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위하여 둘
- 운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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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동생이 소학교 선생인데’
슬쩍 흘린 그 한마디로 떠오른 표정 진한 붙박이가 되었다 ‘교장 선생님께 경롓’ 구령 부치던 세 살 많은 검은 얼굴 사내 6학년 때 전교회장이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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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미의 아홉 살 남동생 옆구리 찌르며
‘누나, 그 코주부 선생한테 시집가지 마 술고래야’
징징 짜거나 말거나 꽃가마 탔으니, 운명이다.
흰 빨래는 희게 빨고 검은 빨래 검게 빠는 살림 밑천 며느리로 떨어질 줄 까맣게 몰랐다 아즈버니 상처(喪妻)로 두 조카 데려왔더니 웬걸, 나머지 피붙이들 고구마 뿌리로 끌려와 여기저기 방 한 칸씩 차지하니 식솔 총합 열일곱까지 팅팅 불어났다 생강밭 고샅에서 박박 기다 돌아오면 백화산 시뻘건 저녁놀 외양깐 잡아먹다가 대청마루와 부뚜막까지 촘촘히 덮는 것이다 그렇게 등허리에 콩이 튀면서 피도 눈물도 없이 세월이 흘렀고.
지금은 요양병원 15개월 차 아흔네 살 밤꽃 피는 유월이다 통유리 건너편 그미는 무슨 말인가 연신 던지고 싶은데 위·아래 붙은 눈꺼풀 떨어지지 않는다 초로의 아들, 벙어리장갑으로 묶여 생존실습 이어가는 스크린 보며 ‘만남보다 석별이 더 힘들다’고 가슴 두들긴다 아픈 운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