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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내가 만난 사람들(아남 창업주 김향수)
누구나 인생 코스를 되돌아보면 엉뚱한 곳으로 돌아간 적 있을 것이다. 불교신문 갔으면 동대 교수 되던지, 불교방송 사장 됐어야 했다. 그런데 주간지 싫다고 일간지로 옮겼고, '일간내외경제' 갔으면 거기서 편집국장 쯤은 하고나왔어야 했을 것이다. 초기 수습 기자 네 명 중 둘은 편집국장 되었다. 그런데 해외홍보부란 곳으로 옮겼다. 국내외 무역회사를 영어로 해외에 알리는 기구인데, 거기서 두둑한 리베이트 받아 대학원 진학 할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거기 가서 생각이 또 바뀌었다. 당시는 한국 경제가 비약적 발전을 하던 시기고 우후죽순처럼 기업들이 성장하고 있었다. 무역협회 앞에 '한신공영'이란 회사가 있었다. 남산 1호 터널 나오면 책상 서너 개 전화 한 대가 전부인 회사였다. 반포에 무슨 수영장을 만든다고 했다. 창업 때라 사무실엔 사장 포함한 직원 서너 명 밖에 없었다. 사장과 점심 먹다가 내가 고려대 출신인 걸 알자, 그가 홍보 맡을 사람 필요하다며 총무를 맡아달라고 했다. 나는 몇 백 명 경쟁자 제치고 신문사 들어간 사람이다. 내키지않아 제의를 거절했는데, 후에 한신은 반포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세웠고, 고대 나온 사위는 땅을 챙겨 백화점까지 세웠다. 그런 시절에 마침 亞南産業 창업주 김향수 옹이 청와대 보낼 편지 쓸 겸 자서전 써줄 작가를 찾고 있었다. 그래 반도체가 장래성 있다고 그 회사로 간 것이다.
요즘 한국 반도체의 원조는 누구인가. 사람들은 매스컴 보도를 보고 삼성 창업주 이병철과 SK하이닉스를 먼저 생각한다. 그러나 일간내외경제 기자 하다가 내가 74년에 亞南産業 갔을 때, 亞南은 이미 1973년에 한국 최초의 반도체 개척 회사로 대통령 표창 받았고, 수출유공 금탑산업훈장 받았다. 1974년에 반도체 수출 유공 대통령기를 수상 했고, 1990년에는 10억불 반도체 수출탑을 수상했다. 그 때 삼성이나 SK는반도체 회사로 이름도 올리지 않았던 때다.
면담은 김향수 사장과 간단히 끝냈는데, 현존하는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고 묻기에 박정희 대통령이라 대답했더니, 지금 그 자리에서 청와대 보낼 서신을 하나 만들수 있냐고 했다. 김 사장이 작성한 서신 내용 읽어보더니 당장 내일 비서실 출근할 수 있냐고 물었다. 그렇게 입사했다.
나는 거기 가서 먼저 청와대 보내는 서신의 발신자 호칭을 회장으로 바꾸었다. 당시는 회사들이 주로 사장이란 호칭 쓰고 회장 호칭은 안쓰던 시절이다. 타이틀은 현대로 간 선배가 그런 일도 있어 실장 정도 바랬는데, 비서역이란 묘한 걸 주더니 나중에 월급 보니 차장 과장 중간 이었다. 당장 그 다음 날 출근을 않았더니, 집으로 비서실장이 차 타고 와서 일단 회사는 나오라고 통사정을 하였다. 재계에서 왕소금이라 부르던 김향수 사장 수법이 청와대에 돈을 얼마 보냈는지, 그것부터 살펴보았다. 비서실 서류 정리라는 명목으로 한 일주일 살펴보았는데, 김사장은 박대통령은 물론 정재계 누구한테도 땡전 한 푼 보낸게 없었다. 깔끔하긴 해도 이렇게 뒤 돌봐줄 빽 없이 하다간 위험하다 싶었다.
그런 그렇고 왕소금 회장한테 처음 놀란 건 근검절약 정신 때문이다. 여비서 시켜 신문 광고지를 4등분 갈라 메모지 만들어 쓰느데, 나는 처음 그걸 신문사 기자 하나 출근하니 쇼하나 싶었다.
식사 추어탕
지 역.
그건 그렇고
사람들은 재벌에 대해 궁금증이 많다. 내가 만난 그 분의 특징은 첫째, 근검절약. 둘째는 뱃장, 세째는 무식 이다.
우선 근검절약부터 살펴보자. 내가 놀란 것은 김 옹은 나는 기자였기에 .
佛心’ 김회장 글씨 몇 점,그 우선
추어탕 인삼 저서 마쓰시타 고노스께 전경숙 연세대 고려대 노무현 전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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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사람들은 대개 공부 잘하면 출세하는 걸로 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재벌은 대개 무식하다. 무식해서 용감하다. 학벌 좋은 재벌도 있긴 있다. 가물에 콩나물로 있지만, 대개 창업주 학력은 국졸이거나 애매하게 안개 피운 학력이다. 한번은 국회에서 서도전이 열렸다. 국회의원동우회 서예전에 국회의장 이재형씨를 비롯해서, 정권 실세이던 노태우(당시 국회의원) 의원 등이 참석했는데, 모두 윤길중 의원이 초서로 쓴 <귀거래사> 병풍 앞에서 잘 썼다고 고개를 끄떡이며 야단이다. 윤길중 의원은 역대 국회의원 중 최고 명필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하나 생긴다. 그 병풍 <귀거래사> 한 대목이 표구가 잘못되어 앞 뒷 장이 바뀌어져 있는 것이다. 내가 초서는 잘 모르지만, 대학시절 외우던 <귀거래사> 한 구절 한구절을 짚어나가다가 발견한 것이다. 그래 귓속 말로 회장에게 그걸 알려드렸다. 그러자 이 양반이 가만 있는가. 국졸이 자기요, 자기 옆에 선 사람이 일본 동북제대 나온 분 이다. '어이 여보시오들! 잠시 이거 좀 보고 갑시다.' 큰소리로 일행 모두 불러세우고, 손가락으로 병풍 글씨를 가리키며, 병풍 글씨 순서 앞 뒤 틀린 것을 지적한다. 이리되면 자기는 초서 읽을 수 있고, <귀거래사> 잘 안다. 그분들은 그때 모르면 그냥 지나쳤어야 했을 것이다. 병풍 앞에서 초서를 아는체, 시 내용을 아는 체, 고개 끄덕거린 것이 문제였다. 그러는 바람에 모두 바보가 되고 말았다. 윤길중 의원이 자기 작품을 보고, 아차 표구가 잘못된 걸 그때사 알았다. 동생을 시켜서 작품을 표구했는데, 표구사가 실수한 것이다. 그 경위 설명들으며, 우리 회장님 잠시 기분 좋았을 것이다. 돌아오는 차 속에서 날더러, '앞으로 서도전은 반드시 자네가 수행하라'고 지시한다. 회장님은 불심(佛心)이란 글씨를 자주 썼다. 반절지에 빗자루같이 큰 붓으로 불심 두 자를 쓰는데, 사모님처럼 절에 가서 기부금은 내지않지만, 불심만은 많이 쓴다. 명필인지 아닌지는 내 모르겠다. 원래 펜글씨 자체가 좋아서 붓글씨도 좋은 편이지만, 좀 예술적 취향이 모자라고 속된 점은 있다. 회장을 방문하여 서예를 가르키는 선생이 있었다. 서예 대가인데, 아첨쟁이 였다. 돈을 존경해서였을 것이다. 회장님 글씨가 천하명필이라고 입에 침 마르도록 칭찬하니, 회장이 뭘 알겠는가. 한번은 의원 동료인 성균관 대학 재단이사장에게 글씨를 선물할 때였다. 자기가 천하명필이라 자부해서 그랬을것이다. 표구 하지말고 글씨만 보내라는 것이다. 내가 두번 물어도 그래라고 한다. 그 덕에 동작동 그 양반 집에 그 글씨 들고 간 나만 욕 싫컷 먹었다. 경력 이십년 서예가 자처한 회장은 원래 회사 일이 바쁘다. 어디서 글씨는 힘이 있어야 한다는 말 듣긴 들었으나 서예 기본 지식은 없다. 화선지에 먹 묻은 그 큰 붓으로 힘차게 눌르니, 종이가 찢어질 수 밖에 없다. 그러면 좋은 종이 골라오지 못한다고 아랫 것들한테 눈 흘긴다. 이 바람에 인사동 나들이 자주 하였다. 원래 종이 질은 원료인 닥을 많이 쓰면 질겨진다. 그러나 화선지 질이 거칠어진다. 전문가는 그런 종이 쓰지 않는다. 그런 사정이라 찢어지지 않는 한지 인사동에 있을 턱 없다. 종이 구할려고, 인사동 이 골목 저 골목 지업사 안가본 데 없다. 지업사 사장한테 사정도 해보았다. 아예 한지 공장에 그런 종이 만들어 달라고 부탁도 해보았다. 이런저런 우여곡절들은 다 몰라서 생긴 일이다. 원래 글씨의 힘이란, 붓의 속도에 있지, 힘차게 찍어눌르는데 있는 것 아니다. 그걸 본인에게 말해주지 못하는 것이 나의 고민이었다. 이 양반이 참 경제적이다. 글씨를 일본 마쓰시타 중역들에게 선물로 사용했다. 화선지에 먹글씨 두어 자 끄적거린 것은, 종이 값 먹 값 전부 쳐도 원가 이천원 못미친다. 칼라 TV, 오디오 기술 얻어오고, 단돈 이천원 짜리 선물로 때우니, 참 경제적이다. 또다른 선물은 소주에 담은 수삼이다. 수삼 값, 병 값, 소주값, 몽탕 쳐야 5만원 못미친다. 최소비용으로 최대 효과 얻으니 참으로 고수다. 수삼은 마쓰시타 중역은 물론 창업주 마쓰시타 고노스께 옹 본인에게도 전해졌다. 뭘 모르는 사람들이 중소기업 사장들이다. 