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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수도 병이련가(1) 치미는 분노의 고독
"九十歳.何がめでたい" (2016 佐藤愛子 作)
-1- 치미는 분노의 고독
"장수한다는 게 보통일이 아니네..." 나의 요즘의 생활 모습과 연이어 오는 신체의 고장을 보고 하는 딸의 이 말에는 애절함이 묻어있다. 딸은 1960년 3월에 태어났으니 올해 몇 살이지? 50은 조금 더 넘은 것 같은데 정확한 나이는 모른다.
나이를 헤아리는 것 조차 귀찮다. 자신의 나이도 구십 하나인지 둘인지도 잘 모르는 처지에 남의 나이 따위는 알고 싶지도 않다. 나이 따위는 이미 나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처지이다.
옛날의 나이 셈법은 단순해서 좋았다. 새해가 되면 한 살 더 먹었다고만 생각하면 되는 간략한 셈법이 편했다. 예를 들면 12월 20일에 태어난 아기는 12일 후의 설날에 두살이 된다.
지금은 12월 20일에 태어난 아기는 설날이 되면 생후 12일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된다. 정월 초이튿날이면 생후 13일 초삼일이면 생후14일....이러한 모든 것이 어수선한 쇼와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에겐 귀찮을 따름이다.
"사토 씨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라는 질문에 답하려면 저어 90하고 5개월...? 6개월인가...즉11월생이기 때문에 11, 12, 1, 2, 3...그런데 지금은 몇월달?" 이렇게 헤메고 있는 머리를 쥐어짜야만 한다. 머잖아 시집을 가거나 아이를 낳을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일일지 모르지만 지금의 내게는 구십 하나든 둘이든 셋이든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라는 자포자기투의 묘한 기분이 든다.
왠지 나는 목소리가 크다. 게다가 수다를 많이 떤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를 건강한 할머니라 쉽게 생각한다. 90을 넘어 대단하다는 말을 듣는 것이 제일 난처한 일이다. 원고청탁 강연 인터뷰 등을 의뢰 받아도 이젠 그럴 여력이 없다. 지금까지 무리를 많이 해서 온 몸이 삐걱댄다고 해도 믿어 주지 않는다.
이런 일도 다 내 목소리가 큰 게 원인인 것 같아 가능하면 목소리를 낮추어 응대하려고 노력을 하지만 끈질기게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사람에게는 말다툼으로 변해 결국은 쩌렁쩌렁한 본 목소리가 나오게 되어
"건강하시군요! 보통 사람보다 목소리에 박력이 있습니다"라는 말을 듣고서야 아뿔싸 하고 황급히 목소리를 낮추어도 이미 엎질러진 물. "큰 목소리는 원래 타고나서 그래요"라고 둘러대도 믿어주지 않는다. 정말로 지금의 나는 1년 전, 아니 반년 전, 3개월 전에 비해서 부쩍 쇄약해져 있다.
집에서 15분 거리의 지하철역까지 또박또박 걸어가는데 반도 못 가서 발걸음이 무거워져 예전의 날렵한 토끼 걸음이 지금은 엉금엉금 거북이 걸음으로 바뀐 상태다. 발걸음을 옮기기 어렵기 때문에 자주 비틀거린다. 중심을 바로 잡기가 어려워 생각 밖의 방향으로 비실대기 일쑤다.
뒤에서 자전거를 타고 오던 아줌마가 들으라는 듯이 연신 혀차는 소리를 하며 지나갈 때는 나 자신이 처량해 진다. "예전의 자전거는 자전거벨로 찌링찌링하며 알려 주었는데"라며 혼잣말로 중얼거려 본다.
예전에는 벨이 울리지 않아도 자전거가 다가오면 달가락거리거나 삐걱거리는 소리나 낡은 바퀴에서 설컹거리는 소리 등이 들리면 뒤돌아보지 않고도 한쪽편으로 몸을 피해 주었다.
그랬던 것이 지금은 마치 산적의 기습처럼 가끔은 유령처럼 휙하며 옆에 나타나 "조심해요"라는 말을 내가 하기도 전에 상대가 먼저 내뱉으며 나무란다.
그런 예전의 경험을 얘기라도 할라치면 젊은이들은(내가 볼 땐 60대도 70대도 젊다) 수긍하기는 커녕 "자전거 성능이 좋으니까" "도로가 좋으니까" "포장기술이 진보했으니까" "최근 수년간 사이의 눈부신 문명의 진보는 감동적이다"
뭐가 문명의 진보며 뭐가 감동적이란 말인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삭이면서 덜겅거리던 옛날 자전거를 그리워한다. 울퉁불퉁하고 비가 오면 질퍽거리던 옛날 그 길을 꿈속에 그려본다.
"90이라면 졸수라고 하던가? 어머나! (감동의 감탄사) 경하드립니다. 백수까지 장수하시기 바랍니다"만면에 웃음을 띠고 하는 그런 인사를 받으면 "그래요...고마워요..." 이말도 덧없는 세상살이의 의리라 생각하고 한 대답이지만 속으로는 "졸수? 그게 뭐가 축복이야!"라는 기분이다.(참고:卒寿는 90살)
● 장수도 병이련가(2) 전국민 바보시대 도래?
"九十歳.何がめでたい" (2016 佐藤愛子 作)
-2- 전국민 바보시대 도래?
"주민번호 스마트폰에 탑재"라는 2월 27일 자 요미우리신문의 기사 제목이 눈에 띄었다. "정부는 국민 개인마다 12단위의 번호를 할당하는 공통번호(주민번호) 제도를 스마트폰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방침을 확정했다.
2016년 1월부터 교부 예정의 개인번호카드를 스마트폰에 탑재하여 정보를 읽어낼 수 있도록 한다. 카드가 없어도 전용 홈페지에 스마트폰만으로 접속가능하게 된다"고 한다
무슨 얘긴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도대체 스마트폰이란 것을 믿을 수가 없다. 언젠가 진눈깨비가 내리는 날 무선택시를 부르는데 전화 폭주 때문인지 30분간이나 연결이 되지 않았다. 그 후 이따금 타는 택시기사에게 그 이유를 푸념처럼 물었더니 한 장의 카드를 내밀며 말했다. "이 번호를 스마트폰에 쳐넣으면 직접 우리들에게 접속되기 때문에 빠릅니다"
"스마트폰? 그게 뮙니까? 그런 것 본 적도 없고 가지고 있지도 않기 때문에 그런 말해도 모릅니다" 그러자 운전기사는 말했다. "그런데 실은 저도 잘 모릅니다. 단지 손님에게 드리기만 하면 된다고 해서..." 운전기사의 모습을 살펴보니 짧게 깎은 머리에 흰머리가 섞여 있어 지긋한 나이임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긴장이 풀려서일까 흥분된 목소리로 "그래요 정말로 편리한지 불편한지 영문도 모르고 사는 세상이 되어 버렸네요" 그때부터 말문이 터졌다. "그런데 스마트폰과 휴대폰은 어떻게 다르나요? 전차 속에서 젊은이들이 보고있는 그것이 휴대폰입니까 스마트폰입니까?"
"글쎄요 뭐가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게 뭐냐고 물으면 바보 취급 당하고 컴퓨터인지 아이폰인지... 집에 초등생의 손자가 있는데 그놈이 건방지게도 아는 게 많아 요즘 피쳐폰이 인기라던지 뭔지 들어도 모를 말을 우쭐대며 설명하다가 내가 수긍을 하지 못하면
할아버지는 그런 것도 모르면서 어떻게 살고 있어요라며 면박을 주곤 한답니다." "스마트폰 하나면 전화 카메라 계산기 시계 등 안되는 게 없다면서"
"그 뿐만 아니고 차 시간표 일기예보 회중전등에다 더욱 놀라운 것은 비디오카메라까지 자기자 발명한 것도 아닌데 자랑해대는 꼴이란...너의 머리와 몸을 써서 뭐든지 해보라고 타박해 주고 싶긴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인간은 모두 바보가 되겠네. 조사도 생각도 기억도 노력도 하지 않고 바로 답이 나오니까!"
"정말로 일본 전국민이 몽땅 바보가 되는 시대가 오겠네!" "이런 바른 말에는 귀를 막고 오히려 바보 취급 당할 뿐이에요." "그러면서 경로의날인지 뭔지 하면서 그날 하루 억지로 빵 따위를 사와 할아버지 메밀빵 좋아하시니까 사왔다고 해놓고 권하지도 않고 먼저 먹어 치운다니까요" 얘기는 계속되어 내릴 때가 되었는데도 내리지 않고 더 많은 얘기를 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늙은이가 존경받지 못하게 된 것은 이러한 급격한 "문명의 진보" 때문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때마침 도까이도신간선 "노조미"가 시속을 25km 증가시켜 동경과 신오사카 간을 2시간 22분만에 주파하게 되었다고 TV가 전하고 있다. 브레이크의 성능을 높혀 "3분"을 단축시켰다고 한다. 3분 단축? 그게 뭐 대단하냐는 생각이 든다. 신간선 개통 이래 50년간 사고는 한 번도 없었다.
그것이(무사고가) 무엇보다도 경하할 일이고 대단한 업적이어서 만세를 부르고 축하할 일이지 3분 빤라진 게 뭐가 축하할 일인가? 왜 그리 서두르는가? 비행기에 손님을 뺏기지 않으려고 속도를 높이기에 집착하는 것이라는 해석도 있지만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어리석다고 밖엔 할 말이 없다. 진보라는 것은 "생활의 향상" 나아가서는 "인간성의 향상"에 필요한 것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들의 생활환경은 이제 충분히 향상되어 있다. 나는 90년을 살아왔기 때문에 이것만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이 90년의 세월 속엔 국운의 부침에 관련된 어려움이 있기는 하였지만 그것을 발판으로 우리들의 생활은 날로 윤택해지고 편리하고 지혜롭게 되었다. 그래서 "더욱 편리하게" "더욱 쾌적하게" 더더하며 욕망을 부풀려 가고 있다.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할머니들은 개울에서 빨래를 하였고 내 어릴 적엔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대야에 물을 길어 담아 빨래판으로 빨래를 하였다. 그 후엔 우물에 펌프를 설치하여 삐꺽삐꺽 소리를 내며 펌프질을 하면 물이 콸콸 쏟아지는 수동펌프가 개발되어 정말 편해졌다고 여인네들은 기뻐하고 고마워했다.
그 후 "수도"라는 게 시설되어 꼭지를 틀기만 하면 언제든지 물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초기에는 2층에는 사용할 수가 없는 불편함을 참고 살았던 그 수도가 지금은 혹시라도 고장이나 공급이 되지 않으면 수도국에는 불만의 전화가 쇄도한다.
"이래서야 생활할 수 있겠나! 어떻게 좀 빨리 조처해 봐요!" 라고 투덜거리는 사람에게 "옛날 생각 좀 해봐요. 모모타로의 할머니가 냇가에서 빨래를하고 삐꺽삐꺽 펌프질하던 때를..." 그런 말을 한다면 바보나 잔소리꾼 취급당하기 십상이다.
"문명의 진보"라는 게 우리들의 일상생활을 윤택하게 하였는 지는 모르지만 그와 반대로 우리들 속에 있었던 겸허와 감사와 인내 등의 정신력을 마멸시켜 간다. 더 편리하게 더 빠르게 더 길게 더 깨끗하게 더 맛있는 것을 더더더...
이제 "진보"는 이 정도로도 충분하다. 더 이상의 문명을 진보시킬 필요는 없다. 진보가 필요하다면 그것은 인간의 정신력의 진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 장수도 병이련가(3) 늙은이의 꿈
"九十歳.何がめでたい" (2016 佐藤愛子 作)
-3- 늙은이의 꿈
언제 적 일인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내가 TV를 보고 있자 딸이 다가와서 못마땅한 투로 말했다. "왜 이렇게 볼륨을 키웠어요!" 보통의 음량으로도 들리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왠지 허전하다. 편한한 마음으로 들으려면 음량을 크게 하고 싶어진다.
생각해 보니 그 때부터인 것 같다. 언젠가 TV에서 하는 젊은 여자들의 수다가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뭔 말을 하는지 바짝 다가가 집중하여 듣지 않으면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러지 않으면 작은 새들의 지저귐 같기도 하고 개울물 흐르는 소리 같게만 들린다.
이것은 젊은 여자 탤런트가 아나운서 수준의 발성수련을 하지 않아서 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NHK에는 이런 따발총수다쟁이는 없다. 무대에 오르는 여배우들도 그런 사람이 없는 것은 나름대로의 수련을 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요즘은 연륜보다 젊음이 환영 받는 세상이 되어 노력이나 능력보다 미모나 풍만한 가슴이나 천박한 말을 함부로 말하는 무모함 등이 더 대접받는 세상인 것 같다. "본래 TV의 사명은 '전달"에 있다. 그 기본을 무시하는 제작자가 문제다"라고 나름대로 주장은 해보지만 물론 아무도 들어주는 이는 없다.
