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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 문화의 원류 원문보기 글쓴이: 솔롱고
▲ [그림 ①] 5세기의 대륙 정세 |
제가 보기에 개로왕에 대한 이야기들이 상당한 부분이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특히 도미설화에 대한 이야기나 도림의 꼬임에 빠져 국정을 망쳤다는 것은 다시 제대로 검정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히려 반개로왕계의 귀족들이 임의로 유포한 일종의 마타도어(Matador : 흑색선전)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부여사를 돌아본 결과, 개로왕은 날로 심각해지는 고구려의 강한 압박에 대비하여 열도의 강화에 많은
신경을 쓴 것으로 보입니다.
개로왕은 등극하자마자 아드님인 곤지왕자(곤지왕)를 송나라로부터 좌현왕으로 관작을 받게한 후 '사실상 후계자'
로 만들어 열도(일본)로 보냅니다. 이 때가 461년입니다.
그러니까 개로왕이 등극한지 6년쯤 된 해입니다.
따라서 개로왕은 일찌감치 모든 준비를 완료하여 자기의 분신을 일본으로 보낸 것입니다.
만약에 이 같은 판단이 없었다면 아마 백제(반도부여)는 475년으로 영원히 사라졌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열도에 의해 백제는 다시 소생하는데 이 열도가 강력한 백제의 배후세력이 되게한 것이 바로
개로왕이라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이제 곧 보시겠지만, 개로왕은 현재 일본 천황가의 직접적인 조상이 되는 분입니다.
왜냐하면 게이타이 천황(繼體天皇)의 할아버지가 바로 개로왕이기 때문입니다.
게이타이 천황은 현 천황가의 개조(開祖)가 아닙니까?
게이타이 천황은 열도 북방의 호족 세력들을 제압하고 야마토 왕권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천황으로 알려져 있습
니다. 게이타이 천황의 치세(治世)로 인하여 일본의 중앙집권화가 제대로 성립되었다고 합니다.
당시만 해도 야마토는 나라(奈良) 주변의 일부 영역을 지배한 수준이었는데 게이타이 천황으로 인하여 야마토의
영역이 크게 확장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고사기』나 『일본서기』에 나타나는 게이타이 천황 이후의 기록들은 다른 사료들과 일치하는 부분들이
많고 기록의 신뢰도가 높아 게이타이 천황은 현재의 일본 천황가와의 혈연이 확인가능한 최고(最古)의 천황이라고
합니다.
(1) 현 일본 천황가의 개조, 개로왕
이제 일본 고대사의 가장 큰 쟁점 가운데 하나인 이른바 왜 5왕을 좀 다른 각도에서 분석해 봅시다.
『송서』「왜국전」에는 찬(讚), 진(珍), 제(濟), 흥(興), 무(武)라는 휘(임금 이름)를 가진 다섯 사람의 왜왕(倭王)
이 순서대로 나오는데 이들이 이제 누구인지를 알아봅시다.
앞에서 왜왕 무(武)가 곤지왕자라는 것을 알아내었는데 그러면 곤지왕을 기점으로 하여 나머지 찬(讚)·진(珍)·제
(濟)·흥(興) 등이 구체적으로 누군지 알아봐야합니다.
앞에서 본대로 곤지왕과 개로왕에 대한 기록이 서로 다른 경우가 있지만 그 동안의 분석 결과 곤지왕은 개로왕의
아드님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먼저 『송서』「왜국전」에 나타난 왜 5왕의 가족관계를 살펴봅시다.
『송서』「왜국전」에는 왜왕 진(珍)이 찬(讚)의 아우로 나타나고 있고 흥(興)과 무(武)는 제(濟)의 아들로 나타
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진(珍)과 제(濟)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는데 이 같은 경우는 일단 부자관계로 보거나
아니면 다른 계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양서(梁書)』「왜전」에는 "정시 연간에 히미코가 사망하자 남자로 왕을 세웠지만 나라 사람들이 이에
복종하지 않고 서로 죽이고 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그래서 다시 히미코 집안의 여자를 세워 왕으로 세웠다.
그 후 다시 남자 왕을 세웠고 또한 중국의 작위를 받았다.
진나라 안제 때 왜왕 찬(讚)이 있었다. 찬(讚)이 죽자 그 아우인 미(彌)를 세우고, 미(彌)가 죽자 아들인 제(濟)를
세웠고, 제(濟)가 죽자 아들인 흥(興)을 세우고, 흥(興)이 죽자 그 아우인 무(武)를 세웠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1)
이와 같이 『양서』는 『송서』와는 달리 왜왕 진(珍) 대신에 왜왕 미(彌)가 나오고 있습니다.
아마도 진(珍)을 잘못 기록한 것이거나 진(珍)이 아니라 미(彌)일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두 사람의 관계가 부자관계로 명확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노중국 교수는 진(珍)과 미(彌)의 약자가 각각 珎, 弥 로 매우 유사함을 들어서 같은 사람을 표기한 것으로
보고 있기는 합니다.2)
어쨌든 왜왕 찬(讚)을 기점으로 하여 중국과의 교류가 많아졌고 중국의 작호를 요구한 것이 분명합니다.
