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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들의 자질을 통렬하게 비판한 책. 네 아이를 키우는 엄마이자 저널리스트인 저자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면서 속된 말로 교사들에게 열 받은 사연을 속속들이 적나라하게 이야기한다. 우리나라의 교육 현실과 비교하면서 읽으면 한층 더 의미심장하면서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
▣ 저자 로테 퀸(Lotte Kuhn) : 네 아이의 엄마이자 저널리스트이며, 현재 베를린에 살고 있다. 그녀는 어머니가 교사인 가정에서 자라났다. 하지만 여덟 살에서 열여섯 살까지 네 아이들을 키우며 직접 경험한 학교 교사들의 무능력, 나태안일, 냉소주의, 무관심을 더 이상 두고만 볼 수 없어, ‘로테 퀸’이라는 가명으로 이 책을 펴냈다(퀸은 독일어 ‘대담하다’란 단어에서 따온 것이다). 그녀가 가명을 쓴 것은 현재 김나지움(중고등학교)과 초등학교에 다니는 네 아이에게 피해가 미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책은 출간 직후부터 독일 사회를 뒤흔들며 엄청난 논란과 소동의 진원지로 떠올랐다. 1개월만에 독일 아마존서점 종합 1위에 오를 만큼 그 파장은 강력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베를린의 학교들에서는 교사들에 대해 이토록 심하게 공격을 퍼부은 주인공 찾기 대소동이 벌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여교사가 반 아이들 앞에서 이 엄마의 막내아들 코앞에다 그녀의 뒷모습이 찍힌 잡지 사진을 의기양양하게 들이댔다. 그러자 아이는 저도 모르게 외쳤다. “그거 우리 엄만데!” 큰 실수를 저지른 막내아들은 집으로 돌아와서는 울면서 자기가 엄마를 배신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녀의 본명은 게를린데 운페어작트. 그렇게 해서 우연히 정체가 드러난 그녀는 그 덕분(탓)에 더욱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도 지지자들과 비판자들 사이에서 갈수록 커져만 가는 소란과 논쟁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이름과 얼굴이 언론에 공개된 이후 직간접으로 가해지고 있는 유형무형의 온갖 압박과 고통을 네 아이와 함께 꿋꿋이 견뎌내면서.
▣ 역자 조경수 : 연세대학교 독어독문학과와 한국외국어대학교 통역대학원을 졸업했다. 현재 번역가이자 외국 책을 우리나라에 소개하는 저작권 에이전트로 일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크레이지』,『빈둥빈둥 투닉스 왕』,『우리 시대의 아이』,『왜 사랑인 줄 몰랐을까』,『나쁜 여자 보고서』 등이 있다.
▣ Short Summary : 네 아이의 엄마인 저자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면서 교사와 교육현장을 체험하고 느낀 문제점을, 철저하게 학부모의 시각으로 담아냈다. 권위적인 교사들의 모습에 절망하는 학부모들, 독단적이고 무절제하고 무관심한 교사들에게 매일매일 무력하게 내맡겨져 있는 아이들, 그리고 경직된 상황과 동료들의 무지에 절망하는 교사들. 그들의 불만에 가득 찬 목소리를 들려준다. 속된 말로 선생들에게 열 받고 분통 터진 사연을 직설적이고 적나라하게 속속들이 까발리고 있다. 저자가 말하는 나쁜 교사의 7가지 유형은 이렇다. ‘의무보다 권리를 생각하며 불평불만을 늘어놓는다. 남의 탓만 하며 자기비판을 할 줄 모른다. 무엇하나 제대로 가르치는 게 없다. 마음 내키는 대로 막말을 한다. 학부모들을 교육 파트너가 아닌 막일꾼으로 부려먹는다. 아이들을 싫어한다. 학교라는 철옹성 속에 안주한다.’
신랄하고 위트 있는 내용 때문인지 이 책은 출간 이후 독일 교육계, 더 나아가 독일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키며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독자의 의견이 극과 극으로 갈렸다. 학부모를 주축으로 하는 지지자 집단은 절대적으로 공감을 표시한 반면, 교사가 주축인 반대자들은 허위 사실과 편견에 가득 찬 책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학부모들이 이 책에 공감하게 되는 이유는 교사와 학교제도에 대한 불만이 독일의 상황과 너무나 닮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공부는 학교에서 하는 것이니 아이가 특별히 학과 공부를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따로 학원을 다닐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가진 어느 학부모의 신념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면서 깨어진다. 아이들의 수업과는 상관없는 행정업무에 시간을 보내는 선생님들. 그리고 제대로 수업을 따라오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부과되는 인격적인 모욕과 과도한 벌은, 윽박지름으로 표현된다. 아이들의 발랄한 창의력은 전체 학급의 정숙과 질서정연한 운영이라는 원칙에 위배되어 “주제파악이나 하고 가만히 있어”라는 말을 듣는다. 보이지 않는 교사의 폭력은 아무런 대책 없이 참아내야만 한다.
