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여행을 할 경우 그 나라의 과거 역사에 대하여 어느 정도 미리 알아두고 떠나는 것이 도움이 될 때가 많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근현대사는 유럽에서 건너온 정복자 지배계급인 백인정권에 의한 반인권적 반문명적 범죄행위인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와 이에 대한 피정복자 노예계급인 흑인들의 투쟁과 저항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아공에는 아파르트헤이트를 앞세운 백인정권이 저지른 추악한 죄악상과 아파르트헤이트 철폐를 위해 치열하게 전개한 흑인들의 숭고한 항쟁을 기록하고 증언하는 역사적 현장이 몇 군데 있다. 케이프 타운(Cape Town)의 테이블 베이(Table Bay)에 있는 로벤 아일랜드(Robben Island)와 요하네스버그(Johanesburg, 이하 조벅) 서남쪽 6km 지점의 사우스데일(Southdale)에 있는 아파르트헤이트 박물관(Apartheid Museum), 그리고 사우스데일의 남서쪽 10km 지점의 소웨토(Soweto, South Western Townships의 머리글자를 따온 말)에 있는 헥터 피터슨 박물관(Hector Peterson Museum) 등이 그들이다.
엊그제 케이프 타운에 갔을 때, 백인정권이 넬슨 만델라를 비롯한 흑인 정치지도자들을 격리 수용했던 감옥으로 악명높았던 로빈 아일랜드를 보려고 했지만 배표를 구할 수 없어서 포기해야만 했었다. 그래서 오늘은 만사 제쳐놓고 백인들에 의한 억압과 착취를 뒤엎어 버리고 자유와 평등세상을 위한 흑인들의 붉은 피로 쓴 남아공 해방투쟁의 역사를 웅변으로 증거하는 아파르트헤이트 박물관을 찾아보려고 굳게 마음먹었다. 박물관은 골드 리프 시티(Gold Reef City) 정문 안쪽 모서리에 자리잡고 있다.
아파르트헤이트 박물관
1652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얀 반 리벡(Jan van Riebeeck, 1619~1677)이 동양무역의 보급기지 건설을 위해 케이프 타운에 상륙한 이래 네덜란드인의 이주가 계속되었다. 그러자 네덜란드계 백인인 아프리카너(Afrikaner=Afrikander=Boer, Boer는 네덜란드어로 농부의 뜻임)와 흑인 원주민들 사이에 싸움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18세기 후반부터는 케이프 타운에 영국인들이 침투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케이프 타운은 1814년 결국 영국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영국인들에게 밀려난 보어인들은 북쪽으로 이주하여 1852년 오렌지자치국, 1854년 트란스바알공화국을 세웠다. 그러나 1899년에 발발한 보어전쟁에서 보어인이 영국에 패하자 두 공화국은 1902년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고, 1910년에는 남아프리카연맹에 편입된 뒤 영국연방국의 하나가 되었다.
아파르트헤이트란 용어는 1917년 아프리카너 출신 얀 크리스티안 스무트(Jan Christiaan Smuts, 1870~1950, 2년 뒤 남아프리카연맹의 총리가 됨)가 행한 연설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1948년 보어인들을 기반으로 남아공 국민당(National Party of South Africa, NPSA)이 단독으로 정권을 잡자 백인정권은 33개에 달하는 각종 인종차별법을 한층 강화하여 흑인과 유색인종을 탄압하였다.
백인들의 억압과 착취에 시달리던 남아공의 흑인들은 인종차별을 종식시키기 위해 1920년대부터 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흑인들의 투쟁이 본격화된 것은 1960년대 들어와서부터다. 1960년 3월 아프리카민족회의(African National Congress, ANC)의 한 분파인 범아프리카인회의(Pan Africanist Congress, PAC)의 주도로 통행증 지참에 반대하여 일어난 샤퍼빌(Sharpeville) 폭동은 향후 남아공 흑인해방투쟁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
샤퍼빌 폭동 이후 ANC와 PAC는 불법단체로 간주되어 일체의 합법적인 저항운동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ANC는 1961년 넬슨 만델라(Nelson Rohihlahla Mandela, 1918~)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움콘토 웨 시즈웨(Unmkhonto we Sizwe, MK, 민족의 창)'라는 군대를 창설하고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1964년 백인정부는 이른바 '리보니아 재판(The Rivonia Trial)'을 통해서 만델라를 비롯한 '민족의 창' 지도부에 종신형을 선고했다. 이 사건 이후 남아공 백인정권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판은 점점 거세져 갔다. 1961년 영국연방은 국민당 정권의 남아공을 연방으로부터 제명시켰으며, 1974년에는 국제연합(UN)도 남아공을 축출했다.
흑인해방투쟁의 기폭제가 된 것은 1976년에 발생한 소웨토 봉기였다. 조벅의 서남부에 있는 소웨토에서 아프리칸스(Afrikaans, 네덜란드계의 현지 공용어)를 정규 교과목으로 채택하려는 데 대해 반대시위를 벌이던 군중에게 경찰이 발포하여 헥터 피터슨이라는 13세의 흑인소년이 사망함으로써 촉발된 소웨토 봉기에서 많은 흑인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당했다. 소웨토 봉기 10년 뒤 1986년 ANC와 남아공 공산당(South African Communist Party, SACP)을 비롯한 흑인 저항운동 단체들은 드디어 인민전쟁을 선포하고 백인 지배세력에 대한 군사작전을 전개하였다. 인민전쟁은 1990년까지 이어졌다.
이에 대해 백인정권은 국가권력을 동원하여 살인과 암살, 고문, 폭행, 강간, 구금 등 온갖 폭력적 만행을 자행하였다. 심지어 저항운동의 주동자를 색출한다는 핑계로 백인들이 흑인 집단거주지에 총기를 난사하는 일도 다반사로 일어났다. 1960년 3월부터 1990년까지 백인 지배세력에 대한 저항운동 과정에서 약 3백만 명 이상의 부상자와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소웨토 봉기 이후 백인정권을 타도하려는 수많은 흑인 투사들이 ANC에 줄을 이어 가입했다. ANC의 급격한 세력확대로 상황은 백인정권에 점점 불리해져 갔다. 백인정권은 이제 더 이상 흑인들을 폭력으로 굴복시킬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모든 것을 잃고 쫓겨나지 않으려면 흑인들과 타협을 할 수 밖에 없었다.
1990년대 들어 남아공 백인정권은 마침내 ANC를 비롯하여 모든 저항운동단체들을 합법화하고 흑인들에게 참정권을 허용하는법안을 통과시켰다. 1994년 4월 남아공 최초로 실시된 다인종 총선에서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는 ANC가 전체 의석의 60% 이상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두었다. 2세기에 걸쳐 악명을 떨쳤던 백인정권이 종말을 고하는 순간이었다. 1994년 5월 넬슨 만델라가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이로써 3백여년간 지속되었던 백인들의 지배가 종식되고 흑인들에게 새로운 세상이 열리게 되었다.
박물관 입구에 세워진 일곱 개의 기둥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면 먼저 입구에 세워진 일곱 개의 길다란 장방형의 기둥을 만난다. 각각의 기둥에는 남아공의 흑인들이 백인정권의 인종차별 정책에 대한 저항과 투쟁을 통해서 체득한 일곱 가지의 소중한 가치들 즉, 민주주의(Democracy), 평등(Equality), 조화(Reconciliation), 다양성(Diversity), 의무(Responsibility), 존중(Respect), 그리고 자유(Freedom)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1994년부터 1996년에 걸쳐 구성된 남아공 최초의 완전한 민주적 의회인 제헌의회는 새 헌법을 채택하였다. 새 헌법에는 전 세계의 그 어느 나라보다 광범위하게 평등을 보장하는 내용들이 담겨 있다. 그 중에서도 핵심인 일곱 가지 가치의 중요성은 박물관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들어오자마자 만나게 되는 기둥들에 의해서 상징된다.
이들 일곱 가지는 어쩌면 독재자나 권력자, 지배 기득권층이 가장 싫어하는 가치일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려면 최소한 이 일곱 가지 가치는 반드시 실현되어야만 한다. 이 일곱 개의 기둥을 세우기 위해서 흑인들은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뤄야만 했던가!
