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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송 아 지
머리말
오늘 공부를 위해서 19, 20, 24장을 먼저 읽어 두어야 시나이산에 도착해서 오늘 본문까지의 사건의 연속을 머리에 담을 수 있게 된다. 모세는 한 번 이상 산을 오르내렸었다. 특별히 24장 18절은 32장의 상황에 대한 설명이 된다. 모든 백성들은 산에서 오는 주님의 소리를 들었었고 몇 번씩 주님께 순종하겠노라고 이미 약속해왔었던 점을 주지해 두어야겠다.
성 서 본 문: 출애굽기 32장 1-24절
32장: 1. 백성은 모세가 오래도록 산에서 내려 오지 않자, 아론에게 몰려와 청하였다. “어서 우리를 앞장설 신을 만들어 주시오. 우리를 에집트에서 데려 온 그 어른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2. 아론이 그들에게 “너희 아내와 아들 딸의 귀에 걸린 금고리를 나에게 가져오라”하고 대답하자 3. 백성이 모두 저희 귀에 걸린 금고리를 떼어 아론에게 가져왔다. 4.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것을 받아 수송아지 신상을 부어 만들자 모두들 외쳤다. “이스라엘아, 이 신이 우리를 에집트에서 데려 내 온 우리의 신이다.” 5. 아론은 이것을 보고 그 신상 앞에 제단을 만들고 “내일 야훼 앞에서 축제를 올리자”하고 선포하였다.
6. 이튿날 그들은 일찍 일어나 번제를 드리고 친교제물을 바쳤다. 그리고 나서 백성은 앉아서 먹고 마시다가 일어나서 정신없이 뛰놀았다.
7. 야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당장 내려 가 보아라. 네가 에집트에서 데려 내 온 너의 백성들이 고약하게 놀아나고 있다. 8. 저들이 내가 명령한 길에서 저다지도 빨리 벗어나 저희 손으로 부어 만든 수송아지에게 예배하고 제물을 드리며 ‘이스라엘아, 이 신이 우리를 에집트 땅에서 데려 내 온 우리의 신이다’라고 떠드는구나!” 9. 야훼께서 계속하여 모세에게 이르셨다. “나는 이 백성을 잘 안다. 보아라, 얼마나 고집이 센 백성이냐? 10. 나를 말리지 말아라. 내가 진노를 내려 저들을 모조리 쓸어 버리리라. 그리고 너에게서 큰 백성을 일으키리라.”
11. 모세는 그의 하느님 야훼의 노기를 풀어 드리려고 애원하였다. “야훼여, 당신께서는 그 강하신 팔을 휘두르시어 놀라운 힘으로 당신의 백성을 에집트 땅에서 데려 내 오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어찌하여 이 백성에게 이토록 화를 내시옵니까? 12. 어찌하여 ‘아하, 그가 화를 내어 그 백성을 내다가 산골짜기에서 죽여 없애 버리고 땅에 씨도 남기지 않았구나’ 하는 말을 에집트인들에게서 들으시려 하십니까? 제발 화를 내지 마시고 당신 백성에게 내리시려든 재앙을 거두어 주십시오. 13. 당신의 명예를 걸고 ‘너의 후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약속한 이 땅을 다 너의 후손에게 주어 길이 유산으로 차지하게 하겠다’고 맹세해 주셨던 당신의 종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이스라엘을 기억해 주십시오.” 14. 이 말을 들으시고 야훼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내리시겠다던 재앙을 거두셨다.
15. 모세는 두 증거판을 손에 들고 돌아 서서 산에서 내려 왔다. 그 두 판 양면에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이쪽에도 저쪽에도 새겨져 있었는데, 16. 그 판은 하느님께서 손수 만드신 것이었다. 그 판에 새겨진 글자도 하느님께서 손수 새기신 것이었다. 17. 백성들이 떠드는 소리를 듣고 여호수아가 모세에게 말하였다. “진지에서 들려 오는 저 소리를 들으니 전쟁이 터졌나 봅니다. 18. 모세가 말을 받았다.
“그것은 승리의 노래도 아니요,
패전의 곡성도 아니다.
나 듣기에 저것은 화답하는 노랫 소리다.”
19. 모세가 진지에 가까이 이르러 보니, 무리가 수송아지를 둘러 싸고 춤을 추고 있었다. 모세는 격분한 나머지 손에 들었던 두 판을 산 밑에 내던져 깨뜨렸다. 20. 그는 그들이 만든 수송아지를 끌어다가 불에 태우고 빻아서 가루를 만들어 물에 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마시게 하였다.
21. 모세가 아론을 나무랐다. “이 백성이 당신을 어떻게 했기에, 당신은 그들이 이토록 큰 잘못을 저지르게 하였소?” 22. 아론이 변명하였다. “우리의 영도자여, 노여워 마시게. 이 백성이 얼마나 악에 젖어 있는지 당신도 잘 알지 않는가 23. 그들이 나에게 와서 우리를 에집트 땅에서 데려 내 온 그 어른 모세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우리를 앞장서 인도할 신을 만들어 달라고 조르더군. 24. 그래서 내가 금을 가진 사람이 없느냐고 했더니, 금을 가진 자들이 몸에서 금을 떼어다가 주기에 그것을 불에 넣었지. 그랬더니 이 수송아지란 놈이 나오더군.”
교리 요점
* 주님을 섬김 외에 다른 어떤 대상물이 삶의 첫번째에 놓이지 않도록
자신을 단속해야 한다.
* 성경에서 주님은 사람들의 약함을 보여 주시면서 또 우리의 약함도 보여주고 계신다.
