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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천(鄭洊)
[생졸년] 1659년(효종 10)~1724년(경종 4) / 향년 65세
조선후기 영춘현감, 공조정랑, 금천현감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장원(長源), 호는 첨의당(瞻依堂). 정철(鄭澈)의 현손으로, 아버지는 원림처사(園林處士)정보연(鄭普衍)이다. 외숙인 민정중(閔鼎重)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1684년(숙종 10)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기사환국으로 인현왕후(仁顯王后)가 폐위되자 왕후의 친척이면서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였음을 부끄럽게 여겨 문과를 단념하고 송시열(宋時烈)의 문하에 들어갔다.
이 때 송시열이 두번에 걸쳐 올린 상소로 말미암아 유배당하게 되자 그를 유배지까지 따라가 모셨다. 1696년 왕명을 받아 장녕전참봉(長寧殿參奉)이 되고 이어 동몽교관·영춘현감을 거쳐 공조정랑을 지내고, 금천현감으로 나가 1년 동안 재직하다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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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랑 정공 묘지(正郞鄭公墓誌)
우암(尤菴) 문하에 한 시대의 훌륭한 인재들이 많았는데 처사(處士) 정보연(鄭普衍) 공은 더욱 뛰어났다. 처사의 지조는 우뚝하였는데, 매번 천지가 무너지고 세상이 뒤집어져 선비가 세상에 설 수 없다고 해서 공명의 기회에 뜻을 접고 산수 사이에 노닐었다.
선생이 그의 의기(意氣)를 높이 사서 기대함이 매우 남달랐는데 불행하게도 단명하여 세상을 떠나니 겨우 24세의 나이였다.
선생이 글을 지어 곡하며 말하기를,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였구나.”
하였으니, 공은 그의 아들이다.
공은 휘가 천(洊)이고 자가 아무개이니 숭정(崇禎) 기해년(1659, 효종 10)에 태어났다. 처사공(處士公)이 죽음을 앞두었을 때 공이 아직 포대기를 벗어나지 못했기에 편지를 써서 사문(師門)에 부탁하였다. 당시에 정씨(鄭氏) 집안은 한 가닥 머리털처럼 위태롭게 이어지고 있었는데, 모친 민 유인(閔孺人)이 밝은 견식이 있어 ‘여중군자(女中君子)’로 일컬어졌으니 온 마음으로 길러 어머니와 자식이 서로 의지하여 목숨을 부지하였다. 우옹(尤翁,우암 송시열을 말함) 또한 조정에 나갈 때마다 자주 들러보면서 혹 무탈하게 성장하여 처사공에게 훌륭한 후손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주기 바랐다.
공의 세덕(世德)은 그 바탕이 있었다. 송강(松江) 문청공(文淸公) 휘 철(澈)은 문장과 절의로 사림의 영수가 되었다. 이분이 휘 종명(宗溟)을 낳으니, 종명은 문과에 급제하여 부사를 지냈으며 판서에 추증되었다. 이분이 진선 휘 양(瀁)을 낳으니, 양은 병자호란 때 숙인 이씨(李氏)와 함께 강도(江都)에 들어갔다가 적을 만나 굴복하지 않고 모두 스스로 목을 베었으나 다행히 목숨을 부지하여 잇달아 소생하였다.
우암이 전(傳)을 지어 기록하였고 나중에 모두 정려문을 하사받았으니 이분들이 처사공의 부모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영특하였고 조금 자라서는 타고난 효성과 우애로 조부와 유인(孺人)을 섬김에 온청(溫淸)과 감지(甘旨)의 일을 성인(成人)처럼 의젓하게 행하여 보는 이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겨우 10세 때 진선공(進善公)이 세상을 떠나자 외롭게 더욱 의지할 데가 없어지니, 외숙 노봉공[老峰公, 민정중(閔鼎重)] 삼형제가 서로 데려가서 공을 길렀다. 유인이 노봉에게 가서 수학하라고 명하니 노봉은 자기 자식과 다를 바 없이 공을 가르치고 사랑하였다.
