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망디 공수작전 당일의 506연대 점프 개요도이다. 왼쪽 밑에 대대별로 어떤 아이콘인가를 나타내고 있다. 밴드 브라더스는 2대대 이므로, 하얀색 동그라미가 되겠고, 중간에 굵은 선은 첫 글에서 말한 수로선(둑길)이다. 밴드 브라더스 2편을 자세히 보신분들은 아시겠지만, 윈터스가 82공수사단대원의 판초를 덥고 지도를 보는데, 거기에 Causeway 2번이라고 지도에 기입되어 있다. 이것은 유타해안 상륙부대가 내륙으로 들어오는 2번 출구(Exit)를 의미한다. (이해가 안되는 분들은 이 글의 앞 첫 글의 그림을 보시도록)
<부연 그림 설명>
1. 윈터스 대위가 목표로하는 2번 출구는, 바로 그림의 중간에 사각블록에 드롭존C라고 보일 것이다. 거기에 맞물린 선이 보일 것이다. 그 드롭존C 블록 바로 아래 선이 교차된 곳이 바로 윈터스의 목표 Causeway 2이다. 그러므로 윈터스 대위가 떨어진 곳은 아마도 2대대 하얀 동그라미 착륙장의 81번이 되겠다. 비행기가 서쪽에서 진입했고, 윈터스의 비행기가 일찍 강하를 했으므로 그렇다. 원래는 검은색으로 된 2대대 주 투하지점까지 날아갔어야 했다. (81번 투하지점은 드롭존C 왼쪽에 있다)
영화상으로 보면 잘 모르지만, 그 반대일 경우 드롭존C바로 위의 50번대 모인 2대대 착륙장으로도 볼수 있다. (사실은 이게 더 유력함. 왜냐하면 걷다가 수로를 만나기 때문이다. 동이 터 올때 늪지를 횡단한다)
2. 506연대를 기준으로 보면, 3대대가 가장 안정적이고, 1대대는 중간, 윈터스의 2대대는 오나전히 흩어졌다. 2대대의 문제는 수로 바깥쪽에도 떨어진 부대가 많았다는 것이다.
3. 지도의 맨 윗쪽에 검은색 1대대 투하지점이 하나 나온다. 아마도 기체고장이나 피격된 상태로 보인다. 그리고 1대대의 1/4 정도는 지도의 왼쪽 아래, 캐런탱 뒷쪽으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이 곳의 투하는 대공포를 피하다가 그런 것으로 보이며, 드문드문 떨어져 있는 곳들이 대부분 그렇다.
4. 착륙장의 넘버는 바로 바로 점프 비행기 일련번호이다. 대대별로 10단위가 비슷한 점이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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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좀 빳빳한 글이며, 이후 506연대 세부기술에서 조금 인간적인 재미와 특수한 상황들이 자세히 기술된다.
2. 프랑스 지명은 여전히 엉망이다.
3. 병력이 산만하게 떨어진만큼, 개략도 내용이 산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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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6공수연대의 노르망디 공수작전(1)-101사단 개략(나)
Capture of the Southern Beach Exits
로버트 싱크 대령이 지휘하는 506연대의 1-2대대는 착륙장 C에 떨어졌다. 그리고 3대대는 326공병대대와 2개의 폭파팀을 대동해서 Drop Zone D에 떨어졌는데 506연대의 목표는 유타해안 서쪽이 범람지역의 출구 1과 2였다. 지명으로 따지면 Audouville-la-Hubert와 Pouppeville 사이였다. 이들은 Douve 강의 두 개 교량을 점거하는 것이 임무였다. 필요한 경우 가교를 건설해야 했고 독일군은 이미 이 교량에 폭발물을 장치해 놓고 있었다.
2대대는 한 개의 폭파팀을 대동하고 남쪽의 두 개 둑길(두개의 출구)를 장악하기로 되어 있었다. 먼저 허버트가 이끄는 2대대의 F중대가 Exit 1에 도착했고 E중대는 Exit 2에 도착했다. 그러자 허버트의 병력과 D중대는 대대본부와 예비대로 편성된다. 1대대는 Hiesville에서 연대본부와 만난다. 그리고 B중대는 적의 주의를 유도하기 위해서 ‘생 마리 두 몽(Ste. Marie-du-Mont)’으로 이동한다. 3대대는 le Port에 있는 강변을 장악하고 동쪽에 두 개의 교량을 점거한다.
