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 나그네
‘걷기도’를 잘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이번에는 천안 역에서 태안 몽산포까지 100킬로 남짓 걸었습니다. 올해로 7년째 이어가는데 이전 여러 경우와 달리 날씨가 비교적 따듯하고 하늘이 맑았습니다. 왜 늘 추운데 길을 나서냐고 묻는 분이 있습니다. 사실 연중에는 길 나설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봄, 가을에는 그야말로 나들이지요. 기왕 사서하는 고생이라면 가장 혹한기를 겪어보려는 고집도 담겨있습니다.
첫 날, 오후 늦게 천안 단비교회를 향했습니다. 단비교회 한옥예배당 안에 꾸민 사무실 방에서 따듯하게 첫날밤을 지냈는데, 메주 띄운 냄새가 물씬 배어나오는 그런 방이었습니다. 아침에 청국장 김치찌개에 밥 두 공기를 든든히 먹고 천안 역으로 향했습니다. 낯선 길에 나서면서 답사를 걸렀기에 약간의 부담이 있었지만 스마트 폰이란 믿는 구석이 있었습니다.
남들 보란 듯 천안역 광장에서 맨손체조를 하고 온양온천으로 방향을 잡아 떠났습니다. 아산, 예산, 홍성, 태안 등 충청도 읍내와 마을들은 대도시처럼 들떠 있지 않고 오가는 인적도 분주하지 않았기에 그냥 편안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확장한 도로마다 고속질주 하는 자동차의 소란함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온양, 도고, 덕산 그 유명한 온천을 그냥 지나쳤습니다. 해질 무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산에서 바라본 하늘은 참 넓었습니다. 예전에 프랑스 사르뜨르에서 본 지평선과 넓은 하늘이 연상될 정도였습니다. 아마 그리 넓고 푸른 하늘이 있기에 예산사과가 유명한 모양입니다. 예산은 평야와 저수지와 함께 ‘의좋은 형제 이야기’로 유명합니다. 이 지역에서 역사적 인물이 많이 났더군요. 아산과 홍성에 이르는 동안 유관순, 김좌진, 한용운 등 동상을 차례로 볼 수 있었는데, 어쩌면 그리 유치찬란하게 만들었던지 속이 상했습니다.
홍성에서는 한 25년 전 쯤 어죽을 먹었던 좋은 기억이 있습니다. 아직 아이가 없던 신혼시절에 아내와 함께 그곳에 있는 시골교회를 방문했다가 흐믓한 맛의 어죽을 먹었습니다. 요즘은 사람들이 어죽을 별로 찾지 않는다는 말에 실망스러웠습니다. 대신 서산 천수만 간척지의 A와 B 방조제 사이에 있는 간월도에서 먹은 손칼국수는 일품이었습니다. 칼국수를 덮은 바지락을 먹다가 이미 배가 불렀습니다.
어림잡아 거리를 삼등분하여 하루 걸을 분량을 정하는데, 늘 저녁 식사와 잠잘 곳 때문에 변수가 생깁니다. 식당은 많은데 입이 짧은 처지에 기웃거리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싸구려 여관과 민박집에서 묵은 이틀 밤은 얼마나 허술한지 아직도 웃풍이 몸에 밴듯합니다. 민박집은 결코 겨울철에 묵을 일이 아니더군요.
그래도 나그네 발걸음이 고달프지 않은 까닭은 짧은 쉼조차 새 힘을 주기 때문입니다. 하루 걷기를 마무리하면 더 이상 100m도 못 걸을 듯 다리가 무거운데, 하룻밤을 자고 나면 또 35km를 걸을 너끈한 힘을 주시더군요. 몸의 회복능력이 얼마나 고마운지, 그래서 ‘내일의 해는 내일 또 떠 오른다’는 말이 있는 모양입니다.
여정의 종점은 몽산포 색동외갓집입니다. 지난여름 우리 교회 교회학교 수양회를 한 곳입니다. 저녁나절, 겨울 해변은 하늘가득 눈보라로 채웠고 검은바다는 세찬 바람으로 내내 으르렁거렸습니다. 몽산포는 금새 어두워졌습니다. 방향을 잡아 문홍빈 권사님 댁 빈집으로 가던 중 어느새 사위가 깜깜해져 그만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30분 쯤 마을 한 복판에서 헤맸습니다. 스마트 폰도 시골동네에서는 쓸모가 없더군요.
겨우 한 구조대원을 만나 가까스로 목적지에 닿을 수 있었습니다. 고마운 대원의 이름은 두 어 시간 전에 갑자기 전화를 한 후 6시까지 몽산포에 오겠다고 한 정기준 권사님입니다. 함께 길동무가 되어 쏟아져 내리는 눈을 거스르며 다시 천안 역까지 돌아왔습니다. 3일 걸어온 길은 겨우 자동차로 1시간 반도 안 되는 짧은 거리였습니다. 가족의 환대를 받으니 우리 집 거실조차 어찌 그리 따듯한지 그야말로 추위조차 생각하기 나름이더군요. 고맙습니다.
“나는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사오니 주의 계명들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시 11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