갑자년(1684, 숙종 10)에 공이 사마시에 합격하였는데,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이때 중전으로 있었다. 옛 규례에 왕후의 인척이 과거에 급제하면 반드시 사적으로 왕후를 뵙고 문후하였기에 방방(放榜)하던 날에 왕후가 하사할 물건을 마련해 놓고 기다렸으나, 공은 유인이 평소 궁중과 내왕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여 합격자 명단이 발표되자 궁궐 밖에서 곧장 돌아갔다.
공은 유인의 가르침을 받들어 과거공부를 그만두기로 결심하고 두문불출하며 교제를 끊었으며 내내 유인을 곁에서 모셨다. 이따금 화양동(華陽洞)에서 우암 선생을 따랐는데, 선생이 높은 산의 가파른 암벽을 보면 그때마다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네 부친의 기상이 꼭 이와 같았다.”
하였다.
처사공이 세상을 떠날 적에 또 공을 윤증(尹拯)에게 부탁하였기에 윤증이 낭패를 본 이후에 공은 차마 대번에 절교하지 못하고 선생에게 여쭈었다. 선생이 말하기를,
“네가 의리에 처신함이 너희 부친과는 조금 차이가 있으니, 어찌 기필코 절교한 뒤에야 마음이 시원해지겠는가.”
하였다.
공은 이때부터 다만 경조사에만 내왕하였다. 윤증이 일찍이 처사공의 묘문을 지어서 보냈는데, 공은 받기만 하고 쓰지는 않았다.
우옹이 전후로 귀양 갈 적에 공은 험난하고 먼 곳도 꺼리지 않고 그때마다 적소로 달려가 절하였다.
기사년(1689, 숙종 15)에 우암이 탐라(耽羅)로 귀양 갈 때에도 중도에 쫓아가 전송하였는데, 사계(沙溪, 김장생)의 묘를 지나게 되자 선생이 제문을 지어 공으로 하여금 묘에 가서 고하게 하였다. 우옹이 초산(楚山)에서 사약을 받게 되자 또 밤낮으로 달려가 관을 받들어 모시고 돌아왔다.
왕후가 사제(私第)로 물러나자 공은 달려가 문밖에 이르러 통곡하며 절하고 물러났다. 갑술년(1694, 숙종 20)에 중전이 복위되자, 공은 노봉의 아들 문효공[文孝公, 민진장(閔鎭長)]을 따라 문을 마주하고 살면서 옛 즐거움이 변하지 않았다.
병자년(1696)에 장녕전 참봉(長寧殿參奉)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뒤 모친의 병을 이유로 면직되었으며 다시 동몽교관에 제수되었다. 유인의 상을 당하여 삼 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고, 상기를 마치자 경안도 찰방(慶安道察訪)에 다시 제수되었는데 친혐(親嫌)으로 인해 성현 찰방(省峴察訪)으로 옮겼다.
임오년(1702)에 사헌부 감찰을 거쳐 영춘 현감(永春縣監)이 되었는데 정사가 대부분 잘 이루어지고 곤궁한 백성에게 우선적으로 은혜를 베푸니 골짜기의 백성이 지금도 공의 선정을 기리고 있다. 유영경(柳永慶)의 후손이 어사가 되어 옛날의 원한을 품고 공을 무함하였는데 공이 이로 인해 파직되어 마침내 제천(堤川)의 옛집으로 돌아갔다.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 권 선생이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는데 실로 처사공과는 동문(同門)의 교의가 있었기에 공이 자주 가서 문안하였고 수암 또한 이따금 와서 만났다. 공이 묘 옆에 새로 집을 지은 것을 보고 ‘첨의당(瞻依堂)’이라는 편액을 써주었다. 나의 큰 외숙 지재공(趾齋公 민진후(閔鎭厚))이 시를 지어 찬미하고 나 역시 화운하였다.
이후에 의금부 도사, 예빈시 주부, 평시서 령, 공조 정랑에 제수되고 금천 현감(衿川縣監)이 되었는데 1년 뒤에 체직되었다. 친지들이 대부분 궁벽한 골짜기는 노인이 살 곳이 못 된다며 가솔들을 이끌고 서울 집으로 돌아가길 권하였으나, 공은 선영이 여기에 있기에 차마 떠날 수 없었다.