그 후 남자 탤런트랑 젊은 배우들의 대사도 잘 들리지 않는 경우가 늘어났다. "목소리가 뱃속에서부터 나오지 않으니까 그런 것이다. 좀 더 또렸하게 남자답게 해라!" 라며 비아냥거리기도 하는 사이 알게 되었다. 이건 아무래도 내 귀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솔직하게 말해 주었다.
"20대의 절반 정도 밖엔 못알아 듣는 셈이군요" "듣지 못한다"는 말에 먼저 난처한 것은 남들이(보기에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시력이 좋지 않다던가 다리가 불편한 경우 그리고 후각이 좋지 않은 경우 등은 남들이 바로 알아차린다.
그런데 청각의 경우는 몇 차례고 다시 말하고 불러도 반응이 없어 반복해 불러야만 알아차리 게 된다. 이러한 수고를 당사자인 본인의 입장에서는 자주 반복해서 "뭐라고요?"하고 물어보는 것도 귀찮을 뿐만 아니라 누죽드는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저는 귀가 잘 안 들리니까 이해하여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도 남세스러운 일이다.
도리없이 알겠다고 수긍하는 시늉을 하기도 하고 미소짓기도(상대의 웃는 얼굴을 따라)하고 미묘한 표정을 보이기도 하였지만 상대가 질문을 해도 빙긋빙긋 웃기만 하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넘긴 적도 있었다고 반성도 해 보지만 그렇다고 상황이 달라지지는 것도 아니다.
이미 들리지 않게 된 귀는 되돌릴 수 없다. 그것은 병이 아니고 "노화"이기 때문이다. 계단을 내려갈 때 갑자기 오른 쪽 무릅에 힘이 빠져 비틀거리며 넘어진 적이 있다. 그것도 부주의 때문이 아니고 "노화"라고 의사 선생님이 말했다. "주의하셔야 합니다" 라고 말하지만 아무 징조도 없이 갑자기 힘이 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잠자리에 들어서 몸이 따뜻해지면 등덜미 여기 저기가 마구 가려워도 손이 닿지 않아 2층의 딸을 불르기도 미안해 "효자손"을 한손에 쥔 채 잠을 청한다. 그것도 "노인성습진"이라고 한다." 노인성이라는 것은 치료법이 없다고 한다. 말하자면 의사도 약으로도 치유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지나간 세월은 다시 되돌릴 수 없듯이 시간과 함께 시든 육체는 예전으로 되돌릴 수는 없는 것이다.그런 생각을 하면서 병원의 대기실에 앉아 있다. 하나의 고통을 치유하고나면 다음이 온다. 한 번 치유된 고통이 다시 머리를 들쑤시곤 한다. 의사도 이젠 "노화탓이다"라는 말도 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아도 이제는 알고 있을 것이라는 심경이기 때문에.
그 마음을 눈치채고 내가 먼저 (어느정도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노화탓이니까 별 도리가 없겠군요"라고 하니 "하하하"하고 의사도 웃고 나도 따라 웃는다. "당신은 언제나 명랑한 성격이어서 좋습니다"라는 말에 또 한 번 웃음으로 답한다. 이 웃음에 숨겨진 말못할 비애를 누가 알겠나. 이것이 죽음에의 서곡인 것이다.
젊은이는 꿈과 미래를 향해 전진한다. 그렇다면 노인의 전진은 죽음을 향해선가? 동년배와의 잡담 중에 우리들의 꿈은 뭐지?라는 말이 나왔다. "나의 꿈은 덜컥 죽는 것"이라고 친구는 말했다. 덜컥 죽는 것이 꿈이라? 그것 명답이네 하고 맞장구를 치고는 그렇지만 "당신은 고혈압약 혈액정화약 코레스트롤저감약 등을 먹고 있지 않나? 그래놓고 덜컥 죽기를 바라는 것은 모순이잖아?"
그러자 그 친구는 벌컥 화를 내며 "당신 나쁜 버릇 가졌군. 늘 그런 식으로 내 꿈을 짓밟네..." 그 친구에게는 "덜컥 죽음"이란 것이 어디까지나 꿈인 것이었다. 정말로 그랬다. "꿈"이다. 그녀는 10대 때부터 미국 영화배우 클라크 케블과 뜨거운 키스를 해보는 것이 "꿈"이었다.
말하자면 그녀의 꿈은 덜컥죽음이 아니고 크라크 케블과의 키스였다. 현실에서는 이룰 수 없는 것이 "꿈"인 것이다. "미안"이라고 말하며 나는 솔직히 사과했다. 마침내 우리들의 "꿈"은 여기까지 와 버리고 말았구나 하는 울적한 마음이 떠나지 않는다.
● 장수도 병이련가 (4) 자격미달 인생상담자
"九十歳.何がめでたい"(2016 佐藤愛子 作)
-4- 자격미달 인생상담자
3월 21일 자 산케이신문의 "인생상담"란에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었다. "불편한 시골 이웃"이라는 제목이었다. 상담요청자는 50대의 시골 여성으로 내용을 요약하면 이웃에는 고령자 뿐으로 배려없이 남의 사생활을 파고든다. 지금까지는 말하고 싶지 않을 때는 거짓말로 적당히 얼버무려 왔기 때문에 어쩌면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내가 사는 동네에는 여성도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일을 합니다. 회사에서의 인간관계에 어려운 점도 많았지만 달리 일할 곳이 없기 때문에 오래 동안 생계를 위해서 참고 있는 것입니다. 거짓말 덧칠이 되는 것도 싫지만 이런 말까지 다른 사람들에게 하지 않으면 안되는지요. 내가 이상한 사람일까요?"라는 내용이다.
되풀이하여 읽어 보았지만 내용을 잘 이해할 수가 없다. 생계를 위해서 과거에 회사를 다녔던 것인지 아니면 지금도 다니고 있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거짓말 덧칠이 되는 것도 싫지만" 운운 하지만 회사근무를 하고 있다는 것이 주위에 부끄럽다는 것인가? "거짓말 덧칠을 하는 것도 싫지만"이라 하지만 왜 거짓말을(그것도 어떤 거짓말을) 하여 왔다는 것인지? 아무리 읽어 봐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자수제한이 있어 편집자가 문장을 무리하게 줄여서 이렇게 되었는 지는 모르지만 이 내용 만으로는 변변한 회답을 할 수가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에 대한 회답을 읽어 보았다. "투고 감사합니다. '불편한 시골 이웃'이라는 내용 같은데 그러한 일면도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라는 정중한 서두로 차분하게 말하고 있다. "그러한 상황은 변함이 없고 사람 사귀기가 힘들다고 하더라도 어쩔 도리가 없기 때문에 편안한 마음이 들도록 어딘가에다 넋두리라도 할 곳이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 말엔 나도 동감이다. 하지만 이럴 땐 넋두리를 하기보다는 욕이라도 실컷 해대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욕하기를 계속하다 보면 진이빠져 지치게 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말하자면 등산 후와 같이) 기분이 좋아 지게 된다. 나도 그렇게 하면서 고달픈 인생살이를 헤쳐나왔다. 욕을 마구 해대는 것을 상스럽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이것은 욕하기를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원기를 되찾고 마음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꺼릴 것이 없다. 라고 간단하게 말은 해도 어쩌면 이 투고자에겐 욕을 참고 들어줄 상대가 없을 지도 모른다.
회답의 글을 쓴 다치바나 쥰 여사는 말하기를 "어려울지 모르겠지만 기분전환도 하고 취미도 살리고 그 시간 동안 만이라도 잡념을 잊을 수 있도록 조금 떨어진 다른 동네 쪽의 문화센터 같은 곳에 다녀 보는 것이 어떨까요? 같은 동네라면 기분전환은 커녕 낯익은 사람들과 부딪혀 어수선해지기 십상이어서 쓸데없이 신경이 쓰이지만 낯선 곳의 사람들이라면 마음이 편하고 적당히 거리감을 가지고 사귈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등등.
그리고는 " 25년간 잘 참아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제부터는 부부 간에 금실 좋게 그리고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시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라고 상냥한 위로의 말로 끝맺음을 하였다. 죽 훑어 본 나는 "수고하셨습니다. 이런 종류의 질문에 답하시느라..."라고 진심으로 다치바나 여사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어졌다.
내게 이런 종류의 상담에 답하라면 더는 할 말이 없을 것 같다. 억지로라도 말한다면 "그것. 참 난처하게 되었네요..."라는 정도일까.
"내가 이상한 사람으로 보입니까?" 이게 상담자의 마지막 질문이었다. 이 질문에는 대답이 가능할 것 같다. "이상한 사람은 아닙니다. 마음이 여린 사람입니다. 꼭 집어 말하자면 소심한 사람일 뿐입니다"
그러나 훌륭한 회답자라면 이 경우엔 그렇게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고 "당신은 심성이 고운 사람입니다. 너무 고운 게 탈입니다." 라고 상대편이 상처받지 않도록 배려를 할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입발림 소리를 하는 재주가 없다. 정곡을 콕 찔러야만 직성이 풀린다.
"당신은 소심하기 때문에 별볼일 없는 사람이 하는 말에 신경을 쓰는 것입니다. 그런 하찮은 사람에게는 '나는 당신과 그런 말을 하고 싶지 않다'고 단호하게 말해 두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그런 야박한 말을 못하는 심성이기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다고 당사자인 당신은 말하고 싶겠죠.
똑 부러지게 말하기 어럽다면 되도력이면 난처하고 싫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으면 상대방도 이 사람은 나와 얘기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구나 하고 당신의 마음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남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교양 없는 상대방도 애써 당신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지 못하는 당신에게는 별로 재미를 못 느끼기게 되기 때문이지요. 당신은 재미없는 이상한 사람이라고 여러 사람들에게 소문을 내겠지만 그런 상대방을 신경쓰지 않고 무시해 버린다는 것을 상대에게 인식시키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소심하기 때문에 마지못해 거짓말로 얼버무리고 마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점이 당신을 고통스럽게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악순환에서 벗어나려면 당찬 실행럭이 있어야만 합니다. 사람이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나름대로 자신의 윤택한 삶을 위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노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여곡절이 없는 평탄한 인생은 미지근한 탕 속에서 마시는 김빠진 사이다와 같은 것입니다. 어쩌면 "사토씨의 말은 잘 알겠습니다만 저로서는 어려운 일입니다"라고 당신은 말하겠지요. 그리고 "저라는 인간은 어쩔 수 없나 봐요"라연서 자책하겠지만 노력해서 안되는 일도 없답니다.
노력하면 됩니다. 말하고 싶은 것은 말하면 됩니다. 말하기 어려운 것은 노트에 메모를 하세요. 그리고 노트에다 대고 적힌 대로 마구 외쳐 보세요. 그러면 울분이 발산되어 마음이 가벼워질 것입니다. 자신의 나약함과 싸우세요. 싸워 보지도 않고 푸념만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이런 말을 하고 있는 내가 괜히 흥분된다.
그래서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다. 뒷일은 알아서 해라 더는 나도 어쩔 수 없다!" 라고. 말하고 한 걸음 물러난다. 상담신청자를 응대하는 일은 결고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나는 아무래도 상담에 대한 답변자로서의 자격이 없는 모양이다.
● 장수도 병이련가 (5) 두개의 생일
"九十歳.何がめでたい"(2016 佐藤愛子 作)
-5- 두개의 생일
나의 생일은 1923년 11월 5일이다. 초등학교 입학 이래 생년월일을 기입해야 할 때에는 반드시 그렇게 기입하여 왔다. 갓난아이는 자기가 태어난 날이 언제인지 모른다. 누구나가 부모가 알려 준 날자를 믿을 뿐이다.
그래서 11월 5일이 되면 생일을 축하하는 의미로 팥밥을 먹었다. 그러나 지금은 생일케익에 양초를 꼽고 불며 딱히 웃을 일도 없는데 웃음보를을 터뜨리며 축하해 주는 것이 예사지만 그 때는 그런 시절이 아니었다.
팥밥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팥밥에는 "축복"의 의미가 있는 것 같아 내 입에는 맞지 않았지만 잘 참고 먹었다. 생일이래 봐야 그게 다였다. 생일선물 따위는 없었다. 혹여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을 보면 하찮은 것이었을 것 같다. 그래서 생일이란 게 특별히 기쁜 날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지만 11월 5일에 태어났다고 하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지만 공공기관에 제출하는 서류에 기입한 생년월일이 잘못되었다고 지적받아 정정해야 하는 일이 많아졌다. 관공서에서 말하는 나의 생일은 11월 25일이라는 것이다. 그말을 들은 어머니는 "낳은 내가 11월 5일이라고 하는데 나보다 더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다.
