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코튼은 영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목회자였고, 뉴잉글랜드에서 최고의 지성인이며 영적인 지도자였다. 1609년 리처드 십스의 설교를 듣고 회심하게 된 코튼은 십스의 초상화를 집 안의 잘 보이는 곳에 걸어 두고 그에 대한 특별한 존경심을 표하였다. 철저한 훈련을 거쳐 목회자가 된 코튼은 케임브리지의 세인트 메리 교회에서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설교에 유머와 기지를 발휘하는 것을 선호하던 당시의 요구를 배제하고, 퍼킨스가 주장한 평이체 설교를 도입하여 양심을 찌르는 설교를 행하였다.
그는 지성에 호소하는 설교를 지양하고 양심에 호소하면서 생활의 변화를 촉구하였다. 코튼의 학문성과 설교자적 자질에 대하여 듣게 된 링컨 주의 보스턴에 있는 성 보톨프 교회가 그를 담임목사로 청빙하자. 겨우 26세의 젊은 나이로 쟁쟁한 경쟁자를 가운데서 1,500여명의 성도가 모이는 대형 교회의 담임 목사가 된 것이다. 코튼 메더의 기록에 의하면 “위대한 개혁이 --보스턴에서 일어났다. 불경스러운 것들이 사라지고 미신이 폐지되었고 참된 종교가 모두에게 환영을 받았다. 보스턴 시의 행정 관료들은 물론이고 시장까지도 청교도라고 불려졌으며, 반면 사탄을 따르는 자들은 하찮은 존재가 되어 버렸다.”
1625년 찰스 1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코튼의 개혁 운동은 고비를 맞게 되었다. 대주교 윌리엄 로드가 고등 종교 법원을 열어 청교도들을 소환하여 신앙을 포기하게 하였고, 거부할 경우에는 모진 고문을 행하였다. 청교도들은 귀가 잘리거나 화인을 받았고 심한 경우에는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
1630년 윈스럽을 비롯한 청교도들이 신대륙으로 이민하기 위해 모였을 때 환송 설교를 코튼이 했다. 1632년 코튼도 소환되었고, 다음해 박해를 피하여 신대륙으로 이민하였다. 하버드 대학이 설립되면서 1637년 코튼은 이사로 선임되어 학교 설립과 발전에 공헌하였다. 그의 동료 매튜 스왈로우는 말이다. “그는 빈 바구니와 같은 공허한 강론으로 회중을 먹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하는 참된 유형의 설교를 고수하였다. 그의 설교는 교리만이 아니었고, 열정적이고 거룩한 대화로 빛을 발하였다. 그의 생애는 ‘살아 있는 소리’로, 곧 강단에서 촉구한 경건과 정의와 절제에 대하여 친히 모범을 보였다.” 그는 매일 기도와 명상으로 하루를 시작하였고, 하루 12시간 이상 성경을 연구하여 당시의 사람들은 그를 “걸어다니는 성경”이라고 불렀다.
코튼은 윈스럽을 도와 새롭게 출발하는 뉴잉글랜드 식민지를 경건한 사회로 만들고자 하였다. 그는 교회 개혁이 바른 신앙을 회복하는 데서 비롯되며 기독교 신앙은 오직 성경에 기초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오직 성경이 명한 대로만 예배하여야 한다고 믿었다. 코튼은 주일성수를 토요일 저녁부터 시작하여 주일 종일 지키는 것으로 하였고, 성경이 가르친 대로 예배를 회복함으로써 경건을 실천하고자 하였다.
그의 개혁운동으로 인하여 뉴잉글랜드 사회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서 경건한 성도들이 다스리는 ‘언덕 위의 도시’가 되었고, 그가 도입한 목요강좌를 통하여 뉴잉글랜드 청교도들은 매주 당면하는 문제에 대한 성경적인 답변을 얻을 수 있었다. 또한 ‘교회의 부활’ 사상을 통해 뉴잉글랜드에 천년 왕국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낙관적인 역사관이 미국인들에게 뿌리를 내렸다. 조나단 에드워즈나 찰스 하지와 같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천년 왕국이 임할 것이라는 확신으로 철저하게 교회 개혁 운동을 전개한 것도 코튼의 영향이었다.
- 오덕교, 『청교도 이야기』, pp 211-225 |
출처: 청교도의 길 원문보기 글쓴이: 강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