마침내 갑진년(1724, 경 종4) 9월 29일 첨의당(瞻依堂)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66세였다. 집의 동쪽 작은 기슭 축좌(丑坐)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심숙인(沈淑人)이 78세의 나이로 을묘년(1735, 영조11)에 세상을 떠나자 부장하였다.
공은 사람됨이 관후하고 공손하여 사람이나 물건을 해하려는 마음이 절대 없었다. 어버이를 섬기는 효성에 근본하여 관직에 있을 적에는 그 직분을 다하기를 생각하였으며, 친족 간에 화목하게 지내는 정의(情誼)를 미루어 남들을 대할 적에는 정성을 바치는 데 힘썼다.
남의 잘못된 점을 보면 비록 드러내어 비난하지 않더라도 마음속으로 마치 더럽혀진 듯이 여겼으며, 남이 환난을 만나면 힘이 미칠 수 있는 데까지 그를 위해 도와주되 입으로 절대 그 일을 말하지 않았다. 항상 선조들이 모두 고상(高尙)함을 일삼았다고 여겼기에 권세가에게 의지하여 출세하려는 생각은 하지 않고 말하기를,
“선조에게 욕되지 않으면 다행이다.”
하였다.
평생 부친의 얼굴을 알지 못하는 것을 통한으로 여겨 남들로부터 부친의 유묵(遺墨)을 얻게 되면 보배로 삼아 간직하였다. 매일 새벽에 사당에 알현하였으며, 묘 아래에서 거처할 적에는 또 반드시 성묘하여 비록 노쇠하고 병들어도 그만두지 않았다.
과부가 된 늙은 고모가 있었는데 공은 모친처럼 고모를 섬겨 맛있는 음식이나 몸을 따뜻하게 하는 옷가지 하나라도 얻으면 꼭 보내드리며 종신토록 그렇게 하였다. 누이가 요절하자 남겨진 아이들을 데려다 성인이 될 때까지 길렀다. 의지할 데 없는 먼 친척에 대해서도 혼례와 상례를 도왔으며, 공에게 의지하여 끼니를 이어가는 고을 사람들도 많았다.
진선공이 평소 검소한 덕이 있었기에 공은 어려서부터 그 가르침에 젖어들어 집안일을 주관하게 되어서도 항상 어버이를 여의고 근심하는 듯 거친 베옷과 무명옷을 입었으며 늙어서도 한결같았다. 자녀들의 복식이 사치하고 화려하다 싶으면 통렬하게 금지시켰다.
새벽닭이 울면 반드시 세수하고 정좌하여 집안사람들에게 각기 할 일을 맡기니 집안이 엄숙하였다. 늘 자제들에게 경계하기를,
“근래의 습속이 대부분 마음과 입이 서로 맞지 않으니 내가 매우 부끄럽게 여긴다.”
하였다.
젊은이들을 만나면 반드시 우옹의 기상과 노봉의 가법을 거론하며 끊임없이 얘기하니, 공이 평생 수용한 바가 대부분 여기에서 나왔다.
숙인은 청송(靑松)의 벌열 가문으로 감찰을 지내고 판서에 추증된 약명(若溟)의 딸이다. 효성으로 시어머니를 섬기고 의리로 자식들을 가르쳤으며 집안일에 부지런하고 집안사람들을 자애롭게 대하니 온 친척들이 그 덕을 칭찬하였다.
장남 태하(泰河)는 의금부 도사를 지냈고 2남 관하(觀河)는 지금 성주 목사(星州牧使)이고 3남 익하(益河)는 문과에 급제하여 참판을 지냈고 4남 복하(復河)는 요절하였으며, 장녀는 이신좌(李藎佐), 2녀는 진사 이시덕(李蓍德), 3녀는 정랑 이보만(李普萬)에게 각각 시집갔다. 손자는 태하의 아들 규(槼), 관하의 아들 륜(棆), 익하의 아들 숙(橚)과 박(樸)이니 모두 진사이다.