공교육에서 배운 기초가 튼튼해야 학원에서 가르치는 심화 학습도 소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 사교육전문가는 상담결과 나타난 현실을 이렇게 전한다. 조금만 긴장을 늦추고 연구를 게을리 하면 금세 이류로 떨어지고 생계에도 위협을 받는 사교육 강사들에 비해, 공교육 선생님들은 거의 변화 없는 지도법과 내용으로 몇 년 이상을 버틸 수 있다는 것이다. 무난한 교육을 하고 그 성과도 책임도 묻지 않는 공교육의 상황은 그들의 열정과 잠재 능력을 잠재우기에 충분하다. 극심한 경기 불황 속에서 교직이 최고의 인기 직종으로 떠오르면서 수많은 인재들이 몰리고 있지만, 정작 현장에선 별다른 교육적 성과를 내지 못하는 교사의 자존심과 사기는 땅에 떨어진 지 오래다. 교육에 대한 사명은 간 곳 없고 정년이 보장된 안정된 직장으로서의 개념만이 남은 학교는 지금 무기력증에 빠져 있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말라는 전통적인 불문율이 버젓이 살아있는 한국의 상황에서, 이 책의 출간 역시 우여곡절이 많았다. 하지만 편집자는 이 원고를 성원해준 학부모들 때문에 과감히 밀어 붙였다고 한다. 독일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학부모들도 교사와 학교제도에 대한 불만이 상상 이상으로 크기 때문일 것이다. 학교교육에 문제가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 책을 읽으며 속이 시원해지길 바라는 역자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정말 허심탄회하게 우리 교육계의 현실과 문제점을 짚어보고 토론하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누구를 위해서인가? 저자는 말한다. ‘학교에서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사회, 그리고 세상의 다른 모든 사회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보물, 바로 우리의 아이들’이라고.
발칙하고 통쾌한 교사 비판서
- 네 아이의 엄마가 감히 교사들에게 드리는 레드카드 한 장 -
로테 퀸 지음
언제나 시작은 쉽다: 입학 첫날
멀리서 들려오는 내 학창시절의 메아리
많은 사람들이 학창시절에 대해 뒤죽박죽의 기억을 갖고 있다. 어른이 된 후 자기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면 그 옛날 자신을 세세하게 억눌렀던 사건들과 괴로웠던 기억들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또렷하게 다시 떠오른다. 어느 날 누군가 내 연필깎이를 훔쳐 간다. 돌려받으려고 하자 상대가 내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나는 비명을 지른다. 부당하게도 선생님은 죄가 없는 나를 혼낸다.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내 말은 전혀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어느 날 아침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식탁으로 슬금슬금 다가간다. 엄마는 입을 꼭 다문 채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지켜본다. 전날 저녁 학부모 상담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선생님이 나에 대해 한 말이 엄마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다.
오래된 두려움들이 갑자기 우울할 정도로 생생해진다. 이제 자신감 있는 어른이 되어 담임선생님에게 해명을 요구하러 학교에 간다. 그런데 학교에 들어섰을 때 복도의 냄새가 살짝 풍겨 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다시 어깨를 움츠리고, 그것이 정당하든 부당하든 책임을 추궁당할 것이 두려워 안절부절못하는 어린아이로 돌아가고 만다. 학부모인 우리는 물론 아무런 내색 없이 나이 든 여선생님의 눈에서 인자하고 선한 품성과 흔들리지 않는 정의감의 흔적을 찾고, 화장실 등의 시설을 찬찬히 둘러본다. 입학 첫날, 교실 벽에 붙어 있는 학생들의 멋진 그림, 많은 장난감과 귀여운 아이들, 친절한 여선생님에게로 자기 아이의 관심을 돌리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마음 밑바닥에서는 교사들에 대한 의심과 불신이 계층과 나이를 초월하여 우리를 하나로 만들어준다. 누구나 괴팍하고 불공평하며 가학적인 교사들의 행태를 경험해봤기 때문이다.
학교는 멋질 수 있다, 좋은 교사들만 있다면
6년 전 맏아들 요하네스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나는 내가 받았던 주입식 교육보다 훨씬 지적으로 보이는 새로운 학습법이, 아이들에게 적극적이고 지속적인 지식욕을 자극하기를 기대했다. 공부를 강요하는 대신에 이해에 대한 즐거움을 일깨우는 것, 그게 내 바람이었다. 내가 이런 희망을 품은 데에는 아주 마땅한 이유가 있었다. 아이들이 입학하기 전 몇 년 동안, 인간이 매우 강한 호기심과 학습능력을 타고난다는 사실을 잘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학교 가기 전에 아이들은 곧잘 이런 질문을 던진다. “있잖아, 엄마. 달이 완전히 메말랐고 돌투성이라면서 어떻게 빛이 나는 거야?” 그런데 그로부터 몇 년 뒤 학교를 가고 난 후, 지리 선생님이 우리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이웃 행성들이 무엇이냐고 묻자 아이들은 경멸하듯 콧방귀를 뀌었다고 한다. “저 위에 있는 것들의 이름이 뭐든 나랑은 아무 상관도 없잖아요.” 왜 아이들이 이렇게 변할까?
