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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연기로 이 년을 감옥에서 보냄
행 24:22-27
22 벨릭스가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 고로 연기하여 이르되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오거든 너희 일을 처결하리라 하고
23 백부장에게 명하여 바울을 지키되 자유를 주고 그의 친구들이 그를 돌보아 주는 것을 금하지 말라 하니라
24 수일 후에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거늘
25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26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
27 이태가 지난 후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소임을 이어받으니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구류하여 두니라
행 24:22-27 / 벨릭스는 그리스도교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는 파견대장 루시아가 온 다음에 사건을 심의하겠다고 말하고 재판을 연기하였다. 23) 그리고 바울을 감금하여 두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간수들에게는 그를 정중하게 대하고 바울의 친구들이 면회하거나 뒷바라지를 해줄 수 있도록 편의를 봐주라고 단단히 일러두었다. 24) [가이사랴 감옥에 갇힌 바울] 며칠 후 벨릭스는 유대인인 자기 아내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내어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신앙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었다. 25) 바울이 정의와 절제와 장차 올 심판에 대해 설교하자 벨릭스는 두려운 생각이 들어 `이제 그만 가보시오. 기회를 봐서 당신을 또 부르겠소.' 하고 말하였다. 26) 그는 한편으로는 바울이 혹시 뇌물이라도 바치지 않을까 해서 자주 바울을 불러내어 대화를 나누었다. 27) 이렇게 2년이 흘러 벨릭스의 후임으로 보르기오 베스도가 부임하게 되었다. 그런데도 벨릭스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려고 바울을 그대로 감옥에 가두어 두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벨릭스가 ‘이 도’, 즉 유대교 안에서 일어난 나사렛 예수에 관한 일을 자세히 알고 있다고 썼습니다. 실제 벨릭스는 바울을 만나 깊이 있는 강론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말씀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서도 그것을 믿지는 않았습니다.
연기된 재판(22-23) 벨릭스는 바울에게 죄가 없는 줄 알면서도 석방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의 반발을 우려하여 또다시 천부장이 올 때까지 선고를 연기합니다. 이 같은 연기 결정은 처음에는 유능한 재판관의 조심스럽고 현명한 판단인 것처럼 보였으나, 실상은 유대인들의 집단 소송에 맞서 바울을 풀어 줄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후 바울에게 약간의 자유를 주었지만, 그는 공의를 실천하는 지도자는 아니었습니다.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24-25) 벨릭스는 아내와 함께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도를 들었습니다. 바울은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에 대하여 설교했습니다. 의와 절제와 심판은 총독 부부를 위하여 바울이 선택한 주제로, 그들의 불의와 무절제한 삶을 지적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한 것입니다. 바울은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진 이 기회를 자신의 석방을 위한 탄원의 기회로 사용하지 않고, 그들이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도록 용감하게 권하는 기회로 사용하였습니다. 바울은 강렬한 열의를 가진 전도자였습니다.
또 다른 기다림(26-27) 복음과 거리를 둔 벨릭스는 곧장 뇌물을 기대하는 어둠에 빠집니다. 부족할 것이 없을 것 같은 부와 명예를 지니고 있었음에도 여전히 돈에 대한 욕심 때문에 복음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습니다. 이렇듯 우유부단했던 사람, 지극히 정치적이었던 사람, 물질에 대한 탐심을 포기할 줄 몰랐던 사람인 벨릭스에게 하나님은 2년 동안이나 기회를 주셨지만 그는 결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었습니다. 바울을 총해 벨릭스에게 뿌려진 천국의 씨는 마치 길가에 떨어진 것처럼 아무런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적용: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발을 2년이나 가이사랴 감옥에 묶어두십니다. 바울에게 아무런 죄가 없으며, 그를 로마로 가게 하실 계획을 분명히 갖고 계신데도 말입니다. 게다가 그 2년의 시간에 대해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으십니다. 지금 당신의 삶에서 그 ‘2년’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까? 기다림밖에 할 것이 없을 때, 기다리는 것이 최선의 순종이 될 것입니다.
어느 아이가 주일학교 시간에 하늘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설레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는 집으로 돌아와서 엄마에게 말했습니다. “엄마,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하늘나라를 준비하셨다는 것을 오늘 배웠어요. 하늘나라는 참으로 아름답고 좋은 곳이래요.” 듣고 있던 엄마는 아이의 말이 맞다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칭찬을 해 주었습니다. 아이는 다시 엄마에게 말했습니다. “엄마, 엄마는 다른 여행 준비는 언제나 철저하게 준비하시면서 그 아름다운 하늘나라 여행을 위해서는 왜 준비를 하지 않으세요?”
< 설 교 >
짝퉁 아니십니까?
배진기 목사
우리는 모조품(imitation)을 가짜라는 의미에서 짝퉁 또는 짜가라고 부릅니다. 소위 명품이라는 물건들이 나타나면서 짝퉁들도 등장을 했습니다. 명품이라고 알려져서 사람들이 선호하지만 너무 비싸고 구하기가 힘들어지면서 저렴하고 쉽게 명품을 가지고자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모조품을 만들어 유통 시키는 모조품 산업은 세계적으로 갈 수록 급성장하고 있습니다.
모조품의 심각한 문제는 이 모조품들이 사람들의 생명과 건강을 위한 건강식품이나 의약품에까지 미치고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세계보건기구(WHO)의 보고에 따르면 전세계에 유통되는 의약품의 10퍼센트가 가짜라 고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 우리들의 교회 안에 이 짝퉁, 짜가 신앙인이 너무도 많다는 것입니다. 전형적인 짝퉁 신앙인의 모습이 오늘 본문 속에 나오는 벨릭스 총독을 통해서 보여지고 있습니다. 벨릭스는 짝퉁 신앙인의 모델입니다. 내 안에 벨릭스 같은 모습은 없는지 점검하여 회개하므로 진품, 명품 신앙인이 되도록 합시다.
예수님은 로마의 초대황제인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통치라에 탄생하셨습니다. 그리고 주후 14년에서 37년까지 로마를 지배했던 티베리우스 황제 때인 주후 30년에 제3대 유대 총독이었던 폰티우스 빌라투스에 의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3차에 걸쳐서 활발하게 복음을 전했던 사도바울은 네로 황제가 통치하던 때에 유대총독이었던 본문에 벨릭스로 표기된 안토니우스 펠릭스에 의해 가이사랴에서 구금생활을 하게 됩니다.
