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찹힐 (Pork Chop Hill)
1959년 미국영화
감독 : 루이스 마일스톤
출연 : 그레고리 펙, 해리 구아르디노, 립 톤
조지 페퍼드, 로버트 블레이크, 우디 스트로드
제임스 에드워즈, 칼 벤튼 레이드, 조지 시바타
밥 스틸
할리우드에서 만든 전쟁영화중 한국전쟁과 관련된 소재는 태평양 전쟁이나 독일과의 전쟁영화 만큼 많지는 않지만 제법 있습니다. 의외로 국내 미개봉된 작품들이 많지요. 옛날에는 이게 좀 궁금했었지요. 우리나라에서도 6.25 전쟁영화는 꽤 많이 만들어졌고, 왜 수많은 할리우드 영화들이 개봉되는 와중에 한국전쟁 영화들은 쏙 빠진 경우가 많을까?
좋은 시대가 되어 그런 영화들을 한 편 한 편 볼 수 있게 되면서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부분이 있었죠. 적어도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진 한국전 영화는 몇년전에 히트한 '인천상륙작전'이나 혹은 60년대 만들어진 극책성 전쟁영화 같은 내용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나라 반공교육에 어울리는 입맛에 맞는 영화를 찾기는 쉽지 않았을 겁니다. 한국에 인도적인 착한 미국장교의 이야기를 다룬 '전송가' 같은 영화는 개봉되었지요.
그레고리 펙이 주연한 '폭찹힐'도 국내 미개봉작입니다. 그레고리 펙의 경우 1950년부터 1962년 사이에 출연한 작품 중 국내에 개봉되지 않은 영화는 딱 2편 뿐이며 나머지 20편은 모두 우리나라 극장에서 개봉되었을 정도로 인기 배우였습니다 그 개봉되지 않은 2편 중 하나가 '폭찹힐'입니다. 당시로서는 의아했겠죠. 거의 모든 영화가 개봉되는 인기 배우가 한국전쟁 소재 영화에 출연했는데 그 영화가 개봉이 안되다니..... 그런데 영화를 보면 이해가 될만 합니다. 적어도 대사를 왜곡하지 않으면 불편한 내용들이 있으니까요.
코리아 힐튼 호텔 이라는 표지판을 보면
한국전쟁임을 알 수 있다.
별로 생각외로 역할이 적었던 조지 페퍼드
(맨 왼쪽)
병사들은 판문점에서의 회담타결 소식만 기다리는데
그 기대와는 달리 고지를 탈환하라는
전투 명령이 떨어진다.
중공군이 장악한 언덕을 탈환하기 위하여
전투에 임하는 병사들
우리나라 영화 '고지전'의 미국버전이랄 수 있습니다 아마도 '고지전'이 이 영화를 보고 힌트를 얻었을 수 있겠죠. 다만 여러가지 영화적 재미와 픽션적 요소가 많았던, 그래서 이야기가 장황했던 '고지전'과 달리 '폭찹힐'은 굉장히 단순하고 일관된 영화입니다.
휴전협상이 한참 진행중인 한국전쟁 막바지인 1953년 4월, 전쟁에 참전중인 미국 최전방 부대 병사들은 긴 전쟁에 지쳐있고, 곧 휴전협상이 타결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벌써 분위기는 전쟁이 끝난 것처럼 흐르고 있고, 얼마후면 집에 돌아가서 가족과 만날 것을 기대하는 병사들은 하루하루 판문점 회담의 뉴스에 촉각을 세웁니다.
이런 분위기와 상반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중공군이 폭잡고지를 공격하여 점령했다는 소식, 미국측은 즉각 병력을 보내서 고지를 탈환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몇 개의 중대가 고지탈환을 위해서 보내지고 그 중 클레몬스 중위(그레고리 펙)가 이끄는 135명의 킹 중대도 고지 탈환을 위한 전투에 보내집니다. 그런데 별로 탈환이 어렵지 않을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수많은 중공군들이 배치되어 있었고, 우측면을 막아줄 거라고 생각했던 러브중대는 속절없이 당해서 중공군의 반격을 허용하고 있었습니다. 클레몬스 중위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있는 힘을 다하여 벙커를 하나하나 점령해 나갑니다. 하지만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대대에 지원병과 보급품을 보내달라고 계속 애기하지만 보급품도 지원병도 오지 않습니다. 심지어 구원병처럼 등장한 동료 중대를 만나 반가워했지만 대대로부터 그 중대의 철수명령이 떨어진 것을 알고 망연자실합니다. 숫적으로 우세한 중공군의 거센 공격을 간신히 막아내며 겨우 25명 정도 병력만이 남은 상황, 중공군은 45분내 항복하라고 최후 통첩을 보내고 이제 알라모 전투처럼 사면초가에 올린 클레몬스 중위는 살기 위해 고지를 포기하고 퇴각할지 아니면 끝까지 결사항전을 해야 할지 선택의 기로에 놓입니다.