진나라 안제의 시기라면 5세기 초에 해당하고 백제는 전지왕(405~420) - 비유왕(427~455) 시기에 해당합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이 시기는 광개토대왕의 남벌(南伐)이 강화되는 시기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광개토대왕의 남벌시기에 맞춰 왜왕의 국제교섭이 강화되고 있고 중국으로부터 작위도 받아가더
라는 것이죠.(왜왕 작위에 관해서는 다음 장에서 상세히 살펴봅시다).
먼저 이 왜왕 제(濟)의 행적으로 판단해보면, 왜왕 제(濟)는 개로왕일 가능성이 큽니다.
왜냐하면 왜왕 무(武)가 바로 개로왕의 아들인 곤지왕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왕 찬(讚), 진(珍), 제(濟), 흥(興), 무(武) 가운데 제(濟)가 개로왕이 되면, 흥(興)과 무(武)는 각각
문주왕과 곤지왕이 될 수 있지요.
그런데 이 가족관계가 『송서』「왜국전」이나 『일본서기』유락쿠 천황과 일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먼저 왜왕 무(武)가 유라쿠 천황(雄略 天皇)이라는 것이 열도 사학계의 대세이므로3)
유라쿠 천황을 중심으로 가족관계를 살펴보면, 『일본서기』는 『송서』와 일치합니다. 그러니까 왜왕 찬(讚)은
닌도쿠 천황의 아들으로 제17대 리쥬우 천황(履中天皇), 왜왕 진(珍)은 제18대 한제이 천황(反正天皇),
왜왕 제(濟)는 제19대 인교 천황(允恭天皇), 왜왕 흥(興)은 제20대 안코오 천황(安康天皇),
왜왕 무(武)는 유라쿠 천황이 됩니다.
이것은 에도시대 중기의 국학자였던 마쓰시다겐린(松下見林)이 지적한 이후 별 다른 이설이 없는 상태입니다.4)
따라서 왜왕 찬(讚)과 진(珍)는 닌도쿠 천황의 아들들이고 왜왕 흥(興)과 무(武)는 인교 천황의 아들들로 나타
나고 있습니다.5)
일단 중간 정리를 해 본다면 왜왕 찬(讚), 진(珍), 제(濟), 흥(興), 무(武) 가운데서 제(濟) - 흥(興) - 무(武) 는
개로왕 - 문주왕 - 곤지왕 등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들 가족 관계는 『일본서기』나 『삼국사기』와도 일치합니다. 즉 안코오 천황은 인교 천황의 둘째 아들이고,
유라쿠 천황은 인교 천황의 다섯째 아들입니다. 그러니까 인교(아버지) - 안코오·유라쿠(아들들)의 관계가
개로왕(아버지) - 문주왕·곤지왕자(아들들)와의 관계가 일치하는 것이죠.
재미있게도 안코오 천황도 문주왕과 마찬가지로 재위기간이 3년을 채 넘기지 못합니다.
다만 시기적으로 많은 차이는 있긴 합니다.
즉 문주왕의 서거연도는 477년이고 안코천황의 서거 년도는 잘 알기는 어렵지만 유라쿠 천황기록으로부터 거꾸로
계산하면 안코 천황은 455년 서거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바로 이 서거 연도가 석연치 않습니다.
유라쿠 천황이 등극하는 시기의 기록들이 대체로 이해하기 힘들다는 말씀은 이미 드린 바 있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안코오 천황이 문주왕이 아닐 경우에는 안코오 천황은 개로왕의 다른
아들일 가능성이 있습니다(경우에 따라서는 부여계의 유력한 귀족일 가능성도 있겠지요).
다른 하나는 안코오 천황이 문주왕이라면, 이 기록은 『일본서기』의 편찬 의도에 맞게 재편집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즉 22년 뒤의 기록을 앞당겨서 편집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제가 보기엔 왜왕 제(濟)·흥(興)·무(武) 의 관계는 개로왕·문주왕·곤지왕이 되는 것이 분명하지만 왜왕 찬(讚)·진(珍)·
제(濟)의 관계는 일단 신중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제(濟)·흥(興)·무(武)의 관계와 개로왕·
문주왕·곤지왕의 관계가 일치하는 여러 증거가 있지만 찬(讚)·진(珍)·제(濟)의 관계를 구이신왕·비류왕·개로왕 등
으로 바로 파악하기에는 증거가 많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앞에 본대로 이시와타라 신이치로(石渡信一郞) 교수는 곤지왕자가 일본으로 건너와 일본의 시조왕이 되었
으며 5세기경부터 많은 백제인들의 열도로의 이동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런 경우라면 『일본서기』의 가족 관계는 두 가지 경우의 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반도부여(백제)의 왕이 열도부여(일본)의 왕을 겸했을 경우입니다.
그러면 하나의 왕이 두 부여지역(반도, 열도)을 통치했을 것이므로 사실적으로 타당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왜왕 찬(讚) = 구이신왕, 진(珍) = 비류왕, 제(濟) = 개로왕, 흥(興) = 문주왕, 무(武) = 곤지왕 등으로 파악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유라쿠 천황과 이전의 천황들과 혈연적인 관계가 다소 먼 경우로 유라쿠 이전의 왕계가 근초고왕
계열인데 반하여, 유라쿠 천황의 경우는 같은 근초고왕 계열이라도 개로왕 직계 후손들로 보는 경우입니다.
