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커 키츠, 마누엘 투쉬가 공저한 『마음의 법칙』이 눈에 들어온 것은 인지심리학자인 김경일 때문이었다. 그는 “수많은 심리학책 중 단연코 돋보이는 수작이다! 북미에 말콤 글래드웰이 있다면, 독일엔 폴커 키츠가 있다!”라고 하는 감언에 책을 펼쳤던 것이다.
책은 51개의 이야기가 들어있었다. 이런 유형의 책은 주로 자기 계발서 같은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심리학자가 그런 책을 썼을 리는 없을 것이다. 어쨌든 별로 흥미가 없으면 책을 닫을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더구나 심리학은 관심에 비해 읽기가 늘 버거웠었다.
수많은 용어 때문이다. 연구자마다 자기들의 실험 결과에 대해 이름을 붙이는 모양이다. 그러다보니 생소한 용어가 가득해서 읽을 때는 흥미로운데 얼마가 지나면 용어 때문에라도 내용을 금방 잊어버린다. 그러니 흥미가 줄어들 수밖에.
심리학의 핵심은 언제나 ‘사람의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 것일까?’하는 질문이다. 그런데도 누구도 이 문제를 깊게 들여다보지 않는다. 이걸 어느 정도라도 안다면 모르는 사람보다 훨씬 모든 면에서 유리할 것은 분명하다.
저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심리학이 가르쳐주는 몇 가지 요령을 터득하면 우리의 일상은 한결 더 편안하고 성공적일 수 있다고 한다. 이 말을 듣고도 이 책을 읽지 않는다면 좀 덜 떨어진 사람이라는 모양이다.
저자들이 자신 있게 말하고 있다. “심리학자가 쓰는 말을 배우고 사용하라! 세상을 설명할 수 있으며, 인생의 거의 모든 상황에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은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심리학 지식은 일상에 응용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슬금슬금 한 꼭지씩 책장을 넘기다보니 어느새 나도 모르게 책속으로 빠져들었다.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마주치는 난감한 상황들에 대해 심리학적 용어로 또는 심리학 실험을 통해 입증된 사실들을 통해 시원하게 해결책을 제시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우리 삶이 곳곳에 도사린 문제들에 대해 이 책이 제시하는 내용만 알고 있어도 대부분은 갈등 없이 원만히 해결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이 책은 여느 소설 읽듯이 하루 이틀에 읽기보다는 그야말로 야금야금 맛을 음미하며 읽어야 할 책이다.
우선은 전체를 일독하고 나면 책 속에 대강 어떤 내용들이 들어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과거에 나에게 있었던 난처했던 일들을 떠올려 이 책의 어떤 내용과 연관되는지를 알게 되면 그때 내가 한 행동을 평가할 수 있겠다 싶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현 시점부터 나에게 닥치는 문제들일 것이므로 이 책을 꼼꼼히 챙긴다면 우선은 난감한 상황을 만들지 않을 가능성이 클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어떤 난감한 상황에 빠지게 되면 혼자 해결하려 덤비기 전에 이 책을 펼쳐보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분명히 이 책에서 제시한 해결책은 그러한 난감한 상황을 헤쳐 나가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책의 말미에 소개된 부부에 관련된 내용은 꼼꼼히 숙독하고 적용해 보면 부부관계가 더욱 좋아질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 삶을 반추해 보았다. 어떤 경우에는 그때 이러저러하게 대처를 했으면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은 효과는 톡톡히 본 셈이다. 그 중 몇 가지를 소감 삼아 적어본다.
나도 모르게 솔직한 내 감정을 숨기고 있다. 감정을 드러내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 되는 듯이 말이다. 그리고는 아이들의 표정을 살핀다. 내가 숨긴 것처럼 아이들도 진솔한 자기 감정을 숨기고 있을 것이고 나는 그 감정을 찾아 정확히 읽고 싶어 안달했다. 나는 교사였다.
우리는 가끔 뭐 하나 되는 게 없는 날, 재수 더럽게 없는 날이라고 오늘 하루를 푸념할 때가 있다. 사람들은 말한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그러나 누가 그걸 모르나? 그러나 혹시라도 재수 없는 일을 돌려서 생각하면 어떨까? 말하자면 도랑 치고 가재 잡는 식으로 말이다.
“우이씨!” 드라마가 한창 긴장을 고조시키는데 갑자기 광고가 끼어들어 분위기를 망쳤다. 그런데 광고가 끝나고 드라마가 다시 시작되자 금방 몰입한다. 그러고 보니 드라마를 두 편을 본 것 같기도 하다. 즐거운 일은 야금야금 즐기라는 말이다.
한창 골치 아픈 일로 속을 썩이는데 친구가 한잔 하러 가잔다. 세상에 이런 일이를 외치며 따라 나선다. 기분 좋게 한잔 걸치고 집으로 돌아왔더니 그 놈의 골치 아픈 일이 다시 나를 괴롭힌다. 기분 상하는 일은 한 방에 해결하는 게 좋단다.
친구 녀석은 약속을 하면 언제 한번 제대로 시간을 지킨 적이 없다. 녀석은 천성적으로 게으른 녀석이기 때문이야. 나도 가끔 시간을 어기기도 하지만 내 경우는 불가피한 경우가 있기 때문이지. 남의 잘못은 성격 탓이고 나의 잘못은 외부에 그 이유가 있다. 그게 내로남불이다.
