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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
(Friedrich Schleiermacher, 1768~1834)
[근대 독일철학자, 종교철학자, 개신교 신학자, 해석학자]
생애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는 독일 브레슬라우에서 1768년 독일 개혁교회 목회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슐라이어마허는 1783년부터 니스키에 있는 모라비아 형제단 학교에서 교육받았고, 1785년부터 바르비에 있는 신학부를 다녔다. 그런데 그는 1786년부터 교조적이고 실정적인 종교성의 형식과 거리를 두게 되었다. 그 후 그는 할레 대학에서 개신교 신학을 공부하면서 볼프와 칸트 철학에 심취하게 된다. 1790년부터 1793년까지 슐라이어마허는 동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알렉산더 백작의 가문에서 가정교사로 일하였다. 1794년에는 란츠베르그에서 부목사가 되었고, 1796에 베를린 샤리테에서 목사가 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프리드리히 슐레겔과 낭만주의자들과 가깝게 교류하면서 여러 작품들을 발표했다. 그런데 1802년 슐라이어마허는 그의 상관과의 갈등으로 인해 슈톨프로 옮겨 가게 되면서 스톨프 궁정설교자로 일하게 된다. 거기서 그는 슐레겔로부터 영감을 받아 번역한 다섯 권의 플라톤 전집 중 세 권을 출판한다. 그리고 1804년 가을 슐라이어마허는 할레 대학의 원외 교수 겸 대학사목자직을 수락했다. 그러나 1806년 프로이센이 나폴레옹 군대에 패하게 되어 할레 대학이 문을 닫게 됨으로써 그는 교수활동을 중단하게 된다. 1809년 슐라이어마허는 베를린대학 교수로 지명되었고 1810/11년에 신학부 초대 학장을 역임했다. 같은 해 개혁파와 루터파의 통합교회인 삼위일체 교회의 설교자로 초빙된다. 1813년에는 『프로이센 신문』의 공동편집자였던 슐라이어마허는 검열과 관련하여 정부와 갈등을 겪게 되고, 1823년에는 설교까지 감시당하는 어려움을 겪게 된다. 1821년에는 통합 교의학으로 평가를 받는 그의 대표작인 『기독교신앙』을 발표한다. 슐라이어마허는 교회제도개혁과 예배개혁을 정부와 교회에 맞서 추진하였고 그의 교의학은 교회통합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였다. 그리고 1834년 그는 폐렴으로 베를린에서 위대한 생애를 마감한다.
주요 업적과 사상
『종교론』(Über die Religion)은 슐라이어마허의 초기 사상을 대표하는 저서로서 칸트의 『이성의 한계 내에서의 종교』에 필적하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여기서 슐라이어마허는 종교와 신앙이라는 보편적 사태가 어떤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형태를 띠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먼저 그는 종교를 계몽주의적인 세속적 관점에서 해방시키려고 하며, 종교의 본질을 우주에 대한 직관과 감정, 더 자세히 말해 수동성과 수용성에 기초한 직관과 감정에서 찾는다. 이러한 슐라이어마허의 종교관은 능동적 주체성을 강조하는 칸트의 도덕신학이나 헤겔의 사변철학과 구별된다. 또한 그는 인간의 타고난 소질로서의 종교성을 통해 종교가 형성됨을 강조하며, 더 나아가 개인들 간의 종교성이 상호전달로 이어지면서 종교 공동체가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종교론』은 정통주의와 경건주의를 종합하면서 종교철학은 물론이고 개신교 신학의 논의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은 슐라이어마허의 후기 사상뿐 아니라 그의 사상 전반을 대변하는 대작이다. 이 저서는 일반적인 교의학 및 신앙론과 구별되며, 슐라이어마허는 여기서 개신교 교회의 통일에 기여할 수 있는 새로운 교의학과 학문적 체계를 갖춘 신앙론을 제시한다. 특히 그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경건한 심정’에서 찾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은 기독교적인 경건한 자기의식에 대한 학문적 분석으로 해석된다.
