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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혁명] 박정희 각하 일기 |
나 한 사람의 힘이란 적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나의 힘을 다 발휘하여 꾸준히 노력할 때는 무한한 힘이 나타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자조정신이 없는 사람은 자기자신이 가진 참다운 힘을 인식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자조정신은 자기자신을 최대한으로 계발하고 발전시키고 완성시키는 원동력이다.
재작년(1970) 가을부터 시작된 새마을운동이 작년(1971) 중에는 2차 선거로 인하여 다소 퇴조하는 경향이 보이드니 제2차년도인 금년도에 들어서면서부터 전국 농촌에는 요원의 불길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두메산골에서도 외로운 낙도에서도 국도연도에서도 도시 변두리에서도 문자 그대로 우후죽순격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도시보다는 농촌에서, 국도연변보다는 구석진 산골부락에서, 더 열의와 의욕이 왕성한 것같다. 가난을 하나의 숙명처럼 생각하고 침체와 체념과 나태와 무기력에 삶의 의욕조차 찾아볼 수 없는 농촌 구석 구석에서 누가 강요해서가 아니라 아니, 누가 하라고 강요한다면 할 맛이 없다는 듯이 이제부터 내 힘으로 내가 일어서보겠다고 일어서고 있다. 우리 역사를 오천년이라고 하는데 아마도 오천년 민족사중에 왕조가 바뀌고 역성혁명이 일어나고 외적의 침략을 오백여회나 겪으면서도 민족이 스스로 눈을 뜨고 스스로 깨달아서 이웃과 협조하고 남녀노소가 다 함께 뜻을 같이하여 민족중흥을 위한 대약진운동을 전개한 것은 이것이 처음일 것이다. 이것은 하늘이 우리 민족에게 마지막으로 한번 기회를 준 천재일우(千載一遇)의 호기회라고 생각한다. 저 의욕에 넘치는 사랑하는 동포들의 희망에 부푼 눈동자와 부지런한 모습을 보라. 전민족이 대동단결하고 혼연일체가 되어 이 절호의 천시(天時)를, 민심을 놓쳐서는 안된다. 위대한 새 역사를 창조하고 보람찬 유산을 후손들에게 물려주기 위하여 다같이 이 대열에 앞장 설것을 다짐하자. 1974년 9월 30일 (육영수 여사 묘소를 다녀와서) "당신이 여기에 묻혀 그 앞에 비석이 설 줄이야." 당신이 이곳에 와서 고이 잠든 지 41일째. 어머니도 불편하신 몸을 무릅쓰고 같이 오셨는데 어찌 왔느냐 하는 말 한마디 없소. 잘 있었는냐는 인사 한마디 없소. 아니야. 당신도 무척 반가와서 인사를 했겠지. 다만 우리가 당신 목소리를 듣지 못했을 뿐이야. 나는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 내 귀에 생생히 들리는 것 같아. 당신도 잘 있었소. 홀로 얼마나 외로웠겠소.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당신이 옆에 있다고 믿고 있어요.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당신이 그리우면 언제나 또 찾아오겠소. 고이 잠드오, 도 찾아오고 또 찾아 올 테니. 그럼 안녕. 1974년 10월 23일 (토) 강설(첫눈) 종일 흐림 7시 45분 포드 대통령이 이한 인사차 청와대 내방. 키신저 장관과 같이 잠시 담소 후 김포로 향발. 연도에 이른 아침인데도 학생 시민이 많이 나와서 열렬히 환송하다. 8시 조금 지나 포드 대통령 비행기 이륙. 돌아오는 길에 동작동에 들러 아내 유택을 찾다. 