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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 소설에 투영된 작가의 전기적 영향 고 민 곤(우석대학교)
I.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에게는 그의 작품특성을 반영한 많은 수식어구들이 따라다닌다. 그중에서도 헤밍웨이의 삶이 곧 작품이고 작품이 곧 그의 삶이라는 말은 그의 작품이 헤밍웨이 자신의 삶의 여정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만큼 헤밍웨이 자신이 소설과 같은 역동적인 삶을 살았다는 반증일 것이다. 따라서 헤밍웨이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려면 그의 삶의 과정을 살펴보는 것이 올바른 방법일 것이다. 그 이유는 타 작가들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헤밍웨이의 경우 그의 인생여정이 작품과 소설기법에 미친 영향의 정도가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헤밍웨이의 인생여정을 연구하는 것이 작가 헤밍웨이를 연구하는 단초가 되어야 함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연유로 본고는 헤밍웨이의 세계여행의 여정, 신문과 잡지사의 기사 취재활동, 생생한 삶의 현장의 몰입의 문제 등이 작품에 어떠한 양상으로 투영되어 작가의 삶 자체가 한 편의 소설과 같은 작품으로 회자 되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II. 첫째로 살펴볼 헤밍웨이 작품의 배경은 그의 세계여행의 여정이다. 헤밍웨이는 글을 쓰기위해 세계의 여러 지역을 여행했다. 그리고 그 여행에서 작품을 쓰기위한 다양한 소재를 얻을 수 있었다. 헤밍웨이의 첫 번째 여행은 어린시절 가족소유의 미시간북부의 원디미어(Windmere) 별장에서 시작된다. 매년 여름 헤밍웨이 가족은 이곳을 찾곤 했다. 이 별장을 시작으로 헤밍웨이는 파리, 이탈리아, 스페인, 스위스, 남미, 터키, 독일, 중국, 아프리카 등 역동적인 삶이 펼쳐지는 현장을 방문하게 된다. 그리고 그가 찾아간 곳에서 전쟁, 폭력, 사랑, 삶과 죽음 등을 목격하면서 삶의 깊이를 넓히고 동시에 자연의 아름다움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그 여행지, 혹은 삶의 현장에서 20세기 전위예술을 인도하는 세계적인 소설가, 시인, 화가, 음악가 등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들과 문예의 주제에 대해서 담론하고 토론하면서 자기 나름의 소설 창작기법을 익히게 된다. 그에게 있어 인생은 곧 여행이다. 그러므로 여행이 바로 작품구상의 시발이었다. 여행에서 만난 문인들과 여행지, 그곳의 문화 등이 그의 작가로서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됨은 당연지사였다. 1918년 5월 23일, 그의 나이 19살 때 배편인 시카고(Chicago)호를 타고 프랑스로 여행을 기점으로 그는 1960년 10월 8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뉴욕으로 영구 귀국하기까지 총 43년 동안 44회를 여행했다. 미국에서는 뉴욕, 플로리다, 키웨스트(Key West), 아이다호주의 케첨(Ketchum), 선 벨리(Sun Valley) 등을 여행했다. 그리고 해외영행 및 외국체류기간은 총 14년 4개월이었다. 총 작가 생활이 43년이니까 3/1에 해당하는 긴 기간이다.
그의 세계여행의 일지는 다음과 같다. 그는 1917년에 입사했던 캔자스 시티 스타(The Kansas City Star)사를 1918년 19세가 되던 해에 퇴사하고 친구인 테드 브럼벡(Ted Brumback)과 함께 미군 적십자부대에 소속되어 이탈리아 여행을 한다. 그는 뉴욕에서 배를 타고 프랑스의 보르도(Bordeaux)를 거쳐 이탈리아에 도착한다. 그는 곧바로 1차 세계대전 유럽전선에 참여하기 위해 야전병원 4소대에 소속되어 이탈리아 북부지역 스키오(Schio)에 배속된다. 구급차 운전사로 활동하면서 최전선에서 전쟁실전 경험을 하게 된다. 최초의 전쟁경험이자 생사를 넘나드는 절박한 전투현장이었다.
전투지는 이탈리아 북부 피아브강(Piave River)이 흐르는 유역이었으며 예술과 낭만의 도시 베니스(Venice) 북쪽에 위치한 포살타(Fossalta) 전선이었다. 기관총 피습에 의해서 다리 부상을 입은 헤밍웨이는 동료군인 중상자 한 명을 업고 돌아오던 중 피습으로 온 몸에 227개의 파편이 박히는 중상을 입었다. 이로 인해 그는 1918년 7월 8일 밀라노(Milan)적십자 병원에 입원했다. 그리고 이때 만난 담당간호사 에그너스 크라우스키(Agnes Von Kurowsky)와 사랑에 빠져들었다. 그 후 에그너스는 밀라노에서 트레비소(Treviso)로 전출하였다. 그리고 그가 트레비소를 방문하여 그녀를 만난 것이 그녀와의 영원한 이별이었다. 포살타 전투에서 부상당한 헤밍웨이는 1919년 1월 4일 제대하고 줴세페 베르디(Giusepe Verdi)호를 타고 이탈리아 제노바(Genoa)를 출발하여 뉴욕에 도착했다. 유럽문화와 전쟁을 체험한 헤밍웨이는 오크파크(Oak Park)로 돌아와서 미시간북부 별장에서 휴식을 취했다.