* 육체적인 감각의 경험만을 의존했던 이스라엘 백성처럼 우리도
자칫하면 그렇게 되기 쉽다.
* 주님과 이웃사랑은 우리를 곧바르게 지키는데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느낌이다.
가정 예배를 위해 부모에게
40여년 광야 배회 생활을 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한 것은 두 기둥, 즉 낮의 구름기둥과 밤의 불기둥이었습니다. 이 백성들은 이 기둥이야말로 그들과 함께 하시는 주님의 현존임을 알고 있었는고로 기둥이 멈추면 그들도 멈추어야 했고 기둥이 움직일 때까지 그들도 움직이지 않는 등, 두 기둥이 그들을 인도하는 데로 이동했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이 경험에서 저 경험으로 우리를 인도 해주십니다. 우리에게 와지는 모든 것은 주님이 보시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를 격려해주기 위해서, 때로는 경고를 위해서, 혹은 테스트 등등 여러 가지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따라서 인생에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무엇이 발생되느냐가 아니라 발생된 것에 관해 우리가 어떻게 처신하느냐 입니다.
르비딤지역으로부터 기둥은 이스라엘 백성을 시나이산으로 인도했습니다. 이 산은 바닥은 평지이면서 산만큼은 높고 가파른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 백성이 평지에 야영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11개월 동안 그곳에 머물렀는데, 그 때에 주님은 모세를 통하여 그들의 삶과 예배를 위해 모든 법을 주셨고 이 법으로 인해 이 백성들은 유목민의 떼거리에 불과했던 수준에서 조직화된 국가 형태로 바뀌게 되었고 이스라엘 교회도 건립되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제일 먼저 십계명이 주어졌는데, 계명이 주어지는 소리는 천둥과 번개와 더불어 이 백성 모두에게 들려 졌습니다. 사실 이 십계명은 이미 그들도 알고 있었던 것인데도 다시 그들에게 보여 주셔야만 했고 이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이유는 이 법은 인간의 작품이 아니요 모든 행복된 삶에 기초가 되어야 하는 신성한 법이기 때문입니다. 이 법은 결코 바뀔 수가 없으며 해를 자초하지 않고 이 법은 깨트려질 수도 없습니다.
이 십계명 외에 다른 법과 규정들을 받기 위해 모세는 산꼭대기로 주님에 의해 몇 번 부름을 받았습니다. 마지막 때에 모세는 사 십일 주야 동안 구름에 감추어져 산 위에서 지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그가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판정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보이지 않는 것보다 보이는 것에 더 신뢰를 두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연계 속에 있는 것 중, 예를 들면 보이지는 않지만 중력이나 전력들에 아주 큰 힘이 있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말입니다. 오늘 본문의 금송아지는 우리가 이 세상의 쾌락이나 성공을 자기 삶의 최상의 위치에 올려놓을 때에 관한 그림입니다. 이를 마음에 두면서 본문을 읽게 되면 주님께서 우리를 가르치시는 경이로운 교훈을 얻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제 1반
오늘 이야기는 간단하면서 극적인데 계명을 주심과 연결시켜 생각해 본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놀라운 수단을 통해서 에집트를 빠져 나와, 주님은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 백성들을 인도하셨습니다. 그들은 기둥이 가는 곳은 어디든지 따라가도록, 또 움직이는 때가 낮이든 밤이든 상관없이 기둥이 멈출 때는 그들도 멈추도록 지시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둥이 움직일 때까지 그들도 다시 이동하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이 르비딤을 떠났을 때 이 기둥은 그들을 시나이 광야로 인도했습니다. 그곳은 넓은 평지에 갑자기 솟은 듯한 산이 있는 곳입니다. 거기에 도착하는데 그들은 석 달이 걸렸습니다. 기둥이 시나이산 앞에 머무르자 백성들은 그곳에서 천막을 치고 거의 일년을 지냈습니다.
* 산꼭대기로부터 말하시는 주님의 어떤 소리를 백성들은 들었습니까?
* 모세는 계명과 다른 법 그리고 예배와 삶을 위한 규정들을
받도록 산꼭대기로 불리웠습니다.
* 여호수아를 포함한 일부 장로들도 모세와 동행했으나
꼭대기까지는 가지 않았습니다.
* 모세는 사십 일 주야를 거기에서 지냈습니다.
* 백성들은 모든 면에서 주님께 순종하기로 약속되어 있었습니다.
* 그들은 이 약속을 잘 지켰습니까?
* 모세가 되돌아오지 않는다고 백성들이 생각했을 때 그들은
아론에게 무엇을 해달라고 요구했습니까?
* 그들을 위해 아론은 어떤 우상을 만들었습니까?
* 모세가 산에서 내려올 때 그의 손에는 무엇을 들고 있었습니까?
* 백성들이 금송아지에 예배하는 것을 본 모세는 돌판을 어떻게 했습니까?
* 모세는 금송아지를 어떻게 했습니까?
제 2반
시나이산의 모습, 그 곳에서 십계명이 어떻게 주어졌는지, 왜 첫 돌판은 깨어지고 둘째 돌판이 산밑에서 다듬어져 새겨지게 되었는지, 백성들은 눈에 보이는 우상에 예배하기를 왜 원했는지, 이스라엘 백성과 우리 사이의 유사점을 찾아본다.