그저께 제막한 비석이 퍽도 깨끗하고 아담하게 서 있고 비문도 단정하고 맵시 있게 부각되어 있다. 애쓰신 분들에게 마음 속으로 감사를 드린다. 당신이 여기에 묻혀 그 앞에 비석이 설 줄이야. 당신이 여기에 잠들어 風雨星霜(풍우성상) 춘하추동 가고 오고, 오고 가도 아는지 모르는지? 어찌 모를 리가 있으랴. 당신이 사랑하는 이 조국과 이 겨레의 삶의 모습을 낱낱이 지켜 보며 보살펴 주고 사랑해 주고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오. 아내가 그토록 정성들여 애쓰던 지난 날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저 깜박거리는 네온 불빛이 동작동에서도 보이겠지. 1975년 4월 30일 (월남 패망 후) 월남공화국이 공산군에게 무조건 항복했다. 비통함을 금할 수 없다. 한때 우리의 젊은 이들이 파견되어 월남 국민들의 자유수호를 위하여 8년간이나 싸워서 그들을 도왔다. 연 파병수 삼십만명. 이제 그 나라는 멸망하고 이제 월남공화국이라는 이름은 지구상에서 지워지 고 말았다. 참으로 비통하기 짝이 없다. 자기 나라를 자기들의 힘으로 지키겠다는 결의와 힘이 없는 나라는 생존하지 못한다는 당연하고도 냉혹한 현실과 진리를 우리는 보왔다. 남이 도와준다고 그것만을 믿고 나라를 지키겠다는 결심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가 망국의 비애를 겪는 역사의 교훈을 우리눈으로 보았다. 조국과 민족과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여하한 목숨도 불위하겠다는 결심과 힘을 배양하지 않으면 망국하고 난 연후에 아무리 후회해보았자 후회막급일 것이다. 충무공의 말씀대로 필사즉생 필생즉사다. 이 강산은 조상들이 수천 년 동안 고진감래를 다 겪으면서 지켜오며 이룩한 조상의 나라이다. 조국이다. 우리가 살다가 이 땅에 묻혀야 하고 길이길이 우리의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서 이어가도록 해야 할 땅이다. 영원히 영원히 목숨이 끝나는 그날까지 지켜가야 한다. 저 무지막지한 붉은 오랑캐 들에게 더럽혀서는 결코 안된다. 지키지 못하는 날에는 다 죽어야 한다. 죽음을 각오한다면 켤코 못 지킬 리 없으리라. 1975년 3월 27일 (목) 맑음 전남 나주군 노안면 유송리 현애원 음성나환자촌 주민들이 아내가 생전에 두 번이나 방문하여 격려해 주고 지원해 준 데 감사하여 주민들끼리 돈 11만 5천원을 모아 육여사 추모비를 건립하고 제막식을 거행한 내용과 사진을 보내왔다. 비문에는 「 고 육영수 여사님의 크신 사랑 앞에?, 사랑의 등불로 우리에게 어둔 길을 밝혀주시던 고 육영수 여사님은 유명을 달리하셨습니다. 여기 천병(天病)을 겪고도 햇빛보다는 그늘에서 삶을 영위하는 현애원에까지 자애로운 선물과 희망의 씨앗 주셨으니 우리는 그이로 하여금 자활과 애국애족을 배웠으며 사랑의 정신을 일깨웠습니다. 두 차례나 벽지인 이곳을 찾아오시어 남이 꺼려하는 손을 어루만지시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기에 우리는 그이가 뿌리신 거룩한 씨앗을 키우려 합니다. 생존시에 은덕비를 세우려던 것이 추모비로 바뀌어진 것을 참으로 가슴 아프게 여기면서 조그만 정성을 새겨 고 육영수 여사님의 명복을 삼가비옵니다.」라고 씌어져 있다고 한다. 사랑이란 참으로 고귀하고도 소중한 것이다. 참으로 인류애, 동포애, 조국애는 삼세(三世)에 걸쳐서 영원히 빛나고 참되고 아름다운 것이다. 