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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 본관 | 장인 | 아들 / 딸 | 친부 | 참고사항 |
신덕린 申德隣 | 고령 | 1세 신호 臣扈 | 子 신포시★ 申包翅 | 신사경(申思敬) | 증손 신숙주★ 曾孫 申叔舟 |
안문언 安文彦 | - | 1세 신호 臣扈 | 女 정의 鄭義 | - | 外孫 鄭安道 外孫 鄭安止 |
박가흥 朴可興 | 순천 | 2세 윤부 允孚 | 子 박석명 朴錫命 | 천상 天祥 | 사위 鄭安道 사위 鄭安止 |
탁신 卓愼 | 광주 | 3세 인진 麟晉 | 女 정충효 鄭忠孝 | 광무 -판서 光茂 | 탁신★ 시호 문정 卓愼 諡號 文貞 |
★신포시(申包翅) (1361년(공민왕 10) ~ 미상)
본관은 고령(高靈). 검교군기감사(檢校軍器監事) 신성용(申成用)의 현손으로, 할아버지는 신사경(申思敬)이고, 아버지는 전서 신덕린(申德隣)이다.
1383년(우왕 9)에 생원으로 식년문과에 급제, 조선 개국 후 좌사간 등 언관의 직임을 수행하면서 불교배척, 양천의 분별에 관한 주장을 펼치는 등 개국 초창기에 있어서 문물제도의 설행에 유교이념적 언론활동을 하였다. 뒤에 벼슬이 공조참의에 이르렀고, 죽은 뒤에는 찬성에 증직되었다
★신숙주(申叔舟) (1417~1475)
자는 범옹(泛翁). 호는 보한재(保閑齋)ㆍ희현당(希賢堂). 훈민정음 창제에 공을 세웠으며, ≪세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고 ≪동국통감≫ㆍ≪오례의≫를 편찬하였다.
★박가흥(朴可興)
1347(충목왕 3)~1427(세종 9).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순천(順天). 평원부원군(平原府院君) 박천상(朴天祥)의 아들이며,
우왕 때 밀직부사를 지냈으나 1388년(우왕 14) 이인임(李仁任)이 숙청당하여 경산부(京山府)에 유배되자 그에 연루되어 순천으로 귀양갔다.
공양왕 때 중낭장 이초(李初)와 윤이(尹彝)가 명나라에 있으면서 명나라의 힘을 빌려 시중 이성계(李成桂)를 제거하려고 모의하였다. 당시 사신으로 명나라에 머무르고 있던 순안군 방(順安君昉)과 동지밀직사 조반(趙胖)이 돌아와 그 사실을 임금께 알렸다.
1390년(공양왕 2)이색(李穡)·우현보(禹玄寶) 등 수십명이 하옥되는 이초의 옥사가 일어났다. 이 때 연루된 김종연(金宗洐)을 숨겨주는 등, 이성계 제거에 협력하다가 붙잡혀 유배당하였다
사위 – 정안도 정안지
★탁신(卓愼) 1367(공민왕 16)∼1426(세종 8).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자기(子幾)·겸부(謙夫)·계위(係危), 호는 죽정(竹亭). 평장사 영(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직제학 문위(文位)이고, 아버지는 좌간의대부 광무(光茂)이며, 어머니는 판종부시사 박지연(朴之衍)의 딸이다.
1389년(공양왕 1) 식년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고 1408년 집의를 거쳐, 그 해 8월 언관으로서 태종의 사위 평양군(平壤君) 조대림(趙大臨) 죄를 청하는 소를 올렸으니 태종의 노여움을 사 1409년 나주에 장류(杖流)되었다.
곧 사면되어 1416년 지신사(知申事)·경승부윤(敬承府尹)·이조참판을 거쳐, 1418년(세종 즉위년) 예조참판·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에 올랐다. 1419년 예문관제학을 지냈고, 1423년 의정부참찬에 올랐다. 경학(經學)에 밝았고, 무예·음률에도 능하였다. 성주의 오계사(梧溪祠)에 배향되었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이 름 | 본관 | 장인 | 아들 / 딸 | 친부 | 참고사항 |
이질 李垤 | 고성 | 4세 지당 之唐 | 子 이칙 (李則) | 이원(李原)★ | 이원(李原) 좌의정 |
윤처관 尹處寬 | 남원 | 4세 존 存 | 子 윤효손(尹孝孫)★ | 윤희(尹希) -監務 | 윤효손 신도비 - 보물 |
이형 李蘅 | 양성 | 4세 존 存 | 女 양팽로 ★ 梁彭老 |
| 외손 장석 張錫 흥덕인 |
모순 牟恂 | 진주 | 4세 존 存 | - | 모세택(牟世澤) | 모순 – 효행 정려각 ★ |
방계문 房戒文 | 남양 | 4세 존 存 | 방귀온(房貴溫) ★ | 방구성(房九成)) | 방귀현 – 종형 문과급제 |
★이원(李原) (1368~1430)
고려 말기ㆍ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차산(次山). 호는 용헌(容軒).