촛자들은 대기업 납품선에 대개 엄청나게 비싼 선물 보낸다. 수삼을 보낼 때 남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 회장님은 선물 옆에 작은 책자를 동봉한다. 책자에는 밭에서 캔 수삼을 들고 찍은 회장 사진이 들어 있다. 백발 노인 모습은 마치 신선같다. 그 밭은 대한민국 땅덩이 중에서 가장 좋은 밭이고, 자신이 직접 발굴한 밭이라고 설명된다. 사실은 내가 수삼 캘 때 우리 회장님 모시고 우연히 가본 포천에 있던 삼밭이다. 책자에는 인삼의 외형과 연혁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있다. 동경도립연구소 농학박사 유택문정(柳澤文正)씨 논문과 허준의 동의보감에 나온 인삼의 효능 설명되어있고, <본초강목>, <해동기략>이 소개되고, <신농본초경>, <향약집성방>이 소개된다. 인삼을 복용치 말고 주의해야할 태양인 태음인 사상의학상 체질이 소개되어 있고, 자연산 고려 천연 산삼의 약통과 뿌리혹, 뇌두에 대한 이야기도 실려있다. 산삼은 반드시 대나무 칼로 잘라서 옹기 그릇에 다려야 한다, 토봉에 하루 담가서 아침 공복에 먹어야 한다는 둥 삼에 대한 제반 지식이 적혀있다. 책 만든다고 내가 인삼박사 되었다. 회장님이 이걸 일본말로 번역하여 그쪽에 보냈다. 마스시타 중역 간에는 우리 회장님 수삼 선물이 인끼였다. 모두 그걸 좋아한다. 효과가 좋으니 매번 일본 출장 때마다 한번에 열개 이상 가져간다. 갈 때마다 공항에 수삼 병이 나래비를 선다. 귀빈실 담당자가 귀회사는 인삼 장사 하느냐고 웃으개 소리를 할 정도였다. 좌우지간 이 양반은 국졸이다. 마쓰시카 고노스께 옹도 국졸이다. 두 사람 다 보통 사람 아니다. 고노스께 옹은 일본 재계의 대부이다. 중국과의 교류를 위해서 일본 재계 인사들을 대동하고 등소평 만난 사람이다. 그가 한국 기업인 중 가장 친한 사람이 우리 회장이다. 고노스께 옹에게 보내는 편지는 회장이 직접 안을 잡고 일본어로 쓴다. 이 편지지 때문에 내가 애 좀 먹었다. 고노스께 옹이 우리 회장에게 보낸 편지는 편지지가 보통 편지지 아니다. 일종의 화선지인데, 손으로 그은듯한 파란 줄이 몇개 쳐졌고, 첫눈에도 엄청나게 고급스럽다. 그런 화선지 우리나라 어딜 찾아가도 없다. 내가 인사동 수십번 돌아댕기며 그런 종이 찾아헤매곤 했다. 옹의 서신은 친필로 딱 한 페이지에 그림처럼 아름답게 안배되어 있다. 호칭, 안부, 본문 내용 그리고 끝나는 인사말, 날자가 한 페이지에서 정확히 끝난다. 고수의 편지는 자로 잰듯 정확하다. 군더더기 한 줄 없다. 여하간 나는 회장 덕분에 그 세계적인 인물이 방한했을 때, 안내도 맡았다. 청와대, 삼청각으로 따라댕겼다. 그 분 저서도 선물 받아 읽었다. 많이 배웠다. 때론 재벌이 정말 무식한 걸 느끼기도 했다. 한번은 명동에 나가서다. 마침 길바닥에다 누가 유화를 잔뜩 늘어놓고 팔고 있었다. 물레방아, 폭포, 초갓집이 그려진 전형적인 이발소 그림이었다. 그 그림을 보자, 회장이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는 눈치가 맘에 든 모양이었다. 한 점 흥정해서 사보라는 표정이다. 재벌이 이발소 그림 좋아하지 말란 법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 있는가. 수행한 사람은 멀쩡한 사람이다. 누가 그걸 보면 챙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황급히 말을 돌리며 그 양반을 그림 옆에서 떨어지게 할려고 무척 애먹었다. 집에서도 그런 적 있다. 한번은 홍콩 다녀오더니 집으로 와보란다. 가보니 비단에 그려진 호랑이 자수 그림 넉 점이 있다. 이걸 표구해서 거실에 걸어두고, 아들 딸 집에도 하나씩 보내란다. 유치해도 유치하단 말 할 수 없는게 비서다. 말리려고 온갖 핑계를 해대어 겨우 성공했다. 좌우지간 세상은 공평하다. 못배운 분 밑에 배운 놈이 일하는게 세상이다. 서울대 부러워 할 것 없다. 나는 재벌 중 누가 서울대 출신인지 모른다. 대통령 중 누가 서울대 출신인지 모른다. 사법부 입법부 수장 치고 누가 거기 출신인지 금시초문이다. 나는 아이들 과외공부 시키려고 모든 걸 희생하는 젊은 엄마, 영어 공부 시킨다고 아이 엄마 외국 보내고 기러기 아빠 된 사람들에게 이 말 꼭 전하고 싶다. 못 배웠다고 다 재벌되는 건 아니지만, 공부 잘 했다고 다 출세하는 건 아니다. 철 없는 짓이다. 건강하고, 잘 놀고, 성격 좋으면, 고노스께 옹 말씀대로 운칠기삼(運七氣三)이다. 운이 일곱이라면 노력이 삼이다. 성실히 노력하면, 다 살 길 있다. |
'안녕하십니까? 박근혜 입니다.'
'아! 네.'
엉겹길에 대답을 하다가 생각해보니, 그가 나에게 전화할 일이 없다. 대통령 선거 중, 음성메세지 하나 보낸 것이다. 아내도 그런 전화를 받은 적 있다고 한다. 얼마전에도 이 비슷한 일로, 인쇄업 하는 친구가 나를 새누리당에 추천하겠다는 것이었다. ' 나는 정치 졸업했다. 필요없다.' 고 했더니, 그냥 이름 올리니 그리 알라고 했다. 며칠 뒤 임명장이 날라왔다. 박후보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직능총괄본부 외식산업본부 특보 임명장이다. 허허허 친구 하나가 외식산업협횐가 뭔가 대표로 있어 그런가 싶었다.
어쨌던 모처럼 목소리 들어보니, 부드러워 듣기 좋았다. 한 30년 전 일이다. 박근혜씨가 광진구 어린이회관에 있을 때다. 12.6 사태로 아버지 박대통령이 피격으로 돌아가신 후 였다. 재벌들이 모두 외면하던 그 시절 내가 모시던 회장 혼자 유일하게 명절이면 외로운 근혜씨에게도 성의를 보내고 국립묘지 묘소를 참배하곤 하였다. 그 담당 비서가 나였다. 서너번 가서 아무도 돌봐주지 않아, 전기와 난방비도 내기 어려운 실정을 토로하는 근혜씨를 위로하고 온 적 있다. 나는 푼돈 몇푼 얻으려고 비서실로 찾아오는 국회의원들은 자주 만난 편이다. 근혜씨는 퍼스트레이디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침착하여 바늘끝 하나 꽂을 틈 없는 빈틈 없는 여성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원래 박대통령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내가 A산업 회장 비서가 된 것도 어찌보면 박통 덕이다. 회장이 나를 면접할 때 물은 것이 딱 한가지다.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는 것이다. 나는 박대통령을 꼽았다. 회장은 그 이유를 물은 뒤, 몇가지 상황을 설명한 뒤, 그럼 청와대 박대통령에게 보낼 자신의 편지 초안을 써보라고 했다. 두개의 편지 초안 만들고 비서실에 취직되었다. 기업 회장이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는 좀 복잡하다. 쉽게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호칭도 어투도 격식도 청원 내용도 까다롭다. 그 뒤 한 열편 정도 편지를 청와대에 보낸 것으로 기억된다.
박통은 참 청렴한 사람이다. 반도체를 만들던 A산업은 무조건 도와준 분이다. 근혜씨는 서강대 전자공학과 재학시 그의 은사인 임태순교수와 A산업의 생산라인을 투어한 적 있다. 항간에서는 그 당시 재벌이면 무조건 내야하던 방위성금도 안내는 A산업과 박통과는 모종의 거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자 출신인 내가 비서실 비밀금고 정리한다는 명목으로 샅샅히 다 봐도 박통에게 보낸 금전은 단 한푼도 없었다. 박통은 첨단 반도체산업이 방위산업 우주산업과 직결된다는 그 단하나 이유만으로 사심없이 A산업을 도와준 것이다. 정말 멋진 분이다. A산업이 박통에게 보낸 유일한 선물은 경옥고 한 단지다. 그 경옥고 재료는 인삼 백복령 생지황 꿀인데, 내가 직접 충북 영동에 가서 마른 뽕나무 뿌리를 싣고와서 정성껒 고운 것이다. 당시 김도룡 총무비서관에게 전달한 기억이 난다.
79년 12.6 사태로 박통이 피살되자, 우리 회사는 신당동 빈소로 향촛대를 들고 찾아가 조문하였다. 당시 전두환 사령관은 파란 공군 야전잠바를 입고 권총을 차고 살벌한 표정으로 빈소를 지키고 있었다. 우리가 다녀가자, '저 사람들이 누구냐?'고 묻더라고 한다. 재벌 모두가 사태가 어떻게 되는가 싶어 눈치만 보던 때 였다. 그 후 전두환씨가 나중에 대통령이 되자, A산업은 의리있는 회사라면서 많이 배려해준 편이다.