슐라이어마허는 『독백』(Monologen)에서 개인적 삶의 고유성과 특수성을 보편성의 지평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윤리학의 가능성을 탐구한다. 여기서 그는 세계와 우주 속에서도 소멸되지 않는 개인의 정신과 내면성 그리고 고유한 독자성을 강조하면서 보편적 에토스를 앞세우는 윤리학에 맞서서 개인적 정신과 자유에 기초한 윤리학을 정초하고자 한다. 이를 토대로 슐라이어마허는 이후에 철학적 윤리학을 확립한다. 철학적 윤리학에서 그는 인간의 개인성과 공동체성이 통합되는 진정한 인간성의 구현과 이성을 통해 자연을 지배하는 인간의 점진적 과정에 대한 서술로서의 인간성의 역사를 중시한다.
또한 슐라이어마허는 텍스트 해석학으로 정립된 계몽주의 해석학을 더욱 발전시킨다. 그는 계몽주의 해석학에서 경계가 모호했던 ‘설명의 기술’, ‘적용의 기술’ 그리고 ‘이해의 기술’을 구분하면서 ‘이해의 기술’만을 해석학에 귀속시킨다. 해석학은 단순히 체계적이고 문헌학적인 작업이 아니라 이해의 기술로서 항상 이미 구성되어 있는 말과 글을 전제한다. 즉, 이해는 이미 구성된 말에 대한 재구성이다. 따라서 텍스트를 해석하기 위해 해석자는 저자의 내적 생각과 텍스트 작성에 사용한 언어를 모두 고려해야한다. 슐라이어마허에서 해석학의 목적은 저자가 텍스트를 서술했을 때 경험했던 동일한 사유를 경험하는 것인데, 이 경험이 바로 이해이다. 더 나아가 슐라이어마허는 번역이 해석학 이론의 실제적 적용이며, 해석학 이론이 번역의 방향과 기준을 제시해 준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슐라이어마허의 플라톤 번역과 그의 해석학 이론 사이의 연관성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슐라이어마허에서 언어에 기초한 이해의 기술로서의 해석학은 사고에 기초한 대화수행의 기술인 변증법과 상호보완적인 관계 속에 놓여 있다.
주요 저작
Über die Religion. Reden an die Gebildeten unber ihren Verächtern, 1799.
Monologen, 1800.
Grundlinien einer Kritik der bisherigen Sittenlehre, 1803.
Die Weihnachtsfeier, 1806.
Gelegentliche Gedanken über Universitäten im deutschen Sinn, 1808.
Die Lehre vom Staat, 1808/09.
Über die Philosophie Platons, 1809.
Dialektik, 1811.
Ethik, 1812/13.
Pädagogik, 1813/14.
Dialektik, 1814/15.
Der christliche Glaube nach den Grundsätzen der evangelischen Kirche im
Zusammenhange dargestellt, 1821/22.
Theologische Enzyklopädie, 1831/32.
Ästhetik. Begriff der Kunst, 1832/33.
Hermeneutik und Kritik, 1838.
Schleiermacher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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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종교론
종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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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우주는 모든 방식으로 직관되고 숭배되어야 한다. 무수한 형태의 종교가 가능한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다양성을 무한자에 이르기까지 내적으로 산출하며 이러한 다양성을 그리스도교 바깥에서도 직관하고자 한다. 그리스도교는 자신의 파멸성과 그만의 고유한 슬픈 역사 가운데서 자신의 영원성을 최고로 입증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다.
인간적이고 유한한 존재 가운데 위대한 신적 존재의 파멸 가능성이 들어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교가 갖는 근원적인 직관의 절반이다.
이 모든 종교보다 숭고하며 그 영광의 면에서 이들보다 더 역사적이며 겸손한 그리스도교는 그 덧없는 본성을 인정해 왔다.
