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죽을 때, “껄, 껄, 껄” 하며 죽는다고 한다. 호탕하게 웃으며 죽는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세 가지 아주 치명적인 실수를 후회하며 “~ 할걸” 하며 죽는다는 것이다. 우선, 첫째 ‘껄’은 “더 베풀고 살걸!”이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죽은 다음 재산을 정리해보면 돈 1000만원은 나온다. 그 돈을 두고 가는 것이 아까운 것이다. ‘이렇게 다 놓고 갈 걸, 왜 그토록 인색하게 살았던가’하는 것이다. 둘째 ‘껄’은 “더 용서하고 살걸!”이다. 죽을 때,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다. 사랑한 사람들의 얼굴도 떠오르지만, 미워하고 증오했던 이들의 얼굴도 떠오른다. “아, 이렇게 끝날 것을 왜 그토록 미워했던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화해할 시간도 이젠 없는 것이다.
마지막 ‘껄’은 “아, 더 재미있게 살걸!’이다. 이렇게 죽을 걸, 왜 그토록 재미없게 그저 먹고살기에 급급하며 살았던가, 하는 것이다. 죽을 때가 되니 내가 이미 가진 것들을 제대로 보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다. 왜 그토록 내가 이미 소유한 것에 감사할 생각도 없이, 그 행복을 느낄 여유도 갖지 못하고, 이토록 재미없이 살다가 가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중에 마지막 “껄”이 가장 중요하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삶이 재미있으면 저절로 베풀게 된다. 삶이 재미있으면 관대해진다. 더 중요한 것은 재미있으려고 노력하면 얼마든지 재미있게 살 수 있다는 사실이다. 재미는 유쾌한 느낌을 구체적으로 정의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내가 하얀 침대시트에서 찾아낸 유쾌한 느낌처럼.
회의는 즐겁게!
이 즐거운 느낌, 기분 좋은 시간을 보내려는 노력은 개인의 행복에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다. 기업의 생산성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펀 경영(fun manangement)이 중요한 것이다. 요즘 많은 기업에서 펀 경영이 화두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펀 경영을 한다며, 코미디언이나 개그맨, 혹은 말재간이 좋은 사람을 불러 강의 듣는 것이 마치 펀 경영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한다. 그게 아니다. 펀 경영의 본질은 정서경영이다.
지식기반사회, 정보화사회에서 지식경영은 아주 중요한 영역이다. 지식경영이란 지식을 공유하는 지속적인 시스템 구축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한자리에서 10년 동안 일한 사람이 그 자리를 떠나 다른 직장으로 옮겼을 때, 그 사람이 그동안 익힌 노하우를 어떻게 후임에게 전달할 수 있는지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지식경영이다. 후임으로 온 사람이 전임자가 처음부터 겪었던 과정을 맨땅에 헤딩하는 방식으로 반복한다면 그 기업은 망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지식경영은 기업에서 ‘직위나 직급에 따라 지식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전달하고 공유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도 관련돼 있다. 그래서 회의를 효율적으로 진행하고, 정보와 아이디어를 공유하는 지식관리시스템을 개발하는 등, 많은 시도가 있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결정적인 차원이 누락되곤 한다. 재미의 차원이다.
지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형식적 지식(explicit knowledge)’과 ‘암묵적 지식(tacit knowledge)’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회의나 지식관리시스템으로 전달하고 공유하려는 것은 ‘형식적 지식’이다. 즉 상징이나 문장과 같은 언어체계로 옮길 수 있는 것들이다. 회사의 주요한 경영상의 이슈들, 기술적 노하우 등이 형식적 지식에 해당한다. 경영자들은 매일, 매주, 매달 열리는 각종 회의를 통해 이 형식적 지식을 공유하려고 애쓴다. 물론 회의는 형식적 지식을 공유하는 매우 중요한 수단이다. 그러나 형식적 지식이 반드시 회의를 통해서만 공유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습관적으로 반복되는 회의가 형식적 지식의 공유를 방해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망해가는 기업일수록 회의시간이 길어진다’고 한다. 내 이야기가 아니다. 하버드대학 경영학 관련 보고서의 내용이다.
