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선작
밥맛
요즘은 식도락가가 아닌 사람이 없다. 맛집을 찾아다니며 입에 맞는 음식을 찾는다. 배가 고파 먹는 것이 아니라 즐기기 위해 먹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맛을 느끼며 식사를 한 횟수가 고작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만큼 드물었다. 직장 생활을 해온 터라 시간에 쫓기고 일에 빠져 때우는 식사가 거의 전부였다. 결혼 후 줄곧 긴장 속에서 살았기 때문일 거다. 이것이 습관이 되어 음식이 입에 들어가는 순간 몇 번 씹지 않았는데 목으로 넘어가 버린다. 그래서 다른 사람보다 식사 시간이 빨라서 회식 자리에서는 늘 미안하다.
몇 달 전 딸을 시집보내고 나니 남편과 겸상을 하게 되었다. 오붓이 밥맛을 느끼며 즐거운 식사여야 할 텐데 그렇지 못했다. 남편은 앉아서 물, 컵 하며 자꾸 시켜서 나는 늦게 수저를 들어도 빨리 놓고 일어섰다. 그때부터 남편의 불평이 나왔다. 혼자 먹어서 밥맛이 없다는 둥 밥을 그렇게 빨리 먹으면 무슨 밥맛이 있느냐며 나를 식탁에 앉혔다. ‘밥맛은 무슨 밥맛’ 하며 가슴 저 깊은 곳에서 부아가 치밀어 올라왔지만 꾹 누르고 오이 한 접시를 와삭와삭 씹어 먹으며 삭였다. 결혼 후 부부가 다정하게 밥맛을 즐기며 식사를 해 본 적이 없어 둘만의 겸상이 어색했다.
신혼 시절에는 시조모를 모시고 시동생과 함께 살았다. 남편이 읍내로 통근하게 되어 이른 아침과 늦은 퇴근으로 식사를 함께할 수 없었다. 서툰 솜씨로 정성을 다해 차려놓은 반찬을 두고 시조모께서 개코같이 맛이 없다는 타박에 주눅이 들었다. 시조모와 마주한 식사 시간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밥맛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늘 시집살이 눈치 밥상이 되었다.
시아버지 사후에 따로 살던 시어머니와 살림을 합치니 식구가 기본 아홉에 늘 손님이 두세 명 보태어졌다. 퇴근 시간에 양손 가득 장보기를 하여 식사 준비를 해야 했기에 항상 마음은 바빴다. 시조모와 시어머니는 내가 직장을 핑계로 교만해질까 전혀 도움을 주지 않았다. 삼시 세끼를 부지런히 차렸지만 정작 조용히 앉아 밥 먹을 시간이 없어 늘 차려만 놓고 국에 말은 밥을 후루룩 넘기고 뛰어다니기 바빴다. 저녁은 느긋하게 먹을 수 있었지만, 숭늉을 만들어 가면 반찬이 남아 있지 않았다. 남은 반찬으로 대충 배고픔을 면했다. 바쁜 일상으로 아침을 거르거나 컵라면으로 때우는 일이 다반사였고 항상 허기진 기분이었다.
이년 뒤 둘째 시동생이 사업에 실패하고 함께 살게 되어 세 식구를 보탰다. 안방을 어른들과 시동생들에게 내주고 문간방으로 내려앉으니 남편이 전보(轉補)희망을 신청 했다고 나에게도 권했다. 별생각 없이 낸 전보 신청이 받아져서 경산으로 오게 되었다. 말이 경산이지 하루에 새마을 버스가 편도 세 번밖에 다니지 않는 봉화보다 교통이 더 불편한 오지였다. 우리 식구끼리 오붓하게 살게 된 기쁨도 잠깐이었다.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아침을 차려 놓고 초등학생인 딸에게 부탁하고 여섯 시 반 일반 고속버스를 탔다. 일곱 시에 고속버스에서 내려 고등학교 통학버스를 얻어 탔다. 오전 중에 학교에 갈 수 있는 유일한 교통수단이기 때문이었다. 이조차 놓치면 택시를 타야 했다. 학교에 도착하면 일곱 시 반이었다.
