帝제와 侯후의 구분
고대의 정치체제는 諸侯제후 정치였는데 諸侯제후에는 帝제 작위와 侯후 작위가 속해 있었다. 諸侯제후(帝제, 侯후)는 당시 天子천자(신시개천 배달국 한웅천왕님. 고조선의 단군임금님)앞에서 직접 활을 쏘아 그 능력을 인정받아 작위와 封地봉지(領地영지)를 받은 사람을 말하며, 帝제는 세습을 하는(할 수 있는) 작위이고, 侯후는 원칙적으로 세습이 되지 않는다(자손에게 세습을 할려면 엄청난 공헌을 쌓아야 하고 그 자식도 또한 능력을 인정받아야 한다, 그러니 차라리 그 자식이 활을 쏘아 侯후 작위를 받는 것이 오히려 쉽다.)
炎帝염제 神農신농씨는 신시개천 제8대 안부련 한웅천왕께서 신하 少典소전을 강수(섬서성 기산현, 제갈공명이 6출기산 하던 그곳이다.)에 감병(군대감독관)을 보내면서 임명한 관리(少典소전)의 아들로서 世襲帝세습제다. 그의 후손 8세손 유망까지 世襲帝세습제로 작위를 유지하다 軒轅 헌원에게 패망한다.
少典소전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가 炎帝염제 神農신농씨이고 둘째가 勖욱이다.
少典소전의 장남 炎帝염제神農신농씨 계보는 8세손 帝榆罔제유망까지 이어지고, 소전의 차남 勖욱은 9세가 계곤이고 10세가 黃帝황제라 스스로 참칭한 인류사의 역적놈 軒轅헌원이다.
炎帝염제神農신농이 帝제 작위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天子천자인 안부련한웅천왕이 신하 소전을 감병보내면서 지위를 부여했고, 炎帝염제神農신농이 뛰어난 인재였으므로, 천자가 인정해서 세습이 되는 帝제 작위가 부여되었기 때문에 그 자손들이 8세 유망까지 帝제 작위를 이어갈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軒轅헌원이 帝제 작위를 이어받으려면 그의 아버지 啓昆계곤이 천자로부터 지위를 보전받아야 하는데, 아시다시피 軒轅헌원은 황제라고 지나쪽에서 떠들어서 帝제인줄 착각하였지만, 그의 아버지 ' 啓昆계곤'은 이름조차 잘, 거의, 알려지지 않는(역사에 관심이 있는 한산도 여러군데 검색을 해 보아야 겨우 알 수 있는) 평범한 호족에 불과했는데, 갑자기 軒轅헌원에게 세습이 되는 帝제 작위가 부여될 가능성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의하면 ‘황제는 소전의 자손이고 성은 공손이며 이름은 헌원이다 (黃帝子 少典之子 姓公孫 名曰軒轅)’ 라고 적혀있다. 소전少典의 아들 중에 첫째 장남이 염제신농씨이고, 둘째가 '욱勖'이다. 욱勖의 10세손이 황제헌원(BCE 2692 ~ BCE 2592) 이다.(내가 보기엔 족보도 없는 놈이 갑툭튀 해서 출세하니까 족보를 끼워 맞춘 것으로 보인다. 소전의 아들 신농의 후손은 제유망까지 전부 강씨인데 반하여, 헌원만 공손씨이므로 어딘가 냄새가 많이 난다.)
헌원의 가계도
이 軒轅헌원이 큰집인 炎帝염제神農신농씨 집안을 쳐서 권력을 찬탈하고 스스로 世襲帝세습제가 되어 黃帝황제라 참칭한 경우다. 따라서 黃帝 軒轅헌원은 엄밀한 의미로 세습을 한 帝제가 아니라 패륜역적놈이다.
헌원이 제 유망을 쳐서 신농의 세력까지 합친후 동방천자인 신시개천 제14대 자오지한웅(치우천왕)께 반기를 들고 탁록에서 전쟁을 치루었기 때문에 천자인 치우천왕이 헌원에게 帝제 작위를 수여한 적이 없다. 따라서 3황5제 중에 세 번째로 불리는 헌원부터 소호금천 – 전욱고양 – 제곡고신 – 지 – 당요 – 우순까지 帝제가 된 적이 없는 게 역사의 팩트다.
