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작가 한 승원씨가 쓴 글이다.
김영사에서 펴낸 " 시방 여그가 그 꽃자리여"에 실려 있는 글이다. 타자 연습 겸해서 타이핑을 하며 한 번씩 읽어볼 만한 글이라 생각하여 여기에 올린다.
목포는 항구다.
내 사전 속의 목포는 항구가 아니라 눈물이다. ‘목포의 눈물’과 ‘눈물의 목포’가 동의어이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 /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 부두의 새악시 아롱 젖은 옷자락 /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음 / 삼백 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 임 자취 완연하다 서글픈 정조 /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 임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사랑”
편하게 앉을 수 있는 자리를 찾지 못한 새처럼 서울의 이 거리 저 거리를 해맬 때, 술에 취하여 늘 이 노래를 부르면서 눈물 흘리곤 했다.이노래를 부르면서 눈물짓곤 한 것이 어찌 나만이었으랴.
그러나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만으로는 목포를 제대로 읽을 수 없다.
비 내리는 호남선의 완행열차가 철도를 달려가다가 멈추어 서지 않으면 안 되는 자리에 목포가 놓여 있는데. 이 철도는 일본 제국의 식민 통치의 주구이던 조선총독부가 전라도 사람들을 서울 쪽으로 전송하도록 도우려고 만든 것이 아니었다. 전라도 일대에서 생산되는 쌀과 콩과 목화와 황소를 목포로 실어낼 목적으로 만든 철도였다.
목포를 제대로 읽으려면 시인 김지하의 “황토”에서부터 읽어야 한다.
황토 길에 선연한
핏자욱 핏자욱 따라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었고
지금은 검고 해만 타는 곳
두 손엔 철삿줄
김지하의 뿌리를 캐면 목포가 보이기 시작한다. 김지하는 1920년대 목포를 거점으로 활동했던 한 연극단원의 아들이다. 당시의 연극은 민족계몽운동이기도 했다. 이 연극단원을 이끈 사람이 김우진이다. 가수 윤심덕과 부둥켜안은 채 일본과 대한민국 사이를 흐르는 검푸른 해류 현해탄 속에 몸을 던진 김우진. 연극 단장이자 희곡 작가이고 소설가이자 한 회사 사장이며 제1세대 일본 유학생이었던 김우진. 김우진이 가사를 짓고, 윤심덕이 노래를 부른 <사의 찬미>를 읽으면 목포가 제대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 너의 가는 곳 그 어데이냐 / 쓸쓸한 세상 적막한 고해에 / 너는 무엇을 찾으려 하느냐 /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고만일까 /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 웃는 저 꽃과 우는 저 새들이 / 그 운명이 모두 다 같구나 /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 너는 칼 위에 춤추는 자도다 / 눈물로 된 이 세상이 나 죽으면 고만일까 /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 허영에 빠져 날뛰는 인생아 / 너 속였음을 아느냐 / 세상에 것은 너에게 허무니 / 너 죽은 후는 모두 다 없도다 / 눈물로 된 이세상이 나 죽으면 고만일까 /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이 노래를 부른 윤심덕은 일본 도쿄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귀국했다. 윤심덕의 미모는 클레오파트라나 양귀비처럼 나라를 기울게 할 만했고, 그녀의 미모에 대한 소문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당시 조선총독부의 권세 시퍼런 고급 공무원이 요정에 앉아 윤심덕으로 하여금 자기들의 술자리에 와서 노래 부를 것을 청했는데, 윤심덕은 한마디로 그것을 거부했다. 이로 인하여 윤심덕은 성악가로서 설 자리를 잃었고. 어찌할 수 없이 대중가수로 전향하여 <사의 찬미>를 불렀다.
김우진의 집은 지금의 북교동 성당 자리에 있었다. 최하림 시인의 말에 의하면 그 집은 ‘김장생집’ 이라 불렸다고 한다. 당시 아이들은 성벽 같은 그 집의 담 위를 오르내리며 놀곤 했다. 김장생집이란 무엇인가. 김우진의 아버지는 장성군수를 지낸 김병익이었다. 김병익은 민족주의자였다. 삼성합명회사를 운영하여 많은 돈을 벌었고, 번 돈으로 아들 김우진을 유학시켰다. 김우진은 일본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연극단을 구성해 활동했다.
김우진을 좀더 깊이 캐들어가 보면 1894년(갑오년)의 동학군 이야기가 있다.
