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에는 한자로는 다르지만 한글로는 같은 이름인 두 개의 왕릉인 영릉이 있다. 하나는 조선시대 최고의 성군으로 추앙받고 있는 4대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를 모신 영릉(英陵)이고, 다른 하나는 제17대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仁宣王后 張氏)를 모신 영릉(寧陵)이다(사적 제195호). 세종의 능은 합장릉이지만, 효종의 능은 쌍릉이다.
예부터 왕릉은 임금의 하루 순행 길에 알맞도록 한양에서 100리 안에 설치하는 것이 법도였으나, 한양에서 여주까지는 180리길이나 되는 먼 길인데도 남한강 뱃길로는 100리가 된다는 궁색한 구실을 붙여서 이곳에 왕릉을 설치한 것은 이곳이 천하의 명당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원래 1450년 세종이 승하하자 경기도 광주(현재의 서울 서초구 내곡동) 대모산의 아버지 태종의 헌릉 서쪽에 모셨던 능은 흉지라고 하여 세조의 유언에 따라 1469년(예종 원년) 이장할 때, 파헤쳐 보니 장사한지 19년이 지났는데도 전혀 육탈이 되지 않고 수의도 썩지 않은 채 물속에 잠겨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광주 이씨의 선산이었던 이곳에 왕릉을 옮긴 뒤에는 왕위에 오른 세조의 큰아들 의경세자(덕종 추존)의 둘째아들 성종이 25년 동안 재위하면서 선정을 베푼 임금이 되었으며, 조선왕조는 영릉의 발복으로 국운이 백년은 더 연장되었다는 소위 ‘영릉가백년(英陵加百年)’의 천하길지라는 말이 널리 유행했다.
본래 도교의 음양오행설과 불교의 선근공덕사상(善根功德思想)을 기반으로 하여 형성된 풍수지리설은 땅에 관한 이치, 즉 지리를 체계화한 주역(周易)과 결합하여 ‘길한 것을 택하고, 흉한 것을 피하는(追吉避兇)을 목적’으로 삼는데,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풍수지리설은 지리학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중국 동진의 곽박(郭博 : 276~324)이 장서(藏書)에서 처음 주장했다고 하는 풍수지리설은 나말여초 한반도에 수입된 이래 ‘살아서는 살기 좋은 명당을, 죽어서는 망자와 후손에게 복을 주는 길지’를 구하는 수단으로 인식되어 현재까지 유행하고 있다.
영릉을 찾아가는 길은 서울 강남터미널이나 동서울터미널에서 여주행 시외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영릉행 시내버스로 갈아타면 되지만, 자동차로는 중부내륙고속도로 여주나들목을 빠져나와 여주시청 방향으로 37번 국도를 따라 영릉 방향 표지판을 따라가면 된다. 대부분의 왕릉은 입구에 관리소 하나만 있는 정도이지만, 세종의 영릉은 넓은 주차장이 잘 꾸며져 있을 뿐만 아니라 입장료 500원을 내고 경내로 들어서면 왼편 세종대왕기념관인 세종전의 세종의 어진을 비롯하여 당시에 발명한 과학기구, 악기류, 간행된 서적들과 야외전시장의 해시계, 천상열차분야지도, 자격루, 관천대, 측우기, 혼천의, 간의 등 15점의 세종 시대의 과학기구들, 그리고 서쪽으로 약700m쯤 떨어진 효종의 영릉까지 한꺼번에 관람할 수 있다.
능의 출입문인 훈민문에 들어서면 잡귀의 출입을 막는다는 홍살문을 지나 T자형의 정자각(丁字閣)에 이르게 되는데, 정자각 동쪽에는 수복방과 비각, 서쪽에는 제사를 준비하는 수라간이 있는데, 영조 21년(1745)에 세운 비각에는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약력, 그리고 능을 옮긴 내력 등이 적혀 있다. 나지막한 동산 같은 봉분은 12면으로 만든 돌난간을 돌렸으며, 다른 왕릉과 달리 병풍처럼 에워싼 병풍석 대신 난간 석을 받치고 있는 동자 석주에 한자로 12지(十二支)를 새겨 방위를 표시하고, 능 앞에는 합장릉임을 알 수 있도록 2개의 혼유석과 능을 밝히는 장명등을 세웠다. 조선왕릉 중 최초의 합장릉인 영릉의 좌우에는 망주석을, 능침 주변에는 돌로 만든 양과 호랑이를 좌우로 서로 엇바꾸어 두 쌍씩 8마리가 밖을 향하여 능을 수호하는 형상으로 배치하고, 봉분의 동·서·북 3방향에 곡담을 둘렀다. 봉분 앞 한층 낮은 단에 왕을 호위하는 문인석과 무인석 2쌍씩을 세우고, 문·무인석 뒤에는 각각 석마(石馬)가 있다.