이 비문을 아내 영전에 바쳐 그대가 이 세상에 남기고 간 따뜻한 동포애와 참된 사랑의 뜻을 길이길이 이 땅 위에 키우고 가꾸고자 합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신의 뜻을 받들어 사랑을 인간사회에 심고 펴고 가꾸기 위해 온 것이다. 부모형제의 사랑, 이웃간의 사랑, 동포의 사랑, 나라를 사랑하는 조국애, 그리고 전 인류에게 공헌하기 위한 인류애, 이것을 위해서 삶의 보람을 찾아야 할 것이다. 부모와 처자의 사랑도 모르고 이웃과 동포애도 모르고 조국을 사랑할 줄도 모른다면 그는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태어난 참뜻을 모르고 사는 불쌍한 인간일 수밖에 없다. 인류사회의 모든 도덕과 윤리의 밑바탕이 되는 것은 <사랑>이다. 이것을 터득하고 성실히 실천하고 노력하다가 간다면 참으로 보람된 인생일 것이다. 아내는 이것을 실천하였다. 그것을 실천하려고 자기의 최선의 노력을 다하다가 갔다. 그대는 보람있는 삶을 살다 갔고 영생(永生)하리라. 1975넌 3월 9일 (일) 비 하루종일 봄비가 소리 없이 내리다. 서재에서 멀리 남산을 바라보니 구 어린이회관이 안개 속에 우뚝 솟아 보인다. 어린이들이 마음껏 즐기고 놀 수 있고 또 배울 수 있는 회관을 건립하겠다고 늘 벼르던 아내의 꿈이 처음으로 실현된 것이 저 회관이었다. 시간만 있으면 자주 가서 어린이들과 어울리기도 하고 어린이 지도를 위해 또는 경로잔치를 베풀고 노인들을 위로하기도 했다. 건물이 너무 높고 광장이 없는 것이 흠이라 해서 작년 초 어린이 대공원으로 옮기기로 작정, 목하 공사중이다. 금년 8월 15일에 준공을 목표로 공사가 촉진중이다. 전국 도(道)마다 회관을 하나씩 건립하자는 것이 일차적 목표였다. 재작년에는 부산에 어린이 회관을 세우는 데 여러 가지 지원을 하고 작년 9월 5일에 준공을 하게 되어 행사에 참석한다고 자신의 휘호를 저도(猪島) 휴양중에 정성들여 썼다. <웃고 뛰놀고 하늘을 쳐다보며 생각하고 푸른 내일의 꿈을 키우자> 써놓고 나에게 "내일의 푸른 꿈을 키우자" 하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느냐고 묻기도 했다. 이 휘호가 아내의 절필(絶筆)이 되고 말았다. 아내는 가도 아내가 그처럼 사랑하던 이 나라의 어린이들은 착하고 슬기롭게 자라서 길이길이 이 나라를 지키리라. 1975년 6월 25일 (수) 흐름 1950년 6월 25일(일) 새벽4시. 1백 55마일 38선 전선에서 북한 공산군이 일제히 포문을 열고 기습공격을 개시, 민족사상 가장 처절한 혈투가 전개되었다. 불의의 기습공격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남침징후를 약 6개월 전에 예측했었다. 육군본부 정보국에서는 적의 남침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을 군 수뇌부에 누차 보고하였다. 그러나 이 판단서를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군수뇌, 정부당국, 미국고문단 모두가 설마하고 크게 관심을 표시하지 않았다. 1949년 말 정보국 작전판단서는 전쟁이 발발 후 포로와 적 문서에 의하여 또는 귀순자들의 제보에 의하여 너무나 정확하게도 적중하였다. 알고도 기습을 당했으니 천추의 한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무능과 무위와 무관심이 가져온 국가재산과 인명, 문화재의 피해가 그 얼마나 컸던가 후회가 앞설 수는 없지만 너무나 통탄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4백년 전 임진왜란 때 우리조상들이 범한 과오를 우리시대에 또 되풀이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오늘의 정세는 흡사 6.25 전후와 비슷하다. 