1921년, 헤밍웨이는 22세가 되던 해에 8년의 연상인 엘리자베스 해들리 리처드슨(Elizathe Hadley Richardson)과 미시간북부 호튼베이(Horton Bay)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후 토론토 스타(The Toronto Daily Star)지에 입사하여 유럽특파원으로 아내와 함께 파리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헤밍웨이는 파리를 중심으로 스위스 그리고 유럽 각국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했다. 예를 들면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열리는 제노바 경제회의 및 스위스 로잔(Lausanne)에서 열리는 평화회의 등에 참석한다. 작품구상을 위해서 이탈리아 코르티나 당폐조(Cortina d’Ampezzo)를 비롯해서 전쟁기사취재를 위해 직접 전쟁터에 나가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작품출판을 위해 미국을 오가며 플로리다주 최남단 키웨스트에 거처를 마련했다. 그리고 또다시 키웨스트 생활을 청산하고 쿠바의 수도 아바나(Havana) 근처에 라 핑카 비히아(La Finca Vigia)를 장만하여 이사했다. 귀국 후에도 아프리카의 사파리여행과 수차례의 스페인여행을 했다.
60세가 되던 1959년 케첨에 주택을 구입해서 인생여정의 여장을 풀었다. 그 후에도 스페인의 투우순회축제를 구경하기도 했다. 1960년 10월 18일 귀국 후에는 더 이상 해외여행을 하지 못했다. 그의 독특한 세계여행은 그의 과감한 행동주의에서 시작되었다 볼 수 있다. 몸을 돌보지 않는 그의 활동성은 생생한 인생경험을 풍부하게 창조해냈고 그 경험은 작품으로 연결되었다. 그러나 헤밍웨이는 그의 역동적인 자취와 함께 많은 병에 시달린 적이 있었다. 하지만 병마에도 불구하고 창작활동을 접은 적은 없었다. 몸을 돌보지 않으면서 창작활동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집념의 창작정신이었다. 그 많은 병들은 작가인 헤밍웨이의 길을 막지 못했다. 1960년 그가 죽기 1년 전인 61세 때 병든 몸을 이끌고 라이프(Life)지에 위험한 여름(The Dangerous Summer)을 시리즈로 연재하는 의연한 모습을 통해서 그의 작가로서의 불굴의 정신력을 보여주었다. 헤밍웨이의 외유기간 14년 5개월은 그에게 중요한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즉 그는 여행의 경험을 작품의 배경으로 채택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그의 작품세계는 미국적인 상황에만 국한되지 않고 이탈리아, 스페인, 파리, 쿠바, 아프리카 등 세계적인 배경을 갖게 되었다. 헤밍웨이는 이와 같은 해외여행으로 인해서 그의 작품에서 많은 변화들을 볼 수 있다.
둘째, 헤밍웨이는 해외여행에 의해 미국시절에 가지고 있었던 극사실주의적 서술기법의 한계를 뛰어넘는 빙산이론 문체라는 독특한 문체와 기법을 만들어 낸다. 빙산이론의 문체는 20세기에도 독보적인 서술기법이지만 21세기에도 그 생명력이 지속되는 문체이고 기법이다. 노인과 바다(The Old Man And The Sea)에 사용된 문체도 빙산이론에 토대를 둔 기법이고 결국 그를 위대한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도 이 문체기법 때문이다. 빙산이론의 문체는 헤밍웨이가 파리에 체류하는 동안 문학 작가들 이외에 화가, 음악가 등 여러 장르의 거장들과 교류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그 중 가장 강한 영향은 세잔의 회화기법이었다. 그의 작품은 세잔의 영향을 받기전과 받은 후가 확연히 구분된다. 1923년작 「미시건 북부」(“Up in Michigan”)와 1924년작 「두 개의 심장을 가진 큰 강: 제1부」(“Big Two Hearted River: PartⅠ”)의 비교는 헤밍웨이 문체에 끼친 영향을 잘 보여준다. 짐은 키가 작고 살빛이 거무스름한데다 콧수염이 많고 손이 컸다. 기술이 좋은 제철 공으로 가죽 앞치마를 두르고 있을 때에도 별로 대장장이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는 대장간 2층에서 잠을 자고 D. J. 스미스의 집에서 식사를 했다... 리즈는 짐을 무척 좋아 했다. 그가 대장간에서 걸어 나 올 때의 모습이 좋았다. 그래서 자주 부엌문께서 그가 이쪽으로 걸어오는 것을 바라보곤 했다. 또 그의 콧수염 언저리가 좋았다. 웃을 때의 그의 이가 하얗게 드러나는 것도 좋았다. 그가 대장장이처럼 보이지 않는 것이 특히 좋았다. 그가 스미스 부부의 마음에 들었다는 것이 좋았다. 