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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강 <동양에서의 인체표현> 강의자료 2008년 10월16일 담당교수 : 이미애 |
제4강- 동양의 인체 표현
동양에서의 인물화는 산수, 화조화와 함께 3대 전통적 장르를 이룬다.
인물화는 사람의 용모나 자태를 그리는 회화로, 산수(山水)나 화조화(花鳥畵)에 앞서고대로부터 그려졌던 역사가 매우 오래된 화목(畵目)인데, 단순히 생활인의 모습을 그린 것과 인물의 정신을 담아 내는 초상화로 크게 분류해 볼 수 있다. 특히 초상화는 얼굴을 중점적으로 그리되 그 인물의 인격과 덕망 내지는 정신세계를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높은 필력(筆力)을 요구하는 화목이다. 중국에서는 이미 전국(戰國)시대에 그려진 초묘백화(楚墓帛畵)를 통해 그 역사가 얼마나 오래되었는가를 알 수 있는데, 백화는 초(楚)나라 무덤에서 출토된 장례용 깃발로 그림의 위쪽에 가는 대나무를 봉합하고 비단실을 늘어뜨린 것을 보아 이들 백화의 용도는 장례의식에 사용된 깃발, 혹은 명정(銘旌)임이 분명하고 화면에 그려진 남녀 인물은 묘주인의 초상이라고 여겨진다. 예로 <인물용봉백화 人物龍鳳帛畵>는 1949년 호남성 장사시 진가대산의 한 묘터에서 출토된 것으로 오늘날까지 알려진 바로는 중국최초의 인물화이다. 바탕천은 무늬가 없는 비단천이며 길이 31㎝, 폭22.5㎝이다. 가는 허리에 긴치마를 입고 몸을 옆으로 돌려 서서 합장하고 축수(祝手)하는 모습의 귀족 여인이 힘차게 솟아오르는 용과 춤추는 봉황의 인도로 천국을 향해 오르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한(漢)대 부터, 진(晋), 수(隨)에 이어지는 고대 인물화의 흐름은 중국회화 초기에 전성기를 이루었다. 특히 중국에서의 인물화가로는 동진(東晋, 371-420)의 고개지(顧愷之, 345-406)1)가 최초의 화이론을 성립한 이론가이자 화가이다. 특히 그는 화가로서 매우 명성이 높았는데, 사안(謝安, 320-385)2)은 그를 높이 평가하여 심지어 “사람이 생겨난 이래 아직 없었다.”3)고 까지 말하였다.
한편, 고개지 이전에는 한사람이 평론가와 작가를 겸하지 않았는데, 진 이후의 회화이론이 한대 이전 제자(諸子)들의 회화론에 비해 보다 구체적인 문제까지 깊이 있게 들어간 것은 논자 자신이 몸소 회화창작을 실천하면서 이를 체득했다는 사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고개지는 바로 화가로서 회화를 논한 대표적인 그리고 탁월한 인물이었다.
고개지의 화론은『위진승류화찬(魏晋勝流畵贊)』, 『논화(論畵)』, 『화운대산기(畫雲臺山記)』 세 편이 있다. 이 세 편의 화론은 모두 장언원(張彦遠)의 『역대명화기(歷代名畵記)』의 기록에 의해 전해져왔다.
『위진승류화찬』은 고개지가 위협(衛協)이나 대규(戴逵) 등 위진의 저명한 화가들의 작품에 대해 평론한 것인데, 우수한 점을 말하기도 하고 결점을 말하기도 하였다. 『논화』는 오로지 그림의 임모에 관한 지식을 말한 것인데, 회화이론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화운대산기』는 한 폭의 그림을 창작하기 위한 문자로 이루어진 설계도이다. 이밖에 『진서(晋書)』의 고개지 전(傳)과 『세설신어(世說新語)』등에도 고개지가 그림에 대해 논한 약간의 어록들이 실려 있다. 고개지의 화론은 주로 인물화와 초상화에 대해 논한으로 특히 그의 회화이론은 ‘전신사조(傳神寫照)’ 즉. 정신이 전해져 그림으로 드러난다. 라는 의미로 집약된다. 이는 대상, 즉 자연 풍물이나 인물의 내면의 세계를 표현하는 것으로 대상 속에 숨겨진 정신과 본질적인 특성을 그려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개지(346-407)가 주장한 중요한 명제이다. 「세설신어」교예에 하나의 보기가 기재되어 있으니 곧 다음과 같다.
