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만식 | |
| |
출생 | 1883년? 2월 1일 대한제국 평안남도 강서군 |
사망 | 1950년 10월 15일 추정 북조선 평양시 |
사인 | 처형 |
국적 | 대한제국, 조선인민공화국, 대한민국 |
별명 | 호 고당(古堂) |
학력 | 일본 정칙영어학교 |
직업 | 독립운동가, 사상가, 정치가 |
종교 | 기독교(장로교 |
배우자 | ?, 전선애 |
자녀 | 아들 조칠숭, 아들 조연명, 아들 조연창, 아들 조연흥, 아들 조연수, 딸, 조부선, 딸 조선영 |
부모 | 아버지 조경학(趙景學), 어머니 경주김씨 김경건(金敬虔) |
웹사이트 http://godang.goorm.net |
조만식(曺晩植, 1883년[1] 2월 1일 ~ 1950년 10월 15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일제 강점기의 교육자·시민사회단체인·정치인이다. 22세에 기독교에 귀의한 이후 상업과 종교활동에 종사하다가 1919년 3.1만세운동으로 투옥당하기도 하였다. 일제 강점기 하에 교육활동과 물산장려운동· 국내민간 자본으로 대학설립 추진 운동인 민립대학 기성회 운동을 주도하였다. 1945년 한국최초의 기독교 정당인 조선민주당을 창당하고 초대 총재를 지냈으며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관하다가 1946년 평양 고려호텔에 감금된 뒤 6.25 전쟁 중 살해되었다.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출생하였으며, 아호는 고당(古堂), 본관은 창녕, 종교는 기독교이다. 국산 물산장려운동과 일본 제품 불매운동을 적극적으로 주도하여 조선의 간디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1883년 2월 1일(음력으로는 12월 24일) 아버지 조경학(曺景學)과 어머니 경주김씨 김경건(敬虔)의 독자로 태어났다. 평안남도 강서 출신으로, 본적은 평안남도 강서군 반석면 반일리 내동이었다. 1888년 6세에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1896년 한문 수학을 마쳤다. 1905년 평양의 기독교 계열 학교인 숭실학교(또는 숭실중학)에 입학하였으며, 숭실중학에서 수학하면서 재학 중 기독교에 입문했다.[2] 어린 시절의 조만식은 병약하였고, 아버지는 어린 아들에게 강인한 정신력을 키워주려 노력하였다. 한번은 어린 동네 아이들에게 얻어 맞고 울면서 집에 들어온 적이 있었는데, 부친은 그때 울고 온 아들에게 "사내 자식이 창피하게 얻어맞고 다니려거든 밥도 먹지 말거라." 하며 벌을 세웠다 한다. [3] 그뒤 체력을 단련하고 무예를 연마하여 격투기의 일종인 날파람을 익혀 호신술로 활용하면서 어린 조만식은 날파람의 명수로 이름나도록 연마하기도 했다.[4] 아버지 조경학은 "사람이란 의리가 있어야 한다. 절의(節義)를 존중하고 지켜야 하느니라"하며 의리와 절의의 중요성을 자녀들에게 역설하였고, 이는 그의 생에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보다 5살 아래인 누이 동생 조은식 역시 아버지의 가르침의 영향을 받았는데, 은식은 열일곱에 결혼하여 결혼 3년 만에 남편을 잃고 청상 과부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녀는 재혼하지 않고 지조와 절개로 50년을 수절한 후 고고하게 생을 보냈다.[3] 그뒤 조만식은 평양시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였다.
