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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왕사와 문두루(文豆婁) 비법
668년(문무왕 8년), 신라의 운명은 한 치 앞을 가늠할 수 없었다. 고구려를 멸망시킨 기쁨도 잠깐, 당나라 군대는 전쟁이 끝나고도 돌아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내친김에 신라까지 쳐서 아예 한반도 전체를 복속시킬 기세였다. 문무왕은 기습적인 선제공격으로 이를 막았다. 당나라가 배은망덕이라며 발끈했을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670년 당 고종은 장수 설방(薛邦)에게 50만 대군을 주어 신라를 침공케 했다. 대군의 침공을 앞두고 전전긍긍하던 왕에게 명랑(明朗) 법사는 낭산(狼山) 남쪽 신유림(神遊林)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창건하고 법도량을 베풀 것을 주문했다.
사정은 급박했다. 당의 대군을 실은 배들이 벌써 가까운 바다를 가득 덮고 있었다. 명랑은 채색 비단을 둘러 임시변통으로 없던 절을 만들었다. 오방신상(五方神像)은 풀로 엮어 대신했다.
그리고는 단 위로 올라가 문두루 비법을 베풀었다. 문두루의 위력은 놀라웠다. 난데없는 바람과 파도가 당나라 50만 대군을 실은 배를 일제히 침몰케 해 몰살시켰다.
문두루는 밀교의 결인(訣印)을 뜻하는 범어의 음역이다. 불설관정복마봉인대신주경(佛說灌頂伏魔封印大神呪經)에 구체적 방법이 보인다.
문두루비법은 국가적 위난과 재액을 당했을 때 중앙에 높게 단을 설치하고, 그 위에서 방위에 따라 각종 진언을 베푸는, 대단히 장엄하고 거창한 의식이었다. 이후 당나라에서 신라를 결코 얕잡아볼 수 없도록 만든 것이 바로 이 사천왕사의 문두루 도량이었다.
국립경주박물관에서 26일부터 사천왕사 특별전이 개최된다. 여러 해 계속해 온 발굴 조사를 망라하는 전시가 될 듯하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녹유전(綠釉塼; 녹색 유약을 입혀 구운 벽돌판) 부조상(浮彫像)의 파편들도 비로소 한자리에 다시 모이게 되었다.
상반신과 하반신이 따로 보관되어 있던, 투구 쓰고 갑옷 입고 화살과 칼을 든 채 악귀를 깔고 앉은 수호신상들이 90여 년 만에 합체되어 제 모습을 되찾은 것이다.
안팎의 국가적 위난을 한마음으로 물리쳤던 사천왕사 문두루 도량의 상징성이 새삼스러운 요즘이다. 그 도량 터 부조상의 합체를 계기로, 흩어졌던 마음들이 하나로 되모이고, 뒤숭숭한 나라 안팎의 시름도 씻은 듯이 가라 앉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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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교사찰 사천왕사와 문두루비법
고구려 소수림왕 2년 6월(372년)에 진(秦)나라 왕 부견(符堅)이 사자(使者)와 순도(順道)라는 승려를 시켜 불상과 경문을 보내 오면서 불교가 전래되었다.
삼국사기와 해동고승전에 의하면 “인과(因果)를 보여 화복(禍福)으로 인도하여 점차로 익히도록 하되 당시의 민도에 맞게 이끌어 가니, 어려운 가르침은 펴지 않았다.”고 하고, 나라에서 사찰을 창건하여 순도가 그곳에 있게 하였고 다시 이불란사(伊弗蘭寺)라는 사찰을 세웠다고 한다.
