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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지고 잊혀진 유적지를 찾아서 경산 가는 길
경북 경산은 대구에 인접해 있어 사실상 생활권은 대구에 속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학도 많으며 예로부터 삼성현(원효.설총.일연)의 출생지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경산은 팔공산 자락의 사찰들과 곳곳에 유적지가 많으나 잘 알려지지 않은 곳들이 많아 가까운 거리부터 둘러보았다.
처음 하양역에서 출발하여 팔공산 자락에 위치한 원효암을 찾아갔다. 갓바위 가는 길로 가다가 도로변에 크게 원효암이란 표지석이 있다. 매번 지나치기만 하였지 가 보기는 처음이다. 극락전을 중심전각으로 산령각과 요사채가 있는 작은 암자이나 전체적인 분위기는 조용한 산사답다는 느낌이다.
→ 원효암 삼층석탑
극락전 앞에는 고려시대로 추정되는 삼층석탑이 남아있는데 부재가 일부 없어져 완전치 못하다.
뒤편에 대나무 숲 사이를 헤치며 산길을 조금 오르면 주형의 감실 안에 모셔진 마애불이 있다. 일반 서적에는 이 마애불을 소개한 책은 없으나 지역내에서 발간한 향토지에 소개가 있어 찾아가 보았다. 육계가 크고 귀가 길게 표현되어 있는 이 불상은 연화좌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 계신다.
조각 수법이 그리 좋지 않은 곳으로 보아 고려시대 초기 작품으로 보인다. 아직 사람들의 손길이 잘 닿지 않은 곳이어서 인지 이끼가 많이 끼어 있고 전체적으로는 음습한 느낌이 드는 곳에 있으나 조용하고 한적하여 마음을 다스리기에는 안성맞춤의 장소인 듯 하였다.
또한 이 곳 산 계곡에는 원효대사가 수도하였다는 석굴과 물맛 좋기로 유명한 샘물이 있다고 한다.
다시 화양읍내로 나와 경산시로 가서 영남대학교 인근 지금의 경산 중학교 근처의 큰 못을 갔다. 이 곳은 남매지로 통하는데 왜 남매지라 부르는지 그 어떠한 내력도 설명해 놓은 안내판은 없다. 허나 주변의 사람들은 다 남매지라 하면 안다.
이 곳 남매지는 경산시 계양동에 위치한 연못으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조선 선조때 인근 마을에 오누이가 눈먼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오빠는 머슴살이를 하면서 틈틈이 공부하여 입신양명을 꿈꾸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과거에 낙방하여 화병으로 숨진 남편을 잃은 슬픔에 울다가 눈이 멀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들은 과거에 꼭 합격하여 아버지의 원을 풀어드리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여동생이 황부자집에 식모살이 할 것을 약속하고 마련하여 준 노잣돈으로 오빠는 과거를 보러 떠나고, 이 틈을 이용하여 황부자집 아들이 강제로 여동생을 겁탈하자 목숨보다 귀중한 정절을 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한 여동생은 연못에 몸을 던졌고 딸을 건지려던 눈먼 어머니마저 목숨을 잃었다. 한편 한양간 아들은 장원급제하여 금의환향했으나 기다리는 것은 청천 병력같은 슬픈 소식뿐이었다. 살아갈 의욕을 잃어버린 아들은 보름달이 눈부신 어느 날 어머니와 여동생이 잠든 연못속으로 걸어 들어 갔다. 그 후 마을 사람들이 불쌍한 오누이를 기리기 위해 이 못을 남매지라 불렀다고 하는 슬프고도 슬픈 전설이 깃든 역사의 현장이다.
다음으로는 경산중학교(현 장산중학교)에 사진상으로만 보아오든 석조물들이 많아 그 곳을 찾아가기로 했다. 막상 찾아가니 이 곳에는 석조물들이 없었다. 학교내에 아실만한 선생님께 문의하니 옮겨가기는 했는데 어디로 옮겨 간 것인지는 알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경산시청 새마을과에 문의하니 현재 계암정수장 수도사업소로 옮겨다 놓았다 한다. 왜 옮겨다 놓았는지는 모른다 하니 이 석조물들의 위치 변동에 대해서 그 누구가 안단 말인가?
