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八畊山人 박희용의 南禪軒 독서일기 2024년 9월 14일 토요일]
『대동야승』 제8권 [해동야언 Ⅱ] 무오사화 사적 (戊午士禍事跡)
○ 홍치(弘治 명 나라 효종의 연호) 무오년 연산4년 7월 17일의 전지(傳旨)에 이르기를, “김종직(金宗直)은 초모천사(草茅賤士)로 세조조 때에 급제하였고, 성종 때에는 경연에 발탁되어 오래도록 시종(侍從)관으로 있으면서 형조 판서에 이르렀다.
그 은총이 조정에서 제일이었는데, 병으로 사퇴한 뒤에도 성종은 아직도 그가 있는 고을 원을 시켜 미곡을 그가 죽는 해까지 특별히 내려주었다.
이제 그 제자인 김일손(金馹孫)이 편수한 사초(史草) 내에 무도한 말로 선왕의 조정사를 거짓 꾸미몄을 뿐 아니라, 또 그 스승인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기재하였는데, 그에 이르기를, ‘정축년 10월 어느 날에 내가 밀성(密城)에서 경산(京山)으로 오던 도중에 답계역(踏溪驛)에서 자는데, 꿈에 칠장복(七章服 제왕의 의복)을 입은 신인이 근심된 빛을 하고 와서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초 회왕(楚懷王)의 손자인 심(心)인데, 서초패왕(西楚霸王 항우)에게 피살되어 침강(郴江)에 버림을 받았다.’ 하고서, 그대로 홀연히 사라졌다.
내가 놀라 깨어서 생각하기를, ‘초 회왕은 남초(南楚)의 사람이요, 나는 동이(東夷)의 사람이며, 남초는 거리가 여기서 만여 리나 될 뿐 아니라, 세대로 말한다 하더라도 천 년이 넘었는데, 이제 와서 꿈에 보이니 이것이 무슨 징조인가.’ 하고, 또 사기를 상고하여 보니, 의제를 강에 던졌다는 말은 없으니, 아마도 항우가 사람을 시켜 몰래 죽이고 그 시체를 강물에 던진 것이었던가. 그것은 알 수 없다. 드디어 글을 지어 조상한다. 오직 하늘이 사물의 법칙을 제정하여 사람에게 주었으니, 누가 사대(四大) 오상(五常)의 존귀함을 알지 못하겠는가. 중국에는 풍요하고 이적(夷狄)에는 인색할 이 없으니 어찌 옛날에는 있었고 지금인들 없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동이 사람이며, 또 천 년이나 뒤에 났지마는, 공손히 초 나라의 회왕에게 조상하노라.
옛날 조룡(祖龍 진시황)이 어금니와 뿔(牙角 무력)을 희롱할 적에 사해의 파도가 크고 거칠었었다. 비록 전유추예(鱣鮪鰍鯢 철갑상어ㆍ다랑어ㆍ미꾸라지ㆍ도롱뇽) 같은 잔 물고기도 생명을 보호하지 못하고 그물에서 새어 나려고 몸부림친다. 그때 육국(六國)의 유손[遺祚]들은 결딴나고 쫓기어 겨우 평민되는 것을 면하였다.
양(梁)은 남쪽 나라 대장의 후예로서 고기와 여우의 뒤를 이어 거사(擧事)하였다. 왕을 구해 얻어서 백성들의 바람을 따랐고 웅역(熊繹 초 나라 시조)의 제사 없던 것을 이었도다. 하늘의 옥새를 쥐고 남쪽을 향하고 앉으니 천하에 진실로 우씨(芋氏 초 나라 임금의 성)보다 높은 이 없었다. 장자(長者)를 보내어 관중(關中)에 먼저 들어가게 하였으니, 그 역시 그의 인의(仁義)를 볼 수 있었다. 승냥이처럼 사납고, 이리처럼 탐하는 자 마음대로 관군(冠軍 총대장 송의(宋義))을 죽였으니, 어찌 먼저 잡아 도끼날에 피 묻히지 않았던가.