시나이산은 큰 평야에 우뚝 올라 선 큰 바윗덩어리들의 집합체인 듯 보이고 그 가장자리는 날카로운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 산의 정상은 해발 8-9천 휘트(feet)정도 됩니다. 이 산덩어리들은 대략 2마일 정도의 길이에 폭은 1 마일쯤이고 그 밑의 평야는 대략 2마일 길이에 1/2마일 정도의 폭인고로 넓이로 보면 400에이커(acres)정도 됩니다. 이 지역의 공기는 경이로울 정도로 맑아서 보거나 듣는데 아주 적합합니다.
십계명은 천둥과 번개와 자욱한 연기로 덮힌 시나이산 꼭대기로부터 주님 자신의 소리로 말해졌고 모든 사람들은 그 모든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신명기 5장 22-24절을 읽어보기 바랍니다.
그런 다음 모세는 산꼭대기로 불리워져서 거기서 깍아 만든 두 돌판위에 주님의 손가락에 의해 새겨진 계명을 받도록 명령되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순종해야 할 모든 법, 특히 예배에 관한 법들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성막과 그 속의 가구를 설비하는데 따른 지침도 주셨습니다. 아마 여러분이 위의 모든 것이 모세에게 일시에 주어지지 않았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모세는 백성들을 가르치기 위해 몇 번이나 산에서 내려왔고 그때마다 백성들은 모세를 통해 주신 모든 법에 순종하겠노라고 응답했었습니다. 모세가 산에 올라 갈 때 여호수아가 그의 시종으로 그와 동행하도록 허락되어 있었고 멀찍이 떨어져서 모세를 기다렸습니다. 이는 여호수아가 누구보다 주님과 가장 가까웠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사실로서 아마 여러분도 기억해두고 싶은 모습이라 믿습니다. 아론과 후르는 평야에 있는 백성들을 책임지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모세가 불리워 산꼭대기에서 구름에 덮인 채 사십 일 주야를 머무르게 되었을 때 백성들은 모세가 영영 가버린 것으로 결정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지금까지 보여주셨던 경이로움이나 그들이 주님께 약속했었던 모든 것을 일시에 다 잊었습니다. 한꺼번에 다 잊는다는 것이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교회에서, 또는 성경공부 도중에 자신을 감격스럽게 만든 어떤 말씀속의 진리에 젖어 본 적이 있습니까? 아마 이스라엘 백성이 오늘 본문에서 잊는 속도보다 우리들의 잊어버림은 더 빠를지도 모릅니다.
* 백성들은 아론에게 무엇을 해달라고 요구했습니까?
이들은 과거 에집트에서 우상을 숭배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아마 그 우상들 중에서 제일 가는 에집트인의 우상은 송아지(calf)였습니다. 이 백성들은 자기들이 보고 만질 수 있는 어떤 신을 원했습니다. 한마디로 보고 만져 보는 신이 그들에게 더 가까이 있는 듯, 더 실재인 듯 여겨진 것입니다. 사실 자신 스스로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어떤 것을 실재(진짜, real)라고 믿는다는 것은 수많은 이들에게 참 힘든 것입니다. 자연계에서 조차도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굉장한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말입니다.
* 앞의 성경 어느 이야기에서 우리는 귀걸이에 관해
공부했었습니까? (창세기 35:4)
* 아론은 송아지를 어떻게 만들었습니까?
본문 4절과 24절을 같이 읽어봅시다. 모세가 아론을 꾸짖자 아론의 변명은 자기는 직접 우상을 만드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발뺌을 하려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 우리의 경험에서도 이런 일은 허다하므로 쉽게 그 마음을 감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 모세는 산에서 내려오면서 무엇을 가지고 왔습니까?
* 그는 이 돌판을 가지고 무엇을 했습니까?
* 그는 금송아지를 어떻게 했습니까?
* 그는 백성들을 어떻게 처벌했습니까?
모세는 매우 화가 나 있었지만, 여전히 백성을 용서해달라고 주님께 간구했습니다.
이후 주님은 모세에게 시나이산 밑에서 두 돌판을 만들어 산꼭대기로 가지고 오도록 말하셨고, 그 새 돌판에 다시 계명을 쓰셨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그 새 돌판을 백성에게 가지고 왔습니다. 이 돌판이 후에 궤 안에 보관 된 돌판입니다.
그 다음 주님은 이 백성에게 언약을 하셨습니다. 그들은 주님만을 예배해야 하며 우상을 발견할 때는 언제든지 파괴해 버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거쳐가는 여행길목에 사는 민족이나, 설사 자기들 주변에 섞여 같이 사는 타민족과 결혼해서도 안된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그들의 작물과 가축의 첫 소산은 주님에게 바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매해마다 세 가지 축제를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즉 과월절(Passover, 무교절, 유월절), 그리고 밀 곡식을 처음 거두어 들일 때의 칠칠절(Feast of weeks, 추수절) 그 다음, 해가 바뀔 때, 즉 가을철 모든 곡식을 안전하게 다 거두어 들인 후 있게 되는 초막절(the feast of ingathering, 수장절)입니다. 이와 같이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는 그분을 잊지 않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 애쓰신 것입니다. 그들이 위의 조항을 성심껏 준수한다면 복을 내리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모든 주님의 명령들은 우리의 선을 위해 주신 것이요 이 선이야말로 주님이 우리를 축복이 가능하게 할 수 있고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조건임을 기억해두기 바랍니다.
제 3반
우상숭배, 특히 금송아지 숭배의 상응을 중심과제로 삼는다. 첫 돌판은 왜 깨트려지고 두 번째 돌판은 왜 산밑에서 다듬도록 하셨는지도 살핀다.