506연대도 502연대와 마찬가지로 상당히 분되어 콘탱팅반도에 떨저였다. 126대의 항공기가 영국을 이륙할때만 해도 날씨가 아주 좋았으나 프랑스 해안에 도착하자 안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거기다가 독일군의 대공포화는 비행기들 대열을 흔들었다. 그로 인해서 광범위한 지역에 떨어졌다. 3대대는 Drop Zone D에 그런대로 들어갔으나 2대대는 대부분 정해진 곳을 벗어났다. 81대의 수송기가 Drop Zone C로 예정되었으나 10대만이 C의 패널을 확인하고 정확한 곳에 점프했다.
연대장 싱크 대령도 점프후에 두시간 동안 40명만을 규합하여 약속지점 근처에 포스트를 설치했다.
(이것은 101개략에 포함된 506연대 개략에 해당됨. 이후 자세히 기술됨. 재미 있음)
그러나 1대대장 윌리엄 터너 중령과의 만남은 아주 느렸다. 병력은 Culoville로 이동하여 지휘소를 만들었다. 남쪽의 3대대와 2대대는 연락이 두절됐다. 싱크 대령은 먼저 1대대가 작전에 정상적으로 나타나기를 빌었다. 그러나 1대대장 터너 중령도 단 50명을 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터너 대령도 출구2는 포기하고 Pouppeville와 Exit 1의 확보를 결심했다.
같은 시간 상황파악이 동일하게 힘드었던 101공수사단장 테일러 장군은 501연대(줄리안 이웰 중령) 3대대에 남쪽의 출구로 신속히 향하라고 명령했다. 원래 이 501연대 3대대는 사단의 예비대였고, 그들은 원래 Drop Zone C와 글라이더의 착륙을 돕도록 되어 있었다. 이 3대대는 병력이 분산되었는 것 외에 3대의 수송기가 격추되어 34명이 이미 희생된 뒤였다.
이웰 중령은 생 마리 두 몽(Ste. Marie-du-Mont) 가장자리에 60명의 사단본부대와 같이 점프했었다. 3대대에서 파견된 150명은 Hiesville 근처에서 사단지휘소를 만들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사단장 테일러 장군 역시 아서 맥컬피(리프) 준장과 18명의 다른 장교들과 함께 있을 뿐이었다. 이들과 조우한 독일군은 생 마리 두 몽의 외곽진지에 있던 6명의 독일군 뿐이었다.
그러나 이웰 중령은 마을을 공격한다. 독일군의 방어는 강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옥이 많았기에 기동이 불가능하여 세시간 동안 천천히 집과 집을 이동하면서 시가전을 벌인다. 정오가 되자 마을에 있던 독일군 지휘소는 포위된다. 이웰 중령의 병력은 18명이 전상했다. 그러나 독일군 25명을 전상시키고 38명의 독일군 포로를 얻는다.
일부 독일군은 해변에서 후퇴하였다. 그러나 새벽에, 샹륙한 보병4사단의 8연대쪽은 상황이 안 좋았다. 독일군이 8연대를 포위하는 형태가 된 것이다. 이웰 중령은 보병4사단이 진주하는 방향으로 가서 기관총과 참호를 설치하고 기다렸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독일군의 8연대 포위는 아직 풀리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후 보병8연대 2대대 칼톤 맥닐리 중령과 이웰 중령이 조우한다. 해변에서 올라온 병력과 만난 것이다. seaborne과 airborne의 만남이었다. 그리고 101사단장 테일러 소장도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다.
보병4사단은 생각보다 빠르게 해변에서 올라왔다. 그러므로 테일러 장군도 101공수사단의 2단계 임무인 상륙군단의 남쪽 측면 담당으로 작전을 전환하려고 한다. 그러나 아직 병력의 집결은 너무 적었다. 그러는 동안 터너 대령이 지휘하는 506연대 1대대가 소규모 전투를 벌이면서 진격하고 있었다. 이들이 이웰 중령의 부대와 만나자 그때 수로의 둑길을 타고 보병4사단의 탱크가 올라오고 있었다. 그러자 터너 대령도 바로 Culoville의 지휘소로 돌아갔다.