어느 날 그가 집밖에 있는 세면대에 몸을 씻고 있을 때 보았던 두 팔에 돋은 시커먼 털과 더욱이 햇빛에 그들은 데서부터 위쪽이 아주 흰 것을 보고는 그것도 좋아져 버렸다... 호오튼 베이 마을은 보인시와 샤를르보아를 연결하는 간선 도로 옆에 있으며 집은 겨우 다섯째 밖에 없었다. 그 마을에는 정면만 그럴 듯하게 높이 꾸몄고, 대개 그 앞에 마차가 한 대 매여져 있는 우편국 겸 잡화점이 있고, 그 밖에 스미스의 집, 스트로우드의 집, 딜월스의 집, 그리고 반 후젠의 집이 있었다. 그 집들 은 커다란 느릅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길은 모래투성이였다. 길 위쪽의 양쪽에는 각각 전원과 숲이 있었다. 길을 따라 위로 죽 올라가면 감리교회가 있고 길 아래로 내려가면 반대쪽에 마을 학교가 있었다. 대장간은 빨간 페인트로 칠해져 있었으며 학교 바로 맞은편에 있었다.[「미시건의 북부」. 킬리만자로의 눈과 그 밖의 단편들(The Snows of Kilimanjaro and Other Stories) 72-3] 기차는 계속해서 선로를 달려 올라가더니 타다 남은 숲이 있는 산 하나를 돌아서 모습을 감추었다. 닉은 수하물계가 입구에서 내던진 텐트와 침구를 꾸린 보퉁이 위에 앉자 있었다. 마을도 아무 것도 없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선로와 불에 탄 드넓은 들판뿐이었다. 시니 마을의 하나밖에 없는 거리에 쭉 늘어서 있던 열 세 채의 술집들은 흔적도 없었다. 맨션 하우스 호텔의 주축돌만 땅 위로 불쑥 튀어나와 있었다. 주축 돌은 화재 때문에 금이가 부서져 있었다. 시니 거리에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그것뿐이었다. 마을 지표가지 깨끗이 불타서 지면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닉은 마을 집들이 점점이 흩어져 있을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불탄 들판이 된 일대의 언덕 비탈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선로에서 내려가 강에 걸려 있는 다리 족으로 갔다. 거기에는 강이 흐르고 있었다. 강물은 통나무다리기둥에 부딪쳐서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잔돌들이 많아서 강바닥이 다갈색으로 보였지만 닉은 맑은 강물을 들여다보며 송어 몇 마리가 지느러미를 저으면서 물 속에서 가만히 있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러자니까 소어는 갑자기 몸을 움츠리면서 방향을 바꾸었지만 급류 속에서 또 움직이지 않은 채 같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었다. 닉은 오랜 동안 송어를 지켜보고 있었다.(「두 개의 심장을 가진 큰 강: 제 1부」. 우리들의 시대에 177) 위의 예문에 사진주의적 사실주의(photographic realism)가 잘 드러난다. 이 풍경에 대한 정확성은 몽고메리(Constance C Montgomery)에 의해서 확인되었고, 몽고메리는 3개월 동안 북부 미시간(North Michigan)에 가서 실제 장소를 확인한 결과 세월의 흐름에 따른 유실을 제외하고는 묘사된 대로라고 지적 한다(Nelson 8). 이에 반에 「두 개의 심장을 가진 큰 강」에 나타난 시니(Seney)의 묘사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즉 「미시건 북부」에 나타난 묘사가 자세하고 섬세하고 사실적인데 반해 「두 개의 심장을 가진 큰 강」은 단순함을 가져다준다. 즉 보이는 것은 철도와 사방의 풍경뿐이다. 주인공 닉에 비친 모든 것은 <생략>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세잔의 생략기법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셋째, 헤밍웨이의 해외여행은 그의 문학세계 및 작품생산에 있어 외연과 깊이를 넓혀 가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헤밍웨이는 20대 초반 꿈을 안고 파리생활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파리를 중심으로 유럽무대에서 여러 사람들과 접촉하고 다양한 체험을 하게 된다. 이렇게 넓힌 유럽무대를 배경으로 작품을 썼다. 그 첫 번째 작품이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The Sun Also Rises)이다. 그는 이 작품으로 인해 세계적인 작가가 된다. 그리고 이 작품은 영미문학사에서 1920년대 ‘길을 잃은 세대’, 즉 ‘로스트 제너레이션’(Lost generation)의 대표작이 되었다.