슬프다. 대세가 그렇지 못하였으니 나는 더욱 왕에게 황구하게 여기는 바이라, 도리어 그들에게 식혜나 초와 같이 먹히고 말았으니 과연 천도가 거꾸로 되는도다. 침산(郴山)이 우뚝 하늘을 찌를 듯, 태양빛 어둑어둑 저물어가고, 침강(郴江)은 주야로 흘러흘러 물결이야 일어나건만 다시 오진 못하도다. 하늘같이 깊고 땅같이 오래된 한 언제나 다할쏜가. 혼백이 이제까지 아직도 방랑하며 떠도누나. 나의 마음이 쇠나 돌이라도 뚫기로 왕이 문득 내 꿈속에 나타났다. 자양(紫陽 주자)의 노련한 붓을 본뜨니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근심된다. 구름 같은 술잔 들어 땅에 부으며 영령(英靈)이 와서 흠향(歆享)하기 바로옵네.’ 하였으니, 그 말한, ‘조룡(祖龍)이 어금니와 뿔을 희롱한다.’ 하였는데, 조룡은 곧 진시황인데, 종직은 진시황을 세조에게 비기었다. 또, ‘왕을 구해 얻어 백성들의 바람을 따랐다.’ 하였는데, 왕은 초 회왕(楚懷王)의 손자 심(心)이다. 처음에 항량(項梁)이 진 나라를 치고 손자 심(心)을 얻어서 의제로 삼고자 하였으니, 종직이 제를 노산(魯山)에 비긴 것이다.
또, ‘승냥이처럼 사납고 이리처럼 탐하는 자가 마음대로 관군을 죽였다.’한 것은 종직이 승냥이처럼 사납고 이리처럼 탐하는 것으로 세조를 지목한 것이고, 마음대로 관군을 죽였다 함은 세조가 김종서 죽인 것을 지목한 것이다. 또 말한 ‘어찌 먼저 잡아서 도끼에 피 묻히지 않았는가.’함은, 종직이 노산이 어찌하여 세조를 잡지 않았는가라고 말하는 것이요, 또, ‘식혜나 초처럼 도리어 먹혔다.’는 것은 종직이 노산이 세조를 잡지 아니하고 도리어 식혜나 초처럼 세조에게 먹혔다는 말이다.
또 ‘자양(紫陽)의 노필(老筆)을 본떠서 글을 쓰려고 하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근심이 된다.’는 것은, 김종직이 주자(朱子)로 자처하여, 그 마음에 이 부(賦)를 지어서 《강목(綱目)》의 필법에 비긴 것이다.
김일손(金馹孫)이 그 부를 찬미하여 말하기를, ‘충성된 울분을 붙였다.’ 하였으니, 생각하면, 우리 세조대왕은 국가가 위태하고 의심스러운 때를 당하여 간신들이 난리를 꾸며서 화의 기미가 거의 터질 지경이었으므로, 역도를 주제(誅除)하여 나라가 위태하다가 다시 안정되어 자손이 계승하여 오늘에까지 왔으니, 그 공업이 높고 높아 덕망이 백왕(百王)의 으뜸이었는데, 뜻밖에 종직이 그 문도와 더불어 성덕을 기롱하고, 심지어는 김일손으로 하여금 역사까지 거짓 꾸미게 하였으니, 어찌 일조일석의 일이겠는가. 몰래 불신(不臣)의 마음을 품고 삼조(三朝)를 내리 섬긴 것이다. 내가 이제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처참하고 황송해진다. 그들의 형명(刑名)을 정하여 아뢰이다.” 하였다.
7월 27일에 크게 사면하는 교지를 반포하기를, “삼가 생각건대, 우리 세조 혜장대왕(世祖惠莊大王)은 신무하신 자질로 국가가 위태롭고 의심스럽고 여러 간신들이 도사려 차지하고 있는 때를 당하시어, 깊은 생각과 밝은 결단으로 화란을 가라앉히시어, 천명과 인심이 저절로 귀속된 바가 있었다.