“고장강(顧長康)이 사람을 그렸는데 수 년동안 눈동자를 그리지 아니하였다.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물으니 顧가 대답하기를 사체(四體)의 아름답고 아름답지 못함은 본래 묘처(妙處)와는 아무 런 관련이 없다. 神明(정신적 얼)을 밝혀 전달하는 것은 바로 심안(心眼) 속에 있는 것이다."
고개지의 이 사상은 아주 심장한 것이다. 이 말 가운데서 그는 전신사조의 명제를 내세웠으며 또한 전신이 있는 곳은 주로 아도(阿堵)에 있으며 사체의 아름다움에 있지 않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인물화를 그리면서 전신하려고 생각하였다면 마땅히 일정한 형체(자연적 형체)에 시각을 두지 말고 응당 어떤 특정부분에 촛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아도로서 눈을 지시했으나 형사적 눈이 아니라 마음을 드러내 비쳐보이는 마음의 창으로서 심안을 말한다. 곧 형이상적 인품, 덕망 등의 내재적 정신세계를 표현한다는 말이다.
(1) 생활을 반영하는 “이형사신(以形寫神)론”을 제시함
전신(傳神)이 이와 같이 중요하다면, 무엇에 의하여 정신을 전하는가? 고개지는 “형상으로써 정신을 그린다(以形寫神)”는 이론을 제시하였다.
그는, 정신은 객관사물의 형상 가운데 존재하고 정신은 이러한 형상을 통해 표현되는 것인데, 형상이 없으면 정신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형상과 정신은 모순의 통일체라고 생각하였다. 가령 인물화의 경우, 고개지는 무엇보다도 얼굴모습의 전신작용을 중시하여
“목 위를 그릴 때는 차라리 천천히 그릴지언정 빨리 그리지 않는 것이 낫다”
고 말하였다. 얼굴의 전신은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얼굴을 그릴 때는 신중하게 해야 되는데, 천천히 그리는 것은 차라리 괜찮지만 지나치게 빨리 그려서는 아니된다는 것이다. 얼굴의 5관(五官) 중에서는 어느 부분이 보다 더 중요한가? 고개지는 눈동자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는 사람을 그리는 데 어떤 때는 몇 년 동안이나 눈동자를 그리지 않았다고 한다.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묻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사지가 잘 생기고 못생긴 것은 본래 묘처(妙處)와 무관하니, 정신을 전하여 인물을 그리는 것은 바로 아도(阿堵) 가운데 있다.4)
이는 사람의 팔과 다리의 미추(美醜)는 전신과 큰 관계가 없는데 특히 인물의 형상을 그리는 초상화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는 의미이다. 전신의 요체는 바로 눈동자에 있으니 고개지는 일찍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손으로 5현(弦)을 타는 것은 그리기 쉽지만 돌아가는 기러기를 눈으로 보내는 것은 그리기 어렵다.5)
악곡을 연주하는 동작이나 자세로 사람의 사상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날아가는 기러기를 눈빛으로 멀리 바라보는 것을 그림으로써 사람이 생각을 표현하는 것에 비해 쉽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눈동자 그리는 것에 특히 주의를 환기시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눈동자를 그릴 때 아래 위나 크고 작음, 또는 짙고 엷음을 터럭만큼이라도 잃으면 곧 신기(神氣)가 이와 함께 모두 변하고 만다.6)
고개지의 이론은 그의 예술실천 중에 구현되어 있으니, <낙신부도권(洛神賦圖卷)>의 여신은 물 위의 경쾌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바람에 나부끼는 옷고름에 의해 묘사되고 있으며, 그 묵묵히 정을 품은 채 차마 잊지 못하여 떠날 듯 말 듯하는 표정은 눈동자가 큰 작용을 하고 있다.
고개지는 눈동자를 그리는 데 고수(高手)였고 또한 재치있는 교묘한 기술자여서 그의 기법에는 기막힌 것이 적지않았다. 눈동자는 마음의 거울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눈동자는 사람의 사상이나 감정의 움직임을 가장 선명하게 반영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의 정신적 특징은 오히려 얼굴의 다른 부위에 더 잘 나타나니, 눈에는 정신이 있고 입에는 감정이 있다는 속담이 있듯이, 입도 또한 전신을 할 수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2) 생활을 체험하는 “천상묘득(遷想妙得)”론을 제시함
대상을 묘사할 때 형상으로써 정신을 그려야 하는 것이라면 어떠한 과정을 거쳐야 대상의 정신을 관찰할 수 있는가? 고개지는 “생각을 옮겨서 묘를 얻는다(遷想妙得)”고 대답하였다 “천상묘득(遷想妙得)”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화가와 묘사 대상 사이의 주관과 객관의 관계를 제시했다는 것이다.
