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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니남편 입니다. |
축구에는 후반전이 있습니다.
시리즈는 잠시 멈춰두고 여러분께 잠시 알리는 글 을 올릴까 합니다.
남북의 화해와 협력을 위해 노력하시다가....
안타깝게 희생당하신 고 정몽헌 회장님의 3주기가 열린다고 합니다.
남북 관계가 경색된 요즘 회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가져 주시기 부탁 드립니다.
저도 이번 주말을 계기로 해서 사진전에라도 찾아 갈 예정입니다.
금메달 획득 북한 계순희/“「남쪽 언니들」 고마워요”
[경향신문] 1996-07-28 (사회) 기획.연재 23면 1263자
◎미국서 연습파트너로 함께 훈련/한국선수 다무라공략법 가르쳐
남과 북이 하나가 되어 만든 올림픽 금메달이었다. 북은 경기에서 이기고 남은 뒤에서 연습상대가 되어주고 기술을 가르쳐 주었다.
27일 새벽 애틀랜타 조지아 월드콩그레스센터 유도장. 그곳에선 큰 이변이 일어나고 있었다. 무명의 북한 여자 선수 계순희(16).
그녀가 4년무패의 일본 유도 영웅 다무라 료코를 꺾고 단숨에 세계1인자가 되었다.
그것은 남과 북이 한몸이 되어 이루어 낸 남북합작품이다.
아픈 몸으로 결승에 올랐던 투혼의 은메달리스트 현숙희선수(24·52㎏급)가 뒤에서 열심히 밀었다.
두 「희야」는 지난 11일 애틀랜타 그레디고교연습장에서 난생 처음 대면했다. 같이 유도를 하지만 남과 북으로 갈린 조국때문에 단 한번도 만날수 없었다.
그러나 가슴속에 도도히 흐르는 동포애로 남과 북의 여자유도선수들은 금방 친해졌고 나이 어린 계선수는 「처음 본 남한 언니」들을 스스럼없이 따랐다.
한국의 언니들도 달랑 혼자서 올림픽무대에 나선 계선수를 친동생처럼 대해 주었다. 남과 북의 여자유도선수들은 훈련을 하며 자연스럽게 친해졌고 계선수가 「지도교사 박철 동무」를 연습상대로 삼아 훈련하는것을 보며 파트너를 자청했다.
박 감독도 김관현 여자유도감독에게 계선수의 파트너가 돼줄 것을 요청했다. 특별히 부탁하고 허락할 필요도 없었다. 처음에는 이경근 한국여자코치가 시험삼아 계선수를 「잡아」주었다. 이코치는 깜짝놀랐다.
힘이 엄청나고 워낙 공격적이어서 88서울올림픽금메달리스트인 그도 쩔쩔맸다. 그 모습을 관심있게 지켜보던 현선수는 『야, 「순희 동무」 대단한데』하고 농담하며 훈련파트너를 자청했다.
『다무라가 워낙 강해 상대선수들이 주눅들어 제기량을 발휘하지 못하니까 순희 너는 쉴사이없이 공격해.
상대는 너를 전혀 모르니까 아마 네가 과감하게 공격하면 당황할거야』
「숙희」의 조언에 어린 「순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를 악물었다.
『언니가 많이 도와주었어요. 잡아주기도 했지만 다무라의 유도스타일을 이야기해주고 경기운영방식도 가르쳐 주었습니다.
숙희 언니가 도와주어서 더욱 할맛이 났어요』.
계순희도 남쪽 언니의 고마움을 잊지않았다. 코치가 상대가 되어주지만 남자이기에 아무래도 훈련이 쉽지않았다. 뒤늦은 올림픽참가결정으로 혼자만 나서게 된 계선수.
난생 처음 북한땅을 떠났다는 그녀에게 남쪽의 친절한 언니들은 말벗이 되어주기도 했고 금메달훈련파트너가 되어줌으로써 멀고 먼 미국 애틀랜타가 결코 낯설지 않았다.
하나가 된 남과 북. 일본의 철옹성은 그렇게 깨졌다.
<애틀랜타=이영만·권부원 특파원>
북한에 첫금 안겨준 유도선수 계순희
[경향신문] 1996-08-05 () 기획.연재 25면 3482자
◎눈부신 16살 소녀 올림픽 신데렐라
장막을 걷고 첫 해외나들이 올림픽무대. 소녀는 단숨에 일본 영웅 다무라의 크고 넓은 매트를 점령했다. 그리고 찬란히 빛났다.
