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광산에 못지 않은 극적 생환이 한국에도 많았다
조선시대 완도 앞바다 표류 최부 일행 43명
140여일만에 중국 거쳐 고향으로 돌아와
얼마전 칠레의 광부 33명이 지하 700m에 매몰돼 있다가 69일만에 극적으로 구조된게 세계적인 박수와 격려를 받았다.
광부들을 구해낸 것은 첨단기술이었지만 세계인들의 관심이 집중됐던 것은 33명이 지하에서 어떻게 오랫동안 생활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삶과 죽음이 엇갈리는 엄청난 중압감과 절망속에서 광부들은 인간으로서 최대의 고통을 느꼈을 것이다.
그 와중에 매몰된 갱안에서 절망한 광부들을 격려하고 우리는 반드시 살아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준 사람들이 있었다.
세계인들은 첨단기계 보다 다른 사람을 격려하고 희망을 준 광부에게 큰 박수를 보냈다.
우리 역사에도 절망에서 희망을 건진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들은 돛단배를 타고 다니던 시절에 바다위에서 표류를 당했던 사람들이다.
비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는 망망대해는 매몰된 700m 지하와 다름없다. 강진의 남쪽 바다에서도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났다.
탐진최씨인 최부(1454~1504)란 사람은 1488년 (성종 19년) 추세경차관이라는 벼슬을 달고 제주도에 들어갔다. 제주도에 들어온 죄인이나 정치범들을 잡는 임무였다.
그러다가 제주도에서 활동한지 한달 반이 조금 지난 어느날 전남 나주의 고향에서 부친상을 당했다는 부고가 당도했다.
때는 겨울이었으나 최부는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1488년 1월 3일 제주도를 출발해 육지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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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부 일행의 표류 바닷길과 귀국길> |
본선 뒤에는 배에 식수를 공급할 거룻배도 따라왔다.
별도포를 떠나 노를 저어 5리쯤 나아가자 바람과 파도에 휩싸여 표류를 하기 시작했다.
최부 일행은 9일 동안 바다위에서 표류한 후 1월 11일 저녁에 중국 절강성 영파부 주산열도에 도착해 간신히 목숨을 건진다.
그러나 최부일행은 왜인으로 오인받아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다.
최부일행은 온갖 고초를 겪은 다음 조선인으로 밝혀져 항주로 이송됐고, 이어 대운하를 거쳐 북경에 이르렀으며 다시 요동을 경유해서 조선으로 돌아왔다.
최부일행이 항주~소주~ 덕주~천진~북경~요양을 거쳐 조선땅 의주에 도착하기 까지 장장 126일이 소요됐다.
최부는 바다 위에서 13일 동안 표류하면서 두가지 적과 마주쳤다고 한다. 하나는 언제라도 배를 삼킬지 모르는 풍랑이었고, 또 하나는 풍랑보다 무서운 내부 갈등이었다.
1488년 1월 3일 제주도를 출발한 배가 바람에 밀려 거침없이 대양으로 빠져들자 배는 절망감에 휩싸이고 뱃사람들은 노골적으로 최부를 원망하며 어차피 죽기는 마찬가지라고 떠들어대며 윗사람의 지시를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
비와 바람은 그치지 않았고 산더미 같은 성난 파도는 쉬지 않고 뱃전을 때렸다. 있는 힘을 다해 물을 퍼내어도 배안의 물은 줄어드는 것 같지 않았다.
온몸이 바닷물에 젖어 추위는 뼈를 깎아 내는 듯 하였다. 고통을 견디지 못해 목을 매어 자살을 기도하는 자도 있었다.
마침내 부친의 부고를 가지고 왔던 집안 하인 막쇠가 "청컨대 옷을 갈아입으시고 죽음이 이르시기를 기다리시도록" 권고하자 최부도 상관과 상복을 갖추고 인장과 마패를 품안에 넣은 다음 하늘에 절절한 축원을 올렸다.
"신이 어떤 죄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만약 신에게 죄가 있다면 신에게 만 벌을 주어야 옳습니다. 같이 배를 탄 40여명이 죄없이 물에 빠져 죽게 되었습니다.
바라옵건데 하늘이시여 이 궁박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어 바람을 돌리고 파도를 잠재워 주십시오"
죄가 있다면 자신에게만 벌을 내리고 죄없는 다른 뱃사람들은 살려달라는 기도는 뱃사람들을 상당히 감동시켰을 것으로 보이는 부분이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배안은 온통 울부짖는 소리로 가득하였다.
하늘로 쏘아대는 듯한 물보라와 배가 뒤집힐 것 같은 파도는 계속됐다. 바람과 파도 소리는 점점 커지며 배의 속력도 빨라졌다.
선원들은 용신에게 빌어야 한다며 배에 있던 물건들을 던지기 시작했다. 용신에게 빌어서 우선 사람이 살아야 하고 물건은 몸뚱이 밖이라는 것이었다.
최부가 말렸으나 선원들은 앞다투어 옷가지, 군기, 철물, 실량 등을 바다로 던져버렸다.
