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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9월 24일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 주일 [예수닮기를 시리즈 설교]
제목 : 사랑하고, 기뻐하고, 화평하라!
본문 : 갈라디아서 5장 22~23절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런 것들을 막을 법이 없습니다. <새번역>
‘이 시대에 교회의 사명은 무엇인가?’ 라고 누군가 저에게 질문한다면, 저는 조심스럽게 이렇게 대답하고 싶습니다. “‘그러나’를 이루어 가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이 시대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희망입니다.
이 시대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이 시대에는 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진리를 선포하는 곳입니다.
이 시대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평화를 이루어가는 곳입니다.
물론 많은 교회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손가락질을 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확신합니다. 교회가 교회되고, 예배가 예배되고, 성도가 성도될 때 이 모든 손가락질은 찬사로 바뀔 것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 때까지 우리 교회부터 ‘그러나’의 사명을 잘 감당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세상의 법칙이 아무리 기승을 부리더라도, ‘그러나’ 우리는 끝까지 말씀의 세대로 이 땅을 살아갈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시대를 감당하시고, 승리하셨던 분이셨습니다. 육체의 행실이 판치던 시대였습니다. 음행과 더러움과 방탕, 우상숭배, 마술, 원수맺음, 다툼, 시기, 분냄, 분쟁, 분열, 파당, 질투, 술취함, 흥청망청 먹고 마시는 놀음이 가득한 시대였습니다. 예수님 시대와 지금 시대는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시대에 ‘판’을 완전히 뒤집어 놓으셨던 분이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입니다. 다른 어떤 방법을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신갑주, 말씀을 입고, 말씀으로 힘써 싸워 이기며,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직접 실천하심으로 완전히 다른 시대를 열어가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들이 어떤 것인지를 먼저 삶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 본이 되어 주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마태복음 11장 29절, 새번역>
실로 예수님께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육체의 행실만이 가득한 이 세상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써 내려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런 것들을 막을 법이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 새번역>
이제 우리가, 직접, 이 ‘그러나’의 길을 걸어가야 할 때가 왔습니다. 그런데 그 길을 걷기 위해 꼭 필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이 가신 길을 따라 걸어가기 위해서는 예수를 닮아야만 가능한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분이 이 땅에서 보여주셨던 그 성품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야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의 성품이 나의 성품이 되어 예수가 보여주셨던 그 ‘변화’의 길을 걸어가는 존재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3일이 지나서 예수님은 말씀하신대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미 약속하신대로 제자들을 만나러 디베랴 호수로 발걸음을 옮기셨습니다. 거기에는 베드로와 도마와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제자들 가운데서 두 사람이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모두 자신을 버리고 도망친 제자들이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정말 꼴도 보기 싫은 배신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만나러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아침 식사를 준비하십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 <요한복음 21장 12절A, 새번역>
아침 식사에 독약이라고 넣고 싶은 것이 너무도 좁은 제 마음인대, 예수님은 식사를 권합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모두 돌처럼 굳어 버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오히려 또 한 걸음 다가 가셨습니다.