넷째, 신문, 잡지사의 만남과 기사취재활동이 작품에 영향을 주었다. 그는 신문사에 직업을 얻고 기사취재와 보도를 위해 뉴스현장을 늘 긴장, 흥분 그리고 자극적인 심리상태로 찾아 나섰다. 그리고 이 직업을 자신의 첫 번째 목표인 창작활동에 활용했다. 캔자스 시티 스타, 토론토 데일리 스타(The Toronto Daily Star), 북아메리카 신문연합(North American Newspaper Alliances) 등의 신문과 협동나라(Cooperative Commonwealth), 콜리어스(Collier’s), 에스콰이어(Esquire), 라이프 등의 잡지사와 관계를 맺어서 활동했다. 헤밍웨이 글쓰기 훈련과 관련된 중요한 신문사는 캔자스 시티 스타와 토론토 데일리 스타였다. 두 신문사는 헤밍웨이 초기 문체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협동나라지는 미국중서부 농민들을 위한 기관지 잡지였다. 이 잡지사의 설립자가 농민 사기사건으로 고소되어 이 잡지가 폐간 될 때까지인, 1921년 10월 까지 기고와 편집 일을 계속했다. 콜리어스지는 1차 세계대전 이전 10년 동안 사회문제에 있어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헤밍웨이는 이 잡지에 1944년에 6편의 기사를 기고했다. 6편 모두가 2차 세계대전동안 연합군이 프랑스를 거쳐 독일로 진군한 것이다. 에스콰이어지는 1933년 아놀드 깅리치(Arnold Gingrich)가 초대 편집장인 잡지이다. 헤밍웨이는 이 잡지에 「킬리만자로의 눈」(“The Snows of Killimanjaro”)을 비롯하여 6개의 단편과 1930년대에 26편의 기사를 실었다.
창간호는 1933년 8월에 나왔다. 그는 이 창간호에 “Marlin off the Morro: A Cuban Letter”를 게재했다. 또 이 잡지에 1954년 노인과 바다, 1960년 위험한 여름을 시리즈로 게재했다. 북아메리카 신문연합은 60개 넘는 신문 및 통신사의 회원을 가진 연합체다. 헤밍웨이는 이 연합신문에 스페인 전쟁의 상황을 전하는 전황급보기사 30편을 1937년~1938년 동안 전송했다. 헤밍웨이는 신문, 잡지의 기사 취재활동으로 기사 365편을 남겼다. 모두 신문, 잡지의 기사 취재여행의 결과다.
다섯째, 그는 해외여행에서의 치열한 생사 현장 몰입의 문제를 작품생산에 삽입한다. 헤밍웨이는 용기와 진취적인 기상으로 삶을 이끌어왔다. 그리고 그와 같은 경험을 작품에 반영했다. 이 문제는 마초(macho)헤밍웨이라는 문제로 접근하면 설명이 가능하다. 남자다움이란 용기, 사나이다움, 그리고 모험심이 그 특징이다. 전쟁에 참여하고, 스페인에서 벌어지는 오전시간의 산 페르민 축제(Fiesta San Fermin)와 오후의 투우 현장을 찾고 전투를 즐기고 자신의 어선인 필라호를 개선하여 독일 함대에 대적한 활약이라든가 아프리카 세렌게티 평원에서 맹수사냥 등이 이 같은 특징에 속 한다. 먼저 헤밍웨이의 전쟁참여와 작품의 상관관계를 알아보자. 그는 다섯 번의 전쟁에 직접 참여하거나 종군기자로 참여했다.
그의 전쟁 참여 기록을 살펴보면, 1) 이탈리아 전투 → 1차 세계대전에서 이탈리아 전투(1918~1919) 2) 프랑스 전투 → 2차 세계대전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시 콜리어스지 기자 신분으로 노르망디(Normandy)해안상륙, D-day를 보기 위해 특파원 수송선 드로시아 L, 딕스(Dorthea L. Dix)에 승선 영군공군(RAF)본부방문, 영국공군폭격임무 비행기에 탑승하여 독일군 로켓을 요격하기 위해 2회에 걸쳐 출격, 조지 패튼장군(Gen, George Patton)사단에 배속, 제 4보병사단으로 전출, 찰스 벅 랜햄 대령(Charles Buck Lanham)이 지휘하는 22연대에 입대 뒤 1944년 나머지 기간동안 부대에 잔류, 램봘레(Rambouillet) 근처 사령부에서 포로 심문을 도우며 근무
3) 그리스-터키전쟁: 토론토 시티 스타지 특파원으로서 그리스군의 터키 콘스탄티노플 철수 취재 4) 스페인 전쟁: 북아메리카 신문 연합에 제공할 스페인 내전 취재(1937~1938) 5) 중일전쟁: 픽처지(Picture Magazine) 특파원으로서 중일전쟁 취재, 광둥(Canton) 전선, 장개석 군대, 기타 전선취재 등이다. 이상 다섯 군데의 전쟁터에서 그는 생생한 생사의 삶의 체험하고 목격했다. 전쟁참여는 그의 삶의 여정의 흥분과 자극이라는 삶의 형태에서 극한적인 형태가 된다. 전쟁체험과 목격한 실상들을 반듯이 작품에 반영하거나 기사화 한다. 작품과 관련하여 이 다섯 개의 전쟁 중에서 전쟁의 체험과 실상이 소설에 반영된 대표적인 경우는 1차 세계대전의 이탈리아 전투체험이 배경이 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For Whom The Bell Tolls)와 제 5열(The Fifth Column) 등이다.