대학시절에도 나는 박통을 좋아했다. 6.3데모인가 할 때 나는 군인이었는데,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 같은 건 못마땅 하게 생각했다. 다들 그게 무슨 민족을 위한 일인듯 몰려다닐 때, 나 홀로 박통이 5천년래의 가난에서 민족을 중흥시킬려는 고독한 지도자라고 믿었다. 68년 복학해서도 가장 데모 잘하던 K대 교정에서 혼자 데모에 반대했다. 타임지가 취재를 나와서 데모 찬성과 반대 학생 두 명 인터뷰 할 때 나는 소수 반대 학생 대표로 응했다. 철학과 후배인 도올 김용옥이 데모 주동하다가 강의실에서 나에게 구타 당하여 교수들까지 출동한 일이 있다. 철학이 무엇인가. 시대를 관통하는 흐름을 내다보는 예지다. 도올은 하바드 박사로 지식은 많지만, 예나 지금이나 그게 약하다. 지금 대학시절 운동권들은 모두, 단군 이래 가장 눈부신 경제 성장의 기적을 훼방한 철없이 아이들 이다. 박통의 업적이 지금 와서 햇불처럼 뚜렷히 밝은 데도, 아직도 정치하는 사람 중에 과거 황구를 나불대며 데모한 걸 자랑한다면 바보나 파렴치한일 뿐이다.모두 반성해야 한다.
오늘 19일, 밤에 개표가 되면, 나라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다. 박근혜씨가 대통령이 되면, 아버지 박정희처럼 청렴하고, 시대를 내다보는 혜안을 보여줬으면 한다. 그도 아버지처럼 고독한 선구자의 길을 걸었으면 한다.
12월 19일 오후
열한 번째 책을 내고나서 이번에 '책 한 권에 소개한 중국 사상 25편'을 낸 후 이정수 장군이 집에 축하 화분을 보내주었다. 돌아보면 그동안 열 한 권의 책을 내면서, 그때 그때 사연도 많고 도움 받은 사람도 많다. 첫 번째 책은 30년 전 내외경제 기자 시절에 쓴 '재미있는 고전여행'이란 책이다. 그 책은 매일경제 기자였던 K대 후배 소개로 김영사의 박은주 사장에게 원고를 보냈더니, 박사장이 '이 원고는 김영사에서 책으로 낼 터이니 꼭 기다려 달라'는 전화를 했다. 보통 책은 저자가 원고를 들고 이곳 저곳 한참 출판사 문을 두드리다가 출간된다. '서밍엎' '달과 육펜스'란 세계적으로 유명한 책을 낸 서머셋 모음도 그가 쓴 책의 自序에 보면 그런 출판의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있다. 나는 운이 좋아 첫 책이 김영사의 재미있는 책 시리즈 인기에 힘 입어 1만 5천부가 팔려 1500만 원 인쇄 수입을 얻었다. 그 책은 속초 아남프라자 백화점 시절 우리 건물에서 대통령 선거 연설을 한 김대중 대통령한테 전달했고, 그때 김대중 씨는 '나의 길 나의 사상'이란 자기 책도 김영사에서 나온 것이라며 자필 휘호한 저서와 자기 이름 새겨진 만년필을 내게 선물했다. 두 번째 책은 아남건설 상무 때 수필가가 된 기념으로 쓴 '한 잎 조각배에 실은 것은'이란 책이다. 그 책은 나를 수필가로 추천해준 전 문인협회 이사장 성춘복 씨가 운영하던 출판사에서 500만원 출판비 내고 만들었다. 주로 여행과 명산 참배가 그 내용인데, 문학책이라 인쇄 수입이 없었다. 세 번째 책은 亞南 그룹 창업주 김향수 옹의 자서전 '작은 열쇠가 큰 문을 연다'란 책이다. 나는 그 분 자서전 써주는 작가로 가서, 그 책에서 강진 초등학교 출신으로 우리나라 최초로 반도체 조립에 뛰어들어, 세계 제일의 반도체 조립 회사를 만든 옹을 소개하고, 1960년 대 초창기 한국의 반도체 착수 현황을 정리했다. 출판기념회는 신라호텔에서 박충훈 신현확 씨 등 내빈을 초청하여 열었고, 책은 2014년에 미국에서 영역판이 나오기도 했다. 네 번째 책은 '일본은 한국이더라'라는 책이다. 김향수 옹은 청년 시절 일본에 오래 살았다. 그래 일본 내 한국 사적을 많이 방문하여 간혹 그 이야길 하길래, 과장을 일본에 파견하여 일본 내 한국 유적을 탐사시켜 만든 책이다. 이 책은 전 국무총리 신현확 씨와 민족사 바로잡기 국민회의 의장 윤길중 씨가 추천사를 썼다. 이 책 출간 이후 조선일보가 여행객을 모집하여 일본으로 몇 차례 방일 여행단을 보냈고, KBS가 기자를 일본에 보내 다큐로 방영하기도 했다. 나는 천황이 백제계 후손인 마당에 굳이 반일이나 극일 보다는 한 차원 높은 상호 협력이 바람직하다 생각한다. 다섯 번째 책은 6,25 때 이북에서 내려온 38따라지 청계천 알부자 자서전이다. 동대문에서 사업하던 이창국 친구 소개로 만났는데, 그분은 19살에 영하 20도의 추위 속에서 양털모자를 쓰고 몽고족 자치주까지 찾아가 소를 사오면서 무법천지 마적단과 모택동의 팔로군의 약탈 광경을 목격했고, 6,25 때는 임진강을 뗏목으로 도강하여 파주 기지촌에서 쌀장사, 담배장사, 밀주장사, 딸라장사, 양색씨 장사 등 않해본 일이 없는 분이다. 원체 파란만장한 인생을 어렵게 살아서인지 소위 자기 자서전 쓰는 작가에게 천원 짜리 청계천 다방 커피와 자장면 대접하던 게 인상 깊었다. 그 분은 풀씨처럼 날아와 인동초처럼 뿌리내리고 산 1950년 대 대한민국 풀뿌리 인생을 대변하고 있다. 여섯 번째 책은 '나는 이런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란 전자책인데, 젊은 시절 철학을 배운 후 신문기자, 중역, 대학 교수, 수필가를 거치면서 쓴 수필과 시와 漢詩를 실었다. 일곱 번째 책은 '내가 만난 대통령'인데, 노무현, 김대중, 박충훈, 박근혜 대통령과의 에피소드를 쓰고, 고려대와 연세대 대학총장 만난 이야기, 재벌 총수와 노조위원장, 불교신문 시절 만났던 청담, 운허, 광덕, 월주, 법정 스님 이야기, 진주의 대표 여류시인 김정희 정혜옥 김여정 김지연 인터뷰를 실었다. 여덟 번째 책은 '책 한 권에 소개한 한국 사상 25편'인데, 거기에서 나는 내가 대학에서 동양철학을 전공하면서 배운 퇴계, 율곡, 남명 등의 사상을 간결히 소개하고, 불교신문에서 알게된 원효, 원감, 태고, 서산대사 등 한국 고승들의 깨달음과 죽음을 나타낸 오도송(悟道頌)과 임종게(臨終偈)를 소개했다. 아홉 번째 책은 불교신문에서 같이 근무한 법정스님의 영향을 받아 쓴 '어느 수필가가 쓴 전원교향곡'이란 책이다. 거긴 은퇴 후 내가 도연명처럼 전원생활 한 이야기, 텃밭 가꾼 이야기와 국내외 여행기를 실었다. 열 번째는 '진주는 천리길'이다. 누구에게나 고향은 연인의 품처럼 따뜻하고 그리운 곳이다. 그동안 두 군데 진주 신문에 연재했던 고향의 강, 산, 달, 꽃 등에 대한 글과 내가 10년간 부회장으로 봉사한 남강문학회 활동과 출향 작가들 이력을 소개했다. 열한 번째 책이 이번 '책 한 권에 소개한 중국 사상 25편'이다. 중국 최초의 시집인 詩經부터 시작, 공자, 맹자, 노자, 장자, 등 사상가를 간편하게 소개하고, 현대 경영에 도움 되는 太公望의 육도삼략, 손자 오자 병법을 소개하고, 꼭 읽어야 할 중국의 명시 명문장 8편을 엄선하여 소개했다. 공자는 자기를 알아줄 사람은 오직 춘추 때문일 것이며, 죄 줄 사람도 그렇다고 하였다(知我者 其惟春秋乎며 罪我者 其惟春秋乎). 공자가 춘추를 쓴 동기는 무도한 현세를 개탄하고 미래를 위한 帝王의 經世大法을 후세에 밝히기 위한 정치적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정치엔 관심이 적고 그릇이 적어 經世濟民의 뜻도 없다. 그냥 글 쓰길 좋아하여 불교신문과 일간 내외경제 기자를 하다가 亞南 그룹 창업주 자서전을 썼고, 은퇴 후에도 책을 냈다. 그중 가장 보람 느낀 책은 귀 출간한 '책 한 권에 소개한 한국 사상 25편'과 이번에 출간한 '책 한 권에 소개한 중국 사상 25편'이다. 전에 나온 '한국 사상 25편' 전자책은 대학도서관 30여 군데에 납품되었다. 훗날 나를 알아줄 사람도, 우리 철학과 사상을 쉽고 짧게 소개한 이 두 권의 책 일거라고 생각한다. 은퇴 후 책은 모두 전자책으로 출간했다. 전자책은 요즘 젊은이들이 컴을 통해 쉽게 접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전문 출판사 요원이 편집 교정 해준 것이 아니고, 저자가 편집 교정을 책임지는 시스템이다. 오탈자가 많고, 그걸로 종이책을 만들어도 지질과 제본이 나쁘다. 팔십 바라보는 노인이 교정 본 책이라 관심 가진 정운성 정순석 두 친구가 책 내용은 좋은데 편집이 아쉽다고 지적해주었다. 