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신협 60주년 기념 '어부바에세이' 공모전에서 참가상으로 입상한 작품입니다.
아내, 내 삶의 수호천사
나는 경남 사천의 두메산골에서 태어나 자랐다. 농사를 짓는 부모님 슬하에 맨 위로는 누나가 한 명 있었고 그 밑으로 쭉 형님 셋이 있었다. 나는 막내였다. 그러니까 우리 형제자매는 4남 1녀였다.
옛날에 대다수의 집이 다 가난했듯이 우리 집도 예외 없이 가난했다. 산골짜기 마을에서 천수답과 작은 밭뙈기를 합쳐 예닐곱 마지기 되는 척박한 땅으로 농사지어서 일곱 식구가 겨우 먹고 살았다.
하얀 쌀밥이나 고깃국은 명절이나 생일이 돼야 구경했고 평소엔 거무스름한 보리밥이나 밀가루 음식으로 연명하는 경우가 잦았다. 당시에 정부에서는 선진국으로부터 원조식량으로 받은 밀가루를 국민에게 배급해줘서 밀가루로 수제비나 칼국수, 부침개 등을 심심찮게 요리해 먹었다. 점심이나 저녁은 십중팔구(十中八九) 밀가루 음식으로 끼니를 해결했다.
쌀이나 밀가루가 동났을 때엔 가끔은 초근목피(草根木皮)로 배고픔을 달래는 경우도 있었다. 산골이다 보니 철따라 다채로운 먹을거리를 얻을 수 있었다. 칡뿌리를 비롯해 찔레 순, 소나무 속껍질인 송기, 띠의 어린 꽃 이삭인 삘기, 진달래 꽃잎, 감꽃, 아카시아꽃 등을 먹었고 갖가지 야생과일도 따 먹었다. 이를테면 산딸기, 머루, 다래, 어름 등이었다.
밭에서 기른 고구마, 감자, 옥수수 등도 주전부리로 심심찮게 먹는 식품이었다. 산골 농촌에서 기른 식량과 야생 식품으로 배고픔을 달래긴 했지만 배는 항시 고팠다. 성장기이다 보니 먹고 나서 돌아서면 배가 고파 늘 먹을거리를 찾곤 했다.
어린 시절에 배고픔은 둘째 치고 근엄한 아버지가 늘 문제였다. 옛날 어른들이 거의 그렇듯이 아버지는 우리 자식들에게 무척 엄하셨다. 고리타분하면서도 엄해서 어린 우리 형제들은 늘 두려움에 떨었다. 사소한 잘못에도 크게 호통을 치거나 매를 들었고 심지어 집에서 쫓아내기도 했다.
성격이 좀 게을렀던 아버지는 고된 농사일로 자주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면 어머니와 자주 싸우기도 해서 어린 우리 형제들은 언제나 아버지가 두려웠다. 그래서 아버지가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버지가 없는 집의 친구들이 부럽기까지 했다. 아버지는 우리 형제들에게 자상하다기보다는 언제나 불안과 공포를 끼치는 대상에 불과했다.
가난한 환경에다가 근엄한 아버지 슬하에서 자라다 보니 누나를 비롯한 우리 형제들은 성격이 온순했고 젊은이다운 패기나 배짱은 부족했다. 학교에서도 친구들 앞에서 자신감이 없었고 별다른 말이 없이 조용한 편이었다. 항시 사기가 꺾여 풀이 죽은 모습으로 지냈다.
그렇게 가난한 가정환경과 근엄한 부모 밑에서 자란 우리 형제자매들이었지만 그래도 각자 부모 도움으로 한글과 숫자를 깨치는 기초학업을 마쳤다. 내가 스무 살 무렵에 부산으로 이사해서 나는 병역의 의무를 다한 뒤에 사회생활을 하고 가정을 이뤘다. 나를 비롯한 누나와 형제 모두가 성격이 내성적이고 소위 말해서 암되다보니 이성과의 연애는 해 보지도 못하고 중매로 겨우 결혼했다.
