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언제나 그랬지만
공연이 끝나면 표면적으로 굉장히 즐거워......표면적으론."
결코 즐겁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충분히 즐거웠다.
어제밤에 정모 모임에 가서 술을 마셨다.
흐린 아침이 밝자 이젠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자리에서 일어섰다.
술과 잠에 살짝 데인 모양인지 비몽사몽.
잔뜩 지친 발걸음을 옮겨 돌아왔다. 비가 추적추적....
문제는 지친 발걸음 따위가 아니었다.
수천가지의 말과 생각이 자학이 되어 들끓었다.
껍질 안쪽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터덜터덜 ..돌아와서 아무도 없는 집에 쓰러져잤다.
잠에서 깨어나니 아직도 비가 내린다.
간 밤에 꾼 꿈에서도 비가 내렸다. 똑같은 비가.
마치 아직도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 것처럼....
뇌와 혀가 뒤죽박죽인 되어있다.
글을 써서 웅웅거리는 말마디들을 토해놓아야만
안정될 것 같아 지금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
정말 이상한 공연후기다. 아니 사실상 후기를 빙자한 일기.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이다.
어제처럼 즐거운 날이 또 있을까.
맛있는 밥도 먹고 그 좋아하는 술도 실컷 마시고
무엇보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수 있었으니깐.
반가운 사람들이랑 재밌게 놀기도 했구.
밤바람이 상쾌하지 못한 점이 흠이긴 했지만 정말 좋은 기분이었어.
....그런데 어째서 후기라는 글이 이 모양 이 꼴인지. 내가 생각해도 웃기네.
가볍게 맥주를 조금 마시다가 공연장에 들어갔다.
청량한 느낌의 오프닝 밴드 공연을 보며 볼이 아파졌다. 미소가 배어나와서.
참 부럽다.
이읔고 앨범의 인트로가 울리고...
드디어 한 개의 목과 열개의 손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
거인이다. 나중에 멘트에서 무대가 비어있다고...하셨는데 그다지.
처음 사운드홀릭으로 레이니선 공연을 보러갔을 때가 생각난다.
생각보다 작은 무대에 하얀 스크린이 내려져있고
이읔고 공연이 시작되자 하얀 스크린이 스르르~ 올라가는데
사람 발이 보였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정말??!!!" 이라고 꽥 소리를 냈었다.
믿겨지지가 않아서. 레이니선이 사람 형상으로 거기 서있다는 것이.
레이니선은 내게 항상 납작한 씨디나 웹에 떠돌아다니는 동영상파일이었는데.
게다가 ..거의 몇년만이다.
난 원래 이렇다. 상식으로 아는 사실도 잘 체감을 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래서 별 것 아닌 것에도 이상한 스펙트럼을 투영시켜 혼자 놀라곤 한다.
.....스크린이 올라가고 나서는 더 신기했다.
이 사람들이 레이니선이구나.... 마치 사람을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어라. 생각보다 작았다.
레이니선은 삼국지에 나오는 호걸들처럼 생겼을 줄 알았는데....사천왕처럼...
그치만 이후에 공연을 다니면서 역시 그 존재감에 압두되어
한번도 그 사람들이 작다고 생각해본적이 없다. 무대는 항상 조밀했다.
어제도.
무대 위에 올라온 거인들은 알 수 없는 기계들(악기)를 조물거리더니
이읔고 주술을 시작했다.
"돌이킬 수 없는"
시작곡으로서 더할 나위 없었다.
이 곡은 앨범의 곡 중에서 가장 감정의 농도가 짙은 곡이다.
진한 요리는 뒤에 맛보아야 한다는 고정관념 탓인지 신선하게 받아들여졌는데...
...좋았다.
김태진님의 기타와 차이님의 우울한 주술로 시작...
나머지 두 사람의 주술이 합류하여 공연의 초두부터 작렬한다.
그리고 바로 이러진 그 너머에.
감정의 과잉.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나와주어 오히려 어설픈 우울에 빠질 겨를이 없다.
처음엔 초장에 좋은 곡들이 다 쏠리는 것 같아서 공연후반에 김새는 거 아냐?
싶었는데.....음. 역시 공연을 거의 한 달만에 오다보니 잊고 있었다.
WOMAN에 있는 곡들은 모두 강렬하다. 한 곡조차 버릴 수 없다.
돌이킬 수 없는.으로 시작된 감정의 과잉은 교교히 공연 후반까지 이어졌다.
가끔 나즈막한 목소리로 이어지는 멘트는
편안한 의자에..잠 오지 않으신지...음악도 이렇고....운운이었는데
...