벨릭스는 주후 52년부터 60년까지 유대를 다스렸던 총독이었습니다. 바울이 가이사랴에 구금 되었을 때 벨릭스 총독의 아내는 본문 24절에 소개된대 로 유대여자 드루실라였습니다.
드루실라는 주후 38년에 태어난 헤롯대왕의 손자 헤롯 아그립바 1세의 막내딸이자 아그립바 2세의 누이동생이였습니다. 오빠인 아그립바2세는 드루실라를 15세의 나이에 수리아의 작은 분봉국 에메사(Emesa)의 아지주스(Azizus)왕에게 시집을 보냈습니다.
벨릭스가 총독으로서 그 체면을 불구하고 남의 아내가 된 드루실라를 탐했던 것으로 보아서 드루실라는 그 미모가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총독이 자기 관할 지방 출신의 여자와 결혼하는 것은 로마의 정책에 어긋낫지만 벨릭스는 당시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돈독한 신임을 받던 자기의 형 팔라스의 배경을 믿고 구브로의 마술사 아토모스를 시켜서 드루실라를 유혹하여 아지주스를 버리고 자기와 결혼하게 했습니다. 드루실라는 벨릭스의 세 번째 아내가 되었습니다. 이때 드루실라는 16세의 어린 나이였습니다.
2년후 벨릭스는 유대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했으나 더 큰 소요가 일어나고 많은 사람이 죽게되는 소동에 책임을 지고 파면되어 로마로 소환되었으나 그의 형 팔로스의 중재로 큰벌은 면하게 되었습니다.
벨릭스는 탐욕에 마비된 세상 사람의 모형입니다. 그리고 짝퉁신앙인의 전형적인 모델입니다. 그는 바울의 말을 듣기를 원하여 그를 자주 불러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본문 26절에 "동시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하여 바라는고로 더 자주 불러서 같이 이야기 하더라"라고 벨릭스의 태도에 대해 기록하였습니다.
벨릭스와 드루실라는 바울에게서 말씀을 자주 들었으나 아무런 변화도 회개도 없었던 사람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출석은 하지만 믿음이 없는 짝퉁신앙인의 모습입니다. 말씀은 잘 듣지만 변화는 받지 않습니다. 돈을 받고자 하는 목적으로 바울을 불러 말씀을 들었던 벨릭스 총독과 같이 자신의 육신적인 목적이나 위안을 위해 말씀을 듣는 모조품 신앙인이 교회 안에 너무 많이 있습니다.
첫째, 벨릭스는 말씀을 듣고 두려움을 느꼈지만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로마서 10:17에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말씀 하였습니다. 그러나 벨릭스는 말씀을 들으므로 믿음이 주어지는 기회를 회피해 버렸습니다. 본문 25절에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회개의 기회를 회피한 것을 봅니다. 짝퉁신앙인은 감동이나 느낌은 받지만 회개에 이르지 아니하고 회개를 뒤로 미루거나 회피해버립니다.
성령님의 책망하시는 역사를 외면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신앙인은 성령님께서 말씀을 통해 자신을 찌를 때에 회개하고 믿음의 세계에 발을 내딛게 됩니다. 사도행전 3:19절에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라고 말씀 하였습니다. 회개를 회피하는 짝퉁 신앙인이 되지 말고 회개함으로 새로움과 유쾌함을 얻는 참 믿음의 백성들이 됩시다. 말씀이 주어질 때에 죄를 깨닫는 사람은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때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감동만 받고 말면 하나님이 더욱 진노하십니다.
말씀을 들으므로 근심하고 각성하는 참 신앙인이 됩시다. 고린도후서 7:10에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 말씀 하였습니다.
예전에 오천에 사시던 한 성도님이 저희 교회를 출석하셨습니다. 한동안 부인의 인도로 잘 나오던 분이 갑자기 출석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심방을 갔는데 그 분이 말씀하기를 "교회에 가면 항상 목사님이 내가 그 주간에 잘못한 일을 다 말하므로 너무 괴롭습니다"라고 하며 교회 출석을 거부하였습니다. 그 분은 이중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에 찔림이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 분을 사랑하신 증거입니다. 그런데 그 분은 회개를 거부하였습니다. 짝퉁 신앙인으로 출석은 했지만 구원에 이르지 못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여러분을 괴롭게 하고 고민하게 하고 아프게 찌른다면 여러분은 복 받은 백성입니다. 회개하고 구원의 자리에 서서 하나님의 자녀의 평안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벨릭스는 탐욕을 전제로 말씀을 들었습니다.
벨릭스는 자주 바울을 불러서 그 말씀을 듣고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벨릭스가 바울을 자주 부른 이유는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탐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문26절에 "동시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하여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서 같이 이야기 하더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돈을 바라는 탐욕을 전제로 바울의 말씀을 받은 벨릭스는 결코 믿음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적인 잣대로 받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 받아들이는 세속적이며 기복적인 짝퉁, 짜가 신앙인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디모데전서 6:10에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사도 바울이 경고 하였습니다.
인간적인 욕심과 탐욕을 버리지 못하면 아무리 기도하고 말씀을 들어도 참 믿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언제나 말씀 앞에 순전한 마음으로 서는 참 믿음의 사람들이 됩시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고 하지 말고, 자신이 바라는 것을 얻으려고 집착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를 사모하십시오. 로마서 12:1-2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씀 하였습니다.
참된 예배는 생활과 이어집니다.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것은 바로 우리의 삶이 예배가 되어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세대의 특징은 자기중심적이며 탐욕적인 자세를 가지고 모든 것을 대하는 것입니다.
이 세대를 본 받고 살면 짝퉁신앙인이 됩니다. 참 신앙인은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삶을 삽니다.
셋째로, 벨릭스는 무책임한 총독이었습니다.