아파르트헤이트 박물관 입구에 세워진 거울
일곱 개의 기둥을 지나면 사람들이 어디론가 부지런히 걸어가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 인화된 거울들이 죽 세워져 있는 통로가 나타난다. 백인도 있고 유색인종도 있다. 어떤 사람은 앞모습, 또 어떤 사람은 뒷모습이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1886년 조벅에서 금이 발견되자 남아프리카뿐만 아니라 전 세계로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거울 속의 주인공들은 바로 1886년 이래 조벅으로 이주했던 사람들의 자녀의 자녀의 자녀들인 것이다! 그들은 함께 다양한 인종이 뒤섞인 공동체 사회를 구성했다. 백인들은 인종적 혼혈을 방지하기 위해서 유색인종에 대한 분리와 차별정책을 고안해냈던 것이다.
백인과 유색인종이 따로 들어가도록 구분된 출입문
박물관 내부로 들어가는 입구 앞에 선다. 그런데 백인(WHITES)과 유색인종(NON-WHITES)의 출입문이 구분되어 있다. 나는 잠시 어느 문으로 들어갈까 망설인다. 백인이 아니기에 나는 유색인종의 출입문을 선택한다. 기분이 묘하다. 마치 내가 인종차별을 받는 듯한 느낌이다. 단지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건물의 입구에서부터 인종차별을 받는다고 상상해보라! 그 치욕과 좌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박물관이 의도했던 것도 바로 이것이리라.
남아공의 인종 등급은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에 근거한 것이었다. 인종 등급은 흑인 원주민(Native), 백인과 흑인의 혼혈인 컬러드(Coloured), 아시아인(Asian), 백인(White) 등 네 등급으로 구분되었다. 당시의 실상을 체험하기 위해 방문자들은 자신을 임의로 백인 아니면 비백인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일단 인종을 결정하면 방문자는 오직 그 인종집단만이 출입할 수 있는 문을 통해서만 박물관으로 들어갈 수 있다.
아파르트헤이트는 17세기 중엽 백인들의 이주와 더불어 흑인들은 열등한 인종이라는 악의적 편견에 기초하여 점차 제도로써 확립된 것이다. 아라르트헤이트 시스템은 남아공을 백인국가와 흑인국가로 완전히 분리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대(大) 아파르트헤이트와 국가내에서의 인종 분리와 차별을 목표로 하는 소(小) 아파르트헤이트로 나눌 수 있다. 집권 국민당은 1980년대 들어 소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점차 폐지하는 대신 1990년대에 들어서는 대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줄기차게 추진하였다.
주요 아파르트헤이트 법안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인종간 결혼 금지법'(1949)은 서로 다른 인종간의 결혼을 금지했고, 배덕법(背德法, 1950)은 백인이 유색인종과 갖는 성관계를 부도덕한 범죄행위로 간주하고 처벌하였다. '주민등록법'(1950)'은 16세 이상의 모든 국민에게 신분증을 만들 것을 의무화하고, 인종정보를 신분증에 표시할 것을 규정하였다. 이 법에 따라 남아공 국민은 누구나 반드시 백인, 인도인, 컬러드, 흑인 가운데 하나의 인종집단에 속하도록 하였다. '집단지구법'(1950)은 국토를 인종에 따라 특정한 인종만 거주할 수 있는 인종구역으로 나눈 아파르트헤이트의 핵심 법률이다. 이 법에 따라 인종별 정치적, 사회적 분리가 가능해졌다. '반공법'(反共法, 1950)은 남아공 공산당을 포함해서 백인정권이 공산주의 정당이라고 규정한 모든 정당의 활동을 불법으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이 법은 흑인들을 탄압하는데 악용되어 백인경찰은 흑인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살해한 뒤 시체를 불태워 증거를 인멸하곤 하였다. 한국의 역대 독재정권들이 반정부 민주인사들을 공산주의자 또는 간첩으로 몰아서 탄압한 사례와 동일한 수법이다.
'반투 자치법'(Bantu 自治法, 1951)은 흑인들만의 분리된 자치정부를 규정한 것이다. 그러나 백인정부의 속셈은 반투스탄(Bantustan)이라고 불리는 불모지에 흑인들을 집단거주시키고, 남아공 국민으로서의 모든 권리와 혜택을 박탈함으로써 그들을 외국인 노동자로 만들려는 데 있었다. '불법거주금지법'(1951)은 백인정권이 대도시의 흑인 슬럼가를 합법적으로 철거하기 위해 만들었으며, '패스포드법'(1952)은 흑인이 여행을 할 때는 반드시 통행증을 지참하도록 규정하였다. 통행증이 없는 흑인들은 범죄자로 간주되었다. '시설분리보존법'(1953)은 서로 다른 인종이 같은 공공편의시설(버스, 식당, 수영장, 화장실 등)을 이용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반투 교육법'(1953)은 인종별 분리 교육을 규정한 법이다. 이 법에 따라 남아공에는 무려 17가지 이상의 분리된 교육 시스템이 있었으며, 흑인들은 백인이나 컬러드, 인도인에 비해 형편없는 교육을 받아야만 했다.
'광산노동법'(1956)은 고용에 있어 인종차별을 정당화시켰다. 이 법에 의해 백인과 흑인의 임금격차는 최대 10배에 이르기도 했다. '흑인자치정부촉진법'(1958)은 흑인집단거지인 블랙 스테이트(Black State=반투스탄=Bantu Homeland)를 남아공에서 분리된 독립국가로 만들고, 흑인들에게 해당 홈랜드 안에서 투표권을 부여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경제적 자립이 불가능한 블랙 스테이트는 백인정부의 위성국가가 될 수 밖에 없었으며, 흑인들은 사실상 남아공 국민으로서의 권리인 투표권을 박탈당한 것이었다. 국제사회도 블랙 스테이트를 남아공의 인종차별적 위성국가로 보고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다.
'대학교육확장법'(1959)은 백인과 인도인, 컬러드, 흑인 등 대학을 인종집단별로 분리시켰다. '홈랜드 시민권법'(1970)은 블랙 스테이트에 거주하는 흑인들로부터 남아공 국민으로서의 모든 권리를 박탈하였다. 이 법을 만든 백인정권의 속셈은 블랙 스테이트를 독립시킴으로써 흑인 대 백인의 인구대비에서 우위를 차지하려는 데 있었으며, 궁극적으로 백인이 지배하는 남아공에서 흑인들을 몰아내기 위한 것이었다. 이 법에 따라 흑인들은 자신들의 땅에서 졸지에 외국인 신세가 되고 말았다. '아프리칸스어 매개법'(1974)은 블랙 스테이트 밖에서는 영어와 아프리칸스어를 50 대 50으로 균등하게 사용하도록 규정하였다. 이 법은 줄루어, 코사어를 비롯한 흑인 원주민들의 모국어 사용을 금지함으로써 민족혼을 말살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처럼 백인들은 온갖 아파르트헤이트 악법을 동원해서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백인의 특권을 유지하고 강화하려고 기도하였다. 그 결과 전 인구의 80%에 이르는 천8백만의 흑인들은 전 국토 면적의 13%에 불과한 황무지에 인위적으로 설정된 10개의 블랙 스테이트 가운데 하나에 속한 시민으로 편입됨으로써 시민권과 참정권을 박탈당하고 말았다. 흑인들은 백인의 노예 역할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것들만을 배울 수 밖에 없었으며, 노동현장에서는 노예노동과 임금착취에 시달려야만 했다. 흑인인구 가운데 절반 이상이 수도와 전기, 공공의료 서비스의 혜택을 받지도 못했다. 백인들은 흑인들의 그러한 비참한 생활을 '종족의 전통을 이어가면서 살아가는 관광상품'으로 간주하였다.
박물관 안으로 들어서면 1952년에 만들어진 '패스포드법'에 의해 인종 분리의 중요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던 흑인들의 신분증명서들이 전시되어 있다.
아파르트헤이트를 설명하는 벽면 글씨
아파르트헤이트에 저항하다 희생된 사람들의 명단
로비의 벽에는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설명문을 돋을새김하여 놓았다. 거기에는 '1948년부터 1991년까지 남아프리카에서 인종에 기초하여 강제적으로 실시된 인종 차별과 분리 정책'이라고 새겨져 있다. 그 옆에는 흑인해방투쟁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명단이 걸려 있다. 우선 희생자의 수가 엄청나다는 점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희생자는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어니스트 콜의 기록사진 전시실
백인정권의 폭력성을 고발함과 동시에 흑인들의 참상을 증언한 사람은 남아공의 흑인 더큐멘터리 사진작가 어니스트 콜(Ernest Cole, 1940~1990)이다. 그는 사진을 통해서 1960년대 아파르트헤이트를 견디면서 살아야만 했던 흑인들의 고통과 치욕을 증언하고 있다. 그는 이 사진들로 인해 백인경찰의 끊임없는 감시와 괴롭힘을 당하다가 결국 1960대 후반 국외로 망명을 해야만 했다. 아파르트헤이트를 비난하는 그의 기록사진들은 나중에 '노예의 집(House of Bondage)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미국에서 출판되었다. 아파르트헤이트 박물관은 어니스트 콜의 기록사진들을 공개적으로 전시한 남아공 최초의 박물관이다. 그의 더큐멘터리 사진들은 박물관에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알몸으로 신체검사를 받는 흑인 광부들
백인정권의 아파르트헤이트로 인해 남아공 흑인들의 삶은 인간 이하의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남아공 백인들에게 있어 1960년대는 전례없는 번영의 시기였다. 반면에 흑인들에게 있어서 1960년대는 아파르트헤이트가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가장 독선적인 인종차별로 고착화되어 가던 시기였다.