선원들의 행위는 용신을 달래지 못했다. 밤이되자 더욱 사나운 파도가 넘실댔다. 파도가 선실 천장으로 덮쳐 사람들의 얼굴위에 쏟아졌다. 사람들이 눈을 뜨지 못하고 아비규환이었다.
최부도 자포자기하고 홑이불을 찢어 몸뚱이를 여러번 묶고 배의 한 귀퉁이에 꽁꽁 묶었다. 파도에 휩쓸려 죽은뒤 시체와 배가 서로 떨어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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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69년 발행된 일본어 목판본 표해록에 실린 삽화. 최부일행이 탄 배가 난파되는 장면을 그렸다. |
장한철 일행이 표류할 때도 속장을 하는 장면이 보이고, 1970년대 초반 전남 강진군 강진읍 남포마을에서 돛배를 타고 제주도 추자도로 멸젓을 사러다니던 상인들도 큰 파도를 만나 속장을 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다시 힘을 낸 최부는 한 선원에게 외친다.
"파도가 비록 험하고 일의 형세가 급박하지만 배가 실로 굳고 탄탄해서 쉽사리 침몰하지 않을 것이오.
만약 능히 물을 퍼내어 거의 없어진다면 살아날 수 있을 것이요.
그대는 실로 강건하니 선실 밖으로 나가 힘껏 구령을 붙이면서 물을 퍼내는 일을 먼저 주도하시오"
최부의 명령을 받은 선원이 물을 퍼내고자 했지만 물을 퍼낼 그릇들이 모두 깨져 없는 상태였다. 구령을 붙이며 물을 퍼내도록 부르짖는 일도 다 소용이 없어졌다.
다행히 다른 선원이 북의 가죽을 찢어주어 그것으로 물을 퍼내기 시작했다. 자포자기 하고 있든 군인들을 독려해 7~8명이 서로 돌아가며 물을 퍼내자 겨우 배가 가라앉는 위기를 벗어났다.
자신도 속장을 준비할 정도의 상태까지 갔지만 다시 힘을 내서 자포자기 상태의 선원들에게 물을 퍼내자고 독려해서 배의 침몰을 막는 드라마 같은 장면이다.
위기에 맞서고 극북해 가는 최부의 절박한 지도력이 아니였다면 43명의 목숨은 바다 한가운데서 안전을 보장받지 못했을 것이다.
돌풍이 잦아들자 이제는 기갈이 일행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식수를 싣고 본선을 따라오던 거룻배는 벌써부터 행방불명되었고, 뱃사람들이 성난 용신에게 바친다고 옷과 양식을 다투어 바다에 던져버린 이후라 배에는 마실물과 쌀이 부족했다.
최부는 개인의 행장을 수색토록해서 귤 50여개와 술 두동이를 찾아내었으며 이를 공동 관리시켜 극도로 입이 마른 사람에게만 조금씩 나누어 마시게 했다.
최부는 호소했다.
"한 배에 같이 타고 있으면 멀리 떨어진 북쪽 오랑캐나 남쪽 오랑캐 조차 한 마음이 되는 법이고. 하물며 우리들은 모두 같은나라 사람으로서 정이 골육을 나눈 형제와도 같소. 살면 모두 한꺼번에 살고 죽으면 모두 한꺼번에 죽는 마당에서 대지 이 감귤과 술 한방울이 천금과 같소"
귤과 술이 모두 동나자 마른 쌀을 씹어먹는 사람도 있고 자기 오줌을 받아마시는 사람도 있었으나 얼마후에는 오줌마저 나오지 않았다.
선원들은 가슴 속이 건조해서 목소리와 숨소리를 밖으로 내지 못하고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이 대목에서는 칠레의 광부들이 이틀에 참치 두 조각과 우유 반컵을 먹으며 연명했다는 것과 비슷한 상황을 느끼게 한다.
다행히 비가 내렸다. 최부가 행장에 담아둔 옷 몇벌을 꺼내어 비를 받아 적시어 빗물을 짜서 몇 병을 저장했다.
선원들에게 물을 숟가락으로 나누어 먹이기 위해 숟가락을 집어들자 배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입을 벌렸다. 그 모습이 마치 새끼 제비들이 먹이 주기를 바라는 듯한 모습이었다고 최부는 적고 있다.
이런일도 있었다. 최부일행이 탄 배가 표류 8일째 되던날 저녘 어떤 무인도에 표착했다.
뱃사람들이 기뻐하며 급히 배에서 내려 계곡을 찾아가 먹을 물을 손으로 떠서 마셨다. 또 물을 길러와 밥을 지으려고도 했다.
최부는 극도로 굶주리면 오장이 바짝 달라붙게 되어 만일 갑작스럽게 밥을 먹어 배가 부르면 반드시 죽게 될 것이라며 먼저 미음물만 마시고 죽을 먹는게 좋겠다고 권했다. 사공들은 최부의 말대로 해서 탈없이 배를 채웠다.
최부는 이렇듯 어떤 상황에 대해서도 냉정함을 잃지 않고 뱃사람들의 건강까지 챙기는 모습을 견지한다.
최부 일행이 탄 배는 결국 43명 중 한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중국 절강성 호산반도에 표착한다. 최부의 지도력이 없으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계속>
첫댓글 좋은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