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이나 설날 같은 명절이 되면 난 외롭다.
매스컴에서는 매일 같이, 아니 매 시간 귀경길에 접어 든 고속도로 상황을 생중계하고, 버스 터미날이나 기차역에서 선물 보따리를 챙겨서 고향길로 가는 귀성객을 인터뷰하면서 들뜬 분위기를 전한다.
하지만 난 이 소식을 들을 때마다 서글퍼진다.
명절이 되어 봐야 갈 곳도, 마음을 두고 의지할 곳도 없기 때문이다.
돌아갈 곳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외롭고, 쓸쓸하고, 적적한지는 직접 느끼는 당사자가 아니면 잘 모른다.
명절이 되면 으례히 TV에서는 고향을 북쪽에 두고 가 보지 못 하는 실향민 소식을 전하는데, 내겐 그렇게 안따까워 보일 수가 없다.
통일전망대나 망향정 같은 곳에서 멍하니 그냥 북쪽만 바라보는 장면을 보거나, 북쪽이 보이는 아무 곳에다가 제삿상을 차려 놓고 절을 하는 장면을 보면, 내 눈가엔 자연스레 물기가 어린다.
이렇게 실향민에 대해 동정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학창시절부터인데, 장가도 가고 세월이 흐를수록 그 증상은 더 심해진다.
그 이유는 우리 집이 안동댐으로 인해 수몰이 되면서, 내가 대구로 이사를 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중학교 2학년이 되면서부터다.
안동댐으로 인해 우리가 떠나야 된다는, 몇 년 전부터 떠다니던 소문이 온 마을에 구체적으로 퍼지기 시작했고, 그 당시 학교에만 가면 하루에 한두 명씩 전학 가는 소식이 내게 들려 왔다.
한 학년에 남녀 각각 두 반씩 해서 네 반이던 것이, 한 달만에 세 반이 되고, 또 한 달이 지나자 두 반이 되었다.
이러는 상황 속에서 내 마음에도 벌써 조급증이 생겼고, 우리 아부지는 나를 대구로 전학 보낼 궁리를 이미 하고 계셨다.
바야흐로 5월이 되자 난 벌써 대구로 전학 가 있는 여동생을 따라 전학을 오게 되었고, 그 길로 그만 난 영영 고향을 잃어 버리고, 다시는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전학 온 뒤 그 해 겨울 방학에 고향을 가니, 이미 내가 자라고 뛰어 놀던 고향은 어디에도 없었고, 가슴이 꽉 막힐 정도로 바닷물 같은 호수만이 골골이 들어차 있었다.
그 때부터 난 안절부절 하기 시작했다.
대구에서 학교에 다니고,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해도 밤만 되면 고향생각밖에 없었다.
고등학교에 들어와서도 난 고향생각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여름방학, 겨울 방학이 되면 난 버스를 타고 부리나케 고향으로 달려갔지만, 거기엔 아무도, 아무것도 없었다.
나를 반기는 친척도 없었고, 같이 놀던 또래도 없었다.
친구들과 밤이 새도록 다마고 놀이(한 편은 도망가고 한 편은 잡는 게임) 하던 논과 밭은 어디 가 버리고 흔적 하나 남지 않았다.
여름이면 발가벗고 멱을 감고, 겨울이면 시겐토를 타고 놀던 강물과 백사장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아침 저녁으로 하루에 한 번씩 오가는 버스가 다니던, 그 먼지가 펄펄 날리던 신작로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빈 깡통에 돌을 넣고는 깡통을 차며 술래놀이 하던 동구밖은 어디 갔단 말인가?
겨울이면 햇볕이 잘 드는 흙담벼락에 모여서, 구슬치기, 자치기 하던 동네 오솔길은 누가 다 없앴단 말인가?
그 무엇보다가도 어릴 적에 전쟁놀이 하고, 딱지치기 하고, 소 먹이러 가고, 밤만 되면 건빵 따먹기 하던 어릴 적 친구들이 모두 어디로 갔단 말인가?
내 마음속에는 아직도 어린 시절 함께 놀던 시간과 공간과 추억밖에 들어 있지 않은데......
아직도 내 마음을 움직이고, 감정을 다스리는 것은 어릴 적 경험과 추억밖에 없는데......