그럴 경우 열도에는 개로왕 직계와 근초고왕 계열 또는 다른 부여계 귀족들이 대립하고 있는 상황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연구로는 토오마세이타(藤間生大), 하라지마레이지(原島禮二), 가와구찌가쯔야스(川口勝康)
등의 연구가 있습니다. 이들은 『송서』에 왜왕 진(珍)과 왜왕 제(濟)의 혈연관계가 분명히 기록되어있지 않음을
주목하여 당시의 왜 왕가에는 찬(讚)·진(珍)과 제(濟)· 흥(興)의 양대 세력이 존재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찬(讚)은 왜찬(倭讚)으로 제(濟)는 왜제(倭濟)로 묘사된 것으로 봐서 왜 즉 야마토를 성씨로 하는 부계
(父系)의 친족집단으로 볼 수도 있다고 합니다.6)
당시의 왜 왕가에는 찬(讚)·진(珍)과 제(濟)· 흥(興)의 양대 세력이 존재했다고 한다고 해도 결국은 개로왕[제]의
직계혈통[흥·무]이 열도부여를 제대로 건설해나갔다는 점은 변함이 없는 듯합니다.
이 두 혈통은 모두 근초고·근구수 계열로 혈연적인 공통성은 가지고 있겠지만7) 결국 개로왕계가 열도에서는
곤지왕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다는 사실은 달라질 것이 없습니다.
이와 관련된 이론 가운데 하나는 바로 삼왕조 교체설(三王朝交替說)입니다.
미즈노유(水野祐) 교수는 일본의 황실은 만세일계가 아니라 세 번째 왕조이며 현재의 천황가는 게이타이 천황에서
부터 시작되었다는 이른바 삼왕조 교체설(三王朝交替說)을 주장합니다.
즉 645년 다이까개신(大化改新) 이전에 일본의 왕조가 세 번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본다면, 실제의 초대 왕조는 200여년 경 나라(奈良) 분지에 터전을 잡은 스진왕조(崇神王朝 : 제 10대
천황)로 스진천황은 실재하는 최고의 천황이며 그 이전의 천황은 왕조를 늘리기 위해 만들어진 가공의 천황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스진왕조의 마지막 왕인 쥬아이(仲哀) 천황이 규슈(九州)의 구나국(狗奴國)을 공격하다가 전사했
는데 이 구나국이 기나이(畿內)로 진출하여 세운 왕조가 닌도쿠 천황(仁德 天皇 : 제16대)을 시조로 하는 닌도쿠
왕조라는 것입니다. 그 후 에찌젠(越前)에서 올라온 게이타이 천황이 게이타이 왕조를 수립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황통이 현 천황에 이르렀다는 것이죠.8)
쉽게 말해서 게이타이 천황은 현 일본 천황가의 시조라는 말이죠.
이 점은 앞으로 보시겠지만, 한일고대사의 연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요한 사항입니다.
▲ [그림 ②] 에이젠(越前)의 위치 |
『일본서기』에는 유라쿠 천황에 대해서 매우 가혹합니다.
유라쿠 천황은 정치적 라이벌들을 하나씩 살해하고 즉위하였다고 합니다.
유라쿠 천황 이후에는 세이네이(淸寧) 천황 - 겐조오(顯宗) 천황 - 닌겐(仁賢) 천황 - 부레쯔(武烈) 천황 등으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부레쯔 천황에 대한 『일본서기』의 기록은 지나칠 정도입니다.
마치 악정을 하는 폭군과 관계되는 모든 표현을 모아둔 듯합니다.
그런데 유라쿠 천황의 왕통은 이 부레쯔 천황에서 끊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찌젠(越前 : えちぜん) 삼국(三國)으로부터 오우진 천황의 5세손인 히코우시왕(彦主人王)의 아들인
게이타이(繼体)를 야마토로 데리고 와서 즉위시켰다는 것이지요.
문제는 바로 이 게이타이 천황입니다.
게이타이 천황의 즉위 과정이 정상적이지 않고 게다가 이 시기의 『일본서기』의 기록들은 대부분 백제관계
기사로 덮여있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다른 각도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일관계사 전문가인 김현구 교수에 따르면, 게이타이 천황은 곤지왕의 자녀나 손자들과 함께 생활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김현구 교수는 동성왕(곤지왕의 아들)과 무령왕(곤지왕의 아들)은 수십년간 일본에 머물렀고 일본의 황녀를 부인
으로 맞았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런데 생몰연대로 본다면, 게이타이 천황이 시기적으로 곤지왕의 다섯 아들이나 무령왕(손자)과 함께 생활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9) 나아가 김현구 교수는 "만약 백제계의 일본 천황이 있다면 그 가능성이 가장 높은
인물은 천황가의 계보상 게이타이 천황이고 125대의 개조인 게이타이 천황은 동성왕이나 무령왕과 함께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동성왕이나 무령왕의 동생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결론내리고 있습니다.10)
만약 게이타이 천황과 무령왕이 형제라면 어떻게 됩니까?
곤지왕은 두 아드님을 한 분은 백제의 왕으로 다른 한 분은 천황으로 등극시킨 분이 됩니다.