우리 세대에 또 다시 이러한 과오를 범한다면 후손들에게 영원히 죄를 짓고 조상들에게도 면목이 없다. 전국민이 시국의 중대성을 깊이 인식하고 총력안보 태세를 철통같이 다져서 추호의 허(虛)도 없이 조국을 수호하는 데 심혈을 경주해야 할 때다. 1950년 6월 25일에 나는 고향집에서 어머님 제사를 드리고 문상객들과 사랑방에서 담화를 하고 있었다. 12시 조금 지나서 구미읍 경찰서에서 순경 1명이 급한 전보를 가지고 왔다. 정보국장 장도영 대령이 경찰을 통해서 보낸 긴급전보였다. "금조 미명(未明) 38선 전역에서 적이 공격을 개시, 목하 전방부대는 적과 교전 중, 급히 귀경"의 내용이었다. 새벽 4시에 38선에서 전쟁이 벌어졌어도 12시까지 시골동네에서는 누구 한 사람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 동리에는 라디오를 가진 사람이 한 집도 없었기 때문이다. 오후 2 시경 집을 떠나 도보로 구미로 향하다. 경부선 상행열차에 병력을 만재한 군용열차가 계속 북행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25일 야간북행열차를 탔으나 군 병력 전송 관계로 도중 도중이나 역에서 몇 시간씩 정차를 하고 기다려야 했다. 이 열차가 서울 용산 역에 도착한 것은 27일 오전 7시경이었다.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의 표정은 모두가 불안에 싸여 있고 위장을 한 군용차량들이 최대한도로 거리를 질주하고 서울의 거리에는 살기가 감돌기만 하였다. 용산 육본 벙커 내에 있는 작전상황실에 들어가니 25일 아침부터 밤낮 2 주야를 꼬박 새운 작전국 정보국 장병들은 잠을 자지 못하여 눈이 빨갛게 충혈이 되어 있고 질서도 없고 우왕좌왕 전화 통화 관계로 실내는 장바닥처럼 떠들썩하고 소란하기만 했다. 1975년 8월 1일 (금) 소나기 여천(麗川)공업단지 방문. 남해고속도로를 따라 여천단지 방문, 호남정유에서 오찬. 메탄올 공장, 칠비(七肥), 삼일만 부두공사 시찰. 조국근대화의 상징적 공사의 하나인 중화학 공업단지, 여천단지의 공사가 그 동안 여러 가지 난관이 많았고 특히 석유파동 이후에는 설상가상격으로 애로가 겹쳤으나 그래도 예정 공정대로 착착 추진이 되고 있는 것을 보고 기쁘기 한량없다. 관계 책임자들의 노고를 치하하다. 메탄올 공장이 금년 말에 완공되고, 칠비가 1977년 3월에 준공되고 삼일만 항만시설이 또 완공되고 석유화학 공장들이 1978년경에 완공이 되었을 때를 예상해 보면서 부풀은 희망과 자신감을 가득 간직하고 저도(猪島)로 돌아왔다. 남해고속도로의 쾌적한 기분은 배할 데 없고 불과 수년 전만 하더라도 교통사정이 극히 불량하던 이 고장에 고속도로가 개통됨으로써 연도(年度) 농촌의 모습도 일신하였고 연도 농촌이 기름져 보였다. 1963년 봄, 호우와 홍수로 보리농사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적이 있었다. <적미병>이라는 맥류(麥類)에 걸린 병충해였다. 당시 이 지방을 지날 때(아마도 진양 부근이라고 기억된다) 어느 농가에 들었더니 노인 농부가 썩은 보리이삭을 만지면서 "우리는 이제 무엇을 먹고 산답니까?" 하고 눈물이 글썽한 것을 보고 나는 "홍수 피해 복구에 농민들이 협력해서 열심히 노력하면 정부가 여러분을 돌봐드릴 것이니 용기를 잃지 마시오" 하고 격려했다. 그러나 몹시도 나는 마음이 괴롭고 가슴이 아팠었다. 1962년에는 큰 한해(旱害)로 농민들이 타격을 입었는데 다음해 63년 봄에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또 농민들이 큰 타격을 입었을 때였다. 