이 감정은 중년에 접어든 현재도 고향 이야기나, 명절 이야기나, 친구 이야기나, 실향민 이야기를 할 때면, 아무 때나 불쑥불쑥 튀어 나와서는 내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내가 고향을 떠난 지가 어언 30년이 넘었는데도, 15년이란 짦은 어릴적 추억에 짓눌려 헤어날 길이 없다.
그래서 1년에 한두 번씩은 꼭 아무 일이 없어도, 아니 일부러 만들어서라도 고향을 가 본다.
꼭 기억 상실증 환자가 과거의 정체성을 회복하고자 기억을 더듬 듯, 혹시나 내가 놀던 흔적을 한 줌이라도 찾아내려고 고향을 찾는다.
그런데 지금도 막상 고향에 가 보면 아무 것도 없다.
어릴 적 50여 가구가 아랫마을, 윗마을 구분해서, 우물가를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여 살던 그 곳엔, 내가 물지게를 지고 다니던 길도, 노을이 질 때면 떼거리를 만들어 온몸을 뒹구르던 동산도, 밤에 몰래 살구를 따먹던 살구나무도, 그리고 조대를 가지고 장난감을 만들던 진흙밭도 깡그리 사라지고 없다.
다만, 단오날이면 짚으로 엮어서 만든 커다란 새끼줄로 그네줄을 매달아 그네를 타던 500년 된 은행나무와, 겨울이 올 무렵이면 횡성 조 씨 제궁에서 시사를 지내고, 그 음복 한 점 얻어 먹기 위해 줄을 길게 섰던 '월천서당'만이, 관리해 주는 주인도 없이 휑하니 서 있을 뿐이다.
그 서당과 은행 나무는 그야말로 어릴적 놀이터의 전부라고도 할 수 있는데......
지금에 와서 단지 조금의 위로라도 된다면, 내 고향 다래 마을에 후배 집 딱 한 가구가 마을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 후배는 아직 그곳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를 단지 '가방 끈이 짧아서 할 수 없이 붙어 있다'고 표현을 했다.
그 후배 혼자서 마을 전체를 지킨다는 것도 서글픈 일인데, 만일에 그 후배한테도 무슨 일이 있어 고향을 떠나게 된다면 내 마음은 그야말로 지구의 종말 같은 상황이 벌어질 것 같다.
지금은 그 후배가 꺼져 가는 내 고향의 불씨라도 잡고 있는 것 같고, 실낱 같은 가느다란 희망이 걸려 있는 마지막 잎새 같기도 하다.
그렇다 보니 난 명절이 되면 더욱 슬픈 것이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우리 아이들 이름이다.
첫째 아들 이름은 낳자마자 벗씨한테 의논하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내 고향 마을 이름인 '다래'로 정해 버렸고, 둘째 아들 이름도 낳자마자 벗씨와 의논하는 척하면서 '바다'로 정해 버렸다.
그래서라도 '바다'가 되어 버린 내 고향 '다래' 마을을 되찾아, 가슴 한 언저리에라도 밀어 넣고 싶은 이기적인 마음 때문이었다.
이러한 안타까운 실향민의 마음은, 비단 안동 댐으로 고향을 잃어 버린 내게뿐만 아니라, 전국 어디를 가더라도 황폐화 되어 가고 있는 시골 때문에, 곧 실향민이 되어 떠돌아 다닐 모든 서글픈 영혼들에게도 적용되지 않겠는가?
2006년 10월 17일
멋진욱 김지욱 서.
첫댓글 느켜보지 못한 감정들이지만 딱 이해가 갑니다. 한해.두해.세월이 더할수록 그리는 마음이 더 애뜻해 질텐데......
그렇게 밝으신 대장님께 이런 슬픔이 있을줄이야.... 아~ 아픕니다. 가슴이.... 대장님~
첨에, 고향이 없다고 했을때 저는 거짓말하는 줄 알았지요..사연을 알고는 눈물이 나더이다. 다래마을 이야기만 나오면 시댁 형제들이 아주 난리도 아니랍니다... 저도 어릴적 놀던 동네에 가만히 다녀 오고 싶어지네요..
아하! 그래서 이들이름이 다래구나. 쯧즛 몰랐수 그렇게 깊은 뜻이 있을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