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손을 잡고 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기러기 쌍을 바라보고 있는 어린아이의 모습. 이 그림은 유일하디시피 한 허난설헌의 작품이다. 강릉 땅 돌 쌓인 갯가에서 살면서, 문 앞의 강물에서 비단옷을 빨아 입고, 아침마다 한가롭게 배(목란배)에서 놀았다는 허난설헌의 생가를 찾았다.
일곱살에 '광한전벽옥루상량문"을 지을 정도로 그녀의 천재성은 중국에까지 알려졌다(양조평양록). 오빠 허봉도 배워서는 그리 할 수 없다고 할 정도로 천재성은 남달랐는가 보다. 당시 여자로서 딸들에게 글을 가르키거나 학문을 못하던 시절에 오빠 허봉은 동생 난설헌에게 당대 최고의 시인이었던 친구 이달에게 시를 배우도록 했다. 이달은 서얼출신으로 사회제도적으로 출세할 길이 막혀 벼슬길로 나가지 못하고 떠돌이 생활을 했으며 틀에 박히지 않은 당나라 시풍의 글을 썼다. 난설헌은 이달에게서 자유분방한 성격의 당시을 배웠다. 이렇게 허균과 허난설헌 남매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친 사람이 손곡 이달이다. 스승 이달은 원해서 그런 것도 아닌데 자신의 의지와도 상관없이 서얼출신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사회진출도 어려웠다. 난설헌은 15세에 김성립과 결혼하였으나, 원만한 부부생활을 하지는 못했다. 남편은 관직에 나갔으나 방탕했고, 그녀를 학대하기도 했다고 한다. 거기에다 고부간에 불화하였다고 한다.
한편 아버지 '초당' 허엽은 그 흔적이 강릉의 유명한 '초당' 두부에서도 남아있는데 두부를 소금물 간수가 아닌 바닷물로 처음 만들어먹었다고 해서 초당 두부라고 한단다. 그런데 초당 허엽의 집안은 강릉의 유명한 양천 허씨 문중으로 허씨 가문의 5문장은 특히 유명하다. 아버지 초당 허엽은 서경덕의 문인이었고, 아들인 하곡 허봉과 악록 허성은 담양에 연고가 있는 미암 유희춘의 문인이고, 허균과 허난설헌은 서애 유성룡과 손곡 이달에게서 배웠다. 이렇게 아버지 허엽, 자식들(허엽, 허봉, 허균, 허난설헌, 허성) 5명은 허씨5문장으로 유명하다.
잘 아시다시피 허난설헌은 젊은 나이에 강물에 몸을 던져 기구한 생을 마감했다. 1563년에 태어나 1589년에 세상을 떴으니 우리 나이로 치면 27살 꽃다운 나이에 피지 못한 꽃으로 지고 말았다. 그녀의 삶은 기구했다. 자식을 잃었고 남편이라는 사람과 사랑을 알지 못한채 시들어갔다. 그렇게 사랑하던 남매를 잃고, 그녀는 어린 남매의 무덤 앞에 정화수를 떠놓고 소지를 올려 “밤마다 사이좋게 손잡고 잘 놀아라”하면서 넋을 위로하였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뱃속의 아이까지 잃었다 한다. 아이를 일고 지은 곡자(哭子)을 옮겨 적는다. 아니지 사진을 찍어 올린다.
첫댓글 가을 단풍이 너무 예쁜날 저도 다녀왔어요.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