릴리엔바이스 초등학교에서는 매년 한 번씩 우렁차면서도 점잖은 박수갈채와 함께 학생들의 공연이 시작된다. 각자 이국적인 새로 분장한 아이들이 다른 새들의 무리에 합류해, 지배적인 규정에 복종하고 자신의 개성을 버릴 각오를 하는 즉시 화려한 개체에서 평범한 집단의 일원으로 진급한다. 그 극락조들은 웅덩이에서 기어 나와 새들의 활기찬 활동을 관찰하는 늙은 두꺼비로부터 지도를 받는다. 이런 내용의 공연을 위해 적극적인 어머니들은 의상 준비에 많은 비용과 노력을 투자하면서 말한다. “제발 눈에 띄지 말고 수수하게 무리에 끼어 같이 날아다니고, 가끔씩만 살짝 빛을 내라. 하지만 절대 다른 새들이 질투할 정도로 빛을 내지는 마라.” 연극에서처럼 획일화되고 있는 교육을 보며, 아이들을 학교와 공무원 신분의 교사들에게만 맡겨놓아서는 안 된다는 통찰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내가 조금만 더 용감하다면 모든 획일주의자들의 원형인 프로크루스테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의 이야기를 초등학교 연극에 맞게 각색하자고 제안할 것이다. 프로크루스테스는 지나가는 나그네를 온갖 감언이설로 꼬여 집으로 유인한 뒤 붙잡아 침대에 눕히고는, 나그네의 키가 침대보다 작으면 딱 맞을 때까지 잡아 늘이고, 침대보다 길면 침대에 딱 맞게 몸을 잘라버린다. 전체 교육제도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같아서, 아이들은 그 안에서 사이비적인 교육 행위에 따라 획일화된다. 영특하고 활기 넘치는 아이가 통계적 평균치에서 벗어나면 특이한 아이로 간주되어 평균치와 같아질 때까지 교육적 조치의 세례를 받고, 발달 수준이 기준치에 미달인 아이들은 엄청난 보살핌을 받으며 상급학교로 보내질 때까지 계속 침대에 맞게 늘여지게 되는 것이다.
부모들이 교사에게 바라는 것은
많은 부모들이 지적이고 독창적이고 섬세한 자기의 자녀가 학교에 간 후 더 이상 이렇다 할 일을 해내지 못하고 불안에 시달리는 것을 경험한다. 곧잘 불만을 털어놓고 때때로 큰 소리로 분노를 표출하는, 열의 없고 불만투성이인 학생으로 변하는 것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아이들은 돌연 말수가 눈에 띄게 줄어든다. “학교는 어땠니?”하고 물으면 “좋았어요.”라는 규격화된 대답이다. 나머지 말은 매일 숙제 때문에 고생하고, 선생님이 꼭 따르라고 한 지시들이 담긴 수많은 통지문을 읽고 처리하느라 파묻혀 버린다. 이런 아이들을 보며 부모들은, 처음에 호기 있게 밝혔던 포부를 무엇하나 제대로 실현시켜주지 않는 사람들이 대표로 있는 기관에 자녀를 맡겨야 한다는 상상을 하면 겁이 덜컥 난다.
나는 납세자의 엄마로서 초등학교라는 기관에서 내 아이가 일기와 쓰기, 셈을 배우기를 기대한다. 교사가 내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기대한다. 아이가 기초를 충분히 익혀, 6년간 학교를 다니고 나면 읽고 쓰는 능력을 100퍼센트 갖추고, 장래에 아이에게 무슨 일이 닥치든 지속될 문화기술(좁은 뜻으로는 읽기․쓰기․기초 연산능력을 말하나, 넓은 뜻으로는 채집․수렵부터 문학․미술․음악을 거쳐 커뮤니케이션과 정보통신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많은 기술과 활동을 일컫는다)의 기초도 세웠으면 한다.
부모들이 교사에게 바라는 것은 이런 것이다. 자신의 일에 능숙하여 수업시간에 필수적인 기본 지식과 기능을 전달하는 것, 엄격하든 그다지 엄격하지 않든, 그것은 사실 아무래도 상관없다. 중요한 건 교사가 아이를 호의적으로 존중하며 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문어(文語) 취득과 기본 연산, 읽기 능력에서 아이의 발전과 퇴보를 교사의 개인적 호감, 그날의 컨디션, 기타 심적 상태를 배제하고 전문가다운 공정성을 바탕으로 평가했으면 한다. 또한 중요한 건 교사가 사적인 이유로 자주 결근하지 않는 것, 이런저런 고민으로 괴로운 나머지 아파서 몇 주 씩 침대에 누워 있지 않는 것이다. 나는 자신의 일을 잘 하는, 무엇보다도 즐겁게 하는 교사를 원한다. 그러라고 세금을 내고, 매일 아침 정각 여덟 시에 푹 자고 일어나 든든히 먹고 깨끗이 차려입고 필요한 학용품을 갖춘 아이를 학교 정문에 데려다 놓는다. 그러라고 교사는 국가에 채용되며 안정된 직장과 많은 특권을 갖게 되는 것이다.
