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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암차문화박물관> 홈페이지의 관련내용-2 (강동오, 부인 장효은 운영)
바탕화면의 매암나눔 광장-<뉴스&공지> 에
89-차문화다큐멘터리 <다반사>를 완성했습니다. 2009. 03. 17
매암차문화박물관에서 드디어 차문화다큐멘터리 <다반사>를 완성했습니다. 그동안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지라 굉장히 감회가 새롭습니다. 준비부터 완성까지 3년이 걸린지라 좀 허탈하기도 합니다. 여기 기본적인 내용을 올립니다. 많은 관심 가져주세요^^
차문화다큐멘터리 조선남다로 I
다반사(茶飯事)
어머니와 같이 편안하고 따뜻한 우리 발효차, 작설! 역사 속에 갖혀 있던 작설의 진실을 찾아가는 여정.
[제작의도]
저희 제작팀은 차문화다큐멘터리 <다반사>를 통하여 지난 시절 단절되고 왜곡되었던 우리 차와 차문화를 새롭게 발굴하고 복원하고자 합니다.
어렵게만 느껴지는 차의 모습이 본래 우리의 모습이 아니었음을 알고 <다반사>를 보는 모든 이가 우리의 차를 편안한 어머니처럼 느낄 수 있길 바랍니다.
그래서 방청한 모든 이가 다양하고 우수했던 우리 차와 차문화의 역사와 전통성에 대해
사회, 문화적으로 인식하고 자긍심을 갖을 수 있게 하고자 합니다.
이를 기초로 한 우리차에 대한 애정이 FTA등으로 존폐위기를 맞고 있는 한국 차 산업의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희망의 씨앗이 되길 바라며 제작했습니다.
[제작진]
투자 경상남도 . 하동군 . 매암차문화박물관
제작사 매암차문화박물관 기획 장효은 제작 강동오. 박희준
감독 송준호
조감독: 김태호 촬영감독: 이성국 미술감독: 이수정 제작실장: 이걸기 조명감독: 김재근 편집: 손정선 음악: 김기연 분장: 김상인 스토리보드: 안선영 동시녹음: 김창훈
구성작가 : 장효은. 신희지 사운드 믹싱: 송영호 나레이션작가:이세윤 나례이터 정남 촬영: 이종혁행정: 장안성 . 홍재식 선전: 조승범
자문: 김대성. 류건집. 정영선. 문찬인
제작후원: 한국발효차연구소 .동진한방병원. 국제차문화교류재단 . 차와 문화
[내용]
다반사는 다음과 같은 네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하나! 조선은 작설의 전성시대였다.
차문화가 쇠퇴했다고 알려졌던 조선시대. 그러나 조선시대의 민중은 일상 속에서 언제나 차와 함께 했다.
둘! 홍차와 발효차의 본고장을 찾아서 - 하동의 작설
새롭게 조명된 놀라운 사실! 하동을 비롯한 남도 여러 지역에서는 끊임없이 홍차를 생산했었다. 다양하게 빚어져 온 우리의 발효차를 발굴한다.
셋! 우리의 차를 사라지게 한 것은 일제였다.
일제 강점기, 우리의 차문화를 말살하려 일본은 조선차 쇠퇴론과 일본다도를 강요한다. 그 과정을 파헤쳐 보고, 그럼에도 조선차가 얼마나 아름답게 살아있었는지를 보여준다.
넷! 우리의 하늘, 땅, 그리고 우리를 담은 작설 되찾자...
역사 속에서, 민중 속에서 강인한 생명력으로 살아 숨 쉬던 우리의 차의 본 모습을 되찾는 희망의 여정!
같은 날, 매암나눔광장-<자유게시판> 에
33번-차문화다큐멘터리 <다반사>에 대해서 09.03.17 23:34 장효은
어머니와 같이 편안하고 따뜻한 우리 발효차, 작설!
역사 속에 갖혀 있던 작설의 진실을 찾아가는 여정.
매암차문화박물관에서 제작한 차문화다큐멘터리 <다반사>에 대해서에 대해서 좀 자세히 아시고자 하는 분들을 위해 여기 내용올립니다.
Ⅰ. 제작의도
저희 제작팀은 차문화다큐멘터리 <다반사>를 통하여 지난 시절 단절되고 왜곡되었던 우리 차와 차문화를 새롭게 발굴하고 복원하고자 합니다. 어렵게만 느껴지는 차의 모습이 본래 우리 차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의 전통차는 어머니와 같이 편안하고 따뜻한 존재였습니다. 일제가 이런 차를 사라지게 하는 과정을 알리고 싶었고, 다양하고 우수했던 우리 차문화의 역사와 전통성에 대해 다시 한번 자긍심을 일깨우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또한 우리의 전통차가 본래는 주로 홍차를 비롯한 발효차였음을 새롭게 조명하며 차와 관련된 역사뿐 아니라 차와 관련된 한국미를 보여줍니다.
이를 기초로 한 우리차에 대한 애정이 FTA등으로 존폐위기를 맞고 있는 한국 차 산업의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희망의 씨앗이 되길 바라며 제작했습니다.