어니스트 콜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흑인 광부들이 신체검사를 받는 장면을 포착한 사진이다. 흑인 남자들이 벌거벗은 채 가축 우리에 갇힌 짐승처럼 치욕적인 신체검사를 받고 있다. 이 사진을 통해서 백인정권의 이주노동자 정책이 얼마나 공포스러운 것이었던가를 단적으로 알 수 있다.
통행증이 없어 체포된 흑인들
어니스트 콜의 이 사진은 통행증을 소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두 사람이 하나의 수갑을 찬 채 경찰에 끌려가는 장면을 담고 있다. 이처럼 백인정권은 통행법을 무자비하게 실시했다. 1964년도에 남아공에서는 약 2백2십만 명의 흑인이 범법자로 체포되었는데, 이 가운데 3분의 1은 무고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단지 통행증을 소지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경찰에 체포되었다.
시위자들을 무차별 구타하는 샤퍼빌 경찰들
샤퍼빌 대학살의 희생자들
샤퍼빌 대학살 희생자들의 장례식
백인정부의 무리한 통행법 실시는 흑인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다. 1960년 3월 로버트 소부퀘(Robert Mangaliso Sobukwe, 1924~1978)가 지도하는 급진 흑인민족주의 단체인 PAC의 주도로 통행증 지참에 반대하는 전국적인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트란스발(Transvaal) 주의 샤퍼빌에서 경찰의 무차별 총격으로 69명이 사망하고 186명이 부상을 당하는 이른바 '샤퍼빌 대학살(Sharpeville massacre)'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백인정권의 폭력성과 잔악성이 전 세계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민족의 창' 본부로 사용되었던 리보니아 릴리스리프 농장의 건물
샤퍼빌 대학살에 이어 ANC와 PAC 등 흑인 저항운동단체들도 불법단체로 규정되어 활동금지령이 내려졌다. 흑인 정치지도자들은 대부분 체포되거나 국외로 망명을 하였다. 이에 ANC와 PAC는 오랜 기간 고수해온 비폭력 노선을 포기하고 무장투쟁을 선언하였다. ANC와 PAC는 독립을 쟁취한 이웃 나라에 근거지를 두고 백인정부에 대한 사보타주와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1962년 백인정권은 무장투쟁을 지도한 혐의로 넬슨 만델라에게 5년의 징역형을 선고하였다.
1961년 SACP(남아공 공산당)는 28에이커 넓이의 릴리스리프 농장을 매입했는데, 이때는 ANC가 비폭력 저항에서 무장투쟁으로 옮겨가던 시기였다. 이 농장은 저항운동 지도자들의 도피처로 사용되었다. 넬슨 만델라도 데이비드 모차마이(David Mochmai)라는 가명으로 이곳을 은신처로 삼았다. MK의 고위간부들은 이 농장에 은거하면서 백인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한 군사작전을 수립하였다. 또 이곳에서 비밀리에 ANC와 MK를 대변하는 '라디오 프리덤(Radio Freedom)'의 전파를 내보내고, 흑인해방운동을 선전하는 전단지들을 찍어냈다. 이처럼 릴리스리프 농장은 남아공 흑인들의 자유를 위한 해방투쟁의 중심지였다.
릴리스리프 농장에는 현재 남아공 흑인해방투쟁의 역사를 되돌아 볼 수 있는 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박물관에는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1960년대 남아공의 실상을 보여주는 흑백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리보니아 재판에 항의하는 남아공 시민들
리보니아 재판에 대한 영국 런던에서의 항의시위 조 슬로보(오른쪽)와 유수프 다두(왼쪽)
백인정권에 의한 '리보니아 재판'은 남아공 국내는 물론 외국의 양심적인 지식인들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았다. 재판이 열리는 동안 법정 밖에서는 연일 항의시위가 일어났다. 영국 런던에서도 '리보니아 재판'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런던 시위에는 유수프 다두(Yusuf Dadoo, 1909~1983)와 조 슬로보(Joe Slovo, Yossel Mashel Slovo, 1926~1995)도 참가하였다.
조 슬로보는 남아공 공산주의자 정치가로 오랫동안 SACP를 이끌었으며, 동시에 ANC의 지도적 인물이었다. 슬로보는 1926년 리투아니아(Lithuania)의 오벨리아이(Obeliai)에 살고 있던 유태인 가문에서 태어나 8살이 되던 해에 부모를 따라 남아공으로 이주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조벅에서 트럭 운전기사로 일했다. 슬로보는 1941년 학교를 떠나 배송사원이 되었으며, 전국유통노동자조합(National Union of Distributive Workers, NUDW)에 가입했다. 그는 상점의 지배인으로 파업을 조직하는 일에 연루되기도 하였고, 1942년에는 SACP 당원이 되었다.
슬로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동부전선에서 독일의 나찌군에 대항해서 전투를 벌이고 있던 소련의 붉은군대(Red Army)로부터 깊은 인상을 받은 나머지 전쟁터로 나가기 위해 스프링복 군단(Springbok Legion)에 지원했다.
1945~1950에 슬로보는 비트워터스랜드 대학교(Witwatersland University, Wits Univ)에서 학생운동가로 활동하면서 법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1949년 그는 SACP 회계담당자 줄리우스 퍼스트(Julius First)의 딸로 뛰어난 반 아파르트헤이트 활동가였던 루쓰 퍼스트(Ruth First)와 결혼했다. 그들 사이에 숀(Shawn)과 질리안(Gillian), 로빈(Robyn) 등 세 딸을 두었다.
조 슬로보는 주택장관 재임중 1995년 암으로 죽었다. 그는 2004년에 '100명의 위대한 남아공인'에 47위로 선정되었다. 조 슬로보는 2006년 그의 딸 숀 슬로보가 각본을 쓰고 필립 노이스(Phillip Noyce)가 감독한 영화 '캐치 어 파이어(Catch a Fire)'의 한 극중인물로 등장한다. 조 슬로보 역은 말콤 퍼키(Malcolm Purkey)가 연기했다. 이 영화는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백인정권의 탄압과 저항세력의 투쟁을, 한 평범한 가장이었던 패트릭 차무소(Patrick Chamusso)라는 실존 인물이 급진 해방운동가로 변모해가는 과정을 통해서 잘 그려내고 있다. 조 슬로보의 또 다른 딸 로빈 슬로보는 이 영화의 제작을 맡았다.
'캐치 어 파이어'에서 패트릭 차무소 역은 데렉 루쿠(DerekLuke), 그의 아내 프리셔스(Precious) 역은 보니 헤나(Bonnie Henna), 남아공 백인정권의 보안 담당자 닉 보스(Nic Vos) 역은 팀 로빈스(Tim Robbins)가 맡았다. 주인공 패트릭을 연기한 데렉 루크는 그의 아버지가 실제로 남아공 출신이다. 데렉 루크는 이 영화를 찍기 위해, 패트릭 차무소가 넬슨 만델라 등 정치범들과 함께 수감됐던 로빈 아일랜드 교도소를 직접 찾아가기도 했다.
스코틀랜드의 싱어 송라이터 데이비드 헤브너(David Heavenor)는 1993년 앨범 '프라이비트:심야의 방문자들(Private:The Night Visitors)'을 슬로보에게 헌정하였다. 슬로보는 또 1988년 뉴욕 비평가협회로부터 크리스 멘지스(Chris Menges)가 최우수 감독상을 받은 영화 '갈라진 세상(A World Apart)'에서 예로엔 크라베(Jeroen Krabbe)가 연기한 거스 로쓰(Gus Roth)로 등장하기도 한다. 이 영화도 숀 슬로보가 각본을 썼는데, 어린 시절 백인정권에 의해 암살당한 그녀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유수프 다두는 남아공 공산주의자 활동가로 1956년 조 슬로보와 함께 '트리즌 재판'에 회부되었던 인물이다. 그는 남아공 해방운동의 가장 뛰어난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1909년 남아공 동북부의 크루거스도르프에서 아버지 모하메드(Mahomed)와 어머니 아미나 다두(Amina Dadoo) 사이에 태어났다. 모하메드와 그의 아내는 다같이 인도 중서부 구자라트 주 남동부 도시 수라트(Surat)에서 그리 멀지 않은 타피(Tapi)강변에 있는 콜와드(Kolwad)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유수프 다두는 죽어서 영국 런던에 있는 하이게이트 공동묘지(Highgate Cemetery)에 묻혔다.