구청 멍청이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라고 명확히 말해서 나는 구청담당자에게 그 뜻을 전했으나 담당자는 "그래도 호적에는 25일이라고 기재되어 있습니다"라고 잘라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낳은 본인이 5일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출생신고서에는 25일이라고 되어 있습니다"라고 하여 "언제부터 그렇게 되어 있습니까?"라고 묻자 "그게 질문이라고 합니까? 태어날 때부터겠지요" 당신 혹시 바보아니냐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 무렵(지금부터 50여년 전)의 공무원들은 모두가 권위를 앞세워서 안하무인이었다.
세무서(제일 심한 곳), 동사무소, 철도역원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웃으면 뭔가 손해본다는 듯한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 무뚝뚝한 응대 태도는 한마디로 "귀찮다"는 표정이 얼굴에 역력하다.(평소 상사로부터 당한 불만을 찾아온 민원인에게 분풀이 한다는 말도 있었다)
나는 출생일의 정정을 하러 구청에 갔다가 "한 번 호적에 기재된 사항은 바꿀 수 없어요!" 라는 말에 이런 사람과 상대해 봐야 결론이 나지않겠다는 생각이 들어 일단 한 발 물러나기로 결심했다. 생년월일을 기입할 때 호적상 생일인 1924년 11월 25일을 쓰기로 마음 먹었다.
가끔 그 사실을 잊고 5일로 썼다가 그위에 25일로 고쳐 쓴 것을 보고는 "뭐야 자기 생년월일도 몰라 고쳐 쓰다니!" 하고 의심을 당한 적도 몇 번인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다카시마비전개운비결 12지일대운세"라는 책을 보고 있다. 1926년에 다카시마주역풀이총본부에서 발간한 오래된 책이다.
12지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간지라고도 하여 당신의 간지가 뮈지요? 라고 물으면 호랑이띱니다. 그래서 사리에 밝군요라던지 저 사람은 저래 봬도 뱀띠이기 때문에 집념이 강하다라던지 하며 좌중에서 대화의 씨로 삼곤 하였다. 그런데 이 책은 원래가 흥미 유발적인 책이 아니다.
이 12지설은 고대 동양의 철학자가 철학적 사색 끝에 만든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태어난 날자에 의해 본성과 운세를 점쳐서 인생에 뭔가의 지침을 주는 책이다. 이 책에 따르면 나의 간지 "1924년 출생의 돼지띠"에 대해 이렇게 풀이되어 있다.
돼지띠는 올해의 운수가 매우 길하여 큰 뜻을 관철할 정도로 강한 성질이며 앞뒤 가리지 않는 조급함 때문에 남에게 미움받는 손재수도 있다. 올커니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앞뒤 가리지 않는 조급함 때문에 남에게 미움받는 손재수도 있다"는 마치 나를 두고 하는 말 같았다.
사람의 본성과 운세는 태어난 해 만으로 대충은 알 수 있지만 자세한 사항은 월일을 봐야 알 수 있다. 그래서 나는 11월 5일 부분을 살펴 보니 다음과 같았다. "11월 5일 출생은 재물수가 없어 남이 돈 부탁하면 자신도 어러운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돈을 빌려 주고 만다. 반면에 본인은 어려워도 남에게 부탁하지 못하는 성격이라 아주 손재수 많은 운세다."
그래 이 말도 틀린다고는 할 수 없다고 감탄하며 문득 11월 25일 출생은 어떤지 궁금해졌다. 같은 돼지해 출생이라도 태어난 해의 10간에 따라 성격과 운세에 차이가 있다고 하니까.
"평소 희망과 포부로 충만하여 있는 사람이지만 계획만 하고 실천을 하지 않는 결점이 있다. 이 해에 태어난 사람은 돈에 궁핍하지 않은 운을 가졌고 저축심도 강해서 금전적으로는 안정된 생활을 보낼 수가 있는 운세다"
역시 5일과 25일은 위에서 요약한 내용 만큼 차이가 있는 것이다. 한 쪽은 "손재수가 많다"하고 다른 한 쪽은 "꿈만 꾸고 실행은 않는 주제에 돈에는 궁핍하지 않다"는 운세인 것 같다. 이러한 운세 풀이 내용을 보더라도 11월 5일 출생 쪽이 나와 맞다는 것 같다.
내게 여성독자들로부터 "사토씨 처럼 굳건하게 살고 싶은데 그 비결을 알려 주십시오"라는 내용의 편지가 심심찮게 온다. 비결? 그런 게 따로 있을 수 없다. 내게는 비결이라기 보다 "다카시마비전개운지비결" 에서 다음과 같은 풀이를 명심하고 있다고 말해 준다.
돼지해에는 용맹한 돼지, 노는 돼지, 병든 돼지, 태어나는 돼지, 난폭한 돼지 등의 다섯 종류의 돼지로 구분되는데 11월 5일 출생은 난폭한 돼지에 해당한다. 그런 난폭한 기질이어서 "분별없는 행동이나 몰상식한 말투는 광기에 가까워 망나니 취급을 받아 인기도 있으나 미움도 받는다.
정직하고 불의를 참지 못해 거짓말을 못하며 성질이 급해 한 번 화가 치밀면 끝장을 보고 만다. 급한 성질을 참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키우면 신망을 얻고 행복한 날들을 보낼 수 있다"라고 풀이 되어 있다. "굳건히 사는 비결" 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라고.
먼저 "난폭한 돼지"가 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남에게 폐를 끼쳐 싫은 소리를 듣게 되더라도 개의치 말고 앞만 보고 나가야 합니다. 굳건한 삶이란 만신창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굳건한 삶 따위는 권할 만한 일이 못됩니다.
사토 아이코를 "인생의 반면교사"라고 생각한다면 별개의 일이지만...라고 답하고 싶다.
● 장수도 병이련가 (6) 냄새나는 당신
"九十歳.何がめでたい"(2016 佐藤愛子 作)
-6- 냄새나는 당신
의과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는 20대 여성이 동급생의 남자가 너무 불결하여 견딜 수가 없어서 요미우리신문의 인생상담 코너에 투고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그 남학생은 2주가 넘게 같은 옷을 입고 있습니다. 목욕도 않는지 지독한 냄새를 풍기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교실에 들면 모두가 그와는 멀리 떨어져 앉습니다.(중략)
그런 그와 같은 팀이 되어 실습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스크를 하여도 소용없고 촉진 실습 때는 그와의 접촉을 피할 수 없습니다.. 머리와 어께에는 비듬투성이입니다.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로인해 실제로 두통에 걸린 적도 있습니다" 그 여학생은 생각 끝에 학생과에 상담을 했지만 아무런 해결도 보지 못한 채 본인에게 직접 부딪혀 볼까도 했지만 두려운 생각이 들어 그러지도 못했다.
차후 새로운 실습팀이 다시 편성될 때 만약에 그 학생과 같은 팀이 된다면 1년간 함께 행동해야 된다. "그런 생각을 하면 불안해서 잠이 오지 않습니다. 이런 상태어서는 대학에 다닐 수 없을 것 같습니다"라는 내용이었다. 다 읽고 나서 왠지 웃음이 나왔다. 내가 여학생 때 같은 동네 남학교에 다니던, 지금은 돌아가신 엔도슈사쿠씨의 별명이 "냄새나는 당신"이었던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옆에 가면 역한 냄새가 물씬 풍긴다고 그런 별명이 붙은 것이라고 그와 동급생이었던 사람으로부터 듣고 본인에게 물어 보니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하지만 그 말한 친구도 상당한 '냄새나는 당신'이었어" 라고 말했다. 몸냄새는 주위 사람들은 알지만 본인은 모르는 모양이다.
당시의 남학생은 빡빡머리였기 때문에 비듬은 없었겠지만 몸에 때는 많았을 것 같다.
학생들은 계속되는 엄한 군사교련 등 야외훈련으로 땀범벅이 되어도 목욕도 못하고 얼굴엔 여드름투성이지만 비누를 사용하면 악화된다고 얼굴도 씻지 않고 어쩌면 이도 제대로 닦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러하다면 그 시절엔 모두 피차일반 "냄새나는 당신"이어서 특별히 문제될 것이 없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이 상담신청자는 왜 그 "냄새나는 당신"에게 똑부러지게 말하지 못 하는가? 내게는 그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직접 주의를 주는 것은 무서워서 못 한다"고 그녀는 써놓았다. 그사람의 어디가 무섭다는 말인가!
마스크를 하여도 소용없는 역한 냄새 때문에 두통이 난 적도 있다면서 당사자에겐 아무 말도 못 하고 학생과를 찾거나 신문에 투고하여 회답을 기다리는 등의 번거로운 일을 한다는 것은 마음이 여려서가 아니라 내가 보기엔 용기가 없어서인 것 같다.
자신에게 닥친 재앙은 자신의 힘으로 헤쳐나가는 것이 인생수업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상대와 부딪치는 것도 인생수업의 하나이다. 하고싶지 않은 일,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일일지라도 힘을 다해 부딪혀 보면 자신감이라는 것이 쌓여 간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답글을 쓴 야마다 마사히로선생은 뭐라 하였는지 살펴 보았다
"학생이 평온한 환경 속에서 배우는 것을 보장하는 것은 역시 학교의 책임입니다. (중략) 담당선생님에게 반드시 다른 학생들의 의견도 물어 볼 것을 권합니다.(중략) 이 정도라면 인내의 한계를 넘어서 학습의욕을 해칠 뿐만 아니라 본인을 위해서라도 좋지 않은 일이라고 담당선생님에게 강력하게 지도하도록 권하여 주십시오.
특히 의료계통의 대학이라는 점에서 보면 실습 등에 따른 학교 밖의 사람들에게 폐를 끼칠 수도 있다는 점을 강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대학의 입장에서도 평판에 관계되는 일이기 때문에 '소정의 조치'를 해야 할 사항입니다."
세상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 든다. 단지 몸냄새나는 학생 한 사람 때문에 "대학의 평판에 영향을 준다"니! 그리고 "소정의 조치를 해야 한다"는 그렇다치고 그런 조치를 해야 하는 담당선생님도 힘들게 되었다. 내가 학생 때의 교사는 "선생님"이라는 권위가 있었기 때문에 힘이 있었다.
"이봐! 너 냄새난다! 씻고 와!"하는 한 마디로 끝났다. 목소리에 힘이 실려 있었기 때문에 길게 말하지 않아도 됐다. 그러나 평등시대인 지금은 선생에게 권위 따위는 부여되어 있지 않아 모두가 의기소침해 있다. (그래서 이런 상상울 해본다)
"실은말이야, 자네한테서 역한 냄새가 난다고 모두가 곤란해 하고 있다. 교실은 공공장소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기분도 배려해 줘야 하지 않겠나?
자네는 목욕은 매일 하나? 머리는 씻기나 하나? 치약으로 이는 닦고 있나? 스스로 자신에게서 냄새가 난다는 것을 알기나 하나?" 라고 다그쳐도 묵묵부답. "아니야, 낸들 학생들의 몸냄새 따위까지 이러쿵저러쿵 말하고 싶지 않네. 평소 각 개인의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네.
그러나, 나한테 고충을 하소연하러 온 여학생이 있기 때문에 담당선생의 입장에서 도리없이 자네한테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는데 자네는 이 일을 어덯게 생각하나?... (몸냄새학생 묵묵부답) 이것 참 난처하네 난처해(몸냄새학생 묵묵부답) 어쩌연 좋지 뭐라 말 좀 해보게 탄원조가 된다.
이렇게 상상하여 써보는 도중에 왠지 차츰 흥미가 더해져서 그 위대한 "냄새나는 당신"을 한 번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냄새나는 당신" 자신 때문에 다른 사람이 고통받고 있는데도 본인은 아무 것도 모르고 태연하게 있는 것이 어쩌면 큰 인물일지도 모를 일이다.
몇 십년 후에는 이 나라를 짊어지고 나갈 지도자가 되어 한국의 어깃장과 중국의 야욕 등에 유연하게 대처해 나갈 믿음직한 존재가 되어 "냄새나는 당신"의 이름을 울려퍼지게 할지도 모를 일이다. 생각컨데 "냄새나는 당신"이었던 엔도씨도 세계에 이름을 떨친 대작가가 되었던 것 처럼.
● 장수도 병이련가 (7) 이해불가 세상사
"九十歳.何がめでたい"(2016 佐藤愛子 作)
-7- 이해불가 세상사
세다가야구의 오래된 주택지에 살아온지가 벌써 60년이나 된다. 그 무렵 이 주변은 차가 다니지 않는 조용한 곳이었다. 이따금씩 울며 지나가는 꼬마들 소리도 들리고 같은 악보를 반복하여 연습하는 피아노 소리도 담장 넘어 정원수 사이로 흘러나오기도 하고
겨울 밤에는 "군고구마~군고구마~"라고 외치는 군고구마장수 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어떤 때는 "불조시~임!"하는 소리와 함께 딱딱이를 치며 지나가는 야경꾼 소리도 들렸다. 그러한 다양한 소리들은 평화로운 일상을 나타내는 데에 너무나 잘 어울리는 요소들이었다.
