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날의 초상(肖像)
이문열(李文烈)
<전략>
꼬박 일주일을 병원에서 치료받고 고비를 넘긴 나는 형의 골방으로 병실을 옮겼다. 그리고 그 때부터 강진에서의 내 삶은 하나의 유적(流謫)이 되었다. 고비를 넘겼다고는 하지만, 그 뒤로도 상당 기간 치료받지 않으면 안 되었고 치료가 끝난 후에는 또 치료 기간의 몇 배가 되는 회복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참으로 음울한 나날이었다…. 조그만 음식물의 부주의에도, 몇 시간 정신 쏟아 책을 읽거나 연탄 몇 장 나르는 정도의 가벼운 노동으로도 그 날 밤은 신열에 들떠 지새워야 했다. 어느 정도 회복된 후에도 나는 하루의 대부분을 자리에 누워서 보내야 했고 기껏해야 마을을 한 바퀴 도는 정도의 가벼운 산보가 유일한 운동이었다.
형의 어두운 눈길을 대하는 것은 그대로 커다란 괴로움이었다. 치료비의 부담도 부담이지만, 혼잣몸으로 이리 뛰고 저리 뛰다 어두워서야 지쳐 돌아오는 형을 보면 견딜 수 없이 죄스러웠다. 그러나 그 사이 몇 번인가 그런 형을 도우러 모래장에 나갔다가 증세가 재발하여 혼이 난 형은 나를 모래장 근처에는 얼씬도 못 하게 했다.
시작부터 엉망이 되어 버린 나의 진학 계획도 자리에 누운 지 두 달로 접어들면서부터는 그야말로 번민과 고뇌가 되어 내 영혼을 짓씹었다. 대학이 인생의 전부이겠느냐는, 형의 상식적이건 하나 건강한 충고도 내게는 전혀 위로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억지로 휑한 머리를 가다듬어 몇 시간 책이라도 읽고 나면, 그 날 밤은 또 늦도록 두통, 신열에 시달려야 했다.
지금에 와서는 그리움으로 떠오를 때도 있지만 그 무렵의 내 하루는 거의 참담했다. 나는 토굴 같은 내 방에 홀로 누워 가벼운 읽을거리과 얕은 잠과 우울한 몽상으로 긴긴 해를 보냈다. 그러다가 해거름이 되면 골방을 나와 갯가의 갈대밭 사이에 난 둑길을 천천히 산보했다. 어느새 여름이 깊어져서 볕이 뜨거운 대낮에는 나돌아다닐 수 없기 때문이었다. 매우 느린 걸음이어서 그 산보가 끝날 때쯤은 완전히 해가 지고 나는 피어오르는 저녁 안개와 함께 돌아오곤 했다. 그 다음은 괴롭고 긴 밤이었다. 바다가 가까운 탓인지 강바람 탓인지 강진의 여름 밤은 그리 덥진 않았지만, 일단 밤의 요기(妖氣)에 휩싸이고 나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낮 동안 무슨 축복처럼 간간 찾아들던 잠도 밤이 마치 낮의 선심이 화가 난다는 듯 무정하게 나를 외면했고 유일한 위로였던 책도 어둠이 찾아들기 무섭게 깊은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다만 낮의 우울한 몽상만이 혹은 무성한 번민의 수풀로, 혹은 치열한 고뇌의 불길로 나의 밤을 지배할 뿐이었다.
