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래 최고의 천재 설잠비구
-암흑시대를 밝힌 기걸한 고승 김시습(1435~1493년)-
조선이 개국하면서 격렬해진 배불정책은 태종과 세종 때 철저히 시행되어 불교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였다. 그러나 세종이 만년에 호불의 경향을 띠게 되면서 불교는 다시 발전의 계기를 맞이하게 되었으며, 특히 세조의 적극적인 호불책으로 더욱 활발한 발전을 했다. 그러나 성종은 다시 배불책을 쓰게 되어 불교는 거듭 타격을 받게 되었다.
설잠은 매월당 김시습 (1435~1493)의 승명인데, 그는 세종대로부터 성종대에 걸쳐서 승려 생활을 했다. 그러나 김시습은 단순한 승려가 아니라 매우 다양한 면모를 보여준 조선조 최고의 아웃사이더였다.
율곡이 선조의 명을 받아 쓴 <김시습 본전>에서 그를 '마음은 유자이나 그 행적이 불가였다'라고 한 '심유적불(心儒蹟佛)'이라는 단정이 그에 대한 평가의 한 전형이 되어 사람들은 김시습을 '승복을 걸친 유학자 '쯤으로 생각하는 오해를 횡행케 했다.
김시습은 정치적으로는 세조의 왕위찬탈에 거역한 생육신의 한사람이며, 문학상으로는 한문 소설 <금오신화>를 쓴 한국소설의 비조이며, 운문으로는 15권의 시집에 2,214편의 시를 남긴 유명한 시인이었고, 또한 당대 한문학의 여러 장르에 걸친 146편의 문장을 남긴 탁월한 유학자였다.
이뿐 아니라 율곡의 '심유적불'이란 김시습 평가의 한 전형으로 불교 승려로서의 업적과 면모가 굴곡되었음은 이미 앞에서 말한 바 있는데, 참으로 그에게 있어서는 전 59년의 생애 중 38년간 승려 생활을 했으므로, '심유적불' 넉 자로 조선 초의 뛰어난 사문 한 사람을 유가에 영입한다는 것은 한갓 교묘한 언어적 변론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의 불교에 관한 주요저작들이 원숙한 40대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선에 관한 저술인 <십현담요해>가 41세에, 의상의 법성게에 선적인 주를 단 <일승법계도주병서>가 42세에 씌어졌다. 따라서 그는 젊은 날의 짤막한 유학자로서의 삶보다 승려로서의 삶이 더 길었을 뿐 아니라, 선리를 깨달은 위대한 선승이자 학승으로서 벽불암흑기에 많은 공적을 남긴 조선 초기 불교사의 중요한 승려의 한 사람이었다. 설잠 김시습의 자는 열경이요 호는 매월당 또는 동봉·청한자라 하였으며 본관은 강릉이다. 그는 3세에 시를 짓고 5세에 중용과 대학을 통달하여 '오세' 또는 신동이란 별명으로 불리었고, 또한 대궐에 불려가 다섯 살의 어린 나이에 그 능력을 인정받음으로써 세종과 재상 허주의 총애를 받는 영광을 누렸다. 그의 이러한 행적은 우리나라 역사 이래 정사 또는 문헌에 그 기록이 남은 자 중에서는 최고의 천재로 기록되어 있다. 설잠비구 김시습은 역사상 가장 조숙한 천재였던 것이다.
대개 뛰어난 사람의 행적을 서술할 때 그냥 어릴 때 수천 어를 외웠다든가 하는 등의 막연한 천재와 신동들은 역사 인물의 전기에서 곧잘 대하지만, 공인된 기록에 3살 때 시를 짓고 5세에 중용과 대학을 통달하여 '태어나면서 아는 자'라는 칭호를 받은 자는 김시습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21세 때인 1455년, 삼각산 중흥사에서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에 올랐다는 세조 정변의 소식을 듣고는 읽던 책을 불사르고 3일 동안 통곡한 후 곧장 설악산으로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그는 그 후 관동·관서지방을 편력하면서 승경과 사암을 떠돌아다니며 시를 읊고 경치를 즐기며 불우한 자신의 초년을 회억하기도 했다. 그는 이어 호남과 영남을 방랑하다가 경주에서 깨달음을 성취한다. 이런 인연 때문이었는지 그는 37세 때까지 경주에 머물면서 한문 소설 <금오신화> 다섯 편을 집필했고, 또한 그동안 관동·관서·호남·영남 등지를 편력하면서 쓴 시들을 <사유록〉이라는 제목으로 정리하기도 하였다. 이후 일정한 곳에 정주하지 않고 떠돌다가 1493년 2월, 설잠은 59세를 일기로 홍산현(부여) 무량사에서 입적했다. 그의 유언에 따라 절 옆에 가매장 하였다가 3년 후 빈실을 열었는데, 그의 안색은 마치 살아 있는 듯하였다. 그에게는 많은 시와 문장,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비롯하여 불교관계 저술로는 <화엄경석제> <화엄법 계도주> <법화경별찬> <십현담요해> <조동오위요해> 등이 있다. 설잠비구 김시습은 이처럼 불교계에도 여러 부면에 걸쳐 많은 저 술을 남긴 탁월한 인물이었다.
< 불교사 100장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