Exit 1이 506연대 2대대(로버트 스트레이어 중령)에 의해서 점거가 되자 2번을 향했다. 당시는 연대본부 병력도 이 작전에 참가하였다. 당시 2대대는 200명이 악조건하에서도 모였다. 당시 대대본부의 통신중대와 기관총소대의 8명과 주로 D중대로 구성된 100명 정도가 Foucarville 근처에서 대대의 지휘부와 만났다. 또한 82공수사단 508연대의 20여명도 같이 합류하였다. (아직 윈터스와 소대원들은 낙오된 상태다)
새벽 3시 30분에 이들은 모여서 스트레이어 중령의 지휘 아래, 502연대 1대대와 함께 남쪽으로 작전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은 바로 독일군의 저항에 부딛쳤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지역은 이미 503연대 1대대가 WXYZ이라고 불린 독일군 포병진지를 공격하고 통과한 지점이었다.
이 스트레이어 중령의 병력들은 아침까지 독일군 기관총과 도로상의 포격으로 묶여 있었다. 결국 D중대의 일부가 우회로를 이용하여 남쪽으로 급하게 향했고 2번 출구에 오후 1시 30분에 도착하였다. 스트레이어 중령의 나머지 병력은 1시간 후에 도착하였다. 오후 6시에 대대는 다시 제대를 편성하였다. 그때 이미 보병4사단의 70탱크대대가 수로에 도착하였다. (수로를 건너기 전에는 섬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의 운명이었다)
이날 하루동안 506연대의 연대본부는 이 반도에 홀로히 남겨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특히나 2-3대대는 전혀 연락이 없었다. 사단의 일부만이 연락이 되었다. 거기다 독일군의 현황은 아주 컴컴했다. 주요한 이유는 통신의 두절과 연대장 싱크 대령이 너무 본대와 격리되어 있었던 것이 었다. 그리고 싱크대령 마저 수로 공격에 집중하자 연대가 모일 구심점을 병사들이 찾을수 없었던 것이다. 싱크는 아침이 되자 정찰을 보내서 독일군을 파악하고 3대대와의 접촉을 기도했다. 그러나 실패했고 소수의 독일군 위치만을 파악했다.
싱크 대령이 정찰을 내보낸 시각, 북동쪽으로 1천야드 떨어진 Holdy에 있는 독일군 105밀리 포대를 향해서 506연대원들과 일부 82공수사단 병력들이 뛰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군의 방어로 접근을 못하고 증원군을 기다렸다. 싱크 대령의 병력은 차차 모여들었고 1대대의 80명 정도가 연대지휘소 통제로 들어왔다. 그들은 1대대 본부중대장인 리로이드 패치 대위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C중대장 컨트 보스테인도 같이 조력하고 있었다.
증원군이 도달하자 독일군은 포상의 옹벽으로 후퇴하였다. 미군은 로켓을 발사했다. 그리고 이후 패치 대위에 의해서 포상이 점령됐다. 이후 이곳은 502연대 병력의 한 중위의 병력이 완전히 점령했다. 그러자 패치 대위는 생 마리 드 몽의 공격을 준비했다. 그곳의 서쪽에 포대가 또 있었던 것이다. 마을은 이미 상륙한 보병4사단이 장악했고 독일군을 동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패치 대위의 작전능력은 의심스러울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그러자 싱크 대령은 패치 대위에게 포를 파괴하지 말라고 전령을 보냈다. 노획한 포를 사용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령이 도착했을 때 4대중 3대는 이미 파괴하고 1대만이 온전했다. 정찰이 돌아오자 싱크 대령은 새벽이 지휘소가 공격받기 쉽다고 판단했다. 정오가 되어서 독일군과의 사격전이 이어졌다. 아주 가까웠다. 그러자 지휘소를 야간 후퇴시켰다. 그리고 저녁이 되자 싱크 대령은 기다리던 스르레이어 중령의 2대대와 터너 중령의 1대대와 연결됐다. 4보병사단도 진주했다.