일부 책에는 이 곳의 석조물 중 부도는 경흥사지내의 부도로 추정하였고, 또 다른 책에는 신림사지에서 옮겨 간 석조물들이라고도 하며, 또한 일제시대 경산에서 公醫로 있던 久米라는 이가 자기 집 정원의 장식물로 석등과 탑재 등을 가져가고 그 기초석 일부가 전하고 있는데 이 久米가 가지고 간 유물 중 이동이 간편한 것은 광복 후 일본으로 가져간 듯 하고 그 일부가 이 석조물들이라고도 한다.
이제 조금은 외곽지인 남천면 산전리 동학산 자락에 위치한 경흥사를 찾아간다. 찾는 길 이정표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주변만 30여분 헤매였다.
이 곳에는 경흥사 목조 삼존불좌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46호)가 있는데 현재 대웅전에 내에 봉안되어 있으며 은행목으로 만든 불상 중 도내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고 한다.
1970년대 개금불사시에 주존불의 복장에서 조선 인조22년(1644)에 달성 동고 서사선이 쓴 복장기가 나와 이 불상의 조성내력과 경흥사의 중창내력을 알 수 있다.
이 삼존불상은 목장기에서 밝히고 있듯이 임진왜란 때의 승병장으로 싸우다 금산전투에서 순국한 영규대사와 이름이 같은 스님이 화주가 되어 전국을 돌며 탁발을 하여 1637년 정축년에 조성한 것이다.
본존불은 결가부좌를 한 석가모니불로서 두발은 나발이고 둥그스름한 작은 육계가 있다. 잘 정리된 이목구비와 삼도를 갖춘 상호는 온화한 모습이다. 양어깨에 걸쳐진 통견 양식의 법의와 가슴 아래 수평으로 가로질러 있는 군의는 두텁고 주름이 잘 드러나 불상 제작의 뛰어난 기법은 보여준다. 항마촉지의 수인을 했으며, 왼손은 무릎 위에 가볍게 놓고 엄지와 장지를 둥글게 만들고 있다.
좌우의 보살좌상은 문수ㆍ보현보살로 모두 화려한 보관을 쓰고 주존불인 석가모니불을 협시하고 있으며, 양쪽으로 내려진 머리카락은 두 귀를 감싸면서 어깨 위로 드리웠고 수식이나 다른 장식을 하지 않았지만 조성 솜씨가 매우 빼어나다.
이들 불상은 원래 지금의 명부전에서 대웅전이란 현판 아래 봉안되어 있었는데 1993년 현재의 대웅전을 완공하여 옮겨 봉안하였다.
명부전에는 경산시 압량면 부적리에 있는 삼룡사 아미타불을 이운하여 봉안하였다. 명부전에 아미타불을 모시고 있는 것이 특이하며, 예전에 수미단은 그대로 두었는데 상단 일부에 조각이 남아 있으나 그 조각이 영천 은해사 백흥암 극락전 수미단 조각과 비슷한 것처럼 상태가 아주 좋게 잘 남아 있었다.
대웅전 위쪽으로는 자미전과 독성전이 남아 있으며 경내의 동쪽에는 조선시대 석종형 부도들이 남아 있다.
아직도 많은 숨겨진 유적지가 많으나 교통편과 시간이 맞지 않아 발길을 돌리나 아직 반룡사, 제석사, 안흥사, 혜광사 등의 사찰과 또한 고택과 산성 등 볼 유적지가 많이 있다.
언제 기회를 보아서 틈틈이 찾아보아야 하는 그런 곳들이다. 늘 알려진 유적지만 다니다 모처럼 너무나 조용하고 한적한 곳들이어서 휴식을 즐기듯 느긋하게 여유로움으로 다녀온 장소들이었다.
<붓다뉴스> 김환대 (2004. 2)
첫댓글 관세음 보살_()_
잘보고 갑니다 여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