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가 망한 이유는 전체 인구대비 노예의 수가 너무나 많았던 때문이다. 즉 로마는 노예제 경제로 인해 멸망한 것이다. 모든 생산과 직결된 경제활동은 노예를 부리는 것으로 해결할 수도 있다. 그러나 노예에게 맡길 수 없는 것이 한가지 있다. 그것이 바로 나라를 지키는 일이다. 노예에게 족쇄를 채우고 재갈을 물려서 마소와 같이 들판에서 일을 시킬 수는 있고, 산을 깎아 평지를 만들 수는 있어도 노예에게 칼과 방패를 들려 전장터로 내몰 수는 없다. 노동과 달리 전투는 애국심이 없으면 할 수 없는 것이고, 자기의 목숨보다 더 가치로운 것이 있어서 죽음으로서 지켜야 할 것이 없는 사람은 결코 군인이 될 수 없다. 그래서 노예는 콜롯세움의 그라디에이터는 될 수 있어도 전장터의 워리어는 되지 못한다.
로마는 자유민의 수가 부족하여 징집할 수 있는 인적자원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나라의 방위를 용병으로 충당하여야 했다. 심지어 황제를 보호하는 근위대조차도 이민족의 용병들로 채워졌다. 결국 용병들은 수틀리면 반란을 일으키고 황제를 갈아치웠고 로마는 쇠락하여 멸망했다. 로마를 지킬 자유민이 줄어든 필연적인 결과였다.
한일합방 직전의 조선이 멸망 전의 로마와 같았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말기의 조선을 노비국가로 보는데 이견이 없다. 당시 조선인의 절반 이상이 노비였고, 나머지 절반의 반 이상이 사실상의 노비였다. 조선이라는 국가는 극소수의 양반과 지주들에게만 지킬 가치가 있는 나라였지 다수의 인민들에게는 별 애착이 없는 습관에 지나지 않았다. 일본에 넘어가던 청국에 팔리던 다수 대중에게는 별반 감흥이 없었다. 그래서 망국의 울분에 분개했던 사람들은 소수의 기득권층이었지 일반 민중은 아니었다. 오히려 조선의 일반 민중에게 일본은 해방자나 마찬가지였다.
고려가 요나라와 몽고와 싸울 때의 기록에 의하면 동원 가능한 병력수가 50만명을 넘었다. 그보다 천년전인 고구려 때만 해도 십만, 이십만 병력은 예사로 동원했다. 그런데 임진왜란 직전에는 10만 양병도 꿈같은 일이었고, 철종, 고종 때 접어들면 1만명의 군대도 모집할 방법이 요원했다. 로마보다 더 한심했던 것은 로마는 모든 로마시민이 로마군단에 징집되었지만, 조선은 양반들을 군역에서 제외시켰다. 징집은 양민들만 대상이었는데 그 양민의 수가 격감해서 조선 말기에는 전 인구가 양반 아니면 노비의 두 가지 뿐이었다. 극소수의 양민은 경제력이 없는 난민들이나 마찬가지였고 대부분이 소작으로 연명하고 있었다. 군적에 올릴 사람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조선시대의 노비들은 인간이 아니라 마소와 같은 동물이었고 사유재산이었다. 이런 노비들에게 나라가 무슨 의미가 있겠으며, 이씨가 통치를 하건, 박씨가 말아먹건 무슨 감흥이 있겠나 말이다. 조선 왕조가 계속되었다면 죽을 때까지 자기 이름도 쓸 줄 몰랐을 다수의 조선인이 일본 통치 덕분에 글을 읽고 쓸 줄 알게 되었고, 개돼지와 같은 남의 재산에서 벗어나 당당한 국민이 된 것이다. 망국에 분노한 것은 소수의 양반들이고, 식자들이고, 지주들이었다. 중국에서, 만주에서, 하와이에서 싸운 사람들은 대개 이런 기득권층이었다. 이런 사람들이 나라를 잃고 보니 그제서야 절실하게 필요한 것인 인민대중의 각성이었다. 그래서 시작된 것이 계몽이다. 뭘 계몽하자는 것이었나? 나라가 뭔지 가르치는 일이 급했다. 지금 북한 인민들한테 눈치 보지 않고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고, 덴노헤이까 반자이 천번만 부르면 김정일의 북조선에서 데려다가 일본 국민으로 살게 해주겠다 하면 북한 땅 전체가 반자이 소리에 파묻힐 거다. 내가 북한 사람이라면, 그리고 일본에 가서 일본인으로 살 수 있게만 해준다면 나는 천황한테 삼보1배하면서 신의주에서 부산까지 기어가서 일본 가는 배를 타고야 만다. 지금의 북한이나, 멸망 직전의 로마나, 합방 당시의 조선은 소수의 특권층이 아닌 다수의 인민에게는 지킬 가치가 없는, 오히려 그것을 부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할 사악하고 악독한 감옥에 다름 아니었다. 일반 민중에게 있어서는 일제의 통치가 조선시대의 양반들에 의한 지배보다 가혹했다고 볼 이유가 전혀 없다.
