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엄마.... ' 그러면 '무슨 다 큰 어른이?' 하고 미간을 찡그리실 지도.... 그러나 전 부끄럽게도 단 한 번도 '어머니' 하고 불러 본 적이 없답니다. 저보다 12살이나 위인 큰 언니도 결혼하여 자녀들이 장성한 후, 모양이 모양이다 보니 할 수 없이(?) '어머니' 하고 어색하게 아주 어색하여 쿡~ 웃음이 나올 정도로 겨우 어쩌다 부르곤 했지만, 제 경우엔 둘째 낳고 바로 돌아 가시는 바람에 그런 정황도 오지 않았었다고 함이.... 늘 '엄마~' 하고 불렀던 그런 엄마가 제 곁을 떠난 지 벌써 만 26년이나 되네요.
울 엄마.... 절 아는 거의 모든 고향 어른들께선 언제나 엄마 안부를 먼저 여쭙곤 하셨지요. 德이라고 하면 적당한 표현인 지 몰라도 정말 다른 사람들에게 참 잘 하셨던 분이셨거든요.
오늘같은 명절이 되면 우리 식구들만 모여 차례를 지내곤 하였지요. 왜냐구요? 아버지가 3대 독자셨으니까요. 명절이나 기 제사 돌아오면 엄마 혼자서 정말 분주하게 움직이셔선 咸安 趙家 종가집 며느리답게 차례상은 늘 그득하였답니다.
며칠 전 데이지님 방에 가 보니 명절 앞두고 쌀강정을 만드셨는 데, 그것을 보는 순간 또 엄마 생각이 났지 뭡니까??? 쌀강정 뿐만 아니라, 콩강정.....그것도 몇 가지씩. 약과.... 유과.... 등등 또 즐겨 먹던 건빵 튀김 까지..... 간식 거리만 해도 몇 가지를 하시어선 큰 장독에 담아 두시면 긴 긴 겨울 날 밤 한 소쿠리씩 갖다 놓고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하였답니다.
차례를 지내고 나면 제일 먼저 - 기제사 때도 마찬가지로- 종류별로 조금씩 떼어 내어선 대문 앞에 갖다 놓았는 데 그 일은 제가 주로 했었지요. 어느 날은 왜 그렇게 하는 지가 궁금해서 여쭈어 보았더니 어려운 사람들 갖고 가서 먹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차례 지낸 후 아침 밥을 먹고 나면 그 다음 하는 일이 바로 아버지 몰래 - 왜냐구요? 가만히 들으니까 자주 아버지께서 엄마더러 손 커다고 야단하시곤 하신데다. 저희 식구는 달랑 5이었으니까요.
그런데도 특히 명절이 되면 민어, 도미, 조기 등 큰 고기들이 몇 소쿠리씩 지붕 위에서 볕을 보며 말려졌고 찜 솥에서 한 번 쪄 낸 후 구워야 살 깊은 생선들이 바스라지지 않고 모양을 유지한 채 구워졌지요. 그런 비싼 생선과 쇠고기 류의 육류, - 부산에서는 순 쇠고기만 상에 올렸는 데 - 쇠고기 산적, 갈비구이, 갈비찜, 등등 그 고급 음식들이 이집 저집 앞집, 뒷집으로 건네지는 걸 제 눈으로 늘 보며 자랐답니다. 옆집 사람이 얼른 안 나오면 제가 살짝 전해 주는 심부름꾼 노릇을 하곤 하였지요. 실제로 아침, 저녁으로 문전 걸식하러 오는 거지들이 한, 둘이 아니었지만, 결코 그냥 돌려 보낸 것을 본 적이 없답니다.
게다가 울엄마는 요리 솜씨도 각별하셔서 동네 잔치가 있다 하면 불려 가시어 요리를 담당하시곤 하셨고 그 별나고 까타롭고 유별난 - 초량 동네 바닥에서는 모두 다 알 정도로 소문난 - 울 아버지의 식성을 엄마 외에는 도무지 맞출 수가 없으셨지요. 제가 알기론 거의 바깥 음식을 드시지 않았던 거로 기억하는 데 머....그 때 다 그러셨겠지만 3 식 세끼니 챙겨 드리는 거 그거 정말 힘든 거 였죠. 아마 지금 같으면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 그래서 현 시대의 남정네들 불쌍하다는 생각조차 들기도..... 생각이고 행위겠지요???