학교에서 새로운 것은 없다: 교무실
거꾸로 된 학교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학습하고 있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이러한 사실이 전혀 이해 받지 못한다. 어떤 아이는 지도가 필요하지만, 어떤 아이는 그저 경청하는 것이 최선의 학습법이다. 어떤 아이들은 새 단어를 배울 때마다 탁월한 암기력을 발휘하지만, 어떤 아이들은 철자를 대충 건너뛸 때 더 쉽게 배운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위에서 수줍은 성격의 아이는 조별로 공부해야 할 때 난감해 할 수밖에 없다. 수업시간에 가만히 있지 못하고 돌아다니는 아이는 리탈린(주의력 결핍, 과잉행동장애의 치료에 쓰이는 중추신경자극제)을 처방 받는다.
아이들은 저마다 다르다. 그런데도 학교의 교사와 학생 간에는 명령과 규정만이 지배할 뿐, 신뢰할 만한 전문성을 바탕으로 하는 교육적 책임감 같은 것은 (아마도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학교에서는 교수 활동에 대한 기준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어 무엇을 성취해야 하고 어떻게 성취해야 하는지, 결국 얼마만큼 성취되었는지 이 모든 것이 교사의 사적인 문제이며 그의 판단에 맡겨진다. 학교라는 기관을 통틀어 개인적으로 아이들 개개인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선언하는 교사는 거의 없다.
진짜 학교 낙오자는?
교무실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교육 실패의 책임을 가정 교육 실패, 사회적 방임, 사춘기의 정체성 문제, 텔레비전 혹은 경기 불황탓으로 돌리는 주장들이 횡행해왔다. 아이들 모두 입학 첫날에는 희망이 넘치고 호기심이 가득해서 학교 생활을 시작했는데도 말이다. 학교 문제가 발생하면 교사는 학생을 욕하고 부모를 탓하거나 모든 것을 타락한 교육정책과 위협적인 자금 부족, 교육 행정당국에서 쏟아져 나오는 바보 같은 명령들의 탓으로 돌리기 전에, 제일 먼저 자기 자신에게 이런 점을 물어보아야 한다.
물론 학생들이 저지를 수 있는 일체의 나쁜 행실과 비참한 실패의 이유가 항상 교사에게만 있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교사는 그 이유를 자기 자신 안에서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좋은 교사가 아니다. 그러나 교사들은 그것을 받아들이기를 완고하게 거부한다. “대체 어떻게 이성적인 수업을 하란 말이야?” 교사들은 독선적인 포즈로 자신에게 맡겨진 아이들을 과잉행동 아동과 편식 아동, 행동장애 아동, 부잣집 망나니, 난독증 아동이 뒤범벅된 무리라고 판정한다. 타인의 잘못을 보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 유일하게 정말로 교육적인 가치가 있는 기본 태도를 교사 집단에서 찾아봤자 헛수고다.
교사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에 대한 전문적이고 구속력 있는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결과가 낳는 좋은 교사와 나쁜 교사의 편차는 점점 커진다. 그러니 훌륭한 교사를 만나려면 항상 상당한 행운이 필요하다. 이런 상황에 가장 먼저, 그리고 직접적으로 시달리는 것은 학생들이다. 학생들은 인생에서 가장 예민하고 민감한 나이에 예측불허의 권력을 자랑하는 변덕스런 교사들의 손에 맡겨진다. 수업에서는 교사가 선호하는 것들이 다뤄진다. 그들은 당일 컨디션과 취향에 따라 행동하고, 때로는 자제력을 상실하거나 아예 무관심한 표정을 짓는다. 미꾸라지 몇 마리가 물을 흐리는 것이라고?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 해고 불가능한 공무원 신분이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거나 해명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왜 교사가 되었을까
교사, 세상에서 가장 이상한 직업
교사는 예로부터 보호받는 사회적 환경에서 살고 있고 거의 한 번도 그곳을 떠나지 않기 때문에 야간 근무나 교대근무, 하루아침에 해고당하는 냉정한 직업의 현실에 무지하다. 그들의 직업적 유연성은 정신적 지평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수십 년 전에 절대 다른 문과 바꿀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 들어섰던 학교 정문에서 끝난다. 그는 그 안에서 반 아이들과 바깥세상의 삶에 등을 돌린 채 칠판에 붙어 일한다. 새장 안에서는 자기가 한 일로 평가받아야 하는 현실세계의 요구가 들어설 자리가 많지 않다. 별 큰 위험 없이 가족을 부양하고 위기에도 안전한 직업은 (거의) 학교 밖에 없다.