'더러운 조센징'이라는 욕과 '천한 쌍것이...'라는 욕 중에 어느 것이 더 굴욕적인가 생각해 보라. 일제 시대에 조선인으로 사는 것이 조선 시대에 노비나 소작인으로 사는 것보다 더 나았다는 데는 군소리가 필요없다. 최소한 소학교는 다니게 해주었고, 인간이 지 이름 석자는 쓸 줄 알게 해주었고, 최소한 죽기 전에 재판은 받을 수 있게 했다. 조선시대 노비들이나 양민들은 재판받을 권리조차 없었다. '네 죄를 네가 알렸다'하고 곤장을 앵기는 원님전 송사를 재판이라고 우기면 할말은 없다.
로마의 노예들을 향해 '왜 로마를 지키지 않느냐'고 말하는 것은 코메디다. 조선 말기의 조선 민중들에게 나라가 왜넘한테 넘어가는데 왜 아무 생각이 없냐고 답답해하는 것은 100년 후의 잘사는 나라 대한민국 사람들의 마음이다.
우리가 지금 해야 하는 일은, 지킬 아무런 이유도 가치도 없는 나라를 굳이 지키려고 애쓰지 않았던 사람들을 비난하고 욕하는 것이 아니라 이 나라를 지킬만한 가치가 있고, 그것을 위해 희생할 이유가 있는 나라로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욕해야 할 대상은 친일파가 아니고 매국노가 아니라 '나라 같지도 않았던 나라'이며, '지킬 마음이 조금도 안 나는 밥맛 없는 조국'이다. 지금도 이 나라를 그런 밥맛으로 만들려는 인간들이 있다. 그런 인간들일수록 친일파에 대해서 기세가 등등하다.
우리가 일제 통치의 치욕을 입은 이유는 조선에 애국자가 적어서가 아니었다. 비분강개하는 열혈남아가 없어서도 아니었고, 비록 말기에 들어선 왕조일망정 5백년의 역사를 가진 조선에 충신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반만년 역사의 이 땅에 열사가 드문 것도 아니었다. 조선인의 용기와 저항정신이 허약했던 것도 이유는 아니었다. 한일합방, 경술국치의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로 귀결된다. 그것은 당시 조선인의 무지와 몽매함이었다.
서세동점의 광풍이 불던 그 때에 아시아, 아프리카, 중동, 남미의 모든 종족들은 군함을 앞세워 세계의 정복과 약탈에 나선 서구의 열강에 비교할 때 토인들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역사가 몇천 년이 되건, 그 인구가 몇 억이 되건, 찬란한 역사와 문화의 저력이 어떻든 간에 산업혁명을 해낸 서구의 열강들이 도달한 수준에는 까마득히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 차이는 우리가 지금 상상하는 것보다는 훨씬 엄청난 격차였다. 그들에 비하면 반만년 역사의 조선민족의 지성과 기술, 문화라는 것은 참으로 서글픈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특히 보통 서민들의 생활수준과 지식의 정도, 문명화의 수준으로 보면 한마디로 야만인들 그 자체였다. 해방 후에 한국전쟁 당시에 이 땅에 온 외국군인들의 눈에 비친 조선사람들도 아프리카 토인들과 별반 차이 없었다.
일제 시대 직전, 개화기의 조선인들은 소수 특권층을 제외하고는 전부 맨발로 다녔다. 짚신은 먼길 갈 때나 두어켤레 준비했지만 그나마도 여정의 태반은 옆구리에 매달린 채였다. 여자들은 젖통을 태연하게 내놓고 돌아다녔고, 화장실(뒷간, 변소)이라는 것은 퇴비를 모으기 위한 시설이었지 위생을 위한 장소가 아니어서 남자나 여자나 길에서 들판에서 예사로 볼일들을 보곤 했다. 그것을 치우라고 개를 길렀다. 입고 있는 옷이라는 것은 누더기 넝마에 다름없었고, 그 먹는 음식이라는 것은 꿀꿀이죽보다 나을 게 없었다. 그나마 없어서 춘궁기만 되면 사람들이 떼로 굶어 죽었다. 위생관념이나 인권 같은 것은 아예 생각할 줄도 몰랐다. 기술? 밭갈고 씨뿌렸다가 가을되면 추수하는 전래의 농사법, 새끼 꼬고 짚신 삼는 겨울철 소일거리, 막그릇, 사발이나 구워내는 도기 제조술, 원시적인 호미나 가래 겨우 만들어내는 대장쟁이 기술, 소나무 꺾어다가 지게나 만드는 기술이 조선인이 할 줄 아는 전부였다.