나도 연애는 책이나 영화 속에서나 상상으로 해 보고 어머니 친구인 이웃 아주머니의 소개로 아내를 중매로 만나 서른두 살에 결혼하게 되었다. 조용한 성격에다가 취미로 책을 즐겨 읽었는데, 책을 읽으면서 애틋하면서도 달콤한 연애를 꿈꾸었지만 결국 실행에는 옮기지 못하고 말았다.
남들은 다 하는 연애를 해 보지 못하고 중매로 아내를 만나 아쉬움이 컸지만 아내는 내게 든든한 수호천사 역할을 제대로 해 주었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나는 어린 시절을 가난하고 근엄한 부모 밑에서 자라다 보니 매사에 자신감이 없었고 표정은 늘 어두웠다. 쉽게 말해 ‘풀 죽은 우거지상’이라고나 할까?
아내는 나의 그런 모습을 보며 잔소리하듯이 자주 나를 다독였다. 마치 어머니가 아들을 다독이듯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가난한 환경은 죄가 아니고 부지런하게 살아갈 동기를 부여한 것이고, 근엄한 아버지는 자식들을 옆길로 새지 않고 올바른 길로 가도록 하려는 사랑이 깃든 훈육이라고 했다.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 번”이란 속담이 있듯이 아무리 아내가 하는 옳은 이야기라도 계속해서 들으니 짜증이 났다. 그렇지만 남편으로서 아내의 잔소리 같은 말을 들으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말이 정말로 맞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가난하고 근엄한 부모 슬하에서 자랐지만 그런 덕분에 나쁜 길로 빠지지 않고 근면하게 움직여서 원만한 사회인이 되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나에게 아내는 ‘하늘이 내린 수호천사’나 마찬가지였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나는 지독히도 ‘복이 없는 사람’이란 생각을 늘 했었다. 나처럼 복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것이란 생각을 자주 하며 살았다. 각종 행사에서 행운권 추첨에 당첨되는 경우는 아예 없었고 가끔 사는 복권에도 당첨은 남의 일이었다. 내게 행운이나 대박, 공짜 따위는 강 건너 불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주관상을 봐도 나는 평생 스스로 벌어서 먹고 살 팔자라는 것으로 나왔다. 우연히 라도 행운이나 공짜가 생기면 재물이 들어온 만큼 다시 나가게 되는 운명이라고 했다. 공짜나 행운은 바라지도 말고 개미처럼 언제나 부지런하게 노력해 가며 살아가라고 조언했다.
그런 운명이랄까 처지의 내 삶에서 아내를 만난 것은 그야말로 커다란 축복이고 행운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아내 복 하나만은 제대로 타고난 느낌이었다. 늘 박복하다고 신세를 한탄했는데 뒤늦게 지혜로운 아내를 잘 만나 삶의 기쁨이랄까 행복을 누리며 산다.
나와 아내는 나이가 다섯 살 차이다. 각각 서른두 살과 스물일곱 살에 중매로 만나 다섯 달 사귀다가 결혼했다. 둘 다 가난한 처지였지만 성격이 맞고 대화가 잘 통해서 서로 결혼을 결심했다. 맞선으로 만났기에 처음엔 사랑이 없었지만 가정을 꾸려 살다 보니 시나브로 사랑이 싹텄다.
강원 영월이 고향인 아내는 남편의 사기를 북돋워주며 조력자 역할을 잘 했다. 또한 매사가 긍정적이고 낙천적이었다. 요리 솜씨도 나쁘지 않았고 성격도 원만해서 시댁인 우리 형제들과 잘 어울렸다.
아내 덕분에 강원 별미인 메밀 부침개나 감자떡, 올챙이묵 등도 심심찮게 먹을 수 있었다. 아내 고향인 영월로의 여행도 가끔 하는 행운을 누렸다. 아내를 만나지 않았다면 내게 강원 여행은 꿈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않을까 싶다.
지금 나는 50대 후반이고 아내는 50대 초반이다. 결혼한 지는 26년 됐다. 내가 지금껏 무난하게 직장생활을 하고 행복하게 살아온 것은 전적으로 아내 덕분이다. 아내 자랑하면 팔불출이라고 하지만 팔불출이라고 비난 받더라도 나는 아내를 자랑하고 싶다. 다른 복은 지지리도 없지만 아내 복 하나만은 확실하게 타고났다고 자부심을 느낀다.