십계명은 천둥과 번개와 더불어 있은 주님의 소리로 주어졌고, 모든 백성들은 주님이 이 계명을 말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 계명은 새로운 법은 아닙니다. 이 백성들 이전의 사람들로 언제나 이 법을 가졌었고 이 세상 모든 국가의 법에 기본이 되어 왔었습니다. 그러나 계명이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주님의 소리로 주어진 이유는 이 법이야 말로 인간이 만든 법이 아니고 하느님의 법임을 인식 시켜주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이 법은 어느 장소에서든, 어느 때든 절대 깨트려 질 수 없습니다. 단지 깨트려지는 조건이란 그가 영적으로, 자연적으로 피해를 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주님은 모세를 산꼭대기로 올라오도록 부르신 다음 백성에게 주어야 할 다른 법들도 주셨습니다. 제 21-23장 성서의 소제목들만이라도 잠깐 읽어본다면 이 법이 무엇 같은지 짐작할 수 있게 되며 더 상세한 내용은 레위기서에 있습니다. 사실 이 법은 통상적으로 우리가 시민법이라 부릅니다. 글자대로의 의미로는 이 법들은 이스라엘 족을 위한 것이나 그 글자속의 의미, 영적인 의미에서는 모든 시대의 모든 이를 위한 법임을 미리 감지해두기 바랍니다.
그 다음 모세는 예배와 그와 관련 된 규정들, 특히 성막과 그 안의 가구들, 사제들의 제복, 바칠 제물등에 관한 세부지침을 받기 위해 산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느님께서 손수 쓰신 십계명의 두 돌판이 주어졌습니다. 이 마지막 훈계의 시기에 모세는 산꼭대기를 덮은 짙은 구름속에서 사십 일 주야를 지냈습니다. 40이란 시험이 충만된 시기를 그려줍니다. 우리가 어떤 시험에 저항하고 있을 때, 이젠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느끼는 막바지에 이른 상태에 도달할 때가 있는데 이를 성경에서 40이란 숫자로 그려주고 있습니다. 모세가 사라지고 말았다고 생각된 이스라엘백성들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에 대한 충절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결국 만져서 알 수 있는 어떤 것을 예배하길 원했습니다. 이는 영적인 가치는 덧없는 그림자같이 보이고 세상적인 성공만이 삶의 유일한 진짜 목적인냥 보이는 우리의 상태와 비등한 것입니다.
소(cattle)는 에집트에서 총애 받는 우상입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에집트인들은 아주 오래 전 이세상의 선한 것과 세상적인 지식을 사랑했기 때문이며, 소는 외적 또는 자연적인 선함과 그에 따른 애정(affection)을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소가 가진 상응(correspondence)의 의미를 생각하는 것이 소에 대한 본래의 용도였지만 이 소가 예배의 대상물로 세워지자, 이 상응은 악으로 변해 갔습니다. 그래서 아론이 만든 우상이 표현하는 바는 이세상의 것들을 주님과 그분을 섬기는데 사용하기보다 이세상의 것 자체에 관심이 쏠려 있는 마음을 말하게 됩니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 He that hath ears to hear, let him hear.” 아마 이 구절은 성경, 특히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서 많이 발견했었을 줄로 봅니다. 들음(hearing)이란 순종(obedience)을 표현합니다. 따라서 윗 구절의 실제 의미는 “네 마음이 주님의 가르침에 열려 있다면 그 가르침에 순종하라. If your mind is open to the Lord's teaching, obey it”일 것입니다. 금귀고리(golden earring)란 주님께 순종함으로 결과되는 행복(happiness)을 표현합니다. 그러나 이 금고리를 백성들의 귀로부터 떼어냈는고로 이 고리들은 금송아지(golden calf)가 되고 말았습니다. 아마 여러분은 귀고리에 관한 설명이 있었던 공부를 기억할는지 모르겠습니다. 「야곱의 귀향」을 다룬 곳, 즉 야곱과 그의 식구들이 베델에서 진정으로 주님을 예배하기 전 그들이 하란에서 달고 왔던 귀고리들을 떼어 내 세겜의 상수리나무 밑에 묻었던 이야기에서 입니다 (창세기 35:1-8). 하란에서 단 귀고리란 그들의 동기(motive)속에 있는 옛 자연적인 상태를 표현합니다.
모세가 처음 가지고 내려 온 두 돌판은 산꼭대기로부터 취한 돌이었습니다. 이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고 싶어하시는 높은 영적인 상태에서의 계명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족들은 이와 같은 영적인 것을 감지해서 그 진가를 아는 것은 커녕 전혀 이해조차도 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첫 돌판은 깨어졌습니다. 두 번째 돌판은 모세가 산밑에서 다듬어 가지고 올라와 다시 새겨주신 돌판입니다. 이는 낮고 낮은 세상적인 상태에 머물고 있는 사람에게 계명의 중요성에 대한 어떤 인상을 깊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란 계명에 대한 힘들고 외적인 형태 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안되겠기에 억지로 지켜 가는 삶이고 보니 힘들 것은 뻔한 사실이 아니겠느냐는 말입니다.
모세는 첫 돌판을 산 밑에 내던져 깨뜨린 후, 송아지를 빻아서 가루로 만들어 물에 타 이스라엘 백성으로 마시게 하였습니다. 이는 그 당시 이후로 계속되어 온 그 교회속의 사람들이 모세를 통하여 자기들에게 주어진 모든 법을 외적인 형태에서 제아무리 잘 준수하더라도 그들 속에 있었던 영적인 진리는 세상적이고 이기적인 사랑들에 의해 왜곡되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그려주는 구절입니다.