그러나 506연대의 싱크대령의 병사는 당시 총 650명이었다. 대부분이 1-2대대였다. 일부는 82공수사단의 대-전차반이었다. 3대대는 그때까지도 소식이 없었다. 전체적인 상황은 아직도 막연하고 불확실했다. 오후에 사단장 테일러 소장과 매컬피 준장이 연대 지휘소를 방문했다. 아침이 되면 다시 남쪽을 소탕하기로 했다.
Securing the Southern Flank
싱크대령이 전혀 모르고 있는 3대대의 소대규모의 병력이 그들의 목표에 접근했다. 원래 3대대는 Drop one D(그림)에 점프하여 le Port 교량을 확보하는 것이 임무였다. 그러나 독일군은 이 지역에 연합군 공수부대가 내릴수 있다는 것을 예감하고 대공포가 집중적으로 설치되었다. 여기에 점프한 병력은 점프후에 바로 기관총과 박격포에 노출됐고 일부는 떨어져보니 푹푹 빠지는 늪지였다.
대대정보장교인 찰스 세틀 대위도 점프후에 바로 이 마을을 향해 병력을 찾기위해 걸었다. 그러나 그가 찾은 것은 2명의 장교와 12명의 사병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정확한 곳에 떨어졌다고 믿고 병력을 규합하여 목표로 향하리라 마음먹었다. 총 33명의 병력이 le Port의 북쪽 교량에 새벽 4시 30분 도착했다. 그들은 독일군의 사격에도 불구하고 건너편으로 도하를 시작했다. 이들은 5명의 장교와 15명의 병사들로 “대대”를 구성, 대대임무를 공격한 것이다.
당시 H중대의 정찰대가 교량에 동시에 접근하고 있었다. 그들은 동시에 독일군을 수명 사살하고 기관총 진지 몇 개를 파괴했다. 그러나 이들은 실탄이 떨어져갔고 도와줄 병력이 없었다. 그들은 결국 후퇴하여 서쪽 제방으로 은폐해 그날 동안 있게 된다. 이후 이들과 하워드 존슨 대령이 지휘하는 501연대와 연락이 되어 세틀 대위는 증원을 요청하나, 존슨 연대장은 그럴만한 형편이 못된다고 연락하고 긴급상황이 되면 증원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세틀 대위는 뜻밖의 증원을 받게 된다. 밤에 캐런탱 남쪽에 점프했던 40명 정도가 걸어오다가 이들과 만난 것이었다. 당시 독일군은 세틀 대위보다 월등했으나 세틀 대위를 예상밖으로 공격하지 않았다. 밤중에 세틀대위는 시험적으로 교량의 진출을 시도한다.(아주 중요한 대대목표의 교량이다) 세틀 대위 휘하에 있던 폭파병은 교량폭파를 준비한 상태였다. 그러나 다시 독일군의 사격을 받았다. 세틀 대위는 몰랐지만 이 병력은 당시 101공수사단의 남쪽 측면의 방어선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시 남쪽에서는 501연대 1-2대대가 방어선을 구성중이었다. 그리고 1대대는 la Barquette에 있는 Douve River대 대한 공격을 시도한다. 2대대는 그곳에서 가까운 곳에서 생 두 몽으로 향하는 도로를 점거하고 있었다. 그 도로는 캐런탱으로 향하는 도로였다(Map No. 5). 이제 501연대는 생 두 몽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서쪽의 철도교량을 파괴하라고 명령이 내려왔다. 사실 la Barquette 마을 자체는 위장목표였다. 진짜 목표는 교량이었다.
그리고 또하나의 중요한 목표가 있었는데 그것은 캐런탱 북쪽에 있는 수문이었다. 이 수문은 두브(Douve)강의 수위를 Merderet에서 물이 합류하는 지점까지 조절하고 있었고, 만약 그것이 완전개방되면 점차 수위가 증가하여 생 마리 두 몽과 캐런탱의 늪지까지 범람시킬수 있었다. 독일군이 취후의 방어방법으로 이 수문을 개방할 가능성이 작전 전에 제기되었다. 그러면 동쪽의 수로들이 최대 8피트까지 높아지며 이 경우 도하가 힘들어진다.