신문에 교사직이 보수가 좋은 일자리라는 기사가 실리기라도 하면 교사들은 큰 소리로 개탄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버릇없는 자식을 돌보는 이런 끔찍한 직업을 가질 사람이 자기들 말고는 없을 거라고 한탄한다. 교사들은 또 학교에서 하루를 버티기 위해서는 신체적, 정신적 부담을 견디는 능력이 평균 이상 되어야 한다는 말도 즐겨한다. “멍청한 아이들을 상대하고 싶지 않아서 떠나고 싶다”는 여교사도 있었다. 왜 하필이면 아이들을 싫어하고 아이들에게 다가갈 마음도, 능력도 없는 사람들이 굳이 교사가 되는지 몹시 궁금할 따름이다. 어떤 직업의 요구 사항을 충족시키기 위해 우리는 어디에서나 그에 합당한 자격을 미리 갖춰야 한다. 만약 난독증(難讀症) 환자가 기자가 되고 싶어 한다면 다급히 말려야 하지 않을까?
교사는 가르치지 않는다, 다만 반복할 뿐
교사들은 성취라는 걸 잘 모른다. 반대로 아이들은 학교에 처음 입학할 때 성취욕에 불탄다. 무턱대고 뭔가를 배우려고 안달한다. 그럴려고 학교에 온 것 아닌가. 그러나 초등학교 교사들은 아이들의 능력을 철저히 과소평가하는 바람에 아이들이 처음 학교에 들어와서 보여주는 이런 강렬한 호기심과 열의를 보는 눈이 오래 전에 흐려졌다. 솜처럼 푹신한 새장 속에 갇힌 채 날마다 아이들에게 인생에 대해 뭔가 가르쳐줄 최고의 기회를 그냥 흘려보낸다. 배울 계기는 넘칠 정도로 많이 있다. 뭔가를 배울 적당한 순간들은 언제 어디서나 존재한다. 라디오를 듣고 책을 읽고 다른 사람의 대화를 우연히 듣고 음악을 연주하고 뭔가를 만들고 요리를 하는 등의 모든 것이, 정말 모든 것이 호기심에 새로이 불을 붙여줄 수 있다. 그런 학습 계기들은 저절로 생기지만 눈을 크게 뜨고 있어야만 알아 볼 수 있다.
시력 보완용으로 자신의 눈가리개를 나눠주는 교사로부터는 그런 계기를 기대하기 힘들다. 그런 교사는 틀에 박힌 대로 가르친다. 무엇이 틀에 박힌 것인지는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경우에 따라 3주 후에나 되돌려주는 시험지가 그렇다. 제일 늦게 교실에 와서 제일 먼저 나가는 선생님들이 그렇다. 진짜 딱정벌레를 관찰하는 법 없이 딱정벌레에 대한 비디오로 때우는 생물 수업이 그렇다. 학부모들이 전화할까 봐 귀찮아서 연락처를 알려주지 않는 교사들이 그렇다. 학부모회의 때 불참하는 교사들이 그렇다. 학부모 대표가 과목별 전문교사들을 최소한 한 번이라도 학부모회의에 나오도록 설득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해 책 한 권은 너끈히 쓸 수 있을 정도다.
틀에 박힌 것은 훨씬 더 많다.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무지, 엄청나게 과도한 요구, 악명 높은 잘난 척, 배부른 나태, 제멋대로의 맹목…. 왜 국어 수업을 듣고 문학을 좋아하게 되는 사람이 그렇게 조금밖에 없는지, 왜 종교 수업을 듣고 교회에 가는 사람이 별로 없는지, 세계정치 수업을 듣고 올곧은 민주주의자가 되는 사람이 왜 그렇게 적은지 여전히 궁금해하는 사람은 그들의 편협성을 과소평가한 것이다. 왜 이것이 변해야 하는가? 학교 안은 편안하고 알아서 봉급을 챙겨준다. 대부분의 교사들이 대규모로 전달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그들 역시 학생들만큼이나 교사라는 직업을 별로 내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교사들이 해야 할 일은 끊임없이 아이들의 성취욕을 북돋우고 바람직한 학습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교사들의 연대감을 존중하면서 교육 현장의 다른 관계자들도 참여시키는 것이다.
무슨 권리로?: 교사라는 본보기
무심코 한 말이 아이를 지배한다
콩과 다진 고기를 넣고 야채를 곁들인 토마토소스 파스타는 우리 집에서 최고의 인기 메뉴로 네 아이 모두 좋아한다. 그런데 샤를로테가 “브뤼텐차르트 선생님이 그러시는데 콩이랑 국수는 안 된대. 둘은 서로 안 맞는 음식이래.”라고 말한다. 샤를로테는 선생님이 콩과 국수의 궁합이 안 맞는다고 말했기 때문에 접시를 비우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제 토마토소스 콩 파스타는 우리 가족을 예전처럼 긴밀히 결합시켜주지 못한다. 이건 다른 많은 사건들 가운데 아주 사소한 일례에 불과하지만, 교육적 실패의 다채로운 시나리오의 단편을 돋보기를 댄 것처럼 확대시켜준다.