화가는 그림을 그리기 전에 먼저 묘사할 대상을 관찰하고 연구하여 대상의 사상과 감정을 깊이 이해하고 체득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생각을 옮기는 것(遷想)”이다 그리고 화가는 대상의 정신적인 특징을 점차 이해하고 파악하는 가운데 이를 분석하고 정련(精煉)하는 과정을 거쳐 예술적인 구상을 회득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묘를 얻는 것(妙得)”이다. 천상묘득의 과정은 곧 사유활동을 형상화하는 과정이다. 생활을 체험하는 이러한 방법은 인물을 관찰하는 데 적용될 뿐만 아니라 자연풍경과 동물들을 관찰하는 데도 적용된다. 고개지는 천상묘득의 난이로 회화에서의 소재표현의 난이를 구분하였다.
무릇 그림은 사람이 가장 어렵고 그 다음이 산수이며 그 다음이 개와 말이다 망루와 누각은 일정한 기물일 뿐으로서 그리기는 어렵지만 보고 좋아하기는 쉬운데 천상묘득을 기다리지 않는다.7)
인물의 사상과 감정은 복잡, 미묘하기 때문에 관찰하고 체득하기 가장 어려운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고개지가 산수화도 천상묘득의 범위에 넣었다는 것이니, 이는 매우 훌륭한 탁견이다.
이는 중국의 고대 산수화론이 태어나 싹틀 때부터 이미 자연주의 예술관과는 대립하여 대자연의 미를 재현하고 작가의 감정도 담을 것을 요구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고개지는 계화(界畫)8)중의 망루, 누각등과 같은 건축물은 생활체험의 범위에서 제외하였다. 그가 이와 같이 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즉 계화는 묘사대상이 건축의 규칙에 부합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리기가 어렵기는 하지만 그려낼 수 있고 또한 효과도 좋은데 천상묘득을 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당시 고개지는 정자와 누각 등의 건축물이 인물의 생활환경으로서 그려진 것이지 결코 건축의 조감도가 아니며 예술표현의 대상인 이상 생활체험의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아직 인식하지 못하였다. 고개지의 이러한 부당한 이론은 후대의 계화가(界畫家)들에 의해 부정되었다.
우리나라에 있어서도 초기 인물화는 대체로 고구려 고분벽화를 통해 살펴 볼 수가 있는데 주로 묘주(墓主)의 초상을 중심으로 하는 풍속화적인 요소가 그려졌다.
예를 들어 동수묘(冬壽墓)라 불리우는 안악3호분9)의 벽화에는 무덤의 주인공상으로 보이는 당시 인물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으며, 당시 귀족층의 생활상을 암시하기도 한다. 특징적인 표현으로는 이들 두 주인공이 주변의 다른 인물이나 사물에 비해 유달리 부각되어 있는데, 이러한 특징으로 보아 고구려인들은 원근에 따라서 사물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목적과 의도에 따라서 사물의 크기를 달리 표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특징들은 고대 이집트 벽화에서도 발견되는데 이는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물을 화면에 크게 위치하게 하고 주변 인물이나 사물 등은 화면 주변에 작게 배치하였다. 이 묘에서는 당시 연대를 알 수 있는 명문이 발견되었는데 이 명문에서 보인 영화13년(永和十三年)은 동진(東晋)의 연호로서 서기 357년이며 낙랑 옛 땅의 중국계 주민들이 해상교통을 통하여 중국의 동진과 연락을 가지고 동진의 연호를 쓰고 있음을 말하여주고 있다. 동수묘의 주인공인 동수는 326년(미천왕27년) 에 랴오둥에서 고구려로 건너온 무장이며, 357년(고국원왕 27)에 죽어서 안악 유순리에 묻힌 것이다.