기본이 되어줄 상응공부
40 = 시험이 가득 찬 상태
송아지(the calf) = 외적인 선을 사랑함
제 4반
세상적이고 이기적인 이스라엘족들의 상태, 이런 상태로 흘러 버리기 쉬운 우리들의 상태를 오늘 공부를 통해 명확히 해보고자 한다. 세상 삶으로 나가거나, 나가있는 사람들에게 자기속의 “모세”는 “산꼭대기의 구름안으로 사라져”버린 듯 여겨질지 모른다. 이런 시험에 자신이 포함될 수 있고, 되어 있다면, 오늘 공부를 통해 더 확실히 이 시험을 인식하는 기회가 되어 버티는 힘을 갖기 바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석 달 동안의 광야여행 끝에 시나이산 밑에 도착하여 진을 치게 되었다. 역사가들이 지적하는 바는 십계명은 모세 이전 시대에 이미 고대인들의 법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을 들은 어떤 이들은 시나이로부터 주님에 의해 주어지고 있는 성경 이야기를 불신임하려 든다. 만일 계명이 하느님의 법이라면, 이런 불신임하는 이들의 경우에도 계명은 모든 질서 있는 사회 활동의 기본법으로서 반드시 알고 따라야 했을 것이다. 이스라엘 족들은 그들 고유의 어떤 정부형태도 없이 노예 생활로 이어 온 민족들인데다 진정한 자기들 하느님의 이름까지도 잊은 상태였다. 그들은 지상적인 만족 외의 어떤 바램에 대해서는 하나도 남지 않은 백성들이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의 영적인 자유를 간섭하지 않고도 그들 역사를 지휘하실 수 있었다. 그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외적인 것들에만 있었기 때문에 주님은 장차 그들 역사가 상응의 의미를 가져서 성경이야기 속에 담겨지도록 외적인 예배형태가 건설되기 위해 주님을 따르면 보상이라는 희망과 주님을 배반하면 처벌이라는 공포를 통해 그들을 인도하실 수 있었다.
오늘 본문은 위의 사실들을 상징적인 형태로 말해주고 있다. 또 이 본문은 우리가 세상적인 상태속에 있을 때 주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다루게 되시나에 관해서도 알게 해준다. 모세, 지난 공부를 통해 살핀 바는, 그는 신성한 법(divine law)을 표현한다. 다시 말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오는 진리를 표현한다는 말이다. 모세는 성막의 관리와 건축을 위한 지침을 받기 위해 산으로 불리위졌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그와 동행하도록 허용되었다. 그리고 아론과 후르는 백성의 사건을 담당하기 위해 백성과 함께 머무르게 되었다. 모세는 산꼭대기의 구름속으로 사라져서 사십 일 주야를 지냈다. 이와 아주 흡사한 우리의 경우는, 주님의 권능과 주님의 직접적인 리더쉽에 대한 우리의 느낌이 사라져 버린 듯 되고 우리의 종교 훈련이나 습관적인 도덕적인 규약들만 우리에게 남아 있는 듯 여겨지는 때가 종종 있는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이러한 때, 즉 우리의 영적인 삶이 아주 감퇴되어 버린 듯 여겨지는 때, 우리는 세상적인 생각이나 사랑에 몰입되기 십상이다. 사십 일 주야란 이런 시험이 가득해진 상태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소(cattle)란 세상적인 용도, 즉 사업, 전공분야, 예술, 음악, 학문, 과학 등등에 빨려드는 우리의 마음을 표현한다. 사실 이런저런 세상적인 용도가 주님과 이웃을 섬기고자 하는 한, 그 모든 것은 선한 용도임에 틀림없다. 단지 그것들 자체를 신본하려 들지 말라는 말이다. 송아지(calf)란 이런 세상적 용도들에 관한 지식을 사랑하는 것을 그려주고 있다. 고로 오늘 본문에서 송아지를 예배한다는 것은 세상적인 성공을 삶의 전부로서 마음에 두고 움직이는 모습을 말하게 된다. 좀 더 설명하면, 자기의 전공을 살리느라 너무 바빠서, 내 가게는 일요일에 특별히 더 잘되는데...라든가, 일요일이어야 재미나는 친구들이 모일 수 있어서... 등등으로 인해 성경을 읽을 시간이 없다고 한다던가, 교회가 갈 수 없는 경우에 해당되는 이들이 바로 금송아지를 예배하는 자들일 것이다.
이런 상태가 충만되면(6절) 모세가 산에서 내려온다. 그리고 우리의 이런 상태는 신성한 법의 심판에 갑자기 노출되고 만다(19절). 산에서 내려오는 모세의 양손에는 하느님의 손가락이 새긴 계명의 두 돌판이 들려 있었다. 이는 주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오는 신성한 법, 행복된 삶의 기본법이 계명임을 그려주는 모습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족들은 지상적인 것들 외에는 어떤 것에도 가치를 부여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이른바 19절에서 “송아지를 둘러싸고 춤을 추고 있었다” 이러면 첫 돌판은 깨어지고야 말 수 밖에 없다. 세워 놓았던 우상이 먼저 파괴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상태의 사람, 자신의 삶을 이기적인 사랑에 의해 점유당해 버리도록 놓아둔 그런 사람이 받을 수 있는 진리란 더럽혀진 형태의 진리, 거짓화된 진리만이 가능해진다. 이것이 20절에서, “그들이 만든 송아지를 끌어다가 불에 태우고 빻아서 가루로 만들어 물에 타” 마시게 한 구절의 내용이다.