1897년 그는 부모의 권유로 2세 연상의 박씨(朴氏) 부인과 결혼하였다.[5] 첫 아들 조칠숭이 태어나 아버지가 되었으나 조칠숭은 정신 미발육의 장애아였고, 가정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결혼생활 7년 만인 1902년 그는 첫부인 박씨와 사별하였다.[5] 1902년 전주이씨 이의식 여사와 재혼하였다.[5] 장애아였던 장남 조칠숭은 그의 나이 26세때에 요절하고 말았다.[5]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생하자 조만식은 장사를 그만두고 가족들을 이끌고 대동강 중류 지방의 베기섬에 있는 벽도지리(碧島只里) 마을로 피난을 떠났다. 그 무렵 고당의 나이 22살 때 피난 생활 중에 급우의 전도로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5]
조만식은 22세에 기독교 장로교에 귀의하여 신앙 생활을 시작하였다. [6] 기독교 신앙에 입문한 한 후 조만식은 한정교를 따라 평양 장대현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4] 주일 낮에 1천 5백명을 육박할 만큼 신자가 많던 장대현 교회의 교회당에 처음 들어 선 순간 조만식은 거대한 군중들의 분위기를 보고 놀랐다 한다. 당시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대규모인파가 한 서양인의 인도에 따라 열광적으로 노래하다가, 다시 온 무리가 함께 부르짖기도 하는 광경에 그는 충격을 받았다. 처음 예배장면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은 그는 며칠밤을 잠못이루다가 교회에 본격적으로 다니면서 신앙에 귀의하게 되었다.[4] 놀기를 좋아하고, 대주가(大酒家)로 용맹을 떨칠 정도였던[4] 신앙 생활을 시작한 직후 조만식은 술과 담배를 끊고 방탕한 생활을 정리하기 시작했다.[6] [4] 1905년초 평양 장대현 교회의 신년사경회를 통해 감화받은 조만식은 3월이 되자 고당은 숭실 중학교에 입학을 결심, 아버지를 여러 번 설득한 끝에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4] 숭실중학교에 원서를 제출시 초라한 몰골 때문에 배박사 등이 거절하였으나 여러번의 설득으로 1905년 그는 숭실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4][7] 교장 배위량 박사는 한국인이 술을 지나치게 좋아해서 폐단이 많은 것을 보고 학교의 교칙으로 금주령을 내렸다. 술이 신앙 생활하는데 방해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던 그는 철저하게 금주 교육을 시켰던 것이며 수업중에 술 주(酒)라고 써야할 대목이 나오면 그 글자를 일부러 피하여 ○표로서 술 ‘주’자를 썼다.[8] 숭실중학교의 교장이자 은사였던 배위량 박사와 박자중 교사의 감화를 받았다. 그러나 박자중 교사는 조만식이 숭실중학교 재학중인 1906년 6월 21일 5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8] 또한 교외의 인물로는 도산 안창호와 남강 이승훈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중학교에 다니며 금연과 금주를 결심하였으나, 술과 담배 습관을 완전히 끊기 어려워 그는 급우들과 망을 보면서 몰래 담배를 피우다가 들켜서 여러번 벌을 받기도 하였다.[6] 그러나 그해에 조만식은 금연·금주에 성공했고 그후 40년을 일체 금주, 금연하면서 지조를 지켰다.[6]
안창호의 연설에 감화받은 그는 실력을 양성하는 길이 민족을 구하는 길이라 확신하고 일본유학을 결심한다.[9] 1908년 숭실중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서 1910년까지 정칙영어학교에서 영어를 공부하였다. [7] 일본 유학 시절 그는 인도의 독립운동가 마하트마 간디의 일대기인 '간디전'을 읽었으며[8] 영어를 공부하던 도중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가 주창한 인도주의와 무저항주의, 민족주의에 관한 글을 공감하여 독립운동의 거울로 삼았다.[2][7] 그뒤 심지어 복장이나 삶의 스타일까지 간디풍을 즐겨 따라하였으며[8] 무저항주의와 비폭력주의의 실천과 간디 정신을 따라 매사에 스스로 절제하려 노력하였다.[8] 한편 인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그는 국내 대학 설립운동에 참여하여 후원하기도 했다. 1910년봄 정칙영어학교를 졸업하고 메이지 대학교 법학부에 진학하였다. 1910년 여름 조만식은 잠시 귀국하여 고향에 돌아왔다. 고향에 머무르고 있을 때 8월 29일 경술국치 소식을 접하였다.[9] 치욕스러운 한일합방에 분노를 느낀 그는 시내의 한일합방 경축식과 일본의 신사에서 신을 모셔오는 행사장에 난입하여 아수라장으로 만들려다가 아버지 조경학이 계속 간곡히 만류하여 그만둔다.[9] 자신이 나설 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닭고 격정을 참은 그는 참는 것이 진정한 용기라고 깨닭게 되었다.[9] 그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 대학을 다녔다.
