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음력 12월 8일.
나는 아버지 양준열과 어머니 서순례
사이에서 육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의 고향이 개성이라 바로
위의 오빠까지는 개성에서 나고,
나만 1.4 후퇴 때 피난을 내려와
외가인 경기도 양수리에서 났습니다.
친가는 대규모 인삼밭을 가진
인삼 거상으로 개성에서도
손꼽히는 부자이자 명문가였습니다.
전쟁이 나자 인공기가 걸린 하늘 밑에서는
편안한 숨을 쉬며 살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아버지는 만삭인 어머니를
데리고서 피난 보따리를 쌌습니다.
어머니는 부른 배로
이불 보따리를 옆구리에 끼고
꽁꽁 얼어 붙은 강을 기다시피 했다는
피난길 이야기를 지금도 가끔 하십니다.
아버지는 난리통에 대를 이을
아들을 잃을 수 없다며 오빠 둘을
데리고부산으로 먼저 내려가셨습니다.
어머니는 언니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산달이 머지 않아 외가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태중에 있을 때 발길질이 하도 심해서
사람들은 나를 사내 아이로
알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외가에 머문지 한달 만에
나는 여자 아이로 세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나를 가진 지 오개월 만에
학질에 걸려 심하게 앓으셨습니다.
열이 사십 도를 웃돌아 온몸이 쩔쩔 끓고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땀이 쏟아졌습니다.
어머니는 그 이야기를 하실 때마다.
''너는 그러고도 끈질기게
내 뱃속에 붙어 있었던 애다" 라는
말을 잊지 않으십니다.
어머니는 태몽 없이 나를 가졌다고 합니다.
언니.오빠들을 가질 때는 꿈에
수염을 기른 노인이 나타나
산삼 뿌리를 건네주기도 하고,
향긋하고 빛깔 고운 복숭아가
치마폭으로 떨어지기도 했다고 합니다.
형제들 중 나만 태몽이 없었다는
이야기가 어린 마음에는 꽤 섭섭했습니다.
다만 아버지는 내가
태중에 있던 어느 날 꿈에,
파란 하늘에 큰 글씨로
'양애란' 이라고
씌여진 하얀 천이 걸려
있는 것을 보 셨다고 합니다.
외할머니는 피난중에 얻은 딸이니
'피란'이가 좋겠다고 하셨다는데,
아버지의 이런 꿈을 연유로
나는 '양애란' 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아버지는 제법 이 꿈을
특별히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내가 먹지도 자지도 않고 일년을 보낼 때.
어머니는 답답한 속을 좀 풀 수 있을까 해서
어느 용하다는 점쟁이를 찾아가셨습니다.
그이는 '애란이'는 기생이 될
이름이니 바꾸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말을 전해들으신 아버지는,
그 이름은 하늘이 주신 것이라며
일축하셨다고 합니다.
피난살이 와중에도 아버지는
개성 사람 특유의 기질을 발휘하셨든지
사업에 크게 성공하여
집안 살림은 넉넉했습니다.
덕분에 나는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랐습니다.
아버지 친구분들 중에는 지금도
이름자만 대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정.재계의 쟁쟁한 인물들이 많습니다.
막내들의 특권인 어리광과 재롱이
유독 많았던 나는 부모님은 물론
형제간이나 친척들에게도
귀여움을 듬뿍 받았습니다.
능력 있는 사업가답게 친구들도 많고
술도 잘 드시던 아버지는,
내가 태어난 후로는 술자리를
마다하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양사장! 오늘 오랜만에 술 한 잔 하지."
"미안하네. 요즘 그럴 시간이 없어."
"자네 요즘 뭘 하는데 그렇게
바쁜 척을 하나?"
''월 하긴, 별일 아닐세. 일찍 들어가서
우리 막내딸 재롱 떠는 거 봐야 해. "
''이 사람, 늘 그 막내딸, 막내딸.
그 귀여운 막내딸,
내 돈줄테 나 한 달만 빌려 주게.
얼마나 이쁜지 나도 좀 보자구."
'안 돼. 한 달 동안
나 심심해서 어떡하라구."
어려서부터 노래를 곧잘 불렀던 나는
아버지 친구분들이 집으로
찾아오실 때마다 모임의 분위기를 한껏
돋우는 초대 가수가 되곤 했습니다.
나는 사람들 앞에서 양손을
가슴께에 모으고
좌우로 몸을 흔들어가며
노래하기를 즐겼습니다.
국민학교 2학년 시절부터는 그 재능을 살려
YMCA 기독교 합창단원으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주말이면 곱슬곱슬 구부린 머리에
코티분으로 뽀얗게 단장을 하고
기독교 방송국으로, 미군 부대로
공연을 하러 다녔습니다.
미군 부대로 공연을
가는 재미는 특별했습니다.
그날은 귀하기만 했던 초코렛, 껌,
드롭프스 등을마음껏 먹고 집으로
한아름 싸들고 올 수 있었으니까요.
전쟁의 상흔이 채 아물지
않았던 그 시절에는
세끼 밥을 먹고 사는 집이 드물었습니다.
오히려 당장의 한 끼니를 걱정하며
사는 사람들이 태반이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꽤 살림이 넉넉했던
우리집에는 구걸하러
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아버지는 그이들에게 얼굴 한번
찡그리는 법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집안 일을 보는 아주머니들에게
매번 꼭 더운밥을 대접해
보내라고 이르시곤 했습니다.
사랑채에서 배가 부르도록
식사를 한 그이들이 돌아갈 때는
과일이며 과자 등을 싸서
들려보내는 것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나 역시 과자나 장난감을 사서
친구들한테 나누어 주기를 좋아했습니다.
친구들과 고무줄 놀이나
소꿉 놀이를 할 때면
고무줄을 자르거나
장난감을 부수고 도망 치는
짓궂은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제대로 된 장난감을 구경하기조차
어려운 시절이었으니
샘이 났을 법도 합니다.
그런 친구들에게는 내가 왜 진작 고무줄을,
장난감을 나눠주지 못했을까 하고
늘 미안한 마음이 앞섰습니다.
다음날이면 나는
그 친구에게 사과의 편지를 써서
몰래 책상 속에 넣어두곤 했습니다.
아버지는 그런
막내딸을 바보라 하시기는 커녕,
"우리 막내딸 착하다" 하시며
형편이 어려운 여러 친구들의
학비와 용돈은 물론
그 집안 살림살이까지
일일이 돌봐주셨습니다.
아들.딸들의 옷을 사 입힐 때도
친구들의 몫까지 꼭 함께 챙기셨으며,
생일까지 잊지 않고
선물을 준비해두곤 하셨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어린 내 눈에도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모릅니다.
부모님에 대한 효성도 지극하셔서
좋은 음식을 부모님보다
먼저 드시는 법이 없었습니다.
밖에서 친구분들과 새로 나온
과일이라도 드시게 될 양이면
그 자리에서 드시지를 못했습니다.
곧 바로 상점에 들러 그 과일을
사다가 부모님이 잡숫도록 하신 후에
가족들과 집안일을 돌보는 식구들까지
함께 불러서 드시는 분이
내 아버지였습니다.
내게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유독 많은 이유는
내가 스스로의 힘으로
설 수 있을 때까지
아버지는 나를 지탱하는
지팡이가 되어주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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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자유게시판
하늘에 걸린 이름----양 애란
고구마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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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4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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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