영국공군의 정기 정찰에서 드러난대로 이 지대는 상습범람지구로써 원래 해안 저지대였다. 이 수문의 점거는 작전에서 필수적이었다. 수문을 독일군이 열 경우 지체된 미군에게 반격을 가할 빌미를 줄수도 있었다. 그리고 전술적으로 상륙하는 VII군단의 측면이 노출된다. 그러나 어디서나 병력의 규합이 문제였다. 원래 501연대는 Vierville과 Houesville 사이에 점프하여 두 개의 도로를 따라서 캐런탱으로 올라가게 되어있었다. 그러나 이 Drop Zone D는 작전 수일 전에 Anoville-au-Plain-Bse의 남쪽으로 변경되었다. 사실상 이 수문의 중요성이 조금 과장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실상 당시 독일군이 그 수문을 개방한다고해도 큰 장애가 될 것은 아니었다. 이미 얼마전에 비로 한번 범람했던 것이고, 독일군도 큰 염두에 두고 있이 않았다.
존슨 대령이 바로 이 수문과 교량을 임무로 받고 있었다. (정식 명칭: la Barquette lock) 이들의 점핑지역은 두브 강의 저지대였다. 최초로 투하된 1대대와 연대본부는 심각하게 산재되어 투하되었다. 일부는 캐런탱의 독일군 진영 깊숙이 점프했다(아래 검은 점). 대부분은 개런탱 서쪽의 늪지에 떨어졌다. 이때 1대대의 본부병력이 탄 수송기들이 대공포화에 아주 많이 맞았고 대대장은 전사했다. 참모의 일부가 독일군에 포로가 되었고 대부분의 중대장과 참모들이 당일 모두 실종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1-2대대의 병력을 실은 비행기들은 화물을 많이 싣고 있지 않았다.
존슨 대령의 수송기에서 그린라이트가 들어오자 먼저 문으로 화물을 걷어 차 내려고 했으나 문제가 생겨 조금 딜레이가 된 상태에서 수송기에서 병사들이 점프했다. 이로 인해서 오히려 이들은 정확한 사각형의 Drop Zone D에 점프하게 된다. 존슨 대령은 점프후에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다양한 제대 출신의 병력 150명을 모은다. 이들은 수문 북쪽의 도로교차점에 이르자 먼저 수문으로 50명의 공격대를 나머지는 방어진을 구성한다. 이들은 최대한 달려서 수문 부근의 제방에 도착했고, 당시 독일군의 포격을 피하고자 바로 참호를 팠다.
이들은 수문점거의 교두보를 마련했으나 독일군이 역공으로 이 교두보를 공격할 의도는 없어 보였다. 존슨 대령은 수문공격과 강 2천 야드 윗쪽의 목표교량을 점거하기 위해서는 증원군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대령이 정찰대를 교차점에서 내보내려고 하자 바로 사격을 받았다. 대령이 있던 장소는 유리한 지형이 아니었다. 다리를 폭파하려면 병력이 더 필요했다. 존슨 대령은 북쪽으로 이동해 Bse에서 더 연대병력을 모으기로 결정했다. 이때 불서쪽으로 정찰을 나갔던 정찰대는 그 지역에 연대 작전장교인 앨런소령이 상당한 규모의 병력을 데리고 있음을 보고했다. 당시 수문을 지키고 다리를 확보할 병력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결국 대령은 수문의 방어를 풀고 떠나면서 50명을 얻었다. 그리고 대령은 더 나아가서 병력을 더 모아 생-콩-두-몽으로 진출할 생각이었다. 아침 9시에 그는 Bse에 도착했다. 당시 앨런소령의 100명 정도되는 병력은 북쪽과 서쪽의 독일군과 교전을 벌이고 있었고 사단에 대한 정보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 존슨대령도 마찬가지였으나, 존슨대령이 결정적으로 정세판단을 하게 된 것은 라디오에서 들은 런던의 BBC방송이었다.
당시 이 방송은 침공에 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침공은 작전대로 진행되고 있으며, 미군 공수부대원들은 잘 결속하고 있다.(생구라. 바로 이런것이 진짜 심리전이다.)”