교사가 무슨 권리로 개인적 취향을 마치 엄정한 법이라도 되는 듯이 알리는 것일까? 부드럽게 관심을 보이며 “오 콩을 곁들인 국수라, 난 생전 처음 들어봤어. 한번 먹어보고 싶구나.”라고 말해주면 될 것을. 이 교사는 콩과 국수는 같이 먹는 것이 아니라고 단호히 판결한다. 하루 중 활기 찬 시간을 거의 대부분 함께 보내는 아이들이 선생님이 하는 말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그들은 정말 모르는 것인가? 자기들이 하는 말이 엄청난 설득력을 갖는다는, 적어도 아이들이 스스로 상황 파악을 할 수 있을 때까지 그렇다는 사실을 이 교사들은 눈꼽만큼도 모르고 있는 걸까?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아이들을 도와주는 것이 교사의 의무라고 알려준 사람이 여태 하나도 없는가? 교사들은 자신의 개인적 취향과 견해를 학생들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 관심을 가지되 평가는 유보한 채 주제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 생각을 이어가는 것, 그것이 교사의 임무다.
아이들은 교사의 말을 아주 꼼꼼히 새겨듣고 교사의 행동을 날카로운 눈으로 관찰하고 있다. 다운로드가 쉬지 않고 계속된다. 아이들은 교사를 우러러 본다. 가르치는 사람들의 자연스런 권위가 그만큼 큰 인상을 줘서가 아니라 아이들의 방향 정립에 대한 자연스런 욕구가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옳은 것과 그른 것이 있고, 그 둘 사이에 명확히 판단할 수 없어서 숙고해봐야 하는 것이 많이 있다는 메시지를 교사들은 분명하고 명백하게 알려야 한다. 우선 실상을 알고 되도록 여러 면에서 조명할 필요가 언제나 비판 능력보다 선행하는 법이다. 그리고 그 필요는 100퍼센트 저절로 발생한다. 폭넓은 지식의 결과로, 또 그것을 토대로 말이다. 교사가 나서서 학생들 앞에서 뭔가를 먼저 비판하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은 항상 교사들을 주시하고 있다
교사들은 자신의 행동이 항상 학생들에게 본보기로 작용할 수 있고 수업보다 더 오래도록 각인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교사들이 별 생각없이 무심코 한 얘기의 일부가 영원히 제자들의 기억에 남고, 결국 한 세대의 사회적․정신적․감정적 가치관이 다음 세대에 의해 수용된다. 이 점을 교사들은 명심해야 한다. 우리 어른들은 대부분 확고히 정립된 의견의 힘으로 하루를 요리조리 빠져나가며 살아간다. 정치 문제, 실업 대책, 교육 정책, 유가 인상, 동성혼인 같은 주제에 대해서 자신의 의견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아이들은 일단 자신의 의견을 형성할 현실적인 기회를 가져야 한다. 설령 그들이 애초부터 정해져 있는 사고의 틀을 그대로 답습하게 된다 할지라도 말이다. 이것 역시 존중의 문제다.
상호존중은 무엇보다도 내가 남들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그러면서 균형을 유지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이들의 자연스러운 탐색 활동이며, 교사는 거기에 어리석게 제동을 거는 대신에 지원해야 한다. 아이들은 아직 모든 것을 스스로 발견해야 하는 시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통찰을 요즘 교사들은 대폭 상실한 것처럼 보인다. 타성에 젖은 많은 교육공무원들은 객관적인 비판마저 인신공격으로 간주하곤 한다. 하지만 실수와 잘못을 인정하고 거기에서 기꺼이 배울 줄 알아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사적인 기분과 평가를 보류할 줄도 알아야 한다. 왜 그것이 교사들에게는 그토록 엄청나게 어려운가?
교사의 말 한마디가 아이들의 선입견을 낳는다
최근의 사건을 하나 들어보자. “파펜하이머 선생님이 그러시는데 교육부 장관은 못된 사람이래. 새로 교사를 채용하지 않아서 늙은 선생님들이 일을 많이 해야 한다는 거야.” 이번에도 샤를로테가 독일어 시간에 나온 대단히 용의주도한 폭탄 발언을 집으로 가져왔다. 샤를로테는 같은 반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담임선생님이 하는 말을 덮어놓고 믿는다. 그렇게 충실하고 절대 흔들리지 않는 애정에 반대 주장을 펼치기란 정말 쉽지 않다. 파펜하이머 선생님이 좋아하는 음식, 입는 옷, 인생관, 정치관이 아이의 머리에 새겨져서 우리집에 도착한다.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이야기할 때는 좀 더 깊이 숙고해야 하지 않을까? 현재 교사들의 처지를 설명하고 나라의 부채와 곤경에 처한 정부에 대해서도 말해줘야 하는 게 아닐까? 단순히 교육부 장관이 못됐다고 말함으로써 아이들에게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선입견을 머릿속에 심어주는 대신에 말이다. 그런 교사들은 얼마나 대단하고 훌륭한 정치적 견해를 갖고 있기에 자신의 정치 투어에 아이들까지 끌어들이는 것일까. 나는 어른다운 교사를 소망한다. 어설픈 교수법 실험, 유아적인 애착, 덜 여문 종교적․정치적 태도에 편향됨 없이 말 그대로 ‘교사’(敎師)로서 자기 정체성을 획득한 교사를 원한다. 인격과 신념을 가지고 학생들을 대하며, 그럼으로써 신뢰와 확신을 줄 수 있는 교사를 원한다. 이런 토대 위에 서 있을 때 교사는 학생들과 함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진실로 교육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나쁜 교사에게서 어떻게 벗어나는가
철옹성에서 안전하게 보호받는 교사들
공무원이 되면서 교사는 영원히 안전한 쪽으로 옮겨간다. 직장을 잃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은 소문으로만 들어봤을 뿐이다. 실패한 인간들을 위한 방공호로서의 학교. 이것이 무엇보다 일자리 보장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학교제도의 이면이다. 극도로 보호받는 학교의 저편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너무 자주 병가를 내거나 근무시간에 개인 용무를 보거나 실적이 저조하고 일에 대한 열의 부족을 드러내는 사람은 직장에서 쫓겨난다. 거짓말을 하고 실패를 거듭하고 요구받은 일을 거부하거나 동료들과 고객들 앞에서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 역시 해고된다.