그러니까 근초고왕에 이어 새로운 개로왕계의 왕조가 출범하고 범부여 제국의 새로운 터전을 구축하게 한 분이
바로 곤지왕이라는 것입니다
(게이타이 천황이 무령왕의 동생이라는 것은 이미 충분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다음 항목에서도 상세히 해설합니다.
다만 그 동안 곤지왕의 정체가 베일에 가려져 있었던 것이죠. 일본인이라면 아무도 곤지왕이 유라쿠 천황과 동일인
이라고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라쿠 천황의 왕통은 이 부레쯔 천황에서 끊어진다는 열도의 시각은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라쿠 천황이 바로 곤지왕이고 그 혈통이 현재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서기』에는 유라쿠 천황의 혈통이 끊어지자 에찌젠(越前)으로부터 게이타이(繼体)천황을 옹립했다고 합니다.
이 기록은 마치 게이타이 천황이 유라쿠 천황과는 무관한 듯이 묘사하고 있죠?
하지만 제가 보기엔 이것은 『일본서기』가 가진 일종의 안전장치일 수가 있습니다.
즉 '왜왕 무 = 유라쿠 천황 = 곤지왕 = 게이타이 천황의 아버지' 등의 일련의 관계가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안전장치라는 것이죠. 이 등식들 가운데 하나만 밝혀져도 열도 역사의 비밀을 모두 밝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일본서기』의 편찬 의도가 일본의 역사에 나타난 '백제 지우기'라는 점이 극명하게 보이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 동안 열도에서는 게이타이 천황의 출생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즉 『일본서기』의 내용 가운데서 게이타이 천황이 기존의 천황과 구체적으로 어떤 관계인지가 제대로 설명되어
있지 못하고 특히 『일본서기』의 계도(系圖) 1권이 망실되었기 때문에 당시 천황가의 정확한 계보를 그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11)
그래서 오랫동안 게이타이 천황은 아마도 천황가의 먼 방계 친족의 유력왕족이 아닐까라고 생각한 것이 대체적인
견해였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미즈노유(水野祐) 교수는 이른 바 삼왕조 교체설(三王朝交替說)을 제기하여 게이타이 천황은 천황가
와는 혈연이 없는 새로운 왕조의 시조라는 학설을 주장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학설은 거의 정설이 되고 있습니다. 나아가 게이타이 천황은 황족(皇族)이 신하의 신분으로 낮아져서
출생한 씨족 즉 황별씨족(皇別氏族)인 오키나가우지(息長氏 : おきながうじ)라고 보기도 어렵고 그저 무력으로
야마토 왕권을 장악하였다는 견해까지 나타나고 있는 것이 열도 사학계의 분위기였습니다.
물론 천황이라는 호칭이 7세기에 등장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당시 누가 천황의 지위를 가질 수 있었는 지를
파악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겠지요.
일반적으로 당시에는 '대왕(大王)'이라는 호칭을 사용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아마도 후손들이 추존하여
천황(天皇)으로 승격한 것으로 봐야하는 구조일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게이타이 이전에는 대왕이라는 지위는 특정한 혈연집단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견해가 강하게 대두
하고 있습니다(만약 부여계가 통일했다면 대왕이라는 호칭은 아무나 사용할 수 없는 일이죠).
극단적으로 게이타이 천황은 야마토 왕조와는 혈연적 고리가 매우 약할 뿐만 아니라 그저 에찌젠[越前(えちぜん) -
현재의 후쿠이(福井)]과 오우미[近江(おうみ) - 현재의 사가(滋賀)]의 부족장이었다가 20여년을 군사적으로
야마토 지역을 모두 통일했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친 견해입니다.
개로왕의 아드님인 곤지왕의 직계혈통이 부여계의 종손(宗孫)들인데 곤지왕의 아드님인 게이타이 천황을 동북의
일개 호전적인 부족장으로 전락시키는 것 그 자체가 문제지요.
이와 같이 열도 사학계는 게이타이 천황과 이전의 천황가와는 연관성이 약한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 대세입니다만,
이것은 분명히 틀린 견해지요. 왜냐하면 이들은 곤지왕[아버지] - 동성왕·무령왕·게이타이 천황[아들들] 등과의
관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같은 오류를 범하게 된 것이죠.
다시 말해서 곤지왕이 유라쿠 천황이라는 점을 전혀 고려하려 않았거나 설령 그것을 파악했다고 한들 그 내용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본의 역사가 안개속으로 밀려들어간 것이죠.
뿐만 아니라 진구황후 즉 근초고왕 이후의 부여계의 역사를 무시하고 근초고왕계와 게이타이 왕계를 별개의 왕조로
파악하는 것은 커다란 오류입니다(이런 점에서 삼왕조 교대설은 비판적으로 검토해야할 사안입니다).
분명한 것은 게이타이 천황의 아버지인 유라쿠 천황(곤지왕) 이후의 기록들은 이전의 기록들과는 달리 상당한
신뢰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유라쿠 천황 이후 『일본서기』의 기록과 『삼국사기』를 포함한 여러 사서들의 기록들이 일치하는 현상이 나타
납니다. 그러니까 유라쿠 천황 이후의 기록부터는 역사적 왜곡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는 것입니다.