Ⅱ. 제작진
투자 경상남도. 하동군. 매암차문화박물관
제작사 매암차문화박물관
기획 장효은
제작 강동오. 박희준
감독 송준호
조감독: 김태호
촬영감독: 이성국
미술감독: 이수정
제작실장: 이걸기
조명감독: 김재근
편집: 손정선
음악: 김기연
분장: 김상인
스토리보드: 안선영
동시녹음: 김창훈
구성작가: 장효은
사 운 드 믹싱: 송영호
나레이션작가:이세윤
나례이터 정남
촬영: 이종혁
행정: 장안성. 홍재식
선전: 조승범
자문: 김대성. 류건집. 정영선. 문찬인
제작후원: 한국발효차연구소. 동진한방병원. 국제차문화교류재단 . 차와 문화
Ⅲ. 촬영지 및 상영시간
[촬영지역]
하동, 지리산일대, 남해, 서울, 안동, 강진, 장흥, 해남, 순천, 산청, 안산, 남양주
[상영시간]
52분 : 일상다반사
Ⅲ. 다큐 구성
다반사의 네가지 구성.
하나! 조선은 작설의 전성시대였다.
차문화가 쇠퇴했다고 알려졌던 조선시대. 그러나 조선시대의 민중은 일상 속에서 언제나 차와 함께 했다.
둘! 홍차와 발효차의 본고장을 찾아서 - 하동의 작설
새롭게 조명된 놀라운 사실! 하동을 비롯한 남도 여러 지역에서는 끊임없이 홍차를 생산했었다. 다양하게 빚어져 온 우리의 발효차를 발굴한다.
셋! 우리의 차를 사라지게 한 것은 일제였다. 일제 강점기, 우리의 차문화를 말살하려 일본은 조선차 쇠퇴론과 일본다도를 강요한다. 그 과정을 파헤쳐 보고, 그럼에도 조선차가 얼마나 아름답게 살아있었는지를 보여준다.
! 우리의 하늘, 땅, 그리고 우리를 담은 작설 되찾자...
역사 속에서, 민중 속에서 강인한 생명력으로 살아 숨 쉬던 우리의 차의 본 모습을 되찾는 희망의 여정!
Ⅳ. 기대 효과
다큐멘터리 <다반사>는 매암차문화박물관과 경상남도, 하동군이우리 문화 찾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3년에 걸쳐 제작했습니다.
<다반사>는 우리민족이 차문화가 발달되었던 조선시대부터 홍차를 비롯한 다양한 발효차를 오랫동안 만들어왔으나 이런 우리차를 사라지게 한 것은 일제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차문화를 어렵게만 느끼는 일반 관객들은 차는 우리민족에게 항상 함께 하던 편안한 일상이었고, 어머니와 같이 편안하고 따뜻한 존재였다는 것을 새롭게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일제가 우리차를 사라지게 하는 과정을 파헤쳐 흥미진진하게 감상할 수 있습니다.
또한 보는 이들이 강인한 생명력으로 살아 숨 쉬던 우리의 차의 본 모습을 되찾는 희망의 여정에 함께 동참하는 기회가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다큐멘터리 <다반사> 는 차와 조선에 관한 우리들의 모든 인식을 새롭게 바꿀 것입니다.
매암나눔광장-자유게시판 -07.12.01 13:46
알림-매암에서 2008 차문화다큐멘터리 '조선남다로' 제작합니다.
매암차문화박물관에서 원광디지털대학교, (계간)차와 문화와 함께 다큐멘터리 '조선남다로-왕의 차, 한양으로 가다'를 제작합니다.
지난 11월 24일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제작발표회가 있었습니다. 차문화발전을 위한 '조선남다로'제작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모든 사람이 차와 차문화를 편안하고 쉽게 받아들여 공감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프로듀서] 강동오(매암차문화박물관 관장) 손연숙(원광디지탈대학교 학과장)
[연출] 계운경(다큐멘터리 '언니', '아름다운 동행'연출)
[기획의도]
조선남다로
아름다운 조선 남녘 300리길, 다시 한양까지 700리길... 이 길은 우리의 문화와 경제의 교역로로 수천 년 간 함께 해왔다. 여기는 우리의 차문화와 역사가 온전히 살아 숨쉬는 조선 최고의 문화적 보고이며 문명로이다. 이제 우리는 이 길을 조선 남다로라 부른다!
1.조선 남다로를 통해 지난 시절 단절되고 왜곡되었던 우리 차와 차문화를 새로이 복원
2. 다큐멘터리를 통해 우리 차와 차문화의 역사와 전통성에 대한 사회, 문화적 자긍심 고취
3. FTA등으로 존폐위기를 맞고 있는 한국 차 산업의 해결방안을 모색
4. 전통의 제다법을 재현하여 문화적 깊이와 감동을 주는 영상으로 연출
[촬영 기간]
2008년 2월 1일 ~ 2008년 10월 31(10개월)
[시놉시스]
* 신농(神農).
소머리, 사람 몸을 한 신이 인류에게 농업과 차를 전파하다! 艸(풀), 人(사람), 그리고 木(나무)이 만나 만들어진 茶(차)! 차의 식물학적인 기원과 그 시작을 조선남녘에서부터 신화를 통해 풀어본다.