형식적 지식은 e-메일이나 기타 공식 서류를 통해 얼마든지 공유될 수 있다. 중요한 사실은 이 형식적 지식은 암묵적 지식의 기반 위에서만 공유된다는 사실이다. 일본의 경영학자인 노나카 교수가 ‘암묵지’와 ‘형식지’를 구분해 경영학계에서 한동안 화두가 되었지만, 사실 이 암묵지, 즉 암묵적 지식을 처음 강조한 이는 마이클 폴라니(Michael Polanyi)라는 과학철학자다. 객관적이고 명확한 지식처럼 보이는 자연과학적 지식에도 주체와 객체의 상호작용이 전제되어 있다는 그의 ‘인격적 지식론(personal knowledge)’의 핵심은 바로 이 암묵적 지식에 있다. 모든 지식의 공유과정에는 전하는 이와 전달하는 이 사이의 암묵적 추론이 전제돼 있다는 것이다. 암묵적 추론을 제하고 전달되는 지식은 공허한 문장에 불과하다고 한다. 도대체 폴라니가 강조하는 이 암묵적 지식의 실체는 무엇인가?
정서 공유 안 되면 월급은 주나마나
정서 공유다. 폴라니 교수나 노나카 교수가 구체적으로 예시하지 못하는 이 암묵적 지식의 실체는 정서 공유의 방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가 기업문화라고 이야기할 때, 그 기업문화란 바로 ‘정서 공유의 정형화된 과정’을 뜻한다. 현대 앞의 술집과 삼성 앞의 술집 분위기가 다르다고 한다. 실제로 현대에 다니는 동창들과 삼성에 다니는 동창들을 함께 만나면 그 차이가 피부로 느껴진다. 함께 대학을 다니며, 강의실보다는 막걸리 집에서 뒹굴던 동창들이다. 그러나 각기 다른 회사에 입사한 지 20여 년이 지나 만나니 전혀 다른 스타일로 변해 있었다. 도대체 무엇이 이토록 사람을 바꿔놓았을까? 정서 공유의 방식 때문이다.
정서란 기쁨, 슬픔과 같은 개념적으로 정의할 수 있는 ‘명사적 정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받는 듯한’‘가슴 설레는’ 것과 같은 ‘형용사적 정서’도 있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정서는 오감을 통해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부사적 정서’다. 같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그 말하는 속도, 음의 높낮이, 말하는 이의 표정을 통해 전달되는 느낌이 달라진다. 부사적 정서란 오감을 통해 전달되고 느끼는 정서적 신호를 뜻한다. 같은 말이라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이야기는 바로 이 정서 공유의 부사적 차원을 가리키는 것이다. 마치 ‘얼씨구’라는 단어가 탈춤에서는 감탄사가 되지만 일상에서는 비꼬는 단어로 느껴지는 것처럼.
정서 공유가 가능하려면 가장 먼저 이 부사적 정서부터 활성화돼야 한다. 기쁜 일이 있을 때 우리는 어떻게 기쁨을 공유하는가? 슬픔은 또 어떻게 공유하는가? “지금 이런 기쁜 일, 슬픈 일이 있으니, 하나, 둘, 셋을 세는 것과 동시에 우리의 기쁨, 슬픔을 공유하자”고 하는가? 아니면 논리적으로 우리가 기뻐해야 할 이유를 설명하고, 공유할 것을 설득하는가? 아니다. 그런 식으로 공유되는 정서는 없다. 기쁜 일이 있으면 하이파이브를 하며 소리를 지르며 어쩔 줄 모른다. 슬픈 일이 있으면 서로 껴안는다. 흥미로운 것은 이 과정에서 우리는 상대방의 표정, 몸짓, 목소리를 서로 흉내 낸다는 사실이다. 그래야 부사적 정서가 공유되기 때문이다. 이 정서 공유의 과정이 망가지면 재미가 없어진다. 재미란 바로 이 부사적 정서를 공유하는 과정, 그 자체를 의미한다. 재미있으면 서로의 정서를 자동적으로 공유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부사적 정서, 즉 감각적으로 경험되는 정서 공유는 수도관에 비유할 수 있다. 우리가 전달하려는 논리적인 형식적 지식은 물이다. 물은 수도관이 있어야 흘러갈 수 있다. 수도관의 한구석에 구멍이 나 있으면 물이 흘러가지 못하고 다 새나간다. 지식 공유가 가능하려면 바로 이 부사적 정서로부터 활성화되는 정서 공유의 과정이 있어야 한다. 부사적 정서가 가장 활성화되고 공유될 때는 재미있을 때다. 함께 축구 경기를 구경하며 응원할 때처럼 서로의 감각적 정서표현이 공유될 때만 논리적 지식이 공유된다. 정서 공유의 과정을 생략하고 월급만으로 사람을 움직이려는 것은 곳곳에 구멍 난 수도관에 물을 흘려 보내는 일과 비슷할 뿐이다.
