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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독심을 빼고 보리심을 심고 불과(佛果)를 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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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포교 선구자 선진규 법사(봉화산 정토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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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님 계신 가 가봐라.”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前 대통령이 세상을 떠나던 날, 부엉이바위에 있던 노 前 대통령과 동행했던 경호원의 대화이다. 노 前 대통령이 마지막으로 찾았던 원장이 봉화산 정토원장 선진규 법사이다.
선진규 법사는 1934년 4월 김해 한림면 장방마을서 3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노무현 前 대통령의 생가와 사저가 있는 봉화산 남쪽 기슭 반대편, 봉화산 북쪽 기슭이 선 법사의 고향집이다.
그는 낙동강 전선까지 밀려 내려온 북한군에 맞서 학도병으로 입대해 나라와 가족을 지키려 했지만 가족들의 만류로 여의치 않았다. 그러나 미24사단이 선진규 가족 소유의 과수원에 주둔하면서 그는 군속이 되었다.
“어린 나이에 전쟁의 한 복판에 있으며 너무나도 슬프고 가슴 아픈 모습들을 봤습니다. 이것이 제가 불교를 택한 이유입니다.”
학도병 선진규는 1951년 2월 이승만 대통령이 소년병들은 모두 복귀하라는 명령이 있었지만, 전방에 있던 터라 7월에서야 고향으로 돌아왔다.
“내가 좀 끈질기게 있거든.”
고교 졸업 후 선진규는 스님이 되고 싶었다. 부산공고 토목과를 졸업하고 출가를 위해 무작정 상경해 조계사를 찾았을 때, 권상로 스님(동국대 초대총장)을 만났다.
경전공부를 제대로 하고 싶어 학생 선진규는 해인사를 찾았다. 2학년을 마치고 3학년을 올라갈 무렵이었다. 행자생활을 하고 있는데 학교는 난리가 났다. 총학생회장 선출을 두고 4학년 학생들끼리 크게 다투자 당시 백성욱 총장은 3학년 학생을 총학생회장으로 하라는 명을 내렸다. 학생들은 대의원회의를 거쳐 학생 선진규를 총학생회장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선진규는 학교에 없었다.
그때 학생 선진규는 행자가 되어 해인사에서 <원각경> 수업을 듣고 있었다. 수소문 끝에 학생과 교직원이 해인사로 선진규를 찾아왔고, 그를 학교로 데려갔다. 먹물옷 입은 채 그대로.
백성욱 총장을 만나서도 선진규는 경전공부를 해야겠다고 고집했다. 그런 그에게 백 총장이 말했다.
총학생회장 선진규는 그 날부터 6개월간 매일 2시간씩 백성욱 총장에게 <금강경> 과외를 받았다. 경전공부도 하고 학생운동도 하며 선진규는 평생의 배필을 만났다.
선진규가 총학생회장을 하던 당시는 학생운동도 활발했지만, 보릿고개가 있던 시절로 삶이 궁핍한 때였다. 졸업을 코앞에 두고 선진규는 고민했다.
“불교에서는 관세음보살을 일심으로 불러도 모든 고통에서 벗어난다고 합니다. 하물며 중생구제의 원을 세운 부처님이 호미를 들고 민둥산 정상에서 개발을 위해 서 계신다면 그 원이 이룩될 것 아닙니까? 그래서 정토원 관음상은 호미를 들고 있습니다.”
민둥산이던 봉화산 꼭대기에 호미든 관음상이 봉안됐을 때, 당시 중1이었던 노 前 대통령도 식목행사에 참여해 관음상 주위에 나무를 심었다.
선진규 법사는 “노 前 대통령이 ‘일부러 부처님 근처에만 집중적으로 나무를 심었다’고 정토원에만 오면 이야기를 하곤 했다”고 말했다.
봉화산의 유래에 대해 선진규 법사가 말했다.“옛날 가락 때(가야국) 왕족의 번영을 위해 지은 암자가 세 곳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김해 무척산 모은암(母恩菴)과 양산 인근 부은암(父恩菴)이 왕비와 왕을 위한 곳이었습니다. 아들을 위한 태자암(太子菴)이 있던 곳이 봉화산이었어요.”
선진규 법사는 예전엔 봉화산이라고 안 부르고 태자암이 있다고 해서 자암산이라고 했다고 전했다. 이후 마을 사람들이 봉오산이라 부르는 것을 1962년 전국적으로 측량조사를 할 때 선 법사가 건의해 봉화산이라고 이름하게 했다. 뒤편에 봉수대가 있기도 했지만 호미든 관음상을 통해 주창했던 4대개발의 횃불을 높이 들자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선진규 법사는 “종교는 국경이 없더라도 종교인은 국경이 있어야 합니다. 중생의 부름에 답하지 않는 종교는 생명이 없는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호미든 관음상이 봉안되자 불교계서 말이 많았다. 비구ㆍ대처 싸움 속에 서로 이를 두고 또 다툼이 벌어졌다. 청년 선진규는 불교계에 “천수천안 관음보살이라는데 그 손에 호미만 들었겠느냐”라고 설명했다.