ㅎㅎㅎ. 한껏 주문을 걸어서 사람을 휘져어 놓을 땐 언제고.
나는 울뻔했다.
술이 조금 들어가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6월 18일 이후의 공연에 대한 공지가 없었기 때문에,
이것이 마지막 공연이라는 바보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공연 시작 몇분전에 황망히 달려가 도라지 한보루를 살 수 밖에 없었다.
.....
내가 슬펐던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다.
음악을 사람의 감정을 휘져어놓는 주술이다.
그러나 음악은 사람의 감정을 휘져어놓을 뿐이지 어떤 하나의 결과로 이끌지 않는다.
같은 사랑 노래도 듣는 이에 따라 어떤이에게는 기쁨을 이끌어내고
어떤 이에게는 저주스런 비참함을 이끌어내고...
레이니선을 아주 훌륭한 주술이다.
내장의 끄트머리 하나가 수면 위로 떠오른다.
처음 떠오른 내장은 분홍빛과 하늘색이 교묘히 섞여 예쁘다.
여기까지는 레이니선 본연의 주술의 색깔과 비슷하다.
그러나 주술에 걸려 멍~하니 있으면 하나 둘 더 깊은 뱃속에 있던 내장들이
하나하나 떠오르는데...
갈수록 거무튀튀하고 썩은 냄새가 나는 내장들이 연거푸 떠오른다.
그 썩은 냄새는 나 본연의 것이지 레이니선과는 무관하다.
애써 코를 막고 외면하려고 해도
애써 뇌가 내장에게
"야! 오늘은 즐거운 날이란 말야! 나랑 심장은 이미 한달전부터 오늘 하루는 뽀지게 행복하기로 약속했는데 이러기야? 꺼져버려!"
라고 다그쳐도 내장은 꿈적도 하지 않는다.
나의 썩은 냄새는 눈물이 되어 내게서 비집고 나오고 싶어한다.
막았다.
.....
두 곡의 신곡이 선보여졌다.
한 곡은...스프링이라고 했나? (용수철인지 봄인지?)
차이님의 저음 보컬이 반가웠다. 곡의 분위기도 좋았다.
귀가 아둔한 나는 처음 들어서 곡이 좋은지 어떤지 잘 모른다.
대게는 귀에 익어야 좋아지는데....드물에 처음 들어서 느낌이 참 좋은 곡들이 있다.
스프링은 후자에 속했다.
그 다음 신곡... f#song(?)은 전자에 속했다.
신곡이 있을거라곤 예상도 못했다.
김태진님이 게시판에서 짧게 신곡을 얘기하셨을 때 신곡이 이번 2집 앨범 곡들인 줄 알았다.
반갑다. 신곡.
그리고...
사실은 공연 가기 전에 약간 걱정을 했는데
잠깐 트러블이 있었던 예전곡을 하냐 안하냐의 문제.
물론 예전 곡을 한다는 소리를 듣고 나도 굉장히 붕붕~ 좋아했었다.
그러나 안 한다는 김태진님의 말을 듣고 별로 실망하진 않았다.
오히려 다른 팬들이 분개하지 않을까....공연장 분위기 괜히 이상해지는 거 아닌가 소심한 걱정을 했는데.
별로 그러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멘트.... 예전곡에 대해서 노이로제라는 표현을 쓰실만큼 시달리셨다니...
나도 포르노 바이러스 감염자이다.
언더 마이 스킨에 개슬램해서 어딘가 부러지고 싶다.
그렇지만..나의 생각은....
어디까지나 나의 단견인데.
팬은 뮤지션에게 그런 것을 강요할 권리가 없다.
물론 강요한 사람은 없지만... 압박이 되어 짓누른 것은 사실은 모양인 듯.
팬들의 요구에 전적으로 따라야 하는 사람은 엔터테이너지, 예술가가 아니다.
누구도 예술가의 영역을 침범해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같은 이유로 나도 크리핑 데쓰에 전율하는 인간이지만 메틀리카의 변신을 큰소리로 불평하거나 욕하고 싶지 않다.
나가노 마모루는 10년이 넘게 파이브 스타 스토리를 겨우 11권을 그리고 있지만...
빨리 그리라고 강요해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예술은 기술이 아닌 진심일텐데
그런 식으로 팬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생각된다.
그냥 하고 싶어서, 혹은 하기 싫어서-이것으로 모든 정당성이 성립되는 것.
아닐까.
팬인 나는 그냥 아쉬운 마음을 감수하거나....혹은 뒤돌아서버리면 된다.