우리네 ‘복사골 순희’와 조금도 다름없는 계순희.
누구에게도 기죽지 않는 북녘의 신세대.
신화가 시작됐다.
「빛」이 크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장막에 가려있었기 때문이다. 단 한번도 세상에 노출되지 않은채 베일에 가려져 있다가 올림픽무대에 나타났다.
그리고 다른 모든 빛들을 삼켜버렸다.
다무라 료코. 21세.
세계의 매트를 주름잡은 일본 여자유도의 영웅. 17세 어린 나이에 매트를 평정, 4년간 장기집권을 했다.
93, 95세계선수권대회, 94년 아시안게임 챔피언. 기술은 변화무쌍했고 공격은 집채 크기의 파도처럼 거셌다. 누구도 그녀 앞에선 머리를 들지 못했다.
뉴스위크지는 96애틀랜타올림픽에서 절대 질 수 없는 20명의 후보중 그녀를 으뜸으로 꼽았다. 일본은
「만약 일본이 단 1개의 금메달을 딴다면 그것은 다무라일 것」
이라고 추어올렸다.
당연했다. 거칠것없는 82연승. 그녀의 빛나는 성에는 어떤 빛도 스며들 수 없었다.
96애틀랜타올림픽 여자유도 48㎏결승전.
다무라는 이리저리 끌려다녔다.
색색가지 기술은 모두 어디 갔는가. 당찬 고함소리는 또 어디로 사라졌는가. 4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악몽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당할 수 있는가.
이름도 얼굴도 알려지지 않은 16세 수줍은 애송이에게.
계순희. 북녘땅 우리동포.
장막을 걷고 튀어나온 그는 단숨에 다무라의 크고 넓은 매트를 점령하고 찬란히 빛났다.
그토록 의기양양했던 다무라는 경기내내 숨을 죽였다. 바위덩어리와의 싸움. 계순희는 쉽게 잡히지도, 끌려 오지도 않았다. 마침내 고개숙인 다무라.
『뭐가 그리 대단했던가요. 듣던 것보다 훨씬 못했어요. 올림픽이라고 해서 엄청난줄 알았는데 인민대회보다 못한것 같았어요.
만경대상대회 우승이 올림픽보다 더 어려웠어요, 인민들에게 기쁨을 안겨주어 행복합니다.
남조선언니들이 많이 도와주었어요.
연습상대를 해주어서 정말 좋았어요.
언니들과는 말도 잘 통했습니다』
이변의 4분 드라마. 그러나 각본은 이미 짜여져 있었다.
지난 4월 평양. 만경대상 체육대회 유도 오픈체급 경기. 체급에 관계없이 모든 선수가 함께 싸우는 대회. 이를테면 우리 씨름의 천하장사대회 같은 것. 48㎏과 70㎏선수가 맞붙었다.
어른과 아이의 싸움. 하지만 거구의 어른들이 맥없이 나자빠졌다. 관중들의 입에선 탄성이 쏟아졌다. 상대의 힘을 빌려 상대를 제압하는 유도. 가장 작은 체구의 나이어린 소녀가 제1봉에 올랐다. 그 소녀가 바로 계순희였다.
우리네 시골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얼굴. 예쁘지는 않지만 정감이 가는 얼굴. 낯가림하듯 돌아서면서도 마냥 빼지만은 않는 태도.
계순희는 그냥 우리네 복사골 「순희」와 조금도 다름 없었다.
남한사람 앞에서도 주눅들지 않는 그쪽의 신세대. 쉽게 입을 열지않고 수줍어 하면서도 입을 열면 할말을 다했다.
평양태생. 출판사에 근무하는 아버지, 광복고등중학교 교사인 어머니. 소녀는 비교적 괜찮은 집안에서 자랐고 똘똘했다. 초등학교때는 공부를 잘해 소년단위원장을 맡았다.
유도는 10살때 시작했지만 모란봉체육학교에 입학하며 본격적인 선수생활을 했다. 박철 감독이 그의 재질을 알아보았다. 1m57의 작은 체구. 그러나 힘이 장사였다.
무엇보다 배짱이 두둑했다. 승승장구. 94년 4월 만경대상체육대회 우승. 그리고 2년동안 한번도 지지 않았다.