리보니아 재판의 주역들
이 사진의 인물들은 저 유명한 '리보니아 재판'의 주역들이다. 윗줄부터 시계 방향으로 넬슨 만델라, 앤드류 음랑게니(Andrew Mokete Mlangeni, 1926~), 데니스 골드버그(Dennis Theodore Goldberg, 1933~), 엘리아스 모초아레디(Elias Motsoaledi, 1924~1994), 월터 시술루(Walter Max Ulyate Sisulu, 1912~2003), 아메드 카쓰라다(Ahmed Mohamed Kathrada, 1929~), 고반 음베키(Govan Archibald Mvuyelwa Mbeki, 1910~2001)다. 아래는 레이몬드 음라바(Raymond Mhlaba, 1920~2005)의 사진이다.
넬슨 만델라는 1918년 남아공의 남동부 음짐부부(Umzimvubu)강 상류지역에 있는 움타타(Umtata, 1976년 독립을 선언했으나 국제적인 승인을 얻지 못한 트란스케이의 수도) 근교의 마비쉬에서 코사어를 사용하는 템부(Tembu)족 추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의 이름인 '로히흘라흘라(Rohihlahla)'는 골치덩어리라는 뜻이다. 1927년 부친의 사망으로 삼촌이 만델라를 맡아서 키웠다. 1939년에 흑인대학인 포트헤어 대학교에 입학한 만델라는 이 대학 육상종목의 대표선수로 활동하였다. 동맹휴업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포트헤어 대학교에서 제적을 당한 뒤, 그는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조벅으로 갔다.
무장투쟁을 지도한 혐의로 1962년 체포되어 5년 징역형을 살고 있던 만델라는 1963년 8월 5일 MK사건의 주범으로 7명의 동료들과 함께 재차 소추되어 1964년 6월 11일 열린 이른바 '리보니아 재판'에서 만델라를 포함한 8명 전원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MK의 본부가 있던 리보니아의 릴리스리프를 급습한 백인경찰이 다량의 무기를 발견하자 만델라는 삼차 소추되어 1964년 10월 9일 열린 재판에서 사형이 구형되었다. 1965년 4월 열린 변론공판에서 만델라는 모두진술을 통해 '인종주의 철폐와 민주화를 위해서 필요하다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이 모두진술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켜 전 세계인들로 하여금 그를 위한 구명운동에 나서게 하였다. 같은 해 6월 44세의 만델라는 종신형이 확정되어 7명의 동료들과 함께 케이프 타운 앞바다에 있는 로벤 아일랜드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국제사회의 계속되는 비판과 압력에 굴복하여 F. W. 데 클레르크(Frederik Willem de Klerk, 1936~) 남아공 대통령은 1990년 2월 11일 마침내 27년 동안이나 감옥에 갇혀 있었던 71세의 만델라를 석방했다. 석방된 만델라는 3월 2일 ANC의 부의장에 선출되었고, 1991년에는 오랜 동료인 올리버 탐보에 이어 ANC 의장에 취임하였다.
만델라는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의 철폐와 민주헌법의 제정을 위해 데 클레르크 정부와 긴밀하게 협조했다. 1993년 만델라와 데 클레르크는 남아공에서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를 종식시키고, 다인종이 참여하는 민주정부 수립과 평화로운 사회로의 이행을 부단히 추구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1994년 4월 남아공 역사상 처음으로 다인종이 참여한 민주적 자유총선에서 넬슨 만델라가 이끄는 ANC가 62%의 압도적 지지를 얻어 하원의원 400석 가운데 252석을 차지하였고, 이전의 여당이었던 국민당은 20%의 지지로 82석, 잉카타자유당(Inkatha Freedom Party, IFP)은 10.5%의 지지로 43석을 차지했다. 만델라는 남아공 최초의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오랜 세월 악명을 떨쳤던 아파르트헤이트는 종말을 고했다.
대통령에 취임한 후 만델라는 1995년 '진실화해위원회(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 TRC)'를 설치하고 과거사 정리를 위한 조치들을 취했다. 이 위원회는 아파르트헤이트 시절에 일어난 인권침해 사건들을 조사했다. 만델라는 흑인들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 경제개발 계획을 도입했다. 또 가난한 흑인들을 위해 주택의 보급을 늘리고 누구나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1996년 만델라는 남아공의 새로운 민주주의 헌법 제정을 진두지휘했다. 그는 1997년 ANC 의장에서 물러났고, 1999년에 임기가 만료되자 재선 가능성이 확실했음에도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그 해 6월 정계에서 은퇴했다. 만델라는 지금도 여전히 아프리카 대륙의 민중과 다른 여러 나라의 피압박 민중들에게 희망의 등불이 되고 있다.
'험난한 자유의 길(No Easy Walk to Freedom, 1965)'과 '나는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I Am Prepared to Die, 제4판, 1979)'에는 만델라의 글과 연설이 다수 수록되어 있다. 1994년 그는 자서전 '자유를 향한 긴 여정(Long Walk to Freedom)'을 출판했다.
앤드류 음랑게니는 1926년 소웨토의 프로스펙트 타운쉽(Prospect township)에서 14명의 형제자매 중 9번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쌍둥이 여동생이 태어난 직후인 1936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10살이 되어서야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지만, 가족을 부양하는 어머니를 돕기 위해 겨우 12살의 나이에 노동을 해야 했을 만큼 가정형편이 어려웠다. 학교가 끝나면 그는 조벅의 골프장에서 캐디로 일했다. 1942년에는 소웨토 핌빌레(Pimville)에 살고 있던 그의 형이 수업료를 도와주었다. 음랑게니는 성 피터스(St. Peters) 고등학교에 다니던 1946년에 졸업 자격시험에 합격했다.
음랑게니는 가난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학업을 중도에 포기해야만 했다. 1946년부터 그는 여러 공장들을 전전하며 노동을 했는데, 거기서 노동착취를 경험했다. 그는 푸트코(Putco)사의 버스 기사로 일할 때 보다 나은 노동조건과 최저 생활 임금을 위한 파업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51년 그는 ANCYL에 가입했고, 1954년에는 ANC에도 가입했다. 인민회의 당시 그는 소웨토의 클리프타운 지부 대의원을 맡기도 하였다. 1958년부터 1960년까지 그는 ANC에 충실히 복무했으며, 1961년에는 군사훈련을 받기 위해 국외로 나갔다.
1963년에 귀국한 그는 신병을 모집하고 군사훈련을 시켰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리보니아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는 법정에서 '전세계 여러 나라의 지도자들이 백인정부에 대해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폐지할 것을 아무리 설득하고, 또 국제연합(UN)이 남아공에 반대하는 결의안을 아무리 통과시켜도 결과는 소용없었다. 백인정권은 민중의 요구를 외면하고 오로지 정치 지도자들을 감옥에 쳐넣거나 가정을 파괴하는 만행만 저질렀을 뿐이다.'라고 진술했다. 그는 종신형을 선고받고 넬슨 만델라 등 다른 동료들과 함께 26년간 수감되었다.
1980년대 음랑게니는 만델라 등 소수의 지도자들과 함께 폴스무어 교도소로 이감되었다. 교도소에 있는 동안 그는 남아프리카 대학(University of South Africa)을 졸업하고 정치학 학사학위를 받았다. 음랑게니는 ANC와 백인정부가 협상을 시작했을 때 석방되었다. 그는 확정판결 당시 결혼한 조한나 져니(Johanna Junny)와의 사이에 10명의 자녀를 두었다. 1994년 총선에서 음랑게니는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그의 아내는 2001년에 죽었다.
1933년 케이프 타운에서 태어난 데니스 골드버그는 남아공 사회주의 운동가로서 반 아파르트헤이트 저항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반 아파르트헤이트 운동의 핵심 인물들과 수형생활을 줄곧 함께 하였다.
데니스 골드버그는 케이프 타운 대학교 토목공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1948년에 들어선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에 의해서 금지된 단체인 SACP 당원으로서 민주주의자회의 구성에 다른 백인 회원들과 함께 참여하여 후에 지도자가 되었다. 민주주의자회의는 ANC를 비롯한 인종차별을 반대하는 다른 여러 저항운동 단체들과의 '회의체 연합(Congress Alliance)'이었다. 골드버그는 1960년 재판도 없이 4개월 동안 구금되었다.
