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7년 8월 1일
남대문 전투
전투 발생 며칠 전인 7월 24일에 체결된 정미 7조약의 일환으로
일제 통감부는 조선군의 후신인 대한제국군의 해산을 감행하였다
통감부는 한국군의 반발을 예상하여
일단 한국군 대대장 이상급 장교들에게만 우선 해산소식을 알린 후
사병들에겐 비밀을 유지한채
병력들을 무장해제 시킨 후에 훈련원으로 모을것을 명령한다

대한제국군 시위대 1연대 1대대장 박승환 참령(소령)은
이 참담한 명령에 할 말을 잃었다
1887년에 참위(소위)로 임관하여 1904년에 참령까지 오른,
당시로서써는 찾기 힘든 엘리트였던 그는
이 명령이 무엇을 뜻하는지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군대가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가 충성을 다하지 못한다면 만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
차마 해산령을 부하들에게 말할 수 없었던 그는 짤막한 유서를 남긴채
그의 집무실에서 자결한다

대대장이 자결하고, 그의 유서를 통해 모든 전말을 알게 된 1연대 장병들은
분노에 몸을 떨었고 이내 억누르고 있던 반일감정이 폭발하게 된다
그들은 무기고를 깨부숴 이미 반납했던 총기를 되찾아
일본군과 교전을 시작했다

그 시각, 영문도 모른채 무기를 반납하고 훈련원으로 향하던
바로 옆 병영의 2연대 1대대 장병들은 갑작스런 총성에 발길을 멈췄다
그리고 이어서 병영으로 들어온 1연대의 장병들에게서 사건의 전말을 듣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며칠 전, 마찬가지로 반일장교였던 2연대 1대대장 이기표 참령이
항명죄로 경질된 것에 격앙되어 있던 2연대 장병들 역시 즉시 전투에 참가하였다

통감부는 어느 정도의 소요사태는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한국군이 봉기하자 통감부는 즉시 바로 인근에서 그들을 감시중이던
일본 육군 13사단 9중대와 10중대에게 진압명령을 하달하였다
하지만 예상외의 거센 저항에 9중대와 10중대는 진압은 커녕
병영으로의 진입조차 불가능한 교착상태에 빠진다

당황한 일본군은 남대문 문루에 기관총 2정을 설치하여 제압사격을 시작했다
1연대와 2연대의 병영은 남대문에서 바로 내려다 보였기 때문에
이 제압사격은 상당히 치명적이었다
거기다 곧이어 13사단 7중대와 12중대가 급파되며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결국 병력과 화력, 탄약, 장비 등 모든 면에서 열세였던
한국군은 이내 병영의 방어선이 돌파당하며 2연대 병영이 함락당한다
이 와중에 일본 13사단 9중대 가지와라 중대장을 전사시켰지만
1시간 후, 1연대의 병영 역시 함락당하고 말았다

이 전투로 인해
봉기하였던 한국군 1200여명 중에
68명이 전사, 100여명이 부상을 입고 500여명이 포로로 사로잡혔다
포로로 잡히지 않은 나머지 병력은 극적으로 탈출하여 훗날 정미의병에 가담하였다
포로로 잡힌 병력은 의외로 퇴직금의 명목으로 은사금을 지급받고 집으로 돌아갔으나,
부상을 입은 장병들에겐 은사금이 지급되지 않았다
이들의 일부는 이후 남한대토벌 작전에 동원되었으며, 그 중의 또 일부는 친일세력이 되고 말았다
반면 일본 육군은 4명이 전사하고, 약 3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후 전국적으로 군 해산명령이 하달되자
강화와 원주의 진위대도 봉기하였지만
별다른 성과없이 진압되었다.
※대한제국군의 소총은 베르됭소총이였는데 볼트액션식 소총이긴 했지만 탄창이 1발씩이라 탄환 한 발을 넣어서 쏘고 다시 한발을 장전하고 쏘는 식이여서 연사속도가 굉장히 느렸음.
하지만 일본군소총은 5발들이 볼트액션식이라 연사력에서 압도했고 감제고지격인 남대문에서 기관총사격까지 받다보니 화력면에서 절대 열세였기 때문에 어쩔수 없었음.
거기다가 대한제국군은 1인당 20발정도의 탄약만이 있었기때문에 제압사격도 힘든 상황이었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