유라쿠 천황 이후 부여계의 역사가 제대로 진행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유라쿠 천황 8년 2월(464년)에 일본군이 고구려를 격파하고 9년 5월에는 신라에 쳐들어갔지만 장군
기노오유미노수쿠네(紀小弓宿禰)가 전사하여 도중에 패주 했다고 하는데 이와 관련된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타나고 있습니다.12)
그리고 유라쿠 천황 이후 『일본서기』의 다른 기록들도 다른 사서들의 기록과 많은 유기적인 관련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의 사건을 보는 시각의 차이는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하나의 사건들에 대해 다른 사서와 일치
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백제의 멸망과 관련하여 열도에서 유라쿠천황이 자신의 아들을 백제왕
으로 보내는 기록도 그 하나의 예가 될 수 있겠지요.
이것은 유라쿠 이전의 일본의 역사가 온전히 부여계의 독립된 역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일 수가 있습
니다. 즉 여러 세력들(예컨대 가야계, 고구려계, 신라계 등)의 역사가 한데 어우러져서 부여계만의 체계화된 역사
적인 사실들이 제대로 채록되어 기록될 수가 없었겠죠. 유라쿠 천황 이후의 역사가 보다 일관성이 있고 체계적
이라는 것은 부여계에 의해 열도의 통일이 제대로 진척되고 있다는 의미로 파악하여야 합니다.
필자 주
(1) "漢靈帝光和中, 倭國亂, 相攻伐歷年, 乃共立一女子卑彌呼為王. 彌呼無夫婿, 挾鬼道, 能惑眾, 故國人立之.
有男弟佐治國. 自為王, 少有見者, 以婢千人自侍, 唯使一男子出入傳教令. 所處宮室, 常有兵守衛. 至魏景初三年,
公孫淵誅後, 卑彌呼始遣使朝貢, 魏以為親魏王, 假金印紫綬. 正始中, 卑彌呼死, 更立男王, 國中不服, 更相誅殺,
復立卑彌呼宗女臺與為王. 其後復立男王, 並受中國爵命. 晉安帝時, 有倭王贊. 贊死, 立弟彌. 彌死, 立子濟. 濟死,
立子興. 興死, 立弟武. 齊建元中, 除武持節、督倭新羅任那伽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鎮東大將軍. 高祖即位,
進武號征東大將軍." (『梁書』「倭傳」)
(2) 노중국 「5세기의 한일관계사」『한일역사 공동연구보고서 1』(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 2005) 204쪽.
(3) 유라쿠 천황은 오오하즈세와가다케루노미고토[大泊瀬幼武尊(おおはつせわかたけるのみこと)], 大長谷若
建命・大長谷王(『古事記』)또는 大悪天皇(히도이수메라미고토 : ひどいすめらみこと)・有徳天皇 등으로
불리운다. 열도에서는 『송서』·『양서』에 기록된 왜의 오왕 가운데 무(武)에게 비정되고 있다. 왜왕 무의 상표문
에는 주변의 여러 소국들을 공략하여 세력을 확장하는 모습들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에 대하여 쿠마모토현 타마
나군 와스이쵸(熊本県玉名郡和水町)의 에타 후나야마 고분(江田船山古墳)에서 출토된 은상감철도명(銀象嵌鉄
刀銘)이나 사이타마현 교다시(埼玉県行田市)의 이나리야마 고분(稲荷山古墳)에서 출토된 금상감철검명(金象嵌鉄
剣銘)이 와카타케루 대왕(獲加多支鹵大王)이라고 해석되어 그 증거로 삼는 설이 유력하다.
유라쿠 천황 시기부터 조정이 비로소 조정으로서의 역할을 하게되었고, 『일본 서기』에 나타난 역법이 유라쿠
천황 이전과 이후가 다르다. 그리고 『만요슈(万葉集)』이라든가 『니혼료이키(日本霊異記)』의 머리말에 유라쿠
천황이 등장하는 것으로 봐서 유라쿠 시대는 이전과는 매우 다른 시대로 인식되고 있다.
(4) 岩波書店『日本書紀』(上) (1967) 626~627쪽.
(5) 이에 대한 다른 견해로 나카미치요(那珂通世)는 왜왕 진(珍)을 닌도쿠 천황으로 보고 있다.
(6) 藤間生大『倭の五王』(岩波書店 : 1968) ; 原島禮二『倭の五王とその前後』(塙書房 : 1970) ; 川口勝康
「五世紀の大王と王統譜を探」『巨大古墳と倭の五王』(靑木書店 : 1981) 등.
(7) 이미 앞에서 본대로 진구황후가 근초고왕이다. 그런데 『일본서기』의 기록으로 본다면, 진구황후의 아들이
오우진 천황이고 왜왕들은 이들의 후손이므로 이들 왜왕들은 근초고-근구수 계열로 볼 수 있다. 물론 보다
사실적으로는 『일본서기』에 나타나는 천황들에 대한 기록이 근초고-근구수 계열 또는 부여계의 귀족 계열일
수도 있겠지만 귀족일 경우 문헌적으로 고증하기는 어렵다.
(8) 김현구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창비 : 2007) 194쪽.
(9) 김현구, 앞의 책, 23쪽.
(10) 김현구, 앞의 책, 26쪽.