물론 그건 조선사람만 그랬던 것이 아니었다. 긴 칼 차고 게다짝 끌고 다니면서 뻑하면 사람 모가지나 댕겅댕겅 자르던 잔나비 왜넘들도 문명과는 거리가 먼 야만인이었고, 아시아의 중화라는 대국 중국도 나을 것이 없었다. 3억 중국인의 수도 북경은 하수도 시설, 수도 시설은 전무했고 거리에는 똥오줌이 넘쳐서 홍수를 이루었다. 도시가 아니라 백만 명의 거지가 몰려 사는 거대한 빈민굴이 북경이었다. 2억 인구를 가졌던 찬란한 아소카 문명의 후예 인도는 또 어땠을까? 영국군 수천 명이 소풍가듯이 정복한 땅이다. 중국이라고 충신열사가 없었고, 의인, 지사가 부족했겠나? 의화단 수십만이 열강의 신식 군대 7백 명을 못 이기고 무너졌다. 찰톤헤스턴이 주연한 '북경의 55일'이 그 상황을 너무나 잘 그려낸 영화이다. 나라 전체 국민 전체가 무지몽매한 죄였지, 애국심이나 충성심, 용기 같은 것이 부족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 것이 암만 충만하고 넘쳐났어도 그걸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고 그런 것으로 피할 수 있는 위기가 아니었다. 그것에서 비껴간 유일한 사례인 일본은 역시 사무라이 정신으로 이겨낸 것이 아니었다. 세계의 모든 선배열강들에게 비루하고 눈물겹도록 아부하고 굽신거리면서 이를 악물고 배우고 익혀서 일본은 호구에서 벗어났다. 그 과정을 보면 그야말로 기적이라고 말해도 부족할 정도이다. 세계사의 기적이라고 말해지는 메이지 일본의 환골탈태도 50년이 걸렸다. 조선, 중국, 인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베트남, 버마,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기타 등등 아시아의 모든 나라, 모든 민족들은 일본 빼고는 모조리 서구 열강의 밥이 됐다. 조선, 만주, 중국 , 대만은 서구 열강 대신 선배제국의 허락을 받은 귀염둥이 일본 잔나비가 먹겠다고 설쳐대니까 형님들이 비켜준 케이스였다. 조선인만이 못나서도 아니었고, 애국심이나 용기로 극복할 수 있는 그런 정도의 사태가 아니었다. 세계를 통째로 뒤덮은 홍수요 해일이었다. 그것에 맞서 이겨내지 못했다고 우리가 스스로 자책하고 연민할 이유는 없다. 중국도 인도도 속절없이 파묻힌 대격랑이었다.
문제는 그것에서 헤어나는 길이요 방법이었는데, 그것이 애국자가 부족해서 겪은 일이면 애국자를 길러내어야 하고, 용기가 없어서 당한 일이면 용기를 길러야 하고, 체력이 약해서 당한 일이면 운동을 하면 될 일이다. 그러나 무지몽매해서 당했던 비극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벗어나는 방법은 오직 한가지뿐이었다. 바로 배우고 익히는 것이었다. 그 선생이 왜놈이던, 누구던 친일이건 매국이건 무조건 배워야 했다. 일본놈 앞에 무릎을 꿇고라도 배워야 했다. 그건 부끄러운 일도 아니고 수치도 아니다. 자존심 때문에 굽히지 않고 배우지 않아서 무지몽매한 상태로 있는 것이 진정 수치이다.
기술과 지식에는 일제 지식, 일제 기술이라는 것이 없다. 지식에는 국적이 없고, 과학에는 국경이 없으며, 기술은 피부색을 따지지 않는다. 총은 왜놈한테 배워도 쏘면 적을 죽이고, 미국놈한테 배워도 쏘면 적을 죽인다. 누구한테 배웠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총을 쏠 줄 알아야 싸울 수 있다는 것이다. 총을 쏠 줄 모르고, 대포가 뭔지도 모르던 십만의 동학군이 우금치 고개에 잠들어 있다. 무지한 자의 용기가 통할 시대가 아닌 것이다. 모르는 애국자, 기술 없는 충신, 무지한 지사 만 명보다 친일 기술자 1명이 나라에 필요했다. 어느 쪽이 나라를 살리는데 필요한 사람인가를 생각하여야 한다.
그래서 모든 신생독립국들의 지도자들은 예외 없이 피식민지 시절에 자기를 통치했던 주인 밑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배웠던 사람들이었다. 간디, 네루, 막사이사이, 장개석, 박정희, 이광요가 공히 마찬가지다. 모든 독립국들의 건설과 근대화는 식민지 시절의 친영파, 친미파, 친화란파, 친일파들이 담당했다. 그건 필연적인 일이고 당연한 일이지 다른 방법 다른 길이 있을 수 없다. 어떤 나라도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기들의 지도자들 리더들을 그것을 이유로 비난하지 않는다. 오직 한국인들만 그리한다.
그렇지 않은 나라가 한둘 있긴 하다. 노무현 대통령이 존경하는 모택동이 건설한 중화인민공화국과 영명하고 위대하신 영도자 김일성주석이 세운 주체조선이 있다. 둘 다 제국주의 시대에 자기 나라를 침략해 온 외국과 투쟁하는데 평생을 바쳤다는 사람들이 세우고 통치한 나라인 셈이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침략자들보다 더 잔인하고 악랄한 범죄행위를 자국민들에게 자행했고, 두 나라 모두 일본 지배하의 생활보다 더욱 비참한 기아 상태로 국민들이 내몰렸다. 모택동과 김일성은 모두 일본에게 희생된 국민들 수의 열배가 넘는 국민들을 일제보다 더 혹독하고 처참한 고통과 비안간적인 범죄로 숨지게 만들었다. 문화혁명 기간 중에 희생된 중국인 수가 3천만 명에 달한다. 남경 학살 때 일제가 죽인 시민 30만 명의 백배이다. 김일성이 한국전쟁을 일으켜 죽인 동족의 수는 아예 차치하고 그의 통치 하에서 맞아죽고, 굶어죽고, 총살당한 인민의 수는 일제한테 끌려가 죽은 사람 수의 열배를 넘는다.