그 무렵 나는 매일 같이 밤늦도록 책상머리에 앉아 원고 쓰기를 밥먹듯이 하고 있었는데 주위가 고요한 한밤중에 멀리서 개짖는 소리가 들려오면 그립고 애절하며 부드럽고 평온한 기분이 들곤 하였다.
어디에선가 개 한 마리가 짖기 시작하면 그 소리에 다른 개가 따라 짖고 또 다른 개들도 지지 않겠다는 듯이 온 동네 개들이 짖어댄다. 이렇게 되면 혹여 불이라도 난 게 아닌가, 수상한 사람이라도 나타난 게 아닌가 하고 자고 있던 사람들이 일어나 창문 여는 소리랑 말소리 등이 들려와 조용하던 밤이 잠시 술렁거린다.
"개가 짖어도 나무라서는 않된다. 개는 개대로 열심히 직분을 다하는 것이니까"라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그 무렵엔 개에게도 "직분"이라는 게 있었다. 잘 짖는 개는 "좋은 개"로 대우 받았고 잘 짖지 못하는 개는 "별볼일 없는 개"로 취급 받았다.
개도 그것을 눈치라도 챘는지 발자국소리나 인기척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나 보라는 듯이 짖어대어 빈집털이를 격퇴시키는 등 맹활약을 하였다. 한참을 짖어대다 "나 잘 했지요!?" 라고 하는듯 꼬리를 흔들며 주인을 처다보면 "그래 그래 잘 했어 잘 했어"하며 수고한 개를 격려하면 했지 개짖는 소리를 귀찮게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요즘은 그런 개들의 직분이 사라저 버렸다. 짖는 개는 시끄럽다고 이웃으로부터 항의가 들어와 미움을 산다. 머리에 리본을 달고 짖지 못하도록 훈련을 받고, 졸랑거리는 개가 사랑 받고 대우를 받는다. 열심히 직분을 다하는 개는 노력하면 할 수록 귀찮고 멍청한 개라고 푸대접을 받는다. 슬프고 분한 마음에 리본 단 졸랑개를 물어뜯어 죽여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나 어쩌면 졸랑개도 마음대로 실컷 짖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그 게 개의 본능이기 때문에. 졸랑개라도 본능에 따라 저절로 짖는 소리를 내기도 하는데 안타깝게도 그 짖는 소리라는 게, "머엉 머엉"하는 울림이 좋은 본래의 개짖는 소리가 아니고 "끼잉 끼잉"하는 쇳소리 같은 괴상한 소리를 내고 마는 것이다.
"뭐야, 그 소리는! 주제에 개라고! 부끄럽게!" 라고 직분을 다한 개는 멸시 당한다. 그러나 졸랑대기만 하는 개는 주인이 안아주며 "내 강아지 귀엽게도 짖는구나"라며 뺨을 비벼 준다. 그것은 직분개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기분 나쁜 광경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개짖는 소리 뿐만이 아니다. 아이들이 외치거나 울거나 노래하거나 마음껏 떠드는 소리를 나는 좋아한다. 주변을 신경쓰지 않는 그런 높은 톤의 소리에는 때묻지 않은 순박한 힘과 미래를 향한 도약의 기세가 느껴진다. 유치원 가까이를 지날 때면 그런 소리가 들려와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는다. 그런 천사들의 합창을 시끄럽다고 화내는 사람도 있다.
보육원 가까이에 살고 있는 노인이 시끄러워서 낮잠도 잘 수 없어 병이 날 지경이다고 항의하러 갔다는 말을 들었다. 오늘 아침 신문에는 보육원 신설 반대 기사가 실려 있다. 언젠부터인지 거리를 달리는 차들의 경적 소리도 사라져버렸다. 찌르릉찌르릉은 자전거의 대명사였지만 지금은 소리없이 휙 지나간다.
옛날의 초등학교 하교 때엔 교문을 나서는 남학생들은 활기차게 내달리기도 하고 다투기도 하고 소리치기도 하고 울기도 하였고 여학생들은 재잘재잘 수다를 떨며 떠들썩하게 집으로 돌아갔다. 그랬던 것이 지금은 걱정거리라도 안고 있는 듯한 얼굴로 조용하기만 하다. 소음이란 생활이 평화롭고 풍족하여 활기가 있어야만 생겨나는 소리이다.
전쟁을 경험한 나는 공습경보가 울리면 온 동네가 쥐죽은듯 조용해지는 무서운 정적을 알고 있어서 하는 말이다. 당시에 개짖는 소리도 사라진 것은 식량 부족때문에 개를 기르는 사람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짖는 똥개는 잡아먹힌다" 는 말도 떠돌아 개들도 함부로 짖을 형편이 못 됐다.
동네에 여러가지 소리가 들려야 사람 사는 맛이 난다. 그것도 귀찮을 정도로. 그것은 우리들의 생활에 활기가 있다는 증거이다. 그 말을 부정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이 나라가 쇠약의 길로 들어서는 징조 같은 생각이 든다.
가끔 들리는 수퍼마켓은 언제나 조용하다. 손님은 묵묵히 진열대 사이를 걸어가면서 원하는 물건을 바구니에 담는다. 그리고는 조용히 계산대에 물건을 올려 놓는다. 계산대에는 "비닐봉투불요"라고 쓰인 쪽지가 비치되어 있어 봉투가 필요 없는 손님은 그 쪽지를 바구니에 넣어 두면 계산 시 봉투없이 처리해 준다.
계산원이 바구니를 당겨서 묵묵히 계산기를 조작하여 계산서를 출력한 후 봉투불요라는 쪽지가 들어 있지 않으면 바구니에 비닐봉투를 말하지 않아도 함께 넣어준다. 손님도 말없이 돈을 지불하고 바구니 속의 물건을 비닐봉투에 담고 조용히 나간다.
왜 "봉투 필요 없습니다"라고 말로 하면 않되는 것일까. 도대체 무엇 때문에 말로 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일까? 누가 이렇게 하라고 했을까?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묵묵히 따르고 있는 사람들이 이상하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같은 행동을 하는 나 자신도 더 이해가 않된다.
● 장수도 병이련가 (8) 과유불급
"九十歳.何がめでたい"(2016 佐藤愛子 作)
-8- 과유불급
어릴 때부터 나는 우리집 변소 외는 사용하지 못했다. 옛날 변소라는 것은 지금의 청결한 "화장실"과는 달리 매우 음습한 장소로 널빤지에 타원형의 구멍을 낸 위에 쭈그리고 앉아 볼일을 본다. 구멍 아래로 한참 떨어진 곳에 변을 받는 항아리가 묻혀져 있어 그기에 걸쭉한 분뇨가 보기 싫게 쌓여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그 걸쭉한 것 속에서 털투성이의 팔이 쑥 튀어나와 엉덩이를 만진다는 괴담을 4살 위의 언니로부터 듣고는 너무 놀라 을음보를 터뜨린 적이 있다. 야밤에는 변소에 가기 겁나 몰래 마당에다 실례를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변소에 못 가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아 머뭇거리며 학교의 변소에 가서 볼일을 보았는데 변소문이 열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 무렵의 공동변소문에는 놋쇠로 만든 둥근 손잡이가 달려 있었다. 그 손잡이를 좌우로 돌려서 여닫는 것인데 열려해도 잘 열리지 않거나 닫을려해도 잘 닫히지 않는 등 왠지 고장이 잦았다.
안에서 잘가닥잘가닥 돌리다 보면 겨우 열리기도 한다. 그게 겁나서 나는 항상 변소문을 꽉 닫지 않고 1센티 정도 덜 닫고 용무를 보는데 마침 그 때는 변소가 만원으로 줄을 설 정도였기 때문에 도리없이 꽉 닫고 볼일을 보았다. 틈을 두지 않고 문을 꽉 닫은 것 때문에 (나갈 때) 열리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이 태산이었다.
긴장된 마음으로 볼일을 끝낸 뒤 문을 열려고 둥근 손잡이를 돌려 봤으나 잘가닥잘가닥 소리만 날 뿐 열리지 않았다. 아무리 애를 써봐도 소용이 없었다. 나는 이성을 잃고 "도와 주세요..."하고 외쳤다. "하루코야 문 좀 열어줘..." 하루코는 함께 변소에 온 동급생이다.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쳐서인지 문은 거짓말 처럼 쑥하고 열렸다. 밖에서 하루코가 열어 준 것이다. "뭐야 잘 열리잖아" 라고 하루코는 말했다. 줄서 있던 친구들이 킥끽대는 속을 얼굴을 감싸고 지나가는데 등뒤로 "하루코야 문 좀 열어줘..."라고 내목소를 흉내내는 소리가 들려 왔다.
이러한 경험이 트라우마가 되어 나는 변소공포증에 걸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집 외의 변소는 절대로 가지 않겠다고 굳은 결심을 하였다. 이러한 각오 때문인지 나의 방광은 많은 양의 소변에도 견딜 수 있도록 크게 늘어나 있는 지도 모른다. 두세 시간 아니 대여섯 시간 태연히 참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이미 옛날 같은 안 열리는 손잡이 따위는 없으니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아무리 말들해도 나는 결코 집 밖의 변소에는 가지 않는다. 신간선열차나 비행기의 화장실이 어떠한지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아직도 모른다.
내가 이렇게 애쓰고 있는 사이 우리나라 변소문화는 차츰 진화하여 푸세식에서 좌변기로 바뀌고 문의 손잡이도 여닫기가 편리한 것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자택 이외의 변소라도(아니, 이제부터는 "변소"라 하지 않고 "화장실"이라 하겠다) 안심하고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고집불통인 나도 나이 탓인지 긴 세월 몸에 밴 습관을 바꿀 때가 되어(방광의 수용능력이 옛날 같지 않아) 호텔이나 외부활동 시에도 그곳의 화장실을 이용하게 되었다.
언젠가 내가 미츠코시백화점의 화장실에 들어가 볼일을 보고 물을 내리려고 하는데 물내림 손잡이 같은 게 없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손잡이 같은 게 없어 눌름버턴이라도 있는지 찾아봐도 그것도 안 보였다.
수세식 초기엔 천장 가까이에 있는 물탱크에 달린 쇠줄을 당기면 물이 흘러 나왔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천장 쪽을 살펴봐도 그럴싸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수세식 화장실은 천장식에서 손으로 누르는 손잡이식, 발로 밟는 페달식, 요술부리듯 손모양의 표시에 손을 가까이 가져가면 물이 나오는 반자동식 등으로 변화하더니 최근에는 편기에서 일어서기만 하면 저절로 물이 나오는 완전 자동식으로 진화하고 있다고 한다.
하여튼 이건가 저건가 하고 머리를 굴려보지만 눈에 띄는 게 없어 도대체 이런 엉터리가 어딨나! 하는 분노가 치밀었다. 이것이 "문화의 진보"인 것인가?
사용자의 입장은 생각지 않고 줄곧 묘한 것을 만들어 내어 자기 만족에 빠지는 짓에 화가 치밀어 그냥 일어서 나가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변기 속의 내 배설물은 어쩌나!
마침 그 때 분노에 불타는 내 눈에 문 가까이에 매달려 있는 끈이 보였다. 순간적으로 천장에 설치된 초기의 수세식이 떠올랐다. 당기면 물이 나오는 바로 그 줄이 저것이다.
둘러봐도 물탱크는 보이지 않지만 천장 안에 있겠지 생각하고 에잇하며 그 줄을 잡아당겼다. 그 순간 귀청을 찢는 경보가 울렸다. 물이 나오기는 커녕 허둥댈 틈도 없이 노크소리와 함께 "손님 손님 무슨 일입니까?" 라는 여직원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 줄은 긴급 시 구조 요청을 위한 경보장치의 줄이었다. 그 이후 미츠코시백화점에 가기는 해도 화장실 이용은 자제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도 그곳의 수세식화장실의 사용법을 모른다. 지금 생각난 것인데 그 때 내가 남긴 배설물은 어떻게 되었는지? 누가 처리를 했을까?
● 장수도 병이련가 (9) 아이들을 위한 배려
"九十歳.何がめでたい"(2016 佐藤愛子 作)
-9- 아이들을 위한 배려
지금부터 11년 전, 이런 일이 있었다. 에히메현 이마바리시의 한 초등학교에서 6학년 남학생이 찬 공이 학교 담장을 넘어가 마침 오토바이를 타고 오던 노인 쪽으로 날아갔다. 이 공을 피하러던 노인이 넘어져 다리가 골절되어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고 1년 4개월 후 그 노인은 폐렴으로 사망하였다.
그러자 노인의 유족들은 그 학생의 부모에게 감독의무를 소홀히 하였다는 이유로 5천만엔의 배상청구소송을 내었다. 1심과 2심의 판결은 모두 부모의 감독소홀책임을 인정하여 1심 천오백만엔, 2심 천백8십만엔의 배상을 명하였다.