1913년 메이지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정주의 오산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다가 1915년 오산학교 교장으로 승진했다.[7] 1919년 오산학교 설립자인 이승훈을 필두로 교사와 직원에 이르기까지 3·1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그도 교장직을 사직하고[7] 3·1운동에 적극 가담했다가 체포되어 평양감옥에서 1년간 복역하였다. 3.1 운동 직후 그가 1년 형을 선고받고 평양 감옥에 수감되자 아버지 조경학은 아들이 형무소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졸도하였다.[3] 집에서는 가장의 인사불성으로 온 집안이 초상집이 되었으나 얼마 후 아버지 경학은 병석에서 일어났다.[3] 병석에서 일어난 아버지는 지팡이를 짚고 그가 수감됨 평양형무소에 가 형무소 주변을 한바퀴씩 돌았다고 한다.[3] 외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정성을 본 사람들은 그의 정성에 감복하였다. 어느 날 아버지가 조만식을 면회하기 위해 형무소를 찾아가서 옥중 간수에게 취사장의 위치를 물은뒤 간수의 안내를 받아 취사장으로 갔다.[3] 형무소 취사장에서 조경학은 수수와 콩으로 지어진 밥을 직접 시식하고는 너털 웃음을 지으면서 뭐, 이만하면 견딜만하겠다 하며 아들을 면회하게 되었다.[3] 조경학은 쏟아지려는 눈물을 억지로 참고, 염려의 기색을 숨긴 채 태연하게 아들의 안부를 묻고는 이정도의 식사면 건강에 지장이 없으니 잘 이겨내라며 사내에게 이런 고생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며 참고 견딜것을 주문하였다.[3] 아버지 조경학은 외아들에 대한 격정을 감추면서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3]
평양감옥에서 1년간 복역한 후 평양 형무소에서 2개월의 형 만기를 남겨 두고 가석방을 받았다.[6] 일반적으로 가석방 소식은 감방 내에서 경사와 같았지만, 그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감형을 단호하게 거절, 10개월 동안 수감된 것 자체가 불법인데 가석방이라는 이름으로 은전을 받는다는 것은 더욱 불명예스러운 일이니 가출옥을 하지 않고 이대로 잔여 형기를 모두 채우고 나가겠다며 거절하였다.[6]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가석방조치 되었다. 평양교도소에서 석방된 뒤 조만식은 다시 오산학교에 교사로 부임한 뒤 오산학교 교장직에 취임하였다.[2] 1921년 평양 YMCA청년회 총무가 되고, 산정현교회(山亭峴敎會)의 장로에 선출되었다. 1922년 국산품 애용을 독려하기 위해 조선물산장려회를 결성하고 회장에 취임했으며 평양 YMCA 총무를 지내기도 하였다.[10] 이때부터 “조선의 간디”로 불리었다.
1923년에는 김성수, 송진우 등과 함께 연정회(硏政會) 조직에 동참하였다.[7] 연정회의 구성 목적은 민족 교육을 위한 대학 설립 목적의 조선민립대학기성회를 조직했으나 일제에 의해 좌절되었다.[2] [7] [11] 바로 숭인중학교(崇仁中學) 교장에 취임하였다.[7]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계속된 탄압과 압력 끝에 1926년 숭인학교 교장직을 사퇴하였다.[7] 1927년 신간회 결성에도 참가했다.[2] 1927년 평양지역의 신간회 조직 활동에 적극참여하고[7] 신간회 평양지회장에 추대되었다.[11]
1929년 인파를 모아 서울역 앞에 집결하여 광주만세운동 진상보고 민중대회를 개최하려 하였으나 조선 총독부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11]가 풀려났다. 1930년 관서체육회 회장에 취임하였고, 1930년대 이후로 잡지 삼천리에 칼럼을 기고하기도 했다. 1932년에는 숭실학교 후배인 조병옥이 출감하자 경영난에 빠진 조선일보를 인수 운영하였고, 조선일보 사장을 맡았다. 조선일보의 사장이 되자 편집국장에 주요한(朱耀翰), 전무겸 영업국장에 조병옥을 임명했다. 그가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사장이 되자 조선총독부로부터 신사참배와 지원병제도를 협조하라는 요청이 왔으나 모두 거부하였다.[10] 한편 이봉창·윤봉길 사건으로 안창호가 상하이에서 체포되어 수감되자, 여운형, 이광수 등과 함께 매일 안창호를 찾아 안부를 물었으며 그의 옥바라지를 하기도 했다.