벨릭스는 바울의 무죄를 알았습니다. 벨릭스는 오랫동안 유대를 통치했으므로 문제의 핵심을 잘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충분히 대제사장과 유대인들의 요구가 무엇인가를 알아들었고 바울의 억울함이 무엇인가도 알았습니다. 벨릭스가 진정으로 총독으로서의 책임감을 가지고 의로운 판결을 했다면 바울을 석방하는 것이 맞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는 바울을 아무런 이유도 없이 가이사랴에 구류해 두었습니다. 무책임한 총독이었습니다.
어떤 책임도 지기를 거부하는 짝퉁 신앙인들이 바로 벨릭스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말씀을 분명하게 알고 하나님의 뜻을 충분하게 이해하면서도 실천하지 않고 현실에 타협하는 사람들이 바로 짝퉁입니다. 말씀 듣기는 좋아 하면서도 신앙의 어떤 책임도 지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바로 가짜 신앙인들입니다. 전도해야 함을 압니다. 헌신해야 함을 압니다. 절제해야 함을 압니다. 기도해야 함을 압니다. 그러나 알고 깨닫기만 할 뿐 하나도 행하지 않습니다. 성도의 당연한 의무를 짐으로 여기고, 선을 행하고 베푸는 기회를 부담으로 여깁니다. 책임은 회피하고 권리만을 바랍니다. 이것이 짝퉁 신앙인입니다.
넷째로, 벨릭스는 기회주의자였습니다.
벨릭스는 바울의 무죄를 알면서도 유대인들이 두려워 석방해주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바울의 로마시민권이 두려워 바울을 유대인들에게 내주지도 않았습니다. 기회만을 보고 있는 벨릭스 때문에 사도 바울은 2년 이상을 가이사랴에서 감금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벨릭스는 부도덕하고 무책임한 기회주의자였습니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는 벨릭스에 대해 "그는 온갖 수치스러운 일들을 자행하면서도 자신은 벌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부류의 사람이었다"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오직 자기의 이익만을 생각하므로 다른 사람의 피해는 외면해버리고 상황을 따라서 유리한 쪽을 선택하는 기회주의적인 벨릭스의 태도는 오늘 세상과 교회에 양다리를 걸쳐 놓고 자기 편한대로 오고가는 짝퉁, 짜가 신앙인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신앙에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하나를 바로 선택하려면 다른 하나를 과감하게 버리고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단호하게 세상의 것을 단절시키는 참 신앙인이 됩시다.
기회주의적인 짝퉁 신앙인의 모습을 단호히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참 믿음의 사람들이 됩시다. 결단합시다. 예수님은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버리라고 아주 단호한 비유를 들어 거듭해서 교훈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29-30에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고 말씀 하셨으며 마태복음 18:8-9에서도 반복해서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양다리를 걸치고 적당히 신앙생활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 3:15-16에서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우리는 짝퉁과 짜가가 범람하는 모조품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도 짝퉁과 짜가가 너무나 많습니다.
벨릭스와 같이 말씀도 듣기는 좋아하나 찔림이 있어도 회개치 아니하는 짝퉁의 모습을 버립시다. 탐욕에 젖어서 자기중심적인 아집에 집착하는 이기적인 짝퉁의 모습을 벗어 버립시다. 받을 것만 바라보고 자신의 의무는 생각지 않는 무책임한 짝퉁의 모습을 청산합시다. 기회만을 보고 양다리를 걸친 채 결단하지 못하는 짝퉁의 모습을 회개합시다.
짝퉁의 자리를 벗어나서 참 믿음의 사람으로 철저히 회개하고 순전한 마음으로 책임을 다하며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기를 결단하는 참 믿음의 명품, 진품 성도들이 됩시다.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 봅시다. “짝퉁이 아니십니까?”
지금 말고 다음 기회에
윤영택 목사
지금 말고 조금 있다가, 오늘 말고 내일, 아니면 몇 일 후에 … 이런 식으로 무엇인가 할 일을 미루고 연기했던 적이 있지요? 그래서 결국 기회를 놓치고 후회했던 경험들이 모두 있을 겁니다. 어떤 일을 앞두고 이 다음에 해야지 하고 미루는 것은 게으른 습관 때문이기도 하고 마음의 부담이나 두려움 때문일 수 있습니다. 아니면 다른 일에 더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당장은 무관심할 수도 있습니다. 성격상 느리게 움직이는 사람이 있고, 일의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일처리하는 방식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제 아내는 거의 언제나 빨리 지금 바로 해결하자는 식이고 저는 보통 한 박자 느리게 움직이는 편입니다. 그래서 가끔 저의 느린 반응 때문에 답답해 합니다. 눈에 보일 때 당장, 생각 났을 때 빨리 처리하는 것이 대부분 좋은 결과를 얻기는 합니다. 그런데 때로는 급한 마음에 서두르다 일을 더 어렵게 만들기도 합니다. 아내는 물건을 사고 받은 영수증이나 당장 필요없는 허드렛 것은 금방 버리고 치우는 편인데 저는 다음에 필요할지 모른다 생각되는 것은 일단 이 구석 저 구석에 쌓아두는 편입니다.
이것 때문에 가끔 작은 실랑이가 벌어집니다. 전에 보관했던 것을 찾는데 보이질 않아 아내에게 물으면 벌써 재활용 통에 버렸다는 말을 여러 번 듣습니다. 어수선하지 않고 깨끗해서 좋기는 한데 필요했던 것이 없어져 다시 구해야 한다 생각하면 그 순간 열이 나고 ‘또 벌써 버렸어?’ 합니다. 그런데 모아 두고 묵혀 둔 물건이나 서류 등은 대부분 시간이 지난 다음에 결국 재활용 통으로 들어간 경우가 더 많아 아내의 신속한 처리 방식과 깔끔함 덕을 더 많이 봅니다.
이렇게 사소한 일들은 천천히 틈나는 대로 처리해도 큰 손해를 보거나 일을 망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인생의 중요한 일을 결정을 할 시점에 과감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리거나 기회를 봐서 이 다음에 하겠다고 미루는 습관이 반복되면 크게 후회할 일도 생깁니다. 학교와 전공과목을 선택하고 직장과 거주지를 정하며 평생 한 배를 타고 인생 항로를 항해할 배우자를 정할 때가 왔는데 정신을 다른 곳에 두고 이 다음에 틈이 나면 그때 다시 생각해보겠다 한다면 기회가 저 멀리 달아나 버리고 평생 후회할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지금 당장 버려야 할 나쁜 습관, 버릇들을 끌어 안고 이 다음에 틈나면 다시 고려해보겠다 하면 나중에 정말 큰 일을 당합니다.