지금 중국은 마오의 어록으로 다스리는 나라가 아니라 등소평의 유훈으로 통치되고 있는 나라이다. 등소평은 문화대혁명 당시 주자파의 대표자로 혹독한 탄압을 겪었고. 등의 아들이 홍위병들에게 3층에서 아래로 집어던져져 허리뼈가 부러졌다. 평생을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불구자가 됐다. 문화대혁명의 참화를 통해서 등소평은 정신주의, 애국주의의 폐해를 몸서리치게 실감했고, 모 사후에 다시 복권된 등소평이 중국을 개방하면서 8억 중국인민에게 내린 교시가 바로 '흑묘 백묘론'이었다. 검은 고양이던 흰 고양이던 쥐잡는 게 장땡이'라는 말이다. 이 등소평의 한마디로 8억 인민이 누가 검으냐 희냐가 아니라 누가 쥐를 잘 잡느냐로 경쟁하게 되었고 목하 황하의 기적을 우리가 보고 있다.
모택동은 지금 중국인들에게는 기피의 대상이다. 언급이 타부로 되어 있는 사람이다. 이런 중국에 가서 노무현은 모택동을 존경한다고 태연하게 말해서 중국인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얼척이 없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자기 딴에는 점수를 딸라고 한 짓이었겠지만 그 한마디로 중국사람들에게는 한국 대통령이 똥이 돼버렸다. '정신나간 놈'이 된 것이다. 얼마나 국제적 감각이 무디고 한마디로 몰상식한 사람인가를 잘 보여준 사례이다. 그것이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한국전쟁 때 희생된 백만의 국군 장병과 10만의 유엔군에 대한 모독이라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말이다.
우리는 해방된 조국, 신생 대한민국의 건국과 건설을 친일파들이 앞장서서 해냈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생각할 필요없다. 누가 했건, 지금 우리는 세계에서 무시할 수 없는 경제대국이며, 군사강국이다. 우리가 과거에 일자리를 찾아서 일본으로 밀항선을 탔던 그때처럼 지금 아시아 각국의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들어오는 나라가 한국이다. 왜놈들이 기생관광을 하러 몰려오던 나라가 한국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왜놈들 호줌지 사정으로는 감히 우리나라 와서 룸싸롱 못 간다. 잘난 한국의 남자들이 동남아로 중국으로 해작질을 하러 다닌다.
이게 다 친일파들 덕분이다. 우리가 친일파라 불러서 그렇지, 사실은 그 암울했던 시절에 이를 악물고 공부하고 익히고 노력했던 뛰어난 인재들 덕분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을 욕한다. 왜 하는지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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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민족을 두 번 죽이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마라
지금에 와서 50년 전의 친일에 대한 단죄론이 대두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무지에 기반한 부화뇌동이요, 또 하나는 음모이다. 여기서 무지라 말하는 것은 역사와 일제시대의 의미에 대한 무지를 말한다.
많은 이들이 일제시대의 친일행위에 대한 비난과 단죄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고 반대할 이유가 없는 사안이라고 생각하는 듯 하다. 그리고 친일 단죄에 반대하거나 비판하는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몹시도 놀라워하는 것 같다.
놀람과 동시에 분개한다. 친일파 단죄에 반대하면 무조건 매국노, 사대주의자, 수구 꼴통, 혹은 정신이상자로 단정짓는다. 나도 30대 초반까지는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 던 사람 중의 하나였다. 구름은 소싯적에 대한민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만큼 민족주의자로 자처했다. 오히려 국수주의자에 가까웠고, 일본이란 나라에 대한 증오와 복수심 역시 남달리 강했다.
그러나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그때의 그런 정서야말로 젊었던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나이가 들면서 좀더 사유가 깊어지고 보다 폭넓은 공부와 사색의 기간을 많이 가지게 됨에 따라 이 사안이 결코 그렇게 간단하게 정의하고 단정지어 말하기 어려운 무엇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나라를 외국에 빼앗긴 결코 짧지 않은 36년의 힘들고 참담했던 세월 동안 2천만명에 달하는 조선 민족이 각자 자기의 위치와 입장에서 어려운 시기를 헤쳐나간 발걸음이다. 그 많은 사람들의 인생의 여정에는 2천만이라는 사람의 수보다 몇 갑절 많은 곡절과 사연과 이면이 있을 것이다. 어떤 전지전능한 신도 한 인간의 인생을 심판하여 천국행과 지옥행으로 이분할 수 없는 것처럼 어느 누구도 그 정도 오랜 세월 동안의 그 정도 수많은 사람의 행적에 대해 선악과 시비를 분명히 가릴 수 없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어떤 기준과 잣대를 만들어 재더라도 그것에는 무리와 억지가 개입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자칫하면 그것은 우리 민족을 두 번 죽이는 우매한 짓이 될 수 있다.
