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일을 깎으며
이 향 숙
주부 경력이 살아온 날의 절반이 되지만 나는 칼을 들고 부엌일을 하고 나면 자주 손에 상처가 난다. 그래서 가위를 최대한 쓰고 어쩔 수 없는 것은 칼을 사용한다. 가족들을 위해 과일을 깎는 것이 그 첫 번째이다. 매장에서도 나는 조금이라도 흠집이 나 있는 거 같으면 틈틈이 깎아서 직원들과 함께 먹는다. 한바탕 바쁜 시간이 지나면 목이 마르고 입이 궁금하기 때문이다. 손이 가는 일이지만 이왕이면 직원들에게도 건강에 좋은 것을 먹이고 싶어서다.
여름을 지내면서 과일 통 하나를 마련했다. 이 통에는 될 수 있으면 새콤달콤한 과일을 골라 준비한다. 가족들이나 직원들것보다 더 정성을 들이게 된다. 가끔은 종류별로 담아내다보면 서 너 통이 될 때도 있다. 이 과일통의 주인은 어머니이다. 어머니는 과일을 유난히 좋아하신다. 추억속의 어머니는 갓 딴 자두나 살구를 수돗물에 담갔다가 뽀득뽀득 씻어 한 입 베어 물며 맛나다하신다. 구순이 된 지금도 젊은 사람도 손 사레를 치는 신맛의 과일을 좋아하신다. 하지만 연로하신 어머니가 이제는 정갈하게 깎아 드시기는 어렵게 되었다. 아예 드시기 편하게 손보아서 보내드리는 것이 좋을 성 싶어 시작된 일이다. 처음엔 어머니를 모시는 동생네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었었다. 좋아 하시는 과일 좀 신경 써 드리면 안돼나 싶었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 저절로 마음이 바뀌었다. 모시고 사느라고 알게 모르게 얼마나 마음이 쓰였을까. 지금이라도 내가 어머니에게 과일을 깎아 드릴 수 있어서 다행이지 않은가. 낳아주고 길러주고도 모자라 나의 아이도 키워주었을 뿐더러 바쁜 나를 대신해 살림까지 도맡아 해주신 어머니다. 정신이 흐려지기 전까지 우리 집에 오시면 손주보다 내 입에 맞추어 음식을 만들고 맛나게 먹는 내게 우리 애기 잘 먹는다며 행복해 하셨는데 나는 겨우 과일을 깎으며 네 할 일, 내 할 일을 따지고 있었으니 부끄러운 일이다.
과일을 깎다보면 겉모습은 탐스러운데 속은 상해 있기도 하고 겉은 흠집이 있어도 속은 틈실하고 단맛이 나는 것도 있다. 상한 부분을 칼로 도려내 버리고 먹을 수 있는 부분은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 자양분이 된다. 그것이 과일의 숙명이다. 과일은 제 스스로 겉도 속도 틈실 하려 최선을 다 했을 터이다. 뜨거운 태양을 향해 해바라기를 하고 밤이 되면 은빛 달님의 정기를 받고 아침이 밝아 오기 전 온 몸에 기꺼이 이슬을 머금었을 것이다. 비가 내리면 허투루 흘러 보내지 않고 두 팔 벌려 맞으며 바람 또한 그냥 지나가지 못하도록 자신만의 향내로 유혹했을 것이다. 서리와 눈보라도 마다치 않고 땅속 깊숙이 뿌리에서부터 양분을 전력을 다해 끌어 올려 자신의 빛깔로 만들어 내며 운명 앞에 깃발을 번쩍 들었으리라. 그렇더라도 자칫하면 흠집이 나기도하고 깊숙한 상처를 안고 탐스런 것들 속에 섞여 어느 과일상의 주인장 앞에 서게 되었으리라.
사람이라고 어찌 다를 수 있을까. 잘 사는 것이 무엇인지. 어디에 관점을 두느냐에 따라 삶의 질도 바뀌리라. 스스로 최선의 삶을 살아 냈다 자부 하더라도 완벽한 삶이란 없는 것이다. 지금은 다소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절망할 필요는 없다. 살아 있다는 것은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상처가 나면 약은 바르고 치료하면 된다. 그럼에도 상처 부위가 아물지 않고 도리어 다른 곳으로 전이 한다면 과감하게 도려내어야 한다. 그래야만 새살이 돋고 상처가 아물 것이다. 흉터가 남으면 좀 어떤가. 그것이야 말로 삶의 훈장이 아닌가. 매일 과일을 만나다 보니 과일을 통한 인생이 이렇게 보이기도 한다.
그런 날이 오지 않기를 바라지만 거스를 수 없는 이치대로 사람은 난데로 돌아간다. 어머니 또한 피할 수 없으리라. 그날은 오늘이 떠오를 것이다. 서툰 솜씨로 어머니께 과일 깎아 드린 자식으로써 당연한 일을 해드려서 다행이다 싶으리라. 참으로 다행한일이 하나 더 일어났다. 어머니의 과일을 깎다보니 칼이 덜 부담스럽다. 어설프기만 하던 칼 다루는 솜씨가 예전보다 자연스러워져 주부로서의 모습이 영글어지어 가는 가을이다.
첫댓글 오랫만에 올립니다. 행동반경이 좁다보니 삶터에서 글감을 찾고 그 속에서 사유하게 되네요. ㅋㅋㅋㅋㅋ
당연한 일을 해드려서 다행이다 싶으리라.
산다는 것, 사실은 가장 쉬운 일입니다. 왜 다들 어려워해야하는지...
오랫만에 가장 편안한 상태에서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하여 음미할 수 있는 기회를 다잡게 해준 순수한 글이 매혹입니다.
잔바람도 점점 강풍이되면 죄 쓰러집니다.
어떤 모양새를 가지고 있든 거져되는것이 없음을 말하고 싶었는데 제대로 표현이 되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대로 이선생님께서 하고자하는 참뜻이 고스란히 전달된 듯 싶습니다, 내게는요.
문미동인지