(11) 가마쿠라 시대의 서적인 『석일본기(釋日本紀)』에 인용된 『상궁기(上宮記)』일문(逸文)이라는 사료에는
게이타이 천황의 5세 조부인 오진천황(凡牟都和希王 : 호무다와케노오오기미)에서 비롯하여 아버지는 히코시
오오기미(彦主人王 : 汚斯王)가 나오고 있다. 그런데 마유즈미 히로미치(黛弘道)의 연구에 따르면 이 글은
스이꼬(推古) 천황조의 유문(遺文)일 가능성을 제기하여 논의가 분분한 상태이다. 黛弘道「繼體天皇の系譜
について」『律令國家成立史の硏究』(吉川弘文館 : 1982).
(12)『삼국사기』「신라본기」'자비마립간'에 의하면 왜인이 (자비마립간 5년) 463년 5월에 신라의 활개성을
공락하였고 464년 2월에도 침입했지만 최종적으로 신라가 이를 격파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2) 야마토 왕조의 중시조, 게이타이천황은 무령왕의 아우
게이타이 천황과 무령왕이 친형제임을 증명하는 중요한 유물이 발견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일본의 국보로 지정
되어있는 인물화상경(人物畵像鏡 : 청동제)입니다.
이 인물화상경은 503년 무령왕이 아우인 게이타이 천황에게 보낸 것으로 고증되고 있습니다.
이 화상경에는 "계미년(503년) 8월 10일 대왕의 연간에 남동생인 왕을 위하여 오시사카궁(忍坂宮)에 있을 때 사마
께서 아우님의 장수를 염원하여 보내주는 것이다. 개중비직과 예인 금주리 등 두 사람을 보내어 최고급 구리쇠
200한으로 이 거울을 만들었도다."13) 라고 적혀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이 화상경을 보낸 사람은 사마왕 즉 무령왕이고 503년경의 천황은 바로 게이타이 천황이기 때문입니다.
즉 무령왕과 게이타이 천황이 친형제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개중비직이란 강력한 힘을 가진 직책이라고 합니다.
▲ [그림 ③] 쓰따하치만궁(隅田八幡宮)에서 발견된 인물화상경(人物画像鏡) |
이 동경(銅鏡)은 와까야마현(和歌山縣) 쓰따하치만궁(隅田八幡宮)에서 발견된 방제경(倣製鏡) 즉 한나라 때의
거울을 모방하여 만든 거울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기록된 계미년을 443년으로 보는 설과 503년으로 보는 설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 부분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거울을 보낸 사람이 사마왕으로 분명히 나와있기 때문입니다.
무령왕의 재위연도는 501년에서 523년입니다. 443년이 될 수가 없는 것이죠.
즉 이 거울을 보낸 주체가 무령왕인 사마(斯麻)이고 그는 이것을 일본의 왕(왜왕)에게 보냈으며 그 왜왕은
무령왕의 아우님인 것만은 확실하다는 얘기죠.
그렇다면 무령왕의 아우님은 게이타이 천황이 아니면 인교오 천황에서 유라쿠 천황 가운데 한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무령왕은 재위기간이 501년에서 523년이므로 해당되는 인물은 게이타이 천황밖에는 없는 것이죠.
그런데 『일본서기』에 따르면, 503년은 당시 천황은 부레쯔 천황(武烈天皇)이고 게이타이 천황은 507년에
등극한 것으로 되어있지만 게이타이 천황의 재위연대가 대체로 3년 정도의 오차가 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
이라고 합니다.
더구나 이 부레쯔 천황은 유라쿠 천황과 동일인이라는 견해가 대두되고 있습니다.
즉 유라쿠의 일대기를 부레쯔 천황의 일대기에 분산시켜 놓았다는 것이죠.
이상하게도 이 두 사람의 별칭은 히도이수메라미고토(ひどいすめらみこと) 즉 대악천황(大悪天皇)입니다.
뿐만 아니라 게이타이 왕의 본래 휘(이름)는 오오또(男大迹)라고 하는데 공교롭게도 이 말이 동경에 적혀있는
남제왕(男弟王)에서의 발음인 오또(男弟)라는 발음과 닮아있기도 합니다.
게이타이 천황은 계보상으로는 26대로 되어있지만 새로운 왕조를 연 인물로 현 천황가(天皇家)의 개조(開祖)로
알려져 있죠.14)
이 사실(게이타이 천황 = 무령왕의 동생 = 곤지왕의 아드님)은 열도를 크게 긴장시킨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이 부분에 대한 정확한 대응을 못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대응해야할 지를 모르는 상태라고나 할까요? 그래서 전혀 엉뚱한 이야기들이 오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게이타이 천황을 「오또」라고 하는데 이것은 『고사기』에 나타난 왕명인 '호토(袁本杼 :ヲホド)
라는 발음과 차이가 난다는 점 등을 들고 있습니다.15)
즉 6 세기 초에 있어서의 발음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지요. 어떤가요? 이 발음이 약간 차이가 있다고 위의 사실이
변할 수 있을까요? 제가 보기엔 이 정도의 내용으로 위의 사실을 부정하기는 무리입니다.
왜냐하면 발음은 전체적인 내용으로 보아 사실상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위의 사실로 인하여 그 이전에는 게이타이 천황이 기나이(畿內) 세력의 저항에 부딪쳐, 장기에 걸쳐 나라(奈良)
분지에 들어갈 수 없었다는 설도 힘을 잃게되었습니다.