1961년 지하무장조직인 MK가 창설되었을 때 골드버그는 기술책임자를 맡았다. 그는 1963년 MK 총사령부가 있던 릴리스리프에서 체포되어 1964년의 리보니아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리보니아 재판에서 종신형을 받은 MK의 유일한 백인이었다.
엘리아스 모초아레디는 1924년 세쿠쿠네란트(Sekhukuneland)의 네보(Nebo)에서 8명의 자녀 중 세 번째로 태어났다. 그는 17세 때 직업을 구하기 위해 조벅으로 이주했다. 그는 곧 노동조합에 가입해서 남아공노총(Congress of South African Trade Unions, COSATU)의 창립에 주도적 역할을 맡았다.
모초아레디는 SACP와 ANC의 종신회원이었다. 그는 1952년의 악법무시운동을 비롯해서 수많은 사회운동에서 중심적 역할을 맡았다. 그 해 그는 처음으로 구금되었으며, 1960년의 비상사태 때는 4개월간이나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다. 감옥에서 석방되자 그는 지하로 들어가 MK를 위해 일을 했다. 그도 역시 리보니아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고 로벤 아일랜드 감옥에서 26년 동안 갇혀 있었다. 석방된 뒤에는 ANC의 전국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월터 시술루는 ANC의 가장 중요한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 1940년대 그는 ANCYL의 창설자였으며, 반 아파르트헤이트 투쟁에서 ANC를 전투적 저항으로 이끌었다. ANC 사무총장이 된 그는 1950년대 악법무시운동의 중요한 조직가이자 전략가였다. 많은 세월 정치적 수형자였을지라도 그는 아파르트헤이트가 종식될 때까지 매우 큰 영향력을 유지했다.
그는 아파르트헤이트 정책 때문에 유럽인 학교는 물론 흑인 학교에도 입학할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조벅으로 옮겨간 뒤에야 그는 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는 조벅에서 유수프 다두 박사, 아이 씨 미어(I.C. Meer), 모울비 카차리아(Moulvi Ismail Ahmed Cachalia, 1908~2003), 유수프 카차리아(Yusuf Cachalia, 1915~1995), 제이 엔 싱(J.N. Singh) 등 트란스발 인도인 회의(Transvaal Indian Congress, TIC) 지도자들의 영향을 받았다. 그 결과 그는 12세에 이미 남아프리카 공산주의자 청년동맹(Young Communist League of South Africa, YCLSA)에 가입했을 정도로 정치적 행동가가 되어 있었다. 그는 1941년 인도인의 백인 거주지역으로의 유입을 막기 위해 제정된 경계법(Pegging Act)에 반대하는 불복종 저항운동에서 자원봉사을 하거나 홍보 전단지를 돌리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 그는 비(非) 유럽인 연합전선(Non-European United Front)의 반전운동에 합류했다.
1989년 10월 15일 카쓰라다는 말바, 음랑게니, 모초아레디, 시술루, 제프 마세몰라(Jeff Masemola), 윌튼 음콰이(Wilton Mkwayi, 1923~2004), 오스카 음페타(Oscar Mpetha, 1909~1994) 등과 함께 석방되었다. 1990년 2월 ANC가 해금된 뒤, 카쓰라다는 ANC와 SACP의 임시 지도위원회에서 일했다. 1991년 그는 ANC 전국집행위원(National Executive Committee)이 되었고, 같은 해 ANC 홍보책임자뿐만 아니라 웨스턴 케이프 대학의 마이부예 센터(Mayibuye Centre)의 펠로우로 임명되었다.
카쓰라다는 1992년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로 하지(Hajj) 순례를 떠났다. 1994년 총선에서 카쓰라다는 ANC 후보로 출마하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1994년 9월에는 의회를 담당하는 자리로 신설된 만델라 대통령의 정치 고문에 임명되었다. 1999년 6월 그는 의회정치를 떠났다.
당시 트란스케이의 경제는 곡물과 직물의 수출에 의존하다가 대규모의 금과 다이아몬드 발견으로 광업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자본주의 경제로 전환되던 시기였다. 이 시기의 경험은 그로 하여금 백인 자본가들에 의한 이주노동자의 착취 문제에 대한 생생한 기록과 분석을 가능케 했다. 어린 시절 음베키는 주로 선교사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고반이라는 이름도 그가 동 케이프(Eastern Cape) 주에 있는 학교에 들어갔을 때, 러브데일 대학(Lovedale College)의 설립자인 스코틀랜드 선교사 에드워드 고반(Edward Govan)의 이름을 딴 것이다.
1925년 초 음베키는 남아프리카 흑인 노동자에 대중적 기반을 둔 최초의 노동자 운동이었던 산업상업노동조합((Industrial and Commercial Workers Union, ICU)의 활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929년 초에 옮겨간 조벅에서 그는 금광산에서 일하는 흑인 노동자들의 절망적인 고통과 인종차별을 목격하고, '또 한번 나는 아프리카 흑인들의 가난을 보았다. 내가 살았던 곳은 어디에서나 흑인에 대한 경찰의 불심검문과 체포가 항상 일어났다. 경찰은 흑인의 통행증을 검사하거나, 불법 음주를 적발하려고 했다. 이에 나는 분노했고,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를 끝장내는 투쟁에 참여하기로 결심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음베키는 고등학교 시험을 통과하고 동 케이프 주의 포트 하레 대학교(Fort Hare University)에 입학해서 1936년 정치학과 심리학 학위와 교사 자격증을 취득하였다. 거기서 그는 흑인 투쟁 지도자들과 만났으며, 짧은 기간 동안 교사 일도 했다. 1938년 그는 교사를 그만두고 트란스케이로 돌아가 저술을 하면서 지역사회를 위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또 무역노동자 노동조합의 조직을 위해서 힘썼다.
음베키는 트란스케이에서 '지역 잡지(Territorial Magazine, 후에 'Inkundla Ya Bantu'로 이름을 바꿈)'라는 이름의 잡지를 발간했다. 1939년에는 '성장하는 트란스케이(The Transkei in the Making)'를 출판했다. 그는 소작농들이 스스로 협동체제를 만들어서 생산력을 높일 수 있도록 돕기 위해 협동농장에 관한 소책자를 발행하기도 했다. 흑인들을 정치적으로 선동하고 조직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도왔다는 점에서 음베키가 실용적인 혁명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저술과 정치적 활동을 통해 그는 흑인들 사이에 '인민을 위한 사람'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1941년까지 음베키는 '트란스케이 투표자 연합(Transkei Voters Association)'과 '트란스케이 연합(Transkei Organised Bodies)', 그리고 '붕가 (the Bunga)'라는 이름의 '지방정부 협회(Territorial Authorities General Council)' 등 여러 단체에 가입해서 열성적인 활동을 했다. '붕가'는 음베키를 영입하고 회장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붕가'는 트렌스케이에서 매우 제한적인 통제권만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이들 조직을 통해 활동하면서 그는 이 기간에 광범위한 연락망을 구축했다. '뉴 에이지' 내 '동쪽 데스크(Eastern desk)'의 음베키와 직원들은 남아프리카 해방운동에 대한 흑인들의 눈을 뜨게 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특히 1956년에서 1960년까지 농촌에서 벌어진 악덕 지주에 대한 소작농민들의 치열한 투쟁에서 정치적 지도력을 발휘했다. 제루스트(Zeerust)와 세쿠쿠니란트(Sekhukhuniland), 줄루란트(Zululand) 등 농촌의 여러 지역에서는 정부에 편향적인 기관장의 과세와 세금 인상, 토지 재활용 계획, 사회개혁 운동가들에 대한 체포와 추방, 강제 퇴거 등에 반대하는 치열한 항쟁이 일어났다. 폰도란트(Pondoland) 지방에서는 소작농민들이 조직한 산악위원회인 '인타바(Intaba)'를 중심으로 무장투쟁까지 전개하였다. 이에 대해 백인정부의 무장조직은 중무장 차량과 헬리콥터를 동원하여 테러를 가했다. 세쿠쿠니란트에서는 여성을 포함한 16명의 소작농들이 처형되었고, 폰도란트에서는 5천 명 이상이 체포되거나 구금되었다. 다른 지역에서도 수백 명이 체포와 투옥, 추방을 당했다.