그 이유는 첫째, 누가 친일파였는가를 가려서 확인하고자 하면 친일파가 아니었던 사람을 찾는 것이 훨씬 빠르다는 사실을 알게된다는 것이다.
이 말은 당시 조선인으로서 지식이나 재력이나 사회적 지위에 있어서 상위 그룹에 속했던 사람들 중 친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거의 없다는 말이다(우리가 일일이 거론할 필요가 없는 평범한 장삼이사가 당시를 어떻게 살았는 지는 논외로 치자).해방 직후에 겨우 빌려 탄 비행기에서 여의도 모래사장에 초라하게 내린 그야말로 한줌도 안 되는 임정 요인을 제외하고는 반일자세를 끝까지 견지했던 인사는 찾아보기가 어렵다는 사실이다.
이 명백한 사실은 자칫하면 우리민족의 자괴심과 열등감과 자학의 만성적 원인으로 침잠할 가능성이 있다. 우리 민족의 치부를 들쑤셔서 공연히 모멸감을 되씹는 어리석은 짓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한줌도 안 되는 임정의 요인, 해외의 독립투사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국내에 있다가 친일로 전향하고 친일 행각의 오점을 남길 수밖에 없었던 불행했던 사람들과 비교해서 더 애국심이 투철하다거나, 더 저항정신이 강고하다거나 더욱 신념과 인내력이 뛰어났다고 단정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그들과 친일전향자들의 차이점은 일본의 직접적인 힘 앞에 노출된 상태이냐, 아니면 일본의 힘이 당장에는 미치지 못하는 외국 땅에 있었느냐의 차이로 봄이 더욱 옳다.
친일전향자들 중 아마도 대부분은 운이 좋게도 중국이나 미국으로 갈 수 있었다면 광복의 그 날까지 자랑스럽게 지조를 지킬 수 있었을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임정 요인이나 해외 독립투사들 중 누구라도 국내에 남아 있었다면 치욕을 받지 않았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최남선, 이광수, 김활란, 한용운, 조만식을 비롯해서 거의 대부분의 민족지도자들이 크던 작던 오점을 남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보통 사람을 뛰어넘는 특별한 사람들조차도 버티기에는 너무나 힘든 상황이었다는 반증이다.
일본의 강압과 강요만이 요인이 아니라 전쟁의 추이가 어떻게 되어 가는 지 알 수 없이 정보가 차단되었다는 것과 희망을 갖기에는 너무도 오랜 세월이 흘렀다는 것, 고립된 상태의 한계로 인한 전황의 오해가 친일 전향의 주된 이유였다. 일본이 패망하기 한두달 직전까지만 해도 일본이 곧 전쟁에 지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던 사람은 국내에는 없었다.
독일과 일본은 패망의 과정이 달랐다. 독일은 동으로는 소련군, 서로는 미영연합군이 밀물처럼 진격을 계속해서 마침내 엘베강에서 만나고 베를린이 함락됨으로서 나치는 종말을 고했다. 패망한 시점에서 독일군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은 항복했던 1945년 8월 15일 그 날까지도 만주 전체와 중국의 주요부 전체, 그리고 인도차이나 반도 전부와 말레이반도, 자바 보르네오 등의 석유 자원 지대를 점령하고 있었고, 각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의 병력은 약 7백만에 달했다. 일본은 여전히 자기 나라 영토의 열배가 넘는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고, 수백만 대군이 건재한 상태였으며, 그들의 사기는 조금도 저하되지 않았다. 그런 상태에서 일본은 원자탄 두발을 맞고 졸지에 항복을 해버린 것이다.
물론 그 이전에 일본은 이미 해공군력이 궤멸되어 전쟁 수행 능력이 고갈된 상태였지만 국내의 지도급 인사들은 그 사실을 알 수가 없었고 여전히 아시아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일본의 건재만이 눈에 보인 것이다. 최후의 승리는 연합군의 것이라고 확신한다 하여도 그 날이 10년 후일지 20년 후일지 알 수 없는 암흑의 세월이었다.
수많은 민족 지도자들, 항일지사들이 절망한 나머지 지조를 꺾고 무릎을 꿇은 데는 이와 같은 철벽의 시대적 절망이 있었음을 알아야 한다. 해외의 지사들말고는 끝까지 독립의 신념을 굽히지 않은 사람을 찾아보기 힘든 이유를 우리는 알아야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치 점령기의 프랑스와 일제강점기의 조선을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것을 본다. 프랑스와 조선은 결코 같이 비교할 수 없는 대상이다.
프랑스는 바로 한세대 전만 해도 독일과 싸워 이긴 승전국이며, 그 기술과 과학과 문화와 국력과 군사력에서 세계 굴지의 대국이요 열강의 하나였다. 짚신이나 삼고 삼베나 짜고 밥그릇이나 구워내는 기술 외에는 어떤 기술도 갖고있지 못한 상태에서 총 한방 쏘지 못하고 서류상의 합방으로 나라가 소멸되어버린 조선의 경우를 프랑스와 비교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며 어불설성이다.