* 차는 길을 따라 세계를 하나로 묶었다.
문명과 문화의 집합체인 차와 차문화. 그 최초의 전파로인 조선 남다로를 통해 우리 차문화의 사상과 문화적 교류를 알아본다.
* 왕의 차, 한양 가다
조선 남다로를 통해 왕에게 진상되었던 차. 그 길을 재현하며 왕실문화 속에 나타난 찬란했던 우리 차문화를 알아본다.
* 아름다운 조선차 이야기
문헌 속에 나타난 우리 차와 차문화의 우수성과 다양성을 고증하고 그 제다법을 복원
38번-일상 다반사에 대한 관심과 기대에 대하여 09.04.02 23:51 다큐제작팀
# 이글에 담긴 문헌 해석 및 대부분의 내용들은 진행중인 제 논문내용을 포함하고 있어 만일 인용하실 경우 만드시 자료 및 작자 출처를 밝히셔야 합니다.^^
먼저 다큐멘터리 <일상다반사>에 보여주신 많은 관심과 기대 감사드립니다. 일상다반사의 기초가 된 저의 논문은 정확한 학문적 연구 절차를 걸쳐 학계에 보고되었고 한국차학회지에 1번 논문으로 실렸을 뿐 아니라 대학원에서 주는 우수 논문상을 수상했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연구를 통해 우리 민중과 동의보감이란 문헌을 통해 우리의 앞선 발효차, 특히 홍차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그런데 우리 홍차역사의 확인 앞에 이를 인정하지 않고 중국홍차를 더 우선시 하는 풍토에 제가 국수자의인가 아니면 다른 분들이 사대주주자인가 혼란스럽습니다. 가려졌던 우리 차 역사를 새롭게 발굴했다는 점이 최소한 우리 다인들에게는 함께 기뻐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일련의 오해는 제 연구결과를 대중적으로 공유하지 못해 생긴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다큐멘터리의 기획자이자 책임제작자로서 <일상다반사>의 의의와 가치에 대해 여러분과 함께 공유하고자 합니다.
<일상다반사>는 첫째 차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을 유도하고 이를 통한 차문화의 확대를 하고자 하였습니다. 둘째 현재까지의 담론을 뛰어넘어 일제의 식민사관에 가려 우리가 지나칠 수 밖에 없었던 발효차의 진실을 발견하고자 했습니다. 셋째 새로운 차역사를 밝힘으로써 현재의 녹차산업을 공고히 하고 더불어 발효차 산업의 육성과 발전을 도모하고자 했습니다. 역사는 단순한 과거가 아닙니다. 역사가 단순한 문화마케팅과 자본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는 것은 지양해야 하지만 다른 선진국들이 역사 정립에 그토록 의미부여를 하는 것은 역사는 국가가 지닐 수 있는 매우 강력한 자원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현재의 우리의 정신을 지배하며 미래에 영향을 주는 거대자아라 할 수 있습니다. 차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아름다운 차역사를 확인하고 인정하는 순간부터 우리 차산업의 역사는 새로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현장에서 느낀 것은 발효차 중 특히 홍차는 가격과 품질면에서 경쟁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채엽이 녹차에 비해 덜 까다로운데다 채엽의 기계화를 이룬다면 현재 중작수준의 홍차는 100g 1만원에 소비자가격을 형성시킬 수 있다고 봅니다. (반대로 고급화도 가능합니다.) 또, 채엽 시기, 발효도의 조절, 발효온도(저온, 고온)의 양분에 따라 전혀 다른 맛의 홍차가 개발될 수 있어 초기 포장 개발 비용에 대한 지원과 폭넓은 홍차교육, 일반인들에 대한 홍보가 지자체 차원에서 가능하다면 경쟁력이 있습니다. 발효음식에 익숙한 국민들이라 외국홍차에 거부감을 갖고 있는 일반분들도 우리나라 홍차를 굉장히 편안히 받아들이는 경우를 많이 접하고 그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여기에 발효차의 역사를 정리하고 서사성을 부여하는 문화컨텐츠화 작업을 수행한 후 홍차 지구 등으로 적극 개발한다면 지역 차산업 발전에 대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하는 가능성을 거듭 제기해 봅니다.
다음으로 <일상다반사>의 가치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 역사에서 차가 결코 우리 곁을 떠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전통문화로서 기층의 민속문화로서 항상 생활 속에 함께 해왔었던 것을 증명해보였습니다. 그렇게 그들의 생활에서 항상 숨쉬어오던 차와 그 제다법에 대한 연구조사는 생활분야의 민속학 자료로서 중요한 유효성을 획득한 것입니다.
차가 예부터 현재까지 꾸준히, 또한 가장 활발하게 생산되고 있는 하동을 비롯한 남도 차생산 지역에서 차와 그 제다법에 대한 조사는 하동과 차가 생산된 인근지역까지의 근현대 생활관습과 문화를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민속학 연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또한 1900년대 초기 하동지역과 차생산지역 거주자들의 차생활에 대해 기본적인 이해를 할 수 있었고, 과거 제다와 차생활 문화의 원상과 항구적인 원형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일상다반사>에서 다뤄진 자료는 단순한 사회과학적 설문 조사에 의해 도출된 것이 아닙니다. 자료의 가치는 자료조사자의 자격, 자료조사의 방법 및 기간, 자료 축출의 범위로서 결정되어 집니다. 인류학적인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도구는 조사자 본인입니다.