첫 돌판과 송아지도 부서지고, 백성들에 대한 처벌도 끝난 뒤에, 모세는 산으로 다시 부름 받았다. 주님은 모세에게 산아래서 다시 돌을 다듬어 가지고 산으로 올라오면 첫 돌판에 새기었던 계명을 그대로 다시 새겨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34:1-4). 사람들이 성경을 읽다가 종종 의문되는 것은, “왜 주님께서는 하느님이 말씀을 주시되 드높은 영적인 방법을 동원하시지 않고 가혹하고 거칠고, 어쩌면 좀 야만적인 느낌까지 들 정도의 방법을 써서 주셔야만 했을까?”이다. 이에 대한 답이 오늘 본문에 따른 주변 이야기에 있게 된다. 첫 돌판은 산꼭대기에서 주님이 다듬으셨다. 이는 주님에게서 진행되어 나오는 진리의 형태 즉 높은 형태, 영적인 형태상의 진리를 그려준다. 그러나 백성들은 주님을 예배함에서 돌변해있었다. 아마 이런 모습은 오늘날의 우리나 우리 주변에 널려져 있는 모습이다. 이 모습은 영적인 가르침을 받는 상태에 있는 모습이 아니다. 그러나 첫 돌판은 깨어질 수 밖에 없고, 둘째 방법, 산 아래로부터의 돌을 가지고 다시 다듬어져야 한다. 물론 똑같은 계명이 새겨 졌다. 그러나 백성들은 그들 상태에 걸 맞는 낮고 세상적인 상태에 잘 채용되는 수준으로 받아야만 된다.
그래서 34장 마지막 문단, 30절,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쳐다보니 그의 얼굴 살결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으므로 모두들 두려워하여 가까이 가지 못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35절,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쳐다보면 그 얼굴 살결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래서 다시 야훼와 대화하기 위하여 들어갈 때까지 얼굴을 수건으로 가리고 있어야 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기적이고 세상적인 심정 상태 안에 있는 우리는 드높고 아름다운 형태로서의 진리는 거들떠 보지 않는다는 말이다. 딱 한가지 방법, 거칠고 호된 명령과 죽을 듯 느껴지는 위협을 동반하여야 그나마 질서가 지켜진다는 말이다. 이기적이고 세상적인 마음상태는 순수성 속에 든 진리를 쳐다볼 수 조차도 없는 것이다.
제 5반
오늘 본문을 위한 기초 자료로서 19-31장, 특히 24장 12-18절을 읽어둠이 바람직하다. 우리가 성경공부를 게을리 해도 선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간주함에 따른 방심할 수 없는 결과를 살펴본다.
시나이산, 이곳을 우리가 머리에 떠올리면 금방 연상하게 해주는 것은 그곳이 십계명이 주어진 곳이란 점이다. 출애굽기 20장을 보면 십계명이 주어질 때 산은 연기로 자욱하였고 천둥소리와 함께 번개가 치고 모든 백성들은 산꼭대기로부터 계명을 말하시는 주님의 소리를 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가끔 역사가들이 제공하는 반론의 하나는 십계명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새로이 주어진 것이 아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 계명은 모세시대 이전에 존재했던 법전들 속에 이미 포함되어 있음이 발견되고 있기 때문인 바, 말씀에서 주어진 사건은 무효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계명들은 태초로부터 인간 사회가 발견되는 곳의 어디든지에서, 그리고 세상 질서의 기본 법으로 존재해 왔다. 태고교회(Most Ancient Church)에 속하는 사람들은 이 법을 지각(perception)을 통해 알았고, 고대교회(Ancient Church)의 사람들은 계시(revealation, 밝히 앎)을 통해 알았다. 이 계명은 에집트의 법전에도 포함되어있다. 그러나 출애굽시대 때 쯤의 인간은 이 법이 신성하다는 것, 인간이 만든 법이 아니다는 것을 까맣게 잊었고 그 대신 인간의 작품으로 간주하여 인간에 의해 바뀔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우리가 고대까지 추적해보지 않더라도 십계명에 대한 이런 태도는 근대 세계에서만도 풍부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 우리 각자는 계명을 말하시는 주님의 소리를 영적으로 들을 필요가 있다. 계명은 신성한 법이다. 이 법은 바깥쪽 질서 뿐 아니라 영적인 법에서까지도 이를 깨트리면 자연적인 질서의 붕괴에서는 자연적인 피해를, 영적인 계명의 깨트림은 영적인 피해를 자초하지 않고는 깨트려지지 않는 하느님의 법인 것이다. 대중적인 사회 체제나 규약이 계명에의 준수나 결과를 약화시킬는지 몰라도 깨트림에 대한 대가의 존재는 여전하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숙고 해보는 가운데 주목해야 할 것은, 계명이 주어졌다는 것, 모세는 주님으로부터 지시를 받고 그 지시를 백성에게 전달하고자 한번 이상 산을 오르고 내려왔다는 것, 그 때마다 백성들은 만사에 있어서 주님께 순종하겠노라고 매번 스스로 서약을 했었다는 점일 것이다. 이에 대한 성경의 배경을 얻기 위해 24장 12-18절을 꼭 읽어보아야 한다. 그러면서 상기해야 할 사항은 모세는 말씀에서 우리에게 직접 오게 되는 진리를, 여호수아는 “싸우는 진리, truth fighting”를 각기 표현한다는 것, 아론은 교회를 통해 우리에게 오는 법들을, 후르는 각자의 명상이나 경험에 의해 확증된바 있는 종교적인 원리들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나는 성경을 정규적으로 꼭 숙독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 그 이유는 나는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교회에서 다 성장하다싶이 했으니까... 그래도 결국 이해 못하는 것으로 봐서...”라고 여러분이 말을 꺼낸적이 있다면, 영적으로 이해된 여러분 속의 모세가 24장 15절에서 같이 산꼭대기의 구름속에 들어가 있는 상태에서 본문 2절과 같이, 우리는 “그 어른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라는 구절 같은 것이다. 혹은 어떤 이가 하는 말, “나는 종교를 삶에 응용해보기 위해 공부까지 할 시간은 없어... 그 이유는 내 속의 기본은 선하니까... 언제나 내 주장은 진실로 나쁜 것을 행하고 싶지 않은데 기초를 두니까...” 이는 24장 13절에서 우리속의 여호수아가 모세를 따라 올라가 산 위 어딘가에서 내려 올 모세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하는 이가 있다면, “나는 교회의 멤버로서 열심히 봉사하고 있고 주위에서도 내 행실에는 칭찬이 잦지... 그만하면 충분한 것 아닌가?...” 이러면 24장 14절에서 우리속의 아론과 후르가 본연의 임무를 떠나있는 상태이다.