그러나 종이책은 출판사에서 한번 만드는데 5백 만원이 소요된다. 내 처지엔 그건 버겁고, 1회 발간에 제작비 우송비 합해 백만 원 드는 전자책 후 종이책이 적합하다. 그것도 그간 대략 천만 원이 나갔고, 아내가 걱정했다. 그 과정에서 도움 준 친구 많다. 정순석 김화홍 두 친구는 번번이 서점에서 열 권 스므 권씩 책을 사주었다. 이종규 장군은 인터넷에 서툰 내가 300페이지나 되는 방대한 원고를 첨부파일로 출판사에 보내면서 생긴 트러블을 해결해주었다. 김경옥 933 회장은 비록 호응은 적었지만 '진주는 천리길'을 원하는 전 동창에게 보내는 계획을 실천했다. 이번에 이정수 장군이 보내 준 축하 화분을 계기로 돌아보니 역시 사람은 혼자 사는 게 아니다. 주변 도움이 많다. 이 자릴 빌어 요즘도 우리 진중고 933 카페에 들어와 글을 읽고 가는 친구, 문자로 격려해준 친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드린다. 고래도 칭찬에는 춤을 춘다지 않던가. 아직도 933 카페엔 매번 40에서 100 명 친구가 찾아와서 히트 남기고 간다. 미안한 것은 지금은 友테크 시대인데, 사정이 여의치 못하여 친구 모두에게 종이책을 다 보내지 못하는 점이다. |
대통령이라는 사람들 이들을 옛날에는 ‘상감마마’라고 불렀다. 드라마에선 ‘폐하!황은이 망극하옵니다’한다. 시대는 바꿨지만,이들은 옛날엔 왕이다. 왕 알현은 옛날엔 족보에 올릴 대사건이지만,요즘은 시대가 안그렇다. 짧은 스침을 여기 소개한다. 내가 그 회사 회장 자서전 쓰기로 하고 입사할 때 였다. 글 솜씨 테스트였는지,현존하는 인물 중 가장 존경하는 사람과 그 이유를 에잍포 용지에 써달라해서 박정희씨에 대해 썼더니,면담시 김회장이 그 이유만 꼬치꼬치 자세히 묻고 나를 뽑았다. 항간에는 박통이 아남은 봐준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출근하자말자,기밀에 속하는 서류와 편지들을 재분류해야한다고 핑계대고 샅샅이 읽어보고,다른 루트도 알아봤지만,돈 보낸 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박정희씨는 서강대 전자과 다니던 근혜양을 아남에 보내어 반도체 공장 견학을 시키고,당시 재벌에게 세금쪼로 다 뜯어내던 ‘방위성금’을 아남은 면제해주었다.돈 받고 봐주는게 아니라, 한국이 나가야할 첨단산업하는 회사라고 봐준 박정희씨의 소신이 내가 감동한 대목이다. 아남이 청와대에 보낸 것은,‘佛心’ 김회장 글씨 몇 점,그리고 경동시장서 사온 고급 한약재로 영동에서 뽕나무 뿌리를 구해와서 고아서 만든,瓊玉膏 한 단지 밖에 없다. 김용환 재무장관과 영감이 식사할 때 옆에서 들어본,박통 이야기는 사나이 가슴을 치는 것이 많았다.고생하는 파독 광부와 간호원들을 만나 눈물 흘린 이야기, 정주영과 의기투합해 경부고속도로 뚫은 일,여론이 반대하던 월남 파병 이야기는 남자라면 다 심금을 울린다. 차지철이 한 원양회사서 불로소득한 집이 있었다. 4,19탑 방문하고 오던 길에 차지철이 자랑스럽게 박대통령 모시고 집들이를 했는데, 음식이 엘리베이터 타고 2층으로 올라오는 것을 보자, ‘음,자네도 이런 식으로?’ 화를 벌컥 내는 바람에 차지철이 황급히 이 집 반납하고 연희동으로 도로 이사간 일화도 있다. 나는 상공회의소 주최 신년인사회 때,영감 수행해서 세종회관 홀 멀찍이서 본 적 밖에 없지만,‘꼬마 상병’으로 불린 나포레옹처럼,박대통령도 키는 작지만,영웅이다. 전두환씨를 처음 본 것은 박대통령 서거 후,신당동집 빈소에서 였다. ‘조문을 가야 좋으냐,안가야 좋으냐.’ 재벌들이 눈치만 보고 아무도 안 갈 때 였다. 영감이 내 의견을 물었다. ‘지금 권력을 누가 잡을 지는 미지수지만,차후 역사는 반드시 그 분을 인정할 것입니다. 향촛대 준비시키겠습니다.’ 영감과 신당동에 가보니,파일러트 잠바 입은 보안사령관 전두환씨가 살기등등한 자세로 권총을 찬채 지키고 있었다. 우리가 가고 난 후 그가 물었다고 한다. ‘저 사람들이 누구야?’ 전두환씨는 딴 건 몰라도 의리는 남자다. 대통령 된 뒤,아남은 다르게 대했다. 다른 재벌들은 그때 아무도 찾아간 곳이 없다. 형님이 이러니,동생 전경환씨도 그랬다. 영감이 김포 새마을본부 찾아가면,차에까지 내려와 차문을 닫아주며 깍듯이 인사하고 올라가곤 했다. 하나 이상한 것은 근혜양과 그들과의 관계다. 의리의 전씨가 적극 돌보았음직한데,그렇지도 않았다. 박통 기일 몇일 전에 봉투 들고 당시 건대 옆에 있던 어린이회관에 찾아가면, 근혜양은 난방비 관리비도 어려운 처지였다. 그러나 처녀 때 퍼스트레디를 했던 때문인지,조용하면서도 말 한마듸 빈틈없는 얼음같은 처녀였다. 박충훈씨는 인자한 분이다. 회장 막내아들이 서울대 교수로 갈려니 추천서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전화로 말씀드리고 성북동 댁에 가서 기다리니,중간에 전화가 왔다. ‘길이 막혀 한 십분 늦으니 기다려달라.’ 사모님은 손님 왔다고 다과를 내오고,꼬맹이 손자더러 손님에게 인사를 시키면서 그동안 옆에서 대화를 나눠주는 분이었다. ‘타대 출신이라 서울대는 어렵겠는데...’ 이러시면서도 박충훈씨는 양식에다 인감을 찍어주셨다. 대통령 권한대행까지 오르신 분은,비서도 이렇게 인격으로 대하는 도량이구나 싶었다. 김대중씨는 계산 치밀한 정치가였다. 선거 전에 속초 아남프라자서 강연회를 하는데,총무부장이 건물사용료를 받았길래,내가 속으로 생각해봤다.개인적으로 김대중이라면 질색이지만, 그래도 명색이 ‘3김’인데,우리 건물에 온 것만도 홍보비로 치면 우리가 이익이다. 그래 돈을 돌려보냈더니,그 지역구 책임자가 찾아와서 감지덕지 고맙다고 야단이다. 서울 노회장에게 보고했더니,‘자네가 김대중씨 만나 내 안부 전하소.’ 그래 연락하고 별실에 갔더니,문밖에 DJ 만나려는 사람이 백 미터 줄을 섰다. 방에 들어가니,정희경과 정동영이 수행 중이다. ‘제가 이 건물 사장입니다’ 내가 DJ에게 인사를 하니, ‘서로 인사들 하시오.’ DJ가 서로 인사를 시키려 한다. ‘아!이분들은 제가 잘 아는 분들입니다.’ 내 말에 세 사람이 놀란다. ‘TV에 자주 나오신 분들 아닙니까?’ 그래서 넷이 다 웃었다. 내가 어른 안부를 전하고,내 저서 ‘재미있는 고전 여행’을 증정했더니, DJ가 출판사 이름 보더니, ‘김영사 좋은 출판사지요?‘나도 최근 거기서 책을 냈오.’ 내 한자 이름을 묻고,‘나의 길 나의 사상’이란 자신 책에 내 이름과 자신의 휘호를 해준다. 덩달아 휘호 새겨진 만년필과 탁상시계를 주는데,시계는 아남서 만든 거였다. 이렇게 우리 건물서 강연을 하고 갔는데,갈 때 그의 면모가 나타났다. 건물 주인이니 많은 사람 속에서 정문에서 배웅을 했는데,역시 정치인은 다르다. 그 많은 사람 속에서 나를 보더니 닥아와 악수를 하며, ‘회장님께 고맙다는 안부 전해주시오.’ 낮게 남에게 안들리게 하고 갔다. 이튿날 아침 대명콘도 골프연습장서 경찰서장을 만났더니, ‘여보 김사장 DJ하고 무슨 관계요?’ 하고 묻는다. ‘DJ 하고요?’ ‘우리 정보과장한테 다 들었소.김사장이 DJ하고 별실에서 만났고, 갈 때도 현관에서도 뭔가 귀속말 하더라던데...’ 그 바람에 옆에 있던 세무서장이 깜짝 놀랬다.그날부터 나를 무슨 큰 빽 있는 사람으로 간주,밥을 항상 자기가 내려고 하였다. 정치가는 제스쳐 하나까지 군중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을 다 계산해서 행동하는 듯 싶다. 노무현씨는 한남동 ‘필하모니’라는 고급 노래방에서 만났다. 비서실 직원들과 2차 갔는데,술김에 내가 아는 한 남자가 연극배우 손숙과 앉아있다.손숙은 문과대 우리 동기다. ‘아줌마 나 알겠수?’ 내가 그 좌석에 불쑥 앉으며 한 말이다. ‘... ... ...?’ ‘안암동 안 사셨수?게서 보던 얼굴인데.’ ‘아!동문이신가봐요.’ 손숙이 이 불한당을 아는 체 해주는 바람에 그 자리에 앉았는데, 앉아서 가만히 생각해보니,내가 안다고 생각한 이 남자는 아는 사람 아니다. 국회의원이라 TV서 낮익은 것이다. 그러나 칼은 이미 뽑은 후고,술로 정신은 가물가물. ‘마셨으면 잔 좀 돌리시오.’ 술 따르라 독촉해가며 양주 병 말끔히 다 비우고,노무현 차례가 와서 노래 부르러 올라간 무대까지 따라 올라가 같이 마이크 잡고 두 곡 부르고 내려왔다. 모처럼 모처에서 무드 잡던 그들로선 날벼락 맞은 셈. 요즘 생각은,그때 미리 깽판 한번 잘 놓았다 싶기도 하지만,어쨌던 그날 비서실 직원이 와서 실수를 정중히 사과하고,술값 지불하려 할 때, ‘술 먹으면 다 그렇지요.’ 사양하면서 돌려보낸 것은 넓은 아량이다. 손숙한테는 모교 홈컴잉데이서 만나 사과했다. ‘예전에 한남동 ‘필하모니’서 주책 떤 바로 그 사람입니다.’ 했더니, ‘아!재미있는 분이시데요.’ 기분좋은 대답이었다. |