또 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의 일입니다. 어느 날, 점심 시간에 보니 거의 매일 도시락을 못 갖고 와 종만 치면 교실 밖으로 나가곤 하는 친구들을 보게 되었고, 옥수수 빵도 다 돌아가는 것이 아니었기에 그것도 배급 받지 못하는 친구들이 있음을 안 제가 엄마에게 그런 사실을 말하고 도시락을 부탁하였더니 알았다고 하시며, 매일 도시락 2~3개씩을 싸 주셨답니다. 그래서 다른 친구들보다 일찍 가서 그 친구들 책상에 몰래 도시락을 넣어 두곤 하였지요. 제 도시락은 옥수수 빵 먹는 친구랑 거의 매일 바꾸어서 먹구요.... 그럴 수 있도록 앞장 서서 도와 주셨던 참 고마우셨던 울 엄마는, 지금 연산동 로터리 부근의 재제소를 갖고 있던 全州 崔氏네 12형제 중 7번째 부잣집 막내딸이랍니다. 엄마 아래로 외삼촌 둘을 낳으셨기에 엄마는 더욱 사랑을 많이 받으셨다고....
그런 울엄마는 또 재주도 많으셨지요. 그 때는 그런 모습을 절대 보이면 안 되는 것으로 여기셨음인지 동네 분들 잔치 집에 모여 노는 데 불려 가시곤 했는 데 그 후 동네 분들 저희 집에 오시어 나누는 이야길 귓가로 들으니 아아니....글쎄 곱추춤을 추셨다는....것두 너무나 명성이 자자할 정도로~~~ 다 자란 후 딱 한 번 그 모습을 - 살짝 몰래 감추어 두셨다간 등에 넣었던 베 보자기까지 - 본 적이 있었는 데 어쩜 그렇게 신명나게 춤을 덩실덩실 잘 출 수가 있으신지???
울아버진 동래 기생 불러놓고 시조 읊으시며 한 가락 하셨던 한량 중에 한량이셨고, 울 엄마는 노래면 노래, 춤이면 춤, 장구면 장구, 음식이면 음식, 못하는 게 없는 그런 두 분들 사이에서 태어난 전, 왜 이런 둔한 몸치에..... 하고 싶지도, 배우고 싶지도 않은 지 그게 참 의문 중에 의문이랍니다~ ㅋ
다시.... 울 엄마 자랑할 게 있는 데요, 젤루 부러운 게 신체 중 좀처럼 볼 수 없는 다리^^. 목욕탕에나 가야 볼 수 있는 쭉 곧은 다리에 쏘~옥 들어 간 가냘픈 종아리^^ 그 다리가 어린 제 눈에도 너무나 환상으로 이뻐 보여 다 자란 후 어느 날 그랬답니다. "엄마, 엄마 다리랑 내 다리랑 바꾸자. 응?" "그리고 치마 좀 입어. 그 이쁜 다리 평생 햇빛 함 못 보네~~" 하면서 양복을 맞춰 입게 하기도 하였지만, 치마 길이가 워낙 길어서 머 겨우 종아리 정도 바람을 쐬였을까나???
우리 집에 와서 엄마가 차려 준 밥 함께 먹었던 친구는 지금도 그러지요. "너, 엄마 닮았으면 음식 잘 할텐데...." "응, 그런데 갈차 준 게 하나도 없어, 그게 더 안타까워." 실제로 울 엄마는 전혀 집안 살림에 대해 가르쳐 주시질 않으셨기에 지금도 3 자매 모이면 음식 이야기. 도무지 어디 가서 사 먹을 수도 없는 울 엄마 만의 노하우가 담긴 벼라별 별식들.... 무슨 찜이라고 하면 될까??? 다만 맛과 모양 정도만 기억나는 그런 요리들이 한 둘이 아니랍니다. 여름에 콩나물 대가리(?) 다 떼낸 콩나물과 멸치 장조림도 우리 집 만의 밑반찬이었으며, 그 어려운 전후 때 전 장어 조림 등을 늘 도시락에 넣어 갈 수 있었으니, 제 뼈가 아주 단단하다고 누가 그러던데, 아마 그것은 어릴 때 잘 먹었기 때문일 거라는.....
아.....이렇게 명절이 돌아 오면 부엌에서 혼자 그리 힘든 데도 암 말씀없이 그저 식구들이 그리고 이웃에게 나누어 줄 기쁨으로 기꺼이 즐겁게 음식 장만하셨던 울 엄마!!!!!
딸 부자집 세째딸인 저, 유독 어릴 적 골골하는 바람에 더 더욱 사랑 많이 받았던 저. 그런 엄마의 어떤 점을 닮았는 지??? 닮기나 한 게 있기나 한 지???