증산교의 일파인 보천교와도 관계를 갖고 출입하였다. 독립자금 중 많은 부분이 보천교를 통해 종교자금 명목으로 모금되었으며, 이 때문에 조만식이 보천교와 관계를 맺고 출입한 이후, 조만식을 비롯해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보천교를 출입했던 것으로 조선총독부에 알려지게 되었다.[12][13]
조만식이 출입한 이래 조만식 외에도 한규숙·장덕수·최팔용·송진우·백관수·조병욱·신석우·김철수·김철수(동명이인)·안재홍·백남훈·설태훈·임모, 김모 등이 보천교에 출입하게 되었다.[14]이 외에도 그와는 동명이인인 조만식(趙晩植)도 보천교에 가담하였다.[14] 당시 신문기사에 따르면 조만식과 한규숙(韓圭淑) 등은 보천교 신도들이 마련한 30만 원을 독립 군자금으로 만주에 보내려다가 발각되어 총독부 경찰서에 체포되기도 했다.[12][13] 조만식과 한규숙이 체포된 원인은 그들과 함께 권총 2자루를 소지하고 있다가 검거된 '상해 밀정'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함께 관여한 월곡의 후손들은 보천교에 있다 체포된 사람은 고당 조만식이 아닌 1936년에 신의주에서 사망한 동명이인 이라 증언하였다.[14] 그해 조만식은 평양의 을지문덕묘소를 돌보면서 '을지문덕장군 묘 수보회'(墓修保會)를 창립하고 그 회장에 취임하였다.
1935년 12월 18일 부인 이의식 여사가 별세하였다. 그뒤 아내를 잃고 혼자 살고 있었다. 이때 주변의 소개로 옛 제자인 전선애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전선애는 이 무렵 개성 호수돈여자고등학교 기숙사 사감으로 재직하고 있었다.[15] 다시 만난지 3개월 만인[15] 1937년 봄 조만식은 전선애와 결혼하였다.[16][15] 개성 호수돈여자고등학교 기숙사 사감으로 있으면서 미국유학을 준비중이던 전선애는 조만식과 결혼하게 된 동기로는 조만식의 인품을 보고 결혼하게 된 것이라고 진술하였다.[15] 1936년 공석인 목사를 대신하여 산정현 교회의 일을 보고 있던 조만식은 목사가 된 제자 주기철에게 산정현 교회의 목사로 부임해줄 것을 요청하였다.[17] 은사의 부탁을 받은 주기철은 곧 평양 산정현 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해 왔다.[17]
이무렵 안창호가 중국 상하이에서 체포되어 송환되었다. 그는 여운형과 함께 안창호에게 문안인사차 찾아다녔다. 1937년 동우회 사건으로 평양의 독립운동가에 대한 검거와 탄압이 지속되자, 조만식도 이때 체포되어 서울에 이송되었으나 혐의점이 없어 20여일만에 풀려났다. 1938년 2월 2일 딸 조선영(趙善英)이 태어났다.