다섯 번의 전쟁참여는 헤밍웨이의 인생과 단편생성에 영향을 주었다. 전쟁이 헤밍웨이 문학에 차지하는 의미는 전쟁과 인연을 맺고자 하는 그의 의지와 연관 있다. 다섯 번의 전투 현장 중에서 첫 번째와 두 번째 전투의 경우를 예를 들어 보자.
첫째, 1차 세계 대전 당시인 1918년, 헤밍웨이는 군대를 가기 위해 나이를 속였다. 그는 출생 년도가 1898년으로 기록된 것을 보면 군대에 입대 하겠다는 그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길이 막히자 미군 적십자부대에 지원한다. 그래서 세계대전이 전개되는 이탈리아 전선에서 구급차 운전병으로 참여하기 위해서다. 결국 나이 문제를 해결하고 군입대에 성공했다. 전쟁에 참여하겠다는 그의 의지를 불 수 있다. 그리고 전쟁 체험은 그의 삶뿐만 아니라 작품 세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1차 세계대전 체험의 산물이 무기여 잘 있거라(A Farewell to Arms)이다. 그리고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의 제이크 반즈(Jake Barnes)의 경우도 1차 세계 대전 중에 부상당했다. 그리고 작품 배경도 1차 세계 대전이다. 여러 가지 단편들도 전쟁 체험을 기반으로 작품을 썼다. 헤밍웨이가 참여한 두 번째 전쟁도 그리스-터키전쟁(Greece-Turkish War, 1919-1922)이다. 헤밍웨이는 그리스-터키 전쟁 종군 기자로 콘스탄티노플에 체류하면서 취재했고 그리스-터키 전쟁 후 토론토 스타지에 14편의기사를 기고했다. 헤밍웨이는 그리스-터키전쟁과 관련한 로잔회의에 대해 토론토 스타지에 기사를 썼다. 토론토 스타를 비롯한 여러 통신사에 많은 기사를 제공한 그의 활동을 보면 그가 전쟁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기사화 할 것이 많다는 것을 뜻한다. 이때의 체험이 단편 「스머너의 부두에서」(“On the Quai at Smyma”)로 나타났다. 그러나 헤밍웨이는 이 체험을 장편으로 써보고 싶었던 듯 하다.
그는 「킬리만자로의 눈」의 제 1플래시백에서 이 체험을 토대로 한 작품을 쓰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다. 이 전쟁에 대한 헤밍웨이의 깊은 시각이 있었고 이는 장편감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소수만 33). 그런데도 의지를 갖고 참여해서 전쟁 체험을 장편화하지 못한 아쉬움을 나타낸 것으로 사료된다. 1차 세계대전에 참여하기 위한 그의 의지와 장편 발견, 그리스-터키 전쟁에서 그의 취재 활동, 그리고 그리스-터키 전쟁체험을 장편화 하지 못한 아쉬움 등을 보면 전쟁 참여 의사가 얼마나 강한가와 이런 전쟁체험을 통해 창작 활동에 적극 활용하려는 그의 의지를 짐작할 수 있다.
여섯째, 권투와 헤밍웨이와의 관계이다. 어린시절부터 아버지로부터 권투기술향상에 대한 압박을 받을 정도로 권투와 관계가 깊다. 1913년 14세 때 권투연습장에서 연습을 하고 1926년 상금이 걸린 권투경기 시험에 참가할 정도로 수준급의 선수였다. 1935년 에스콰이어지에 기고하기 위해 뉴욕에서 벌어지는 조 루이스(Joe Louis)대 막스 베어(Max Bear)의 헤비급 권투경기를 취재하기로 했다. 권투와 관련된 그의 활동과 애정이 그의 작품세계에 반영되었다.
헤밍웨이는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에서 복싱 챔피언으로 로버트 콘(Robert Cohn)을 등장시켰다. 단편 권투 선수」(“The Battler”)에서 귀가 하나 밖에 없고 얼굴이 망가진 혈상 권투선수 애드 프랜시스(Ad Francis), 「살인자」(“The Killers”)에서 조직 권투선수인 오올 앤드레슨(Ole Andreson) 등이 등장하는 것은 권투에 대한 헤밍웨이의 지식에서 기인되었다.