<후략>
▶ 줄거리
고 1 때 학교에서 쫓겨난 이영훈은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형이 살고 있는 강진이라는 바닷가로 내려온다. 그 곳에서 대학에 가기 위해 형의 일을 도우며 공부를 하고, 서울에 있는 대학에 들어간다. 대학에서 영훈은 도서관 생활과 가정 교사 일을 하면서 많은 책을 보게 된다. 학교에서 그는 김 형과 하가와 친하게 지내게 되고, 김 형의 권유로 문학 동아리에 들어 활동을 한다. 이 시기에 그는 전공과는 상관없는 많은 개론 서적들에 빠져들고, 또 자기의 힘든 삶에 지쳐 김 형과 하가와 함께 술을 자주 마시게 된다. 그는 여자 친구를 사귀지만 경제적 차이로 인해 헤어지고, 궤변으로 사람들을 골탕 먹여 문학회에서도 쫓겨나게 된다. 그러던 중 친하게 지내던 김 형이 어이없이 죽게 되자 대학을 포기하고 바다를 향해 무작정 걸어 내려가기 시작한다. 그는 도중에 술집에서 일을 하기도 하지만 거기에서도 싫증을 느끼고 계속 걸어서 바다를 향한다. 가는 길에 그는 여러 사람을 만나고 그 때마다 궤변으로 사람들을 당혹케 하는데 결국 어떤 지식인을 만나 단편적인 그의 지식이 탄로난다. 그는 결국 바다에 이르게 되지만 그가 기대했던 바와는 달리 바다는 기러기 한 마리를 삼킨다. 그 순간 그는 깨달음을 얻어, 가지고 있던 유서와 약을 집어 던지고 다시 중앙선 상행 열차를 타고 서울로 오게 된다.
▶ 어휘 및 구절 이해
유적(流謫) : 죄인을 귀향 보냄
신열(身熱) : 병으로 인하여 오르는 몸의 열
번민(煩悶) : 마음이 번거롭고 담담하여 괴로워함
토굴(土窟) : 땅 속으로 뚫린 굴
몽상(夢想) : 실현성이 없는 헛된 생각을 함
해거름 : 해가 서쪽으로 넘어가는 일, 또는 그런 때
갯가 :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의 물가
요기(妖氣) : 요사스러운 기운
지금에 와서는 그리움으로 떠오를 때도 있지만 그 무렵의 내 하루는 거의 참담했다. : 이 부분은 이 작품이 과거에 대한 회상의 형식으로 서술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자전적 성장 소설임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여기서 서술자인 주인공의 현재는 젊은 날의 어렵고 힘든 시기이다. 당시의 참담한 상황을 하나의 추억으로 그리워하는 것으로 볼 때, 서술되는 고통의 시절은 성장기의 ‘통과 의례’로 볼 수 있으며, 이 시기를 하나의 과정으로 무사히 넘겼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바다가 가까운 탓인지 강바람 탓인지 - 고뇌의 불길로 나의 밤을 지배할 뿐이었다. : ‘나’는 강진에서의 열 달 남짓한 생활을 처참하고 참담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나’는 대학에 입학하기 전에 세상과 유리된 채 토굴과 같은 방에서 자기 삶의 방향을 모색하는 과정 중에서 겪는 정신적 충격과 아픔의 시간을 보내게 되는데, 이러한 ‘나’의 처지가 강진의 밤을 우울하고 요사스러운 기운이 도는 것으로 생각하게 한 것이다.
▶ 작품 해제
지은이 : 이문열(李文烈 1948- ) 소설가.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새하곡”이 당선되어 등단. 주요 작품으로 “사람의 아들”, “황제를 위하여”,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등이 있다.
갈래 : 장편 소설. 성장 소설
배경 : 강진, 서울
성격 : 자전적. 회고적. 순차적
시점 : 1인칭 주인공 시점
구성 : 3부작
주제 : 허무의 극복과 진정한 삶의 성장 모색
출제 : <젊은 날의 초상>(1981년)
▶ 작품 해설
이 작품은 ‘하구’, ‘우리 기쁜 젊은 날’, ‘그 해 겨울’의 3부작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구성의 공통점은 이미 30대인 ‘나’가 과거의 일기와 그것에 관련된 사건들의 회상에 대한 술회이며, 19세기에서 21세기까지, 순차적인 시간의 진행이라는 점이다.
1인칭 주인공 시점인 ‘나’가 일정한 생의 형성이나 성취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렸다는 점, 주인공 ‘나’가 세계와 대립하지만 그것을 능동적으로 변혁하지 못하고, 세계에 체념하면서 오히려 세계에 대한 발전된 관계를 형성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성장 소설이다. 이런 형태의 성장 소설에서는 서술상의 초점과 성격의 핵심이 주인공인 ‘나’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는데, 특히 이 소설에서는 지나버린 과거를 회상하고 있는 주인공의 오늘의 입장이 거의 은폐되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