1943년 지원병제를 실시하면서 "아시아·태평양 전쟁에 조선청년이 참전하는 것이 일본인과 동등해지는 길"이라며 회유했던 당시 일본의 협조요청을 단호히 거부했다.[7] 총독부는 그를 이용하여 민심을 회유해 보려던 조선군 사령관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正四郞)의 면담을 거절하고 지원병제를 반대하다가 구금되었다 곧 석방되었다. 1943년 11월 16일에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학도에게 고한다”라는 조만식의 이름으로 조작된 학병 지원 기사가 실렸다. 그러나 이는 도용이었고, 당시 평양 지사장 고영한이 날조하였음이 나중에 당시 평양 특파원 김진섭 씨의 증언으로 밝혀졌다.[18]
1940년대 후반 일본이 아시아·태평양 전쟁에서 패망할 무렵, 서울에 있던 여운형이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로부터 통치권을 교섭을 받았던 것처럼, 총독부는 평남도에서는 조만식에게 차를 보내 평양으로 모셔오고자 하였다. 그러나 조만식은 이를 거부했고 대신 오윤선이 보내준 차를 타고 평양에 입성했다. 조만식은 1945년 8월 하순 여운형 등이 밀사 손치웅을 평양에 보내 그에게 남으로 내려올 것을 요청 받았지만 "뜻은 함께 하겠으나 몸은 여기 남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사양하였다.[2][7]
1945년 8월 15일 8.15 해방이 되자 평안남도 도지사는 고향에 은거하고 있는 조만식에게 차량을 보냈다. 그러나 일본 총독이 타는 차는 탈수 없다며 심부름 온 김항복을 통해 돌려 보냈다.[6] 해방 직후 청년들이 그를 찾아왔고, 조만식은 백선엽 등을 비서로 채용했다. 백선엽은 해방직후 잠깐 조만식의 비서로 활동하기도 했다.[19] 1945년 8.15 해방 이후 조만식은 여운형 등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 결성을 주도하였으며, 8월 16일 조선건국 준비위원회 평안남도를 조직하고 혼란기를 수습했다.[10] 이어 건준 평안남도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45년 8월 26일 소련군이 평양에 진주한 이후, 소련군의 권고에 따라[10] 광복 직후 조만식이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 평안남도 지부와 현준혁이 이끄는 조선공산당에서 각각 16명의 위원을 선정하여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조만식은 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이 되고, 오윤선과 현준혁이 각각 인민정치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20] 이후 조만식은 치안공백상태에 있던 북한 지역의 정치적 혼란을 정리해나갔다. 이북에 진주했던 소련군 25군의 정치사령부 정치담당관이었던 G. 메크레르 중좌는 '평양은 조만식의 판이었다라고 회상할 정도였다.[21] 조선건국준비위원회 평남지부의 명단에는 준비위원:김병연 노진설 김광진 지창규 김동원 한근조, 총무부장에는 이주연, 재무부장에는 박승환, 선전부장에는 한재덕, 산업부장에는 이종현, 지방부장에는 이윤영, 교육부장에는 홍기주, 섭외부장에는 정기수, 치안부장에는 최능진 등이 각각 선임되었다.[21] 이 중 노진설, 한근조, 이윤영, 최능진 등은 훗날 월남하여 대한민국정부수립에 참여하게 된다.
9월 3일 현준혁이 트럭을 타고 갈때 조만식은 그와 함께 동승하였는데, 현준혁의 암살을 예측한 그는 현준혁이 암살당할 당시 조만식은 사람을 보내 긴급하게 구명하고자 했으나 무위에 그치고 말았다.[10] 조만식은 현준혁을 공산주의자로 평가하지는 않고, 다만 좌경화된 사람으로 보고 있었다. 1945년 9월 8일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의 내각이 발표되었는데, 조만식은 인공 내각의 재정부장으로 선임되었다.[22][23] 그러나 미 군정 진후 후 인민공화국 내각이 와해되면서 사퇴하게 되었다.