헌원 – 소호금천 – 전욱고양 – 제곡고신 – ‘帝摯제지’로 이어지는데, 摯지의 형인 堯요가 친동생 摯지를 쳐죽이고 권력을 찬탈하여 지나 최초로 唐당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唐당나라 堯요임금 世襲帝세습제 帝堯제요(唐堯당요)가 된 것이다. 지나 화하족이 唐堯당요를 높이 쳐주는 이유는 자기들 최초로 정치적 독립(? 도덕에 반하는 모반)을 감행해서 일정한 성과를 도출했기 때문이다.(지나족 입장에서는 단기적으로는 일정한 성과를 내었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 긴 역사의 안목으로 보면 – 인류사의 재앙이 되었다.)
시대적으로 앞서는 이 사건이 기독교 경전에 형이 동생을 쳐죽이는 카인과 아벨의 모티브가 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니까 헌원부터 소호금천 – 전욱고양 – 제곡고신 – 帝摯제지 - 帝堯제요(唐堯당요,요임금?) - 帝舜제순(虞舜우순,순임금?)까지 엄밀하게 말해서 世襲帝세습제가 아닌 패륜 역적놈들 무리에 속한다고 이야기 할 수 있다.
唐堯당요가 동생 帝摯제지를 쳐죽이고 권력을 찬탈할 때, 전 세계가 우주의 봄에서 여름으로 들어가는 우주의 장마철(우리나라로 치면 1년에 6월 25일부터 7월 25일 기간의 여름 장마철에 해당하며, 기독교 경전에 노아의 홍수로 잘 알려져 있다.)이라 황하와 양자강이 범람하여 세상에 난리가 나서 단군임금님의 도덕과 통치력이 변방에까지 미치치 못하자, 唐堯당요가 동생 帝摯제지를 쳐죽이고 권력을 찬탈할 수 있었던 것인데, 비록 천자의 직접적인 응징은 받지 않았지만 민중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해 정정이 불안 불안하자 먼 조카뻘 舜순을 끌어들여 두 딸 여영과 아황을 시집보내 사위로 삼고 연정으로 권력을 공고히 함. -- 대학자이자 바른말을 하다가 진시황에게 살해당한 금수저 한비가 唐堯당요가 동생 帝摯제지를 쳐죽이고 권력을 잡았다고 증언하고 있고, 죽서기년에도 그대로 발굴됨.
《汲冢竹書》云:舜囚堯於平陽,取之帝位。
《급총죽서》에서 이르기를, 순임금이 평양에서 요임금을 사로잡고 임금의 자리를 빼앗았다.
《광홍명집(廣弘明集)》권11 법림(法琳)의《대부혁폐불승사(對傅奕廢佛僧事)》.
《括地誌》云:……《竹書》云:舜囚堯,復偃塞丹朱,使不與父相見也。
《괄지지》에서 이르기를...(내용 누락) 《죽서》에서 말하기를, 순임금이 요임금을 사로잡고, 요임금의 아들 단주를 가두고서 아비와 아들이 서로 만나볼 수 없도록 하였다.
《사기》 <오제본기> 정의
《竹書》亦曰:后稷放帝朱於丹水。
《죽서》에서 또 이르기를, 후직이 주임금(단주를 말한다)을 단수 땅에 방면했다.
《산해경(山海經)》<해내남경(海內南經)>
세월이 흘러 사위 舜순이 실권자로서 唐堯당요를 보니 늙어빠진 영감쟁이로 별것 아닌 것이 황제를 참칭하므로 자기의 군사력으로 唐堯당요를 감옥에 가두어 죽이고, 唐堯당요와 정치적 동지였던 자기의 친삼촌(아제비) 鯤곤을 쳐죽여서 권력을 찬탈하고, 虞우나라를 세워서 虞우나라 舜순임금 虞舜우순이 되어 천지간에 도량형을 맞추고 율령을 반포한다는 둥, 태산에 올라 天祭천제(?)를 지내 봉선하는 등, 마치 자기가 천자가 된 양 생 쑈를 하고 내려와서 단군임금님의 장남 부루태자를 알현하고 世襲帝세습제로 책봉해 줄 것을 요구함. -- 서전 우서 순전 동순망질 사근동후 대목이 이를 입증함.