전업주부지만 아내의 꼼꼼한 배려와 따뜻한 내조 덕분에 나는 언제나 용기가 있고 무엇이건 자신감이 생긴다. 아내는 내게 든든한 버팀목이자 어머니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내가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받아 오면 대화와 안마로 위로해 준다. 아내는 사치나 허영심은 없고 언제나 검소하다. 우리 가정은 비록 부유한 환경은 아니지만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하지 않고 의식주 해결하며 소소한 행복을 누리고 산다.
우리 가정은 맞벌이 아닌 외벌이인데도 빚이 없다. 요즘 한 가구당 빚이 평균 8천만 원 안팎이라는 데 우리는 아내가 살림을 알뜰하게 한 덕택에 빚이 없이 산다. 요즘 빚이 없다면 믿지 않는 분위기다. 아내가 내 돈벌이 능력에 맞춰 살림을 소박하게 사니 빚을 지지 않고 살 수가 있다.
그리고 아내는 언제나 자신을 낮추고 내게 무엇이든 맞추려고 한다. 음식을 비롯해 집안 분위기 등을 내 중심으로 한다. 바깥에서 일해 고생한다며 집에 오면 편한 분위기를 만든다. 외식을 하더라도 내게 먼저 묻고 나를 왕으로 모시려고 한다. 집안의 가장인 내가 편안해야 가정이 편안하다며 늘 내 기분을 배려하고 의중을 살핀다. 그렇다고 내가 왕처럼 굴지는 않는다. 나도 아내나 자식을 위해 양보할 것은 양보하고 때때로 나의 고집이나 자존심은 내려놓곤 한다.
남들이 보면 아내는 전통적인 유교문화의 가부장적 사회 여인상이라고나 할까? 그렇지만 아내는 요즘 시대에 필요한 덕목도 갖추었다. 수시로 신문과 방송을 보고 들으며 시사정보를 얻고 재테크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아내가 적립식 펀드나 적금 등 재테크를 제대로 해서 아파트를 사는 데도 상당한 보탬이 됐다. 아내는 그야말로 현모양처(賢母良妻)로서의 자질을 갖추었다.
영국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이 “아내는 청년의 연인, 중년의 말상대, 노년의 간호부”라고 했다. 또한 유대인 경전 탈무드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누구인가? 그는 좋은 아내를 얻은 남자다.”고 했다. 이런 명언들은 나를 두고 한 말인 것 같다. 내게 아내는 둘도 없는 평생 친구요 인생의 동반자다. 천년지기이자 수호천사인 셈이다.
어려서 비록 가난했고 근엄한 아버지로 불안과 공포의 나날을 좀 보냈지만 어른이 돼 아내를 잘 만나 어린 시절의 한이 싹 풀린 기분이다. 아내는 ‘내 인생의 어부바’인 셈이다. 직장에서 일이 풀리지 않거나 업무 스트레스가 생겨도 집안에 들어가 나를 반가이 맞아주는 아내를 보면 스트레스가 풀리고 마음이 편해지며 힘이 솟는다. 아내가 세심하게 나를 챙기고 내 기분을 맞춰주며 조언까지 해주니 직장생활도 잘 풀려 어려운 승진마저 했다.
내가 아내보다 나이가 다섯 살 많지만 되레 아내가 나보다 더 어른스럽다. 세상살이 요모조모를 더 많이 알고 처세의 비법을 알려준다. 나는 아내 앞에서는 ‘소리 요란한 빈 깡통’에 불과하다. 그래도 나는 행복하고 즐겁다. 내게는 천군만마(千軍萬馬)와 같은 아내가 있으니 무엇이건 두렵지 않다.
나는 앞으로도 아내를 필생의 동반자이자 스승으로 삼으며 나머지 인생을 활기차게 살아갈 것이다. 아내를 보면 어머니 같기도 하고 스승 같기도 하며 경험 많은 선배 같기도 하다. “여자 말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는 말처럼 아내가 시키는 대로 하니 매사에 탈이 없고 무엇이건 잘 풀린다. 아내와 더불어 당당하게 살고 신나게 살며 멋지게 살고 져 주며 살자는 뜻의 ‘당신멋져’를 외치며 행복하게 살아갈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