CEO, 교수, 고위 공무원의 공통점
어떤 사람을 만나면 무척 불쾌한 느낌을 받는 경우가 가끔 있다. 하루 종일 기분이 이토록 나쁜 이유가 뭘까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아침에 바로 그 인간을 만난 까닭이다.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이다. 알고 보면 안 좋은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그래도 하루 종일 내 신경을 자극할 만큼 내게 중요한 사람도 아니다. 그럼 왜 그는 이토록 불필요하게 나의 하루를 망치는가? 부사적 정서를 통한 정서 공유의 과정이 방해받았기 때문이다. 누구나 남과 이야기할 때, 정서를 공유하자고 무의식적인 신호를 계속 보낸다. 얼굴표정, 손짓, 말투로 전달되는 이 정서 공유의 신호가 상대방에 의해 거부되면 불쾌해진다. 반대로 이 신호를 상대방이 받아들이면 즐거워진다.
요즘 내게 강연요청이 참 많이 들어온다. 창조경영, 휴(休)테크, 커뮤니케이션, 리더십 등에 관해 강연해달라는 요청이 하루에도 수십건씩 들어온다. 이 강연요청 전화만을 처리하는 비서를 따로 두어야 할 정도다. 대부분의 강연은 기꺼이 승낙한다. 그러나 내가 참 가기 부담스러운 강연 대상이 있다. 우선, CEO들만 모아놓은 각 대학의 최고위과정이나 호텔의 조찬강연이다. 웬만한 강연을 다 들어본 이들은 ‘어디 한번 해봐!’하는 표정으로 앉아 있다. 숨이 콱콱 막힌다. 둘째로 어려운 곳은 교수들 모임이다. 이들은 앉아서 내 강연을 평가하고 있다.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내 강의에 감동한 표정이나 즐거운 반응을 보이는 것을 무척 부끄러운 일로 여기는 듯하다. 교수들이나 CEO는 그래도 쉬운 편이다. 가장 강력한 상대는 고위 공무원들이다. 특히 공무원 생활 20년이 넘은 중앙부처의 국장급들이 교육받는 과천의 중앙공무원교육원은 정말 최악이다. 무슨 이야길 해도 반응이 없다. 그래서 중앙공무원교육원을 강사들의 무덤이라고 한다. 다 죽어 나오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를 이끌어나가는 CEO, 교수, 고위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연이 이토록 어려운 이유는 정서 공유가 안 되기 때문이다. 이들은 타인에게 자신의 정서를 보이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그러나 정서 공유가 망가지면 어떠한 의사소통도 이뤄지지 않는다. 수도관에 구멍이 나기 때문이다. 서로 이야기는 하지만 이해하지 못한다. TV토론을 보면 이 자폐적 의사소통 구조가 한눈에 드러난다. 우리나라를 이끌어나가는 재계, 관계, 학계의 리더들이 이토록 심각한 의사소통의 문제를 안고 있다는 이야기다. 우리의 뇌에는 남의 정서적 표현을 그대로 흉내 내는 ‘거울뉴런(mirror neuron)’이라는 신경세포가 존재한다. 생물학적으로 남의 정서표현을 흉내 내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건데,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어서다. 도대체 남의 마음을 이해하는 능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바로 남의 정서를 흉내 내는 것에서 우리는 이심전심의 능력이 생긴다. 서로의 정서를 흉내 내는 것으로부터 우리는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고, 추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밝은 표정의 의사를 보기 힘든 것이다. 아파서 찡그린 환자들을 매일같이 대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찡그린 표정을 짓게 된다. 아파서 죽겠다는데, 환하게 웃으면서 “하하하, 괜찮아요!” 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우리의 이마는 주로 부정적인 정서를 나타내는 근육이 분포해 있다. 상대방이 찡그린 얼굴을 지으면 우리 이마의 근육이 활성화되며, 상대방의 부정적 정서를 흉내 내게 된다. 반면 우리 볼의 근육은 긍정적인 정서를 나타내는 근육이다. 화면으로 계속 웃는 얼굴을 보여주면 자신도 모르게 볼의 근육이 움직인다. 이렇게 우리는 상대방의 긍정적, 부정적 정서를 거울처럼 반사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한국의 남자들은 이 생물학적 원리를 거역한다. 상대방의 부정적 정서를 반사하는 이마의 근육은 아주 섬세하게 발달해 있지만, 상대방의 긍정적 정서를 흉내 내는 볼의 근육은 퇴화돼 있다. 높은 지위에 올라가면 갈수록 이 볼 근육은 퇴화된다. 그래서 높은 사람일수록 입꽁지를 내리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입꽁지를 내려 볼의 근육이 움직이는 것을 막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을 독일의 심리학자 한스 요하힘 마쯔는‘감정정체(Gefuels-stau)’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감정정체란 감정이 자연스럽게 표현되고 물처럼 순환돼야 하는데, 러시아워의 꽉 막힌 도로처럼 감정이 표현되지 못하고 정체돼 있는 현상을 뜻한다.