그러자 사법부 장관이었던 존 포르스테르(John Vorster, 1915~1983)는 1962년 11월 '뉴 에이지'의 발행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다. 포르스테르는 신문의 발행 금지에서 한 발 더 나아가 편집자와 기자, 기고자들에 대해서도 신문의 준비는 물론 편집, 인쇄, 배포와 관련된 어떤 일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이러한 조치는 10년의 역사를 가진 '가디언(The Guardian)'지에도 내려졌다.
언론을 통한 운동이 실패하자 음베키는 지하로 들어갔다. ANC가 비폭력 투쟁을 포기하고 무장투쟁으로 노선을 전환하는 결정을 내렸을 때 그는 지하조직의 핵심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ANC 동 케이프 주 지부장인 동시에 SACP의 지도자였다. 1961년 12월 16일 백인정권을 전복하려는 MK의 무장투쟁이 처음으로 발생하여 남아프리카 전체를 뒤흔들었다. 이 사건의 주모자로 그는 동료들과 함께 리보니아 재판에 회부되었다. 재판을 기다리는 동안 그는 화장지 두루마리에 1956년부터 1960년 사이 남아프리카의 여러 농촌 지역에서 발생한 압제자에 대한 농민들의 영웅적인 저항과 격렬한 투쟁을 그린 서사시 '남아프리카: 소작농들의 반란(South Africa: The Peasants’ Revolt)'을 썼다. 화장지 두루마리로 퍼져나간 이 책으로 인해 그는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암스테르담 대학은 그에게 사회과학 명예 박사학위를 수여했다. 리보니아 재판에서 그는 테러와 반역죄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만델라와 시술루 등 ANC 지도자들과 함께 로벤 아일랜드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1980년 6월 26일 ANC 사무총장 알프레드 은조(Alfred Nzo, 1925~2000)는 고반 음베키에게 ANC의 최고 영예인 이시트왈란트웨 메달을 수여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음베키는 로벤 아일랜드에서 종신형을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 상을 받을 수 없었다.
고반 음베키는 로벤 아일랜드 교도소에서 24년 동안 수감되어 있다가 1987년 11월 5일 석방되었다. 그는 1994년부터 1997년까지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 이후 입법기관의 부의장, 1997년부터 1999년까지 상원(National Council of Provinces, NCOP)의 의장직을 맡았다.
음베키는 그의 정치적 업적에 대하여 국제적인 인정을 받고 있다. 스코틀랜드 소재 글래스고 칼레도니안 대학교(Glasgow Caledonian University)의 헬스 빌딩에는 그의 이름이 붙어 있다. 고반 음베키 헬쓰 빌딩(The Govan Mbeki Health Building)은 2001년 그의 아들 타보 음베키의 참석하에 문을 열었다.
음베키의 저서에는 '남아프리카: 소작농들의 반란' 외에 '남아프리카 해방투쟁 (The Struggle for Liberation in South Africa, 1992)', '정오의 일몰(Sunset at Midday 1996)' 등이 있다.
레이몬드 음라바는 반 아파르트헤이트 운동가로 ANC의 지도자였으며, SACP의 종신 당원이었다. 그는 리보니아 재판에서 만델라 등 동료들과 함께 종신형을 선고받고 교도소에 25년간 수감되었다. 그는 늘 친절한 매너로 사람들을 대했기에 '레이 아저씨(Oom Ray)'라는 별명을 얻었다. 만델라 등 정치범들이 수감되었던 감방의 실제 모형
박물관에는 넬슨 만델라 등 흑인 해방운동 지도자들이 수감되어 있던 로벤 아일랜드 교도소의 실제 감방과 똑같은 크기로 감방모형을 만들어 놓았다. 넓이는 약 1.5㎡ 정도 될까! 육중한 철문이 열려 있는 회색 감방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숨이 턱 막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저 좁디 좁은 독방에 거의 반세기를 갇혀 있으면서도 인종차별이 사라진 남아프리카를 향한 희망과 투쟁의지를 결코 잃지 않았던 ANC 지도자들에 대한 경외감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솟아 오른다. 남아공 반 아파르트헤이트 저항운동 지도자들을 처형했던 131개의 밧줄
감방이 있는 건물 천장에는 아파르트헤이트 체제하에서 저항운동 지도자들을 처형했던 131개의 밧줄이 매달려 있다. 저 밧줄 가운데 하나가 스윽 내려와 내 목에 걸릴 것만 같은 섬뜩한 느낌이 전신을 타고 흐른다. 백인정권은 아파르트헤이트 공포정치를 통해 수많은 저항운동 지도자들에 대한 '정치적 살인'을 저질렀다. 공식 발표에 따르면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에서 131명의 반 아파르트헤이트 저항운동 지도자들이 처형되었다. 다른 많은 사람들은 자살을 시도하다가 저지당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죽어갔다.
경찰의 발포로 사망한 헥터 피터슨과 그의 누이
소웨토 봉기를 증언하는 사진들
샘 은지마
소웨토 봉기를 증언하는 전시실에 들르자, 맨 먼저 경찰의 발포로 숨진 어린 흑인 학생의 사진이 눈길을 잡아끈다. 남아공의 반 아파르트헤이트 저항운동에 있어서 소웨토 봉기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조벅의 '서남쪽 마을(South Western Township)'이란 뜻의 소웨토(Soweto)는 남아공 백인정권에 의한 인종차별 정책의 산물이다. 백인정권은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에 따라 조벅 남서쪽 16km 떨어진 지역을 흑인들만의 집단 거주지로 지정하였다. 1976년 시위 초기 때만 해도 소웨토에는 약 8만 명의 흑인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 후 계속해서 이주민들의 급격한 증가로 2001년 당시 89만 명을 헤아렸다. 흑인들은 허가증을 받으면 이곳에서 33년간 거주할 수 있었으나, 집을 소유할 수 있는 권리는 없었다. 이들은 양철로 만든 벽에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일명 '박스 하우스' 한 채에 평균 10명이 살았다.
백인 관리자들이 통치하는 소웨토는 독일 히틀러 치하의 유태인 집단 거주지인 게토(ghetto)와도 같은 것이었다. 소웨토의 흑인 게토에는 군대와 경찰이 상시 주둔했으며, 흑인들은 늘 신분증을 소지하고 다녀야만 했다. 흑인들은 낮에는 조벅에서 백인들의 노동자와 하인으로 일하고 저녁이 되면 소웨토로 돌아와야만 했다. 소웨토의 흑인이 없으면 백인들의 천국 조벅의 경제는 잠시도 유지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1976년 남아공 백인정권은 흑인 학교의 모든 과목을 아프리칸스로 가르치도록 하는 결정을 내렸다. 아프리칸스는 17세기 네덜란드계 백인이 이주하면서 전파한 언어로 흑인들에게는 차별과 억압의 상징이었다. 이런 정책은 민족 고유의 언어를 말살시키기 위해 폴란드에서 모국어 사용을 금지시킨 제정 러시아나 조선의 학교에서 조선어 사용을 금지시킨 일본 제국주의의 야만적인 정책과도 그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었다. 줄루어, 코사어 등 부족 고유의 언어로 교육을 받아오던 소웨토 지역의 초, 중, 고 학생들은 백인정권의 언어정책에 반발하여 6월 16일 올란도 웨스트(Orlando West)에 모여 평화적인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이 사진은 또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백인정권의 폭력성을 목격한 국제사회는 거센 비판과 함께 인종차별의 철폐를 요구하였다. 이 한 장의 사진으로 그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소웨토는 인종차별의 부당성을 전 세계에 알리는 자유와 인권, 그리고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독일의 제1공영방송인 북독일방송(Norddeutscher Rundfunk, NDR)의 도쿄 특파원 위르겐 힌츠페터(Jüergen Hinzpeter)의 목숨을 건 보도에 의해 1980년 5월 18일 일어난 광주민중항쟁의 참상이 전 세계인들에게 알려졌듯이..... 1976년의 소웨토는 바로 1980년의 광주였던 것이다.