15세에 진사, 18세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우의정을 지냈다.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윤효손(尹孝孫) - 외손
본관 남원(南原). 자 유경(有慶). 호 추계(秋溪). 시호 문효(文孝). 부는 지순창군사(知淳昌郡事) 처관(處寬)이다. 1453년(단종 1)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저작(著作) 박사, 1457년 중시문과(重試文科)에 급제, 우헌납(右獻納)에 특임되었다.
1470년(성종 1) 통례원 좌통례로서 《경국대전》 《오례의주(五禮儀註)》를 수찬, 호조참의를 지냈다. 1475년 전주부윤으로 치적을 올려 금단의(錦段衣)를 하사받고, 대사헌을 지냈다.
1489년 명나라에 갔다 오는 길에 《활민대략(活民大略)》 《속자치통감강목(續資治通鑑綱目)》 등을 구입, 왕에게 진상하고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하였다. 1493년 경상도 양전순찰사(量田巡察使), 형조판서를 거쳐 우참찬으로서 성균관동지사 ·춘추관지사 등을 겸직, 《성종실록(成宗實錄)》 편찬에 참여, 좌우참찬에 이르렀다.
★모순(牟恂)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순지(恂之), 호는 절강(截江).
부친은 첨정(僉正) 모세택(牟世澤)이고, 장인은 정존(鄭存)이다. 김숙자(金叔滋)와는 과거시험을 치를 때 알게 되어 교유하는 사이가 되었다.
1417년(태종 17) 정유(丁酉) 식년시(式年試) 동진사(同進士) 6위에 급제하여 좌사간, 의정부 사인과 검상 등을 지냈는데 지합천군사(知陜川郡事)로 재임하던 중에는 선정을 베풀었다. 1455년(세조 1)에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녹훈(錄勳)되었으나, 진주(晉州)사봉면(寺奉面) 방촌리 은거하였다.
효행이 지극하여 어머니의 장례 때에 강물이 불어 장지로 갈 수 없자 하늘을 우러러 크게 통곡하니 강물이 갈라졌다고 한다. ‘절강(截江)’이 그의 호가 되었다. 세종 조에 정려(旌閭)를 받았는데 방촌리 등건에 세워졌다고 한다
★ 방귀온(房貴溫) 1465년(세조 11) ~ 미상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옥여(玉汝), 호는 금서(錦西). 의원이었던 사량(士良)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구성(九成)이고, 아버지는 사정(司正) 계문(戒文)이며, 어머니는 정존(鄭存)의 딸이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며 효행이 지극한 자로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519년 현량과(賢良科)에 3등으로 급제,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이 되었다가 같은 해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유배되었다. 1538년 이조판서 윤인경(尹仁鏡)의 상소로 인하여 신원(伸寃 :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었다.
이 름 | 본관 | 장인 | 아들 / 딸 | 친부 | 참고사항 |
박이온 朴而溫 | 순천 | 5세 이효 以孝 | 子 박운손(朴雲孫) | 박숙선(朴叔善) | 박이온 승평군★ 朴而溫 昇平君 |
한훈 韓訓 | 청주 | 5세 찬우 纘禹 | 系子 한곤(韓鵾) | 한충인(韓忠仁) | 매형 신수근★ 妹兄 愼守勤 |
강윤범 姜允範 | 진주 | 5세 계우 繼禹 | 子 강자명(姜自明) | 강맹경(姜孟卿)★ | 강회백(姜淮伯) - 조부 |
양돈 楊墩 | 남원 | 6세 승순 承順 | 子 양공건(楊公健) | 양자유(楊子由) 대제학 | 외손 장건(張健) 興德人 - 군수 |
임만근 林萬根 | 평택 | 6세 절 晣 | 子 林毗 林畡 林畯 | 임종직(林從直) 증 참의 | 신광한 – 사위 대제학★ |
★ 박이온(朴而溫) 1461년(세조 7)~1524년(중종 19).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자화(子和). 본관은 순천(順天).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 박숙선(朴叔善)의 아들로 1496년(연산 2) 병진증광사마시(丙辰增廣司馬試)에 생원 3등으로 합격하였고, 관직이 철원부사(鐵原府使)에 이르렀다.