강조하자면 인류문화학적, 민속학적 개념에서 볼 때 조사자인 저는 객관적으로 현지조사의 연구자가 가장 이상적인 참여관찰의 자격을 갖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최대한 정확하고 신뢰할 수 있는 자료를 획득할 수 있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조사자인 저는 현지에서 장기간 주민으로서 생활하여 현지조사에서 필요한 현지인의 관점을 최대한 갖춰 이상적인 수준의 현지 문화에 대한 이해가 가능했고 동시에 타지역 출신으로서 현지문화에 객관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사에서 필수적인 조사대상자와의 라포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장기간의 참여관찰과 자연스런 비공식적 인터뷰를 기반으로 공식적 인터뷰를 진행하여 다른 조사자가 현지조사 시 가질 수 있는 대상자가 증언을 회피하거나 과장, 거짓이란 최대 단점을 피할 수 있어 자료의 가치를 상승시킬 수 있었습니다.
자료조사의 방법 및 기간에서는 참여관찰과 1년 반의 비공식적 인터뷰를 기반으로 한 공식적 현지조사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이는 인류학에서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으로 상용되고 있습니다.
자료축출의 범위는 기존의 단순 제보자나 소수를 대상으로 한 자료의 한계를 뛰어넘고자 50인의 인터뷰를 진행 자료를 축출해 신뢰성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결과에 대한 검증으로 대표적인 유형 사례에 대해 복원을 시행했고 이를 통해 현지조사의 신뢰성을 한층 더 강화하고 우리나라 발효차의 다양성을 확인해보았습니다.
연구자이자 복원자이기도 한 저는 대학과 대학원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했고 모반도체회사에서 연구원으로 2년간 재직했습니다. 그 후에는 6년간 차제다를 해오며 여러 실험을 해왔구요. 마이크로 미터(㎛)의 영역에 저를 가두는 것이 답답해서 전자공학과 결별했지만 대학과 회사생활까지 8년이란 세월이 최소한 실험과 과학적 복원이란 것이 무엇이고 어떠해야하는가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는 자격을 제게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복원 결과 한 종류의 차나무 잎만으로도 향, 색, 맛이 전혀 다른 차의 제조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증언 사례 뿐 아니라 다른 증언 유형도 다양하게 복원을 진행하고 세부적으로 장단점을 비교 분석한다면 우리나라 발효차의 지속적인 개발로 연계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구요.
<일상다반사>는 이런 현지조사를 바탕으로 문헌해석에서 그동안 간과되어 왔던 부분을 재정의 할 수 있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결과가 바로 동다송과 동의보감을 통한 홍차의 역사성 획득이었습니다.
동다송의 구절입니다.
옥부대 아래 칠불선원이 있다. 그곳에서 좌선하는 스님들은 항상 늦게 쇤잎을 따다가 널어 말렸다. 섶으로 불을 피워서 솥에 끓였는데 마치 나물을 삶은 것 같아서 다탕은 진하고 탁하며 붉은 색깔이었고 맛이 매우 쓰고 떫었다.
(臺下有七佛禪院 坐禪者常晩取老葉 晒乾然柴煮鼎如烹菜羹 濃濁色赤 味甚苦澁)
당시 하동의 칠불선원에서 만들어 마시던 차는 강발효차인 홍차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만취(晩取)와 노엽(老葉)이라 했으므로 차잎를 이른 봄이 아닌 늦은 봄이나 여름을 전후로 채엽을 했다는 것과 또 그 잎의 크기가 컸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쇄건(晒乾)이라 했는데 이는 그 잎을 강한 볕에 발효 및 건조시켰다는 것을 말합니다. 채엽 시기가 늦을수록 카테킨과 산화효소를 많이 포함하여 발효되기가 쉬우며, 기온 및 일광의 세기는 강해져 높은 온도로 인해 발효의 속도가 가속돼 강발효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초의는 삶는 팽다법을 이용하여 마시는 차의 찻물 색이 푸르거나 누런 것이 아니라 붉고, 짙다고 했습니다. 적(赤)은 바로 홍차의 색이며 농(濃)은 그 진한 정도를 나타낸다. 또한 여기서 홍차라 말할 수 있는 가장 결정적인 또다른 단어가 탁(濁)이다. 녹차나 백차를 아무리 진하게 끓인다 한들 탁한 색이 도출되지 않습니다. 탁은 띄우는 고온발효를 진행했을 경우에만 차탕색이 흐리고 탁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칠불선원의 차는 전형적인 우리나라 일쇄형 홍차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수년동안 다양한 녹차와 홍차를 만들며 실험해 본 결과입니다. 또 양력 5월 중순에서 6월의 햇볕에 유념한 차 잎을 두었을 경우 3시간 정도의 짧은 시간에도 강발효가 일어나고 강한 맛과 붉은 색을 가진 홍차가 되는 것을 여러 번 경험 할 수 있었습니다.