고구려에 처음 세워진 사찰은 국가적 차원에서 세운 호국사찰이었다는 뜻으로 이해되고 대승불교 중에서도 밀교적인 불교가 전해졌을 것이라고 한다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동진(東晋)의 효무제(孝武帝) 태원(太元) 연간(376~396)에 온 담시(曇始)라는 승려가 경(經)과 율(律) 수십 부를 가지고 와서 불법을 전했고, 그는 의희(義熙)(405~418) 초에 본국으로 돌아갔는데, 흉노가 진에 쳐들어 왔을 때 담시 화상의 영이한 힘에 해치지 못하고 다른 사문도 죽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 산중으로 들어가서 두타밀행(頭陀密行)을 닦아 장안으로 내려와서 포교에 힘썼다고 하니, 그는 밀교를 닦은 스님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해동고승전에 의하면 담시화상은 그 행적이 동용서몰(東涌西沒)하고 중용변몰(中涌邊沒)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알 수가 없었다고 한다.
551년 고구려의 혜량법사가 신라에 온 후 밀교의 '인왕호국반야바라밀경'으로 백고좌회와 팔관회라는 호국도량을 열었던 것으로 미루어 고구려에도 호국을 위한 밀교의례가 있었을 것이란 짐작을 할 수 있다.
신라 왕실에서도 밀교의례에 의해 불력(佛力)으로 국가를 수호하려는 염원으로 호국사찰을 창건하였는데 지금은 터만 남아 있는 황룡사(皇龍寺)가 대표적인 예이다.
의상(義湘)은 한국에 화엄종을 일으킨 사람이며 해동 화엄초조(華嚴初祖)로 불리는 신라의 승려이다. 속성은 김씨 혹은 박씨이며 경주 황복사(皇福寺)에서 출가했고 8세 위인 원효와 친교를 맺고 고구려 보덕 화상에게 열반경을 배우기도 했다.
661년 원효(元曉)와 함께 해로로 당(唐)나라로 가던 중 원효는 고분에서 깨친 바가 있어 돌아가고, 의상은 양주(揚州)에 이르러 주장(州將) 유지인의 대접을 받고 이듬해에 종남산 지상사(至相寺)로 찾아가서 중국 화엄종 2조인 지엄의 문하에서 화엄을 배웠다.
그 후 남산율종(南山律宗)의 개조인 도선율사와 교유하고 중국 화엄종 3조인 법장과 교분을 갖는다. 법장은 지엄의 제자였고 의상보다 19세 연하였다.
의상은 668년 지엄이 입적하기 3개월 전에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를 지어 스승의 인가를 받았고, 670년에는 당 고종의 신라 침공 계획을 문무왕에게 알리기 위해 귀국한다.
신라의 승려 명랑(明郞)은 어머니가 자장율사의 누이동생이었다. 632년 (선덕여왕1) 구법차 당나라에 갔다가 밀법을 배워서 4년 후에 귀국했다.
명랑이 당에 갔을 때는 밀교가 널리 퍼져서 후한(後漢)과 진(晉)을 거쳐 북위(北魏)와 양(梁)대를 거치면서 많은 밀교 경전이 역출되어 당(唐) 시대에는 청우법(請雨法) 등 여러 밀주법(密呪法)이 유포되어 있었고, 특히 지통(智通)이 천안천비관세음보살다라니경(天眼千臂觀世音菩薩多羅尼經)을 번역하여 천수관음법이 알려진 시대였다.
명랑이 신라로 귀국하는 길에 용왕의 요청으로 용궁에 들어가 밀교비법을 전하고 용왕으로부터 황금 천 냥을 시주받아 땅 밑을 통해 자기 집 우물 밑에서 솟아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집을 절로 만들어 용왕에게서 받은 황금으로 불상과 법당에 도색을 하였으므로 절 이름을 금광사(金光寺)라고 하고 밀교 포교에 힘썼다고 한다. 밀교의 문두루비법으로 도량을 열어 국난을 물리쳤기에 후에 신인종(神印宗)의 조사로 불리게 된다.