그리고 프랑스는 인접한 영국의 BBC 방송이 희망을 부추기고 투쟁을 고취하는 선전을 연일 해대었고 전지구적인 전황을 신속하게 들을 수가 있었다. 독일이 패망하리라는 것은 지식인 아니라도 누구나 감을 잡을 수가 있었으며 아무리 힘들어도 몇 년만 참으면 고난이 끝나리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나치 점령하의 프랑스인들 중에 나치 협력자가 수십만이 생겼다는 사실이다. 만약에 독일의 점령기간이 36년 동안 지속되었다면 그래도 프랑스인 중에 대독 빨치산이 남아 있었을까? 그래도 대독항쟁의 신념을 꺾지 않고 독일에의 협력을 거부하는 프랑스인이 한 명이라도 살아있었을 지는 의심스럽다. 아니 독일이 그런 프랑스인을 한 명이라도 살려두었겠는 지가 의심스럽다.
조선인의 경우, 결론적으로는 대부분의 지사, 인망가, 지식인들이 일제에 투항을 했을망정 그 과정은 결코 부끄럽지 않은 것임을 알아야 한다. 실로 그 어떤 민족도 하지 못 했던 정도의 치열하고 끈기있는 항쟁과 저항의 기개를 충분히 과시했다. 우리는 일제시대의 친일을 가지고 우리 자신을 비하하거나 자괴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친일 행각을 이유로 당시의 사람들을 함부로 재단하고 비난해서는 안 되는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친일 단죄를 말하면 안되는 첫 번째 이유이다.
두 번째 이유는 각자의 친일이 진심이었는지 자발적이었는지 그것이 어느 정도 진심이고 어느 정도 자발적이었는지는 본인 외에는 누구도 모른다. 어느 정도로 고뇌하고 번민을 한 끝인지 그건 누구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친일 행적을 보인 사람이 가능하지 않으리라고 생각됐던 해방이 되고 어느 날 갑자기 조국이 자기 앞에 나타났을 때, 그 조국을 위해 헌신하리라고 각오하는 것이 결코 이율배반적이거나 자기모순이 아니라는 점이다.
조선인 대부분이 일제시대에 자기가 했던 일들에 대한 부끄러움을 가슴속에 안고서 새 조국에 대한 사랑과 헌신의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친일파의 애국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들의 진정을 믿지 않는다.
이건 너무나 편협하고 단편적인 마녀사냥이나 마찬가지다. 일본군으로 복무하면서 매일 아침저녁으로 천황이 있는 쪽을 향해 절을 하고 충성을 맹세했던 사람들이 광복된 조국의 간성이 되어 나라를 지키는데 기꺼이 목숨을 바쳤고, 그 어떤 나라, 어떤 시대의 군인들에도 뒤지지 않는 모범적인 군인의 길을 걸었다.
대한민국의 법조계는 일제시대에 판검사를 했던 사람들이 틀을 잡았고, 대한민국의 언론은 덴노헤이까 만수무강을 축원했던 그 신문사들이 민족의 정론을 싣기 시작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대한민국의 학계는 일본인 교수들을 스승으로 삼아 동경대, 게이죠대를 다녔던 그 사람들이 교수가 되고 학장이 되고 총장이 되어 새 조국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가르쳤다.
그들의 새 조국에 대한 충성과 애정과 헌신이 과연 위선일까? 그렇지 않다. 그들은 해방된 조국의 애국자들이었고 그들이 이 나라를 세웠다. 친일했던 사람들이 각계에서 헌신하고 조금 더 알고 조금 더 경험했으므로 그들이 앞서 이끌었다는 사실이 부끄러운 일인가? 천만에. 결코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
전세계에서 가장 궁벽하고 가난했던 조선이라는 나라가 세계 10대 경제대국에 올라서 있다. 신식 총 한 자루 없던 나라가 세계 5위의 군사 대국이다. 누가 만들었나?
조선민족 전부가 노력해서 만들었다. 그러나 그 리더 그룹들은 대부분이 친일했던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이제 와서 친일파를 단죄하고 그들을 비난하는 것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일으켜 세운 대부분의 주인공들을 매국노, 파렴치범, 위선자로 전락시키는 결과가 된다.
이것은 바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그 역사적 정당성에 흠집을 만드는 통탄할만한 우매한 짓이 되는 것이다. 그것을 노리는 자들이 있다. 오매불망 그렇게 만들기 위해 절치부심하는 자들이 있다. 바로 김정일 일당이다.
그리고 그들의 교묘한 선동에 부화뇌동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다. 친일파를 척결했다고 주장하는 항일 빨치산들이 지도한 강성대국 조선은 민족의 수치이다.
친일파들이 일제한테서 배운 지식과 기술과 경험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룬 우리가 조선민족의 자랑이다. 전 세계에 당당할 우리의 모습에 오욕을 가하지 말라. 우리의 자랑스런 얼굴에 스스로 침뱉지 말라. 암울했던 고난의 시기에 우리를 위해 눈물을 삼켰던 우리 부모님들을 더 이상 욕하지 말라.
친일한 사람들? 그 전부가 우리의 부모들이다. 부모가 친일하지 않은 사람의 자식은 우리들 백명 중에 한 명도 안 된다. 소극적 의미에서는 당시 조선인의 95%는 친일했다. 살기 위해서, 굶지 않으려고,일본인들한테 아부하고 굽실거리며 살았다. 그들이 전부 우리의 부모들이다.