9월 12일 평양 산수소학교에서 '인민 정치위원회'가 무장한 소비에트 연방군의 감시 속에 개최되었다.[6] 조만식은 그날 인민정치위원회의 사회를 진행하였다. 인민정치회의를 개최하였으나 공산 측의 방해 공작으로 민족진영의 의견은 빈번히 묵살되었다. 공산진영측에서 민족진영을 향해 인신 공격까지 퍼붓자 조만식은 분연히 일어나 이들을 질책하였다.[6] 1945년 9월 30일 조만식은 소련군 정치장교 메크레르 중좌의 소개로 김일성을 만난다. 조만식은 김일성의 나이가 의외로 젊은 것을 들어 의심하였으나 이내 받아들였다. 10월 7일 조만식은 평양에서 '북조선 5도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24] 스승 유영모의 동창이자 친구인 조만식과 안면이 있던 함석헌은 이날 조만식을 마지막으로 보았다고 회상하였다.[24]
1945년 10월 28일 북조선5도행정국이 설치되자 위원장에 선출되었다.[25] 1945년 11월 3일 조만식은 민족·민주계열이자 최초의 기독교 정당인 조선민주당을 창당하였다.[24] 조선민주당은 창당에서 ‘105인 사건’을 기념하여 105인의 창당발기인을 두었고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을 기념하여 중앙상임위원은 33인으로 하였다. 조만식은 조선민주당의 당수(黨首)가 되어 반공노선과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펼쳤다.[10] 부당수에는 그의 제자였던 이윤영과 최용건이 선출되었다.
조선민주당은 창당 수개월 만에 50만 당원을 확보할 정도로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당원 대부분은 조만식의 인품과 독립국가 건설에 대한 순수한 염원을 보고 입당하여 당원이 되었다. 소련군은 어떻게든 조만식이 친소련적 입장에 서도록 회유와 압박을 가하였다.[26]
1945년 12월 신탁통치가 결정되면서 4개국 신탁통치안에 대한 문구가 쟁점이 되어 찬·반탁 구도가 설정되자 조만식에게는 정치적으로 불리하게 작용하였다.[10] 조만식은 광복 당시 북조선 지역에서 유력한 지도자였고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일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 이어 모스크바 3국 외무장관회의에서 신탁통치안이 통과되자 소련은 조만식을 계속 재촉하였다. 소련 군정청장 겸 소비에트 연방 극동사령부 정치위원 스티코프는 조만식을 찾아와 '당장 신탁 지지성명을 내라'고 요구하였다.[26] 그러나 조만식이 거부하자 흥분한 스티코프가 권총을 빼들고 위협하였다. 조만식은 자신의 한복 옷자락을 헤쳐 보이며 '그래, 쏘아라'고 맞받았다 한다. 그 기개에 질린 스티코프는 얼굴만 붉히고 되돌아갔다. 치샤코프 점령군 사령관은 '신탁통치 결정서에 서명만 해 주면 조선의 대통령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조건을 제시하였으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26]
소련 측은 1946년 1월 2일, 4일, 5일의 세차례에 걸쳐 조만식에게 새로 수립될 정부의 대통령 자리까지 제시하면서 모스크바 협정을 지지할 것을 요청했다.[27]
그러나 1946년 1월 5일 이후에도 기독교인 중심의 조선민주당을 창당하여 반탁 운동을 벌이던 조만식은 뜻을 바꾸지 않았고, 신탁통치 협정문 안건에 관한 사회를 거부함으로써 북조선에서 정권을 잡은 김일성 세력에 의해 곧바로 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에서 축출된 뒤 고려호텔에 연금된 것을 시작으로 한국 전쟁 때까지 투옥되어 있었다. 1월 23일 김일성은 조만식을 반동으로 규탄하고 조선민주당을 접수, 2월 24일 최용건을 북조선민주당 당수로 임명하였다.[25]
1946년 2월 9일부터 11일까지 북조선을 방문한 여운형과 조만식의 석방 안건에 관해 협의했다.[10] 북한의 저명 인사들은 월남할 것을 권하지만 그는 '이북 동포들이 고통 받고 있는데 나 혼자만 월남할 수 없다'며 듣지 않았다.[26]