1506년(연산군 12) 중종반정(中宗反正)에 별제(別提)로서 참여하여 정국사등공신(靖國四等功臣)이 되었고, 이후 공조판서(工曹判書)와 승평군(昇平君)의 훈작을 받았고 사당에 배향되었다.
★ 신수근(愼守勤) 1450 ~ 1506
본관 거창(居昌). 자 근중(勤仲). 호 소한당(所閒堂). 시호 신도(信度). 성종 때 음보로 장령(掌令)이 되어 우부승지 ·중추부첨지사 ·호조참의를 역임하고 1495년 연산군비가 된 누이의 덕에 승지가 되었다. 같은 해 선위사(宣慰使)로서 평안도 지방을 순회하고 우승지 ·도승지 ·이조판서 등을 거쳐 우찬성(右贊成)에 올랐다가 파직되었다. 1504년 다시 돈령부첨정(敦寧府僉正)에 기용, 이듬해 우의정으로 등극사(登極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1506년 좌의정에 올랐다. 이때 사위인 진성대군(晉城大君: 中宗)을 옹립하고 함께 반정(反正)을 도모하자는 박원종(朴元宗) 등의 제의를 거절했다가 중종반정이 성공하자 3형제가 유자광(柳子光) 일파에게 살해되었다.
★ 강맹경(姜孟卿) 1410(태종 10)∼1461(세조 7).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자장(子章). 문하찬성사 강시(姜蓍)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동북면순무사(東北面巡撫使) 강회백(姜淮伯)이고, 아버지는 지창녕현사(知昌寧縣事) 강우덕(姜友德)이며, 어머니는 지보주사(知甫州事) 이혜(李蕙)의 딸이다.
1429년 중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우부승지, 도승지 이조참판, 계유정난(癸酉靖難)에 공훈, 예문관제학·의정부우참찬을 역임하였다. 단종의 왕위를 수선(受禪: 선양으로 받음)에 협력 좌익공신(佐翼功臣) 2등에 책정되고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에 봉해졌다.
1458년 좌의정을 거쳐 이듬해 영의정에 승진되었다. 신숙주(申叔舟)가 비명(碑銘)을 지었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 양자유(楊子由)
1444년(세종 26)∼1495년(연산군 1). 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희철(希轍), 호는 귀은(龜隱)이며, 본관은 남원(南原)이다. 부는 진주판관(晉州判官) 양연(楊淵)이고, 외조부는 이조판서(吏曹判書) 최부(崔府)이다. 전라북도 순창군(淳昌郡) 구미리(龜尾里)에서 태어났다.
1468년(세조 14) 무자(戊子) 춘당대시(春塘臺試) 병과(丙科) 21위로 문과 급제하였다. 이후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홍문관박사(弘文館博士),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장령(掌令), 집의(執義), 금산군수(錦山郡守) 등을 역임하였다. 또한 『세조실록(世祖實錄)』과 『예종실록(睿宗實錄)』의 찬수관(纂修官)을 지냈으며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책훈되었다.
★ 신광한 [申光漢]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한지(漢之) 또는 시회(時晦), 호는 낙봉(駱峰)·기재(企齋)·석선재(石仙齋)·청성동주(靑城洞主). 공조참판 장(檣)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의정 숙주(叔舟)이며, 아버지는 내자시정(內資寺正) 형(泂)이다. 어머니는 사포(司圃) 정보(鄭溥)의 딸이다.