한 가지 추가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초의가 미심고삽(味甚苦澁)이라고 하며 개탄한 것입니다. 고온 일쇄형 홍차는 그늘과 온돌에서 발효시켜 만든 홍차보다 처음에는 맛이 강하고 씁니다. 그러나 이를 1년 이상 숙성시키면 그 쓰고 떫은 맛은 산화를 거쳐 부드럽고 중후한 맛이 되며 찻물 색 또한 탁한 적색에서 맑은 적색으로 변화합니다.
동의보감에서는 굉장히 새로운 형태의 홍차가 나타난다. 단차형 홍차로서 연대로 볼 때 우리나라 홍차 역사가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서도 앞선 것임을 알 수 있게 한다.
採嫩芽搗作餠並得火良
옛사람들이 말한 작설, 맥과는 가장 어린 새싹인 납다를 가리키는 것이다. 가장 어린 새싹을 찧어 떡덩이로 만들어서 불에 쪼여 말
린 것이 좋다.
어린 싹을 따서 먼저 찧는 것은 현재 홍차 제조시 사용되는 절단과 유념이 동시에 진행되는 유절과정이라 할 수 있다. 손으로 유념하는 것에 비해 파쇄율은 높으나 발효의 속도가 가속되며 발효도가 높아지는 장점이 있다. 덩어리로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찧는 과정을 거치면 차잎은 2시간 사이에 70%가 넘는 발효가 진행 될 수 있다. 그런 다음 이를 불에 쪼여 건조시키면 매우 새로운 형태의 단차형 홍차가 완성되는 것이다. 이 건조과정은 현재처럼 건조가 빠른 시간안에 급속히 완성되는 형태가 아니어서 건조가 완결되기까지는 최소 수 시간에서 경우에 따라 며칠이 소요되기도 한다. 그런 과정에서 홍차는 계속 발효가 되어 매우 높은 수준의 발효도를 보일 것으로 사료된다. 보통 떡차를 만들 때 가장 많이 인용되는 당나라 때 육우의 『다경』의 경우 「삼지조(三之造)」에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晴, 採之, 蒸之, 搗之, 拍之, 焙之, 穿之, 封之, 茶之 乾矣
맑은 날 차를 따고, 찌고, 찧고, 박고, 말리고, 구멍을 뚫고, 봉해 숙성한다. 이 것이 차를 건조시키는 것이다.
라고 하여 증제한 차를 찧는 유념과정을 거친 뒤 틀에 넣어 형태를 만든 뒤 건조시키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이렇게 동의보감에 나타난 떡차형 홍차는 일반적으로 언급되는 떡차형 증제 녹차와는 매우 큰 차이를 보이며 우리 홍차역사에 또 다른 의미로 다가 온다할 수 있다.
글을 마치며 드리고자 하는 말은 어떤 분야이든 현재 고전한다고 해서, 다른 경쟁체들이 포기했다고 해서 시도하지 않고 포기한다면 그 분야의 어떠한 미래도 보장되지 않습니다. 사실 현재의 상황을 그대로 감수하라고 한다는 것은 한국차에 종사하는 분들에게 업종을 전환하라는 단언입니다. 가능성이 없으니 직종을 전환하라는 말과 가능성을 믿고 도전할 분들은 해보자는 말 중 어떤 것이 더 무책임한 말일까 자문해봅니다.
전혀 다른 이야기이지만 현재의 삼성이 반도체 분야의 1위가 된 것은 모두가 안된다고 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비전으로 투자하고 승부수를 띄었기 때문입니다.
차계에는 많은 어르신들이 계십니다. 수 십년 동안 한국차를 사랑하고 연구해 오신 분들이고 그분들이 있기에 지금의 한국차가 이어질 수 있었으며 제가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부족한 제가 처한 일정의 특수한 상황과 조건들이(저는 차밭 안에 거주하는 불청객이자, 학자이자 생산자이자 문화기획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앞의 어르신들이 현재의 동료들이 이루어놓은 결과들을 바탕으로 저를 끊임없이 차에 대해 상상하게 하고, 들춰보게 하고, 곱씹게 하고, 확인해보고자 하게 합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학자라는 뜻이 끊임없이 배워가는 학생이란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부족함을 채우고자 끊임없이 배워갈 것이며 더불어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께 앞으로도 많은 관심과 편달 부탁드리겠습니다.
* 매암나눔광장-<차와 사람들> 쪽에 같은 내용
1번-조선의 백자가 선택한 붉은 빛, 홍차가 만들어지다! 08.02.14 14:19 장효은
매암차문화박물관에 있으면 매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데, 그들은 차를 마시면서 그 수만큼이나 다양한 반응들을 보인다. 그들에게 한국산 홍차를 내어놓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예부터 홍차가 만들어졌었습니다.라고 하면 굉장히 놀랍다는 반응들을 보인다. 홍차는 외국에서만 만들어졌고,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놀라고, 또 한국산 홍차의 깊고도 부드러운 맛에 놀란다. 이는 차를 좀 공부했다고 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음식의 제조법이 차에도 적용되는데 우리처럼 발효문화가 발달한 나라에서 발효차인 홍차가 만들어졌었다는 건 그리 놀랄 일도 아닌데 말이다.