신앙의 문제 역시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로 결심한 그 마음을 변함 없이 유지하며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려고 하지만 시시때때로 다가오는 유혹과 시험들 앞에서 맥없이 무너져 버리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개인 묵상을 할 때나 주일예배 혹은 인터넷 방송 설교를 들을 때 나의 죄와 허물이 드러나고 내 마음이 찔릴 때 어떻게 행동합니까? 듣고 깨달은 것으로 그치고 귀를 깨끗하게 청소한 것으로 만족한다면 삶의 변화는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양심의 찔림을 받고 내가 이렇게 살면 안되겠구나 깨달았다면 할 수 있는 대로 빨리 그 자리에서 일어나 올바른 방향을 향해 돌아서는 것이 나를 살게 하는 지혜로운 행동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말씀을 듣고 찔림은 받았지만 삶의 변화는 가져오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사도행전에는 사도들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의 다양한 반응이 나옵니다. 마음에 찔림을 받고 회개하며 예수께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더러운 양심과 행동이 드러난 것이 두렵고 부끄러워 더 나쁜 방향으로 치닫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순절 날 예루살렘 성전에서 외친 베드로의 설교를 들고 마음에 찔림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고’ 하고 회개하며 돌아왔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갇혔던 빌립보 감옥의 간수는 ‘선생들아 우리가 무엇을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하며 발 앞에 엎드렸고 바울을 집으로 데려가 말씀을 듣고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가이사랴에 있던 로마 군대의 백부장 고넬료는 경건하여 온 집안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고넬료가 시몬 베드로를 집으로 청하여 그 말씀을 듣기 위해 발 앞에 무릎을 꿇었고 십자가의 복음과 부활의 도리를 들을 때 성령이 충만하여 온 집안이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베드로와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 예수 이름으로 아무 것도 전하지 못하도록 옥에 가두고 매를 때리던 유대인의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있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헤롯 아그립바의 손에 목이 잘려 순교하였고,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마음이 찔린 사람들은 귀를 막고 이를 갈며 스데반을 성 밖으로 내던지고 돌로 쳐 죽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 있던 청년 사울은 스데반이 죽어 마땅하다 여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삶이 변화된 후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아시아와 유럽을 다니며 세 차례 전도여행을 마친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려고 가이사랴에 잠시 머물고 있을 때 그를 사랑하는 제자들이 바울이 당할 고난을 예견하고 절대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위해 생명을 바치기로 작정한 바울은 죽음을 각오하고 예루살렘에 들어가 사도들과 교회의 장로들에게 문안하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통해 이방인들에게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낱낱이 보고하였습니다.
그리고 성전에 들어갔다가 유대인들에게 붙들린 바울은 성전 밖으로 끌려나가 분노로 가득 찬 유대인들 손에 맞아 거의 죽게 되었을 때 로마 군사들과 천부장의 개입으로 몸숨을 건졌습니다. 천부장이 폭동의 진상을 밝히려고 다음날 유대인의 공회를 소집하여 유대인 대표와 바울의 진술을 들었지만 끝내 결론을 얻지 못하고 총독 벨릭스에게 이 사건을 처리해달라고 청하며 사건 경위서와 함께 바울을 총독이 있는 가이사랴로 호송하였습니다.
총독 벨릭스가 주관하는 법정에 선 유대인의 대표는 바울을 가리켜 ‘저 사람은 전염병과 같은 존재라 세상에 흩어져 사는 모든 유대인을 선동하여 말썽을 일으키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고 욕하며 저 사람이 우리의 성전을 더럽히는 죄를 범했기에 우리 손으로 처리하려다 당신의 천부장이 개입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여기까지 왔으니 총독께서 직접 심문하시면 그 죄상을 알게 될 것이라 했습니다.
총독이 바울에게 변명할 기회를 주었을 때 바울은 그들이 고소한 것처럼 성전을 더럽힌 적도 없고 사람들을 선동한 적도 없음을 진술한 후 그러나 고백할 것이 있다면 그들이 이단이라고 말하는 그 도를 따라 나도 저 사람들과 똑같이 우리 조상의 하나님을 믿으며, 나도 그들처럼 하나님이 주시는 의인과 악인의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가졌고 이 신앙에 대하여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언제나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살려고 힘쓰고 있으니 나는 다만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말한 것 때문에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다고 사실 대로 진술했습니다.