나는 남해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연도 농촌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때의 일을 회상해 보기도 했다. 1975년 8월 15일 (금) 소나기 가세월이라더니 벌써 아내가 간 지 1년이 되었구나. 세월은 과연 유수와 같아 빠르도다. 작년 이날, 생각하기조차 괴로운 이날. 작년 이날 09:45경 아랫층 집무실에 오렌지색 한복차림으로 내려온 당신과 같이 식장으로 향하였다. 그것이 당신이 청와대를 생전에 마지막 하직하는 길이었다. 작년의 오늘은 나의 일생중 가장 긴 하루요 가장 괴롭고도 슬픈 하루였다.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것 같은 허탈에 빠진 그날이었다. 모든 것이 다 귀찮고 나의 심신에서 모든 용기와 의욕을 잃어버리게 한 그날이었다. 그로부터 1년이란 세월이 벌써 흘렀다. 지난 1년 남모르게 수없이 많이 혼자 울기도 했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야(野)에 묻혀 버리고 싶은 생각이 몇번이고 일어났다. 그러나 이 엄청난 정신적 타격과 실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내와 인내로서 스스로를 격려하면서 용기를 되찾기에 안간힘을 다 섰다. 그럴때마다 아내 영정앞에 앉아 아내와 대화를 했다. 아내는 언제나 나에게 격려와 용기를 일깨워 주었다. 아내의 유지를 받들어 아내가 다 펴지 못한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실의를 박차고 일어서야 했었다. 고인의 그 지성을 받들고 그 숭고한 정신을 구현하기 위하여 더욱 분발할 것을 몇번이고 다짐했다. 이렇게 하는 것이 고인의 유지를 받들고 희생을 헛되게 하지 않는 길이라고 나는 굳게 믿고 있다. 오늘도 동작동 국립묘지에는 아내의 산소를 참배하는 행렬이 이른 새벽부터 종일 계속되었다. 15만명이나 된다고 한다. 팔순의 노인, 몸이 불편한 상이군인, 맹인, 불구자, 가정주부, 학생, 시골서 원로에 올라온 각계 국민, 외국 인사등 8월의 태양이 쪼이다가 소낙비가 쏟아지기도 했는데 질서정연하게 순박한 참배객의 행렬이 끊일 줄을 모른다. 저녁 TV에서 이 광경을 보고 눈시울이 뜨거웠다. 고인의 평소 몸에 밴 인간성과 누구에게나 부드럽고 겸손한 사랑의 열매가 모든 사람들 마음속에 깊숙이 뿌리박은 유덕의 소치일 것이다. 1975년 8월 19일 (화) 일기 구름 한점 없는 청명한 날씨다. 그러나 낮에는 섭씨 33.4도를 오르내리는 노염이 기세를 부린다. 작년 8월 19일 나의 사랑하는 아내를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유택으로 떠나 보내고 마지막 작별을 하던 날이다. 벌써 1년이 갔구나. 정든 청와대를 마지막 떠나며 한마디 인사도 없이, 한번 뒤돌아 보지도 않고…. 청와대 정문에서 당신을 마지막 떠나보내고 꽃수레가 현무문 앞에서 왼쪽으로 꺾어서 중앙청으로 소리없이 사라져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피눈물을 머금던 그날. 그 생각이 새롭기만 하구나. 회자정리요, 생자필멸이라는 무상의 도리를 인간의 힘으로 어찌하랴. 오늘도 저 남산 중 허리에 우뚝 솟은 구 '어린이회관'을 창밖으로 바라보면서 하염없이 당신의 그 단아한고 다정스럽던 모습을, 그림자를 그려보며 언제까지나 서 있다오. 구름 한점 없는 저녁 하늘에는 7월 31일(음) 티없이 맑고 밝은 달이 둥실떠서 장안을 비치고 있다. 봄이오면 어김없이 찾아 1975년 8월 27일 (수) 맑음 미국 국방장관 슐레진저 씨 내방(11시). 