이 판결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것이다. 학생은 길가나 공원이 아닌 교정에서 축구를 하고 있었으며 축구는 손이 아닌 발로 하는 스포츠이기 때문에 공이 교정 밖으로 날아갈 수도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이 왜 부모의 감독소홀이 되는가? 부모는 자녀가 학교에 있는 동안에도 그 행동을 감독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인가?
공을 찰 때는 공이 담을 넘지 않게 부드럽게 차도록 가르쳐야만 한다는 것인가? 넘어져 골절한 것이 노인의 사망 원인이 아니다. 사망한 것은 골절사고로부터 1년 반이나 지나서이고 폐렴이 원인이다. 다리의 골절이 폐렴을 유발시킨다는 말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들어 본 적이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옛부터 "운이 나빴다"라는 말이 있어 불의의 화를 당했을 때 이 말 한마디로 체념하고 넘기는 "지혜"를 누구나 가지고 있었다. 사람의 한 평생은 결코 평탄하지 않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있었다. 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부모는 자식에게 참는 법과 체념하는 법을 가르쳤다. 힘든 일을 견뎌내고 남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이 최고의 미덕이었다.
자신에게 피해를 준 상대를 추궁하여 (돈으로) 보상을 받으려는 것은 비겁한 일로 여겼다. 예전의 일본인들은 "불행"에 대하여 겸허하였다. 사고가 발생하여도 악의가 있던 없던 간에 애써서 원상회복을 하려는 악다구니는 없었다. 지금은 그러한 악다구니의 역할을 사법(司法)이 하고 있다.
동일본대진재 때 한 유치원 원장이 원아들을 집으로 돌려보낼까 아니면 그대로 유치원에 머물게 하여 경과를 지켜볼 것인가의 기로에 서 돌려보내기로 결심하고 버스에 태워 보냈으나 여기치 못하게 윈아들이 탄 버스는 결국 예기치 못한 쯔나미에 휩쓸려 버린 가슴아픈 사건이 있었다.
그후 원아의 부모들은 유치원장 등의 책임을 물어 약 2억 6천 7백만 엔의 배상청구 소송을 내어 1심에서는 원장에게 1억 7천만여 엔의 배상명령이 내렸다(2심에서 화해 성립)。 지진과 함께 츠나미가 밀려오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내린 판단이 예기치 못한 결과를 초래한 것이 어째서 원장의 책임일까? 사법은 인간성을 잃었다.
인정을 버리고 관념의 괴물이 되었다. 어쨌던 옳고 그름을 떠나 피해를 입은 쪽의 편을 든다는 규약이라도 있는지 묻고 싶은 심정이다. 초등학교 4년생이 던진 공이 빗나가 다른 학생의 가슴을 때려 사망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사건에서 센다이지방법원은 소년의 부모에게 6천만 엔의 배상판결을 내렸다는 얘기도 있다.
이래서야 마음대로 공을 찰 수도 던질 수도 없다. 누군가와 부딪힐까 두려워 달리기도 할 수 없다. 예전에는 아이들 간의 다툼은 다반사였다. 아이들은 싸우면서 안으로 쌓인 울적함을 발산하면서 성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미래를 향하여 꿋꿋이 살아가기 위한 기초를 몸에 쌓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요즘은 무엇보다도 폭력금지 시대이기 때문에 싸움질도 할수 없다. 싸움 대신에 "이지메"로 상대를 괴롭히고 있다. 심한 이지메는 상대를 자살로 내모는 경우도 있다. 자살로 내몬 경우는 당사자로부터 배상을 당할 염려도 없다고 하는 서글프지만 영리한 생각이라고 여겨질 지도 모른다.
한편에서는 "아이들을 존중하자"라던지 "어린이의 주체성을 인정하자" 또는 "어린이를 제약 없이 키우자"라는 등의 그럴듯한 교육론이 넘쳐나고 있다. 공을 제약 없이 찬 게 이런 소동이 생긴 결과이다. 그러나 올 봄 사건이 생긴 후 11년이 지나 드디어 최고재판소에서 올바른 판단을 내렸다.
"위험이 없는 놀이 등에서 우연히 일어난 사고는 그 책임을 물을 수 없다."라고 하는 판결이 나왔다. 이 나라의 사법에도 아직 양식(良識)이 살아남아 있었구나하고 내 마음 속의 응어리가 어느 정도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11년만에 그 학생의 가정에 어두운 구름이 걷힌 것이다.
그러나 11년이란 너무나 긴 세월이다. 6학년이었던 소년의 나이는 지금은 스물 두세 살이다. 그 긴 사춘기를 그는 어떤 생각으로 보냈을까? 그는 즐거운 마음으로 공을 찼을 뿐이었다. 그 것 말고 내가 어떤 나쁜 짓읠 했단 말인가... 이런 생각은 틀림없이 그의 가슴 속에 응어리져 있었을 것이다.
부모에 대한 미안함과 고액의 변상금에 대한 괴로운 마음을 안고 살았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한 기억, 분노, 억을함, 공따위 차지 않았더라면 하는 후회 등의 생각과 함께 그는 11년의 세월을 견뎌내야만 했던 것이다. 이제 그는 깨끗이 무죄가 되었다.
그래서 축하한다는 말만으로 끝낼 수 있을까? "가엽게도 이 경험이 트라우마로 남지 않기를 빌 뿐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분명히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당사자로는 그 말이 허무하게 들릴 뿐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무죄보도 후에 요미우리신문은 "식자(識子) 코멘트"란에 다음과 같은 글을 실었다. "이 정도 나이의 소년의 공차는 능럭은 정확도를 고려하면 교정의 담을 넘을 수도 있다는 것을 고려했어야 했다.
학교측에서 골문에 그물을 치거나 골문을 도로와 반대편에 세우는 등의 조치를 하였더라면 공이 담장 밖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았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학교측에서는 골문의 위치를 이동하는 등의 조치를 하고 교육위원회는 "차후로 학교시설의 안전관리를 철저히 하여 나갈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차후로 철저하 하여 나갈 것이다"가 무슨 소용이 있나!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 그 보다도 당사자인 소년의 마음을 헤아려야 할 것이다. 득이나 실을 따지기 것 보다 관용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이 늘어나게만 한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 장수도 병이련가 (10) 부모의 마음
"九十歳.何がめでたい"(2016 佐藤愛子 作)
-10- 부모의 마음
오늘은 아주 오래된 기억을 곰곰히 떠올려 본다. 나의 어릴적(쇼와 초기: 1930년 전후)엔 모든 어머니들이 조바심이 많았다. 자녀들이 놀러 나가서 해가 저물어도 돌아오지 않으면 매우 불안해 하고 걱정 끝에 화를 내기도 하였다.
그 것이 두려워 그 때의 아이들은 해가 지기 전에 반드시 집에 돌아오곤 하였다. 놀러 나갈 때엔 어른들이 이렇게 말했다. "전등불이 들어올 때까지는 돌아와야 해" 그 무렵엔 (전기 사정이 좋지 않아) 전력회사로부터 낮엔 단전이 되었다가 저녁 5시(여름은 6시)가 되어야 전기가 들어와 전등을 밝힐 수가 있었다.
밖에서 놀다가 집집마다 전등에 불이 일제히 들어오면 그 것을 보고 아이들은 서둘러서 집으로 돌아가곤 하였다. 해가 저물어도 밖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이 있으면 지나가던 생면부지의 어른들이 "엄마에게 꾸중듣기 전에 빨리 집으로 돌아가거라"고 나무랐다.
이런 기억을 떠올리게 한 것은 오사카부의 네야가와시에서 중학교 1학년생의 남녀 학생이 이유도 모르게 살해된 비참한 사건을 접했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TV에서 심야의 상점가를 왔다갔다하는 소년과 소녀의 모습이 찍힌 방범용 CCTV영상을 계속하여 내보내고 있었다.
동시에 다음과 같은 설명이 따랐다. "그날 밤 9시 경 소년은 소녀로부터 라인통신으로 연락을 받고 소녀의 집에 놀러 간다면서 집을 나섰다. 그 후 둘이 상점가를 배회하는 모습이 방범용 CCTV에 찍혀 있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이러한 설명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이렇게 중얼거렸다. "---밤 9시에 중1년생이 놀러 나가다니---" 나와 같은 연배의 사람들에겐 수긍이 가지 않는 일이었다. 나의 유년기에는 해가 저물면 아이들은 집에 있는 것이 당연지사였다. 밤중에 동네를 돌아다니기라도 하면 부랑아로 치부되며 부모들이 욕을 먹게 된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일을 예사롭게 생각하고 있다. 보도를 보며 내가 너무 어이없어 하자 딸이 한 마디하였다. 학원에 다니는 아이들은 밤 9시나 10시가 지나야 집에 돌아온다고. 그리고 부모들도 회사일로 밤 늦게 귀가하기도 한다. 옛날과 달리 요즘 아이들은 부모가 집에 없어도 편의점 음식 등으로 저녁을 떼울만큼 똑똑하다.
엄마가 집에 없다고 짜증내는 아이는 없는 세상이다. 시대가 달라요, 시대가... 이런 말을 들으니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부모들은 걱정하지 않을 수 있을까. 분별없고 두려운 것 없이 살아온 나 같은 사람도 딸을 키울 때는 걱정을 이고 살았다. 하지 않아도 될 걱정때문에 짜증이 나곤 했다는 딸의 말에 수긍이 가면서 이런 기억도 떠오른다.
"밤에 담배 심부름 가는데 아버지의 지팡이를 들려 보내기도 했으니..." "아버지의 지팡이"는 헤어진 남편이 두고 간 것으로 매우 단단하게 만들어져 있어 비상시에 휘둘러서 몸을 지키라는 엄마의 마음이 담긴 지팡이이다. (참고: 1923년생인 작가는 첫 남편과 사별 5년 후인 1956년 재혼 1960년 지금 동거 중인 딸을 낳고 1968년 피치못할 사정으로 남편과 헤어짐)
"그래서 밤외출을 할 때면 꼭 그 지팡이를 지니고 다니는 나를 사람들은 이상한 눈으로 보곤 했어요. 그러고 보니 나도 너무 순진한 아이였나봐..."라고 딸이 말했다. 쓰다 보니 또 생각나는 것이 있다. 오래 전의 학교시절 친구의 처녀 때 이야기다. 혼자 밤길을 걷고 있는데 뒤에서 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무서움에 걸음을 빨리하였더니 그 발소리도 빨라졌다. 궁지에 몰리게 되자 할머니가 가르쳐 주신 위기대처법이 떠올랐다. 그 대처법은 빗을 입에 물고 따라오는 자를 향해되돌아서서 "이히히"하고 소리내어 웃는 것이었다. 여자는 힘으로는 남자를 제압할 수 없기 때문에 머리를 써야 된다는 할머니의 가르침이었다.
그러나 친구의 할머니 시대에는 여성들이 머리를 틀어올리고 빗을 꼽고 다녔기 때문에 재빨리 머리에서 빗을 뽑아 입에 물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빗을 소지하고 다니는 여성은 드물었다. 그래서 친구는 백 속에서 꺼낸 지갑을 물고 돌아서서 "이히히"하고 소리내어 웃었다.
따라오던 남자는 그 모습을 흘끗 보고는 한눈팔지 않고 그냥 지나가 버렸다는 것이다. 친구는 그 이야기를 기회를 봐 두 딸들에게 하였다. 그러나 딸들은 모두 농담도 작작 하라며 역정을 내면서 도대체 그 남자는 진짜 나쁜 사람이었는지 단지 같은 방향으로 바쁘게 지나가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르지 않는냐며 면박을 주었다고 한다.
나도 친구의 딸 얘기에 수긍은 하지만 부모로서 걱정이 돼 그런 케케묵은 얘기를 하는 친구의 심정도 이해가 되었다. 옛날의 밤길은 무서웠다. 그래서 어둠 속에서 길을 걸을 때는 자신의 발걸음 소리에도 놀라곤 하였다.
밤길을 걸어서 귀가하는 딸을 기다리는 부모의 걱정하는 마음은 안절부절못하는 것이어서 "저 왔습니다"라는 소리가 나야 안심을 하는 것이다. 그 걱정은 아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귀찮고 짜증나는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렇게 걱정하는 부모 모습을 자주 보게되면 아이들의 마음 속에도 걱정을 끼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길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현대의 밤거리는 언제나 밝고 편의점은 심야에도 열려 있으며 요즘 아이들은 여유있는 용돈을 지니고 있는 데다 누구나 휴대전화기를 가지고 있어 문제가 생기면 바로 연락이 가능하다.
살해된 소년은 밤이 으슥해지자 남자 친구에게 라인통신으로 하룻밤 재워달라는 문자를 보냈다. 부모와 의논했는지 아니면 혼자의 판단인지 모르지만 친구는 거절했다. 중학교 1학년인 친구가 심야에 재워달라고 하였을 때 왜 그럴까하는 의구심도 가지지 않은 모양이다.