하지만 바깥세계로 가는 길이 없었다. 나라가 편치않았다. 올림픽의 해가 와도 소용없었다. 하지만 하늘은 무심하지 않았다. 뒤늦게 올림픽참가가 결정되었다. 와일드카드까지 나왔다.
유도여왕 계순희. 와일드카드는 당연히 그녀의 몫이었다. 처음으로 나선 장막 밖 세계였지만 거치적거리는 것이 없었다. 강자에겐 아무리 두꺼운 장막도 장애가 되지 않았다.
『아무것도 부럽지 않아요.
당당하면 다 통하는 법이거든요.
복잡한 건 싫습니다』
다무라의 철옹성을 무너뜨리고 신화를 만든 계순희. 세상에서 가장 순진한 매트여왕.
◎계순희의 몇가지 이야기들/천하태평의 겁없는 소녀/‘모르고 맞붙는게 즐거워’
계순희는 천하태평이었다고 한다. 어려서인지 배짱이 두둑한건지. 오전중에 4강진출을 확정짓고 박철감독의 『잠 자라』는 지시를 받고는 오후 준결승 시작 30분전까지 잠을 잤다고 한다.
긴장한다거나 흥분된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결승전에 출전했을 때도 다무라가 발을 구르고 소리를 지르며 전의를 다졌는데도 계순희는 팔장을 끼고 의자에 떨썩 앉아 있었다.
다무라를 알고있었느냐는 질문엔
『몸놀림이 빠르다는 정도만 알았어요. 상대를 잘 알지 못하고 맞붙는 편이 즐거워요』
라고 잘라 말했다. 박철
감독은 그녀를 『겁이 없는 아이』라고 말했다.
계순희가 다니는 모란봉고교는 평양중심부에 있는 엘리트교육기관이다. 전국의 문화· 스포츠분야 영재들을 모아 철저히 소질을 계발시킨다. 자기의 전공분야에 대해서는 프로들처럼 고된 훈련과 연습을 시키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유도에서 금메달을 처음 땄다.
1979년 8월2일 평양출생. 9월에 평양체육대 진학예정.
<애틀랜타=이영만 기자>
◎취재수첩/따뜻했던 남쪽 유도 언니들… 남과 북이 만든 금메달
70년대, 외국 어느곳에서 남한사람과 북한사람이 만나면 서로 도망갔다. 둘다 「조심하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외국인 보다 더 무서운 동포. 하지만 이젠 아니다.
특히 체육인들은 교류가 잦아 친하게 지낸다. 단 정치이야기는 빼고. 정치는 남쪽이나 북쪽이나 다 골치아프다. 정치이야기를 하게 되면 결국은 싸움을 하게 된다. 국민 대 인민으로 만나는 남과 북은 그렇게 소원하지 않다.
북의 훈련을 도와주는 남쪽. 70년대 같았으면 어림없었다. 계순희의 「깜짝 금메달」 뒤에는 남쪽언니의 도움도 적지않았다. 함께 훈련하며 함께 만든 금이었다.
달랑 혼자 온 계순희. 훈련파트너가 없었다. 한국의 「언니 선수」들이 앞다투어 그를 잡아주었다. 바로 위체급인 현숙희가 가장 많이 훈련파트너가 되었다.
북한의 코치도, 한국의 감독도 적극적이었다. 남과 북이 함께 만들어가는 올림픽 금메달. 연습하며 계순희를 잡아본 현숙희는 어린 소녀의 실력에 깜짝 놀랐다.
그러나 금메달은 생각지 않았다. 북한의 박철 코치도 은메달 정도로 예상했다. 금메달은 무패의 최강자 다무라의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계순희는 달랐다.
어려울 것 없다고 여겼다. 자신감, 그리고 따뜻하게 잡아준 남쪽 유도선배들의 손이 그를 단 한번에 세계정상에 올렸다.
『재미있니』
『그럼요. 유도를 하루라도 하지않으면 잠이 오지않아요』
『요즘 북한은 어때』
유도이야기엔 신을 내다가 딴 이야기만 나오면 입을 다무는 계순희.
16세 인민체육인.
그는 올림픽금메달로 첫 나들이에서 인민체육인이 된다. 승용차, 아파트등 많은 특전이 있다.
그러나 그의 목표는 인민체육인이 아니라고 했다. 더욱 많이 이기고 더 많은 메달을 따서 인민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했다.