이 뉴스를 듣고 존슨 대령은 원래 연대의 목표대로 진출하기로 마음먹었다. 다른곳에서 병력들이 집결되고 있다고 믿은 것이다. 비록 자신이 가진 것은 150명 뿐이지만. 존슨은 나머지 병력을 모아서 다시 수문과 교량으로 진출하게 된다. 이 시점에서 존슨대령은 발라드 대령이 지휘하는 501연대의 2대대 250명이 북서쪽 1천야드 지점에서 싸우고 있음을 알았다. 존슨대령은 이 병력과 연합하여 작전하기를 바랬다. 그러나 존슨과, 501-1대대의 사이에는 독일군이 있었고, 앨런소령의 부대는 소식을 듣고 합류하기 위해 이동중이었다. 이들은 오후 1시 30분에 합류한다.
수문지역에 도달하니 독일군의 포격은 여전히 강력했다. 박격포와 총탄도 많이 날아왔다. 독일군의 사-포격은 커랜탱 동쪽과 생 콩 두 몽 두 방향에서 날아오고 있었다. 이때 앨런 소령은 해군의 포격을 유도하는 사격유도장교 페럴 중위를 만나게 된다. 중위는 무전기로 함대를 불러서 포격의 제원을 산출하고 송신했다. 그러자 수분만에 8인치 함포탄이 날아왔다. 처음에는 조금 부정확했으나 중위는 점차 교정했고 독일군의 포격근원지와 심지어 박격포근원지까지 함포를 유도해서 박살을 냈다. 이 함포사격으로 고착되어 있던 501연대 2대대가 목표인 les Droueries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함포사격 이후 독일군의 포격이 급격히 줄어들어자 존슨 대령은 다시 수문과 교량을 공격하여 점거했다. 그러나 정찰대가 다시 서쪽으로는 독일군의 사격으로 진출이 불가능하다고 보고했다. 대령은 수문의 방어선을 확장하여 동쪽과 서쪽의 간선도로까지 점거하라고 명령했다. 이들은 방어선을 계속 지켰고 밤 8시에는 30명을 앨런 소령이 더 규합하여 데리고 왔다.
그리고 야간에 정찰대가 주변을 돌면서 101사단본부와 506연대본부를 만나 통신이 개통된다. 그리고 세틀대위가 지휘하는 506여대 병력도 만나게 된다. 존슨대령은 D Day에 소수의 병력으로 연대 임무를 성취했다. 연대에서 연락이 되는 것은 1대대뿐이었다. 2대대는 줄곧 생 콩 두 몽의 독일군과 접전하고 있었고, 존슨대령의 우측에 위치하면서 목표인 교량과 수문으로 갈수가 없었다.
발라드 중령이 지휘하는 2대대는 곧 연결이 되었으나 그 역시 데리고 있는 것은 소수였다. 그는 생 콩 두 몽을 통해서 두브강의 교량으로 가려고 작정하고 있었다. 정보장교가 이 마을에는 독일군 1개 소대밖에 없다고 보고한 까닭이다.
오전 5시 30분, 두 개 중대 약 30명이 Angoville-au-Plaindml의 교차로 남쪽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세 번째 중대는 예비대로 뒤를 따랐다. 이때 독일군의 기관총과 소화기, 그리고 박격포의 공격이 전면에 떨어졌는데, 마팀 506연대 주공이 도착하였고 바로 독일군의 우측을 공격했다. 독일군이 주춤하자 발라드 중령은 연대장인 존슨대령으로부터 la Barquette 진출하라고 명령받는다.
그러나 진출하는 도중 독일군이 강력하여 더 이상 나갈수 없음을 중령은 깨닫는다. 거기다가 그 곳은 늪지대였다. 결국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계속 전진한다. Addeville에 있는 알렌 소령도 연대장 존슨으로부터 이동하여 합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400야드 만을 진출하고 독일군의 공격을 받아서 중단되었고 날이 새기를 기다렸고 다른 대대도 마찬가지였다. 날이 새자 506연대는 la Barquette를 점령하고 생 콩 두 몽으로 진출하였으나 독일군의 저항은 강력해져 있었다. 캐런탱으로 가는 철도 교량은 이미 파괴되었다고 보고되었다.
-ps: 저의 번역이 이상해도 잘 봐주세요..영어가 딸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