예수께서 가까이 오셔서, 빵을 집어서 그들에게 주시고, 이와 같이 생선도 주셨다. <요한복음 21장 13절, 새번역>
이미 예수님에게는 ‘용서’라는 단어보다, ‘분노’라는 단어보다, ‘실망’이라는 단어보다, 더 중요한 단어 밖에 남아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십니다. 자신을 버리고 도망쳤던 제자들을 사랑하십니다. 자신의 말씀을 지키십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는, 자기가 이 세상을 떠나서 아버지께로 가야 할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요한복음 13장 1절, 새번역>
저는 사도 요한이 훗날 이 요한복음서를 기록할 때, 이 구절을 적으면서 정말 목 놓아 울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정말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바로 자신부터, 제자들부터 그 사랑을, 그 넘치는 사랑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예수님은 변함없이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질문하신 것입니다. 그것도 3번씩이나 말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복음 21장 15/16/17절, 새번역>
이 와중에 ‘사랑타령’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가지신 성품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사랑’이라는 것에서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이 ‘사랑’이 가장 중요한 것임을 다시 한 번 인식시켜 주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이야말로 만물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람의 모든 말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될 뿐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절, 새번역>
그 어떤 성품도 사랑을 기초로 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오히려 베드로에게 질문하심으로 알려 주십니다. 사랑한다는 말 백 번 보다 행동 한 번으로 보여주신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베드로를 드디어 숨 쉬게 했고, 다시 새로운 사명의 길로 들어설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훗날 베드로는 이 날을 회상하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 줍니다. <베드로전서 4장 8절, 새번역>
이것이 우리가 배워야 할, 닮아가야 할 예수님의 첫 번째 성품, ‘사랑’입니다. 내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배웠다면, 나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마음에서부터 시작하는 삶입니다. 이해를 넘어 있는 그대로의 받아들임의 삶입니다. 용서를 넘어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삶입니다. 모든 것이 ‘나에게 먼저’를 넘어, ‘내가 먼저’로 옮겨가는 삶입니다. ‘나’라는 울타리를 넘어, ‘우리’라는 기쁨을 알아가는 삶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배워야 할 예수님의 첫 번째 성품, 사랑이라고 풀어서 설명해 드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발걸음은 많은 시간 가벼우셨습니다. 제자들이 볼 때 예수님이 가는 길은 늘 사랑하는 이들을 만나러 가는 길처럼 보였습니다. 실제로 너무도 고된 일정을 소화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절대 잃지 않으셨던 한 가지가 있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쁨’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씀드리자면 ‘근원적 기쁨’입니다. 조건부 기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조건에 따라 기뻐할 수도, 기뻐하지 않을 수도 있는 기쁨을 소유하신 것이 아니라 불변의 기쁨, 근원적으로 기쁨이 샘솟는 성품을 소유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항상 기뻐하라’ 라는 말씀이 어떤 뜻인지 가장 분명하게 알고 계셨던 분이심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하나임을 분명히 알고 계셨기에 그 어떤 상황에서도 기뻐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네가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자기의 일을 하신다. <요한복음 14장 10절, 새번역>
그래서 이 기쁨의 반대말은 결코 슬픔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가지신 이 기쁨이라는 성품의 반대말은 오로지 ‘하나님의 부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고 보니 예수님은 딱 한 번 이 기쁨을 잃어버리셨던 적이 있었습니다.
세 시에 예수께서 큰소리로 부르짖으셨다.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다니?" 그것은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는 뜻이다. <마가복음 15장 34절, 새번역>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이 ‘임마누엘’이라는 것에 다시금 깊은 감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를 깨닫는 자만이 이 변하지 않는 기쁨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린 아이들을 보면서 이 기쁨이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언제 가장 기쁨이 충만한지 아십니까? 바로 부모와 함께 있을 때입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있을 때입니다. 아무 걱정이 없습니다. 마음껏 기뻐합니다. 걱정, 근심, 슬픔이 찾아올 이유가 없습니다. 함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저 기쁨만이 충만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면에서 하나님 앞에 완전히 어린 아이셨습니다. 메시아였고, 스승이었고, 위대한 분이었지만, 오직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행복하고 기쁘셨던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으로부터 시작하여 늘 기쁨의 소식, 복음을 전하러 다니셨던 분입니다. 그러니 사람을 만나는 게 기쁨입니다. 그 어떤 상황을 만나도 기쁨입니다. 혼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이것이야말로 샘솟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동행’, ‘하나님의 임재’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에게는 최고의 기쁨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기쁨을 그래서 성품으로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기쁨이라는 것이 조건이 아니라 믿음이며, 확신이라는 것을 성품으로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권면하시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다시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빌립보서 4장 4절, 새번역>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은, 예수를 닮기 원하는 사람은, 말씀대로 살기를 원하는 이는 누구나 이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 안에서’ 항상 기뻐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기뻐하신 것처럼 우리도 기뻐해야 합니다. 결코 흔들리지 않는 ‘근원적 기쁨’을 모두가 성품으로 소유하게 되시길 소망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 믿음이 우리에게 ‘기쁨’이라는 성품으로 점점 자리잡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기쁨’이 바로 우리가 닮아가야 할 예수님의 성품, 두 번째입니다.
