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시성(詩聖) 라빈드라나드 타고르
(Tagore, Rabindranath : 1861-1941)이다.
그의 시 '동방의 등불'을 1면에 실은 1929년 4월 3일 자 동아일보 지면이다.
타고르가 1929년 3월 캐나다를 순방하고 귀향길에 일본에 들렸다.
3월 27일, 일본에 망명 중인 인도의 혁명가 "보-스"씨의 숙소를 방문했던
동아일보 기자는 타고르를 만나 한국 방문을 요청하였다.
"내일이면 떠날 것이고, 돌아오는 길에는 일본에 들리지 않을 것이기에
갈 수 없다. 내일 떠나기 전 다시 만나자." 타고르는 답했다.
그는 이튿날인 28일 오후 3 시 'Empress of Asia'호를 타고 요코하마를
떠나기로 되어있다.타고르는 그를 배웅하러 간 기자에게
"간단한 의미의 메시지를 써 주며 동아일보를 통하여
조선민족에게 전달해 달라" 며 이 시 '동방의 등불'를 건넸다.
이 영문으로 된 타고르의 시는 당시 편집국장 주요한(朱耀翰)의 번역이
곁들여져 그 해 4월 2일자《동아일보》1면에 실렸다.
타고르의 이 시는 예언자적인 비전과 무한한 격려와 사랑을 담고 있어,
우리에게 큰 용기를 불러일으켜 주었다.
동 방 의 등 불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 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 코리아.
그 등불 한번 다시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1929.3.28.-라빈드라나드 타고르
당시 신문에는 아래의 영문으로 된 시는 없었다.
The Lamp of the East
In the golden age of Asia
Korea was one of its lamp - bearers
And that lamp is waiting to be lighted once again
For the illumination in the East.
1970년 4월 1일자 동아일보는 창간특집 기사에서 타고르의 시 '동방의 등불'을
싣게 된 경위를 자세히 밝혔다.이를 그대로 옮겼다.
1929년 3월 인도의 시성 타고르가 캐나다 순방을 하고 귀향길에 일본에 들렸다.
이때 일본에서도 아사히 신문만이 타고르옹의 예방을 받았으며 다른 신문에서는 접촉할 수 없었다.
동아일보는 타고르를 초청하여 강연회를 열기로 하고 동경지국장 이태로에게 타고르를 만나도록
지시했다. 주로 광고업무만을 맡아왔던 이태로는 취재솜씨가 없어 서툰 솜씨로 동분서주했다.
가까스로 인도인 독립운동가로 일본에 망명 중이던 찬드라 보스를 만나 그 뜻을 전할 수 있었고
찬드라 보스의 일본인 장인 소마의 집 응접실에서 타고르옹을 만나는 데 성공했다.
이태로는 성스러운 노인이 합장으로 인사를 해 주는 모습을 사진찍을 수 없음이 안타까웠다.
일인 사진관에서 데려온 사진사는 타고르옹이 약속시간인 오전 10시에서 몇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자 화를 내고 1원 50전을 받고 그냥 가버렸던 것이다.
이태로는 미국인 선교사 내슈가 영문 타이프로 써준 동아일보의 뜻을 전달했는데
타고르는 초청응낙대신 요코하마항을 떠나며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미국인 비서를
통해 전해주었다. 그것이 바로 주요한의 번역으로 4월 3일자 동아일보에 계제된
그 유명한 '동방의 등불'이라는 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