오후 2시 30분까지 오찬을 같이 하면서 한반도의 제반 정세와 한미 공동관심사에 관하여 격의 없는 의견교환을 했다. 한국정부의 자주국방 결의와 노력에 대하여 슐레진저 장관은 매우 기뻐하면서 미국정부는 한국의 방위을 위하여 최대의 지원을 하겠다는 포드 대통령의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자립경제(自立經濟), 자주국방(自主國防)의 완성이 내가 기여하고 완수해야 할 사명이다. 자조자(自助者)는 천조(天助)라고 하였다. 우리 국민의 염원은 하늘도 기필코 도와주리라. 지하의 아내도 우리를 반드시 도우리라. 1975년 9월 2일 (목) 영동고속도로 개통 1주년, 오전 10시 장성호(長城湖) 댐 준공식에 참석하고 준공비 제막식 통수식도 동시에 거행되었다. 영산강 유역의 종합개발사업의 제 1 단계 사업인 장성 담양 광주 나주 4개 댐이 오늘 준공됨으로써 여기에 담수된 2억 6천만 톤의 저수는 하류 1시 6개 군에 몽리(蒙利)를 하게 되고 3만 5천 정보가 한ㆍ수해로부터 벗어나는 전천후 농토가 되는 것이다. 이 지방 농민들의 천년의 한을 풀어주는 대역사가 1973년 4월에 착공하여 우리 기술진에 의해서 7백 3십억이란 방대한 예산으로 완성된 데 대하여 무한히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앞으로 1981년까지 제 2 단계 사업이 완료되면 영산강 하구언이 완성되고 3ㆍ4단계 사업(1995년 완료)까지 완료하면 영산강 유역은 천재(天災) 없고 기름진 옥토가 조성될 것이다. 헬기로 여타 3개 댐은 공중시찰을 하고 영산강 하구 나불도에 착륙, 방조제 공사 예정지점을 시찰하고 광주비행장으로 돌아와서 점심을 들고 전용기편으로 귀경하다. 금일은 1년 전 영동고속도로와 동해고속도로가 개통된 지 만 1년이 되는 날이다. 태백산맥을 뚫고 국토를 동서로 관통하여 국민들이 모두 쾌재를 불렀던 감격적인 날이었다. 2백 90억이 소요된 고속도로이지만 1년 동안에 실질적으로 2백 90억원의 이익이 나왔다고 생각된다. 초기에는 주로 승용차가 많이 통행을 하고 화물자동차는 25%에 불과했으나 지금은 화물차가 50%를 넘는 다고 하니 명실상부한 산업도로가 된 셈이다. 동해안의 풍부한 자원, 설악산을 비롯한 명승 고적, 새로운 가치를 발휘하고 개발을 기다리고 있다. 부강한 나라를 건설하기 위하여. 1975년 10월 3일 (금) 맑음 단기 4038년 개천절이다. 단군 성조(聖祖)가 이 땅에 나라를 세우신 지 4038년. 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민족의 이상을 구현하기 위하여 지난 4천년 동안 우리 조상들이 이 땅에 생을 영위하면서 가꾸고 건설하고 키워왔다. 영고성쇠(榮枯盛衰), 민족이 걸어온 역정에는 허다한 굴곡과 기복도 있었으나 한 조상의 핏줄을 이어받아 연면히 조국의 수호와 민족의 발전을 위한 민족의 전진은 계속되어 왔다. 앞으로도 영원히 계승될 것이다. 올바른 민족사관(民族史觀)에 입각하여 배달민족이 걸어온 전통(傳統)과 정통(正統)을 우리들이 계승하고 창조적인 발전을 위하여 온 겨레가 가일층 분발하고 정진해야 하겠다.
오늘이 아내와 결혼한 지 만 25년이 되는 날이다. 아내가 있었다면 은혼식을 올리고 축배를 올렸을 터인데.. 1950년 12월 12일 대구시 모 교회에서 일가 친척.친지들의 축복을 받으며 식을 거행하고, 아내와 백년 해로를 맹세하였다. 24년만에 아내는 먼저 가고 말았다. 남들은 은혼식 금혼식을 올리며, 일생의 반려로 자손들의 축복을 받으며 노후를 즐기는데 아내와 나와의 사이는 어찌 24년밖에 시간을 주지 않았을까. 25년 전 오늘의, 그 착하고 수줍어 하던 아내의 모습이 아직도 선한데, 이제 25년이란 세월이 흐르고 아내와는 유(幽)와 명(明)을 달리하게 되었으니 인생이란 과시(果是) 무상하도다. 