영성(靈城)부원군에 봉해졌으며, 대제학(大提學) 좌찬성(左贊成)에 지냈다. 나중 궤장을 하사받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이 름 | 본관 | 장인 | 아들 / 딸 | 친부 | 참고사항 |
윤정 尹鼎 | 파평 | 7세 명덕 明德 | - | 윤승세(尹承世) | 慶徽翁主-兄嫂 尹鼐 - 長兄 ★ |
신변 申忭 | 고령 | 7세 명덕 明德 | 子 신여추 申汝樞 女 永陽副守 李春福 | 신용관 申用灌 | 父 申㴐 祖 申叔舟(領相) |
박민고 朴敏古 | 충주 | 7세 만종 萬鍾 | 女 양산욱 梁山旭 | 박상 ★ 朴祥 | 눌재집 |
김효량 金孝良 | 분성 | 7세 천종 千鍾 | 子 김숭수 金承壽 女 김천일 ★ 金千鎰 | - 김중기(金重器) | 金千鎰 창의사 진주혈전 중 전사 |
왕빈 王儐 | 게성 | 7세 지 祗 | 子 왕경우 王景祐 文科 | 왕희걸(王希傑) | 兄 王景祥 兄 王景祿 兄 王景祚 郡守 |
★윤내(尹鼐) ( ? ~ 1552년)
본관은 파평(坡平), 정승 윤필상(尹弼商)의 증손(曾孫)이다. 성종의 딸 경휘옹주(慶徽翁主)에게 장가든 부마(駙馬)로서 성품이 교활하고 탐욕스러웠다. 그는 날마다 주식(酒食)을 장만하여 빈객을 불러들이는 것으로 일을 삼았으므로 체면 없이 술이나 즐기는 문사(文士)들이 많이들 그의 집에 출입하였다.
★박상(朴祥) (1474~1530)
조선 중종 때의 문신. 자는 창세(昌世). 호는 눌재(訥齋). 연산군 7년(1501)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중종의 폐비 신씨(愼氏)의 복위를 상소하다가 삭탈관직을 당하였으나, 학행이 뛰어나 이조 판서로 추증(追贈)을 받았다. 저서에 ≪눌재집≫이 있다.
★김천일(金千鎰) (1537~1593)
조선 선조 때의 의병장. 자는 사중(士重). 호는 건재(健齋). 임진왜란 때에 나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경기ㆍ경상ㆍ전라ㆍ충청 4도에서 활약하였으며, 진주성이 함락되자 자결하였다. 저서에 ≪건재집≫이 있다.
이 름 | 본관 | 장인 | 아들 / 딸 | 친부 | 참고사항 |
박동언★ 朴東彦 . | 반남 | 8세 엄 淹 | 系子 박황(朴潢) ★ 대사헌 | 박응순(朴應順)★ 반성부원군 | 懿仁王后 아우 ★ (宣祖) 妃 |
기효맹 奇孝孟 | 행주 | 8세 엄 淹 | 무자(無子) | 기대승(奇大升)★ | 壬辰亂時 殉節 |
나사침 羅士忱 | 나주 | 8세 호 虎 | 子 羅德顯 | 나질(羅晊) | 금호사 배향 ★ |
유대정★ 兪大禎 . | 기계 | 8세 의신 誼臣 | 子 兪守曾 병조참의 | 유호(兪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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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회 鄭晦 | 온양 | 8세 이주 以周 | 子 정익경(鄭翼卿) 부사 子 정두경(鄭斗卿) ★ 子 정인경(鄭麟卿) | 정지승(鄭之升) | 정익경 두경 인경 3 형제 문과 급제 |
박응현 朴應賢 | 밀양 | 8세 기 耆 | 女 정의신(鄭義信) | 박충원(朴忠元) | 朴啟賢 - 형제 朴承宗 - 從孫★ |
★ 박동언(朴東彦) ?∼1605(선조 38)
본관은 반남(潘南). 조년(兆年)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간 소(紹)이며, 아버지는 반성부원군(潘城府院君)응순(應順)이다. 누이가 선조의 비인 의인왕후(懿仁王后)가 됨으로써 공조좌랑에 오르고, 1592년(선조 25) 사섬시첨정이 되었다.
이 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강원도소모사(江原道召募使)로 나가 군사를 모집하였고, 뒤에 한성부서윤·호조좌랑·상의원정을 역임하고 봉산군수(鳳山郡守)에 이르렀다. 1610년(광해군 2) 2품 실직이 추증되었다
★박황(朴潢) [1597(선조 30)∼1648(인조 26)]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덕우(德雨), 호는 나옹(懦翁)·나헌(懦軒). 소(紹)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응복(應福)이고, 아버지는 관찰사 동열(東說)이며, 어머니는 정엄(鄭淹)의 딸이다. 사복시정(司僕寺正) 동언(東彦)에게 입양되었다.