소웨토는 이제 남아공만의 것이 아니라 전 세계인들에게 모든 차별과 억압에 대한 저항과 투쟁의 성지로 떠오르고 있다. 소웨토는 전 세계적으로 그 유례가 없는 노벨 평화상 수상자를 두 명이나 배출한 땅이기도 하다. 데즈먼드 투투 대주교(1983년)와 넬슨 만델라(1993년) ANC 전 의장이 바로 그들이다. 그리하여 소웨토는 이제 차별과 억압에 대한 저항과 투쟁의 성지일 뿐만 아니라 가해자들에 대한 용서와 인종간 화해의 상징으로 전 세계인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1991년 아프리카 단결기구(OAU)는 소웨토 학생들이 봉기한 6월 16일을 ‘아프리카 어린이날’로 지정했다. 1976년으로부터 29년의 세월이 흐른 2005년 헥터 피터슨이 쓰러진 자리에 소웨토 봉기와 그의 죽음을 기리는 박물관이 건립되었다. 넬슨 만델라는 남아공의 첫 흑인 대통령에 당선된 뒤 6월 16일을 국경일로 선포하였으며, 지금은 '청년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한 장의 사진이 백 마디의 웅변보다 큰 힘을 발휘할 때가 있다. 나아가 사진 한 장이 때로는 역사를 바꾸기도 한다. 월남전에 종지부를 찍게 한 사진이 두 장 있다. 한 장은 1968년 남베트남 경찰국장이 길거리에서 직접 권총으로 베트콩 포로의 머리를 쏴서 죽이는 끔찍한 장면을 찍은 사진이다. 이 사진은 남베트남 정권의 잔학성과 비인간성을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것이었다. 또 한 장은 미 공군 폭격기의 소이탄 폭격으로 불바다가 된 마을에서 아홉 살의 어린 소녀가 벌거벗은 채 비명을 지르며 달려나오는 사진이다. 이 사진 한 장으로 인해 미국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반전운동이 거세게 일어나 마침내 베트남 전쟁에 종지부를 찍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한국의 민주화운동 역사에 있어서도 이같은 사례가 있다. 1987년 6월 10일 민주항쟁 당시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숨진 연세대생 이한열이 피를 흘리며 동료 학생에 의해 옮겨지는 사진은 신군부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과 노태우 민정당 대통령 후보를 굴복시키고 직선제 개헌을 쟁취하는 계기가 되었었다. 외국의 인종차별 전시실
박물관에는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서 행해진 유태인 박해를 비롯해서 세계 각국의 인종차별을 고발하는 전시실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다. 아파르트헤이트는 남아공에서만 행해진 것이 아니다. 아파르트헤이트는 형태를 달리 해서 세계 각국에서 행해졌고, 행해지고 있으며, 또 앞으로도 행해질 것이다. 인간이 욕망을 가진 존재라는 생물학적인 조건을 초월하지 못한다면 말이다. 또한 차별과 억압이 존재하는 곳이라면 그곳이 바로 아파르트헤이트가 행해지고 있다는 증거다. 그러나 차별과 억압이 사라진 나라가 지구상에 있던가!
과거에 행해진 아파르트헤이트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우선 떠오르는 것은 중세 기독교회가 저지른 마녀사냥과 이교도 박해다. 파렴치하게도 신의 이름으로 행해진 이 잔혹한 아파르트헤이트의 중심에는 기독교 성직자들이 있었다. 인디언들이 평화롭게 살고 있던 땅을 무단 점령하고 그들을 보호구역으로 몰아냈던 미국, 135년 전만 해도 흑인 노예제 국가였던 바로 그 미국도 아파르트헤이트 국가였다는 오명을 씻을 수 없다. 1910년 조선을 강점하고 조선인을 차별한 일본, 2차대전 당시 징병과 징용으로 끌려간 재일 한국인과 그 후손들을 차별하고 있는 일본도 아파르트헤이트 국가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밖에도 수백년 동안 북아일랜드의 독립운동을 탄압한 영국, 유고슬라비아 연방 해체 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서 인종청소라는 만행을 저지른 세르비아, 식민지 종주국이었던 벨기에와 소수부족 후투족이 다수부족인 투치족을 차별했던 아프리카의 르완다와 부룬디 등 아파르트헤이트가 존재했던 나라들은 수없이 많다.
아파르트헤이트에는 아직도 지구촌 곳곳에서 사라지지 않고 망령을 떨치고 있다. 남아공에 ANC 흑인정권이 들어선 뒤 흑인들이 일으킨 쿠쫑(Khutsong) 봉기는 아이러니칼하게도 역 아파르트헤이트의 결과였다. 지방정부의 경계선 획정에 따라 쿠쫑을 포함한 메라퐁(Merafong) 시는 가우텡(Gauteng) 주 웨스트 란트(West Rand) 군에서 노스 웨스트(North West) 주 서던(Southern) 군으로 편입되었다. 쿠쫑의 주민들은 부유한 가우텡으로부터 가난한 노스 웨스트로의 편입을 반대했다. 2006년 3월 1일 치뤄진 지방정부 선거에서 단 123명의 주민만 투표에 참가했다. 주민들은 프리토리아(Pretoria) 최고법원에 청원서를 제출함과 동시에 ANC 후보들의 자택에 화염병을 투척하거나 도로를 점거하고, 지방정부 재산을 파괴하는 등 저항을 하였다. 흑인정권은 백인정권 시절 겪었던 아파르트헤이트의 뼈저린 고통을 벌써 잊은 것인가!
티베트인들의 독립 요구에 대한 중국 정부의 무자비한 탄압도 분명히 아파르트헤이트다. 식량부족으로 3백만명이 굶어죽고, 지금도 탈북자가 속출하고 있는 북한은 어떤가? 노동당과 군부를 주축으로 한 김정일 세습 독재정권이 피지배 인민들을 철저하게 통제하는 북한은 지구상에 현존하는 최대의 아파르트헤이트 게토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무차별 탄압하고 차별하는 이스라엘은 어떤가? 과거 독일에 절망적인 유태인의 게토가 있었다면, 지금 이스라엘에는 절망적인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게토가 있다. 이스라엘은 지구상의 대표적인 아파르트헤이트 국가 중 하나다. 투투 대주교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인권유린을 또 다른 형태의 아파르트헤이트라고 비판한 바 있다. 이스라엘은 이제 더 이상 2차대전 당시 독일이 자행했던 유태인 학살을 비난할 자격이 없다! 이스라엘의 강도 높은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으로 신음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참상을 고발하는 자료가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지 않은 점이 매우 아쉽다.
한국도 과거 아파르트헤이트 국가였다는 부끄러운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한국에서 아파르트헤이트의 시초는 고려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에서 찾을 수 있다. 훈요십조 제8조에서 왕건은 차령산맥 이남을 배역의 땅으로 간주하고, 이곳 출신의 인재들을 벼슬에 등용하지 말라는 유훈을 내렸다. 이후 호남을 비롯한 기타 지역에 대한 차별이 뿌리 깊게 이어져 왔다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것은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이후 영남인맥이 고려, 조선시대를 거쳐 현대의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정권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한반도의 지배세력으로 존재해 온 것과 관계가 있다.
1948년 미군정하의 국군과 경찰, 서북청년단 등 우익단체들에 의해 3만명이 학살된 4.3 제주민중항쟁, 1950년 국군과 경찰에 의해 20만명이 희생된 국민보도연맹원 학살사건은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보다도 훨씬 더 잔혹한 아파르트헤이트가 존재했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한국전쟁 이후 역대 반공정권이 실시한 월북자와 부역자에 대한 연좌제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분노와 좌절을 안겨준 아파르트헤이트였다. 1980년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군사반란을 일으킨 신군부에 의해 191명(비공식 집계 1000명)이 학살되고 852명이 부상당한 5.18 광주민중항쟁은 부도덕한 지배세력에 의한 폭압적인 아파르트헤이트의 결과였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에서 아파르트헤이트는 사라졌는가? 지금도 아파르트헤이트는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위해서, 또는 다른 이유로 한반도를 떠나 만주 등 중국으로 이주했던 조선족(조선계 중국인)과 연해주 등 구 소련으로 떠났던 고려인(조선계 독립국가연합인), 징병이나 징용으로 끌려간 재일 한국인 등 해외동포에 대한 차별은 국적의 유무를 떠나 비인도적인 아파르트헤이트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을 보라! 이스라엘은 건국 후 전 세계의 유태인들을 국적이나 피부색에 관계없이 같은 동포로서 동등하게 받아들였다. 그 가운데는 아프리카에서 온 흑인 유태인들도 있었다.
한국의 경제가 발전하면서 일자리를 찾아 동남 아시아를 비롯한 여러 나라들로부터 온 외국인 노동자는 2004년말 현재 약 42만명에 이른다. 최근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임금착취와 인권침해가 사회문제화되고 있다.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차별과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가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한국도 과거 경제가 어려울 때 많은 노동자들이 외국으로 이주한 역사가 있다. 1960년대부터 한국은 외화벌이를 위해 정부가 앞장서서 8000명의 탄광노동자와 11000명의 간호사들을 선발해서 독일로 보냈다. 파독광부들에 의하면 한국인 광부들은 독일인 광부들과 비교했을 때 제도에 의한 차별은 없었다고 한다. 간혹 사람에 의한 차별은 있었지만...... 우리는 독일을 본받아야 하지 않을까! 한국에 온 이주노동자들로부터 '때리지 마세요', '월급 주세요', '우리는 노예가 아니에요'라는 절규를 들을 때마다 나는 한국인으로서 심한 부끄러움을 느낀다. 아직도 아파르트헤이트가 행해지고 있는 국가의 국민이라는 것을.....