신적인 화해 능력이라는 그리스도교의 중심-이념은 이러한 무제약적 자유와 본질적 무한성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형성되어 왔다.
종교의 생명을 자기 속에서 느끼거나 다른 사람에게서 감지하는 모든 사람은 이렇게 비그리스도교적으로 시작하는 것에 대해 저항할 것을 선언해왔다.
자신의 종교에서 이러한 직관을 기초로 하는 사람은 유파와 상관없이 그리스도인이며, 이러한 사람은 자신의 종교를 자신이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역사적으로 도출해낼 수 있다.
중재자가 갖는 유일한 종교성과 근원적인 확신, 그리고 자신을 전달하고 종교를 고무하고 그 힘은 동시에 그의 중보자 직분과 신성에 대한 의식이었다.
아들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으며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신을 계시할 뿐이다.
종교 가운데 지금까지 존재하는 가장 영광스러운 것을 창시한 숭고한 존재자(예수 – 역자)가 보여준 삶에 대한 부분적인 서술에 나타나 있는 그 성스러운 모습을 고찰할 때, 나는 그의 도덕론의 순수성의 놀라운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모든 성스러운 것은 그것이 인간적인 것으로 화하는 순간 파멸될 수 있다는 사실,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근원적인 세계관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언어가 내게 보여준 유일한 이름인 거룩한 슬픔, 모든 기쁨과 고통, 사랑과 공포를 동반하는 것이 이러한 정조이다.
우리는 종교적 감정과 확신을 이들이 생겨 나오는 모든 심정의 느낌과, 이들이 대상으로 관계할 수 있는 모든 행위와 어울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본래 그리스도교가 갖는 노련함의 최고 목표인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그 논쟁적인 힘을 자신에게로 향하게 한다. 그는 외부의 무종교와 투쟁함으로써 스스로 이질적인 것을 흡수하지는 않았는지, 혹은 심지어 자신이 파멸의 원리를 소유하지는 않았는지 늘 염려하며 이것을 추방하기 위하여 격렬한 내부 운동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만의 고유한 경계와 성인들의 내밀한 공동체 안에서는 그리스도교도 마찬가지로 논쟁적이며 예리하고 신랄하다.
그리스도교의 최초의 영웅들은 온갖 왜곡과 변종 가운데서도 종교가 갖는 천상의 맹아를 확실히 보았다.
그리스도교는 대담하게도 동시대인들이 만들어 놓은 신의 세계와 인간 세계의 분리 너머로 이방인들을 인도한다.
그리스도교는 그 고유한 근본 직관을 통해 종교와 종교사 가운데서 우주를 가장 많이 가장 아름답게 본 종교이다.
신은 자신과 인간 사이에 더욱 숭고한 중보자를 세우고 나중에 오는 모든 사자 가운데서 자신과 인간을 더욱 내적으로 통일하며, 이로써 바로 이 신성과 인간성을 통해 영원한 존재를 알 수 있게 한다.
발화된 모든 신의 섭리는 우리가 이러한 우주의 정신에 관계할 때 직관된다. 행위 가운데 역사하는 신의 섭리는 감정의 직접적인 결과를 지향하지 않는다.
저자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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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서강대
헤겔은 자신의 제자 힌리히스가 쓴 종교철학 책의 서문을 작성하면서, 슐라이어마허의 '절대 의존적 감정'을 비판했다. 헤겔은 이렇게 말했다. "인간에게 종교가 오직 감정의 토대 위에 서 있는 것이라면, 그 감정은 인간의 의존하는 감정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개(犬)가 가장 진실한 신자가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개는 이러한 감정을 가장 강렬하게 수행하고 있고, 원리적으로 이러한 감정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심지어 개는 뼈다귀로 배고픔을 채웠을 때 구원의 감정도 가진다." [3] 헤겔은 '이성'과 종교의 변증법적 화해를 강조했기 때문에, (이성을 배제한 채) '감정'에만 기반한 슐라이어마허의 종교관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