총독이 고소인들과 바울의 진술 내용을 들어보니 소송 이유가 정치적인 것이나 악행에 대한 것이 아니고 순전히 자기들의 종교와 예수라는 사람의 부활에 관한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총독 벨릭스도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말은 이전에도 들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 소송이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일이 아니라 판단한 벨릭스는 이 다음에 천부장 루시아가 오면 그때 처결하겠다 하고 판결을 연기했습니다. 그리고 벨릭스는 백부장에게 명하여 바울을 지키되 자유를 주고 친구들 중에 누구라도 면회할 수 있게 하고 수종드는 것을 막지 말라 하며 호의를 베풀었습니다. 고소인 측 대표로 나온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유대인 장로들의 분노가 워낙 거세었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을 달래려고 바울을 구금해두었지만 속으로는 바울의 무죄를 인정하고 있던 벨릭스의 배려였습니다. 죄수가 아닌 죄수로 갇힌 바울은 느슨한 구금 상태에서 자유롭게 활동하였고 이때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복음을 전하고 편지도 자유롭게 주고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것처럼 바울이 벨릭스 총독과 그의 아내 드루실라 앞에 서게 된 것도 이런 상황 속에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헤롯 아그립바 1세의 딸이며 유대인 출신으로 로마인 총독 벨릭스와 결혼한 드루실라는 바울이 믿는 기독교에 관심이 있었고 남편에게도 기독교를 소개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관심과 호기심 때문에 벨릭스 총독 부부는 바울이 어떤 사람인지 만나보고 싶었고 그가 전하는 기독교의 도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여러 차례 불러 강론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부는 정당하지 못한 이유로 배우자들을 두 번씩 버리고 불륜관계로 결혼한 사이였습니다. 드루실라의 미모에 매혹된 벨릭스는 유대인 마술사를 동원하여 자신과 결혼하도록 설득하는데 성공하여 드루실라를 세번째 아내로 맞이하였으니 두 사람 모두 탐욕과 허영의 모형이었습니다. 벨릭스 총독 부부의 부정한 결혼생활은 이미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고 바울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벨릭스라는 인물은 워낙 돈을 좋아하는 탐관오리였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 보면 총독 벨릭스가 퇴임하고 브루기오 베스도가 부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왜 갑자기 벨릭스가 팔레스틴을 떠나게 되었을까요? 역사가의 말에 의하면, 유대인과 헬라인 사이에 인종 분쟁이 일어났는데 그때 벨릭스가 헬라인들로부터 뇌물을 받고 그들의 편을 들어 많은 유대인들이 희생되고 재산을 약탈당했습니다. 그 일로 유대인들이 로마 황제에게 탄원하였고 벨릭스는 로마로 소환되어 엄한 형벌을 받게 되었는데 그의 형의 중재로 가까스로 중벌을 면했다고 합니다. 돈이 되는 일이면 무슨 짓이라도 하는 사람, 벨릭스는 이런 종류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불러낸 그 자리는 총독 부부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는 기회였고 그들이 듣고 싶어하는 좋은 말을 골라 기분을 맞춰줄 수도 있는 자리였습니다. 바울에게 호의를 베푸는 벨릭스 부부에게 잘 보이면 무죄를 인정받아 석방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복음 전하는 사명을 잊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탐욕과 허영으로 가득한 두 사람에게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여 회개의 기회를 주려고 의와 절제와 장차 다가올 심판에 대한 말씀을 전했습니다.
예상치 못했던 바울의 책망과 경고에 벨릭스 부부는 허를 찔렸고 심히 당황스럽고 불쾌했을 것입니다. 양심을 찌르는 말씀이 두려워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바울의 말을 중단시키고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돌려보냈습니다. 그들이 꼭 들어야 할 인생의 중요한 교훈이었으며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기회가 될 수도 있었지만 끝내 받아들이지 않고 ‘오늘은 이것으로 족하니 돌아가라 다음에 틈이 나면 다시 너를 부르겠다’ 했습니다.
복음에 대한 관심은 있었지만 그 말씀을 삶에 적용하지는 않았습니다. 회개와 심판, 죽은 자의 부활이라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한낱 종교적인 지식이나 일종의 철학 사상으로 여겼고 마음 속의 탐욕은 그대로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양심을 찌르는 불편하고 곤란한 자리는 일단 피하고 이 다음에 기회가 되면 다시 듣겠다는 식으로 회개의 기회를 놓친 벨릭스는 진리의 말씀보다 뇌물에 더 마음을 두고 그 후로도 바울을 계속 불러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광야에서 복음을 외치던 세례 요한이 헤롯 안디바와 헤로디아의 부정한 결혼을 책망했다가 옥에 갇혔고 헤롯의 생일 잔치에서 목이 잘려 순교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헤롯 역시 세례 요한을 선지자로 알고 따르는 민중들이 두려워 죽이지 못했었는데 헤로디아의 간교한 술수에 넘어가 결국 요한의 목을 자르고 말았습니다. 부정을 범한 헤롯과 벨릭스 두 사람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양심의 찔림을 받았지만 다음 행동이 따라오지 못하고 머뭇거리다 회개의 기회를 영원히 놓쳐버린 가련한 영혼들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아닐까요?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배우자들의 부도덕한 행동과 물질에 대한 지나친 탐욕으로 그 속은 이미 깨어지고 만신창이가 된 가정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죄를 지적 받아 양심의 가책이 되며 심판이 두렵지만 실제로 회개하는 자리까지는 나가지 못하고 그냥 그 자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하고 시급하게 처리해야 할 인생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결단하지 못하고 미적거리는 동안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드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할 일이 생각나거든 미루지 말고 지금 하라”는 작자 미상의 시 하나를 소개합니다.
지금 하십시오
할 일이 생각나거든 지금 하십시오.
오늘 하늘은 맑지만
내일은 구름이 끼일는지 모릅니다.
어제는 이미 당신의 것이 아니니 지금 하십시오.
친절한 말 한 마디가 생각나거든
지금 말하십시오.
내일은 당신의 것이 안 될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언제나 곁에 있지는 않습니다.
사랑의 말이 있다면 지금 하십시오.
미소를 짓고 싶거든 지금 웃어주십시오.
당신의 친구가 떠나가기 전에
장미는 피고 가슴이 설레일 때
지금 당신의 미소를 주십시오.
불러야 할 노래가 있다면
지금 부르십시오.
당신의 해가 저물면 노래 부르기엔
너무나 늦습니다.
당신의 노래를 지금 부르십시오.
과거에 실패했던 사람들, 실패를 두려워하는 사람들과 나이가 들어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 두려워 머뭇거리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감동적인 글입니다. 사람의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니 결코 늦었다고 생각말고 제2의 인생을 지금 시작하라 격려합니다. 남은 인생을 제대로 살기 위해서라도 바로 지금 시작하라는 이 싯귀가 여러분의 마음에도 다가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남은 인생 그리고 영원한 삶을 제대로 살기 위해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일도 나중으로 미루지 말고 지금 하시기 바랍니다. 나간 어제가 나의 것이 아닌 것처럼 다가올 내일 역시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들어 꼭 사고 싶었던 옷, 가방이나 어떤 것들은 세일 기간이 지나면 다시는 그 가격으로 구입할 수 없고 어쩌면 똑같은 것을 다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기회를 놓친 후 두고두고 서운할 수 있습니다. 꼭 가고 싶었던 여행 기회를 놓치고 내 인생에 언제 다시 그런 기회를 또 만날까 아쉬워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내 인생이 망가지거나 아주 절단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아쉬울 뿐입니다.