조열승 재벌 총수/1 최근에 <국제시장>이란 영화를 봤는데, 첫 장면이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 노래 가사 그대로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헤메었던가. 피눈물을 흘리면서 1.4 이후 나홀로 왔다.' 1950년 12월12월, 눈보라가 휘날리는 흥남 부두에서 철수하는 미국 군함에 승선하려고 개미떼처럼 밀린 9만8천명 피난민. 그 혼란 속에 가족의 손을 놓치고 발버둥치고 울부짖는 사람들, 그들을 배에 태워 달라고 호소하는 통역관 현봉학, 배에 실은 폭약과 장비를 내리게 하고 대신 피난민을 태운 에드워드 아먼드 소장 모습이 인상깊었다. 노래 2절은 국제시장이 배경이다. '일가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이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 금순아 보고싶구나 고향 꿈도 그리워진다.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국제시장>은 어떤 의미인가. 5천만이 사는 나라에서 그 영화에 천만 관객이 몰렸으니 인구 다섯명 중 한 명 꼴 그 영화 본 셈이다. 영화에 재벌도 나온다. 현대건설 정주영 회장 얼굴도 보이고, 앙드레김도 보인다. 정주영은 학벌은 없지만, 사변통에 뱃장 좋게 돈 벌어 재벌된 사람이다. 본명이 김봉남인 앙드레김도 그 사람 웃기는 외국어와 함께 패션계 톱스타 한 사람이다. 따지고보면, 현대 삼성 금성도 사변 통에 성장한 기업이다. 그 틈에 돈 번 사람은 어떤 사람들인가. 한마듸로 나는 그들을 '간뗑이가 크다'고 본다. '간이 그냥 큰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이 놀래 나자빠질만치 크다.'고 생각한다. 나는 재벌 비서로 20년 일했다. 재벌 빤쓰 속까지 들여다 보았다. 그 분에겐 추풍령 쪽 김천에 수십만평 땅이 있었다. 이 땅을 누가 무단 점유하고 있어, 매년 재산세 고지서만 회사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래 관재과장에게 물어보니, 조열승이란 사람 아느냐고 묻는다. 그가 그땅을 점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열승이란 말에 나는 흥미가 솟았다. 그는 <야인시대>란 드라마에 나온 깡패 집단 보스다. 자유당 최고 깡패가 임화수라면, 두번째가 동대문 시장 조열승이다. 이 대한민국 최고 주먹은, 우리가 흔히 보는 동네 술집에서 사이다병 깨고 인상 쓰는 깡패하곤 다르다. 지팽이 짚고 물건 강매하는 상이군인하고도 족보가 다르다. 그들이 하루강아지라면 이들은 범이다. 그 조열승이 회장 땅을 무단점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내가 앞으로 범 만날 일이 있음을 의미한다. 옳치 싶었다. 그의 덩치는 얼마큼 크고, 주먹은 어찌 생겼는지 궁금했다. 그래 회장실에 들어가 김천에 가서 조열승을 만나, 재산세를 받던지, 내보내던지, 양단간 결단을 내고오겠다니, 이 양반이 얼굴에 만면의 웃음을 띄며 그래라고 허락한다. 그동안 그룹 전체에서 한 사람도 그를 직접 만나 담판 짓겠다는 자 없었다. 자네가 조열승 어떻게 다루나 한번 보자는 심보였을 것이다. 종합조정실 관재과장을 데리고 추풍령을 넘어가며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자유당 시절 깡패라면 지금은 늙었다. 환갑 지난 깡패가 무슨 힘 있겠는가. 내 친구 중 부산에서 '타이거'란 이름으로 꽤 알려진 레슬링 선수가 있다. 외항선 타고 돌아오니 도장 채릴 돈이 없다고 전화로 하소한 적 있다. 그에게 그 장소 맡길 생각이었다. 이이제이(以夷制夷)라고, 힘은 힘으로 제압하자는 생각이었다.. 김천에서 물어물어 추풍령 밑 그 동네 찾아가, 감나무가 선 구멍가게에 들러, 사람에게 근황을 물어보니 예상대로다. 그 동네는 참모총장으로 별을 네개나 단 정승화 장군이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조열승이 더 신화적 존재였다. 조열승에게 재산세 받으러 왔다니 모두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엄두도 내지말라고 한다. 이 정도라 건드릴 맛 났다. 걱정하는 시선들 뒤로 하고 산을 오르니, 양지 바른 능선에 수만평 배밭이 펼쳐져 있다. 그 옆에 한가로히 보트가 뜬 호수가 있고, 호수 옆에 작은 원두막이 있다. '실장님! 저 사람이 조열승인 갑습니다. 어쩔까요?' 쳐다보니 호수 위 작은 복숭아 밭에 한 노인이 올라오는 우릴 보고 있었다. 과장은 잔뜩 긴장해버렸다. '우짜긴 뭘 우째! 니가 혼자 가서 인사라도 한번 드리고 싶냐? 그냥 올라가자.' 코 앞에서 빤히 쳐다보는 시선을 무시함은 우선 기를 한 수 꺽자는 의미다. 위에 대궐같은 한옥이 있었다. 기왓장 한 장 한 장 서울의 유서 깊은 고가에서 뜯어온 것이라 한다. 대문 기둥은 덕수궁 기둥 같았다. 문짝에 둥그런 놋쇠고리가 달려있다. 그걸 힘차게 흔드니, '누구세요?' 안에서 일하는 아줌마가 묻는다. '여기 조열승씨란 분 살아요?' 그러자, '저 아래 복숭아밭에 계실낀데요.' 이러고 돌아서니, 그때까지 우릴 지켜보고 있던 조열승 모습이 얼핏 보인다. 일부러 잡담해가며 느릿느릿 내려가니, 우리가 곁에 가자, 이번엔 그가 사람 기척에도 고갤 딴 데 돌리고 서있다. '조열승씨 맞습니까?' 이렇게 그를 만났다. 뒷태로 보아 그는 키도 덩치도 적었다. 이 덩치로 어찌 그런 이름을 날렸을까. 속으로 약간 실망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천천히 돌아선 그 눈빛이 호랑이 눈빛이였다. 화등잔 이었다. 헤트라이트 불빛이 갑자기 내 얼굴을 비치는 것 같았다. 강열하였으나 그러나 적의의 눈빛은 아니었다. 이런 눈빛을 나는 안다. <장자>에 싸움 닭 이야기가 있다. 주나라에서 기성자라는 사람이 싸움 닭을 길렀다. 그 닭은 옆에 다른 닭이 다가와도 눈길 한번 건네지않고, 상대가 높은 소리도 울어도, 마치 나무로 만든 닭은 대하듯 전혀 반응을 보이지않았다고 한다. 이미 무심의 경지에 든 것이다. 조열승은 동요가 없었다. 숨결이 고요함은 고수라는 의미다. '그러면 그렇지!' 고수 만난 것이 기뻤다. 헛걸음 아니었다. 다음 수작은 미리 생각해둔 바다. '이번에 이 땅 새로 산 사람 입니다.' 그리고 뜸 들이고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땅 주인이란 말을 듣고. 그는 한참 후 물었다. '서울 김ㅇㅇ한테 이 땅을 샀어요?' 근거를 확인한다. '그렇습니다.' '그럼 저기 원두막으로 올라갑시다.' 원래 오야붕은 말을 아낀다. 그도 그랬다. 원두막에 올라가며, 노인의 비웟장을 한번 건드려 보았다. '저 호수 속에 있는 보트도 노인장께서 사다 띄운 겁니까?' 한옥집, 원두막, 보트, 모두 그가 작만한 것이다. 그리고 이제 쫒겨날 판이다. 그걸 건딘 것이다. 노인은 한동안 침묵하다가, 입을 떼었다. '김00가 자유당 국회의원일 때, 내가 그 사람 일을 봐주었소,' 사례를 받고 뭔가 주먹이 해결해줄 일 많았다 한다. 냄새나는 일이었을 것이다. 4.19로 감방에 가자, 돈 받고 못해준 일 대신 백지위임장에 손도장 찍어주었다고 한다. 한글을 몰라 그냥 내미는 서류에 찍어줬는데, 그게 정릉 땅 천 평만 주면 될일인데, 김천 땅 수십만평까지 찍어갔다는 것이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 당한 것이다. '조선생님! 