일곱 번째, 독일 잠수함을 대적하기 위해 자신의 어선 필라(The Pilar)호의 개조 문제이다. 필라호는 헤밍웨이의 개인 선박이었다. 헤밍웨이는 1934년 4월 4일 브루클린(Brooklyn)에 있는 휠라 조선소(Wheeler Shipyard)에 선박을 주문했다. 7,500달러를 지불하고 마이애미(Miami)에서 선박을 인수했다. 그 이름은 필라라고 지었다. 이 배를 타고 처음으로 키웨스트로 항해했다. 헤밍웨이도 필라호를 타고 여러 활동을 했다. 처음에는 관광과 고기잡이로 이용했다. 1934년 7월, 8월에는 쿠바의 수도 아바나로 항해했다. 그리고 1936년 4월 24일 아바나를 중심으로 한 달 동안 낚시 여행을 한다. 그는 필라호를 타고 키웨스트와 아바나 그리고 멕시코만류 일대를 종횡무진한다. 2차 세계대전 기간인 1942년 5월 헤밍웨이는 미국 대사와 쿠바수상에게 대적첩보활동을 제안했고 동의를 얻어낸다. 헤밍웨이는 필라호를 큐-보트(Q-boat)로 개조하여 독일 잠수함을 격침시키자는 것이다. 동의를 얻어낸 헤밍웨이는 필라호에 전동장치를 부착해서 큐-보트로 개조했다. 그 후 필라호를 타고 독일 잠수함에 대한 순찰을 시작했다. 1943년 헤밍웨이는 여름을 보내기 위해 아바나에 도착한 후 두 아들, 패트릭(Patrick)과 그레고리(Gregory)와 함께 독일 잠수함을 순찰하기도 했다. 멕시코 만에서의 필라호의 활동은 노인과 바다 등의 작품탄생으로 이어진다. 필라호와 멕시코만은 헤밍웨이 인생과 작품에 큰 영향을 주었다.
마지막으로 아프리카 사파리 여행과 스페인의 산 페르민 축제의 투우(bullfight)를 들 수 있다. 헤밍웨이는 두 번의 아프리카사파리여행을 했다. 이 또한 작품으로 연결 시켰다. 또 헤밍웨이는 스페인에서 열리는 산 페르민 투우축제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헤밍웨이를 이해하는데 이 두 경우는 핵심 사항이다. 특히 투우와 산 페르민 축제는 헤밍웨이가 젊은 시절부터 관심을 가졌던 사항이고 그의 작품세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 문제들은 별도의 장에서 설명하기로 한다.
헤밍웨이는 여행을 통해 새로운 것을 추구했다. 그러나 그 여행에서 반드시 글을 쓰기 위한 자료수집도 이루어진다. 서론에서 언급했듯이 그의 삶이 곧 작품이라고 했듯이 그가 살았던 삶은 예술적으로 잘 승화시켜서 작품으로 내놓는다. 그래서 헤밍웨이의 작품이해는 그의 삶의 이해를 전재로 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조셉 드팔코(Joseph Defalco)가 헤밍웨이 작품분석을 여행기법(Journey Artifice)이라는 측면으로 접근한 것은 타당한 접근법이라 할 수 있다(소수만 36).
헤밍웨이는 자신이 머문 장소, 지역의 풍경, 만난 사람들, 사건, 생각 등을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즉 인생에서 직접 경함한 것들이 작품으로 귀결되었다. 그의 인생이 곧 작품인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그의 문학은 강한 리얼리즘의 문학이다. 그리고 추상적은 내용들 보다 실제생활과 보통 사람들의 삶에 집착하다 보니 사회참여의 문학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예를 들면 가진 자와 못가진 자(To Have and Have Not),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그리고 강 건너 숲속으로(Across The River And Into The Trees)와 같은 작품들이 사회참여문학의 대담적인 경우이다. 그는 용기와 강렬한 활동이 필요한 대상을 찾아 성취하고 즐기는 인생을 살았다. 투우, 전투, 아프리카 사파리 여행, 스키, 전쟁참여, 바다에 도전 등등이다.
이 같은 것들은 흥분과 자극의 인생방식과 도전적인 인생철학에서 시작된다. 결국 여행이 인생의 주요한 테마가 되고 이것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구조이다. 여행을 통한 삶의 경험 그 경험을 토대로 작품을 구성한다. 체험의 영역도 인간으로서의 극기가 가능한 최후의 지점까지 확장시켰다. 그래서 삶과 생의 절박한 순간과 생존에 있어서 진실의 순간을 생생하게 창출해낸다. 미시간 북부 지역, 호튼 베이(Horton Bay), 「두 개의 심장을 가진 강」, 세니마을, 그리고 별장에 있었던 월룬호 등의 지역은 단편 「미시간의 북쪽에서」와 「두개의 심장을 가진 큰 강」 등 초기작품의 배경이 되었다. 1921 토론토 스타지의 유렵 특파원으로서 파리에서 생활했던 경험은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의 배경이 되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 전선에 참여했던 경험은 무기여 잘 있거라의 배경이 되었다. 아프리카 사파리여행은 아프리카의 푸른 언덕(Green Hills of Africa), 「킬리만자로의 눈」, 그리고 「프랜시스 마카머의 짧고 행복한 생애」(“The Short Happy Life of Francis Macomber”), 여명의 진실(True at First Light)로 나타났다. 1938년 스페인 내전을 취재했던 경험은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로 나타났다. 노인과 바다는 그가 싫어했던 쿠바 생활과 키웨스트의 멕시코 만류가 무대 및 배경이다. 1944년 콜리어스지의 특파원으로 2차 세계대전을 취재했던 경험, 1차 세계대전의 이탈리아 참전 경험, 그리고 1948년 북이탈리아 사냥 여행과 그 당시 만난 아드리아나 이반이츠(Adriana Ivancich)와의 추억은 강 건너 숲속으로로 소설화 되었다.