초의(BC 1786~1866)가 1837년에 완성한 우리나라 대표적인 다서인 『동다송』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돈대 아래 칠불선원이 있는데, 좌선하는 자가 늘 늦은 잎을 늦게 따서
햇볕에 쬐고, 말려 나물국을 삶듯이 솥에 넣고 섶나무로 달이니
색이 짙고 탁하고 붉으며 맛은 매우 쓰고 떫다.
臺下有七佛禪院 坐禪者常晩取老葉 晒乾然柴煮鼎如烹菜羹 濃濁色赤 味甚苦澁
칠불선원에서 만들어 마시던 차는 삶는 팽다법을 이용하며 탕색이 짙고 붉다고 했는데 이는 바로 강발효차인 홍차의 색이다.
초의가 만취(晩取)와 노엽(老葉)이라 했으므로 차잎를 이른 봄이 아닌 늦은 봄이나 여름을 전후로 채엽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쇄건(쇄乾)이라 했는데 이는 그 잎을 강한 볕에 발효 및 건조시켰다는 것을 말한다. 채엽 시기가 늦을수록 카테킨과 산화효소를 많이 포함하여 발효되기가 쉬우며, 높은 기온 및 일광의 세기로 인해 발효의 속도가 가속돼 강발효가 일어난다.
초의는 미심고삽(味甚苦澁)이라고 하며 개탄했지만, 홍차 애호가들은 이를 산뜻하고 끊는 듯한 맛이라 한다. 포다법으로 부드럽게 우린 녹차의 맛에만 익숙했던 초의에게는 홍차의 이런 맛은 차를 버린다고 개탄하게 하였다.
그러나 일쇄형 홍차의 경우 일정 기간 숙성(6개월 이상)시키면 쓰고 떫은 맛은 산화중합반응을 통해 부드럽고 중후한 맛이 되며 탕색 또한 탁한 적색에서 맑은 적색으로 변화하며 독특한 우리만의 방식의 홍차가 된다.
그 외에도『차문화유적답사기 상』에 소개된 정학녀 할머니(92년 92살로 작고)등을 비롯해 악양 일대에서는 4월말, 5월 초순에 새잎을 따서 온돌방에서 말려 손으로 비빈 후 음지에서 말리는 홍차제다법 등이 전승, 발전되어 화개와 악양 일대에서는 현재 다양한 홍차들이 제조되고 있다.
칠불선원과 이 일대의 홍차들은 한국 홍차가 자체적으로 오랜 동안 만들어져 내려왔고, 우리나라가 매우 다양한 차의 세계를 가졌다는 사실의 역사적 증인인 것이다.
조선의 백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녹차의 푸른 빛 만을 담은 것이 아니라 우리 홍차의 자주 빛 붉은 색까지 오롯히 담아내왔던 것이다.
37번-홍차를 홍차라 부르지 못할 때 1 09.03.28 22:40 장효은
제가 몇년전에 매암제다원에서 홍차 만들기를 배우기 시작할 때 같이 일하시는 동네 분들이 하시던 말씀이 있었습니다. 옛날엔 이런 차 많이 만들어 먹었는데 그렇게 맛있었다. 등등
그분들이 차의 이름을 생차, 잭살 등등 여러가지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기에 처음에는 무슨 얘기인지를 몰라 넘어갔는데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체계적으로 조사를 해보았더니
악양 뿐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제다법 및 형태와 맛, 색 등으로 규정지어 볼 때 홍차를 비롯한 다양한 발효차를 만들어 왔던 것이 밝혀졌습니다. 굉장히 놀라웠습니다.
우리나라는 홍차를 만들지 않았었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던 저에게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60대 이상의 일반 주민 분들은 현대적 제다용어에 익숙치 않았기 때문에 자신들의 할머니, 어머니들이 대대로 만들어 왔다던 이 '홍차'를 홍차라 부르지 못했었기에 너무나 오래동안 감춰져 있었던 거죠. 다음에 이어서~
알림-다큐내용에 대한 논쟁은 환영하나 없는 사실을 날조하지는 말길 부탁드립니다. -09.04.03 8:03 다큐제작팀
다큐멘터리 일상 다반사에 대한 논쟁은 환영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분야이든 관심을 바탕으로 건강한 토론이 이루어져야 발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비판이 정확한 내용의 확인이 없이 이루어질 경우 명예훼손이 될 수 있다는 점 알려드립니다.
모 차 잡지에 저희 다큐멘터리 일상다반사의 감수자 류건집 교수라며 글이 실렸습니다.
하지만 류건집 교수님은 감수가 아니고 4명의 자문 중 한분이십니다.
인터넷 사전에서 감수란 책의 저술이나 편찬 따위를 지도하고 감독함.이고
자문이란 어떤 일을 좀 더 효율적이고 바르게 처리하려고 그 방면의 전문가나 전문가들로 이루어진 기구에 의견을 물음. 이라고 되어있네요.
감수와 자문은 굉장히 다른 말입니다. 참고로 저희 다큐멘터리의 리플릿, 포스터, 자막 모두에 감수란 타이틀이 올라있지 않습니다.