그런 이야기는 나야 알 필요없는 이야깁니다. 지금 부산 내려가야하는데, 시간 없습니다.'' 나는 초 치고, 그는 이야길 계속했다. '그래 임화수 형님께 호소했더니,'김00 한테 얽혔으면 자네 큰 일 났구먼' 하더란다. 이 대목에서 나는 깨달았다. 지금 벤츠 타고 다니는 사람, 재벌이라 불리우는 그 사람들이 더 무서운 사람이다. 깡패까지 등쳐먹던 존재다. 더 냉혹하고, 더 간 크고, 더 뱃장 좋은 사람이다. 조열승은 글을 모르는 대신 기억력은 비상했다. 모년 모일 모처에서 누구와 무슨 이야길 했고, 그때 무슨 이권 어떤 조건부로 누구에게 넘겼고, 정치권 누구가 거기 관여됐는지, 그 시절 어두운 부분을 실명 실시간으로 환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런 선수 만나러 김천 간다니, 빙그레 웃던 회장이 슬며시 존경스럽기도 했다. 역시 재벌 보스는 좀 더 다르다. 규모와 스케일과 차원이 더 프로다. ' 만약 여기 계속 사실 뜻이 있으시면....도지 금액을 정하여 저한테 전화를 주시던지...' 이렇게 끝을 맺고 일어나 박과장과 희심의 미소를 교환하며 총총히 과수원을 내려올 때다. '여보시오, 젊은 양반!' 그가 우릴 부르며 뛰어왔다. '먼 데서 온 손님인데, 그냥 가는 것도 그럿고...' 아래 동네에서 막걸리를 사겠다는 것이다. 경우는 있었다. 그래 그와 주전자 비우면서, 긴 이야기 나누었다. 나는 술 들어가면 그가 누구던 술술 말 잘 나오는 사람이다. 주거니 받거니 잔을 돌렸다. 그는 꽤 많은 이야길 했다. 감방에 갖히자 아내와는 이혼을 했다. 당시 동대문 모 여학교 재단을 가지고 있었다. 자기는 음지로 부인은 양지로 갔다. 부인은 그 학교 재단이사장이 되었다. 그 소릴 들으니 뭔가 통쾌했다. 그가 형님같이 느껴졌다. 그래 한참 수다를 떠는데, '형님! 부산 가는 기차 놓치겠소. 그만 일어납시다' 옆에 있던 박과장은 맘이 조마조마 했던 모양이다. 술김에 실수할까봐 재촉했다. 그러고 서울로 올라온 어느 날이다. 수위실에서 전화가 왔다. '김천서 온 조열승이란 사람이 회장님 뵙겠다고 비서실로 올라갈려고 합니다.' '어? 그냥 올려보내면 않돼! 수위실에서 제지해야지.' '이 분은 막을 수가 없는데요.' 하긴 그렇다. 자유당 때 조열승을 수위실서 어찌 막으랴. '그럼 종조실 김전무더러 만나라고 하시오.' 종조실은 창업주 재산 관리하는 과장이 있다. 김전무가 그 상관이다. 좀 있어 완전 열 받은 김전무 전화가 왔다. '아니 김비서! 날 더러 그 사람을 만나라고?' '네! 만나시지요. 관재부서 책임자 아니십니까?' '뭐라고요? 가만히 있는 조열승 당신이 내려가서 건드려놓고, 뒷처리는 날더러 하라고?' '그러지 마세요. 거기가 관재담당 부서 아닙니까. 만나서, 그 땅 언제 김 누구누구에게 팔아버렸다 그리 말만 하면 됩니다.' '아아니! 경우가 그래도 되는거요?' '무슨 경우 말입니까? 그 말 왜 못합니까? 그렇찮아요? 지금 담당부서가 피하고, 내가 가면 일이 우습게 됩니다' '당신 정말....' '당신이라니? 실례 말씀 삼가합시다........' 이러고 전화 끊어버리자, 답답한 사람이 샘 판다. 자긴 어려우니, 김천 갔던 박과장을 내려보냈다. 조열승은 박과장 얼굴 보자, 두말 않고 가버렸다고 한다. 회사가 장난친 걸 당장 눈치 챈 것이다. 그래도 한 시대를 주름잡던 암흑가 보스다. 쎈스가 번개다. 회장 만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조열승이 떠나자, 흥분한 김전무가 회장실로 올라왔다. 횡설수설 하면서, 비서실서 공연히 평지풍파 만들었다고 야단이다. 이때다. 회장님 말씀이 명품이다. '김전무 자네도 한번 만나보지... 중역들이 뱃짱들이 없어야!' 뱃장 없단 말에 김전무는 무안만 당하고 내려갔다. 그 일로 나는 오히려 점수만 땄다. |
내가 만난 청와대 사칭 사기꾼
김창현추천 0조회 62016.10.01 08:06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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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글 본문내용
내가 만난 청와대 사칭 사기꾼 /1 두보(杜甫)는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는 말을 했지만, 나는 칠십고래희 전에 희대의 사기꾼 둘을 만났다. 한번은 비서실에 아는 분이 찾아왔다. '이국장님 아니십니까?' '어. 김기자! 여기 근무하시는가?' 불교신문에서 업무국장으로 있던 이 모라는 분이다. 둘은 헤어진지 십여 년 지난 터다. 반갑게 인사하고 접객실로 모셨더니, 용건이 희한한 것이다. 이철희 장영자를 아느냐는 것이다. 내가 있는 회사에 3백억을 4%로 대출해주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은행 대출금리 10% 하던 시절이다. 4%로 그걸 받기만 하면 공짜로 몇 십억 남는다. 엄청난 제의다. 웟선에서 통치자금을 우리 회사로 배정했다고 한다. 웟선이란 누군가? 대통령이다. 하기사 미국같은 나라는 반도체가 우주 항공 산업과 첨단무기 제조의 밑바탕 된다고 국가가 도운다는 말은 들었다. 우리도 그럴 수 있는 일이다. 이국장은 원래 불교계에서 종정은 물론 총무원장, 종단 간부들, 신도회 등 모르는 사람이 없던 사람이다. 장영자를 신도회서 만난 모양이다. 장영자는 전두환 대통령 처삼촌 이규광씨 처제다. 영부인 이순자씨와 친하다. 배경은 믿을만 했다. 그러나 그런 공돈이 그쪽에다가 아무 치성도 들이지않은 우리에게 떨어질까? 아무래도 우리를 낙점한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손님 찾아오면 아무리 의심쩍은 이야길 하더라도 일단 긍정하는 체 이야기 다 들어주는 편이다. 다 듣고나서 판단 내린다. 그런게 예의다. 그런데 듣자하니, 마지막 대목이 무슨 007 영화 같다. 노회장을 아무도 모르게 비밀로 시청 앞 롯데호텔 이철희 사무실로 모시고 가서 접선하면 중앙정보부 간부 지낸 이철희씨가 거액의 돈을 준다는 이야기다. 말이사 꿀처럼 달콤하지만 그러나 조심해야 한다. 그래 살짝 퉁겨보았다. '년세 높으신 우리 회장님을 어찌 시내로 모시고 나갑니까? 이철희씨를 우리 회사 옆 워커힐 호텔로 모시고 오시지요?' 그러자 그가 펄쩍 뛴다. '김기자! 세상을 잘 몰라 그러는 모양인데 그게 무슨 말이요? 통치자금에 대해서 그런 소리하면 불경이요. 크나 큰 결례요.' 한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이미 윗선에서 낙점했다면, 실무자한테 이쪽 나름대로 요구해도 별 탈 없다. 이철희씨를 워커힐로 못부를 이유없다. 그랬더니 그는 이철희가 통치자금을 결정하는 사람이다. 김기자가 세상을 너무 모른다고 우긴다. 그래 한참 이리 와야된다니 그리 가야된다니 밀고당기다가, '이국장님! 정 그러시다면 이 문제는 돌아가서 일단 보고부터 하시지요. 그 후에 결론을 내립시다.' 이리 말해서 돌려보낸 후 회장께 보고하였다. '이러저러한 일이 있었는데, 제가 회장님은 년세가 높으시어, 이철희씨가 회사 옆 워커힐에 와야 된다고 하면서 일단 돌려보냈습니다.' 그러자 회장이 펄쩍 뛴다. '아니 이 사람아! 그런 중요한 일을 그리 경솔히 처리했어! 잠시 나와서 나한테 의견을 물어보지 ?' 그러면서 쓴입맛 다시는 모양이 내가 굴러온 떡을 차버린 기분이 드는 모양이다. 원래 돈 많은 재벌일수록 돈 맛은 더 안다. 경솔하다고 몇번이나 되뇌인다. '회장님! 저쪽도 돌아가서 보고할 것입니다. 일단 기다려 보시지요. 웟선에서 결정했으면 그건 일단 결정된 겁니다. 결정된 거라면 그들 밑 사람 마음대로 처리못합니다.' 이렇게 회장과 내가 불편한 분위기로 딱 일주일 지나서다. 1982년 5월 대검 중수부 발표가 신문에 났다. 장영자 이철희 부부는 기업에게 좋은 조건의 자금을 제시하고, 그 담보로 대여액 2∼9배에 달하는 약속어음을 받아 갔다. 