그런데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에 대한 복음을 듣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기회를 만났을 때 지금은 때가 아니니 이 다음에 틈이 나면 다시 생각해 보겠다 하고 미룬다면 잠깐 후회하고 말 일이 아니라 영원히 후회할 일이 될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개인의 취향이나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달린 문제입니다. 주의 말씀 앞에 양심이 찔리고 두려운 마음이 든다면 지체하지 말고 귀를 기울이며 행함으로 옮기시기 바랍니다. 그때가 바로 나를 만나고 싶어 주님이 부르시는 시간입니다.
‘우리 죄를 자백하면 우리 죄를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시는 미쁘고 의로우신 주님’의 부르심에 두 손 들고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사55:6)하신 부르심에 믿음으로 응답하시기 바랍니다. 지금이 바로 은혜 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입니다(고후 6:2).
2012년이 한 달 조금 더 남았습니다. 주님 앞에서 정리하고 새롭게 시작해야 할 일이 있다면 내년으로 미루지 말고 이 해가 다 가기 전에 바로 시작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위로가 여러분과 함께 하길 빕니다. 우리가 옥스퍼드 한인교회에서 주의 이름으로 만난 것이 바로 이때를 위함인지 누가 알겠습니까? 여러분을 옥스포드로 보내신 하나님의 뜻은 학위나 더 나은 직장과 스팩을 쌓는 것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주께로부터 받은 기회를 그냥 흘러 보내지 말고 주님과 가까워지는 기회를 꼭 붙드시기 바랍니다. 어디를 가든지 주의 말씀에 붙들려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회를 놓친 벨릭스
서금석 목사
시카고에 사는 한 부자가 소아마비를 앓고있는 아들을 고치기 위해 오스트리아의 전문의사인 로렌스 박사를 초빙했습니다. 로렌스 박사가 정성스레 아들을 치료하여 건강이 회복되었다는 소식이 신문에 크게 보도가 되었습니다. 같은 마음에 사는 한 소년도 부잣집 아들과 같은 병을 앓고 있다가 로렌스 박사가 소아마비 병을 고쳤다는 신문을 보고 로렌스 박사를 만나 보기를 원했습니다. 만나라도 보았으면 했지만 자신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라서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비까지 내리는 날 심난해 있는 이 소년의 집에 웬 사람이 문을 두드립니다. 어떤 사람이 산책을 나왔다가 잠시 비를 피해가려고 들려 잠시 쉬기를 원했지만 소년의 어머니는 냉대하며 거절했습니다. 비오는 날 산책 나왔던 사람이 누구였는지 아십니까? 바로 그토록 만나보기만 해도 좋겠다고 했던 로렌스 박사였습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안 소년의 어머니는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늦고 말았습니다.
'기회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이 말은 기회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있다는 말 아닙니까? 문제는 그 기회를 잡느냐? 잡지 못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16에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은 다른 번역에는 "주어진 기회를 충분히 살리십시요"로 번역했습니다. 여기서 '주어진 기회'란, 기회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항상 주어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기회는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현실 속에서 기회를 찾아내는 것이고, 자신의 현실을 기회로 만드는 것이라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나무가 고요하기를 원하나 바람이 멎지 않고(樹欲靜而風不止) 아들이 봉양하고자 하나 어버이가 기다리지 않는다(恣慾養而親不待)"는 한시(漢詩)도 있습니다.
기회는 언제나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깊이 마음에 새기며 주어지는 기회를 잘 포착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누리시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벨릭스에게 의아하게 생각되는 점을 봅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유대인들이 바울을 어떻게 하든 죽이려고 유대법과 로마법에 정통한 변사 더둘로를 대동하면서까지 벨릭스 총독에게 재판을 받았지만, 그들의 계략은 벨릭스가 바울의 변론을 듣고 바울의 편을 들어줌으로써 일단은 실패하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벨릭스는 판결을 내리면서 바울에게 어느 정도의 자유를 줄 것과 친구 중 아무나 수종을 들 수 있도록 허락했습니다. 참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장면입니다. 벨릭스는 우리가 알다시피 잔인한 사람이었습니다. 얼마든지 유대이들 편에 서서 바울을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정확한 벨릭스의 의중은 알 수가 없지만 그 이유는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벨릭스는 바울의 변론을 듣고 바울에게 호감을 가졌을 수도 있습니다. 벨릭스는 수일 후에 그의 아내 드루실라(Drusilla)와 함께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도(道)를 들었습니다. 도를 들은 벨릭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26절에 '두려워했다'고 했습니다. 천하게 무서울 것 없이 수많은 사람들을 거침없이 죽였던 총독 벨릭스가 바울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도'-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에 대해 듣고는 두려워했다- 언뜻 상상이 되지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벨릭스의 마음에 동요가 일고 있다는 것을 읽을 수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벨릭스를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세상에 아무리 악한 사람일지라도 그 안에 선한 본성도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아무리 내 삶 속에서 나를 괴롭게 하는 사람 때문에 힘들고 낙심이 될 때도, 때로는 그 사람에게도 '선함'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 마음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비록 벨릭스가 잔인하고 탐욕스런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에게도 선한 모습으로 변할 가능성은 있구나! 하는 마음이 들지요? 전도하다 보면 '야! 저런 사람이 예수 믿을 수 있을까? 저런 사람에게도 구원의 능력이 임할까?' 이런 생각나게 하는 사람 만나지요? 그럴 때 어떻게 하십니까? 아예 전도하려고 하는 마음을 접습니까? '봉변당하지 말고 그만 두자' 그렇습니까?
그럴수록 더욱 힘서 예수를 전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때문에 내가 봉변당한다면 영광 아닙니까? 비록 전하기를 내가 하지만, 역사는 성령께서 하십니다. '하나님! 보잘 것 없는 저 같은 사람도 구원해 주셨는데, 주님, 긍휼히 여기셔서 복음의 씨앗이 뿌리내리게 역사하여 주옵소서' 기도하시며 힘써 전하시기 바랍니다.