생각외로 만만찮은 형세를 느끼는 병사들
아무리 대대에 상황을 보고하고 보급요청 및
지원군 요청을 해도 깜깜 무소식.
'고지전'을 보신 분이라면 대략 어떤 내용일지 예상이 될 것입니다. 이 영화 전체가 우리나라 영화 '고지전'의 마지막 20분과 많이 닮아 있습니다. Pork Chop Hill, 그냥 휴전선 지역에 있는 하나의 언덕입니다. 군사적으로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지역, 그곳에서 고기덩이 처럼 죽어나간다는 의미로 미국인들이 Pork Chop 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포크 찹 힐이라고 해야 맞겠지만 어감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 그냥 폭찹힐로 발음하거나 표기하는 경우가 많고 저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 어떻게 보면 하찮은 지역이고 그런 곳을 위해서 쓸데없이 병력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지만 어떤 이유인지 중공군이 그 지역에 기습을 해서 고지를 점령했고, 미국인들은 군대를 보내서 탈환을 하려고 했지만 제대로 된 지원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탱크, 비행기가 아닌 그야말로 보병과 보병이 부딫치는 소모전으로 많은 미군과 중공군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결국 판문점 협상에서의 유리한 선점과 자존심 싸움때문에 하찮은 고지를 위해서 별 의미없는 희생과 전투가 벌어진 것입니다.
영화속에서 이런 상황이 은근 수시로 묘사되고 있고, 우디 스트로드가 연기한 프랭클린 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그런 부분이 부각됩니다. 프랭클린은 고지탈환 작전 처음부터 굉장히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고, 심지어 최후의 상황에서 진격거부를 하며 왜 한국이라는 곳을 위해서 의미없이 싸워야 하냐고 항변하기까지 합니다. 10년동안 군에 있었고, 이제 돌아갈 권리가 있다면서. 심지어 '한국을 위해서 죽지 않아서 계속 있어야 하는가?' 라는 말까지 하죠. 그에 대한 클레몬스 중위의 대답도 의미가 있죠.
"죽을 기회는 많지만 훌륭한 중대에서 죽을 기회가 있다. 저들 모두 자네처럼 한국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거칠게 살아온 자들이야. 하지만 이곳에 같이 올라왔고, 같이 싸웠어. 이제 25명 남았고, 자네도 이 배타적인 클럽에 원한다면 가입할 수 있네"
우디 스트로드(오른쪽)는 고지점령 전투에
회의를 느끼는 지친 병사로 등장한다.
전쟁영화에 비교적 많이 출연한 배우 그레고리 펙
루이스 마일스톤 감독은 이미 1930년에 '서부전선 이상없다' 라는 반전영화를 통해서 전쟁의 참상을 비판했습니다. 그는 군인들이 노고와 희생은 깊이 경외하지만, 그들을 뒤에서 조종하는 책상머리에 앉아있는 정치인들을 비판합니다. '폭찹힐' 역시 그런 성향을 갖고 있는 영화입니다. 휴전협상에서 조금이라도 유리한 결말을 위해서 수많은 병사들의 희생이 치뤄지는 고지전에서의 뺐고, 빼앗기는 소모전, 미군병사들간의 대화에서 '이 땅은 단 돈 1달러에도 살 가치가 없을거야' 라는 말도 나옵니다. 이런 대사나 상황묘사를 통해서 '사무직'들의 자존심을 위해서 '현장직'들이 뼈빠지게 고생하고 죽어나가는 부당함을 은근 비꼬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상부의 무모한 작전과 자존심 싸움이었지만 현장의 군인들은 매우 용감하고 치열하게 싸웠고 그들에게 경배한다... 뭐 그런 의미를 가진 내용입니다. 우리나라 DVD 출시제는 '잊혀진 전쟁'입니다. 그날 그 곳을 사수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치열하게 싸운 현장의 그 군인들만이 기억하고 똑똑히 알고 있지만 역사에서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지역을 두고 싸운 소모전이 된 전투. 대체 왜 이깟 고지가 그리 중요한가 라는 서로간의 대화들.. 결국 '누군가 용감히 싸워 죽어갔다'라는 의미가 있는게 가장 중요하다 그런 자조적인 대사까지 등장합니다.