그리고 그 약속어음을 할인해서 다른 회사에 빌려주거나 주식에 투자하는 등 방법으로 어음을 유통시키는 사기행각 벌여, 총 7,111억 원에 달하는 어음 받아내고, 총 6,404억 원에 달하는 불법 자금을 조성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거덜나기 직전 마지막으로 우리 회사를 찾아왔던 것이다. 만약 그들 말대로 했다면, 우리 회사는 꼼짝없이 1천억 쯤 약속어음 발행하고 폭삭 망하고 말았을 것이다. 나는 각 신문에 보도된 기사들을 스크랩하도록 여비서들에게 시켜 회장님게 올리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원래 조직의 생리란 것이 그렇다. 일 잘 되면 윗사람 덕이고, 못되면 아랫 사람 탓 이다. 그후 회장은 가타부타 아무 말이 없었다. 후에 이철희·장영자 부부는 법정 최고형인 징역 15년 선고받고, 10여 년 복역 후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내가 만난 청와대 사칭 사기꾼 /2 그 일 후에도 똘마니 사기꾼들이 청와대 들먹이며 심심찮게 세간을 어지럽히고 돌아다녔다. 사람들은 아무래도 청와대 통치자금이란 게 있긴 있는 모양이라고 믿었다. 당시 기업들은 자금이 어려워 대개 어음을 발행했다. 제2 금융권은 '꺽기'라고 해서 미리 10%를 예금으로 남겨두고 돈을 주던 때다. 일단 운이 좋아 청와대와 연결되면 누군가 돈벼락 맞는다고 믿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 실체는 확인할 수 없었다. 당시 비서실에 좀 야릇한 친구가 하나 있었다. 그는 회장 조카로 키가 팔 척이고 인물이 잘 생긴 사람이다. H대 연극영화과 다닐 때 국방부 영화에 최불암씨와 같이 캐스팅 되어 자기가 주연을 맡았다고 늘 자랑했다. 그는 전에 회사가 어려울 때 퇴사하면서, 본관 건물을 발로 차고 땅에 침을 밷으며 '잘 먹고 잘 살아라'하면서 나간 자인데, 후에 택시사업 하다가 망하고 술집 망하자, 다시 삼촌 밑으로 들어온 사람이다. 노회장은 그가 복직을 하려고 찾아오자, 그가 '남묘호랭겟교'를 믿는다고 그에 대한 글을 써오라, 새벽 5시 아차산 등산에 수행하라는 둥 거의 몇 달에 걸쳐서 인내심을 시험한 후 복직을 허락했다. 사실 새벽 5시 아차산 등산은 쉽지않은 일이다. 회장 수행하려면 자기집에서 새벽 4시에 출발해야 했을 것이다. 그 시간에 회장댁에 와서, 그는 회장 차 사모님 차 두 명의 운전수와 그리고 태권도 8단의 보디가드와 두어명 여비서를 거느린 팀장으로, 회장이 산에서 먹을 음식과 과일들, 보온병에 담은 결명자 당귀 구기자 다린 차, 호박씨 해바라기씨 등의 씨앗, 뉴스 듣는 라디오, 깔고앉는 돗자리, 읽을 책, 메모할 메모지, 무선전화기 등을 챙겨 산을 오르는 것이다. 그런데 회장은 산비탈이 가파르면 이런 짐을 짊머진 그에게 뒤에서 등을 밀도록 했다. 목적지에 닿으면 소나무 밑에 자리를 깔고, 그와 여비서에게 두 팔과 두 다리를 맡겨 안마를 시키고, 다른 한 명의 여비서는 그 옆에서 스크랩해간 신문 기사를 읽도록 했다. 그 당시 어린 여비서가 한 말이 잊히지 않는다. 회장님 수행에 다른 건 다 좋은데, 밥이나 제대로 배불리 한번 먹어봤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풍요 속의 빈곤이었다. 한측의 완벽한 행복은 타측의 완벽한 희생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 젊은 나이에 우유와 빵으로 요기하고 아침나절 신문 스크랩을 오래동안 읽으려니 얼마나 배가 고팠겠는가. 배고픔 하소하던 포천여고를 졸업한 미스 리 얼굴이 잊히지 않는다. 그는 회장이 퇴근하면 집에 모시고 가서 세수하는 일부터, 식사나 전화 수발까지 밤 12시 넘도록 거들다가 퇴근하거나, 회장댁 식모방에서 웅크리고 잔다. 노인은 밤잠이 없어 새벽 5시면 일어나니, 잠은 얼마나 부족하겠는가? 그런데 새벽부터 아차산 등산을 하면서 먹질 못한채 시달리니, 젊은 처녀가 얼마나 자기 신세를 한탄하고 울었겠는가? 하루 24시간 중 20시간을 봉사하는 그에게 내가 수당 5만원을 올려준 적 있다. 이들은 모두 내가 최종 면접하고 채용한 사람들이다. 그러자 회장은 비서실 과장부터 남자직원 전부를 불렀다. 그리고 하는 말이, '미스 리는 우리집에서 잠도 자고, 밥도 공짜로 먹고, 남처럼 하숙비도 않들고 대학보다 더 많이 배우니, 월급은 오히려 깍아야 하는데, 왜 수당이 필요하냐? 그리고 수당을 줄려면 내가 정해주어야지 왜 자네들이 그애들에게 먼저 말했느냐?'며 일갈 한다. 비서실장 시절 사실 이들은 용모도 세련된데다 그런 회장 밑에서 일하느라 눈치도 빠르고 손님접대도 능수능란하다. 고졸 처녀라도 나중엔 환골탈퇴 되어 개천에서 탄생한 용 된다. 과일 하나 깍아도 VIP들 앞에 손색없이 내놓을 수 있게 깍고, 인내심도 있고, 어른 공경할 줄 알아서 나중에 시집을 갈 때 모두 좋은 데로 갔다. 미스 리는 회사 근처 병원장 집에 시집갔고, 미스 전은 무슨 복지재단 이사장 외동아들한테 시집갔다. 미스 리는 결혼 전에 시아버지 될 사람이 며느리깜이 맘에 들어 패물부터 몽땅 사줬다. 그런데 막상 사주단자를 보내려니, 사주가 좋지않아 걱정하길래 내가 사주를 바꿔주었다. 년월일시 네 개 중 제일 중요한 시(時)를 바꿔버린 것이다. 주민증에 시간은 적혀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쨌던 그 모두가 훈련소 보다 고된 회장 밑에 있은 덕분일 수도 있다. 지금도 비서실 스쳐간 20여명 그 착한 심청이 같던 선녀들 얼굴 보고싶다. 김 모는 회장이 제시한 그 고된 일을 월급 없이 몇 달 견마지로(犬馬之勞) 다하다가 회사에 복직하였지만, 사실 그의 손 위 형은 명절이 되어도 회장집에 얼굴도 비치지 않았다. 회장이 소유하고 있던 을지로 1가 땅과 건물이 원래 회장 친형인 그들 부친 소유였는데, 회장이 그 을지로 땅과 건물을 조카들 대학 공부 책임을 진다는 조건으로 가져가고는 내몰라라 했기 때문이다. 어쨌던 김은 입사하자 주로 비서실 잡일과 허드렛 일을 맡았는데, 오후에는 회장실 뒷방에 들어가 땀 뻘뻘 흘리며 팔다리 안마를 하곤 했다. 그 한시간 이상 되는 안마가 여간 고역 아니었다. 이 김모란 자가 실장인 나보다 입사년도도 빠르고, 나이도 네 살 위인데다, 회장 조카라고 좀 묘하게 굴었다. 비서실에서는 실장님 실장님 하면서 고분고분 굴다가, 딴 부서에 가면 전화로 곧잘 나에게 반말을 했다. 그는 좀 우쭐대는 성질이었다. 10분 거리 걸어서 출근하는 회장이 출근한다고 연락오면, 반드시 집에 가서 모셔오고, 퇴근 때도 집에 모셔주고 왔다. 이런걸 호가호위(狐假虎威)라 한다. 여우가 호랑이의 힘을 빌려 거만하게 잘난 체하며 경솔하게 행동한다는 뜻이다. 수위실 앞을 지나가면 7명의 수위가 일제히 일어나서 경례를 부치는데, 이때 그는 사사건건 주의를 주곤 했다. 사내 행사 어디에서도 그는 회장을 곁에서 부액(扶腋)을 하며 딱 붙어있었다. 엘리베이타를 탈 때도, 계단을 오를 때도 항상 그가 옆에서 겨드랑이를 껴붙들어 걸음을 도왔다. 하도 그러다보니 사소한 사내 일들은 그가 먼저 보고하곤 했다. 입은 무서운 것이다. 그래 중역들 중 실장인 나보다 그에게 굽신거리는 자도 있었다. 그가 청와대 사칭 사기 조직을 만난 것이다. 몇 백억을 년리 4%로 주겠다는 사람 만나자, 그는 그사람을 만나도록 인도해준 '남묘호랭겟교' 부처님께 두 무릅 꿇고 눈물을 흘리며 감사드리고 싶었을 것이다. 사실 그 당시 회사 내부 사정이 어려울 때였다. 몇 해 전에 사위가 운영하던 A정밀이 2백억 자금을 대출해준 신탁은행 등 금융권 채무를 부도 낸 것이다. 금융권은 사위가 부도낸 장인에 대해서도 곱지않은 시선은 보내고 있었다. 어쨌던 이때부터 김은 물 만난 고기가 되었다. 밖에서 그자들 만나고오면 나와는 한마듸 상의 없이 회장실로 직행했다. 공로를 실장과 물 타기 싫었던 모양이다. 이때부터 그는 보고절차를 완전 무시했다. 회장께 직보했고, 심지어 아침 출근시 실장보고 인사하는 것도 빼먹었다. 그는 이 일만 성사되면 연세대 명예박사 학위 얻어준 실장 보다 더 공로를 인정 받으리 싶었던 모양이다. 회장도 재미있는 분이다. 그는 세상사면서 때론 엉뚱한 횡재도 있다는 걸 경험한 사람이다. 일제때부터 파란만장한 세상 살다보니 세상이 요지경이란 걸 아는 사람이다. 