1397년 태종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세종은 1418년 세자 양녕이 폐세자 되자, 22세에 왕위에 올라 54세로 승하할 때까지 31년간(1418~ 1450) 재위하면서 한글창제, 북방개척, 대마도 정벌, 측우기 등 수많은 과학기구의 발명, 각종 서적의 편찬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세종 28년(1446) 소헌왕후가 먼저 죽자 경기도 광주에 있는 태종의 헌릉 서쪽에 능을 만들어 동쪽은 왕비의 능으로 하고 서쪽은 자신의 능으로 삼았는데, 당뇨병, 안질 등 수많은 잔병에 시달리다가 1450년 승하하자 이곳에 묻었다. 당초부터 많은 사람들은 그곳은 풍수지리상 길지가 아니라고 했지만, 세종은 ‘부모의 묘소 부근보다 더 좋은 명당이 어디 있느냐?’며 지관과 신하들의 말을 뿌리치고 국조오례의에 따라 능을 만들어 조선전기 왕릉배치의 기본이 되었으나, 아들 문종이 재위 2년 만에 39세로 죽고, 손자 단종은 계유정난으로 폐위되었다가 17세에 사사되고, 세조는 52세에 승하하는 등 19년 동안 무려 4명의 왕이 바뀌게 되자 세조의 유언으로 아버지 세종의 능을 명당인 여주로 이장하도록 했다. 이때 사방 10리 안의 묘소들은 모두 강제 이장되었으며, 세종은 왕비와 합장하게 되었다.
효종릉 역시 1659년 효종이 죽자 태조의 건원릉(建元陵)이 있는 경기도 구리시 서쪽인 동구릉에 모셨지만, 석물이 허물어지고 틈이 벌어지는 등 좋지 않은 일이 생기자 14년만인 1673년(현종 14) 지금의 영릉으로 이장했는데, 정작 능을 파헤쳐보니 너무 깨끗해서 의론이 분분했고, 마침내 당론으로까지 번져서 영릉도감의 책임자들이 면직되기도 했다.
능을 이장한 이듬해 효종의 왕비 인선왕후가 죽자 효종릉 뒤에 동원상하릉(同園上下陵) 양식으로 능을 조성했는데, 왕비의 무덤을 앞에, 왕의 무덤을 뒤로 만든 것은 풍수지리상 왕과 왕비의 무덤을 좌우로 놓을 경우에 생기가 왕성한 정형을 비켜가기 때문이라고 한다.
세종의 영릉은 묘역이 크고 화려한 반면에 효종의 영릉은 작지만 조촐하면서도 차분한 느낌을 주는데, 효종의 쌍릉에 들어서면 숲속 나무사이로 남향으로 지은 재실로 이어지는 길 중 참도 중간을 가로질러 흐르는 물 위에 금천교를 만든 것은 이곳의 산과 계곡의 산수를 절묘하게 조화시켰다는 생각이 든다. 효종릉에서 아래를 바라보면 왕비의 능과 그 너머 정자각이 오른편에 보이는데, 능선이 유난히 길지만 인위적인 능선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길게 뻗은 지형인 것을 알 수 있다.
1619년(광해군 11)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을 겪은 인조의 둘째아들 봉림대군으로 태어난 효종은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동생 인평대군과 함께 강화도로 피난했다가 인조가 삼전도에서 항복하자, 형 소현세자, 척화론을 주장했던 삼학사 등과 함께 청나라에 끌려갔다. 1645년 2월 소현세자가 먼저 귀국한 뒤에도 청나라에 머물러 있다가 그 해 4월 세자가 급서하자, 5월에 귀국하여 세자로 책봉되었다가 1659년 왕위에 올랐다.
영릉은 2009년 6월 조선왕조 40기의 왕릉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일괄 지정될 때 세계문화유산이 되었고, 풍수지리설을 연구하는 이들의 필수코스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