여차하면 경찰차나 구급차가 달려온다. 아이들은 영특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는 세상이다. 그래서 밤 9시에 놀러 나가는 것을 말리는 부모가 없고 심야에 아이들이 길거리를 배회하는 것을 봐도 걱정하는 사람이 없다.
의구심을 가졌다면 부모와 의논하여 그 친구네 부모에게 바로 연락하였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두 아이는 살해되지 않았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그 친구와 가족이 잘 못했다는 것이 아니다. "관심"의 양과 질이 오늘날에 와서는 줄어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 사이의 정이 문명의 진보와 함께 변질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변질을 "진보"라고 해야 할 지 망설여진다.
● 장수도 병이련가 (11) 망상작가
"九十歳.何がめでたい"(2016 佐藤愛子 作)
-11- 망상작가
1969년 7월 20일은 미국의 우주탐사선 이폴로11호가 달에 착륙한 날이다. 그 전날인 7월19일 친구인 가와카미 소오쿤이 입원하고 있는 도라노몬병원의 분원에 병문안을 갔다. 그 무렵은 주변이 벌판이어서 길을 헤메고 있었다. 이어지는 벌판을 헤메는 사이 해는 저물기 시작했고 고즈넉한 저녁 하늘 아래로 이제 막 불을 밝힌 병원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그 외의 풍경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무려 50년 전의 일이니까. 가까스로 병원의 입원병동에 들어가니 정면의 간호사실에서 환자복을 입은 가와카미 씨가 한 손에 전화기를 든 채 나를 보고는 서둘러 "이봐 뭐하고 있는 거야. 나오키상 수상했다는데!" 라고 외쳤다.
내 입에서 나온 말은 "뭐라고"라는 한 마디가 전부였다. 내 작품 "싸움이 끝나자 해는 저물고"가 문예춘추사에서 선정하여 시상하는 나오키상후보에 올랐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전혀 기대하지 않고 있었다. 우리 집은 남편이 경영하던 회사의 도산으로 빚쟁이에 시달리느라 나오키상 따위를 생각하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싸움이 끝나자 해는 저물고"는 이미 고단샤에서 출판한 책이지만 출판사로부터 수상에 관한 아무런 연락도 없었고 아무도 저자인 사토아이코와 나오키상과를 연관지어 생각하는 사람도 없었다. 가와카미씨는 문예춘추사 사람이 벌써 병실에 와서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문춘사로부터 수상을 알리는 전화를 받은 어머니가 딸이 친구 병문안 간 병원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서 나는 나오키상을 받아들일 것인가 거절할 것인가의 정중한 질문에 답을 해야만 했다. 뜻밖의 질문에 곤혹스러워진 나는 친구 가와카미에게 "어떻게 말해야 하지?" 하고 물었다. 그렇지않아도 빚쟁이와 전쟁을 치루느라 마음 편한 날이 없을 때였다. 이 상태에서 나오키상을 받으면 매스컴에 보도되어 빚독촉이 더 심해지지나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
친구는 침상에서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아무튼 돈 생기는 일이잖아"라고 말했다. 돈이라는 친구의 그 말 한마디에 이성을 잃고 "받아 들이겠습니다." 라고 말해 버렸다. 상을 받게 되면 기자회견도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병원에서 바로 신바시제일호텔의 회견장으로 안내되었다. 회견장 내의 모습은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 외는 별로 기억나지 않는다.
ㅡ의자에 앉은 내 주변에 몇 사람인가의 신문기자가 와서 형식적인 질문을 하여 간단하게 답한 것이 기억난다. 그 외 확실치는 않지만 아쿠타가와상 수상자인 쇼지 카오루 씨와 다쿠보 히데오 씨의 회견도 같은 장소에서 있은 것 같기도 하다. 어수선한 와중에 한쪽 구석에서의 일이어서 차 대접을 받았는지도 기억이 가물거릴 정도다.
요즈음의 TV에서 보는 수상 광경과는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이러한 발전을 진보라고 해야 할지 내게는 의문이다. 회견 후 나는 바로 문춘의 담당편집자인 호시노 씨와 함께 호텔을 나왔다. 신바시의 역으로 가는 빌딩 사잇길을 걸으며 문득 빌딩 위를 처다보니 그림으로 그린 듯 한 둥글고 밝은 달이 떠 있었다.
그것을 보고 나는 이폴로11호를 떠올리며 호시노 씨에게 말했다. "호시노 씨 저 달님을 향해서 우주선 아폴로는 날아가고 있겠지요." 그 말에 호시노 씨도 달을 처다보며 "그렇군요. 음 감개무량합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는 역 앞에서 헤어져 나는 지하철로 집에 돌아왔다.
이 일은 이따금 생각이 되살아나서 사람들에게 들려 주곤 하는데 그 때마다 더욱더 선명하게 나의 뇌리에 각인되어 왔다. 나오키상 수상 시기가 되면 지난 시절의 수상 소감을 물어 오는 일이 많았다. 그 때마다 이 추억담을 들여주곤 하였다.
그런데 이 추억담에 트집이 잡혔다. 어느 잡지사와 인터뷰했던 취재기자로 부터였다. "지난번 취재 중의 추억담 속에 둥근 달을 처다보며 아폴로우주선을 떠올렸다는 대목인데..." 라며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조사 결과 1969년 7월 19일은 만월이 아니었습니다." "무슨 얘기입니까?"라고 나는 되물었다. "월령 켈린더에서 조사해 보니 그날의 달은 석월 즉 초승달이었습니다."
뭘 말하고 있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어떻게 조사를 했다는 말입니까?" "데이터가 있습니다. 달의 주기를 계산하여 가면 과거의 모든 날자의 달의 모양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데이터에서 45년 전의 7월 19일은 초승달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날 빌딩 위로 둥글고 밝은 큰 달님이 떠 있는 것을 이 두 눈으로 확실히 보았다.
지금도 "호시노 씨 보세요 저 달님을 향하여 지금 아폴로우주선이 날아가고 있겠지요"라고 말했던 기억과 함께 그 큰 달님의 모습이 내 눈동자 속에 또렸하게 남아 있다. 보기좋은 만월이었기 때문에 아폴로우주선을 떠올린 것이데... "이 데이터는 절대로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천문학이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또 무슨 날벼락일까! 비몽사몽간이거나 여우에 홀렸거나 아니면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마음대로 지어낸 몽상이었던 것일까? 오직 증인은 호시노 씨 한 사람 뿐이다. 그도 나와 함께 그 달을 보았다. 하지만 지금 그와는 소식두절 상태다.
그와 연락이 된다 해도 상대가 천문과학이고 보면 아무리 바둥대어 봐도 소용없는 일이다. 나의 패배다. 그러나 그때의 광경은 45년이 지난 지금도 내 머리 속에 각인되어 있다. (그런 말을 하는 저의가) 미심쩍다기 보다는 어이가 없어 더 이상 이무 것도 말하고 싶지 않다.
모든 게 나의 망상이었을까? 그렇다면 그 망상은 언제부터 왜 생겼을까? 내가 생각해도 소름끼치는 망상의 힘으로 내가 작가가 된 것일까? "독자 여러분 이제부터는 내가 하는 말도 글도 모두 처음부터 믿지 말고 즐기기만 하여 주세요"라는 말 밖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 장수도 병이련가 (12) 말벌 사건
"九十歳.何がめでたい"(2016 佐藤愛子 作)
-12- 말벌 사건
8월초부터 이곳 북해도의 우라카와마치의 산장에서 여름을 보내고 있다. 이곳은 산 중복의 단독주택으로 남으로 태평양이 보이고 눈 아래로는 목초지와 방목장이 펼쳐져 있는 생활하기 썩 편리다고는 할 수 없지만 평온하고 한가로운 기분이 드는 곳이다.
이곳에 와 11일 째가 되는 날 읍장님의 방문을 받았다. 거실에서 두서없이 얘기를 나누던 중 읍장님과 함께 온 무슨과인가의 주임이 앗! 말벌이 날아다니고 있네요라고 했다. 그래서 살펴 보니까 유리창 밖에 여러 마리의 벌들이 날고 있었다. 어디엔가 벌집이 있는 게 틀림없다고 하여 테라스에 나가보니 처마 밑에 벌집이 있었다.
직경 13, 4센티미터 내외로 그렇게 크지는 않지만 예상 대로 말벌집이었다. 3,4년 전에도 내가 집을 비운 시기에 같은 곳에 말벌집이 있어 제거했다는 위탁 관리인의 말이 생각났다. 벌은 아무리 둥지를 없애도 같은 곳에 또 집을 짓는 습성이 있는 것 같다.
다음 날 읍사무소에서 처리반 직원이 와서 손쉽게 처리해 주었다. 주위를 맴도는 벌들도 모조리 그물채로 잡아버려 벌집 문제는 간단히 일단락 되었다. 밤이 되어 외출했던 딸이 돌아와 현관의 마루끝에 오르는 순간 "아야얏!"하는 비명을 지르며 하얗게 질린 얼굴로 거실로 들어왔다.
슬리퍼를 신는 순간 그 속에 숨어 있던 말벌에 발등이 쏘여 심한 통증이 왔던 것이다. 그래서 발등도 붉게 부어올라 있었다. 말벌은 보통 벌과는 달리 맹독성이어서 잘못 물리면 목숨도 위험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사실이다.
딸은 비장한 얼굴로 "만약 심장에 이상이 오게 되면 구급차를 불러 주세요"라고 한다. 우선 독을 빼려고 쏘인 부분을 눌려보기도 하였는데 독이 빠졌는지는 알 수 없는 상태이어서 얼음으로 찜질을 하였다. 순간적으로 딸이 밟아 죽였는지 오무라져 나둥그러져 있는 말벌을 부채 위에 올려 놓고 자세히 살펴 보았다.
살펴 본들 별 뾰죽한 수가 있을 수 없어 인터넷에 들어가 조사해 보니 린데론연고를 바르면 좋다고 하여 그것을 잔뜩 발랐다. 마침 약상자에 있던 린데론연고의 용도를 자세히 읽어 보니 눈가장자리에 바르는 것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다급한 마음에 사용한 것이었다.
그리고 응급처치를 한 후 병원에 바로 가야한다고 되어 있었지만 하필이면 일요일 밤이었고 부기도 그렇게 심한 것이 아니어서 그대로 하룻밤 보냈더니 다음날은 부기도 통증도 사라져 병원에는가지 않아도 되었다.
다음날 보니까 벌집이 있었던 주위로 말벌이 여러 마리 날고 있었다. 이것을 "회귀벌"이라고 하는 것 같다. 이렇게 돌아 온 벌들 때문에 읍사무소 직원이 또 와 주었다. 벌레잡이 그물채를 휘둘러서 돌아다니고 있는 여러 마리의 말벌을 모두 잡은 후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면서 돌아 갔다.
그날 밤 딸이 전동안마기를 사용한 후 벗어 놓았던 슬리퍼를 신는 순간 "아야얏!"하고 어제와 같은 소동이 또 벌어졌다. 또다시 슬리퍼 속에 들어가 있던 말벌에 쏘인 것이다. "지독한 놈이다" 딸은 화를 내며 전날 쏘인 후 바로 사두었던 "하치아부스 파 젯트"라는 강력살충제를 한바탕 뿌렸댔다.
말벌은 동그랗게 몸을 말아 나둥그러졌다. 딸은 " 이 말벌은 슬리퍼 같은 곳에 숨어 있는 본성이 고약한 놈이다..."라고 투덜거렸다. 본성이 고약하다---? 는 말에 생각나는 게 있었다. 둥지를 잃어 오갈 데가 없어진 말벌은 넋이나가 하룻밤을 보낼 장소를 찾아 헤메다가 슬리퍼를 발견한 것이다.
슬리퍼 속은 어둑하고 따뜻하여 잘 됐구나하고 속으로 들어가 한 시름 놓고 있는데 왠 불청객이 쑥 들어와 놀란 김에 한 침 놓은 것이다. 그렇게 벌이 침을 놓는 것은 하늘이 내린 방어본능이다. 둥지를 잃은 화풀이를 하기 위해 작심하고 숨어들어와 기다린 것이 아니다.