멕시코만의 생활을 기반이 된 멕시코만류의 섬을(Islands In The Stream), 파리 지중해연안, 그리고 스페인이 무대로 등장하는 에덴동산(The Garden Of Eden), 파리생활의 기록인 움직이는 축제(A Moveable Feast), 그리고 1959년 여름 스페인의 투우시즌 여행과 그 기록이 위험한 여름이다. 헤밍웨이가 만난 실제인물이 작중 인물로 나타난 경우를 보면 그의 인생이 곧 작품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1차 세계대전의 이탈리아 전선에서 부상 입고 밀라노 병원에 입원 했을 때 만난 간호사 에그너스 크라우스키는 무기여 잘있거라에서 캐서린 버클리로 등장한다. 헤밍웨이는 무기여 잘있거라에서 캐서린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그녀는 키가 꽤 컸다. 그녀는 내가 보기에는 간호원 유니폼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머리는 금발이고 황갈색의 피부에 회색빛 눈을 가지고 있었다. 생각하건데 그녀는 매우 아름다웠다.”(무기여 잘있거라 18) 이 모습은 에그너스 실제 모습이다. 1925년 봄과 여름에 만난 그녀에게 매혹되었던 더프 튜이즌(Duff Twysden)은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의 탄생에 영향을 미쳤고 이 작품에서 브렛 애쉴리(Bret Ashley)로 여주인공이 되었다. 제인 메이슨(Jane Mason)은 「프랜시스 마카머의 짧고 행복한 생에」에서 여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첫 번째 아내 해들리 리처드슨은 움직이는 축제일에 그려져 있다. 단편 「아버지와 아들」(“Fathers and Sons”)에서 헤밍웨이는 자신의 아버지를 등장시킨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 니콜라스 애덤스(Nicolas Adams)는 메추라기 사냥을 하면서 사냥기법과 관련하여 자신의 아버지 생각을 한다. 작품에서 닉이 생각한 그의 아버지 부분을 보면 이렇다. 그가 그의 아버지를 생각할 때는 언제나 맨 먼저 생각나는 것은 아버지의 눈이었다. 커다란 체격, 빠른 동작들, 넓은 어깨, 굽은 매부리코, 약한 턱을 덮은 수엽, 이러한 것들은 생각나지 않고 생각나는 것은 언제나 그의 눈이었다. 아버지의 두 눈은 이마 속에서 눈썹의 편대에 의해 보호되고 있었다. 무슨 꽤 값진 기구를 보호하기 위하여 고안된 특별한 보호 장치처럼 눈은 깊숙이 박혀 보호되어 있었다. 그의 두 눈은 보통 사람들보다 더 머리 그리고 더 빨리 보았는데 그런 눈은 그의 아버지가 받은 타고난 위대한 선물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문자 그대로 큰 뿔이 있는 숫양이나 혹은 독수리처럼 시력이 좋았다.(「아버지와 아들」 405-6) 명백한 헤밍웨이의 아버지, 클레어런스 에드먼즈 헤밍웨이(Clarenve Edmonds Hemingway)에 대한 묘사다. 또 자신의 절친한 군인친구, 칭크 도어먼-스미스 소장(Major Heneral Chick Dorman-Smith)을 「스페인전쟁」(“The Spanish War”)에서 영국의 직업군인으로 등장시킨다. 그리고 파리생활에서 만나 자신의 문체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던 거트루드 스타인(Gertude Stein)을 헤밍웨이는 움직이는 축제일 2장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미스 스타인은 몸을 매우 뚱뚱한 편이나 키는 크지 않았고 농촌 여자처럼 몸집이 건장했다. 그녀는 아름다운 눈을 가졌고 프리우라노(Friulano)처럼 보이기도 하는 강한 독일-유태계의 얼굴을 가졌다. 또한 그녀는 그녀의 옷맵시, 표정을 잘 나타내는 얼굴모습, 그리고 아마도 대학시절에 깎았을 법한,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사랑스럽고 숱이 많고 생기가 나는 이주자 같은 머릿결을 모습으로 내게 북부 아틸라이의 농촌여자를 생각나게 했다.(움직이는 축제일 14) 헤밍웨이는 1948년 2월 초 북이탈리아 방문 당시 만났던 이탈리아의 미모의 여성 아드리아나 이반이츠를 강 건너 숲속으로의 여주인공 레나타(Renata)로 등장시켰다. 그리고 레나타를 다음처럼 묘사하고 있다. 그녀는 창백하다 못해 거의 올리브색의 아름다운 피부를 지녔으며 그녀의 옆면 얼굴윤곽은 당신의, 혹은 그 어느 누구라도 보는 이의 심장이 멎어 버릴 것 같은 아름다운 모습이었으며 생동감 넘치는 검은 머리채는 그녀의 어깨위로 치렁치렁 늘어뜨려져 있었다.(강 건너 숲속으로 64) 레나타의 실제의 모습 그대로이다. 이 외에도 왈가닥 운동선수인 그의 둘째 여동생 서니(Sunny)는 세편의 단편에 등장한다. 