두사람은 날이면 날마다 소근소근 목소릴 낮춰 밀담을 나누곤 했다. 둘은 독립운동을 하는 애국지사 같았다. 모든게 비밀이었다. 런던 부둣가 희미한 등잔불 아래서 럼주 마시며 보물섬 꿈꾸는 선장과 선원 같았다. 서로 바라보는 눈빛이 의미심장 했다. 어쩌다 큰손한테서 전화가 오곤했다. 그러면 그는 궁둥이 바람을 일으키며 신이 나서 외출을 했고, 그때마다 요정 접대 영수증을 가져오곤 했다. 그는 대통령 영부인을 '국모님'이라 불렀다. 그들 사이엔 이순자 여사를 그리 부르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두어 달 지나자, 수차례 모의가 끝난 모양이었다. 어느날 나에게 법인 인감, 회장 개인 인감이 필요하다고 한다. 경리부가 관장하는 회사 등기부등본, 대차대조표, 부동산 목록은 이미 넘긴 모양이었다. 그러나 인감은 다르다. 취급이 복잡하다. 금고 열쇄가 세 개 있는데, 하나는 경리부, 하나는 기조실, 하나는 비서실서 보관하고 있다. '상대의 신원도 모르는데 인감을 보낸다니! 그건 말이 않됩니다!' 이 장면에서 내가 사정없이 부레이크를 걸어버렸다. 사실 나는 그동안 비서실과 접촉한 사기꾼의 신원파악을 해놓고 있었다. 총무부장 시켜 그의 육사 동기인 종로경찰서 서장 통해 그가 별을 몇 개 달았던 전과자임을 확인해놓았던 것이다. 청와대 사칭 사기꾼들의 조직은 여러 조직이 있었다. 하나는 S대 회계학 교수였던 회장 막내아들에게 비자금 제공 제의를 했다. 하나는 회장 사위인 N사장에게 비자금 제의를 했다.하나는 직접 비서실 김을 만난다. 청와대가 우리 회사 어디가 이쁘다고 비자금을 줄려고 몇 군데 씩이나 선을 넣어 접촉하겠는가? 결론은 뻔한 것이다. 어느 날 피래미 조직 하나가 비서실에 전화를 건 적 있다. '청와대 지시인데 계열사 N 사장과 긴급 연락이 필요하니 연결해달라'는 것이다. 그래 내가, '그걸 그 쪽 비서실에 연락하시지 왜 여기로 전화 합니까?'했더니 반응이 걸작이다. '이봐! 비서실장 당신 이름 뭐야?' '이봐' '당신'이라는 말 듣고 나는 그들이 청와대와 무관한 사람임을 알았다. 나는 수차례 청와대 비서실에 가본 적 있다. 총무비서관에게 회장 서신도 전하고, 작은 선물도 전한 적 있다. 높은 분 주변 사람은 그런 고압적 언사 안쓴다. 이 자들이 번짓수 잘못 짚은 것이다. '실례 합니다만 그 쪽 신분 확인이 않되어 곤란합니다. 청와대 전화번호 주시면 이쪽서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고 전화를 꺼버린 적 있다. 그런데 이번엔 김과 접촉하던 조직이 직접 나에게 전화를 했다. 사기범은 이미 회사 등기부등본, 대차대조표 등 몇가지 서류를 손에 넣자 자신감이 붙은 모양이었다. 최고경영진이 완전히 자기들 술수에 말려들었다고 이미 축배의 잔을 든 모양이었다. 회장과 이야기 되었다며 몇날 며칠까지 법인과 개인 인감을 보내라고 비서실장에게 아예 통보를 한다. 이들 조직은 기업에서 서류를 빼내는 조직, 은행에서 돈을 빼내는 조직으로 양분되어 있다. 기업에서 서류 빼내는 1차 작업은 반쯤 끝난 단계인 것이다. 회사 등기부등본 부동산 목록은 이미 들어왔고, 이젠 법인인감과 회장 개인인감 있으면 된다. 그것만 가지면 은행은 돈 얼마던지 대출해준다. '인감? 않됩니다' 내가 한마디로 거절했더니, '아니 회장하고 다 된 이야기를 비서실장이 모른다니 말이 되느냐?'고 펄펄 뛴다. '어쨌던 내가 그쪽 신분 확인을 못했으니 않된다'고 했더니, '당신 그 자리에 얼마나 있을지 한번 보잔다'. '맘대로 하시오.' 하고 그날 전화를 그냥 끊어버렸다. 그런 며칠 뒤 또다시 전화가 와서 인감 보내라고 고자세 협박을 하길래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 참에 아예 그동안 나간 회사 등기부등본, 대차대조표, 부동산 서류를 회수해야겠다 싶었다. '그럼 모일 모시에 비서실에서 한번 만납시다.'해봤더니 당장 그러자고 한다. 이렇게 어느 토요일 오후, 비서실에서 그를 만났다. 그가 정문에 도착했다는 수위실 전화 받고 내가 물어보았다. '비서실 찾아온 손님이 무슨 차 타고왔소?' '택시 타고 왔습니다.' 택시 타고 왔으면 알만했다. '그럼 내가 나중에 전화해서 뭘 물으면 무조껀 네! 모두 와있습니다 하고 크게 복창만 하시오.' 이래놓고 비서실에 나타난 그를 만났다. 우선 관상을 보니 틀렸다. 그는 다방에 출근해서 달걀 노른자 넣은 모닝커피 시켜놓고 레지 붙들고 음담패설이나 하는 그런 사람이다. 할 일 없는 그런 사람한테 속은 김 모의 안목이 한심할 뿐이다. 그는 007 가방을 들고 있었다. 그러나 오십대 꾀쬐쬐한 몰꼴이다. 나는 확신을 가지고 덪에 걸린 그에게 물었다. '명함 있소?' 첫말부터 반말을 썼다. '극비라서... ...' '극비 좋아하네. 자네 오늘 큰 집에 갈 준비나 하고 오셨나?' '자네'라는 하칭을 사용했다. 그러고 정문에 전화 걸었다. '어이 정문이요? 거기 형사들 몇 명 와있소?' '네! 두 명 왔습니다.' '알았소. 잠시 대기시키시오.' 큰소리로 대답하는 수위 목소리는 그도 들었다. 전화기를 쾅하고 놓고 물었다. '어이! 지금 모든 서류를 내놓고 맘 편히 걸어나가던지, 아니면 두 손에 은팔찌 차고 경찰서로 따라 가던지 맘대로 해!' 사내는 이 말을 듣자 손수건을 꺼내 이마의 땀을 딱았다. 오금이 저렸을 것이다. 후따딱 007 가방 열더니 가져간 서류 모두 내놓고 혼비백산한 쥐새끼가 되어 사라진다. 이 일은 그렇게 마무리 되었다. 그 뒤도 재미있다. 다음 주 월요일 아침에 내가 자초지종 회장께 보고했다. '비서실에도 전화 오고, 셋째 아들 김박사한테도 전화 오고, 사위 N사장에게도 전화 오니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종로경찰서에 알아보니 상대가 전과자다. 그래서 내가 지난 토요일 오후 그를 불러 그동안 나간 회사 서류를 모두 받았다' 고 보고하니 회장은 저간의 사정 짐작하고 가타부타 말이 없다. '부회장한테도 지금처럼 보고해!' 하더니 슬그머니 돌아선다. 보고를 받은 부회장도 재미있다. '김** 그 녀석 들어오라고 해.' 부회장은 MIT 박사 출신인데 덩치는 조그만 사람이다. 주눅이 든 팔척 장신의 자기 사촌 동생을 앞에 세우고 이 자식 저 자식 한참 삿대질 하며 고성을 지르고는 내게 데려와 '이 자식을 당장 짜르시오'한다. 그래 내가 그를 달랬다. '사실 노회장님은 벌써 칠순을 넘지 않았습니까? 병원 다니실 때 부축하고 다니고, 건강 위해 새벽마다 산에 모시고 다닙니다. 그 일은 자식들도 못하는 효도 아닙니까? 내가 잘 조처할테니 저에게 맡겨주세요.' 이래서 그는 살아남았고, 다시 상관에게 고분고분한 사람으로 변했다. 차제에 경리담당 부사장도 불러서 한번 혼을 내주었다. '회사 등기부등본, 대차대조표, 부동산 목록이 회사 밖으로 나간 것은 누구 책임입니까? 그런 걸 체크도 않하고 계시깁니까?' 그 뒤 서울 지검 특수부 수사관이 김을 호출했다. 청와대 사칭 사기단 수사를 하다가, 전문 사기단 몇 개 파를 검거했는데, 피해자 인적 사항 중에 그의 이름이 나왔던 것이다. 그때 검찰 출두 통보를 받고 얼굴 노래진 그 얼굴 잊히지 않는다. 그는 사실 피해자라 참고인 자격이다. 그리 소환한 것이라 아무 문제도 없는데 허둥지둥 하다가 그만 하나를 까먹고오고 말았다. 검찰 보도자료에서 우리 회사 이름 빼달라는 부탁을 못하고 온 것이다. 그의 명절 과일바구니 선물 리스트에는 회장이 공항 VIP실 드나들 때 잘해달라고 부탁하던 법무부 백호실, 그리고 회장이 다니던 서울대 병원 의사들, 국회의원들, 서울지검 특수부 수사관 이름도 있었건만, 그는 특수부에 가면 무조건 맞는다는 소문에 얼어서, 뺨 한 대 맞지않고 밤 11시에 돌려보내는 것만 고마워서, 꼬리 내리고 허둥지둥 돌아오느라고 그랬던 것이다. 며칠 뒤 일간신문에 검찰 측 기사가 났다. 중톱으로 우리 회사 이름이 실렸다. 그 신문을 읽은 사람들은 모두 '일개 부장이 어떻게 회사 등기부 등본같은 중요 서류를 외부로 유출시켰겠냐? 회장 허락이 있었겠지' 하고들 수군거렸다. (2016년) |
첫댓글 구구 절절이 옳은말만 하는 김교수가 없으면 어떻게 하지?싶은게 참으로 암담 해 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