성덕신공(聖德神功)이 높이 백왕의 으뜸이 되시고, 조종에서 하기 어려운 일을 더욱 빛나게 하였고, 자손을 도와 편안히 하는 계책을 끼쳐 주었으므로 계계승승하여 오늘까지 이르렀는데, 뜻밖에 간신 김종직(金宗直)이 못된 마음을 품고 가만히 당류를 모아 흉모를 성취시키려 한 지 벌써 날이 오래되었다. 항적(項籍)이 의제(義帝)를 죽이려는 일에 가탁하여, 문자를 만들어 선왕을 욕하고 헐뜯었으니 하늘에 넘친 죄악은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대역으로 논의되어 관을 쪼개어 시체를 자르고 그 도당인 김일손(金馹孫)ㆍ권오복(權五福)ㆍ권경유(權景裕)는 간악한 붕당으로서 같은 말로 서로 도와가며 그 글을 칭찬하여 충성된 의분의 격발된 것이라 하였을 뿐 아니라, 사초(史草)에 써서 오래도록 전하려고 하였으니 그 죄가 김종직과 같은 것이다.
모두 능지처참하게 하고, 김일손은 또 이목(李穆)ㆍ허반(許盤)ㆍ강겸(姜謙)들과 선왕이 하지 않은 일을 거짓 꾸미어 말을 만들어 전파하고, 또 사초에 썼으니, 이목과 허반은 다 참형에 처하고, 강겸은 형장 1백 대에 그 가산은 몰수하고 변방의 노비로 삼으며, 표연말(表沿沫)ㆍ홍한(洪翰)ㆍ정여창(鄭汝昌)ㆍ무풍부정(茂豐副正) 총(摠) 등은 난언(亂言)을 지었으며, 강경서(姜景叙)ㆍ이수공(李守恭)ㆍ정희량(鄭希良)ㆍ정승조(鄭承祖) 등은 난언을 알고도 관에 고하지 않았으니, 모두 형장 1백 대에 3천 리 밖으로 귀양보내고, 이종준(李宗準)ㆍ최보(崔溥)ㆍ이원(李黿)ㆍ이주(李冑)ㆍ김굉필(金宏弼)ㆍ박한주(朴漢柱)ㆍ임희재(任熙載)ㆍ강백진(康伯珍)ㆍ이계맹(李繼孟)ㆍ강혼(姜渾)은 모두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만들어 서로 칭찬하고, 혹은 국정(國政)을 기롱하며 때로는 시사(時事)를 조롱하였으므로, 희재와 이주는 형장 1백 대에 극변으로 부처하고, 이종준ㆍ최보ㆍ이원ㆍ김굉필ㆍ박한주ㆍ강백진ㆍ이계맹ㆍ강혼은 모두 형장 80대를 때리고 원방에 부처하라. 귀양보낸 사람들은 모두 봉수대(烽燧臺)에서 뜰에 불피우는 부역을 정하고, 수사관(修史官)으로 있으면서 김일손의 사초를 보고도 즉시 아뢰지 아니한 어세겸(魚世謙)ㆍ이극돈(李克墩)ㆍ유순(柳徇)ㆍ윤효손(尹孝孫)들은 파직하고, 홍귀달(洪貴達)ㆍ조익정(趙益貞)ㆍ허침(許琛)ㆍ안침(安琛) 등은 좌천시켰다가 그 죄의 경중에 따라 모두 이미 처결하고, 삼가 이 사유를 종묘 사직에 고하였다.
생각하면, 나 같은 덕없는 우둔한 사람으로 간당을 추려서 제거하고 보니, 떨리고 두려운 생각이 깊으면서 한편 기쁘고 다행스러운 마음 또한 간절하다. 이에 이번 7월 27일 새벽 이전에 강도와 절도, 그리고 강상(綱常)죄인 이외에는 기결정(旣決定)이건 미결정이던 간에 모두 용서해 줄 것이니, 감히 교지 있기 전 일을 가지고 서로 전해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 죄로써 죄를 다스릴 것이다.
슬프다. 인신은 역적하려는 마음이 없어야 하므로, 이미 무도한 죄를 처벌하였고, 과실과 죄있는 이를 용서해주고 너그럽게 처리해야 하므로 의당 유신의 은혜에 젖도록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교시를 내리나니, 모두 다 알 줄 믿는다.” 하였다. [한국고전종합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