서기6세기에 해당하는 고구려 고분 벽화 중기에는 풍속도가 유행하는데, 통구의 무용총(舞踊塚)10), 각저총(角低塚)11) 등이 이 시기에 속한다. 무용총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묘실의 동쪽 벽에 1~4명이나 되는 남녀가 대열을 지어 노래를 부르고 춤추는 장면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 민족이가무음곡(歌舞音曲)을 즐겼음을 짐작케 하는 장면으로써, 이 무용도에서 고구려 인들의 흥겨운 고갯짓과 율동이 화면에서 생생하게 느껴지며, 인물들의 의상에서 당시 복식의 형태를 가늠 할 수 있다. 각저총의 동쪽 벽에는 유명한 <씨름도>가 있는데 이는 커다란 나무 한쪽으로 역사들의 씨름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고구려 사람들의 놀이문화를 알 수 있게 한다. 오른 쪽의 수염이 난 사람은 심판이나 구경꾼처럼 보이며, 두 사람이 띠를 잡고 씨름하는 모습은 오늘날 씨름하는 모습과도 흡사하다. 그런데 이 씨름하는 사람들 중 한 사람은 매부리코에 눈이 부리부리한 서역 계통의 사람 모습을 표현 한 것으로, 당시 외국인과의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북쪽 벽에 그려진 주인공의 <실내 생활도>에서는 오늘날의 커튼처럼 화려한 장막이 쳐진 실내에서 귀부인 두명이 음식이 놓인 탁자를 각각 앞에 놓고 앉아 있는 모습으로 고구려 귀족들의 풍요로운 생활상을 단적으로 드러내 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풍속도는 고분벽화의 한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으며 인물의 표현방법이나 묘사력은 부족했다. 풍속도는 조선 후기 김홍도, 신윤복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 절정을 이루게 되는데, 그들은 이 풍속도를 통하여 당시의 인물상들을 매우 사실감 있고 정감 있게 표현하였다. 먼저 김홍도12)의 풍속화에서 보여 지는 인물들은 신윤복의 그림처럼 우아한 매력이나 사랑스러운 감정 같은 것은 느껴볼 수 없다. 그의 풍속화의 주인공들은 예쁜 기생이나 멋있는 한량이 아니라 얼굴이 둥글넓적하고 흰 바지와 저고리를 입은 평범한 서민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윤복의 그림보다 더 한국적인 정취를 물씬 풍기고 있다. 그의 <벼타작>이란 작품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는데, 농부들이 볏단을 통나무에 내려치며 타작을 하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일 하는 농부들의 역동적인 동작과 얼굴 표정에서 고된 노동의 피로감보다는 함께 노동요를 부르며 일하는 신명이 느껴진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 옆에서 갓을 비껴쓰고 담뱃대를 물고 비스듬히 누워 있는 양반의 모습은 그 당시로서는 자연스러운 풍경이었을 것이다.
반면 조선후기 풍속화에서 김홍도와 쌍벽을 이루는 사람인 신윤복13)은 소재의 선정이나 포착, 구성 방법, 인물의 표현 방법과 색을 쓰는 법 등에서 김홍도와는 큰 차이를 보인다. 김홍도가 소탈하고 익살맞은 서민 생활의 단면을 주로 다루었던 반면, 그는 한량과 기녀를 중심으로 한 남녀간의 애정을 다룬 풍속화를 주로 그렸다.
그리고 이러한 남녀간의 낭만적인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하여 매우 섬세하고 유연한 선과 아름다운 채색을 즐겨 사용한 까닭에 그의 작품은 매우 세련된 감각을 지니고 있다. 그의 작품 <월하정인 (月下情人)>에서 보면 늦은 밤 담 모퉁이에서 만난 한 쌍의 남녀를 소재로 다룬 것으로 어스름한 달빛 아래 한껏 차려 입은 남자가 초롱불을 들고 길을 재촉하고 여자는 쓰개치마를 둘러쓰고 다소곳한 모습으로 얼굴을 물들이고 있다. 배경이 간략히 묘사되어 있으면서도 이들의 감정은 어스름 달빛에 녹아 있는 듯하다. 신윤복 특유의 유연한 선은 부드럽게 날리는 도포 자락이나 갓끈의 묘사에서 뿐 아니라 날렵한 가죽신에서도 볼 수 있다.