이승만과 김구는 1946년 4월 밀사 김욱을 조만식에게 파견하였다. 밀사로 파견된 김욱을 접견한 조만식은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방임하면서도 직접 문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대신 밀사는 조만식의 유고시 그를 대행하는 이윤영의 서명을 받아서 이승만과 김구에게 제출했고, 소련 측에 대한 반박자료로 미·소공위에 제출되었다. 이윤영은 ‘이승만과 김구에게만 이 문서를 보여준다’는 조건 하에 서명하였지만 결국 문서가 공개되자 월남하였다. 조선민주당은 당수인 조만식이 연금상태에 있던 상황에서 부당수인 이윤영마저 월남하자 다른 부당수였던 최용건에 의해 장악되었다.[10]
1946년 5월 남한과 북한의 단독정부 수립이 확실시되자 그는 밀사를 보내 후처 전선애를 불렀다. 자신의 최후를 예감하여 머리카락을 삭발해 두었다가 면회시간에 전선애에게 자신의 머리카락과 자른 일시를 적은 쪽지를 담은 흰 편지봉투를 전선애에게 건내주었다.[6]
조만식은 아내 전선애에게 호텔에 놓여 있던 피아노로 찬송가를 연주하게 하였고 그 사이 세 자녀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 기도한뒤 작별인사를 나누었다.[15][6]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그는 여기서 눈뜬 장님을 만드는 것보다 위험이 따르겠지만 자녀들을 서울로 데려다가 공부를 시키는게 좋겠다며 아내에게 월남을 권고했고, 가족과 작별한 뒤 전선애는 조만식이 건네준 머리카락을 품에 간직하고 세 자녀와 함께 월남하였다.[16] [28]
남북협상을 마치고 돌아가는 김구는 김일성에게 조만식을 데리고 가게 해줄것을 부탁하였으나 김일성은 자신에게는 권한이 없다며 주둔군 당국의 양해가 있어야 된다며 거절하였다.[29]
1950년 6월 10일 6.25 전쟁이 발발하기 보름 전에 북조선에서는 김삼룡과 이주하를 조만식과 38선에서 교환하자고 제안했다. 이는 북조선 부수상 겸 외무상인 박헌영의 강력한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1950년 6월 16일 이승만은 북에서 먼저 보내라는 요구를 했고, 6월 18일 북조선은 동시교환을 주장했다. 한동안 “먼저 보내라,” “아니다. 동시에 교환하자”라는 공방을 되풀이하였다.[30]
1950년 5월 16일 북조선 당국이 조만식을 남쪽에서 활동 중 체포되었던 김삼룡, 이주하와 교환할 것을 제의하기도 하였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한국 전쟁 발발 후인 1950년 10월 15일 조만식은 북조선 내무성 안에서 일단의 내무서원들에 의해 살해되었다.[31] 정황은 비슷하나 총살된 날짜가 10월 18일이라는 설도 있다(박길룡 증언). 소련 출신으로 김일성의 통역과 북조선 외무성 제1부상을 지내다가 1959년 소련으로 돌아갔던 박길룡 등의 증언에 의하면 조만식은 1950년 10월 18일 퇴각 중이던 북조선 지도부의 결정에 따라 대동강변 내무성 정보처에서 한규만 소좌 등에 의해 다른 민간인들과 함께 학살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중공군과 함께 북조선 당국이 다시 평양에 들어온 이후, 그의 죽음은 유엔군 및 한국군에 의한 학살이라고 주장된 바 있다.[2]
해방 초기에도 여운형· 김규식 등으로부터 남한으로 내려오라는 권유가 있었으며[2] 김일성 세력과 마찰을 빚던 즈음부터는 남한의 반공 우익 세력들과 미군정, 월남한 기독교인들은 반탁 운동의 기수로 신망이 높은 그를 월남시키려는 노력을 계속했으나, 조만식은 월남을 거부했다.
1970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으며, 1991년 11월 5일 서울특별시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열린 고당선생 추모-안장식때 시신 대신 유발이 안장되었다.[16] 서울 능동 어린이대공원과 경기 파주의 오두산 통일전망대에 동상이, 저동에는 고당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2000년 3월 27일 후처 전선애가 사망하자 국립묘지 조만식의 묘소 옆에 합장되었다.[16]
고려호텔 연금 기간 동안 그와 함께 있던 차남 조연창과 사위 강의홍은 한국 전쟁 직전에 투옥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후 행방은 묘연하다.[32]
첫댓글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