나 어둠 속에 살아가는 이들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고 깨닫지 못하였다(1,5). 여기서 ‘깨닫다’는 과거형인데 ‘비치다’는 현재형으로 쓰였다. 이는 과거에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1,14)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배척했으나 ‘빛’은 지금도 여전히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3,19) 인간을 비추고 있음을 뜻한다. ‘어둠’은 하느님을 거부한 세상, 하느님의 빛으로 비추어지지 않은 세상을 가리킨다. 사실 영혼의 어둠으로 타락하고 눈먼 인간 자신이 곧 ‘어둠’이다.
말씀이신 예수님은 참빛이시고(1,9) 충만하신 분이셨으나(1,16)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1,10), ‘맞아들이지 않았다.’(1,11)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빛이 아니지만 ‘빛을 증언하러 왔으며’(1,8),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음을 알려주었다(1,16).
오늘의 말씀에 비추어 우리 삶을 돌아보자! 성탄 시기의 핵심 영성인 교환의 신비를 통하여 우리는 모든 것을 거저주신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창조 이전부터 영원성을 띠고 존재하신 말씀이신 예수님의 전인격이 매순간의 나의 삶에서 드러나는가? 혹시 나는 뿌리도 없고 가야 할 방향도 모르면서 세상의 어둠이 주는 ‘어둠’에 맛들이며 헛되고 헛된 것을 좇고 있지는 않은가?
모든 것이 말씀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생겨났다면 나도 나의 삶을 통하여 모든 창조의 근원인 예수님의 창조행위에 동참하여야 하지 않을까? 왜 우리는 어둠을 비추는 빛을 알아보지도 맞아들이지도 못한 채 스스로 ‘어둠’인 채 서성대는 것인가? 이 성탄시기에 사람이 되어 오신 말씀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주어진 은총과 진리에 감사하며 빛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한해의 마지막 날 물리적 시간의 끝에서 아쉬워 하기보다 창조 이전부터 영원히 계시는 그분을 더 그리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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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31. 성탄 팔일 축제 제7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마지막 날인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받다"는 말씀이 줄곧 다가오십니다. 이 말씀에 비추어 지난 한해와 각자의 온 생애를 돌아보는 것도 참 좋을 듯합니다.
먼저 복음사가는 세상의 주인이신 분이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11)고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린다고 하면서도, 정작 오셨을 때는 과연 자기들이 내세우는 조건에 부합하는지를 따지느라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지요. 당신께서 사랑하신 백성에게 거부당하신 하느님의 마음이 아리게 느껴집니다. 이 구절에는 하느님의 상처가, 그 통증이 서려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요한 1,12).
주님께서 아무리 엄청난 축복을 지니고 오셔서 이를 나눠주려고 하셔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이들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십니다.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이들을 일부러 제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적극적으로 피하기 때문이지요.
그분은 결코 사랑을 억지로 떠안겨서라도 받아들이게 강압을 행사하시지 않습니다. 당신이 선물하신, 너무도 고귀하고 아름다운 '자유의지'를 순결히 지켜주고 싶으시니까요.
그러니 주님 편에서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이들"이 얼마나 고맙고 기특하시겠습니까! 마치 타인이 우리의 진심을 제대로 알아들어 줄 때 느끼는 흡족함, 고마움, 대견함, 뿌듯함 등과 감히 비교해 봅니다.
그렇게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받습니다. 아버지 없이 자녀는 없지요. 아버지를 인정하니 자녀로 인정해 주십니다. 작고 보잘것없고 죄인이기까지 한 우리 능력으로는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 우리 존재에 생깁니다. 하느님 자녀라는 어마어마한 자리를 꿰어차기까지 우리가 한 공로라고는 "받아들임과 믿음" 뿐입니다.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요한 1,16).
하느님 자녀 되는 권한에 더하여 우리는 또 "은총에 은총"을 받았습니다. 더할 나위 없이 풍성한 최상의 은총, 각자에게 꼭 필요한 은총을 뜻합니다.
은총은 우리가 고를 수 없고 하느님에게서 강탈하거나 훔칠 수 없습니다. 오로지 그분께서 주시길 기다려야 합니다. 은총 수여의 주도권은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가장 잘 아시는 아버지 하느님께 있으니까요.