신라의 신인비법(神印秘法)과 고려의 신인종(神印宗)의 신인(神印)이란 뜻은 범어 무드라를 음역해서 중국 동진시대(東晋時代)에 문두루(文豆婁)라고 썼던 데서 유래했다고 하며, 밀교의 결인(結印)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문두루를 신인(神印)이라 한다.
유상유가(有相瑜伽) 입장에서는 身. 口. 意 三密 중에 신밀(身密)에 해당된다. 밀교의 관정경(灌頂經)에 의거한 밀교의 호국의궤(護國儀軌)로써 신인비법을 처음 설행한 사람이 명랑법사였다.
당나라의 대군이 평양성을 함락시키므로 고구려가 멸망했으나, 본국으로 군대를 철수시키지 않고 백제에 머물러 기회를 틈타 신라를 침략하려 하였다.
정보를 접한 문무왕이 명랑스님을 불러 자문을 구하였더니, 명랑이 말하길 경주 낭산(狼山:南山) 남쪽 신유림에 사천왕사를 짓고 문두루비빌법의 도량을 개설할 것을 주청하였으나 이미 설방(薛邦)이 이끄는 당나라 군사 50만이 국경에 집결하였다는 급보가 들어왔다.
명랑은 급히 낭산(狼山) 남쪽 신유림(神遊林)에 채백(彩帛:채색비단)으로 임시 사찰을 짓고, 풀로 오방신상(五方神像)을 만들어 동서남북 중앙에 안치하고, 밀교에 밝은 유가종(瑜伽宗)의 명승 대덕 12명을 뽑아 스님이 상수(上首)가 되어 신인비법을 행하니, 당의 군대는 신라와 교전도 있기 전에 바람과 파도가 일어나서 당의 군선이 모두 침몰하였다고 한다.
이듬해에 당나라 장수 조헌(趙憲)이 5만의 군사로 침략했을 때도 명랑은 신인비법으로 당군(唐軍)을 물리쳤다고 한다.
문무왕 19년(679년)네 명랑이 밀교의 신인비법으로 당나라 군사를 물리쳤던 경주 신유림(神遊林)에 절을 신축하여 사천왕사(四天王寺)라고 했다. 후에 신라 조정에서는 사천왕사성전(四天王寺成典)이란 관청을 두어 직급이 높은 신하들로 사천왕사를 관리하게 하였다.
명랑에 의해 신라에 전파된 밀교의 문두루비법은 밀교 경전인 관정복마봉인신주경(灌頂伏魔封印神呪經)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이 경에 설한대로 불단(佛壇: 만다라)을 설치하고 다라니를 독송하면 국난을 물리치고 나라를 수호할 수 있다고 한다. 명랑 이후에도 문두루도량은 계속되어 고려 문종 28년(1074년)에도 경주 사천왕사에서 27일동안 문두루도량을 베풀었다고 한다.
고려 태조 왕건은 명랑의 후예인 광학(廣學)과 대연(大緣)이라는 유가승의 작법으로 해적의 침입을 물리치고 개성에 현성사(現聖寺)을 창건하여 신인종(神印宗)의 근본도량이 되게 하였다.
고려 왕실은 호국을 염원하는 밀교의례를 많이 개설하였는데, 몽골의 침략이 있었던 고종 4년(1217년) 4월에도 몽골군의 퇴치를 위해 현성사에서 문두루도량을 개설하였다고 한다.
고려 조정에서 국가적인 문두루도량을 개설하였던 사찰은 특히 국경이 대륙과 접한 서경(평양)에 많이 있었고 흥복사(興福寺), 영명사(永明寺), 금강사(金剛寺), 장경사(長慶寺) 등이라고 한다.
명랑이 당나라 대군의 침략 소식을 듣고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운 것은 한국, 중국, 일본 등에서 진호국가경전(鎭護國家經典)으로 존숭되는 금광명경의 사천왕품에 의한 것이다.