즉 계미년(503년) 8월 10일 게이타이 천황이 야마토 지역의 오시사카궁(忍坂宮)에 있었다는 말이 되므로
이 때는 이미 게이타이 천황이 나라지역으로 입성을 했다는 의미가 되지요.
제가 볼 때는 열도의 사학계도 불필요하게 이 사실에 대항하는 이상한 논리를 찾을 것이 아니라 두 나라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반도의 사학계도 게이타이 천황과 무령왕과의 관계를 넘어서 한일 고대사의 새 장을 열어 쥬신의
관계사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가야 합니다.
이제는 좀 더 본질적으로 들어갑시다.
여기서 왕 들간에 서로 주고받은 것이 왜 하필이면 청동거울 즉 동경(銅鏡)이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이 동경은 앞서 본대로 부여왕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즉 전문가들에 따르면, 부여 사람들에게 이 청동거울은 '태양같은 왕'을 상징하는 중요한 징표라고 합니다.
앞에서 이미 무령왕의 거울과 닌도쿠 천황의 거울이 형제처럼 닮았다는 것을 보았지요?
이제 그 거울이 다시 게이타이 천황이 가진 거울과 같다는 것이죠.
즉 닌도쿠 - 무령왕 - 게이타이 등의 왕의 상징물들이 모두 일치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한 줄기 두 연꽃'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죠.
지금까지 한국과 일본에 나타난 고분 동경의 공통점은 중앙에 볼록한 반구체(半球体)가 있고 주변에 작은 돌기가
이를 에워싸고 있는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청동거울의 직선 길이는 23.45cm 로 비교적 큰 것으로 수대경(手大鏡)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1971년 한반도의 부여에서 무령왕릉이 발굴되었습니다.
무령왕릉에서는 3개의 동경이 발견되었는데 동경 바로 아래에는 금제 뒤꽂이 장식이 발견되었습니다.
즉 거울로 시신의 얼굴 부분을 덮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뿐만 아니라 동경의 중앙 반구체에는 가죽으로 된 끈이 붙어 있어서 이 거울은 가슴에 차고 다녔을 것으로 이
분야의 전문가들은 추정합니다.
만약 왕이 동경을 가슴에 차고 거리를 행차하게 되면 빛을 반사하는데 뛰어난 청동의 성질로 말미암아 아직 태양이
행차하는 것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아니면 백성들은 왕의 몸에서 태양의 빛이 사방으로 퍼져 가는듯한 느낌을 받았을 수도 있겠죠.
▲ [그림 ④]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동경 |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수대경은 이미 많이 부식되어 글씨들이 훼손되어 알 수가 없지만 의(宜), 자(子), 손(孫)
이라는 글씨가 판독되어 이를 의자손수대경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제 정리합시다.
한반도의 기록으로 보면 개로왕(455~475) - 곤지 - 동성왕(479~501)·무령왕(501~523) 등의 관계가 부자의
관계이고 게이타이 천황과 무령왕이 친형제간입니다.
그러니까 개로왕 - 곤지왕(유라쿠 천황) - 동성왕·무령왕·게이타이천황 등의 가족관계가 성립이 됩니다.
구체적으로 개로왕(蓋鹵王 : 455~477)은 한성백제의 마지만 왕으로 장수왕의 침공으로 피살되고 그의 맏아들인
문주왕(文周王 : 475~477)은 피신하여 웅진에서 즉위합니다.
곤지왕은 개로왕의 차남인데 국난을 피해 아들인 모대(牟大) 왕자와 함께 일본에서 살고 있었고, 반도에서는
문주왕의 아들인 삼근왕(三斤王 : 477~479)이 왕위를 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혼란 속에서 피살당하게 되자 곤지왕은 자신의 첫째 아들인 모대왕자를 백제로 보내 왕위를 잇게
하였으니 이 분이 바로 동성왕(東城王 : 479~501)입니다.
이후 곤지왕의 차남인 사마(斯麻)가 동성왕을 이어 무령왕(武寧王 : 501~523)으로 즉위했고 곤지왕의 삼남인
오오또(男大迹)가 일본에서 등극하는데 그가 바로 제 26대 게이타이(繼體) 천황(500?~531)입니다.
그런데 『일본서기』의 기록대로 보자면 게이타이 천황은 오진 천황의 5세손인데 게이타이 천황의 친형이 바로
무령왕이므로 오우진 천황은 분명히 무령왕에게도 5대조 할아버님이 됩니다.
따라서 개로왕(455~475) - 곤지 - 동성왕(479~501)·무령왕·게이타이 천황(500~531)등의 계보가 성립되고
개로왕의 할아버지가 오우진 천황일 가능성이 나타나게 됩니다.
물론 『일본서기』의 기록이 잘못되었을 경우에는 고려할 필요가 없겠지요.
열도에서는 게이타이 천황이 오우진 천황의 5세손이라는 사실을 신뢰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곤지왕 - 무령왕·게이타이 천황의 관계이기 때문에 결국은 개로왕 - 곤지왕의 계보로 환원
되는 것이죠.
『삼국사기』에는 무령왕이 동성왕의 아드님으로 되어있는데 이것은 사실과 다르지요.