1. 바울이 전한 예수 믿는 세 가지 도(道)
"25바울이 의(義)와 절제(節制)와 장차 오는 심판(審判)을 강론(講論)하니"
1. 바울이 전하는 예수 믿는 첫 번째 도(道)는 의(義)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의롭게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의롭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의롭다는 것은 밖으로 나타나는 모양도 중요하지만, 밖으로 나타나기 이전의 내적인 문제, 우리 중심의 문제 마음의 자세, 생각의 문제가 먼저입니다. 마음, 생각, 사상이 의로워야 합니다. 그런데 벨릭스 앞에서 이 "의(義)"에 대하여 말한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잔인한 벨릭스 앞에서 "의"에 대하여 말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울의 용기보다는 벨릭스의 악함으로 인해 야기되는 문제입니다. 벨릭스의 악함은 하루 아침에 형성된 것이 아닙니다. '악하다는 것'은 순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이 한 순간에 악한 마음을 품을 수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악한 마음이 쌓이고 쌓여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만드는 경우도 많습니다. 마음이 악해지니까 무엇이 문제가 됩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들리지 않습니다. 말씀을 들어도 깨달음도 없고 감동도 없습니다. 말씀 들어도 아무런 감동이 없다는 것 - 문제임을 아셔야 합니다.
이런 문제는 총독 벨릭스만의 문제입니까? 생각해 보면 나의 문제 아닙니까? 의로워야 할 마음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철저한 회개가 일어냐 하는데 오히려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합니다. 수없이 말씀을 들어도 변화가 없는 것은 이 까닭입니다. 의롭다는 것은 선하다는 것인데 선하다는 것은 착하다는 정도가 아니라 생각, 말, 행동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긍정적이고 적극적임을 뜻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사는 사람이 물질 문제로, 윤리 문제로 세상의 비난을 받는 일이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2. 바울이 두 번째로 증거한 것은 절제(節制)입니다.
절제에 반대되는 것은 방종입니다. 오늘 본문에 벨릭스의 아내 유대여자 드루실라가 나옵니다. 드루실라는 아그립바 Ⅰ세의 막내 딸로 15세 때에 에메사(Emesa)의 왕 아지주스(Azizus)와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이 절세미인 드루실라를 본 벨릭스는 그녀에게 반하여 마술사를 매수하여 드루실라를 설득하여 아지주스로부터 그녀를 빼앗아 자신의 아내로 삼았습니다. 사무엘하서 11장에 보면, 다윗도 절제하지 못하여 우리아의 아내를 범하고 자기의 범죄를 숨기기 위해 임신한 밧세바와 우리아를 같이 자게 하려 했으나 그도 뜻대로 되지 않자, 드디어 충신 우리아를 죽게 합니다. 절제하지 못하여 엄청난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 전서 9:25에서 고백하기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라고 말하면서, 이어서 27절에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절제한다는 뜻입니다-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 함이로라"라고 했습니다. 절제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삶은 절제하는 삶입니다. 감정도 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고 싶은 것도 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남이 좋게 생각지 않으면 나는 좋게 생각해도 하지 않는 것이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그런데, 이 '절제'라는 것에 참으로 미묘한 것이 있습니다. 뭔지 아십니까? '내가 하는 행동은 절제된 행동이고 같은 행동이라도 다른 사람이 하면 과하다'고 하는 판단의 기준입니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이 좋은 차를 타고 다니면 사치스럽다고 하고, 내가 좋은 차 타고 다니면 안전을 위해서 필수적이라고 말합니다. 남을 판단함에 있어서 자기 중심적이면 결코 절제할 수가 없습니다. 자유도 절제해야 합니다. 풍요로운 삶도 절제해야합니다. 말도 절제해야 합니다. 말 한마디에 상처받고 아파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마음 같아서는 말에 세금 좀 붙였으면 좋겠습니다. (취소합니다. 내가 세금 제일 많이 내야 할 것 같아요)
3. 바울은 "장차 오는 심판(審判)"에 대해 강론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심판이 미래에만 일어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심판을 미래에 일어날 사건이라고만 단정지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심판은 현재의 내 생활, 내 삶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학생들이 왜 밤새워 열심히 공부합니까? 공부한 것-시험 때면 결판납니다. 열심히 예수 믿는 것 - 심판 때 결판납니다. 심판은 있습니다. 심판은 있어야 합니다. 심판이 있기에 우리가 고난 가운데서도, 역경 가운데서도 신앙을 지속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심판이 있기에 예수 믿는 보람이 있는 것입니다. 심판이 있기에 환난가운데 예수를 믿었던 성도들의 의로움이 증거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힘들더라도 예수 굳게 붙잡고 이기십시오. 마지막 심판 때에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들을 반드시 의롭게 여겨 당당하게 세워주실 것입니다.
바울이 전한 의와 절제와 심판 - 이것은 분명 예수 믿는 도입니다.
2. 벨릭스의 반응 - 시방은 가라.
바울의 예수 믿는 도를 들은 벨릭스는 어떠한 반응을 보입니까?
"25……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26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
벨릭스는 바울에게로부터 그의 일생일대에 커다란 가르침을 받게 됩니다. 노예 출신으로서 총독까지 되었지만, 그가 이제까지 얻을 수 없었던 가장 귀한 것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벨릭스는 바울의 말을 듣고-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도'에 관한 강론을 듣고는 두려움을 느끼기는 했습니다. 심판에 대해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그 기회를 연기함으로써 일생 일대의 가장 크고도 위대한 축복을 차버리는 결과는 낳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리석은 벨릭스'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생각해 보면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벨릭스는 세 가지를 연기함으로 후회스러운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1. 벨릭스는 듣는 것을 연기했습니다.
바울의 말을 듣자 벨릭스는 '시방은 가라'고 말합니다. 의와 절제와 심판에 대해 듣고 보니 자신의 죄악이 수면 위에 떠오르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때 벨릭스는 말합니다. '이제 그만해라', '내가 나중에 다시 듣겠다'
안타깝지 않습니까? 구원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는 벨릭스 - 여기서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뒤돌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요즈음 우리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인터넷을 통해서도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설교 테이프도 이전보다 더 많아졌습니다. 듣고자 한다면, 어디를 가서도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말씀 듣는 것'을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말씀 듣는 것, - 내일로 미룰 일이 아닙니다. 오늘, 바로 오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바로 앞의 내 인생이 어떻게 될는지 그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가 말씀 듣기를 포기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지금 내게 들려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내가 거듭날 수도 있습니다. 복음의 능력을 체험할 수도 있습니다. 새벽기도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 예배 뿐 아니라 저녁 예배, 수요예배 등. 말씀들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고 꽉 잡으십시오. 말씀을 사모하여 기대하며 들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이 능력이 됩니다. 말씀이 기적이 됩니다. 말씀 들을 때 상한 심령은 치유되고 연약했던 모습이 강건해 집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말씀 듣다가 "목사님 하나님 말씀 더 듣고 싶어요. 설교 좀 더 오래 하세요"하는 고백을 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말씀 듣기를 미루지 마십시오. 내일 일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입니다.