명랑은 자신의 집에 금광사(金光寺)란 절을 세우고 당나라 대군을 신인비법으로 물리친 장소에 세운 사천왕사(四天王寺)와 그의 후계자들과 김유신 장군이 함께 세운 원원사(遠願寺)가 있으며 모두 문두루도량의 밀교 사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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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왕사와 문두루비법
풍랑 일으켜 당나라 군대 침공 물리친 신라 비밀병기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이 한반도의 주도권을 두고 일으킨 소위 나,당 전쟁은 670년 신라가 지원하는 고구려 부흥군이 합세한 연합군이 압록강 너머 당군을 공격함으로써 본격적으로 개시되었다.
당시 신라는 문무왕의 통치기였는데, 삼국유사 문호왕법민의 기록은 그의 당나라에 대한 전쟁을 상당한 비중을 두고 서술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670년의 사건은 특기할만한 하다.
당시 당나라에는 문무왕의 동생인 김인문이 외교사절로 가있었는데, 당나라와의 관계가 점차 악화되자 볼모로 억류된 상태가 되었다.
마침 당나라에서 유학 중이던 의상대사는 억류된 상태의 김인문을 만나 당나라의 대규모 신라 침공 계획을 전해 듣고 서둘러 귀국하여 이를 보고하였다.
이에 왕은 당나라 대군을 어떻게 막아낼지 대신들과 의논하였는데, 각간 김천존이란 인물이 “근래 명랑법사께서 용궁에 들어가 비법을 전수해 왔다고 하니 그를 불러 물어 보십시오”라며 다소 황당한 책략을 제안했다.
나중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명랑법사가 용궁에서 배워왔다는 비법은 문두루비법이라고 하는 일종의 불교적 주술이었는데, 왜 이를 불교와 연관된 곳이 아닌 용궁에서 배워왔다고 했는지는 다소 의문이 들 수 있다.
여하간 문무왕은 이 건의를 받아들여 명랑법사를 불러 대책을 물었는데, 명랑은 낭산 남쪽 신유림에 사천왕사를 세우고 주문을 외울 단을 만들어 주면 적을 물리칠 수 있다고 하였다.
드디어 당나라 장수 설방이 군사 50만으로 서해를 건너니, 명랑법사가 계획대로 바로 그 문두루비법을 사용하여 큰 바람과 거센 물결을 일으켜 당나라 수군의 배를 모두 침몰시켜 버렸다.
당나라는 다음해인 671년에 5만 수군을 다시 파견하였으나 이번에도 명랑법사의 문두루비법은 이들을 막아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당의 670년 공격 기록은 보이지 않고 오직 671년, 설인귀가 수군을 이끌고 백제로 와서 신라에 대항하는 웅진도독부, 즉 당이 백제에 세운 식민정부를 지원하려다가 신라의 공격을 받고 조운선 70여척이 패퇴한 기록이 보인다. 때문에 670년 문두루 비법으로 당의 수군을 물리친 이야기는 삼국사기에는 보이지 않는다.
불교에 의지해 외세를 물리친 기사는 삼국사기에서 황당한 이야기라고 배제된 것이 아니었을까. 아마 670년이나 671년이라는 정확한 연대는 아니더라도, 설인귀의 수군과 신라가 접전한 것은 여러 차례이므로 그 중에 몇 번 문두루비법의 도움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문두루비법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우선 해전에서 큰 역할을 했기 때문에 물과 연관된 어떤 힘을 이용한 것으로 짐작이 된다.
문두루비법의 전거가 되는 불설관정경에서는 그것이 반드시 풍랑을 다스리는 법이라고 국한된 것은 아니었지만, 여하간 명랑법사는 풍랑을 일으키는데 사용했다.
아마 용궁에 들어가 비법을 얻어왔다는 표현도 그것이 물과 연관되었기 때문에 만들어진 설화일텐데, 용은 곧 물의 신이기 때문이다.