1621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대사간·이조참의를 지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따라 남한산성으로 들어갔으며, 볼모로 가는 소현세자를 모시고 심양(瀋陽)에 갔다가 돌아와 1638년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이어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박응순(朴應順)과 의인왕후(懿仁王后)
본관 반남(潘南). 자 건중(健仲). 시호 정의(靖懿). 1555년(명종 10) 진사가 되고 이듬해 의금부도사, 이어 사복시주부·감찰을 역임한 뒤 안음현감·용인현령 등으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1569년(선조 2) 딸이 선조의 비(妃:懿仁王后)로 책봉되자 반성부원군(潘城府院君)에 돈령부영사가 되어 도총부도총관(都摠府都摠管)을 겸임하였다. 청렴결백하여 국구(國舅 : 왕비의 아버지)인 줄 모를 정도로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
:의인왕후(懿仁王后)는 1569년(선조 2) 15세에 왕비로 책봉되어 선조(宣祖)와 혼인을 하였으나 자녀는 없었다. 그러나 공빈 김씨(恭嬪 金氏, 1553~1577)의 소생인 임해군(臨海君, 1574~1609)과 광해군(光海君, 1575~1641)을 친자식처럼 돌보았으며, 뒷날 광해군을 양자로 맞아들이기도 했다.
★기대승(奇大升)(1527~1572)
조선 선조 때의 성리학자.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高峯)ㆍ존재(存齋). 벼슬이 대사간에 이르러, 혁신적인 정치를 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벼슬을 그만두었다. 저서에 ≪주자문록(朱子文錄)≫, ≪고봉집(高峯集)≫ 따위가 있다.
★ 나사침(羅士忱)과 금호사(錦湖祠)
조선 중기의 효자로, 1544년(중종 39) 정려를 받은 나사침(羅士沈 1525~1596)을 기리기 위하여 1723년(정종 3) 나주읍성 북쪽 대안동(현 나주시 대호동 대안마을)에 건립한 사당이다.
1868년(고종 5) 철폐되었다가 1920년 나주나씨 후손들이 현 위치(나주시 남내동 4-2번지)에 복설하였다. 그때부터 나사침과 그의 여섯 아들(나덕명·나덕준·나덕윤·나덕현·나덕신·나덕헌)을 배향하기 시작하였다.
★유대정 [兪大楨] 1552 ~ 1616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경휴(景休)이다. 1552년(명종 7)에 태어났으며 예조판서를 지낸 유여림(兪汝霖)의 증손자이자 유호(兪灝)의 아들이다. 1588년(선조 21)에 식년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1589년(선조 22)에 일어난 기축옥사에 연루되어 좌천되었다. 1609년(광해군 1) 충청도 관찰사로 승진하였다.
1612년(광해군 4) 동지중추부사로 부총관, 1614년(광해군 6)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이이첨(李爾瞻) 등 대북파의 전횡이 심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1616년(광해군 8)에 죽었으며 묘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덕이동 한산마을에 부인 정부인(貞夫人) 광주 정씨(光州鄭氏)와 합장묘로 조성되어 있다.
★ 정두경 [鄭斗卿]
본관은 온양(溫陽). 자는 군평(君平), 호는 동명(東溟). 아버지는 회(晦)이며, 어머니는 광주정씨(光州鄭氏)로 장령 이주(以周)의 딸이다. 이항복(李恒福)의 문인이다. 할아버지 지승(之升)이다.
1629년 별시문과에 장원, 부수찬 · 정언 등을 역임하였으며 청나라가 강성하여지자 〈완급론(緩急論)〉을 지어 무비(武備)의 급함을 강조하였다.
병자호란 때 척화 · 강화의 양론이 분분하자, 그는 10조(條)의 소를 올려 대책을 강조하고, 또 〈어적 10난(禦敵十難)〉이라는 글을 지어 올렸으나 조정에서 채택하지 않았다. 그 뒤 여러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고 〈법편(法篇)〉 · 〈징편(懲篇)〉 등 2편의 풍시(諷詩)를 지었다.
효종이 즉위하자 풍시를 지어올려 호피(虎皮)를 하사받았다. 1669년(현종 10) 홍문관제학을 거쳐 예조참판 · 공조참판 겸 승무원제조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조판서 · 대제학을 추증하였다.