말벌연구가 말에 의하면 "말벌은 상대로부터 공격을 받지 않는 한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는다" 라고 한다. 말벌이 보여도 모른 체 하고 있으면 되는데 사람들은 말벌이 보이면 바로 공격적이 된다. 벌들은 부지런히 벌집을 짓고 여왕벌을 중심으로 부지런히 활동하고 있을 따름이다. 세력을 확대하고자 인간세계를 공격하고 침략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맹독을 지닌 말벌은 반드시 쏜다고는 단정할 수는 없지만 만약 쏘였을 때에는 목숨도 위험할 수 있기 때문에 서둘러 죽여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을 인간의 세상에서는 "사전조치" "위험예방"이라고 한다. 이웃 노인이 찾아와 "말벌이라는 놈은 젼혀 도움이 않되는 놈이야. 꿀을 모와 오지도 않는 아무 소용없는 귀찮은 존재야..."라며 위로의 말을 해 주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꿀벌은 부지런히 움직여서 꿀을 모아와 인간에게 공헌을 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공헌"이란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 말은 인간이 멋대로 남의 이익 즉 꿀을 가로채는 것을 뜻하는 말이 아닐까? 가로채이는 꿀이 있고 없음에 따라 벌의 가치를 인간이 멋대로 매기고 있다...
소나 닭은 (육신을 몽땅 뺏기고 있으니 인간에 크게 공헌하는) 가치있는 생물이어서 소중한 취급을 받고 말벌이나 바퀴벌레 민달팽이 따위는 아무런 이용 가치도 없기 때문에 미움받아 죽임을 당한다.
"아니 이놈의 말벌들은 왜 태어났을까요..." 이웃 노인은 덧붙여 말했다. 그렇게 정색을 하고 물어 와도 아마 그것은 하늘의 섭리로 태어난 것이겠죠라는 말 외는 할 말이 없다. 단지 한 가지 답해 줄 수 있는 것은 생물은 모두 인간에게 이용 당하려고 태어난 것이 아니다라는 것 만은 말 해 줄 수 있다.
"말벌은 말벌로서 살아가도록 해야 한다" 라고 주먹을 휘두르며 외치다가 그 바람에 조용히 날고 있던 말벌을 놀라게 한다. 이렇게 놀란 말벌의 공격을 받은 나는 이놈아 나는 네 편인데 쏘아서 나를 죽게하느냐! 이렇게 되는 경우도 없으란 법도 없다. 그래서 세상사는 요지경 속이라는 말이 있는 지도 모른다.
● 장수도 병이련가 (13) 신불점지의 아이
"九十歳.何がめでたい"(2016 佐藤愛子 作)
-13- 신불점지의 아이
일본의 제일 북쪽 홋카이도에서 여름을 보내게 된지 올해로 꼭 40년이 된다. 나는 이곳 우라카와 지역이 마음에 든다. 이곳 산 중복의 내 별장에서 내려다 보이는 아자히가시사카에 (우라카와쵸의 일부)라는 작은 마을에는 대략 백여 가구의 어부의 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나는 왠지 이곳 사람들과 죽이 맞아 잘 어울린다. 그래서인지 이곳에만 오면 마음이 편안해 진다. 서로가 단순하고 솔직한 성품에서 오는 동질감 때문인지 격식을 차린 인사도 필요없어 편해서 좋고 하고 싶은 말도 서로 마음대로 할 수 있어 기분이 좋다.
이곳에서 제일 친한 사람은 상점를 운영하는 "아베 씨"이다. 마을 한 가운데에 있는 아베상점은 대부분의 생활 필수품을 구비해 놓고 있다. 틈이 나면 아랫쪽의 마을로 내려가 아베상점 안쪽에 있는 사무실 겸 응접실의 40년도 더 된 장의자에 앉아 끝도 없는 수다를 떠는 것이 낙이다.
"선생님 우리 미키의 배필 감 어디 없을까요" 아베 씨는 나 뿐만 아니라 사람만 보면 이 말을 언젠가부터인지 몰라도 입버릇처럼 하고 있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그 전 해에도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미키는 아베 씨의 아들로 오랜 동안 아이가 없던 아베 씨 부부에게 기적 같이 얻은 아들이다. 그 기적 같은 득남에는 다음과 같은 탄생비화가 있다.
지금부터 47년 전 어느 날 아베 씨가 가게 앞에 서서 길 쪽을 쳐다보고 있는데 어부인 나카무라 씨가 다가왔다. "아베 씨 뭐하고 있어?" "뭐하긴 그냥 서 있는 중이야" 그러자 나카무라 씨가 하는 말이 "자네 저 지장보살의 신통력 들어 봤나?"
아베 씨가 서 있는 가게 옆의 공터에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아주 오래된 작은 석조지장보살이 세워져 있다. 가까이에 있었지만 무심히 보아 넘긴 석조지장보살이다. 이것이 아기점지 지장보살이다고 니카무라 씨는 말했다.
"자네 아직 모르고 있었나? 지장보살 머리를 세 번 어루만지면서 아이를 점지해 주세요 하고 빌면 아이를 얻게된다네" 라면서 나카무라 씨는 "이렇게 하는 것일세"하며 돌지장보살의 머리를 세 번 어루만지는 시범을 보였다.
"간단하네"라고 하는 아베 씨 말에 "간단하고 말고. 어루만지면서 모쪼록 아기를 점지해 주십사하고 빌기만 하면 되지" 예전부터 아베 씨는 아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어쩌자고 아직도 아기를 못 가지나" 했다가 부인과 불화의 씨가 되기도 했다.
그런 아베 씨에게는 귀가 솔깃한 말이어서 시키는 대로 지장보살의 머리를 어루만지면서 빌었다. "이렇게하면 됐나?"하니까 "그리고 오늘 밤 잠자리에서 그걸하면 된다"고 나카무라 씨는 덧븥여 말했다.
아베 씨는 그날 밤 시키는 대로 했더니 다음 달 부인의 달거리가 멎었다. 부인이 임신한 것이다. 아베 씨가 기뻐서 나카무라 씨에게 달려 가서 말했더니 그는 표정이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 마누라도 생겨 버렸어..." 나카무라 씨는 아베 씨에게 지장보살에게 비는 시범을 보이려고 머리를 세 번 어루만지면서 모쪼록 아기를 점지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래서 지장보살은 두 사람의 기도를 모두 들어 준 것이다. 나카무라 씨에게는 이미 세 명의 아이가 있어 더는 아이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또 생겨 반갑지 않았던 것이다. 미키는 그렇게하여 지장보살의 점지로 태어난 아이인 것이다.
아베 씨 부부가 눈물이 나도록 기뻐하며 금지옥엽으로 키운 것은 말할 나위가 없었다. "나카무라 씨의 넷째인 딸아이와 우리 집 미키는 거짓말 같게도 같은 해 같은 달에 태어났고 출생 일자까지 같지. 그걸 보면 지장보살님은 정말로 영험한 것 같다"고 아베 씨는 무척 감격한듯이 말하고 있었다.
이 이야기를 재미삼아 어느 잡지에 투고를 하였다. 잡지가 출판되자 이를 읽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이 영험한 지장보살을 찾아 오게 되었고 아베 씨의 가게는 아이점지 지장보살의 안내소 꼴이 되어 버렸다.
아베 씨는 찾아오는 사람들의 명부를 만들었다. 후에 아이를 낳은 사람과 못 낳은 사람과를 다시 분류하였다. 무사히 아이를 낳은 사람으로부터 온 감사의 편지와 사진을 내게도 보여 주었다. 개중에는 감사의 예를 표하러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도 있었다.
아베 씨의 아내는 흰 경단을 만들어 인사 차 오는 사람들을 접대하였다. 마침내 이 소문이 인터넷을 타게 되어 북해도 뿐만 아니라 멀리 가고시마 등지에서도 찾아오게 되자 아베 씨는 "아기 점지 지장보살"이라고 새긴 표지 기둥을 가게 앞에 세웠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지장보살의 점지로 태어난 미키는 마흔 일곱이 되었다. 미키는 이 동네의 한 병원에 사무직으로 근무하며 현재는 계장이다. 이 동네에서는 드물게 얌전하고 온순하며 날씬한 체격의 청년이다.
아베 씨의 지금의 소망은 미키를 장가보내는 일이다. 하지만 미키는 아무래도 결혼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그래서 아베 씨는 사람만 보면 "우리 미키의 배필 감 어디 없나? 미키 짝 말이야"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할 정도면 미키 본인에게도 "제발 장가 좀가거라 장가 말이야" 라고 줄기차게 재촉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결혼을 하고 싶지 않은 이유를 묻는 것도 아니고 설득시키는 것도 아니고 오직 "제발 결혼 좀 해라, 결혼" 이 말만 되풀이 하니 미키는 입다물고 쓴 웃음만 짓고 있을 뿐이다.
올 여름에도 나는 몇 번인가 "미키 배필 감 어디 없나"란 말을 듣고 있었는데 마침내 도쿄로 돌아가게 된 날 아베 씨는 내게 "선생님 미키 짝 찾는 일 책에 좀 실어주시면 좋겠네요" 라고 부탁했다.
아기점지 지장보살 얘기가 잡지에 실려 전국에서 사람들이 오게 되었기 때문에 미키의 배필 찾기도 잡지에 실리면 틀림없이 며느리 감이 찾아 올 것이라고 아베 씨는 믿고 있는 것 같다.
그것과 이것은 얘기가 다르다고 말해도 아베 씨는 듣지 않는다. 설령 며느리 감을 찾았다고 해도 아들 미키가 결혼 생각이 없다고 하면 어쩔 수가 없는 것아니냐고 말해 주어도 아베 히는 귀담아 듣을려고 하지도 않는다.
"선생님이 쓰기만 하면 반드시 옵니다. 틀림없이 옵니다. 부탁하고 또 부탁드립니다" 나는 아베 씨의 공손한 말투를 처음으로 들었다. 그래서 이번 원고에 이런 사연을 쓰게 된 것이다. 이것으로 아베 씨에 대한 도리는 다하게 되었지만 뒷 일은 어떻게 될지 걱정이 앞선다.
도쿄로 떠나는 길에 붉은 아기침받이 천을 여러 장 목에 걸고 있는 아기점지 지장보살을 옆눈으로 언뜩 보니 어느집 개가 짖냐는 듯이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 장수도 병이련가 (14) 장수만화 '사자에상'
"九十歳.何がめでたい"(2016 佐藤愛子 作)
-14- 장수만화 '사자에상'
TV만화영화 '사자에상(소라고둥 씨)'은 올 해로 방영 몇 년이 되었는 지는 모르지만 35주년 때에 신문에서 만화 사자에상에 관한 감상문을모집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의 신문에 실린 일부 감상문을 스크랩해 둔 것이 최근 발견되었다. 일부러 스크랩해둔 이유는 그 감상문이 의표를 찔렀기 때문인 것 같다. 지금 다시 읽어 보아도 역시 그 내용은 나의 의표를 찌르고 있다.
그 중 첫 번 째 내용은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가츠오(가다랑어: 사자에의 남동생)는 항상 꾸중만 듣는 장면에 위화감이 든다"라는 소감문이다. 이에 대한 유사한 내용의 소감문이 12통이나 된다고 한다. 그리고 "요즘의 아버지들은 권위가 실추되어 그렇게까지 심하게 꾸중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대리만족하는 대중들로부터 더욱 이 만화가 사랑받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의견이 많았다.
그 다음으로는 "가츠오와 같은 연령의 아이를 가진 부모로서, 나미헤이(가츠오의 아버지)의
자식을 이해 못하는 구닥다리 아버지상에
불합리와 불쾌감을 느낀다는 30세 남성의 의견이다. 이를 읽은 나는 "이봐요 이건 만화야 만화..." 라고 말해 주고 싶은 심정이다. 원래 만화라는 것은 세상사의 미묘한 부분을 꼬집어서 재미와 흥미를 유발케 하는 것이다.
'아버지로서의 가져야 할 지세'를 설명하는 교과서 따위가 아니다.
등장 인물의 실수 괴롭힘 거짓말 완고함 얼빠진 행동 등을 보고 한바탕 웃어 넘기면 되는 것이다. 스스럼없이 웃기 위해서 만화는
존재하는 것이다. 도대체 언제부터 만화가 인간을 논평하는 매개가 되어버린 것인가. "옛날엔 복도에서 벌을 선 학생도 불평없이 수업진도를 따라갔는데 '학생은 수업받을 권리가 있다'는 말이 나오는 걸 보니 시대가 많이 바뀌었음을 절감했다"
위는 '58세의 여성'이 평한 것이다. 아마 가츠 오가 선생님께 꾸중을 듣고 교실 밖에서 벌을 서면서 '학생은 수업받을 권리가 있다' 라고 했 는지도 모르겠다. 가츠오는 공부에 흥미가 없 놀기를 좋아하고 짓궂은 장난만 치는 초등 학생으로 일년 내내 선생님과 부모로부터 꾸중을 듣고 있다. 쇼와(1926년~1989년) 전 반기의 아이들은 대부분 공부하기를 싫어하고 먹보였다.
가츠오의 아버지는 고집불통에 완고하고 어머 니는 상냥한 직업 여성이며 사자에상은 촐랑이 누나로 동생 가츠오에게 잔소리하는 것을 낙 으로 삼고 있다. 이 가족은 쇼와 전반기의 전형 적인 일본의 한 가정이라고 할 수 있다. 독자들 이 생각할 수 있는 일상의 아기자기하고 흔히 있을 수 있는 희로애락이 펼쳐지고 있는 점이 아련한 미소를 자아내게 하는 것이다.