‘법적으로’ 울 수 없는 한국 남자
독일이 통일된 지 거의 20년이 되어간다. 그러나 지금도 서독과 동독에는 무너지지 않는 심리적 장벽이 존재한다. 마쯔는 ‘감정정체’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동독의 사회화 과정은 권위적이고 억압적이었다. 이러한 사회에서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에게는 성공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순종적이며 획일적인 사고에 쉽게 적응하는 의존적인 사람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이 사회에서 자라난 어린이는 자신의 가능성이나 꿈을 구체화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할 수 없다. 어릴 때부터 자신에게 주어지는 타인의 눈길을 의식하며, 타인의 기대와 요구를 재빠르게 찾아내는 재주만 발달할 뿐이다.
타인의 요구에만 적응해가는 사회화를 거친 사람들은 여타의 심리적 기본 욕구들이 억압되게 마련이다. 이를 ‘결핍증후군(Mangelsyndrom)’이라 하는데, 예를 들어 어릴 때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은 이후 부족한 부분을 다른 방식으로 채운다. 다양한 형태의 중독현상으로 이어지는데, 단지 알코올이나 마약중독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일중독, 성공중독, 쇼핑중독, 권력욕, 자기과시욕으로 나타난다.
억압된 삶의 경험들은 ‘감정정체’라는 결정적인 장애로 이어진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감정표현을 통해 남과 의사소통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기본적인 욕구를 해소하기도 한다. 성공 뒤의 기쁨의 표현, 실패와 좌절 뒤에는 슬픔의 감정이 자연스럽게 표출돼야 한다. 이러한 정서표현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인 동시에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기제다. 그러나 “울지마, 남자는 울면 안 돼”와 같은 감정을 억누르는 교육으로 인해 남자들은 ‘감정정체’라고 하는 스트레스 상황에 빠지게 된다. 이는 호르몬상의 변화를 야기해 우울, 강박관념과 같은 정서적 장애는 물론 알레르기, 위장장애 등의 신체적 장애로 나타난다.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에 대한 적개심, 호전성과 같은 현상도 감정정체의 결과다.
마쯔에 따르면 통일은 서독인들과 동독인들 모두에게 감정정체를 제대로 극복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했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서독인들은 동독인들에 대해 우월감을 갖고 끊임없는 계몽적 태도를 취함으로써 감정정체에서 탈출하려고 하고, 동독인들은 서독인들에 대한 열등감을 갖고 더 약한 외국인들에 대한 폭력을 행사해 좌절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그러니 이런 방식으로 마음의 장벽은 결코 해결될 수 없다는 거다. 감정정체를 해결할 수 있는 바람직한 방식은 ‘내적 민주화’다. 내적 민주화란 자신의 정서적 장애와 결핍증후군을 인식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 많이 슬퍼하고, 타인에 의해 진심으로 수용되고, 인정받을 인내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 그렇지 못할 경우 편견과 적대감, 폭력의 위험이 생겨난다. 내적 민주화는 ‘치료적 문화’를 통해 가능하다. 치료적 문화란 함께 정서를 공유할 수 있는 문화를 뜻한다. 강요나 억압에 의해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 사소한 정서의 공유를 통한 의사소통 방식의 개발이 필요한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남자들이 겪는 감정정체는 독일의 상황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 이 땅의 남자들은 입꽁지를 내려 긍정적 정서표현을 억누를 뿐만 아니라, 아무리 슬퍼도 울지 못하게 되어 있다. 아니, 한국의 남자들은 법적으로도 울지 못하게 되어 있다. 고속도로 화장실에 가보라. 남자 소변기 앞에는 한결같이 다음과 같은 문구가 쓰여 있다.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만이 아니다! ’ 이 문구를 처음 봤을 때, 나는 숨이 콱 막혔다. 오줌도 막혔다. 감정정체에 걸려 콱 죽어버리란 이야기다. 한국 남자들이 그토록 분노와 적개심에 가득 차, 건들기만 해봐라 하며 사는 것은 아무리 슬퍼도 울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기쁘고 즐거워도 그 느낌을 드러내면 안 되기 때문이다. 아는가, 바로 그 때문에 이 땅의 사내들이 빨리 죽는 것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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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윤경재 원문보기 글쓴이: 화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