티없이 맑은 계순희. 돌아가면 영웅칭호를 받을 계순희. 하지만 돌아서는 길은 왠지 서글프다. 더욱이 요즘 북녘은 작년에 이어 홍수피해를 입었다.
고난의 행군 시기에 수해복구를 하고 있는 이북 주민들과 절약 운동 포스터
애틀랜타 최대 이변 「계순희 드라마」
[조선일보] 1996-07-28 (사회) 기획.연재 31면 1414자
◎「84연승의 일 자존심」 꺽는 16세 북한 소녀
/10살때 유도시작,현재 「초단자격」/북 무제한급까지 석권 “꼬마장사”
한국이 「골드침묵」에 빠져있던 27일 새벽. 자그마한 체구의 북한 소녀 계순희가 애틀랜타 올림픽무대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여자 유도 48㎏급서 일본 유도의 상징인 다무라 료코(20)를 꺾고 금메달을 따낸 것이다.
세계언론의 관심은 국제대회 84연승을 구가중인 일본의 영웅 다무라 료코의 패배와 「무적」을 꺾은 계순희가 누구냐는 두가지였다. 그러나 속시원한 자료는 없었다.
외신들은 할 수 없이 계순희를 「전혀 알려지지 않은(a complete unknown)」 「완전한 무명(totally unknown)」이라고 불렀다.
계순희는 애틀랜타가 첫 국제무대. 「강자들이 경계해야 할 대상은 기존스타가 아니라 무명」이란 스포츠 격언을 증명해 보였다.
다무라는 유도종주국을 자처하면서도 번번이 한국에 자존심을 꺾여온 일본이 마지막으로 믿었던 선수였다. 결승직전 조지아월드콩그레스 유도경기장은 일본응원단의 함성으로 가득했다.
다무라를 믿고, 금메달을 확신한다는 뜻이었다. 계순희는 경기종료 30여초를 남기고 왼발발뒤축 되치기로 효과를 뺏으며 그 함성을 잠재워버렸다. 일본응원단은 깊은 침묵에 빠졌지만 다른 관중들은 긴 탄성을 내질렀다.
1m57, 올 16살난 소녀의 다부짐과 이변의 짜릿함에 몸을 떨었다.
승리의 기쁨에 겨워하는 계순희는 「동토의 땅」의 소녀같지 않았다. 해맑은 얼굴의 계순희는 한국 TV방송과의 인터뷰에선 『…정말 좋아요!』라며 감정을 감추지도 않았다. 본인도 뜻밖일 정도로 계순희의 우승은 의외였다.
북한이 뒤늦게 애틀랜타에 참가하는 바람에 계순희는 각종 국제대회를 통해 출전권을 얻은 것이 아니라 「와일드카드」를 받아 출전케 됐다. 그의 실력은 미지수였다.
계순희는 평양개선중 6학년. 기자인 아버지 계윤환(외국문 종합출판사) 어머니 손도숙과의 사이에 2남1녀중 외동딸이며, 10살때 모란봉과외체육학교에서 처음으로 유도를 시작했다.
94년 만경대상 유술(유도)대회서 우승하며 대표로 발탁돼 강훈련을 받았다. 지난 92년 망명한 북한유도선수 출신 이창수씨는 『북한팀 박철감독은 혹독한 훈련으로 유명한데 아마 계순희가 박감독의 첫작품 같다』고 말했다.
이창수씨는 『북한에는 유도에 단개념없이 1∼6급까지 급수제를 채택하고 있다』며 『계순희는 우리의 초단수준인 3급일 가능성이 높고 귀국하면 바로 1급으로 승급할 것』이라고 말했다.
계순희는 이번 금메달획득으로 북한에선 새로운 신분으로 변신하게 된다. 이창수씨는 『북한은 올림픽서 금메달을 따면 아파트와 차량이 지급되고 인민체육인 칭호와 국기훈장 1급이 주어진다』면서 『이같은 지위 상승이 북한스포츠의 유일한 동력』이라고 밝혔다.
그래서였는지 계순희는 시상식후 공식기자회견서 『모든 영광을 장군님께 바치겠습니다』고 일성을 터뜨렸다. 〈이건우 기자〉
▲ 정일룡의 조선화 '계순희'
계순희 선수는 이북에서는 '인민 체육인'이자 체육 영웅이다. 북쪽 작가 정일룡이 그린 작품의 이름은 '조국의 딸'. 이제 그녀는 8천만 겨레의 체육 영웅으로 자리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