1976년 1월 20일 (금) 맑음 연두 중앙관서 순시 개시, 오전 10시 경제기획원. 오후 1시 30분 재무부 방문.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종사원에게 봉급을 물어보았더니 작년 12월에는 4만 4천원이었는데 1월부터 7만 7천원 정도라고, 상여금을 합치면 월평균 8만여 원이 된다고 기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사람들에게 현재 물가표준으로 배만 더 보수를 인상하여 줄 수 있다면 극히 만족하겠지 하고 혼자 생각해 보았다. 앞으로 4,5년 내에 그러한 수준까지 향상되도록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한다. 1976년 5월 16일 (일) 흐름 5.16혁명 15주년 기념일이다. 15년전 오늘 새벽에 이 나라의 젊은 군인들이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바로잡기 위하여 구국의 횃불을 높이 들고 궐기했다. 오늘 새벽 동녘이 틀 무렵 혁명군 부대가 결사의 각오를 굳게 간직한 채 새벽바람 찬이슬을 마시며 숙연히 한강대교를 도강했다. 고요히 잠든 수도 서울은 역사의 새로운 장이 바뀌는 이 순간까지 적막 속에 초여름의 피곤한 잠을 이루고 있다가 갑자기 술렁이기 시작했다. 부패와 부정과 무능과 안일, 정체와 무기력으로 기식(氣息) 암암하던 이 사회에 새로운 활력소와 소생의 숨소리가 흘러나오고 몽롱한 깊은 잠결에서 잠을 깨고 제 정신을 차리기 시작한 것이다. 오전 5시 국영방송을 통해서 혁명공약이 전파를 타고 전국 방방곡곡에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새 역사가 전개되 시작했다. 그 순간부터 15년이란 세월이 흘러갔다. 그러나 혁명은 아직 완결된 것이 아니다. 아직도 줄기차게 진행중에 있다. 가지가지의 고난과 저항과 훼예포폄(毁譽褒貶)을 들어가면서 5.16의 완성은 우리 나라를 선진 공업국가 수준까지 끌어올리고 자주국방 자립경제를 달성하여 평화적 남북통일의 기반을 구축하여야만 한다. 1980년대 초에는 이 목표가 달성될 것으로 확신한다. 1976년 6월 25일 (금) 흐림 6.25 26주년이다. 대역(大逆) 김일성 도당들이 동족상잔의 전쟁을 도발한 지 26주년이 된다. 조국강산을 피로 물들이고 국토를 초토화시키고 수십만의 동포가 고귀한 생명을 잃었다. 대한민국을 공산화하기 위해서 소위 남조선 해방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이처럼 엄청난 죄악을 저질렀다. 반만년 역사상 동족끼리 이처럼 처참한 살육전은 없었다. 이 대역무도한 놈들의 이 죄과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나. 천추에 씻을 수 없는 이런 엄청난 죄를 범하고도 지금도 또다시 남침의 야욕을 버리지 않고 호시탐탐 남침의 기회를 노리고 있으니 이 만고역적들을 여하히 치죄해야 하나. 길은 하나뿐이다. 전력을 경주하여 우리의 국력을 배양하는 길이다. 역적도당들에게 천벌을 가할 수 있는 막강한 국력을 길러서 민족의 원한을 풀어야 한다. 애국선열, 전몰군경, 반공애국투사들의 천추의 한을 풀어줄 수 있는 길은 오직 이 길 하나뿐이다 나의 모든 생명을 바쳐서 이 민족적 사명을 기필코 완수하리라. 천지신명이시여! 나에게 이 대업을 완성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와 힘을 주옵소서! 1976년 10월 13일 (수) 맑음 10시 40분 기동차 편으로 서울역발. 