“이게 웬일이냐? What had happened?” 산에서 내려 온 모세가 위의 우리에게 대한 물음이다. 24장 14절에서, 모세는 자기가 산에 올라가 있는 동안 사건(cause)이 생긴다면 아론과 후르에게 가도록 백성에게 일러 주었었다. 다시 말해 지시나 충고를 위해서가 아니다. 이 백성들이 몰려와 요구한 것은 32장 1절에서와 같이, “어서 우리를 앞장설 신을 만들어 주시오”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론은 그들의 귀고리로 그들의 신을 만들기 시작했다. 과거 야곱이 하란에서 귀향하면서 베델에 제단을 쌓으라고 명령받았을 때 그는 자기 식구들에게 예배를 준비하기 위해 각기 가진 남의 나라 신들을 버리라고 했던 이 구절을 기억할 것이다. 즉 창세기 35장 4절에서, “그들은 자기들에게 있는 남의 나라 신들과 귀에 걸고 있던 귀걸이를 모두 야곱에게 내어놓았다. 야곱은 세겜근처 상수리나무(the oak)밑에 그것들을 모두 묻었다.” 귀는 순종을, 귀걸이는 순종의 기쁨(the delight of obedience)을 의미한다. 야곱의 이야기에서나, 오늘 본문에서의 이 순종과 기쁨은 외적이며 세상적인 사랑들에 속한 것이다.
뒤에 모세가 아론을 꾸짖자 아론은 말하기를, “그래서 내가 금을 가진 사람이 없느냐고 했더니, 금을 가진 자들이 몸에서 금을 떼어다가 주기에 그것을 불에 넣었지. 그랬더니 이 수 송아지란 놈이 나오더군.” 이래서 아론은 그 책임을 회피하려 들었다. 그러나 그의 말이 사실과 다른 이유가 4절에서 아론과 귀고리에 관한 말,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구번역 참조)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상에 관해 말해질 때 “각도로 새겨, this forming with a graving tool” 우상을 만든다 함은 “인간 자신의 총명으로부터 거짓 교리를 준비하는 것, 이는 자아사랑과 세상사랑을 좋아 하는 데에 말씀의 글자적인 의미를 적용시킴으로서 결과되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사랑이 인간을 지배할 때, 그 인간은 천국적으로부터의 어떤 계발속에 있지 않기 때문이고 단지 자신의 총명에서 모든 것을 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말씀의 글자적인 의미를 가지고 자신의 총명에 대한 증거로 삼는다. 그의 잘못된 적용과 거꾸로의 해석으로 인해 이 사람들은 말씀을 왜곡해버린다. 그런 후에도 이런 적용이나 해석이 자신들로부터 있기 때문에 매우 좋아한다”고 스웨덴볽은 「천국의 신비 제 10406항」에서 말해주고 있다.
금송아지(golden calf)란 위의 과정으로부터 결과된 것이다. 송아지란 “외적인 선, 자연적인 선, external or natural good”을 표현하고 우상으로서의 송아지란 “자연적인 기쁨, 또는 감각적인 기쁨, natural or sensuous delight”을 드높이는 것을 표현한다. 즉 우리가 자신의 항구적인 안내를 말씀에 더 이상 의존하지 않을 때, 그리고 신성한 진리로 자신속의 악들을 드러내놓게 하여 이를 극복하기를 중단할 때 우리속의 악들은 의기양양하게 우리의 심정을 차지할 뿐 아니라 지성까지도 점령해 버린다. 따라서 우리의 예배는 자아사랑이 목적이 되어 수행되어지고, 우리의 지성은 이 사랑과 일치하는 것들만을 추구하며 수락할 수 밖에 없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 다음 모세와 여호수아가 돌아왔다. 이는 갑작스레 우리가 신성한 진리와 그 심판을 마주 대하게 된다는 말이다. 아마 이런 일은 인생살이에 자주 오는 일일 것이다. 자신의 세상적인 생각대로 세상사가 잘 되어 그 방법에 익숙해져 있고 자신이 즐기는 우상도 잘 세워져 있는 모습 - 이 모습은 세상에서는 그야말로 모범적인(?) 케이스일는지 모른다. 이런 이들에게도 말씀으로부터의 어떤 인용이나 줄거리는 그들의 깊숙한 곳(home)을 찌르고 그들의 진짜 자아(real selves)에 정면으로 마주치게 될 때가 있다.