공이 우리 모친과는 내외형제 사이로 어려서부터 함께 성장했기에 형제 같은 정의가 시종 쇠하지 않았다. 이제 여러 자식들이 묘지문을 부탁하기에 의리상 감히 사양할 수 없었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송강의 후손이요 / 松江後孫
노봉의 생질이라네 / 老峰宅相
고아로 스스로 분발하여 / 孤童自奮
옛 집안이 망하지 않았네 / 舊家未喪
늘그막에 녹봉을 위해 벼슬살이하면서도 / 晩從祿仕
오히려 강직함을 보였네 / 猶見骯髒
제천 골짜기의 구름 낀 산 / 堤峽雲山
고상한 선조들이 묻혀있으니 / 昔人高尙
만년에 돌아갈 적에 / 暮年賦歸
이곳을 버리고 어디에 의지하랴 / 舍玆安倣
첨의당이란 편액 / 瞻依之扁
수암 노인이 권면한 것이네 / 遂老攸奬
여기서 숨을 거두고 / 於焉畢命
집 뒤에 장사 지냈네 / 宅後之葬
인후하고 근검하니 / 仁厚勤儉
하늘의 좋은 보답 어긋나지 않아 / 善報不爽
자색 인끈을 찬 고관의 화려한 수레가 / 朱輪紫綬
찬란하게 오가네 / 有煒來往
내가 이 무덤에 기록하니 / 我識厥幽
영원히 잊지 말지어다 / 永世不忘
[脚註]
[주01] 정랑 정공 묘지 :
저자가 정천(鄭洊, 1659~1724)을 위해 쓴 묘지명이다.
[주02] 천지가 …… 뒤집어져 :
명(明)나라가 멸망하고 청(淸)나라가 들어선 것을 뜻한다.
[주03] 하늘이 …… 하였구나 :
《논어》〈선진(先進)〉에 “안연(顔淵)이 죽자 공자께서 말씀하기를 ‘아,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였구나.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였구
나.[天喪予, 天喪予.]’”라고 하였다.
[주04] 우암이 …… 기록하였고 :
《송자대전(宋子大全)》권144〈정씨강도함패기(鄭氏江都陷敗記)〉를 가리킨다.
[주05] 온청(溫淸)과 감지(甘旨) :
온청은 자식이 겨울에는 어버이를 따뜻하게 해 드리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 드리는 일을 가리키고, 감지는 자식이 어버이에게 맛난
음식으로 봉양하는 것을 가리킨다.
[주06] 유영경(柳永慶)의 후손 :
유술(柳述, 1656~1726)을 가리킨다.
[주07] 나의 …… 화운하였다 :
본서 제2권에 수록되어 있는〈종숙 정 수부공(鄭水部公)이 제천(堤川)에 있을 적에 첨의당 팔절(瞻依堂八絶)을 보내어 말하기를
“이는 나의 내형 지재공(趾齋公)의 시이고, 당의 이름은 실로 수암공(遂菴公)이 짓고서 손수 쓰신 것이다. 이 사이에 어찌 그대의
글이 없어서야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불우하던 내 처지가 종숙의 처지와 똑같은지라, 지금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未記], 형제가 드물다
[終鮮]’라는 구절을 세 번 읽으며 눈물을 흘렸다. 다만 나는 선영과 멀리 떨어져 있어 때마다 성묘도 할 수 없는 처지이니, 우리 종숙
과 비교하면 어떠한가. 슬프면서도 부끄럽고 한편으로는 부럽다.
더구나 외숙 지재공과 수암옹이 이미 연이어 세상을 떠났으니 그 남은 자취가 더욱 슬프다. 마침내 삼가 차운하여 보낸다.
[鄭從叔水部公在堤峽寄示瞻依堂八絶曰是吾內兄趾齋公詩而堂之名實遂菴所命而手書之此間惡可無子語不肖少也孤情事竛
竮與吾叔同耳今於未記終鮮之句爲之三復失涕顧隔遠松楸不能以時埽灑視吾叔何如哉旣悲而愧且羨也況舅氏與遂翁已相繼下
世陳迹益可悲。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