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하면 떠오르는 게 뭘까. 예전에는 능금, 미인, 무더위. 요즘엔 완고함, 박정희 부녀, 수구보수. 젊은이들 사이에서 대구는 ‘고담시티’로 불린다. 영화 <배트맨>에 등장하는 거악(巨惡)의 소굴이자 본산. 청산해야 할 적폐의 본고장 고담시티. 일반화가 야기하는 필연적인 오류에도 일말(一抹)의 진실은 있다. 우직할 정도의 고집스러움과 제 것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근자감 (근거 없는 자신감) 같은 것이 대구에는 있다. 혹자는 ‘대구정서’라고도 한다.
경북대에 부임한 지 25년 지나는 시점에 대구를 생각한다. 286컴퓨터를 쓰던 1992년에 몸담은 대학생활이 한 세대에 이르렀다. 열혈청년이 초로에 접어든 형국이니, 어찌 회한이 없겠는가?! 공중전화가 삐삐로, 묵직한 이동통신 단말기를 거쳐 무선전화기로, 그리고 스마트폰으로 변신을 거듭했던 광속의 시간대. 세로쓰기와 한자를 고집하던 신문들이 가로쓰기로 전환했던 시기. 문민정부를 거쳐 평화적 정권교체와 ‘국제통화기금사태’가 있었던 격동의 전환기.
25년 동안 내가 피부로 느끼는 대구의 유일한 변화는 최고기온이다. 1994년 여름 3주 내내 지속된 열대야와 39.4도까지 치솟은 무더위를 기억한다. 아스팔트마저 녹아내렸던 전설의 흑역사! <응답하라 1994>에 그런 모습이 나왔는지는 모르되, 역대급 무더위였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지금은 한낱 추억이 되고 말았다. 아주 덥지도 춥지도 않은 도시 대구.
25년 세월에서 거대도시 대구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 것은 분명 내 탓이다. 둔감하거나 익숙해졌거나, 그것이 원인일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변화를 거부하는 대구 시민들의 생래적인 완악함이 까닭일 수도 있겠다. 각설하고, 경북대 인문대학은 ‘인문학기획위원회’와 ‘인문학술원’을 발족시킨 이래 칠곡군과 부산 기장군 같은 소규모 지자체와 협업해왔다. 칠곡군은 인구 13만, 기장군은 인구 16만 정도의 아담한 규모다. 대구는 250만 아닌가.
칠곡군에 ‘구상문학관’이 개관한 것은 2002년 10월 4일. 대구 시민들 가운데 구상 시인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터. 시인이 1953년부터 20여 년 왜관에 정착하여 문필활동을 전개했다 하여 군(郡) 당국이 나서서 지은 구상문학관. 그로부터 12년 세월이 지나 2014년에 ‘대구문학관’이 개관한다. 대구의 자랑인 현진건, 이상화, 이장희 세 분이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아마 광역시 포함해서 지자체 가운데 가장 늦은 행보 아닌가 한다. (수필문학가 한세광 선생을 기리는 ‘흑구문학관’이 인구 51만의 포항시에 개관한 것은 지난 2012년 일이었다.)
대구를 거점으로 활동한 이육사 시인을 기리는 ‘이육사 작은 문학관’도 작년에 개관했지만, 대구시는 행-재정적인 지원을 외면하고 있다. 그런 문학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나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대구행정은 지나칠 정도로 공무원과 정치가 중심으로 진행돼온 감이 크다. 거점국립대인 경북대에 여태 지하철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사실 만 봐도 그렇다.
그런 대구시가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지난 3월 21일 나는 ‘대구시민대학’ 강연회에서 <대구와 문학>이란 제목으로 300여 시민을 대상으로 강연했다. 한국 근대문학에서 대구와 연관된 시인과 소설가를 살펴보는 시간이었다. 자리를 빼곡하게 메운 시민들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크고 작은 지자체에서 오래 전부터 베풀었던 인문학강연이 고담시티 대구에도 상륙한 것이다. 실로 놀라운 변화다.
이런 유쾌한 변화가 몰고 올 대구의 미래를 생각한다. 자연과학과 공학이 눈부시게 현현하여 변화속도마저 가늠하기 어려운 4차 산업혁명시기. 그럼에도 우리의 본령을 지탱하는 것은 인문학이다. 기술과 공학의 뼈대를 튼튼히 하고 자연과 교감하면서 창조와 생을 인도하는 인문학. 생명 가진 것들의 생장과 변화와 소멸을 응시하고 본원적인 내면을 성찰하는 인문학. 이제야 당도한 대구의 작은 변화를 보면서 대구의 도약과 웅비를 기원한다.
<경북매일신문>, 2017년 3월 24일자 칼럼 ‘파안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