어떤 것도 바래선 안되고 그냥 하늘만 멍하니 쳐다보면 환호성을 지르고 기뻐하고 혹은 아쉬워하고...이런 것.
내 생각에 동조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고, 그럴 필요도 없겠지만...그냥 내 생각이다.
단 한 가지 감히 바라는 것이 있다면
죽지 말아달라는 것 뿐이다.
육신의 죽음보다는 혼의 죽음을 염려함인데...
무슨 색깔로 천변만화를 해도 좋으니 음악을 해주었으면 한다.
재인박명이라고...
....부서질 것만 같다. 두렵다.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
언젠가는 시야에서 사라질 것 같다. "다시"...
언젠가는 더 이상 물이 나오지 않는 우물이 되어 메말라... 사람들의 입끝에서 자취를 감추고... 언젠가는.....
좋고 아름다운 것일수록 부서지기 쉬운 것이 아니었나.
한달에 한번 꼴로 이렇게 공연을 하고 나는 또 그곳에서 내장을 질질 끄집어내가며 울고...이런 "행복"(이것은 확실히 행복이다)에도 종결점이 있을 것이다.
...우울해진다. 사실 이런 재수없는 걸 글로 굳이 쓸 필요는 없는데. 젠장....
나 자신의 편익(글로 뱉어내면 좀 사그라든다)을 위해 게시판을 더럽히는구나.
멘트에서 차이님은 예전곡을 하지 않은 이유를 체력 탓이라 하셨다.
밴드의 감성 변화 탓이라 예상했었는데 실로 의외구나.
체력이 정말 이유의 100% 인지는 의문이 가지만...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저 받아들이는 수 밖에.
아쉽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정도는 받아들일 수 있으니까.
공연이 끝나고 밖으로 나왔다.
반가운 얼굴들이 잔뜩이다. 사랑이 언니랑 적멸님, 나몬스터 언니...
정모는 즐거웠다.
첨 보는 분들도 계셨지만 레이니선팬-이라는 카테고리의 위력이.
밤이 참 밝다. 서울은 불빛이 많은 도시라서 그런가보다.
역시나 반겨주는 불빛은 술집의 불빛 뿐인지...
이례적인 것 같은데... 정모 자리 옆 테이블에 레이니선이 있었다.
공연장아닌 곳에서 레이니선을 보니 열라 황망스럽다.
주술을 마치고 무대에서 내려온 거인은 어느새 사람으로 변신해있었다.
신기해라.
어...작네. 말랐다. 눈코입있고 뭔가 마시고 있는 그냥 사람이다.
게다가 차이님은 내가 거의 들어본 적이 없는 목소리(!)를 쓰신다.
그래도...겉보기엔 그렇지만 정체가 사람한테 주술을 거는 무서운 거인인 것을 뼈져리게 기억하니깐....역시 무섭다.
...그래. 사람이 있을 땐, 정모를 할 땐 정말 벙긋벙긋 웃음이 절로 나오고
행복하고 즐거웠다.
문제는 사람들 곁에서 떨어져 나와
배 밖으로 추욱 늘어진 오물들을, 썩은 내장을
다시 밀어넣고 꿰매어야 하는 순간이다.
청주에는 아직도 비가 온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비 속에서 썩은 내장을 질질 끌며 학교를 배회하는 것은 괴롭다.
비를 사랑했는데... 하루 종일 내리는 비는
도저히 현실처럼 느껴지지않는 어제와 오늘을 잇고 있다.
차라리 해가 떠주었다면 꿈은 꿈대로 고이 접어 서랍안에 모실텐데...
......미안하네요.
또 너무 길어져서 ;ㅁ;
카페 게시글
REVIEW
618 레이니나이트.....의 후기를 빙자한 일기. 극히 삿된 넋두리.
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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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6.19 21:26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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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울지마셈
그날 나는 취해버려서 다들 챙겨보지도 못하고 왠지 죄송하네요..
락티는 입어 보셨습니까? 체격이 크다랗지는 않으시던데, 펼쳐본 순간 속았다! 그러신 건 아니지요? 그거 어느어느 화장실에 두고 나왔었어요. 애환이 많은../저도 후기를 써야지 하고 있는데 바쁘구만요.
줄여 입을 거였어요. 맨슨티도 줄여 입고 있고. ㅋㅋㅋ 손재주가 좋은 친구를 두었기에^^
공연장이 아닌곳에서 올라이즈를 본 나의 심정은 두근반 세근반. ;ㅁ; 락킹 말 믿고 저 사람 술깨면 기억 못할거다 라는 전제하에 꼴값떨었는데 제발 저를 기억하지 말아주세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