선진규 법사는 노무현 대통령도 호미든 관음상의 위신력으로 당선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청년 선진규는 졸업 후 백성욱 총장의 도움을 받아 봉화산 화일사를 봉화사(現 정토원)로 바꾸고 농촌계몽운동을 시작했다.
청년 선진규는 불교의 이상 세계를 현실에서 구현하고 싶었다. 원(苑)이라고 한 이유는 부처님 당시 녹야원이라는 곳에서 설법을 많이 했는데 불법을 널리 알리는 차원에서 이를 인용했다. 또 어감상 좋아 그렇게 지었다는 것이 선진규 법사의 설명이다.
토지 11만5703㎡(35000평), 35만원을 지원받아 창건된 봉화사는 본격적인 농촌운동의 산실이었다. 봉화사에서 선 법사는 1967년 사명대사와 만해스님 상(像)을 세웠고 1972년 조계종 중앙 상임포교사로 발탁됐다.
“12명이 신청해 4명이 초대 포교사가 됐는데, 첫 월급이 쌀 한가마니 값도 안되는 거에요. 함께 포교사를 하던 무진장 스님 등은 스님이니 그렇고…나는 처자식이 있는데 그것으로 어떻게 생활을 합니까? 그래도 버텼어요.”
포교사 선진규를 버티게 한 것은 ‘끈질김’이었다. 배고파서 그만 뒀다는 소리라도 들으면 다행일텐데, 재가자를 포교사로 뽑아놓으면 (근기가 약해) 금방 나간다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였다.
“개신교의 YMCA에 버금가는 시ㆍ군ㆍ구 단위까지 불교청년회 지부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못했지요. 안타깝습니다.”
“망할 수 밖에 없었어요. 사채 이자를 어떻게 당해내겠어요.”
선진규 법사는 “내가 아니더라도 불교계가 경매로 날린 24만평을 되찾아 청소년 도량으로 일궈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2000년 한국청소년수련협회장을 역임하면서는 “전국 공ㆍ사설 수련시설이 청소년의 심신 건강과 인성교육의 장으로 거듭나야한다”고 주장했다. 예절서당 프로그램을 창안해 전국 순회 예절 교육을 주도하기도 했다.
특히, 88올림픽 때에는 기획홍보실장을 맡아 불교 문화 콘텐츠인 유등을 이용해 10만 유등 문화행사를 열기도 했다.
“민주당 내에서 불교 이야기만 나오면 나를 쳐다본다. 나같은 사람이 여ㆍ야를 막론하고 곳곳에 자리하고 있어야 불교가 발전할 수 있습니다.”
선 법사는 노무현 대통령의 49재를 정토원에서 봉행한 것도 국민들로부터 불교 이미지를 높이는데 크게 작용했다고 말했다.
최근 사회 이슈화된 청소년 문제에 대해 선진규 법사가 말했다.
선 법사는 청소년 문제 해결방법으로 템플스테이를 제안했다. 무엇보다 더 이상 방관 말고 속히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선진규 법사는 대중의 부름이 있다면 4년 정도 대사회활동을 계속 펼칠 계획이다. 그러나 부름이 없다면 바로 보림에 들어가 바깥으로 향했던 자신을 수렴하며 회향할 생각이다.
“정적인 수행은 저와 잘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동적인 수행이 맞으니 지금까지 평생 포교를 해왔겠지요? 제가 누굽니까? (앉은 법사가 아닌) 선 법사입니다. 앞으로도 포교사로서 끈질기게 살아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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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_()_
지난 번 정토원에 다녀오니 이야기가 모두 다가오네요. 혹 정토원 구경을 못하신 분들은 사찰순례방을 열어 보세요. _()_
예전 25년전쯤 법사님이 대원정사에 인연이 되셔서 자주 법문 오셨지요. 청소년 포교의 선두 주자 법사님 뵈니 세월이 넘 빠르게 지나간 느낌 입니다....나무묘법연화경()()()
불교계의 인재양성과 청소년들에게 불교적 소양교육을 강조하신 선진규 법사님의 뜻이 원만히 이루어지길 합장합니다. _()_
선진규. 불교성 _()()()_
정토원에 이어 선진규 법사님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