2. 벨릭스는 회개를 연기했습니다.
벨릭스가 바울이 전한 예수를 믿는 도에 대해 듣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벨릭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잔인하고, 탐욕스럽고, 절제하지 못하는 인생을 살아온 벨릭스로 하여금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기회는 은혜입니다. 그런데 벨릭스는 이 기회를 연기함으로 놓치고 말았습니다. 예수 믿는 것은 회개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 회개케 하는 성령의 음성에 귀기울이시기 바랍니다. 때로 말씀을 들으면서 분명 두려움과 떨림, 전율을 느끼면서도 회개하지 못하고 마음을 닫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분명 나를 향한 말씀인데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려고 하거나, '난 그 정도는 아니니깐'하며 위안을 삼으려고 하지 않습니까? 말씀을 들을 때 주님이 회개케 하면 회개하고 주님이 사명을 깨닫게 하시면 '아멘'하고 순종하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만일 벨릭스가 바울의강론을 듣고 즉각적으로 회개했다면, 그의 인생은 비극으로 끝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회개할 것이 있습니까? 미루지 말고, 오늘, 지금 하시기 바랍니다. 내 안에 감추어진 더러운 것들, 나만 알고 있는 죄 - 모든 것을 주님께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회개하세요. 회개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회개하고 푼 마음이 생겼을 때, 비록 그 순간에는 감추고 싶더라도 주님 앞에드러내시기를 바랍니다. 드러내기만 하면, 고백하기만 하면, 아무리 큰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용서해주십니다. 분명 주님께서 바울이 전한 예수 믿는 도를 듣고 벨릭스가 회개했더라면 그가 비록 대제사장 요나단을 죽이고, 드루실라를 아내로 삼았다 하더라도 용서해 주셨을 것입니다.
회개하세요.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리에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십니다.
3. 벨릭스는 바울의 무죄를 알면서도 석방을 연기했습니다.
벨릭스가 바울의 석방을 연기한 이유는 두 가지로 본문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25절을 보면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해서였습니다. 벨릭스는 이미 바울로부터 예루살렘에 온 이유를 들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예루살렘에 온 이유를 예루살렘 교회에 구제금을 전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점이 벨릭스가 돈에 욕심을 갖게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벨릭스는 바울이 구제금을 가져왔기 때문에 혹시 사용하고 남은 돈이 있을 것으로 생각해서 그 돈을 욕심낸 것 같습니다. 벨릭스의 마음 속에는 '바울아!' 네가 풀려나기 위해서는 나에게 돈을 줘야 한다'라고 생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성도 여러분. 물질에 대한 욕심이 인생을 망칩니다. 물질은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있으면 됩니다. 욕심이 넘치면 인생이 망가집니다. 물질에 대한 욕망 버리세요.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27이 태를 지내서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소임을 대신하니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구류하여 두니라" 또 하나의 이유는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이 죄없는 것 알면서도 2년이나 감옥에 가두어 놓았습니다. 왜냐구요? 민심을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세상 인심에 대하여 너무 집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요한 1서 3:11에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세상의 가치관으로는 성도의 삶이 이해될 수 없습니다. 육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해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성도의 삶을 보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성도들을 볼 때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것 - 당연합니다. 때로 세상은 성도들을 우습게 볼 때도 있습니다. 바보처럼 여길 때도 있습니다. 어쩌면 철저한 신앙인일수록 세상에서는 인심을 잃고 미움받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세상이 바라보는 시각대로 이리저리 둥글둥글하게, 적당히 세상 눈치 빠르고 계산 빠르게 사는 삶보다는 좀 미련하게 보일지언정 진득하게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께만 순종하여 나아가는 자에게 하나님의 축복과 인도하심이 있다는 사실 -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 주식회사 신원의 박성철 회장은 교회 장로셨습니다. 신원 에벤에셀 아시지요? 박성철 회장은 이 신원을 자타가 공인하는 믿음의 기업으로 만들기에 힘썼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기업이었던 신원 역시 97년 경제 위기 때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건설, 부동산까지 진출해 16개의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던 신원은 빚을 제때 갚지 못해 경영권이 채권단으로 넘어가고 워크아웃에 들어갔습니다. 직원은 3천명에서 9백명으로 줄이고 13개의 의류 브랜드도 5개로 축소했습니다. 이렇게 살인적인 구조조정이 직원들과의 마찰없이 순조롭게 진행된 것은 평소 신앙을 강조해왔던 기업문화 덕분이었습니다. 떠나야 하는 직원들도 회사 사정을 이해해 주었고 남아 있는 직원들은 회사를 되살려 이들을 다시 불러와야겠다는 '각오(覺寤)'를 다졌습니다. 다행히 해직된 직원들은 대부분 다른 업체에 재취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배경이 - 재취업의 배경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그들의 신앙이었습니다. 진득하게 밀고 나갔던 신앙을 바탕으로 한 회상의 경영 방침이 '신원 직원이면 믿을 수 있다'는 평판을 낳게 했던 것입니다.
정 리
여러분! 세상이 어떻든, 세상이 뭐라 해도 자기 영혼은 사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영혼에 손해가 되는 것은 다 버리고 끊어야 합니다. 바울이 전한 예수 믿는 도를 들은 벨릭스, 구원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지만, 말씀 듣기를 연기하고 회개를 연기함으로 구원의 기회를 놓쳤습니다. 성도 여러분. 기회가 주어졌을 때 말씀듣기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세상 눈치 보면서 슬슬, 적당히 타협해 가는 신앙이 아니라 진득하고 올곧게 예수 바라보며 신앙생활 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