제1독서인 요한 서간의 저자도 우리가 받은 것을 상기시킵니다.
"여러분은 거룩하신 분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1요한 2,20).
이 말씀이 얼마나 대담한 선언인지요! 성경에서 보면 임금이나 예언자, 선지자들에게 기름부음이 이루어집니다. "기름부음받은자"는 그대로 메시아를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쓰이니 이 말씀의 무게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위임 받은 대리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거룩하신 분"께 직접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하면서 우리의 위상이 얼마나 고귀한지 강조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제도 안에서 직무로서가 아니라, 각자가 받은 소명에 따라 그리스도의 사제직, 왕직, 예언직에 참여합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모든 믿는 이들은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통해 거룩한 사제직으로 축성된 것이지요.
"그래서 여러분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1요한 2,20).
서간 저자의 대담성이 한층 더 증폭됩니다. 무지하고 부정하며 우매한 우리가 "모두 알고" 있다니요! 우리가 감히 주님의 모든 진리를, 진리이신 주님을 어찌 다 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앎은 사랑입니다. 얕은 지식이나 정보, 꾀가 아니라, 진심으로 사랑하면 깨닫는 바가, 아는 바가 생깁니다. 어떻게 앎이 생기는지 딱히 설명하기 어려워도 앎이 "있게" 됩니다. 그 아는 바가 "모두"에 이르려면 단 한 번의 사랑, 단 한 번의 일치로써가 아니라 영원으로 이어질 때까지 반복적이며 성실한 과정이 필요하지요. 죽는 날까지 항구하고 지난한 "받아들임과 믿음"의 노력말입니다.
받아들임은 주님 앞에 우리 존재를 입구가 널찍한 그릇처럼 둥그렇게 펼쳐 그분께서 우리에게 들어오시도록 허용하는 것입니다. 용어가 무슨 전쟁 용어처럼 좀 과격해집니다만, 그분이 우리 존재에 "침투"하시도록, "엄습"하시고 "점령"하시도록 과감하고 담대하게, 자유롭고 관대하게 존재를 활짝 열어젖히는 것이지요. 그 다음은 그분이 하실 것입니다.
인간과 하느님 사이에 받아들임과 받아들여짐은 합일과 일치의 신비입니다. 하느님의 자녀이고 그리스도의 신부이며 기름부음받아 거룩해진 우리에게 쏟아부어진 은총입니다.
지난 한 해, 아니, 우리가 긴 인생 여정을 거쳐 오늘 여기에 있기까지 그분께서 주시고 우리가 받은 무수한 사랑과 은총을 헤아리며 감사하는 올해의 끝날 되시길 바랍니다. 이 감사의 여정에 동무되어 주신 벗님께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한해 동안 수고많으셨습니다.
"나날이 선포하여라, 그분의 구원을"(화답송).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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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31. 성탄 팔일 축제 제7일.
능력과 찬송과 구원의 하나님을 선포하는 삶
<2024.12.31> 아침을 여는 묵상 (시 118:14~29절)
❝능력과 찬송과 구원의 하나님을 선포하는 삶❞
❚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라면 그분이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선포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 우리는 무엇을 선포해야 합니까?
➲ 하나님의 능력과 행사를 선포해야 합니다(14~20절).
과거 극심한 환난 속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을 회상한 시인은 이제 구원의 하나님을 힘있게 찬양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능력과 찬송이시요 또 나의 구원이 되셨도다...”(14절). 출애굽을 경험한 모세의 찬송(출 15:2)을 연상케 합니다. 절박한 위기 상황 가운데 있는 종들을 능력으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그들의 ‘찬송’이 되실 수밖에 없습니다. 시인은 의인의 장막에서 기쁜 소리, 곧 구원의 소리가 난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셨기 때문입니다(15~16절). 모진 고난 속에서도 살아남은 시인은 앞으로도 결코 죽지 않을 것이며, 여호와께서 하신 일을 선포할 것이라고 결심합니다(17절). 참고로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시편 118편 중에 17절을 삶에서 생생하게 경험했다고 했습니다. 개혁 운동은 그를 계속 위험에 처하게 했지만, 그는 17절을 통해 용기를 얻고 생명에 대한 약속을 확신했다고 했습니다. 시인은 여호와의 행사를 세상에 선포해야 하는 사명을 지니고 있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결코 자신의 목숨을 죽음에게 내어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고백(18절)합니다. 사망의 문턱에서 구원함을 받은 시인은 ‘의의 문’ 곧 성전으로 들어가 여호와께 감사할 것(19~20절)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친히 우리의 삶에 개입하셔서 승리가 있는 삶으로 인도해 가십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에는 기쁜 소리, 구원의 소리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능력과 행사를 경험한 자라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선포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힘깨나 있고, 자랑하는 자들을 신뢰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므로 우리 인생에서 참다운 구원의 기쁨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기이한 행사를 세상에 전하고 선포하는 일에 우선순위에 두는 삶이어야 합니다. 설령 고통 중에 우리 자신이 처해 있다 할지라도 간절히 기도함으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구원의 은혜를 베푸실 하나님을 기대하며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의의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을 주변에 전하고 선포하는 참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의 구원과 섭리를 선포해야 합니다(21~25절).