완고하고 고집불통인 아버지를 가진 가츠오는 일년 내내 꾸중을 듣지 않으면 이 만화는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41세의 남성은 '비록 학교 성적은 좋지 않지만 가츠오 의 풍부한 삶의 지혜에 감동했다'고 말했다. 이 것은 가츠오가 잔머리를 굴려 아버지의 잔소리를 피하는 장면을 보고 하는 말 같다. 이 장면은 감동하기 보다는 웃어야 할 장면이다.
왜 웃지 않는가! 웃지않고 감동 받는 다는 것은 만화에 대한 모욕이기 때문이다. '태도를 확실히 해요'라고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나 이 기사를 정리한 기자는 "이렇게 다양한 의견들을 보면 왜 만화 '사자에상'이 부동의 인기를 유지하고 있는 지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진지하게 결론을 내렸다.
내가 어릴 때 몇 번을 다시 읽어도 읽을 때마다 나를 웃긴 만화가 있었다. 경찰이 도둑을 쫓아 가면서 "거기 서라..."면서 외치고 있다. 도망가 는 도둑에게 그기 서라고 외친들 설 까닭이 없 다. 하지만 경찰은 진지하게 눈썹을 치켜세우 며 "거기 서라..."고 계속소리치고 있다. 쫓아가 는 경찰이 바나나 껍질에 미끄러져 벌렁 나자 빠지면서도 "거기 서라..."며 눈썹을 치켜세우 고 외치는 장면이 더 재미있다.
옛날의 만화는 이런식이었다. 그래도 우리들은 웃으며 재미있어 했다. 요즘 애들이라면 어떨까? 웃으며 재미있어할까? 아마도 "명색이 경찰이라면 미끄러지지 않도록 주위를 잘 살펴야 한다라는 교훈을 주기 위한 것 같다"는 소감을 말할 것 같다. 이것을 두고 일본인이 지적수준이 높아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르지만 나는 뭔지 모르지만 씁쓸하고 서글픈 생각이 들면서 걱정도 된다.
언젠가 지하철을 기다리며 건너편 플랫폼을 보니 한 켠에 허술한 차림의 노숙자 같아 보이는 노인이 서있는 것이 보였다. 눈 앞에 잡지를 펴든 채 수염이 덥수룩한 얼굴을 쳐들고 큰입 벌리고 웃고 있었다. 그가 두 손으로 바쳐 들고 있는 잡지는 먼눈으로 보아도 표지의 잡 다한 색상으로 보아 만화잡지인 것으로 짐작이 되었다.
노인은 만화를 보면서 크게 웃고 있는 것이 었다. 치아가 없어서인지 속이 컴컴한 동굴 같아 보이는 입으로 내 귀에까지는 들리지는 않았지만 크게 소리내어 웃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참으로 소박하고 세상걱정 없는 천진난만한 웃 는 얼굴이었다. 그렇게 웃는 얼굴을 보니 왠지 내 마음도 흐뭇해 지는 것 같다. 저렇게까지 그 를 웃게하는 만화는 어떤 만화일까? 나도 한 번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다못해 저자의 이름이라도 알고 싶었다. 저렇게 웃어 주는 독 자가 있다는 것을 안다면 저자는 얼마나 기분 이 좋을까? 책이 잘 팔리거나 유명해지는 것보 다도 저렇게 쓸쓸한 삶을 견디며 살아가는 사 람에게 큰 웃음을 안겨준다는 것은 저자에게도 최고의 선물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만화가가 되어 더할 나위없는 복이라는 게 바 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생 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 전차가 왔다. 더 지켜보 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타고 보니 한 순간에 웃고 있던 노인이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내 마 음속의 훈훈한 온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 웃 고 있는 노인의 모습은 지금도 내 머리 속에 못 박혀 있다.
뒷날 친한 친구에게 이 이야기를 하 고학력의 지성미를 자랑하는 이 친구 왈 "그런 무사태평한 성격이기 때문에 노숙자 따위가 되고 마는거야. 성공하는 사람은 만화 같은 거 보고 웃는 짓은 하지 않아"라고 했다. "그렇구나"하고 맞장구는 쳐주면서도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그 말대로 가혹한 현실을 헤쳐 나가려면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그 노숙자야말로 '마음 속에 행복을 지닌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 장수도 병이련가 (15) 애견 '하나'에의 회상
"九十歳.何がめでたい"(2016 佐藤愛子 作)
-15- 애견 '하나'에의 회상
올 6월 하나가 죽었다. 하나는 14년 전 홋카이도의 내 별장 현관 앞에 버려져 있던 암캐 이름이다. 생후 2,3 개월 되었을까 두 손 바닥 크기의 새끼 강아지였다. 동틀 무렵 낑낑 짖는 소리에 온 집안이 잠을 깬 것이다.
어디에서 이렇게 작은 새끼 강아지가 여기까지 왔나하며 함께 있던 숙박 손님이 말했다. 우리 집은 마을과 떨어진 산 중복이어서 인가로부터 700 미터 정도 산길을 올라오지 않으면 안되는 곳이여서 하는 말이었다.
어디서 왔는지 따위는 말할 것도 없이 누군가가 차에 실어와서 버린 것이 틀림없었다. 우리 집을 겨냥해 일부러 아침 일찍 와서 나에게 억지로 떠맡긴 것이다. 이곳은 나의 별장이다. 가을이 되면 나는 도쿄로 돌아간다.
이 개를 떠안으면 떠날 때 비행기 편으로 도쿄로 데리고 가지 않으면 안 된다. (개의 비행기 운임은 얼마지?) 함께 데리고 가지 않으면 추위가 닥쳐올 이 산 속에 이 강아지를 버리고 가는 꼴이 된다.
그러한 매몰찬 역할을 이 강아지의 주인은 생면부지의 나에게 떠넘기고 나를 궁지에 몰아넣은 것이다. 나는 전에 키우던 다로가 죽은 후로는 한 동안 개를 키우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런 상태에서 생면부지의 시건방진 자 때문에 개를 떠맡게 된 사태에 속이 뒤집힐 지경이다.
하지만 사람이 그리워 졸졸 따르는 이 새끼 강아지를 여우가 출몰하는 황야에 내팽개칠 수는 없는 일이다. 고약하게 되었다고 화가 났지만 떠안을 수 밖에 없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도쿄의 집으로 데려온 강아지에게 손자 녀석이 '하나'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전에 기르던 개는 수캐여서 사내 이름식으로 '다로'라 했기 때문에 이번 개는 암캐여서 여자 이름식으로 '하나'로 한 것 같다. 숙고하여 지은 이름이 아니고 생각나는 대로 지은 이름이다. 개 이름만 들어 봐도 알 수 있듯이 이 개에 대하여 별로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 였보인다.
하나는 다로가 쓰던 개집을 그대로 사용하게 하고 집안으로는 마음 내킬 때만 불러들였기 때문에 그외 시간에는 늘 유리창문 밖에서 거실 속의 나를 보고 있었다. 하나는 내가 거실에 있을 때는 거실 유리창 밖에서 응접실에서 손님 접대 중일 때는 응접실 유리창 밖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다.
나는 하나를 별로 귀여워 해 주지도 않는데 "이 강아지는 늘 사토 씨를 바라보고 있군요. 아주 귀여워해 주시나 봐요" 라고 나를 방문했던 손님들이 말했다. 나는 바쁜 몸이라 시간적이 여유가 없어 어쩌다 한 번씩 돌봐 주고 있다. 하나에게 관심을 기울일 틈이 없다.
이따금 생각이 나면 "하나 잘 있니"하면서 머리를 쓰다듬어 줄 정도이다. 가끔은 솔로 털을 손질해 주기도 하지만 마당을 파헤친다고 혼내주고, 흙발로 방금 닦은 마루에 올라왔다고 매몰차게 쫓아낸다. 신경에 거슬리는 일이 생기면 울컥하는 성격이라 도중에 멈추지 못하고 화를 내는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는 손님들 중에는 "참으로 행복한 강아지네요. 개집이나 개목줄에 묶여 있지도 않고 넓은 뜰에 이렇게 마음대로 뛰어다닐 수 있는 개는 드물 겁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적지않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낯이 간지러워 "아니...무슨 그런 말씀을..."하고는 뒷말을 얼버무리곤 한다. 강아지가 알아 듣는다면 "행복하다니 무슨 당치도 않은 말씀을"이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던 어느 날 떠오른 것이 있었다. 홋카이도의 별장에서 강아지 하나를 키우기로 결정한 다음 날의 일이었다. 아침 5시 반 경 요란한 개짖는 소리에 창을 열어 보니 한 마리의 여우가 하나를 물고 있었다. 이 못된 여우놈아! 라고 소리치며 문을 박차고 나가니까 여우는 하나를 놓아 주고 줄행랑을 쳤다. 그러자 하나는 고무공이 튕기듯이 내게로 달려 와 내 품에 안겼다.
이마를 살펴 보니 여우에 물린 자리에 피가 배어 있었다. 그때의 일을 하나는 잊지않고 나를 '생명의 은인'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 같다. 그 은인이 도쿄의 집에서는 별로 신경도 써 주지도 않지만 하나는 섭섭해 하지도 않고 먼 발치에서 조용히 '은인'을 지켜보는 것같다.
지켜만 보는 것이 이제는 버릇이 되버린 것 같다.
하나는 자기의 집에서 자지 않고 나의 침실 밖의 테라스에서 매일 밤 보내고 있는 것을 어쩌다 알게 되었다. 봄이나 여름은 물론이고 날씨가 추워져도 변함이 없었다. 나를 지켜주기 위해서 그러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편으로는 새벽녘에 처음 버려졌던 때의 외롭고 쓸쓸했던 기억 때문에 조금이라도 사람과 가까운 곳에 있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하나의 심정을 알아주기는 커녕 항상 바빠해 하고 매몰차게 대했다. 일본에서는 옛부터 고양이 먹이는 먹다 남은 밥에 가다랑어포를 섞어 주고 개의 먹이는 생선뼈랑 먹다 남은 고기 그리고 먹다 남은 익힌 채소가 들어 있는 국물이나 된장국에 남은 밥을 넣은 '국물밥'을 주는 것이 일반적이다.
'고양이밥'에는 국물이 없기 때문에 고양이가 밥을 먹을 땐 조용하다. 개는 쩝쩍 소리를 내면서 먼저 국물을 다 먹고 난 후 천천히 남은 찌꺼기를 먹는다. 그 쩝쩍하는 소리에 개의 기분 좋아하는 분위기가 묻어나와 귀여웠다. 하지만 요즘은 코로코로(포동포동)라는 이름의 개사료가 일반화 되었다. 매일 아니 몇 년동안이나 같은 사료를 먹는데도 질리지 않고 잘 먹는다고 생각하면서도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는 쩝쩝하면서 시작하는 식사가 아니고 처음부터 끝까지 아사아삭이다. "개사료는 영양도 충분할 뿐더러 무엇 보다도 변에서 냄새가 나지 않는다. 그런 점이 좋다"고 모두들 말하고 있다. 물론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꼭 그래야만 한다는 법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하나의 밥을 옛 방식대로 먹다 남은 것들을 위주로한 국물밥을 계속하여 주었다. 국물을 우리고 남은 다시마를 잘게 썬 것을 꼭 섞어서 주었다.
이 다시마밥으로 다로는 20년을 살았고 다로 앞의 치비는 19년을 살았다. 하나도 그 정도는 살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다시마 넣은 밥이었기 때문에 우리집 개들이 장수한 것이라고 자랑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15년 째 되던 해의 봄이 지날 무렵부터 하나는 다시마밥 뿐만 아니라 무엇을 주어도 먹지 않게 되었다. 의사 말로는 신부전이라 하였다.
의사의 권유대로 신부전용의 개사료를 먹이려고 했으나 아무 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낮에는 거실에 밤에는 내 침대 아래에서 2개월 간 버티더니 어느 날 밤에 죽고 말었다. 그 다시마 넣은 국물밥 때문에 죽지나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나의 가슴 속에는 가책과 후회로 새카만 구멍이 뚤린 듯하다. 자신의 독단과 무관심에의 가책이다. 인정 없는 주인이었지만 하나는 실망하지 않고 나를 그리워하였다. 그에 대한 자책이다. "하나는 사토 씨에 의해 목숨을 건졌다고 말하며 매우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답니다.
그래고 그 다시마 섞인 밥을 다시 한 번 먹고 싶다고 한답니다" 그 다시마밥이 그 무녀의 눈에 현몽이라도 했다는 듯이 "이게 뭐지요? 아무래도 질척한 밥이 맞지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신기하게도 그 무녀가 그렇게 말했단 말인가! 그 말을 듣자 내 눈에서는 주루룩 눈물이 흘러 내리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