전라도 일대의 동학군들이 전주성에 들어가 감영을 장악했을 때 감사는 진즉에 도망쳐버렸다. 감영의 최고 실세인 심성규와 녹두장군 전봉준이 만났다. 김상규는 전봉준 등의 동학 지도부가 원하는 대로 군자금과 무기를 대주었다. 김성규가 바로 김우진의 할아버지이다.
김우진은 당시 식민지시대의 일제로부터 착취당하는 민족과 사회와 전통 윤리의식과 철저하게 갈등 대립하며 살았던 비운의 천재 지식인이었다. 아버지 김병익은 민족을 구하겠다는 생각으로 호남의숙을 설립했고, 김우진은 이 의숙을 수료했다. 김병익은 민족을 구하려면 조선의 농업을 일으켜야 한다면서 김우진을 일본의 고마모도 현립 농업학교에 유학시켰다.
1921년 여름에 귀국한 김우진은 일본 유학생들과 노동자들의 모임인 동우회로부터 회관 건립기금 모금을 위한 하기 순회공연 연극단을 조직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는 고학생을 구제하는 한편 자신들의 연극 이념을 실현하기위해 조영희가 집필한 <김영일의 죽음>과 윤심덕을 짝사랑한 홍난파의 소설을 각색한 <최후의 악수>를 레퍼토리로 마련했다. 극단은 부산을 시발로 해서 40일간 25개 도시를 돌며 근대적인 연극을 선보였는데, 가는 곳마다 관중과 언론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1924년 학업을 마치고 귀국한 김우진은 아버지에게서 삼성합명회사 사장직을 억지로 떠맡았다. 예술적인 열정을 어찌하지 못한 그는 낮에 회사 일을 하고 밤에 독서와 집필을 했다. 그리고 목포 부두 노동자들이 일제의 노동력 착취에 항의하여 동맹파업을 일으켰을 때, 그는 회사 사장답지 않게 7개월간이나 부두 노동자 가족의 생계를 도왔으며 여러 고학 동지들의 학비를 대주었다.
목포에서 ‘5월회’라는 문학 서클을 조직하고 “5월”이라는 잡지를 창간했는데. 거기에 “창작을 권한다”라는 글을 실었다. 그가 남긴 작품은 소설 3편, 시 48편, 문예비평 10편, 희곡 5편, 기타 일기와 산문 등이다. 대표적인 작품은 “정오”, “두더게 시인의 환멸”, “난파”, “산돼지”이다.
김우진은 목포를 예술의 도시로 자라도록 씨를 뿌리고 한국 연극을 앞에서 이끌어간 선구자이다.
목포에 노래가 성한 것은 1920년대부터 성업을 한 창고업 때문이다. 창고로 몰려드는 신안. 무안, 해남, 강진, 장흥, 영암의 목화와 쌀, 콩과 소금을 손질하는 노동자들이 구름 같았다. 이때 많은 노래가 불려졌는데, 이난영도 이러한 분위기에서 나온 것이다. 김환기의 그림, 차범석의 연극, 박화성의 소설, 남농의 그림도 이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목포에 가면 가슴이 우둔거린다. 목포는 신화로서 다가온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한 중년 가수가 노래했듯, 바야흐로 도착한 카페리호에서 내릴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출구를 빠져나오는 사람들을 하나씩 살피며 부두에 서 있고 싶어진다.
해안통의 길바닥, 비린내 나는 짙푸른 바다. 알토란 같은 유달산, 삼학도, 세발낙지와 소주, 우이도로 흑산도로 홍도로 가거도로 떠나는 카페리호, 이 모든 것은 신화에 뿌리를 대고 있다. 호남선의 시발점이자 종착점인 목포역, “잘 있거라 나는 간다 / 이별의 말도 없이 / 떠나가는 새벽열차 / 대전발 영사 오십 분”은 나를 목메게 한다.
파란만장의 삶의 역정을 걸어온 한 정치가 때문이었을까. 목포는 전라도 사람들의 서글픈 희망이었다. 군사독재가 사퍼랬을 때 전라도 사람들은 해태를 응원하기 위해 야구장애 갔고. 가서는 <목포의 눈물>을 부르고 또 불렀다.
그러나 목포는 이제 눈물이 아니다. 바야흐로 서해안시대로 웅비하는 목포는 짠물 출렁거리는 항구다. 영산강 안개 속에 기적이 울고, 삼학도 등대 아래 갈매기 우는 그리운 내 고향 목포는 항구다.
첫댓글 고향을 그리워하는걸 보면 연세가 좀 되는모양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