종교에 있어서도 아파르트헤이트는 분명 존재한다. 특히 일부 기독교 광신자들에 의한 타종교 배척행위는 우려를 넘어 위험한 수준에까지 와 있다. 기독교 광신자들은 학교에 세운 국조 단군상의 목을 자르거나 사찰의 불상을 훼손하는 등 불법적인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 또 민족 고유의 신앙인 무속을 미신이라고 폄하하고 공격한다. 다수 또는 힘센 종교가 소수 또는 약한 종교를 박해하는 것은 명백한 종교적 아파르트헤이트다. 나는 신부나 승려, 무당, 목사를 다 똑같은 성직자로 본다. 사라져야 할 것은 단군상이나 불상, 무속이 아니라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테러를 일삼는 기독교 광신자들이다.
나는 학교에서 종종 일어나는 집단 따돌림인 '왕따'에서 아파르트헤이트의 싹을 보게 된다. 한국은 전 세계적으로 유례없이 혈연과 지연, 학연을 바탕으로 한 각종 계나 동창회, 동문회, 종친회, 향우회, 동지회 등이 매우 활성화되어 있는 나라다. 그런데 이들이 본래의 순수성을 잃고 폐쇄적이고 배타성을 띠게 된다면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는 패거리로 전락할 가능성이 많다. 한국은 이미 패거리 문화의 폐해가 사회 곳곳에 깊숙이 만연되어 있는 나라다. 패거리는 아파르트헤이트의 또 다른 모습이다. 그래서 나는 혈연, 지연, 학연에 따라 이루어지는 모임이나 단체에는 가능한한 참여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참여하게 되더라도 패거리로 전락하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
아파르트헤이트란 강자가 약자에게 가하는 폭력적인 차별과 억압이며, 다수가 소수에게 가하는 비인도적인 격리와 소외다. 한국은 헌법에는 명문화되어 있지만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나라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탄압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는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에 전적으로 찬성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탄압에는 반대한다. 사상의 자유는 그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천부적인 것이기에..... 사상의 자유에 대한 침해와 통제야말로 가장 악질적인 아파르트헤이트다.
아파르트헤이트가 존재하는 나라는 인간다운 사회가 아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려면 어떠한 형태의 아파르트헤이트도 타파해야 한다. 인류여, 지구상에서 아파르트헤이트가 사라지는 그날까지 끊임없이 저항하자. 그리고 우리 자신이 아파르트헤이터(Apartheider, 필자의 신조어)는 아닌지 되돌아 보자.
남아공 최초의 다인종이 참여한 민주주의 선거
박물관의 마지막 전시실에 이르면 1994년 4월 남아공 최초로 다인종이 참여한 민주적 총선에서 한 투표장을 공중촬영한 사진이 걸려 있다. 저 끝없이 길게 늘어선 사람들의 행렬을 보라! 이 한 장의 사진에서 인종차별을 철폐하고 민주적 정부를 수립하려는 남아공 흑인들의 열망과 의지가 얼마나 강렬한 것이었는지를 여실히 느낄 수 있다.
대통령에 취임한 넬슨 만델라는 남아공의 모든 흑인과 백인, 컬러드, 아시아인이 조화를 이룬 무지개 나라(Rainbow nation)의 건설을 위해 진력했다. 만델라는 백인정권에 의해 27년간이나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남아공의 미래를 위해 용서와 화해의 전도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만델라는 백인들의 독재와 마찬가지로 흑인들의 독재도 용납되어서는 안 되며, 보복은 또 다른 보복을 불러올 뿐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잊을 수는 없지만 용서할 것이다(I can't forget but I will forgive)'라는 말에 휴머니즘에 기초한 그의 화해정신이 잘 드러나 있다. 박물관 로비 벽에 걸려 있는 '용서하자, 그러나 잊지는 말자(Forgive, but don't forget)'는 글귀에도 용서와 화해의 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 만델라는 신중한 언행으로 헌법을 준수하고, 다당제 의회제도에 기초한 민주주의를 정착시킴으로써 남아공의 정치적 안정을 이룰 수 있었다.
남아공을 모든 인종이 평화롭게 어울려 살아가는 무지개 나라로 만들려는 만델라의 꿈은 데즈먼드 투투 대주교를 만나면서 구현될 수 있었다. 사실 '무지개 나라'는 아파르트헤이트가 철폐된 후 1994년에 투투 대주교가 처음 사용한 말이었다. 만델라가 대통령에 취임한 뒤 1996년에 설치된 '진실화해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은 투투 대주교는 '고백 없이 용서 없고, 용서 없이 미래 없다'면서 흑인과 백인 모두를 설득했다. 그러나 그는 역사의 진실은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백인정권이 저지른 인종차별과 인권침해 행위에 대해서 진실은 밝히되 처벌은 하지 말자고 역설했다. '용서보다 더 큰 힘은 없다'는 진리를 보여준 만델라 대통령과 투투 대주교의 '용서와 화해'의 정신은 350년간 악명을 떨친 아파르트헤이트를 종식시키고, 남아공을 다문화 무지개 민족(Rainbow people)이 어울려 사는 무지개 나라로 가는 기틀을 마련했다. 그에 걸맞게 남아공의 국가 구호도 '다양성의 통일(Unity in Diversity)'이며, 6가지 색을 사용한 남아공 국기는 여러 가지 색이 조화되어 하나로 통합되는 것을 상징한다고 해서 ‘무지개 국기’라고 부른다.
남아공은 인종차별이 폐지되고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가 들어섰지만 아직도 흑백간의 갈등과 빈부격차, 흑인 부족간의 정체성 차이로 인한 갈등이 언제든 사회문제로 폭발할 가능성이 남아 있다. 남아공이 앞으로 정치적 안정을 이루고 아름다운 무지개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흑백간 또는 흑흑간 경제적 불평등을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아공이 경제정의를 실현하여 백인과 흑인, 컬러드, 아시아인들이 서로 어울려 평화롭게 공존하는 나라가 되기를 바란다. 마치 일곱 가지 색이 한데 어울려 저 하늘에 아름다운 무지개를 만들어 내듯이......
박물관을 나오면서 남아공의 흑인해방운동과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그 유사점이 매우 많다는 생각이 든다. 남아공의 압제자가 백인정권이었다면 한국의 압제자는 군부독재정권이었다. 남아공에 소웨토 봉기에서 첫 희생자가 됨으로써 흑인해방투쟁의 도화선이 되었던 헥터 피터슨이 있었다면, 한국에는 1960년 이승만 독재정권의 붕괴와 미완의 혁명인 4.19혁명의 기폭제가 된 마산항쟁의 희생자 김주열과 1987년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사망함으로써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된 이한열이 있었다. 남아공의 반(反)아파르트헤이트운동을 ANC가 이끌었다면, 한국의 반독재민주화운동은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과 전민련의 발전적 해체로 새로이 결성된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전국연합)이 이끌었다. 남아공에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과 데즈먼드 투투 대주교가 있다면, 한국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문익환 목사가 있다. 남아공의 흑인해방운동에 있어서 그 중심세력이 양심적 백인과 흑인들이었다면, 한국의 반독재민주화운동의 중심세력은 양심적 지식인과 학생들이었다. 남아공에 샤퍼빌 폭동과 소웨토 봉기가 있었다면, 한국에는 부마항쟁과 광주민중항쟁이 있었다.
아파르트헤이트 박물관은 반인류적인 백인정권에 저항했던 흑인들이 무수히 흘린 피의 댓가로 쟁취한 남아공의 인종차별 철폐와 민주화를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악명 높은 백인정권은 흑인들에게 어떤 만행을 저질렀는가? 백인정권의 인종차별에 대해 흑인들은 어떻게 저항하고 투쟁했는가? ANC와 만델라를 비롯한 ANC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흑인들은 어떻게 백인정권을 무너뜨리고 남아공에 흑인해방과 민주화를 실현했는가? 넬슨 만델라 대통령은 남아공의 정치적 안정을 어떻게 이룩했는가? 궁금한가? 그렇다면 아파르트헤이트 박물관을 찾아보라!
2007년 8월 17일
자료제공-장수건강마을 http://cafe.daum.net/leemsan-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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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林 山의 거꾸로 사는 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林 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