★ 박승종(朴承宗) 1562 ~ 1623
본관 밀양, 자 효백(孝伯), 호 퇴우당(退憂堂), 시호 숙민(肅愍), 판서 계현(啓賢)의 손자이다. 1585년(선조 18) 진사가 되고, 1586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89년 봉교(奉敎)를 거쳐 지제교(知製敎)·병조정랑을 지냈다.
부제학(副提學)·병조판서를 거쳐 형조판서·의금부판사 등을 지냈다. 우의정·좌의정에 이어 1619년 영의정에 오르고 밀양부원군(密陽府院君)에 봉해졌다. 앞서 1612년 이이첨(李爾瞻)의 사주로 윤인(尹訒) 등의 일당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죽이려 할 때 죽음을 무릅쓰고 저지하였으며, 1617년 폐모론(廢母論)에도 극력 반대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손녀가 광해군의 세자빈(世子嬪)이 되어 그 일족이 오랫동안 권세를 누린 사실을 자책, 아들과 함께 목매어 자결하였다. 관작이 추탈(追奪)되었으나, 뒤에 신원(伸寃)되었다
이 름 | 본관 | 장인 | 아들 / 딸 | 친부 | 참고사항 |
홍처후 洪處厚 | 남양 | 9세 사호 賜湖 | 子 홍수하 掌令 子 홍수량 府使 子 홍수환 進士 子 홍수헌 吏曹判書 | 홍명원 參判 洪命元 | 洪處厚 號 醒菴★ 文科 工曹參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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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李穧 | 덕수 | 9세 사호 賜湖 | 子 李厚蒔 察訪 | 이경림(李景臨) | 조부 이이 율곡★ 李珥 栗谷 |
위천우 魏天佑 | 장흥 | 9세 인부 仁富 | 子 魏弘源 察訪 | 위인걸(魏仁傑) | 선조 壬午 문과급제 |
김효남 金孝男 | 연안 | 9세 윤호 允豪 | 子 金謹 - 侍直 | 김오(金祦) 贈 領議政 | 金悌男 - 아우 仁穆大妃 - 姪女 |
★ 홍처후(洪處厚)
본관 남양(南陽). 자 덕재(德載). 호 성암(醒菴). 시호 충장(忠莊). 1616년(광해군 8)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음보(蔭補)로 참봉이 되었다.
정언(正言)으로 있으면서 최명길을 탄핵하다가 좌천되었다. 이후 동부승지(同副承旨), 전라도관찰사, 우승지(右承旨)를 거쳐 함경도관찰사가 되고, 경기도관찰사, 공조참판에 이르렀다.
★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 ~ 1584
조선 중기의 유학자이자 정치가로 <동호문답>, <성학집요> 등의 저술을 남겼다. 현실ㆍ원리의 조화와 실공(實功)ㆍ실효(實效)를 강조하는 철학사상을 제시했으며, <동호문답>ㆍ<만언봉사>ㆍ<시무육조> 등을 통해 조선 사회의 제도 개혁을 주장했다. 우리나라의 18대 명현(名賢) 가운데 한 명으로 문묘(文廟)에 배향되어 있다.
이 름 | 본관 | 장인 | 아들 / 딸 | 친부 | 참고사항 |
장훤 張楦 군수 郡守 | 덕수 | 10세 현원 玄源 | 子 장진환 張震煥 | 장선징(張善徵)★ | 고모 인선왕후 ★ 姑母 仁宣王后 |
김극형★ 金克亨 . | 청풍 | 10세 호 頀 | 子 金澄 文科 監司 | 김인백(金仁白) | 김구 – 손자 우의정 김유 – 손자 증좌찬성 김무 – 손자 군수 |
남정 南靜 | 의령 | 10세 민수 民秀 | 子 南斗長★ 子 南斗徵★ | 남정화(南挺華) | 정치화 – 사위★ |
★ 장선징(張善徵)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정지(淨之), 호는 두곡(杜谷)·서엄(西崦). 증조부는 장일(張逸), 할아버지는 판서 장운익(張雲翼), 아버지는 우의정 장유(張維), 어머니는 안동김씨(安東金氏)로 김상용(金尙容)의 딸이다. 여동생이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이다.