우리가 누구를 욕하는 것인지를 돌아보라. 우리를 위해 희생하고 필설로 다 못할 고난과 고통의 시대를 신음하면서 살아가신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들이다. 당신들 눈에는 그 부모가 가증스럽고 한심하고 매국노로만 보이나, 내 눈에는 당당하고 부끄럼 없는 조선의 어버이로 보인다. 그들을 위해서라면 내 온몸을 던져 변호하리라. 그들에게 날아오는 돌이 있다면 내가 대신 맞으리라.
민족을 두 번 죽이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마라. 우리 부모님 가슴에 못박는 짓을 하지 마라. 일제 36년은 입으로 떠들 것이 못된다.
조용히 가슴에 묻고 각자가 생각하면서 묵묵히 나라를 위해 애쓸 따름이다. 누가 잘났고 누가 못났는가를 따질 일이 아니고, 누가 애국자이고 누가 매국노인지 가릴 일도 아니다.
그런 치욕을 두 번 다시 겪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모두 단결해야 했고, 과거를 불문하고 새 조국에 필요한 능력과 인재는 총동원해야만 했다. 우리가 그랬기 때문에 우리에게 오늘이 있을 수 있었다. 아니었다면 우리가 오늘 어찌 되었을까? 북쪽을 보면 그 답이 있다.
우리나라가 해방된 지 50년이 넘고, 그럭저럭 절대빈곤의 가난에서 벗어난지도 한참 되었다. 정치적으로도 민주화가 상당히 진전되어 이제는 인권문제로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거론되는 일도 거의 없어졌다.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한국은 당당한 선진국의 대열에 합류한 나라이다. 그런데 유독 정치만이 낙후된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일본이 패망한지 반세기가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이 있고,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끌어안고 분신하지 40년이 지났는데 아직까지 청계천 피복공장의 미싱공들이 세상을 보는 눈으로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고, 박정희 대통령이 죽은 지 20년이 지났고, 민주화 시대의 주인공들이 나라를 맡은 지 3대째 10년이 흘렀는데도 아직까지 6월항쟁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이다. 이들이 한국 정치의 발전을 가로막고 여전히 야만적이고 후진적인 정치를 만드는 주역이다.
이들은 모두 이미 사라진 과거의 적들을 잡고 싸우는데 열심이다. 일제와 친일파를 적으로 삼아 투쟁하고, 없어진지 30년이 넘은 청계천 피복공장의 업주들을 상대로 노동자의 권익을 부르짖는다. 그 수괴들을 자기들 손으로 용서해주고, 관용을 베풀고, 악수를 했으면서 몇 남아있지도 않은 5공, 6공 출신 인사들을 향해 여전히 민주화 투쟁의 결의를 다진다. 지금 대한민국의 권력을 자기들이 쥐고 있으면서 그런다는 것이다. 전세계에 집권 세력이 야당과 언론을 상대로 민주화 투쟁을 하는 나라는 대한민국뿐이다.
한국은 그동안 경제적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룩해서 과거의 모습은 찾아볼 길이 없도록 변했다. 외국에 나가서 10년만 있다가 돌아오면 자기 살았던 집을 찾지 못할 만큼 급격하게 변한 50년 세월이었다. 정치적으로도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이제 더 이상 민주화 투쟁을 한다는 것은 코메디나 다름없을 정도가 되었다. 기업과 근로환경도 몰라보게 달라졌다. 지금 한국에 굶주리고 헐벗은 근로자가 어디 있다는 말인가? 그런 한국 근로자 대우의 절반 만에라도 목숨을 건 외국인들이 필사적으로 들어오는 나라가 한국이다. 그런데도 노조의 집회에는 어김없이 '헐벗고 굶주리는 근로자의 권익을 쟁취하자'는 슬로건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 노동신사분들은 머리에 맨 띠를 풀고 집으로 돌아갈 때는 거의 전부 자가용을 타고 별로 남부럽지 않을 것 같이 꾸며진 집으로 귀가를 한다.
모든 것이 바뀌었는데도 여전히 30년 전인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조국이 발전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이다. 그 이유는 그 발전이 자기들이 아니라 자기들의 적의 손에 의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들은 한사코 그 발전을 인정하기 않으려 하고 현실을 외면한 채 30년 전과 똑같은 의식구조로 경직된 채 30년 전과 똑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30년 전과 마찬가지인 방법으로 정치를 하는 것이다. 이들의 정치는 여전히 변함 없는 항일전쟁이고, 민주화 투쟁이고, 반독재 항거이다. 그곳에서 한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세월은 이들에게서만은 흐르지 않은 듯이 보인다.