중공군이 방송을 통해서 미군의 약점과 심기를 건드리며 회유를 펴는 내용도 흥미롭습니다. 이 영화에서 비판하는 내용이 그대로 중국인의 방송을 통해서 등장합니다. "당신들도 젊고 우리도 젊다. 당신들은 용감히 싸웠다. 이제 더 이상의 희생을 치룰 필요가 없다. 고향으로 가고 싶지 않은가' 뭐 그런 회유방송입니다. 25명 남은 절대 부족한 인원으로 수많은 중국인의 대대적 기습을 맞어야 하는 상황, 당연히 철수하는게 자기도 살고 부하들도 살리는 방법이지만 클레몬스 중위의 이 한마디가 인상적입니다. '중공군이 나팔을 불며 그냥 걸어오게 놔둘 수는 없어'
병사를 독려하는 클레몬스 중위
더 이상 한국을 위한 무의미한 희생을 거부하는
프랭클린을 설득하는 클레몬스
최후의 25명의 운명은?
한국전을 다룬 영화지만 한국인 캐릭터가 전혀 나오지 않는 것도 조금 씁쓰레하고, 일본계 장교가 하나 등장하고 있을 뿐입니다. 당연히 촬영도 한국에서 한 것이 아니고 한국처럼 산지가 주변에 보이는 아리조나 주 일대에서 촬영했습니다. 미국인들 입장에서 이 영화를 볼 경우 아시아의 먼 어느 나라에 가서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고지를 탈환하기 위해서 곧 전쟁이 끝날 상황이었음에도 목숨걸고 싸워서 전사한 수많은 젊은이들의 애꿎은 죽음에 마음이 아플 내용입니다. 당연히 당시 우리나라에서 지향했던 국책 전쟁물의 성격과는 매우 다른 내용이었지요. 그래서 거의 모든 영화가 우리나라에 개봉되는 인기배우 그레고리 펙 주연의 한국전 소재 영화였지만 국내에는 아예 극장개봉이 안되고, 군사정권 내내 '초희귀작'으로 머물렀던 영화입니다.
ps1 : 루이스 마일스톤은 전쟁영화를 제법 만든 인물입니다. 하지만 멋진 승리를 찬양하는 낭만적 전쟁물을 연출한 것은 아니지요.
ps2 : 한국전 소재 영화들 중에는 아주 유명한 작품은 없지만 기라성같은 유명 배우들이 많이 출연했지요. 대표적인 윌리암 홀덴을 위시해서 그레고리 펙, 알란 랏드, 시드니 포이티어, 로버트 라이언, 록 허드슨, 로버트 레드포드, 로렌스 올리비에 등이 한국전 소재 영화에 출연한 유명한 인물입니다.
ps3 : 그레고리 펙 다음으로 유명한 배우가 조지 페퍼드인데 역할 자체가 정말 빈약합니다. 아마 그가 출연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도 거의 없을 것 같네요. 처음부터 일찍 등장하길래 비중이 좀 있나 했는데 오히려 우디 스트로드나 로버트 블레이크보다도 비중이 없네요. 아직 '티파니에서 아침을' 출연 전이긴 했지만.
ps4 : 대부분의 캐릭터들에 대해서 실명을 그대로 썼다고 합니다.
ps5 : 옛날 고전 전쟁영화들의 특징은 군인역할 배우들의 나이가 너무 많다는 부분이지요. 그레고리 펙은 중위계급인데 40대 나이였지요. 실제 당시 클레몬스의 나이는 25세 였다고 합니다. '발지 대전투' 같은 영화도 군인역할의 배우들의 나이가 심하게 많지요.
[출처] 폭찹힐(Pork Chop Hill, 59년) 한국전쟁의 고지전 전투|작성자 이규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