1662년(현종 3) 철원부사로 있을 때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승정원우부승지, 병조참지 등을 지냈다. 병조참판에 올라 아버지의 작위를 승습하여 풍양군(豊陽君)에 봉해진 뒤 대사간, 도승지, 대사헌, 공조판서를 역임하였다.
★ 인선왕후(仁宣王后) (1618~1674)
효종의 비. 성은 장(張). 세자빈에 간택되었다가 효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으며, 아들 현종이 즉위하자 대왕대비로서 효숙 대비의 존호를 받았다.
★ 김극형(金克亨) 1605 ~ 1663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태숙(泰叔), 호는 사천(沙川)·운촌(雲村)이다. 이조판서 김인백(金仁伯)의 아들이다. 박지계(朴知誡)의 문인으로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후에 익위사부솔(翊衛司副率)·공조정랑 등을 거쳐 화순현감으로 부임하여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였다. 성리학에 정통하여 유학의 대가 송시열(宋時熱)과 성선체용설(性善體用說)에 대해 편지로 논쟁을 벌였으며, 효자로 이름이 높았다.
아들 김징은 송준길 문인이며 그 후손에서 4대 6정승이 나왔다, 손자 金楺 일찍이 학문에 조예가 깊어 박세채가 그의 후계자로 지목하였으며, 송시열도 그의 재주를 중히 여겼다
★ 남두장(南斗長) 1613년(광해군 5)
호 천경(天卿) 부는 첨지 남정(南瀞)으로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역임. 제는 남두징(南斗徵)이다. 효종(孝宗) 1년(1650) 경인(庚寅) 증광시 진사에 급제
매부 정치화는 형 태화의 막내아들 재륜(載崙)을 입양했는데, 이가 효종의 딸 숙정공주(淑靜公主)의 남편인 동평위(東平尉)가 되어, 효종과 사돈 관계가 되었다.
★ 남두징(南斗徵) 1617년(광해군 9)
현종(顯宗) 3년(1662) 임인(壬寅) 증광시(增廣試) 진사 급제. 수암 권상하 - 과거 동기
★ 정치화(鄭致和) 1609(광해군 1)∼1677(숙종 3).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성능(聖能), 호는 기주(棋洲). 영의정 광필(光弼)의 5대 손이며, 유길(惟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창연(昌衍)이고, 아버지는 형조판서 광성(廣成)이다. 어머니는 황근중(黃謹中)의 딸이다. 영의정 태화(太和)의 동생이며, 좌의정 지화(知和)의 4촌이 된다.
오위장 남정(南瀞)의 딸 의령 남씨(宜寧南氏)와 결혼했으나 아들을 얻지 못해, 형 태화의 막내아들 재륜(載崙)을 입양했는데, 이가 효종의 딸 숙정공주(淑靜公主)의 남편인 동평위(東平尉)가 되어, 효종과 사돈 관계가 되었다.
1628년(인조 6) 별시문과에 급제. 충청도 암행어사로, 함경도 암행어사로, 황해도 암행어사로 각 도정(道政)을 염찰(廉察)하였다. 1640년에는 심양(瀋陽)에서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모시기도 하였다. 이 때 세자가 서양 문물을 완호(玩好)하는 것을 크게 북돋운 것으로 전한다.
1650년(효종 1) 광주부윤(廣州府尹), 뒤이어 경기도관찰사·도승지·강화부유수를 거쳐 1657년 형조판서에 올랐다.
좌의정에 올랐지만, 곧 형 태화가 영의정으로 복귀함에 따라 중추부판사로 물러났다. 1677년 9월 중추부영사로서 죽었다.
이 름 | 본관 | 장인 | 아들 / 딸 | 친부 | 참고사항 |
한양 韓崵 | 청주 | 11세 흥문 興門 | 子 韓碩命 | 한사성(韓師聖) | 韓景祿 증조 淸原尉 ★ 曾祖母 - 懿惠公主 |
심수정 沈壽鼎 | 청송 | 11세 전창 展昌 | 子 沈潮(號 靜坐窩)★ 子 沈省 |
| 沈潮 文集 : 정좌와집 |
박세당★ 朴世堂 . | 반남 | 13세 시무 時茂 | 박태한(朴泰翰) | 박정(朴炡) | 南一星 - 장인(前妻) 鄭時茂 – 장인(後妻) |
이광덕 李匡德 | 전주 | 15세 오규 五奎 | 이국형(李國亨) | 이직망(李直望) | 이광덕 – 참판 ★ 장석(흥덕인) – 어사 부관 |
★ 한경록(韓景祿) 淸原尉 1520 ~ 1589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중문(仲紋)이다. 아버지는 춘천부사(春川府使)를 지낸 한승권(韓承權)이다. 중종(中宗)의 둘째 공주인 의혜공주(懿惠公主)와 혼인하였으며, 1546년(명종 1)에는 청원위(靑原尉)에 봉해졌다. 출세하기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545년에 발발한 을사사화(乙巳士禍)의 충격으로 관직에 나가지 않고 은거하며 여생을 보냈다. 의혜공주(懿惠公主)와 쌍분(雙墳)이다.