문두루비법은 정말로 풍랑을 일으켰을까? 물론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삼국유사의 기사가 어느 정도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 당시의 상황을 재구성해 보려고 한다.
풍랑은 일단 날씨와 연관된 사안이다. 지금도 일기예보에서는 풍랑주의보와 같은 바다의 기상에 대한 예보를 해주고는 한다. 특히나 수군은 바다의 날씨에 긴밀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명랑법사는 아마도 풍랑을 일으키는 마법사가 아닌, 풍랑을 예보할 수 있는 과학자였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비법을 용궁에서 배워왔다는 설화는 어쩌면 바다의 변화무쌍한 일기를 잘 파악하고 예측할 수 있었던 어떤 경험자로부터 지식을 전수받은 사실을 미화한 것은 아니었을까?
마치 삼국지연의에서도 적벽대전의 결정적 승패 요인이 동남풍이었고, 제갈량이 기어코 이 동남풍을 불게 함으로써 승리할 수 있었던 것처럼 해전에 있어 날씨는 승패를 가르는 중요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비록 명랑법사가 날씨를 예보하여 언제 어디서 큰 풍랑이 불지 예측했다고 하더라도 당나라 수군이 그 날 그 길로 바다를 건너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도 없다. 따라서 명랑이 알려준 그 시간, 그 장소로 당나라 수군이 바다를 건너도록 유인하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한 관건이었음에 틀림없다.
전쟁에서의 주도권이란 얼마만큼 자신이 유리한 시간과 장소에서 전투가 일어나도록 유도하는가에 달려있다.
그래서일까, 삼국사기에 기록된 문무왕이 당에 보낸 편지는 한마디로 요약하면 자신은 원래 당을 때리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백제를 때리려고 했는데 당이 백제를 감싸는 바람에 실수로 때린 것이다, 어찌 감히 당을 때릴 생각을 했겠는가 하는 구구절절 저자세의 내용이다.
전면전을 피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겠지만, 황급한 순간에 조금이라도 당의 공격을 지체시켜 보려는 지연책이 아닌가 생각된다. 당나라 역시 어리석어서라기 보다는 오랜 싸움에 지쳐 아마 그렇게 믿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문무왕을 폐위시키고 억류된 그의 동생 김인문을 왕으로 삼아 쳐들어 오다가도 문무왕의 사죄편지와 조공에 금세 군사를 돌리는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신라는 그들이 원했던 시간, 장소에서 과감한 선제공격을 감행한다.
실제는 삼국유사와 달리 풍랑에 의해 당나라 수군이 아예 당도하지도 못하고 궤멸된 것은 아닌 듯하다. 670년 침공 때는 풍랑으로 인해 당나라 수군이 바다를 건너다 실패하고 돌아갔기 때문에 아예 기록이 안 되었을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명랑법사의 일기예보는 적벽대전, 인천상륙작전에서 바람의 방향이나 조수 간만의 시간이 중요했던 것처럼 매우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을 것이다. 더불어 그 당시에는 과학이 아니라 마술에 가까운 예언이었을 것이다.
명랑법사는 사천왕사에서 문두루 비법을 행할 때 유가종의 승려 12명을 불러 함께 했다고 한다. 불설관정경에 의하면 지름 77푼의 둥근 나무 기둥에 오방신의 이름을 새겨놓고 주문을 외우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실제 사천왕사에는 둥근 구멍이 뚫린 12개의 초석으로 이루어진 방형 건물지가 금당 좌우로 남아 있다. 마침 그 뚫린 구멍의 지름이 20㎝를 웃도는 크기들이라 만약 문두루비법에 필요한 원형 기둥을 여기에 꽂는다면 적당하다. 그래서 삼국유사에서 언급한 주문을 외울 때 사용한 단석의 터로 추정되고 있다.
과연 여기에 남아있는 12개씩의 기둥과 12명의 유가승은 무엇을 의미할까? 동양에서 12는 12지를 의미하고, 12지는 전통적으로 방위나 시간을 표시하는데 사용되어 왔다.