「사병의 고향」에서 스프트볼 선수인 헬렌(Helen)으로, 「아버지와 아들」에서 도로시(Dorothy)로, 「마지막 좋은 고장」(“The Last Good Country”)에서 수렵 관리인으로부터 닉이 달아나도록 돕는 리들 리스트(Littlest)로 등장한다. 또 스페인의 작곡가이며 피아니스트인 듀란(Gustavo Duran)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 “여단을 지휘하는 아주 훌륭한 장군”으로 등장하고 세 번째 아내 마사 결혼은 제 5열에 등장하는데, 마사는 “그녀는 매우 아름답고 매우 친절했으며, 매우 매력적이며 다소 순진하기도 했다. 그리고 꽤 용감했다(44)”라고 그려져 있다. 모두 실제인물이 작품으로 등장하는 경우이다. 그의 삶이 곧 작품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젊었을 때 헤밍웨이가 즐겼던 여행을 분석해보면 소위 주제여행의 모습이 보인다. 전쟁참여, 산 페르민 축제 관광여행, 아프리카 사파리여행, 신문 및 잡지의 기자 취재여행, 스키여행, 그리고 낚시여행 등이다. 그런데 이들 여행에서 두드러지게 부각되는 한 가지 공통점이 보인다. 그것은 주로 생과 죽음이 맞닿는 현장을 찾아가는 일이다. 그래서 흥분과 자극의 여행길이 된다. 그리고 이런 흥분된 경험과 체험은 다음 단계로 그의 작가의식과 철학세계의 정제과정을 거쳐 작품으로 나타난다.
전쟁소설 무기여 잘 있거라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가 대표적인 예다. 오후의 죽음(Death In The Afternoon)은 투우축제를 관광한 경험으로 쓰여 진 소설이다. 생사를 건 낚시가 주요사건인 노인과 바다는 낚시여행의 결정판이다. 그의 작품탄생을 보면 생과 사의 긴박한 체험이 이어야 한다. 스키여행이 작품의 보조배경으로만 쓰이고 본격적인 작품으로 연결되지 못한 것은 이런 점에서 이해가 된다. 말년에 스페인의 말라가와 이탈리아의 베니스의 관광여행 등은 젊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별도의 여행이다. 예를 들어 말년의 베니스 여행은 젊은 날을 회상하는 추억여행이라고 성격을 규정할 수 있다.
그래서 베니스여행을 배경으로 탄생된 강 건너 숲속으로는 그 실제의 여행답게 작품은 주인공의 회상이 골격을 이루고 있다. 인생의 뒤돌아보기와 사랑이 있을 뿐 긴박감이 넘치는 흥분이 없다. 전체적으로 그의 여행주제의 차원에서 조명하면 거의 모든 작품이 이해될 수 있다. 한 인간으로서 헤밍웨이의 도전과 모험 그리고 흥분과 자극의 인생태도는 치열한 삶과 작가정신으로 귀결되었다. 그는 어떤 일에 착수하면 몰두한다. 그의 인생이 집중적이 된 것도, 그의 작가정신이 치열한 것도 그의 인생 태도인 흥분과 자극의 인생철학 때문이었다. 그는 불가능할 것 같은 삶을 과감하게 살아나갔다. 헤밍웨이를 동시에 풀어내는 키워드(Key word)는 도전과 모험의 치열한 작가정신과 흥분과 자극의 여행인생 그리고 이런 그의 인생의 내용은 모두 작품이므로 예술화, 이 두 마디로 정리할 수 있다. III. 헤밍웨이는 단순한 여행을 위한 여행이 아니라 여행을 통해서 얻은 경험들을 창작의 재료와 활동으로 엮어 갔다. 여행을 통한 많은 경험들 중에서 눈여겨 볼 것들이 많다. 그중에서 신문사의 기자생활을 통해서 불필요한 글을 쓰지 않도록 훈련을 받았다. 여행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그중에서도 파리에서 세잔과의 만남을 통해서 헤밍웨이의 글에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세잔의 회화기법을 소설의 도입을 하게 된다. 그리고 헤밍웨이만의 독특한 문체를 만들어낸다. 그것이 빙산이론이다. 헤밍웨이에게 있어서 파리이전의 시기와 이후의 시기는 이와 같은 점에 있어서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치열한 삶의 현장인 전쟁 참여의 경험들이 작품에 반영된다. 다섯 차례에 걸친 전쟁체험들이 소설로 반영이 된 경우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무기여 잘 있거라,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등을 들 수 있다. 이렇듯 헤밍웨이는 그가 여행하는 곳 그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 그리고 전쟁터에서 경험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창작활동으로 승화시켰다. 그의 삶이 치열하면 할수록 그의 작품세계도 더욱 치열했다. 서론에서 언급했듯이 그의 삶이 작품이고 작품이 곧 그의 삶이라고 전제한 서론에서의 가정이 틀림없는 사실임을 확신하면서 논문을 마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