정확한 사실 확인이 없는 것도 모자라 저희 다큐멘터리의 제작진 이름을 맘대로 바꿔버리는 것은 명확히 사실 날조입니다. 명예훼손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다큐멘터리의 정확한 내용을 확인하시고 논쟁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저희 제작진의 이름을 함부로 바꾸거나 없는 직책을 만들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30번-조선에서 생산된 발효차의 종류 08.03.31 16:55 장효은
일반적인 의미의 백차는 솜털이 덮인 차의 어린 싹을 따서 덖거나 비비기를 하지 않고 실내나 실외 위조과정만을 거친 후 건조해 만드는 차로 10%정도의 발효도를 갖는다. 향기가 맑고 맛이 산뜻하며 찻물 색이 맑다. 문헌상 이 백차에 해당하는 차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정약용의 글 중 유배가 끝나고 고향에 돌아온 후 강진의 제자들에게 쓴 편지에서
다산: 올라올 때 이른 차를 따서 햇볕에 말렸느냐
제자: 미처 못하였습니다.
((다산) 來時 摘早茶付晒否 (제자) 曰未及) 김명배, 『증보판 茶道學 論攷』, 대광문화사, 1999, p. 203.
라고 하였다. 이 글에서는 덖거나 찌는 과정에 대한 언급이 없고 어린잎을 따서 晒했다는 했다. 이는 차의 제조에서 살청과정이 없었으며 유념 없이 일광위조과정을 거쳐 발효와 건조가 동시에 진행됐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일종의 백차라고 볼 수 있다. 晒라고 했으므로 강한 발효의 가능성을 제기할 수 있으나 유념과정이 없다는 것과 차 잎이 이른 차 즉, 여린 잎이라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유념과정에서 차 잎의 세포가 파쇄되고 세포내질이 혼화되어 자체 발열과정을 통해 발효가 급속히 진행되므로 유념이 없을 때에는 발효의 속도가 현저하게 느릴 수밖에 없다. 또한 차 잎 속의 산화효소는 큰 잎일수록, 일조량이 많아지는 여름에 가까울수록 많은 함유량을 보인다. 늦게 딴 잎일 경우에는 그 크기가 클 뿐만 아니라 많은 일조량 때문에 산화효소가 많고 기온이 높아 발효되기가 쉽다. 그러나 일찍 딴 차 즉, 조차(早茶)일 경우 잎의 크기가 작고 적은 일조량으로 산화효소가 훨씬 적고 기온이 낮아 발효가 더디게 나타난다. 즉 같은 시간의 晒과정을 통하더라도 유념이 없는 이른 차는 발효가 약하게 진행되는 도중에 건조가 되어 차가 완성되므로 여기서 언급된 차는 발효가 약한 백차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다음의 「혜장 상인에게 보내 차를 빌다」시에서도 백차로 추정되는 발효차의 원형을 찾을 수 있다.
듣자니 석름봉 석름봉은 만덕산 백련사 서편 봉우리의 이름이다.
바로 아래서 예전부터 좋은 차가 난다고 하네.
지금은 보리가 볕을 쬐는 계절인지라 잎(旗)도 피고 순(槍) 또한 돋아났겠네.
(중략)
모름지기 법대로 배로에 말리고 볕에 쬐어야.(傳聞石廩底 由來産佳茗 時當晒麥天 旗展亦槍挺(중략) 焙晒須如法
우렸을 때 빛깔이 맑으리라 浸漬色方瀅)
정약용, 『茶山 詩文集』중 [寄贈惠藏上人乞茗], 1805.
시에서 나타난 시기는 時當晒麥天 旗展亦槍挺라고 했으므로 보리가 커가고 순과 잎이 막 나기 시작하는 이른 봄이고, 다산은 그 시기에 수확되는 여린 차잎으로 차를 만들 것을 말하고 있다 . 여기에 나타난 제다과정은 여린 잎으로 살청과 유념 없이 焙과정, 즉 실내 위조인 온돌이나 배로에서의 약발효 건조를 거친 후 마지막에 晒과정을 통해 완전 건조하는 것이다. 그 찻물색이 맑을 것이라 말하는 것을 통해 백차제조과정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매암나눔광장-<차와 사람들>
4번-조선 발효차 1, 백차가 조선에 있었다! 08.07.15 4:53 장효은
우리나라 차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갖고 있다. 문헌이나 기타 자료 속에서 우리차의 특징이나 우수성을 찾을 수는 있으나, 그 제다법에 대해서는 자료가 매우 부족한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차가 예부터 현재까지 꾸준히, 또한 가장 활발하게 생산되고 있는 하동지역에서 과거 제다법에대한 증언 조사 및 연구는 시급한 과제이다. 일부 문헌을 제외하고는 제다법에 대한 거의 유일한 자료라고 할 수 있는 증언을 채록할 수 있는 증언자들이 시간이 갈수록 감소할 것이기 때문이다.
본 연구에서는 하동지역에서 1900년대 초중반 가장 일반적으로 활발하게 생산되었던 차가 발효차임을 감안하여 발효차 제다법에 대한 증언조사를 시행하였다.