그러나 그 세째딸 이었던 저 때문에 결국 지궁암으로 돌아 가셔야만 한 울 엄마^^ 근데 제 태어나기 전에 유명한 산파가 아들이 분명하다고 미리 떠들어댄 바람에 울 아버진 넘 좋아라 하시어 5살 때까지 입을 옷가지 미리 준비 다 해 두셨다는 사실^^ 그 바람에 저는 영락없이 머스마로 자라났다는 걸 동네 사람들이 다 알지요. 그런데 그만 아들이 아니고 딸인 제가 태어나는 바람에 그만 아버지 보기 미안한(?) 마음에 몸조리도 제대로 못하고 일어나 움직이셨다고.... 그 후 결국 안 좋아지셨다는.....
그런 울엄마, 무슨 말만 하면 어찌 그리 비유법을 잘 쓰는 지, 들으면서도 '학교도 많이 안 다니셨는 데 어찌 저리 아시는 것도 많을까??? ' 내심 속으로 감탄도 많이 했답니다. '내 손이 내 딸이다~' 누굴 시키지도 못하고 또 어슬프게 제가 설겆이라도 해 놀 양이면 그 때마다 하신 말씀~
요즘 며칠 명절 앞두고 그 동안 쉬 손 대지 않았던 곳 열심히 일한 후, 반짝 반짝 윤이 나고 정리 정돈된 깔끔한 모습을 보면서 혼자 크~ 웃으면서 '내 손이 내 딸이다' 하였답니다. 그 외에도 그런 식으로 어떤 상황이나 정황에 걸맞는 비유적인 어휘를 참 잘 쓰셨다는.....
그 엄마를 따라 갓 스무살 때부터 산천 경계 유람하기 시작했다고 하면~~ ㅋ 그게 바로 서울 행 첫 도착지 남산이랍니다. 바로 보시는 사진의
'꼭 내일 죽을 것처럼 돌아 다닌다' - 또 비유 하나^^ - 고 야단할 정도로 전 그 때부터 이미 한 역마살 끼를 드러내고 만 것을~~~ 푸^^
저 앞으로 퇴직 후 관광회사나 차려 팔도 강산 유람이나 하며 지낼까 하오니 그 때 많이 애용들 해 주실랍니껴껴껴~~~ㅎㅎ
글구 또 제가 좋아하는 죽 중에 녹두죽이 있는 데요, 그 죽을 울 엄마가 너무나 잘 끓이셨다는 거.... 그리하여 수시로 그 손 많이 가는 죽을 쑤어서는 동네 어른들 대접하곤 하셨지요^^ 그리하야 저희도 얻어 묵고~~~ 저야 머 겨우 겨울 철 별미인 단팥죽 정도는 맛있게 잘 하는 데..... ㅎㅎ 아...녹두죽, 그리운 울 엄마표 녹두죽!!!!! 어디 가서 그 맛을 볼 수 있으려나???
아...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살며 살아가며 힘들고 어렵다고 하소를 할라치면, "아래 보고 살아라! 나보다 못한 사람 생각하며 살아라!! " 라고 하시어 철없던 이십대엔 '칫, 엄마가 되어서는 위를 보고 살아라고는 안 하고, 왜 맨날 아래 보고 살아래?' 하고 속으로 반감을 아니 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살아가면 갈수록 그 말의 싶은 뜻을 헤아릴 수 있었으니, 이미 그 때는 엄마가 제 곁에 아니 계신 것을.....
아....또 있네요!!! 결국 열녀비도 못 받고 아버지보다 먼저, 것두 예순도 채 못 채우시고선 저 세상으로 가셨지만, 남편에 대한 지아비에 대한 그 婦德은 그 누구 못지 않은 아니 그 누구도 따라오지 못한 경지에 이르셨던 분으로 영원히 가슴에 새겨질 분!!! 내 어머니!!!
'엄마~ 비록 엄마처럼 몸으로 이웃 사랑 살천하며 잘 살지도 못하고, 아래 보며 사는 거 아직도 잘 안되어 맘 속에 그 욕심이라는 녀석과 늘 싸우고 있으며, 그리고 엄마같은 부덕도 쌓지 못했지만, 그래도 엄마 딸, 열심히 열심히 살아가고 있답니다. 자신애게 부끄럽지 않으려고, 두 분 부모님 욕되지 않게 하려고, 두 아들 앞 가리지 않으려고 말에요. 왜 요즘은 꿈길로도 자주 찾아 오지 않으셔요??? 정말 늘 아니 요즘같이 이런 명절이 돌아 오면 더욱 더 보고싶어요!!! 엄마~~~'
흐르는 곡 / 꽃의 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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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길 위에서의 생각 원문보기 글쓴이: 한결같이
첫댓글 대단한 분이시다...사진을 보니 좋은분같아....함안 조씨라니 반갑기도 하고...울 엄마 생각도 나고...나도 '어머니'소리가 안 나오더이다...엄마에게 늘 죄송한 마음뿐 ...흐르는 곡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