아침 대용으로 준비한 빵과 우유를 먹으면 속 쓰림과 설사가 동반했다. 점심은 도시락을 먹으니 맛보다 배고픔을 면하는 식사가 되었다. 저녁은 퇴근하는 길에 위장약을 사 먹고 밥을 먹어야만 소화를 시킬 수 있었다. 보릿고개도 아닐 때 음식은 풍부하지만 모든 장기가 탈이나 마음대로 먹지 못해 배고픔을 겪어야 하는 고통은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었다. 체중도 40kg 달랑달랑했다. 하지만 병원에 갈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다. 조퇴해야 하지만 별난 상사의 허락받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방학 때 내 몰골을 본 친정엄마에게 이끌리어 병원에 갔다. 양약을 먹을 수 없어 한방으로 몸보신을 겸한 치료를 했다.
몸도 마음도 좀 쉴 만하니 시조모와 시어머니를 다시 모시게 되었다. 아이들이 고등학생 중학생이 되어 도시락 다섯 개씩 싸 놓고 원거리 출퇴근을 하게 되었다. 아침은 먹지 못했고 점심은 학교 급식으로 먹을 수 있었지만 아이들 위주의 식단이라 입맛에 맞지 않았다.
남편은 효손이었다. 일요일이나 휴일에 가족이 한자리에 앉아 식사할 때 조모에게 입에 맞는 반찬이 있느냐며 이것저것 조모 앞으로 밀었다. 아이들과 나는 맛도 볼 수 없었다. 그리고는 조모가 좋아하는 반찬을 해 드리라고 생색을 냈다. 조모가 외식하기 싫어해서 아이들이 대학생이 되도록 가족끼리 외식 뿐 아니라 나들이도 한 일이 없다. 배달 음식도 시조모는 자장면만 드셨다. 그 외 다른 음식은 모두 맛이 없다고 하여 시킬 수가 없었다. 우리 아이들도 포기를 했는지 조르지도 않았다.
시어른들이 모두 돌아가시고 남편과 내가 퇴직을 하니 느긋한 식사를 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혹이 따라붙었다. 손녀 돌보미가 되어 그 치다꺼리를 한 뒤에 밥을 먹어야 하므로 음식은 식었다. 또 손녀가 남긴 밥 처리로 내 입맛에 맞는 식사를 하지 못했다.
남편과 함께하는 첫 가족 나들이는 손녀의 유치원 운동회 날이었다. 도시락과 간식을 챙겨 돗자리위에서 야외식사를 했다. 남편은 맛있다며 기분 좋게 식사를 했다. 딸이 아빠랑 야외에서 처음으로 먹는 자리란 말에 남편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가끔 점심에 남편과 둘이 외식 할 때도 남편이 좋아하는 쪽으로 해서 입에 맞지 않지만 그냥 먹어야 했다. 남편은 아직도 내가 어떤 음식을 즐기는지 모르고 있다. 우리는 연인처럼 다정하게 식사를 하지 않고 무표정한 모습으로 밥만 먹는 부부일 뿐이다.
나는 육류보다 채식을 좋아하며 고기를 좋아하는 남편과 식성이 전혀 다르다. 가끔 남편이 생색을 내며 고깃점을 밥 위에 얹어줄 때면 정을 느끼기보다 어색해서 밥맛을 잃게 된다. 이제까지 살아온 대로 지냈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성의를 무시한다는 짜증스러운 소리가 듣기 싫다. 더 나이가 들면 다정하게 밥맛을 음미하는 식사 시간이 될지 모르겠다.
밥맛이라는 이 한마디가 지난날을 돌아보게 한다. 밥맛을 모르고 살아온 세월이 느껴져 눈가에 이슬이 맺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