★ 심조(沈潮) - 沈壽鼎 아들 어머니 광산김씨(정전창 녀)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신부(信夫), 호는 정좌와(靜坐窩). 아버지는 수정(壽鼎)이고, 어머니는 광주정씨(光州鄭氏)로 도사(都事) 전창(展昌)의 딸이다. 어릴 때 할아버지 밑에서 수학하다가, 뒤에 권상하(權尙夏)의 문인이 되었다.
1747년 처음으로 경릉참봉(敬陵參奉),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한 뒤 오직 학문연마와 후진양성에 힘썼는데, 초학자에게는 반드시 『소학』과 『가례』를 먼저 읽게 하였다.
경전을 깊이 연구하여 의심나는 곳은 차의(箚疑)를 만들어 해설하였고, 『의례(儀禮)』·『가례』와 우나라 선유(先儒)의 학설을 절충하여 「상례홀기(喪禮笏記)」를 만들어 치상절차(治喪節次)를 확정하였다. 저서로는 『정좌와집』이 있다.
★ 박세당(朴世堂)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계긍(季肯), 호는 서계(西溪)·잠수(潛叟)·서계초수(西溪樵叟)등 이다. 이조 참판 박정(朴炡)과 관찰사 윤안국(尹安國)의 딸인 양주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조선 후기의 학자로 남원에서 태어났다. 현종 1년(1660) 증광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경연시독관·북평사 등을 역임하였다. 1667년에 홍문관 수찬에 임명되었을 때는 응구언소(應求言疏)를 올려 신분제도의 모순에 따른 사대부들의 무위도식을 비판하였다.
1668년에는 이조좌랑,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를 다녀온 후 당쟁에 혐오를 느껴 관료생활을 그만두고 양주(楊州) 석천동(石泉洞)으로 물러났다.
그는 반주자학적(反朱子學的) 입장에 사변록(思辨錄)을 저술하여 주자학을 비판하고 독자적 견해를 밝혀 노론에게서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렸다. 박세당은 관작을 삭탈당하고 옥과(玉果)로 유배형을 받았으나, 곧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정치적으로 소론계(少論系)와 빈번하게 교류하면서, 소론의 거두인 윤증(尹拯)을 비롯하여 박세채(朴世采), 처숙부 남이성(南二星), 처남 남구만(南九萬), 최석정(崔錫鼎) 등과 교유하였다. 그리고 우참찬 이덕수(李德壽), 함경 감사 이탄(李坦), 좌의정 조태억(趙泰億) 등을 비롯한 제자를 길렀다.
※ 남일성의 아들 남구만은 처남이다
★ 이광덕(李匡德) 1690 ~ 1748
본관 전주(全州), 자 성뢰(聖賴), 호 관양(冠陽)·존제(尊齊)이며 탕평론을 최초로 제시한 박세채(朴世采)의 외손이고 대제학 이진망(李眞望)의 아들이다. 1722년(경종 2)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시강원설서가 되어 왕세제(王世弟:英祖)의 신임을 받았고 탕평론을 주장하였다.
영조가 즉위하자 수찬·교리에 임명되었고 1727년(영조3)에 호남에 기근이 심하여 별견어사(別遣御史)로 파견되었다가 돌아와 이조좌랑을 지냈다.
1728년 전라도 태인에서 이인좌의 일당인 박필현(朴弼顯)이 반란을 일으키자 전라감사로 부임하여 이를 토벌하였다. 1728년(영조 4) 전라도관찰사가 되고 1739년 사은부사(謝恩副使)로서 청나라에 다녀온 후 대제학이 되고 그후 과천(果川)에 은거했다. 저서에 《관양집(冠陽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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