시인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박해를 받았지만 하나님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영예롭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시인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21절). 시인은 건축자들에 의해 쓸모 없다고 버려진 돌이 새 집을 지을 때 모퉁잇돌이 된 것처럼 자신 역시도 이제 하나님을 찬양하며 구원 사역을 널리 전파하는 귀한 도구가 되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22절). ‘머릿돌’은 건물의 기초를 이루며 건물의 모든 기초를 하나로 묶어 주는 중요한 돌입니다. 신약에서는 메시아를 암시하는 단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러한 반전의 역사는 사람이 한 일이 아니요, 하나님이 하신 일이며 기이한 것이라고 말합니다(23절). 이제 시인은 구원의 기쁨을 표출합니다(24절). “...이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이날’은 이스라엘이 애굽에 구원받은 날은 물론, 그들의 역사 가운데 행하신 수많은 구원의 날을 상기시키며, 바벨론으로부터 돌아온 날,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구원받은 날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과거에 구원의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 시인은 다시 구원을 요청합니다(25절).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전심으로 구하는 자들에게 역사하셔서 그의 길을 형통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어디에 가든지 형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비록 세상 사람들은 믿는 우리를 배척하고 버렸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셔서 하나님 나라의 귀중한 일꾼으로 삼으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눈에 미련해 보이는 십자가, 저주의 상징이었던 십자가를 통해 인류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이처럼 참으로 놀라운 섭리를 보여주신 하나님을 주변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우리의 삶이어야 합니다. 날마다 반전의 역사를 만들어가고 계시는 하나님을 널리 전파하는 귀한 도구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을 택하셔서 그분의 놀라운 일에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의 구원과 섭리를 만방에 선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의 축복과 승리를 선포해야 합니다(26~29절).
시인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는 복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26절).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는 아마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자 성전에 모인 백성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축복의 주체는 제사장이며, 축복의 대상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성전에 모인 무리들입니다. 즉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작정한 무리들은 하나님의 종을 통하여 형통의 복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라...’ 왜냐하면 그분은 구원의 빛을 우리에게 비추셨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시인은 주는 선하시며 그분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심을 감사하며 찬양을 드릴 것을 다짐합니다(28~29절).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어둠에 있던 우리에게 생명의 빛을 비추셨습니다. 죄악의 사슬에 꽁꽁 묶여 있었던 우리를 사슬에서 풀어 자유를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택함 받아 구원받은 우리는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배하고, 하나님을 구원자로 고백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이름을 높이고 찬양하는 자들을 지속적으로 보호하시고 도우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선하시며 인자하신 하나님이 2025년 한 해에도 함께하기를 소망합니다. 날마다 매 순간 우리의 삶 가운데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축복과 궁극적인 승리를 선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능력과 행사를 경험한 사람답게 우리를 도우시고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을 전하고 선포하는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고,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통해 영적 풍요로움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를(시 118:14~29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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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올 한 해 동안도
“아침을 여는 묵상”과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년에도 변함없이 말씀을 통한 영적 풍요로움을 더 맘껏...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한 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하나님을 섬기는 교회 공동체에 하나님이 영원토록 함께하사
부흥과 형통케 하는 축복이 있기를...
그리고 교회 공동체의 모든 리더십들에게 평강과 위로와
하늘의 권능이 임하는 사역이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그리고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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