백차는 부분 발효차로 솜털이 덮인 차의 어린 싹을 따서 덖거나 유념 하지 않고 실내나 실외 위조과정만을 거친 후 건조해 만드는 차로 10%정도의 발효도를 갖는다. 질문조사에서 68세의 하동군 악양면 정서리 출생이며 거주자인 이순희 할머니의 증언은 다음과 같다.
어렸을 때 동네 할머니들이 우전 시기의 여린 잎을 동네 산에서 따왔었다. 채엽 후에 대나무 채반 등에 얇게 널어 그늘이 있는 마루에 놓아둔다. 비비는 과정이 없이 말려 완전히 마르면 화로 위 주전자에 물과 차를 넣고 끓여 마셨고 찻물은 약간 붉은 색이었다. 향이 참 좋았고 할머니들이 주로 만들고 끓여 마셨다.라고 한다.
이는 전형적인 백차의 제조법이었다. 이외에도 다른 증언자로부터는 중간 잎이나 큰 잎을 유념과정 없이 그늘이나 햇볕에 하루 이상 완전 건조시켜 끓여 마셨다는 증언도 얻을 수 있었다.
* 매암나눔광장-<차와 사람들>
3번-초의, 조선의 녹차 제다법을 완성하다! 08.02.28 10:35 장효은
우리 제다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녹차제다법이다. 아직껏 녹차제다법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단지 녹차제다법을 체계적으로 완성한 제다인이 누구인지는 나타나 있다. 바로 초의스님이 녹차제다법을 완성한 주인공이다. 이같은 것은 어디까지나 구체적인 문헌에 의한 것임을 밝혀둔다. 그리고 현대 제다인들이 잘못 생각하는 오류가 있다. 바로 녹차제다법에 구증구포를 사용하는 것이다. 어떤 제다인들은 잎녹차를 구증구포를 계승하여 만들고 있다며 자신들의 차를 정통차라 내세운다. 또 일반인들중에는 차를 구입하기 전에 몇 번 덖었습니까? 아홉 번 덖습니까라고 물어와 필자를 곤혹스럽게 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 과연 구증구포가 전통녹차제다법일까? 흔히 다산이 전파했다고 하는 구증구포는 떡차의 제다법이다. 필자는 다산의 어떤 글에서도 잎차를 제조하는데 구증구포를 사용했다는 언급을 찾아볼 수 없었다.
다음으로는 구증구포의 또 다른 출처로 보는 초의의 제다법이다.
초의가 <다신전>과 <동다송>에서 기술한 녹차의 제다법은 솥에서 살청뿐 만 아니라 건조까지 병행하여 차를 완성하는 중국식 초청녹차 제다법 이었다. 제다를 시작한 초기 초의스님은 실제 이 제다법으로 차를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초의스님의 차를 받은 김정희가 1838년 보낸 편지를 보면 언제나 덖이가 살짝 정도를 넘어서 정기가 녹아날 듯한 느낌이 드니, 만약 다시 만들 때는 불살피기를 조심하는 것이 어떻겠소 라며 그가 차를 지나치게 덖는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런 점을 볼때 초의의 차는 <동다송>을 집필한 후에도 아직 완성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초의녹차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나타나는 것은 바로 범해스님의 글에서다. 초의가 입적한 지 12년 후인 1878년 범해 각안스님은 초의차(草衣茶)란 다시에서 완성된 초의녹차의 전범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곡우절 맑은 날 노란 싹은 아직 잎이 피지 않았는데
솥에서 덖어내어 밀실에서 말리네.
穀雨初晴日 黃芽葉未開 空鏜精炒世 密室好乾來
범해각안스님의 초의차에서 조선, 즉 한국만의 독특한 녹차제다법이 드디어 완성되었음을 말해준다. 초의차에서는 우전차의 제다법을 설명하고 있다. 그 제다법은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우리 정통녹차제다법의 원형을 보여주고 있다. 초의스님은 우선 솥에서 살청을 위해 덖음을 한 후에 건조를 밀실에서 말리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건조시스템은 우리전통생활거주공간인 초가와 한옥의 특수성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즉 한국만의 특수한 난방시스템인 온돌방에서 건조하는 현대제다법의 원형이 그대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덖음과 건조에 있어서 횟수를 명기하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구증구포의 형식이 아닌 것을 입증하는 것은 다산의 떡차에 대한 기록 때문이다. 다산이 차의 제다법을 초의스님에게 전수했다는 것을 보면 녹차를 구증구포의 형식으로 제다하지 않았을 것을 한눈에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초의는 조선조 우리정통녹차제다법을 완성한 제다인으로 기록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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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초의가 이른 '晒乾然柴'를 잘 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찻잎을 따서 말리는 것이 아니라,, 차나무를 베어서 그대로 말린 것이며, 필요시 그 찻잎을 따서 국을 끓이듯 달여 마신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찻잎을 따서 말린 것과는 상당한 제다법 차이가 있는 것이지요. 찻잎을 땄다면 비빔질(유념)도 했을거라는 추정도 가능하기 때문이며, 안 땄다면 비빔질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중요한 법제차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