이제 때가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손에는 그 어떤 무기도 들려 있지 않았습니다. 비폭력주의자라서가 아닙니다. 진짜 평화가 무엇인지 본인이 가지셨던 성품, ‘화평’으로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평화가 말 뿐만이 아니라 충분히 이루어 질 수 있다는 것을 십자가를 지심으로, 그 어떤 복수도 하지 않으심으로, 말씀에 순종함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을 믿는 사람들이 가진 평화이며, 화평을 이루는 방법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방법을 가장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이루어가는 성품이 바로 ‘화평’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화평의 아이콘이셨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성품, 화평을 세 번째로 닮아가야 합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화평케 하셨습니다. 남과 여, 세대와 세대, 부자와 가난한 자, 강자와 약자, 모든 갈등이 있던 곳에서 ‘Peace Maker’가 되셨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방법으로 행동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질서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계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방법과 질서 속에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정하셨던 분이셨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서 평화를 이루는 화평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방법과 질서를 삶에서 실천하심으로 화평을 이루어 가셨던 분이십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태복음 5장 9절, 개역개정>
그리고 이 말씀에 대한 결과는 바로 많은 사람들의 반응이었습니다.
백부장과 그와 함께 예수를 지키는 사람들이, 지진과 여러 가지 일어난 일들을 보고, 몹시 두려워하여 말하기를 "참으로,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하였다. <마태복음 27장 54절, 새번역>
정말로 예수 닮기를 원하십니까? 예수를 닮아, 하나님의 자녀라는 평가를 듣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셨던 방법을 우리도 똑같이 따라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전부 하나님의 방법이었고, 질서였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기 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 밭의 기초를 튼튼히 세우는 것입니다. 모든 마음 밭의 기초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에서부터 모든 성품이 흘러나올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다시 한 번 강력하게 강조합니다. 이 사랑은 바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먼저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리고 나를 사랑하듯이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자 결단하십시오. 그러면 예수님이 보여주셨던 그 사랑이라는 성품이 무엇인지 삶을 통하여 발견하게 되실 것입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과의 동행’이라는 기쁨을 소유하시길 축복합니다. ‘임마누엘’ 이란 예수님의 이름에 대한 믿음이 확신이 될 때 이 기쁨은 감정 표현이 아닌 우리의 성품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상황 속에서 ‘항상 기뻐할 수 있음이’ 정말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많은 이들에게 보여주게 되실 것입니다. 조건부 기쁨을 결코 쫓아가지 마십시오. 우리의 기쁨은 하나님의 동행과 임재로부터만 온전하게 유지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과 질서로 평화를 이루어가는 화평을 이루시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어딜 가시든 화평을 이루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평가를 받으셨던 예수님을 닮아 우리가 가는 모든 곳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이 드러나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가진 화평이란 성품을 통해 평화가 이루어짐도 멋진 일이지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더욱 행복한 일이 일어나게 되실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이 성품을 소유한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예배자 여러분! 예수 닮기를 원합니다. 이제 새로운 성품으로 변화될 시간입니다. 이제 내가 가진 세상에 속한 성품을 버리고 예수님이 보여주신 성품을 닮기 원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사랑을 소유하고 사랑을 완성합시다. 기쁨을 소유하고 기쁨을 전파합시다. 화평을 소유하고 평화를 이루어 갑시다. 시대가 아무리 악해졌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너무 많이 변했다고 하더라도! 이젠 더 이상 사랑이 없다고 하더라도! 도무지 기쁨이 없다고 하더라도! 세상엔 평화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랑하고, 기뻐하고, 화평합시다!”
여러분의 삶 속에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새 생활 가운데 더욱더 새로워져 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을 창조하신 그분의 모습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이 삶 속에서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이 점점 더 자라날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10절, 쉬운성경>
결단 찬양 - 예수 닮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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