오늘 줄거리에는 두 가지 것이 발생했다. 산에서 내려 온 모세의 양손에는 하느님이 산꼭대기에서 다듬어, 하느님의 손가락이 새겨주신 십계명의 두 돌판이 들려져 있었다. 주님은 우리가 계명을 받되 사랑의 법칙으로서, 즉 높고 영적인 형태로서 계명을 받기를 우선 원하신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낮은 평면에서만 작동하고 있다. 후에 계명이 새겨진 두 돌판, 즉 궤 안에 놓여진 돌판은 산 아래에서 모세에 의해 다듬어져 새겨진 돌판이다. 결국 법의 글자는 거친 형태로 주어질 수 밖에 없다는 말이고 이 형태야말로 이스라엘 백성이 귀를 기울일 수 있는 형태요, 세상적이며 이기적인 우리일지라도 주님의 말씀에 청종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형태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금송아지는 파괴되었다 하더라도 빻아서 만든 가루는 그 백성의 마실 물에 혼합되어졌다. 세상욕과 자기 이익만 챙기려는 원칙(금송아지 숭배)은 잘못된 것이라고 우리는 인식해서 거절할 수 있을는지 모르나, 세상욕과 자아애의 부산물격인 거짓들(가루가 된 금송아지)은 우리 지성에 들어오는 진리와 계속 혼합되어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이세상에 살고 있는 한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에는 자아(self)라는 요소가 있음을 보고 인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참고 문헌 - 스웨덴볽의 저서에서
「천국의 신비 제 10407항」: “표현적인 예배속에 있었던 고대인들, 이들은 각종 동물들에 의해 의미되는 것을 알았다. 그 이유는 각 동물은 각 동물대로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 의미에 따라 천국에서 이 동물들이 나타나고, 이 의미에 따른 결과가 말씀안에서 언급되고 있다. 또한 이에 따라 고대인들도 번제물이나 제물을 정했다. ‘송아지’는 외적 또는 자연적 인간안에 있는 인애나 순진의 선이 의미되어졌다. 그러나 이런 선이 없는 때, 즉 내적인 것이 없이 외적인 것만 있는 사람 같은 경우에서 ‘송아지’는 자연적이고 감각적인 기쁨을 의미한다. 이것은 세상에 속한 것, 자아, 또는 탐욕, 육의 쾌락에서 오는 기쁨들이다. 이런 기쁨을 가진 자들이 내적인 것 없는 외적인 것만 가진 이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것들만을 예배하는데, 그 이유는 인간은 자기가 제일 사랑하는 것을 예배하기 때문이다. 아마 이런 자들도 자기들은 우주의 하느님을 예배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의 말은 입으로만 했을 뿐 심정으로 말하는게 아니다. 이런 사람이 금송아지를 예배하는 이들로 의미되고 있다.
에집트인들은 여느 사람들보다 더욱 이런 부류에 속한다. 그들은 타국가 보다 상응과 표현에 관한 지식을 더 많이 가졌는데, 그 결과 그들 스스로 다양한 우상물을 만들었는바, 이런 유물은 오늘날까지도 남아있다. 그중 그들에게 가장 중심이 된 우상은 송아지 였다. 이것 가지고 그들 예배의 외적인 선이 의미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들이 상응이나 표현의 지식이 여타 다른 것 보다 더욱 정통하게 되었을 때, 이들 사이에서 이 지식들은 마술로 변했다. 그러면서 송아지는 그 반대의 의미, 즉 외적 사랑의 기쁨을 의미하게 되었다. 이 송아지가 그들 신전에 놓여 신으로 예배되었을 때, 이 송아지는 예배에서 이와 같은 반대적인 기쁨을 의미하게 되었다. 이스라엘국가가 에집트에서 이런 우상적인 것들을 도입했을 때, 즉 송아지가 그들에 의해 신으로 예배되어졌을 때, 예배속에서도 그 국가가 사랑하는 것들의 기쁨을 의미하게 되었다.”
질문 정리
1) 이스라엘 후손은 시나이에서 얼마나 오래 야영했습니까?
2) 시나이산 꼭대기로부터 주님이 말하시는 무엇을 백성은 들었습니까?
3) 그 외 어떤 지시를 주님은 백성을 위해 모세에게 주었습니까?
4) 어디로 모세는 주님과 대화하기 위해 갔습니까?
5) 오늘 본문에서 그는 얼마나 오랫동안 그곳에 가 있었습니까?
7) 백성들은 아론에게 무엇을 요구했습니까?
8) 아론은 백성에게 무엇을 내놓으라고 했습니까?
9) 그는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만들었습니까?
10)모세가 산에서 내려올 때 그의 손에 무엇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11)금송아지를 예배하는 백성을 보고 모세는 무엇을 했습니까?
12)그는 이 송아지를 어떻게 했습니까?
13)아론은 자신을 어떻게 변명했습니까?
14)금송아지는 무엇을 그리고 있습니까?
15)첫 돌판과 후에 산아래서 다듬었던 둘째 돌판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질문의 답
1) 거의 일년 2) 계명 3) 행동 지침의 법, 예배에 관한 사항 4) 산꼭대기
5) 40일 6) 영원히 갔다고 7) 신들 8) 금귀고리 9) 송아지 10) 두 돌판
11) 돌판을 깨트렸다 12) 불에 태우고, 가루로 만들어 물에 뿌렸다
13) 불 속에 금을 던지니 송아지가 나왔다 14) 세상적 성공과 육의 쾌락을 사랑함
15) 첫 돌판 = 율법의 높고 영적인 형태
둘째 돌판 = 세상적인 사람의 수준에 적합한 율법의 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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