그러나 학교는 전혀 다르다. 교사는 아무 거리낌 없이 사생활 얘기를 미주알고주알 떠들며 수업시간을 보내고, 수업을 하라고 월급을 받음에도 가르치기를 거부하며 교사의 끊임없는 수다에서 벗어날 기회가 없는 아이들을 감정적으로 이용한다. 결국 아이들은 법에 의해 해방을 알리는 쉬는 시간 종이 진짜 삶으로의 출발 신호를 보낼 때까지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는 벌을 받는다. 이런 점에서 취학 의무는 축복에서 저주로 바뀐다.
학교장은 꿈에서조차 무능한 동료 교사를 대놓고 비난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그가 보기에 교사의 삶을 힘들게 만드는 것은 신경질적인 학부모들이다. 마초처럼 굴면서 교사를 습관적으로 깔아뭉개고 아이가 받은 점수가 부당하다면서 항의를 하거나, 아니면 아무 관심 없이 직장일에만 충실한 아빠들. 버릇없는 자식 뒤를 늘 히스테리컬하게 따라 다니고 대학물 좀 먹었다고 뭐든지 다 잘 아는 척하는, 달리 별로 할 일도 없어 보이는 극성 엄마들. 행실 나쁜 자식의 도시락을 한 번도 싸준 적이 없는 파마머리의 하층 엄마들. 그들 모두가 악의로 똘똘 뭉쳐 비열한 비난을 일삼으면서 교사를 공격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교장은 별 볼일 없는 어떤 학부형이 입을 열기 무섭게 침묵한다. 직속 상관인 장학관 역시 똑같이 행동한다. 결국 그도 한때 교사였고 당시 경험으로 학부모들의 기묘한 활동에 끊임없이 노출되는 것이 얼마나 참기 힘든지 아주 잘 알고 있으니까. 다른 분야에서 공장장, 매니저, 인사부장들이 자랑하는 효율적인 품질관리 대신에 학교에서는 과거의 철옹성 정신이 지배한다. 학교는 교사의 수업방식을 비판하고 어느 정도의 개선을 촉구하는 학부모들을 철저히 방해하며, 명백히 무능한 교사를 아이들로부터 떼어놓으려는 모든 시도를 사전에 무산시킨다. 교사들은 배척의 세계 챔피언이다. 교육청과 밀약 아래 교사 집단이 활동하는, 속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새장 안에 학부모들은 들어갈 수 없다. 아무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무능하고 화난 교사는 천하무적이다.
왜 교사들에게 비난만 퍼붓느냐고?
나는 지금 교사들을 싸잡아서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다. 교사들 중에는 어떤 직종이나 그렇듯이 진정한 실력자와 진짜 형편없는 낙오자, 평범한 평균치가 있다. 물론 다른 분야에도 서툰 외과의사, 술취한 버스 운전기사, 솜씨 없는 요리사들이 있다. 이 모든 직업이 인간에 의해 행해진다. 그리고 인간은 매우 다양하다. 적극적이고 유능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평균인 사람도 있고, 또 게으르고 무능력한 사람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공무원 세계에서는 게으름뱅이와 가짜에 대처하거나 부적격자의 임용을 막기 위해 최소한의 조처도 취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내가 트링크아우스 선생님에게 정말로 증오심을 느낀 적은 한 번도 없다. 어쩌면 그는 50대 중반에 들어서 아주 깊은 인생의 위기에 처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느 날 자기가 교사라는 직업을 얼마나 지겨워하는지 깨닫고는 뭔가 전혀 다른 일을 했으면 더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는 사생활에서 배우자와의 관계 악화로 인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다가 얼마 전에 버림을 받았거나 스스로 오랜 결혼생활을 청산했을지도 모른다. 누가 진상을 알겠는가? 어쩌면 그는 단순히 더 이상 기분이 내키지 않는 건지도 모른다. 또는 건강이 너무 상해서 아침마다 하루를 무사히 넘기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을 안고 학교에 출근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일이 언제든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인정한다.