이들에게는 친일파 중에 살아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쯤은 고려할 문제가 아니고, 이미 죽었으면 그 아들과 딸이라도 좋다는 식이며, 군부독재가 종식되고 문민 정부가 들어선 지 10년이 지났으며, 과거 이 나라 민주화투쟁 세력의 양본산인 YS계와 DJ계가 모두 한번씩 집권을 했고, 유감 없이 그 경륜을 펼쳐보였다. 그러함에도 아직까지 무슨 한이 남았는지 이들은 변함 없이 존재하지도 않는 구세력과의 투쟁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 상대는 죽은 지 20년이 지난 독재자의 딸과 그 당시에 그저 정계나 언론계 등에 데뷔했던 당시로서는 신인들에 지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일제 때 존재했었다는 이유만으로 친일로 매도되는 불쌍한 두 민족지이다. 일제의 영합이나 군부독재의 책임과는 거리가 너무도 먼 사람들이 대를 이어 투쟁과 박멸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래서 한국정치는 성숙된 민주정치가 아니라 변함 없는 식민지 백성의 독립운동이며, 봉건주의에 맞서는 시민혁명이고,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노동운동이다. 한국의 현실환경과 정치는 내가 볼 때 약 30년의 격차가 있다. 정치인들만 30년 전에 살고 있는 것이다. 국민들의 생활과 교육의 수준이 극히 낮으며 산업화가 되지도 않고, 민주정치의 경험과 훈련이 전혀 없는 저개발 국가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들이 세계 10대 경제강국이라는 한국의 신문지상과 텔레비전을 연일 장식하고 있다. 그 중에서 압권은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소추가 통과되던 날의 국회표정이었다. 소추안이 발의된 이삼일 전부터 결사방어를 다짐하면서 의장 단상을 점거하고 자리를 깔고 누운 고난의 감수와 경위들에게 끌려나가면서 울부짖는 장렬한 투혼, 탄핵소추안 통과를 발표한 의장의 선포에 통곡하고 절규하는 비장한 애국심, 심지어는 실신하여 쓰러지는 목불인견의 저항정신을 우리는 보았다. 이들이 민주주의 정치를 한다는 국회의원들이었다.
대통령이 법을 어기면 탄핵 당할 수 있는 것이고, 필요하면 탄핵하라고 헌법조문에 탄핵절차가 명시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대통령의 위법에 대한 판단은 광화문에 모인 군중이 아니라 국회의원이 1차로 하고, 최종적으로는 헌법재판소가 하도록 되어있다. 어떤 경우에도 감히 대통령을 탄핵할 수 없다고 할 것 같으면 아예 탄핵소추란 자체를 헌법에 규정해 놓을 필요가 없다. 그 이유가 타당한 것이냐, 무리한 것이냐를 판단하는 기준은 오직 국회의 표결과 헌법재판관들의 판단뿐이다. 우리의 헌법이 그렇게 규정하고 있고, 우리는 그 헌법을 실질적인 국체로서 보호하여야 하는 것이다. 대통령이 취임식에서 선서하는 내용은 '헌법의 수호'이다. 헌법이야말로 국가의 실체이고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나라에 살고 있다'는 것은 '어떤 헌법 아래 살고 있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대통령도 헌법의 구속을 받으며, 오히려 그 헌법을 지키고 보호해야할 책무가 있는 사람이다. 때문에 설령 헌법이 자신의 대통령직을 위험하게 하고 정권을 위태롭게 하는 경우라도 헌법의 존엄성과 신성성을 우선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법은 옳을 때만 지키고, 아니면 지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평소의 지론이던 대통령과 여당의원들은 헌법 절차의 시행을 구테타라고 규정하고, 그들 스스로는 중세 봉건시대의 주군에 대한 충성스러운 심복들임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국회와 헌법재판소가 탄핵사유에 대해서 판단하는 것과 일반 국민들의 정서가 다르다면 그것은 다음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민들이 표로써 나타내면 되는 것이지, 촛불을 들고 광화문에 몰려나올 일은 아닌 것이다. 수가 많던 적든 국회에서 상정된 모든 안건은 표결로서 결정해야 한다. 이것은 상황과 사안에 따라 변할 수 없는 민주주의의 제일 원칙이다. 바로 다수결의 원칙인 것이다. 의장석 점거의 원칙, 밤샘농성의 원칙, 통곡과 절규의 원칙, 여론조사 존중의 원칙, 군중 집회의 원칙 같은 것은 민주주의에는 없다. 법이 옳고 그른 것을 국민 개개인이 개별적으로 판단하여 지키고 안 지키고를 결정하는 그런 민주주의도 없다. 옳기 때문에 법이 아니라 법이기 때문에 옳은 것이다.
그런 후진적이고 무원칙한 추태보다는 표결로서 정당한 의사를 표시하고 다수의 힘에 밀려 자기들을 뽑아준 국민의 의사를 관철하지 못하였으면 선거 때 국민들에게 호소하면 된다. 그리고 국민들은 반드시 자기들의 뜻에 합치하는 방향으로 대의활동을 해줄 사람들을 뽑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되는 것이고, 그게 민주주의다.
이런 것을 실천해 가는 것이 개혁이지 말로만 미사여구를 떠드는 것이 개혁이 아니다. 대통령에 대한 탄핵 절차도 하나의 사무적이고 냉정한 정치적 행위가 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민주주의를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대통령을 위해서 통곡하고 절규하고 실신하여 쓰러지는 사람들은 국민의 대의사가 아니라 대통령의 충신들이다. 세월이 멈추어버린 사람들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