영산강 유역개발 제 1 단계사업 준공식 참석차 광주로 향발. 오후 4시역 광주 도착. 기차편으로 공주행은 오래간만이다. 연도 농촌의 모습이 수 년 전에 비하여 괄목할 만큼 변모한 모습이 눈에 띈다. 새마을운동의 실적이 농촌 방방곡곡에 나타나고 있고 풍요에 넘실거리는 가을의 평화는 아름답기만 하다. 광주시내 모습도 1년여만에 보는 눈에는 깨끗하고 알뜰하게 다듬고 가꾸어진 모습 역연하다. 시민들이 내 고장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씨가 구석구석에 보여 기쁘기 한이 없다. 도착 후 목욕을 하고 고건(高建) 지사를 대동하고 무등산 너머에 있는 김덕령(金德齡)장군의 사당, 충장사를 참배하고 돌아오다. 1976년 10월 17일 (일) 흐림
10월 유신 4주년이 된다. 유신 4년 동안에 우리 나라는 과거 10년 내지 20년 정도의 변화를 가져왔다. 국력이 그만큼 커졌다. 정부와 국민이 일치단결하여 피땀흘려 노력한 결과일 것이다. 그 동나 73년 말부터는 유류파동으로 시작된 국제경제의 일대 불황이 있었다. 75년 초에는 인도지나 반도의 비극이 있었다. 북괴의 남침땅굴 발견도 이 기간 중에 있었다. 8.18판문점 만행사건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꾸준히 국력을 신장시켜 왔고 주변정세의 격변과 북한 침략집단의 집요한 도발과 위협에 미동도 하지 않고 우리의 안보태세를 훨씬 더 튼튼하게 다져 놓았다. 우리의 방위산업도 괄목할 만큼 발전 성장하였다. 우리의 경제발전은 국제사회에서 경이의 대상이 되고 개발도상국 중의 모범국가로서 선전이 되고 있다. 그 원인은 딴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의 일대 자각과 단결과 땀흘려 일한 노력의 대가이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의 이 건설의, 성장의 결과는 값진 것이고 보람있는 것이다. 하늘은 한 민족이 자기의 운명을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고 개척하겠다는 결의와 노력을 경주할 때는 반드시 거기에 응분한 보상을 준다는 것으로 우리는 믿어야 한다. 농촌사회에서 5천년의 유산인 가난이 하나하나 벗겨져 나가고 새로운 생기 약동하는 농촌 모습으로 달라져 가는 것은 새마을운동의 성과이다. 농민들이 의지와 의욕과 노력의 대가가 농촌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10월 유신은 구국의 결단이었다. 우리 국민 전체의 결단이었다. 새 역사의 출범이었다. 근면, 자조, 협동하는 데에서 새 역사가 하루하루 창조되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중단해서는 안 된다. 계속해야 한다. 밝은 내일은 반드시 도래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다.
1979년 10월 17일 (박대통령의 생애 마지막 일기) 7년 전을 회고하니 감회가 깊으나 지나간 7년간은 우리 나라 역사에 기록될 중요한 시기이기도 하다. 일부 반체제 인사들은 현 체제에 대하여 집요하게 반발을 하지만 모든 것은 후세에 사가(史家)들이 공정히 평가하기를 바랄 뿐. 1줄요약.내 一生 祖國과 民族을 爲하여 |
첫댓글 느끼면서 잘 읽었습니다. 1972년 유신이 발표될때 나는 현직 공무원으로 그 정당, 당위성을 국민에게 홍보하는 일도 했는데, 어떤일도 찬성, 반대는 있게 마련인것이 인간세상이겠지. 하여튼 진정한 애국 지도자는 박정희 대통열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