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인수 / 애수의 소야곡
이부풍 작사 / 박시춘 작곡
1.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오마는
눈물로 달래보는 구슬픈 이 밤
고요히 창을 열고 별빛을 보면
그 누가 불어주나 휘파람소리.
2. 차라리 잊으리라 맹세하건만
못생긴 미련인가 생각하는 밤
가슴에 손을 얹고 눈을 감으면
애타는 숨결마저 싸늘하구나.
3. 무엇이 사랑이고 청춘이던고
모두 다 흘러가면 뜻없건마는
외로히 느끼면서 우는 이 밤을
바람도 문풍지에 애달프구나.
1935 년, 우리 가요 사상 불멸의 기린아(麒麟兒)가 등장했으니, 이가 곧 가수 '남인수(南仁樹)'였다.
본명이 강문수(姜文洙)인 남인수는 경남 진주 태생으로 그 무렵 흔히 가수 지망생들이 그랬듯이
무작정 상경하여 문을 두드린 곳이 바로 작곡가 박시춘이 있던 시에론레코드였다.
1936 년 말, 강사랑의 후원으로 OK 레코드에 입사하여 예명을 남인수(南仁樹)로 하여
OK 레코드 전속 제 1 탄인 <범벅서울>, <돈도 싫소 사랑도 싫소>를 취입하여
본격적인 가수생활을 시작한다.
그리고 박시춘에게 목소리 테스트를 받고 소위 '쯔메에리(つめえり- 학생복으로
사용된 목을 두르는 옷깃이 있는 양복 상의)' 차림의 이 떠꺼머리 총각이 OK 레코드사로 옮기기전,
시에론레코드에서 처음으로 취입, 발표된 노래가 바로 '애수의 소야곡'의 원곡인 '눈물의 해협(海峽)'이었다.
1935 (당시 18세) 년의 일이었다.
"현해탄 푸른 물에 밤이 나리면
임 잃고 고향 잃고 우는 저 배야 ..."
그러나 기대와 달리 반응이 신통치 않아, 38 년 가사만 개작(改作 ; 李扶風 作詞)하여
OK 레코드에서 다시 취입한 것이 바로 남인수의 최초의 히트곡인 '애수의 소야곡'으로
달콤한 그의 목소리는 비로소 대중의 환호를 받았고 그는 일약 톱가수로 자리매김하였다.
베토벤이 '기타는 작은 오케스트라'라고도 했다지만 기타 반주 하나만으로도
전혀 부자연스럽지 않은데, 녹음 당시 기타 반주는 작곡가인 박시춘씨가
직접 했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들은 것도 같다.
이로부터 박시춘, 남인수는 명콤비가 되었고, OK레코드와 태평레코드가 쌍벽으로 각축전을 벌이던
당시 가요계의 황금시대 이래 근 30 년 동안 우리 가요계에 구비치는 커다란 산맥이었다.
해방 전에는 '꼬집한 풋사랑' '감격시대' '낙화유수' 등을 불렀고,
해방 후에 '가거라 삼팔선' '달도 하나 해도 하나' 등을 부른 남인수는
그 때 그 때 시대 감각에 맞는 노래를 불러 늘 가요계의 정상에 군림했다.
6.25 전쟁 직후에는 '이별의 부산정거장'을 불러 만년 가수로서의 성가(聲價)를 높혔고,
작고(作故) 석 달 전까도 병든 몸을 이끌고 무대에 섰다. 그는 순회공연 때
여관에서 머리카락이 흐트러질까 봐 목침을 베고 잘 만큼 깔끔한 성미에
야구, 배구 등 스포츠에도 능하고 당구도 500 을 치는 멋쟁이였다.
그런 남인수에게 스캔들이 없을 리 없었다.
화려한 스캔들의 파노라마 속에 노래하며 달려간 정열아(情熱兒)남인수는
1962 년 6 월 16 일, 45 세의 나이에 지병인 폐결핵으로 이 세상을 떠나
1962 년 6 월 30 일, 최초의 연예협회장이 엄수되었을 때,
악단은 장송곡 대신 그의 히트곡 '애수의 소야곡'을 연주했다.
상객들은 귓전에 흐르는 그 선율에 따라 울먹이며
고인의 간드러지도록 달콤한 목소리를 되살렸다.
가수로서 최고의 자리에 올라 한 시대를 풍미하다 미련도 후회도 아쉬움도 없는
그야말로 가수다운 생애를 살다 간 남인수. 남인수 추모 사업을 하고 있는
<예도회>에서 1987 년 4 월 6 일,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일명 밤나무골에 '애수의 소야곡' 노래비를 세웠다.
글 : 성음사 歌謠半世紀 / 웹사이트 참조 정리
첫댓글 참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