즉 동성왕·무령왕·게이타이 천황은 모두 곤지왕의 아드님들로서 이들은 모두 형제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3) 베일에 쌓인 천황가
지금까지 복잡하기 이를데 없는 일본 천황가의 계보를 추적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길을 돌고돌아 이제 다시 오우진 천황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니까 오우진 천황이 개로왕의 할아버지인가 하는 문제 말입니다.
개로왕의 할아버지가 구이신왕(420~427)이므로 그러면 오우진 천황이 구이신왕이 됩니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본서기』에 나타나는 오우진 천황의 행적은 한사람의 행적으로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우진 천황의 서거 당시 나이가 110세 이르고 오우진 천황이 근초고왕(346~375)의 아들로 묘사되어있기 때문
입니다. 즉 진구황후의 아드님이 오우진 천황이라고 하는데 진구황후의 행적은 근초고왕의 행적과 일치하므로
오우진 천황은 근초고왕의 아드님이거나 직계 후손이라는 말이 됩니다.
진구황후의 서거 시의 나이가 100세, 오진 천황의 나이는 110세로 상식적으로 볼 수 없죠.
따라서 일본 천황의 계보를 추적하는 것은 개로왕까지는 정확히 추적할 수 있지만 근초고왕(346~375)대에서
개로왕(455~475)대에 이르는 346년에서 455년에 이르는 대략 110여년간의 시기를 정확히 알아내기란 어렵다는
말입니다.
이 시기의 일부 백제왕들의 업적을 일본에서는 진구황후 - 오우진 천황이 나눠가지게 된 셈입니다.
따라서 백제의 역사와 일본의 얽히고설킨 역사가 한반도 쪽에서는 비교적 상세하게 추적 가능한 형태로 존재
하는데 반하여 일본에서는 진구황후 - 오우진 천황에 함께 뭉쳐져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일본서기』의 기록으로 본다면, 진구황후의 기사에 등장하는 반도부여의 제왕들 즉 백제왕은
근초고왕 , 근구수왕, 침류왕, 진사왕 , 아신왕 등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구황후의 업적은 이들 제왕들의 일대기를 토대로 조합한 것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즉 이들의 업적을 토대로 가공의 인물인 진구황후를 내세우고 진구황후가 이들에게 명을 내려서 수행하는 듯이
묘사한 것이라는 말이죠.
특히 『일본서기』에 나타난 오우진 천황에 대한 기록은 매우 부실합니다.
오우진 천황은 270년(太歲 庚寅) 즉위한 것으로 되어있고 서거 연도는 311년으로 되어있는데 이 때 나이가 110
세이므로 70세에 즉위한 셈이 됩니다. 이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입니다.
차라리 시간 계산을 근초고왕을 기점으로 하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오우진 16년의 왕인
박사의 일본 도래 기록은 아신왕(392~405) - 전지왕(405~420) 대로 나타나므로 『일본서기』를 분석할 때는
백제왕을 중심으로 하는 편이 오히려 더 정확하다는 것입니다.
『일본서기』는 연대가 심하게 조작되어있지만 큰 흐름에서는 고도의 일치성이 나타나는데
이는 남부여(백제) 왕계를 기준으로 할 때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오우진 천황은 대체로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초반으로 보는 편이 타당합니다.
오우진 - 닌도쿠대에 이르러 세계 최대의 고분이 나타나는 것은 이 시기에 강력한 권력이 등장했음을 의미하고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초반은 근초고왕(346~375) 사후 나타난 현상으로 추정됩니다.
지금까지 저는 베일에 쌓인 열도의 역사를 분석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그 베일을 걷어낼 수 있는 고리 하나를 찾은 셈입니다. 비밀이 많고 복잡한 부여의 역사에서 의외로
백제의 폭군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개로왕과 그의 아드님인 곤지왕자가 바로 이 모든 비밀을 풀어갈
열쇠를 쥐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역사상 폭군으로만 인식되었던 개로왕이 부여의 중흥을 위해 많은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으며 날로 강화
되는 고구려의 침공에 대비하여 백방으로 노력한 왕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개로왕은 날로 심각해지는 고구려의 강한 압박에 대비하여 열도의 강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등극하자마자
아드님인 곤지왕자(곤지왕)를 송나라로부터 좌현왕으로 관작을 받게한 후 '사실상 후계자'로 만들어 열도(일본)
로 보냅니다.
개로왕은 일찌감치 모든 준비를 완료하여 자기의 분신을 일본으로 보낸 것입니다.
만약에 이 같은 판단이 없었다면 아마 백제(반도부여)는 475년으로 영원히 사라졌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열도에 의해 백제는 다시 소생하는데 이 열도가 강력한 백제의 배후세력이 되게한 것이 바로 개로왕
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로왕은 현재 일본 천황가의 개조(開祖)인 게이타이 천황(繼體天皇)의 할아버지가 된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필자 주
(13) "癸未年八月日十 大王年 男第王 在意柴沙加宮時 斯麻 念長壽 遣開中費直穢人今州利二人等 取白上銅二百旱
作此鏡"
(14) 김현구, 앞의 책, 27쪽.
(15) 이와 관계된 언어적인 문제는 ハ行転呼音、唇音退化 등임.
(김운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