단군임금님과 부루태자는 唐堯당요와 虞舜우순이 대를 건너 살육을 일삼고 권력을 찬탈하여 세상을 어지럽힌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천하의 제후회의를 열어서 世襲帝세습제를 임명하겠노라고 虞舜우순을 효유하여 돌려보내고, 양자강 남쪽 도산(회계산)에서 천하제후회의(도산회맹)를 열어서 금간옥첩(오행치수법)을 鯤곤의 아들 禹우에게 전수하므로, 虞舜우순이 한거번에 정치적 정당성을 잃어버리고 군중에게 쫒겨 양자강 동정호 옆 창오의 들에서 맞아 죽게 됨(지나 화하족은 이것을 순이 붕어했다고 사기침).
2024. 11. 20일 추가) 회계산에 대하여 절강성 소흥시에 있는 회계산이라고 지나쪽이 주장하고 세상에 알려졌으나 유튜브 북경반점님이 호북성 회계산(禹山우산)을 찾아내게 되어 모든 의문점이 확 풀리게 되었다. 기존의 역사에서 절강성 소흥시 회계산(도산)에서 천하제후회의가 열리고 우순이 쫒겨서 죽은 창오의 들까지 너무 거리가 멀어서 현실성 없는이야기로 보였지만, 북경반점님이 호북성 동정호 옆 회계산(禹山우산)을 찾아내게 되므로, 禹山우산 인근 창오의 들판에서 우순이 난중에 맞아 죽게되는 것이 매우 합당하여 역사가 진실임을 알 수 있고, 호북성 회계산(禹山우산)을 절강성 소흥시로 몇천km나 옮긴 지나족의 역사조작은 정말 인류사의 패악임이 분명하다 하겠다.
북경반점님이 밝힌 중국 남방사의 핵심 회계산(会稽山) https://www.youtube.com/watch?v=2KABjmwPGW4
鯤곤의 아들 禹우가 양자강의 치수를 잡고 민중의 신망을 얻어 夏하나라를 세워서 夏禹씨가 됨.
그러므로, 하나라를 세운 禹우는 고조선 제2대 부루단군임금님으로부터 帝제 작위를 받아서 帝禹제우가 된게 분명하다.
(기존의 역사에서 지나족들이 주장하길 하우씨가 황하와 양자강의 치수를 바로잡고 하나라를 세웠다고 주장했으나, 하나라의 유적이 황하유역에서 발굴되지 않았고, 호북성 회계산(禹山우산)이 드러났으므로, 하우가 치수를 잡은 곳은 양자강이 분명하다 하겠다. 따라서 하나라의 근거지는 양자강 동정호 서쪽이 분명함을 알수 있다. 지나족들이 갑자기 양자강에서 황하의 치수까지 들먹이며 관중땅(서안과 함양) 단군임금님의 직할지를 탈취해 감은 불가하다 할 것이다. 하우가 양자강 연안에 머물러 있음으로서 서안에 있는 단군조선의 유적 380여기의 피라미드에 대한 의문도 단번에 풀리게 되었다.)
이후 夏하나라 - 商상나라 - 周주나라로 이어지는 하.상.주 3대가 이어지고, 주나라가 망하고 춘추5패, 전국7웅의 춘추전국시대가 만들어지며 천하가 혼란에 빠졌으나 진나라 이정이 통일하고 시황을 참칭함.
(商상나라의 수도 은에서 은허가 발굴되어 중공이 은나라라고 역사왜곡 중. 하나라 상나라는 동이족이 세운 나라이고 주나라는 화하족이 세운 나라이기 때문에 중공은 하나라와 상나라를 부정하여 왔는데 商상의 수도 은에서 은허가 발굴되므로 어쩔 수 없이 商상나라를 인정할 수밖에 없으므로 商상나라라고 하지 않고 “은”나라라고 왜곡하여 세상에 주장하며 동이족이 세운 나라임을 애써 부정하는 비열한 짓을 일삼고 있음. 이를 일러 하상주 단대공정이라고 함. 우리는 중공이 은나라라고 부르던지 말던지 “商상나라”라고 불러야 제대로 역사를 인식하고 있는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