하지만 한번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보자. 다른 직종에 종사하는 대다수 직장인들의 경우에, 고액 연봉자와 어마어마한 재산의 상속자는 제외하고, 이런 상황에 처하면 인생 실패의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심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고객은 발길을 돌리고 주문은 뚝 끊기며 은행 잔고는 0으로 떨어져 그때부터 급격히 마이너스로 곤두박질친다. 우선 직장을 잃고 이윽고 돈이 떨어지며 곧 살아갈 용기가 사라진다. 그런데 그와 달리 이 나라의 교사들에게는 아무 문제도 발생하지 않는다. 그가 지금 자기한테 맡겨진 아이들에게 어떤 심한 짓을 저지르든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무능력을 보여주든 상관없이 계속 공무원으로 남아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실제로 어떤 남교사가 여학생의 팬티를 내리면 어떻게 될까? 열네 살 난 여학생들을 105번이나 성폭행했다고 고발당한 53세의 김나지움 교사는 법정에서 법적 보호대상자에 대한 성폭행 사실을 전면 부인했다. 하지만 법원은 결국 그에게 자백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자백을 한 덕에 그 교사는 12개월 미만의 집행유예를 선고 받았다. 그래서 계속 공무원 신분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가 그것을 꼭 원한 것은 아니지만 덕분에 그의 연금 청구권 또한 계속 유지될 것이다. 그 교사의 해임 여부는 행정재판소의 징계위원회가 결정한다. 학교 당국에 따르면 그때까지 몇 년이 소요될 수 있다고 한다. 그 몇 년 동안 그 김나지움 교사는 삭감된 봉급을 받을 것이다.
그래도 훌륭한 교사들이 있긴 하다
선장님, 나의 선장님이여
가슴에 손을 얹고 솔직해져보자. 교사들을 생각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열정과 자연스런 권위, 본보기를 생각하는가? 정신적 깨달음과 다양한 통찰을 얻기 위한 산행에서 위험한 산길과 가파른 암벽, 현기증을 일으키는 협곡을 넘어 안내하는 전문적인 등산 안내인을 생각하는가? 아니면 살아 있는 인간보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 나오는 복제인간 같은 인상을 주는 중년의 여교사들과 머리가 빈 허풍선이들, 교만한 전공 바보들이 먼저 떠오르는가? 이 직업에 적격이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모든 직업에 부적당하기 때문에 교사가 된 자들이 떠오르는가?
좋은 교사들은 자신의 행동과 태도를 의식적으로 조정하고, 다른 한편으로 수업 주제와 학생들의 행동에 매우 집중해서 대처한다. 이것이 좋은 교사와 나쁜 교사를 구별 짓는 기준이다. 거기에 약간의 유머가 첨가된다면 더 이상 바랄게 없을 것이다. 학생들은 그런 교사를 위해 마음을 열고 자신의 잠재된 능력을 보여준다. 그런 선생님을 학생들은 원한다.
열광적으로 또 많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학생들을 지도하며 귀를 열고 그들의 말을 들어주는 교사들은 대체 어디에 있는가? 어쩌다 우리는 영화관에서 그런 교사를 만난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오는 로빈 윌리엄스 같은 교사를. 그런 교사들이 현실에도 존재하는가? 아이들이 자신을 알게끔 자극하고 용기를 주고 항상 아이들에게 최소한의 존중심을 보일 수 있는 그런 교사들이? 완전한 인격과 안정된 자아를 가졌기에 저항 능력이 없는 학생을 이용할 필요가 없는 교사들. 일에 대한 자신감과 열정과 안목을 지닌 교사들. 그런 교사들이 있기는 있다.
젤만 선생님이 바로 그런 쿨한 타입이다. “독일 김나지움에서 생물교사로 일하는 건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최고로 끝내주는 일이야.” 라고 서른아홉 살 먹은 남자가 말한다. 생물과목이 “쌔끈하고”, “죽여주고” 때때로 “진짜 끼깔난다”는 사실을 이 선생님은 그럴듯하게 전달할 수 있다. 그런데 젊은 애들의 속어가 그의 입에서 나오면 환심을 사려는 것처럼, 한번 따라 해보는 것처럼 들리지 않고 진짜 같다. 그는 그냥 그렇게 말한다. 그는 열성적으로 수업을 진행하고 문제를 자세히 설명하기 때문이다. 학생들에게 분명하고 명료하게 동물상(相)과 식물상을 설명하고 현대 유전공학 기술을 둘러싼 윤리 도덕 논쟁도 꺼리지 않는다. 그러나 이따금 원성을 사기도 한다. 젤만 선생님이 복제양 돌리도 인간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전체 우주에서 모든 존재와 사물이 같은 물질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을 설명하려 하면 몇몇 동료 교사들은 그의 주장을 자신들이 맡은 과목에 대한 비방으로 느낀다.
무엇보다 교사가 훌륭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돈을 많이 들여봤자 우리 모두가 학교 교육을 개선하기 위해 절실히 바라는 것에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직 좋은 교사가 못 되는 교사들은 이 점을 상기해야 한다. 그러면 그저 수업 수요를 충당하기 위한 공무원이 아니라 정신적 발전의 조력자로서 괜찮은 급료와 14주의 방학, 해고될 염려가 전혀 없는 일자리를 진심으로 누리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