그렇다면 사천왕사의 두 단석 유구는 각각 시간을 상징하는 시계와 방향을 상징하는 나침반의 역할을 했던 것이 아닐까?
물론 그것이 아직 해시계와 같은 정밀한 것이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상징적이나마 시·공을 의미하는 시설을 둔 연구소 성격의 사찰이 바로 사천왕사였다고 짐작하는데 큰 무리가 없을 듯하다.
나·당 전쟁이 평화조약으로 끝맺음 할 즈음, 당은 마지막 협상조건을 내걸었다. 그것이 바로 사천왕사에 대한 사찰이었다. 당은 사천왕사가 나당전쟁 기간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마치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고 핵사찰을 받아야 평화회담이 열릴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에 당은 예부시랑 악붕귀란 인물을 파견했다. 그러나 신라에서는 이 비밀병기를 포기할 수 없었다. 때문에 당의 사찰단을 속이기 위해 일부러 사천왕사와 가까운 곳, 그리고 사천왕사처럼 쌍탑이 세워진 절을 급조하여 그쪽으로 사찰단을 안내하기로 했다.
무척이나 대담무쌍한 계획이었지만 아무리 급조한다고 한들, 절이 새로 만들어지면 곳곳에 대패질한 나무조각이나 톱밥이 남아있을 것이고 급히 칠하다 보니 안료의 아교 냄새도 남아있었을 것이다.
절에 도착한 악붕귀 일행은 그 절이 가짜임을 한 눈에 알아보고는 심지어 문 앞에서 들어가기 조차 거부했다.
삼국유사는 이렇게 기록했다. “부시사천왕사(不是四天王寺) 내망덕요산지사(乃望德遙山之寺)”
이에 대한 해석이 조금 다른데, 어떤 책은 “이는 사천왕사가 아니라면서 이내 덕요산의 절을 바라보았다”로 해석했고, 어떤 책은 “이는 사천왕사가 아니라 망덕요산의 절이요”라고 풀었다.
덕요산을 바라보았다는 뜻일까, 아니면 이 절이 망덕요산이라는 뜻일까? 둘 다 모호하다. 일단 덕요산이란 산도 주변에 없고, 망덕요산의 뜻도 불분명하다.
후에 이 급조한 절을 망덕사로 불렀다는 내용으로 보아 후자의 해석에 무게가 더 실리기도 한다. 그러나 왜 당 사신이 망덕요산의 절이라 했는지, 망덕이나 요산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해석이 없다.
때문에 오히려 전자의 해석에 관심이 간다. 사신이 절에 들어가지 않고 다른 산 아래에 보이는 절을 보면서 저곳이 진짜가 아닐까 의심했다는 것으로 보면 어떨까? 그렇다면 그 덕요산은 분명 진짜 사천왕사가 있는 낭산이었을 것이다.
낭산을 왜 덕요산이라 불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를 지금은 사라진 낭산의 또다른 이름으로 본다면 문장 구조상 어색할 것이 없다.
현재의 망덕사 뒤쪽으로 바라보이는 산이 낭산이고 그 아래 사천왕사가 있으므로, 결국 덕요산만 바라보다 갔다는 뜻으로 망덕사라 한 것이 아니었을까? 덕요산의 ‘덕’은 혹시 낭산에 장사지낸 선덕여왕과 관련된 명칭은 아니었을까?
아무튼 이 문장은 신라 최고의 비밀병기인 사천왕사가 뿜어내는 아우라를 당나라 사신도 느낄 정도였다는 것을 강조하여 그 위용을 은근히 드러내려는 행간의 뜻이 있었던 것 같다.
비록 사천왕사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평화협정은 체결되었고, 신라가 다시금 문두루비법을 꺼내 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신라에게나 당에게나 다행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