“꽝 소리가 나기에 뒤를 돌아보니 파란 차가 빨간 차를 들이받는 걸 봤지요.” 이 진술이 맞을까? 꽝 소리가 난 후 뒤를 돌아봤다면 이니 상황이 끝난 후다. 들이받는 걸 보는 건 불가능하다. 그래도 우리는 그 말을 믿는다. 점화 효과 때문에 생각이 앞서 가는 것이란다.
우리는 살면서 자주 이웃과 비교하고 친구와 비교한다. 비교의 결과는 두 가지로 나타난다. 내가 우위일 때는 비교 자체가 기쁨이 되고, 내가 열등할 때는 비교 자체가 슬픔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기분을 마음대로 재단한다. 그러데 굳이 비교를 해야 할까?
세상에 뭐 하나 되는 일이 없다. 비참하다. 그렇게 자조한다고 뭐 하나 달라질 것은 없다. 인생은 그 어떤 꾸밈이나 과장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만이다. 그걸 뭐 긁어 부스럼을 만들려고 애쓰겠는가. 세상을 내 생각대로 바꿀 수는 없는 일이다.
제일 마지막에 웃는 사람이 가장 잘 웃는다는 말은 황당하다. 최후의 승자처럼 보이지만 가장 불쌍한 사람이다. 그는 가장 짧은 기쁨만을 누릴 뿐이다. 이미 장사는 끝났고 주위에 불을 꺼졌다. 과정에 충실해야 한다.
웃음은 기쁨과 만족감을 드러내는 가장 자연스러운 표현이다. 웃음은 특히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있을 때 그 효력을 발휘한다. 웃기 위해 일부러 농담을 할 필요는 없다. 그저 입 꼬리를 살짝 올려주기만 해도 된다. 웃음은 강한 전염성을 가지고 있다. 一怒一老一笑一少.
늘 야단을 맞으면 그 결과는 엉뚱한 행동으로 나타난다. 부정적인 생각은 부정적인 행동을 불러오는 것이다. 반면에 칭찬을 받으면 스스로가 칭찬받은 일에 뿌듯함을 느끼며 그 행동을 반복하려 한다. 그렇다면 늘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습관을 길러야 하지 않을까?
부부사이일지라도 나이를 들면서 매력을 잃는다. 성적인 매력이 시간과 더불어 줄어드는 주된 원인은 습관화다. 습관에 길들여지면 세상만사가 다 귀찮아진다. 삶을 새롭게 하는 방법은 습관을 탈피하는 것이다. 하루를 잘게 쪼개고, 같은 일도 방법을 달리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그게 뭐 어때서?’ ‘내가 뭘 잘못했는데?’ 다툼은 사소한 것에서 시작한다. 부부싸움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 입장만 내세우며, 상대의 의견은 될 수 있으면 무시하려 든다. 무시와 무시가 맞부딪치면 결과는 뻔하다. 상대를 이해하고 경청하라.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찬성이나 동의가 아니다. 그것은 무해할 뿐 아니라 사태 해결에 큰 도움이 된다. 경청을 통해 상대방을 더 잘 알 수 있을뿐더러 보다 친근해질 수 있다. 지피지기(知彼知己)하라. 백전백승(百戰百勝)할 것이다.
식탁에 놓인 초콜릿을 오며가며 하나씩 입에 넣는다. 슬금슬금 군것질도 이어진다. 그리고는 식사량도 적은데 체중이 줄지 않는다고 타령을 한다. 군것질을 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눈에 띠면 손이 간다. 군것질을 하지 않을 좋은 방법이 있다. 대놓고 온몸으로 군것질을 상상하라.
군것질을 계속하는 것은 바로 습관화 때문이다. 맛이 습관화된다는 것은 처음 먹는 맛이 가장 좋으며, 계속 먹을수록 맛은 떨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군것질을 하기 전에 충분히 온몸으로 상상하면 그 일의 매력은 떨어진다. 이미지 트레이닝으로 식욕을 잠재울 수 있다는 말이다.
요즈음은 젊은 국회의원 때문에 나라가 시끄럽다. 그는 국회상임위 회의 중에도 짬을 내 코인 투기를 벌였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무슨 잘못이 있느냐고 반문하며 아무 잘못도 없단다. 이쯤 되면 과대망상이 아닌지 모르겠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걸 두고 ‘우월함 환상’이라고 한다나?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남을 돕는 가수가 있다. 코로나 시국에는 공연이 없어서 그는 남을 돕는 일을 할 수 없는 것은 물론 자신의 처지를 걱정할 정도였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았다. 다른 사람의 딱한 처지를 공감해서였을까? 아니면 동정해서였을까? 공감은 합리적 선택을 돕지만 동정은 이성적인 판단을 흐리게 한다.
A가 자기 고민을 B에게 털어놓았다. B는 그런 상황에는 어떻게 대처해야하는지 장황한 설명과 함께 충고를 잊지 않았다. A는 다시 C에게 자기 고민을 털어놓았다. C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어주었다. A는 그런 C에게서 위안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