더구나 옥색으로 코와 뒤축을 댄 남자의 가죽신과 녹색 도포 끈, 여자의 자주색 꽃신과 옥색 치마에 자주색 회장을 댄 옷 등 색감의 표현이 더할 나위 없는 세련미를 보인다. 특히 그의 풍속화는 당시의 살림살이와 복식 등을 사실적으로 보여주어 당시의 생활상과 멋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풍속화와 함께 신윤복의 사실주의적인 미의식을 엿볼 수 있는 그림은 바로 <미인도(美人圖)>(도판64)이다. 실제의 인물을 모델로 했을 것 같은 〈미인도〉는 신윤복의 뛰어난 묘사력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단아한 이마, 갸름한 얼굴, 다소곳한 눈빛, 앵두같은 입술, 좁은 어깨 등 조선 여인의 아름다움을 이상적으로 표현하였다. 양감 있는 짙은 검은 색의 가발(트레머리)과 노리개를 만지는 손이 단조로운 화면에 생기를 준다. 현대의 미인의 척도와는 다른 모습이지만 볼수록 아름다운 자태를 보여는 작품이다. 인물의 표현방법에는 초상화(肖像畵)나 자화상(自畵像) 또한 빼 놓을 수 없는데, 특히 동양에서의 초상화는 외형적인 유사함보다는 인물의 성격, 인품, 감정 등의 신사적(神似的) 표현을 중시하였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많은 어진(御眞)14)과 봉안도(奉安圖)15)들이 그려졌다. 자화상으로는 윤두서16)가 유명한데, 종이 바탕에 엷은 채색을 한 것으로 1710년(숙종 36년) 제작된 것으로 전하며 다른 자화상과는 달리 상용형식이나 표현기법에 있어 특이한 양식을 보이는 수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얼굴만 떠올라 있는 듯 화면 전체를 가득 메운 윤두서의〈자화상〉을 보면, 그의 풍모에 압도당하는 느낌인데, 가는 선으로 처리된 수염은 안면을 보다 부각 시켜서 예리하게 직시하듯 그려진 눈동자와 함께 강한 힘과 생기를 느끼게 하며 거짓없는 외모와 그의 정신세계(精神世界)를 솔직하게 드러낸 작품으로 동양인의 자화상으로는 최고(最高)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인간적인 내면 세계를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는 듯한 이 작품에서 그의 세심한 관찰력과 뛰어난 묘사력을 알 수 있다. 특히, 그 털끝 하나 소홀히 하지 않은 정기(精氣)어린 그의 선묘(線描)된 모습에는 사실(寫實)을 초월한 인간 본연의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첫댓글 얼마전 예술론 시간에 배운 강의가 생각나서 올려봤어요^^ 찬찬히 읽어보면 꽤 재밌답니다. 그리고 요즘 바람의 나라 덕분에 신윤복에 대해 공부할 기회가 있었지요. 신윤복 영상 자료 보면서 같이 보면 좋겠다 생각했는데,,,ㅡㅜ 컴맹의 한계,,,, ㅎ
고개지의 '전신사조'는 김동인의 단편 '광화사'에 나오는 솔거를 연상하게 한다. 추한 외모를 가져 두 번의 결혼을 실패한 사회적 부적응자이며 천재적인 예술인, 미인도를 그리고자 하는 열망에 한 소경여인을 만나 그림을 그리고 마지막 눈동자만 완성하면 되는 날 소경여인과의 하룻밤은 여인을 애욕의 눈빛으로 변하게 되어 실망한 솔거는 작품을 완성하지 못하게 되고 분노로 그녀를 죽이게 된다. 그녀가 쓰러지면서 먹물이 튀어 눈동자는 완성되지만 그 눈동자는 솔거를 원망하는 눈빛으로 결국 솔거는 광인이 되어 미인도를 들고 떠돌다가 죽게된다는 이야기. 예술적 완성은 모든 가치를 우선한다는 것인가. 현실과 이상, 예술인의 광기.
^^ 광염소나타 생각도 나네요. 무엇을 기준으로 둘 것인가의 문제는 현대를 사는 모든 예술이라 지칭되는 것들에 대한 근본적인 것으로 여전히 남아 있네요. 신윤복도 반 평을 떠돌았다는 것으로 봐서 방황이란 모든 욕망에 기초한 자기애의 가장 극단이란 생각도 들고 말이지요. 후우~ 오늘은 바람이 몹시도 찼답니다. 스산한 가을 날이예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꼼짝 못하고 박혀 있어야 할 상황이 될 듯 해요 열심히 책을 읽어야 겠다 생각중이예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